Chapter 14.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미친.”
한나는 아침부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도대체! 뭔데!”
갑자기, 왜?
그러니까 하루 잘 보내 놓고 갑자기 그런 류의 스킨십이 오갈 일이 왜 생기냐고.
이 고민은 이미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지만 난제는 풀리지 않았다.
심지어 더 죽을 맛인 것은 그런 어색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도 이안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이 주둥이가 화근인가. 아냐, 이번엔 내 잘못이 아니잖아.”
정말 사람은 분위기에 취할 수도 있는 걸까.
워낙 커플들이 많았고, 폭죽은 아름다웠고, 기분까지 좋았으니, 혹시 분위기에 휩쓸린 건 아닐까.
“어찌 됐든, 오늘은 모르는 척 하자.”
어쩌면 이안도 어제의 일을 창피해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얼굴을 보고, 어찌 반응할지 판단하기로 했다.
결국 한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궁과 궁 사이를 지나는데, 일을 하고 있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정원의 분수를 바꾸고 있었는데, 의뢰받지도 않은 분수를 바꾸어 주는 이유는, 지난날 마샤의 업보 때문이었다.
“안녕. 마샤.”
하필, 그중 마샤와 눈이 마주칠 게 뭐람.
“선생님. 어디 가요?”
마샤는 한달음에 한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하러.”
“저도 일하는 중인데, 일하는 남자 멋있지 않아요?”
오늘도 열심히 매력 어필을 하고 있는 마샤.
틈만 나면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응. 손가락만 움직이는 모습, 정말 멋있다.”
“꼭 그렇게 말한다니까.”
“열심히 해……. 열심히.”
마샤는 한껏 내려간 한나의 어깨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이리 기운이 없어요?”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흐응…….”
마샤는 한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폈다. 푸석푸석한 얼굴과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지난밤, 숙면을 취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어제 어디 갔어요?”
“어제 이안이랑 축……. 어흐.”
뭔가 있었구나.
마샤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달아올라 있는 얼굴색을 캐치했다.
“머리가 아프다. 아파.”
“잠시 기다려 봐요.”
머리가 아프다는 한나의 말에 마샤는 뚫려있는 창을 폴짝 뛰어넘어 화단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꽃 몇 개를 똑, 똑 꺾어 내더니 이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나에게 다가왔다.
“뭐야?”
“짜잔.”
순식간에 꽃으로 만든 팔찌가 완성되었다.
“머리를 맑게 해 주는 향이거든요.”
“……참나.”
뭘 또 이렇게 아기자기 귀여운 짓을 하고 난리야.
한나는 툴툴거리면서도 팔을 내밀었다.
“예전에도 우리 이런 거 많이 만들었는데. 그쵸?”
마샤는 한나의 팔에 꽃 팔찌의 줄기 길이를 조절하며 말했다.
“맞아. 너 기분 안 좋으면 내가 만들어 줬지.”
그러니까, 이 방법은 한나가 마샤에게 가르쳐 줬던 것이었다.
“됐다.”
마샤의 손재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하얀 꽃이 얼기설기 손목을 두르고 있었다.
“예쁘네.”
그제야 한나의 얼굴에 미소가 되돌아왔다.
아차,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 없는데.
“나 늦겠다. 간다! 일해!”
한나는 쌩하니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
한나의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마샤는 제 붉은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요 근래 한나의 신경을 움켜쥐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것을 마샤는 잘 알고 있었다.
성가시게 느끼든 뭐든, 일단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똑똑한 우리 황제 폐하는 아무래도 제 머리 꼭대기에 있는 모양이었다.
“마샤! 얼른 끝내자고!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지!”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던 마샤는 다른 마법사들의 원성이 들려온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 *
“일부러 아프게 하는 거죠.”
이안은 오늘, 작은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으로 어색한 기류를 날려 버렸다. 말로는 검술 연습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평소에 검술을 연습을 해 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거나 한나는 이안이 다쳤다는 말에 놀라 어제의 일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서로 얼굴을 붉히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한나는 이안의 상의를 젖히고 그의 쇄골을 살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엄살 피우지 마세요. 검술 연습을 어떻게 해야 여길…….”
한나는 하필 상처가 난 곳이 목 바로 옆인 쇄골이라는 점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마치 목이라도 노린 것 같지 않은가.
“조금만 살살해 줘요.”
“아픈 티도 안 내고 잘 참으면서.”
한나의 치료를 이렇게 신음 한번 안 흘리고 받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전에도 치료받으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더니.
이안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한나는 치료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이 정도면 그냥 아무는 걸 기다리는 게 덜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맞는 말이었다.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치료해 달라고는 왜 했어?”
“멀쩡한 성수를 써 줄까 싶었죠.”
아. 그런 방법이.
한나는 뒤늦게 그런 좋은 방법이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놀라서 상처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옷부터 젖히고 보았던 것이었다.
뭐 그 후엔 자연스럽게 치료로 이어졌고.
“성수보다 이게 효과가 좋아요.”
맞는 말이기도 하고, 둘러대는 말이라는 생각에 한나는 침묵했다.
“…….”
상처가 아무는 막바지에 이르자 이안은 정말 아픈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쇄골을 바라보았다. 언제 끝날까 싶어서였다.
고통이 서서히 멎어들자, 이안의 시선에 한나의 하얀 손이 어른거렸다. 자신의 쇄골과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안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손을 지나가는 손목으로.
한나의 손목에는 웬 꽃 팔찌가 둘러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귀여운 걸 만들었을까. 웃음이 새어 나오려던 차, 그의 시선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손목을 지나 팔으로, 팔을 타고 더 위로…….
어느덧 이안의 시선은 한나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치료에 집중한 한나의 내리깔린 속눈썹 밑으로 그늘이 져 있었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눈꺼풀 아래에는 빛 아래가 아니라도, 여전히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있었다.
그 시선이 오로지 제 어깨에만 박혀 있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였다.
저도 모르게 한나의 손목을 잡은 것은.
“응?”
효과는 좋았다. 한나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단박에 이안에게 향했다. 이안은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파서요. 이제 거의 끝난 거 아닌가요?”
그냥, 시선을 잡아 두고 싶어서였지만.
“응. 다 끝났어. 완전 잘 아물었다.”
순식간에 상처가 사라진 것을 보며 한나는 뿌듯해했다.
“흉터는 남겠네.”
누구와는 달리 상처 하나 없는 살결에 상처 자국이 생기는 건 유독 튀어 보였다. 이안은 아직 붙들린 팔목에서 손가락에 건드리는 꽃 팔찌에 눈길이 갔다.
“이 귀여운 팔찌는 뭐예요?”
이안의 물음에 한나의 눈길이 제 손목으로 향했다.
“아. 이거, 기운 없다고 마샤가 만들어 줬어.”
“귀엽다고 한 건 취소할게요.”
“뭐야.”
한나는 빠른 말 바꾸기가 우스워 키득거렸다.
그러곤 이안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한나는 제 팔을 휙휙 돌려보며 말했다.
“마샤 손재주 좋지? 하는 짓이 귀엽다니까. 이게 옛날에 내가 마샤에게 근심 팔찌라고 만들어 준 건데……. 아, 너한테도 해 준 적 있지 않아?”
“그랬죠.”
즐거워 보이는 한나를 이안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샤가 은근히 기억력이 좋다니까. 옛날부터 똑똑하긴 했어. 마법사들이 원래 머리가 비상하다잖아. 마샤도 그런가 봐.”
“그런가.”
“그럼 그럼. 어째서 너희는 다 똑똑하고 잘난 건지. 제레미도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한나의 입이 멈췄다. 머리가 좋아서 그 대단한 길드를 굴리고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다 그만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이건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좋은 일이 아니잖아.
“어쨌거나,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받아서 좋았어요?”
“응? 선물이야 언제나 좋지.”
더욱이 이런 깜찍한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광산을 쥐여 줘도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았으면서.”
이안은 조금 들뜬 한나의 표정이 썩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다.
“질투나게.”
“콜록.”
이어진 말에 한나는 괜히 기침이 나왔다.
질투라니.
갑자기 잊고 있었던 어제의 사건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 질투라니.”
“말 그대로. 다른 남자에게 받은 선물 때문에 얼굴 붉히면, 제 입장에선 질투라는 게 나거든요.”
이안은 천천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리를 꼬아 올리는 그의 동작에 붉은 망토가 넘실거렸다.
한나는 뭐라고 말을 해 줘야 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거나, 혹은 대충 넘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눈치 없는 척 하지 말아요.”
하지만 눈치 빠른 이안이 그 낌새를 놓칠 리 없었다.
“제가 선생님을 이성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잖아요.”
결국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이안이 먼저 정면으로 부딪혀 오고 있었다.
한나는 인정해야 했다.
어쩐지 광산이니 뭐니, 덜컥덜컥 주고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다고 할 때부터 낌새가 이상했지.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미 감정의 물은 엎질러졌고, 그것을 말끔히 주워 담기엔 카펫은 젖어 버린 후였다.
혼란스러운 한나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 속엔 사랑스러운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건 분명, 당장이라도 고백해 온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남자의 모습이었다.
“……저기, 이안.”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이건 확실히 알겠다.
“한철도 못 갈 그런 감정 때문에 서로 어색해지지 말자고.”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치부해 버리는 게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자신의 상황이 된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누가 그래요.”
이안의 입술이 비틀렸다.
“한 철도 못 간다고.”
또박또박, 이안은 한나가 했던 말을 짚어 나가고 있었다.
“대개 그러니까.”
그럼에도 한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남녀 간의 사랑이란 쉽게 변하니까.
지금 설레어도, 내일은 다를 수 있고, 모레는 또 변할 수 있다고 한나는 생각했다.
이안과 자신은 가족 같은 관계나 다름없는데, 이런 불안정한 감정 때문에 서먹해지는 건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일들도 있어요. 내 계절은 이미 여러 번 바뀌었어요.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계절, 많은 날, 많은 시간이.”
마치 어떤 말에도 대답할 수 있도록 연습이라도 한 듯, 즉각 답이 터져 나왔다.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면, 이런 모습일까.
“선생님이 말하는 한철이, 아주 긴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궁금하지 않아요?”
“뭐, 뭐가?”
“나의 계절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의 계절?
“꽃피는 봄일지, 시린 겨울일지, 혹은, 뜨거운 여름일지.”
감정을 뜻하는 걸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사람은 질문이 던져지면, 저도 모르게 답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한나는 조금 궁금해졌다. 이안이 어떤 계절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건지.
봄처럼 말랑한 마음? 여름의 뜨거움?
혹 가을의 처연함이나, 겨울의 시린 감정일까.
그가 품고 있는 온도가 궁금했다.
‘맙소사.’
이걸 고민하다니. 말려들 뻔했다. 이안의 마음을 부정하려 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이제, 웃어넘길 타이밍은 진즉 지나 버렸다는 걸.
* * *
제레미는 척척, 어두운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그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저놈인가.”
제레미의 등장에 검은 무리가 철새가 갈라지듯 길을 텄다.
“오셨습니까.”
한 남자가 제레미에게 깍듯이 인사했고, 제레미는 손을 까딱인 후, 골목의 끝으로 발걸음했다.
그곳엔 너덜너덜하게 널브러져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몸 곳곳에는 피가 흐르다 못해 굳어 있었고, 얼굴은 너무 부어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하.”
제레미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래서야, 말은 할 수 있는 거야?”
“혀는 멀쩡합니다.”
마치 혀를 뽑지 않은 것이 대단한 아량을 베푼 것으로 들리는 말투였다.
제레미는 구둣발로 쓰러져 있는 남자를 툭툭, 걷어찼다.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되지 않던 남자는 그 자극에 ‘끙’ 소리와 함께 떠지지 않는 눈에 억지로 힘을 줬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있는 모양인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으니.
하지만 제레미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잡아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으……. 윽.”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조금이라도 더 숨이 붙어 있고 싶다면.”
“주……. 죽여.”
겨우 나온 말이 죽여 달라는 말이라니.
제레미는 한숨과 함께 그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풀썩, 일으켜졌던 남자의 몸이 허물어졌다.
“이 자식이 몇 명을 죽였지?”
“셋입니다.”
비록 지금은 널브러진 반시체라고는 하나, 그는 제레미의 부하들을 셋이나 죽인 놈이었다. 그것은 그가 편하게 죽기는 글렀다는 뜻과 같았다.
제레미는 부하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몸짓이었다.
“알까 모르겠지만, 난 주로 뭔가를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려고 사람을 죽여.”
“네깟 놈이 그딴……. 윽!”
남자는 제레미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자신의 허벅지에 꽂히는 검 때문에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가진 것들은 대개 사람이고,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건 참을 수가 없단 말이지.”
“크흑…….”
제레미는 검을 비틀었다.
더 이상 나올 피조차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사내의 허벅지에서는 새빨간 피가 철철 흘렀다.
“우리 정보를 얼마나 캐갔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도 쓸모는 없을 거야.”
제레미는 애초에 이 사내에게 배후나, 이유에 대해 들을 필요가 없었다.
“아. 어차피 죽을 녀석이라 알려 줄 필요도 없나?”
제레미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뒤틀렸다.
“커흑…….”
검을 뽑아내자 사내는 그대로 혼절했다. 아니, 죽은 것이라 봐도 무관했다.
제레미는 재미가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검을 다시 주인에게 건넸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제레미의 부하는 이미 숨이 끊어져 가는 남자에 대한 처우를 물었다.
“태워 버려. 그것들이 시체 가루도 한 점 가져가지 못하게.”
“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레미가 골목을 떠났고, 이내 그곳에는 큰 불길이 일었다.
* * *
“결심했어.”
“무슨 소리야.”
한나는 풀을 뜯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궁 언덕에 자라는 미나리를 뜯고 있었다.
핀체프는 풀 뜯다 말고 갑자기 결심을 했다는 한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다.
“데쳐 먹을지 구워 먹을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넌 날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니?”
아무리 나물이나 뜯고 있다지만, 한나는 핀체프의 반응에 빈정이 상했다.
“내가 한 결심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겠다는 거야.”
“아이들?”
“보육원에서 내가 돌봤던……. 뭐, 알잖아.”
“그 아이들이 황제 폐하나 그 무서운 마법사, 암흑길드 수장 말하는 거지?”
핀체프는 이들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
“응.”
“왜 갑자기?”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서.”
한나는 대강 둘러 말했다. 깊은 사정까지는 말해 줄 수 없었다.
핀체프에게 아무래도 얘들이 날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 따위의 말을 한다면 배 잡고 구르기나 하겠지.
“흠…….”
핀체프는 한나의 그 말을 듣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럼 너 지금 그 나물인지 미나리인지는 왜 캐고 있는데?”
“그거야 이안이 입맛이 없어서 아침, 점심을 다 굶었다고 하니까…….”
“신경 안 쓴다며.”
한나가 멈칫했다. 핀체프는 오랜만에 아주 적절한 지적을 했다.
평소엔 맹하던 녀석이 이럴 때만 예리하단 말이지.
“안 쓰지. 안 쓰는 건 안 쓰는 건데, 두 끼를 굶는 건 좀 그렇잖아. 원래도 좀 비리비리한데, 못 먹으면 더 안쓰럽잖아.”
그 순간 핀체프는 한나에게 남들 눈에는 그 건장한 황제가 전혀 비리비리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예민한 폭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밥맛 없을 땐 이런 쌉싸름한 게 입맛을 기가 막히게 돋우거든.”
“그러셔.”
핀체프는 조소했다. 하는 꼴을 보니 신경을 안 쓴다는 건 택도 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저 바구니에 있는 건 뭐야.”
핀체프는 한나의 바구니에 담긴 네모난 솜덩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거 방석.”
“풀 뜯으러 오는데 방석은 왜.”
“마샤 만나면 주려고.”
“그런 조잡한 방석을 왜 줘.”
핀체프는 어이가 없었다. 그 대단한 마법사가 방석 하나 못 살까 봐?
“아, 오늘 마차 타고 먼 길 간다는데, 걔가 좀 마차에서 엉덩이가 약하더라고. 엉덩이에 살이 없는가? 조금만 오래 타도 앓는 소리를 하니, 오늘 만나면 내 전용 쿠션 빌려주려고.”
“…….”
핀체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넌 글렀다. 글렀어.”‘
“뭐가?”
미나리를 한아름 뜯은 한나는 구슬땀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됐다. 말해서 뭐하겠냐. 그냥 그렇게 살아.”
챙기지 않기는 개뿔.
핀체프는 한나의 언행 불일치를 보며 비웃었다.
“뭔지 몰라도 기분 나쁜데.”
그에 한나는 조금 기분이 껄끄러웠다.
“넌 그냥 평생 보모로 살아야 할 팔자인가 보다.”
“보모라니.”
그의 말에 한나는 생각했다.
차라리 보모가 낫지.
이러다 누구한테 코 꿰어서 결혼할 판이구만.
한나는 제 속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핀체프를 보고 있자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넌 그 애들……. 아니지, 그분들한테 왜 그리 약해?”
“약하다니.”
“아주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감싸잖아.”
핀체프의 일침에 한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넌 너무 휘둘려.”
맞는 말이기까지 했다.
“……잘생겼잖아.”
오랜 고민 끝에, 한나가 겨우 짜낸 답은 이거였다.
“뭐?”
핀체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나를 보았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면 없던 인류애도 생긴다고.”
“됐고, 미나리인지 뭔지 그거나 삶으러 가.”
더 이상 말해 봐야,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이나 나오겠지, 핀체프는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근데 넌 왜 일 안 하고 여기서 쉬고만 있지?”
한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물론 자신도 일 때문에 여기 있는 건 아니었다. 실컷 풀 뜯을 때 말동무해 주는 건 좋았는데, 막상 혼자 계속 쉬고 있으니 묘하게 배알이 꼬였다. 이상하게 핀체프는 고생하는 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고…….
“나 요즘 가을 타.”
핀체프의 그 한마디에 한나는 얼른 바구니를 집어 들고 발길을 돌렸다. 더 듣고 있다간 무슨 오글거리는 소리를 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 나온 빠른 결정력이었다.
“그럼 이만.”
한나는 가차 없이 돌아섰다. 그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핀체프는 언덕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았다.
“날씨 한번 좋네.”
더없이 평온한 황궁의 하루였다.
* * *
“신의 은총 그 자체 아닙니까?”
“그분은 신이 내린 구원자입니다.”
“이 시대의 영웅이시죠.”
온 제국이 떠들썩했다.
그 이유는 사막에서부터 시작된 길고 긴, 마물과의 전쟁이 끝이 났기 때문이었다. 신관과 성기사들이 사막으로 떠난 지 5년, 드디어 마물의 구멍이 완벽하게 닫혔다.
그 역사적인 사건의 주역엔 단연 세자르가 있었다. 그는 이미 세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이제는 그를 광적으로 찬양하는 무리까지 생겨나기에 이르렀고, 신전의 위상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높아졌다.
그런 그가 돌아오는 날이니, 만인의 관심이 영웅들의 귀환에 집중돼 있었다. 그들이 다시 사막을 건너, 마을로 입성하는 길목에는 수많은 인파가 진을 치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장면을 눈에 담기 위해 며칠을 진을 치고 기다린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오늘은 필히 도착을 한다니까!”
“어제도 그 말 하지 않았어?”
“이번엔 정찰병들이 확인을 했다고.”
사람들은 모두 목이 빠져라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사람이긴 할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신의 자식이라잖아.”
“신의 자식은 황제 폐하 아니야?”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가득하던 그때, 한 남자가 외쳤다.
“저기! 깃발이 보인다!”
“신전의 깃발이야!”
“성기사들도 보여!”
드디어, 그들이 도착한 것이다. 금빛 사막에 하얀 물결이 수놓아졌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고귀한 모습 그대로일까?”
“인간이 아니라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신의 사자거나, 신의 자식이거나. 뭐든 갖다 붙여도 모자라지.”
모인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수식어보다 이름 자체로 빛나는 존재였다.
“저기, 저분! 저 은빛 머리카락!”
“세자르 님이신가?”
“맞아! 저기 온다고!”
사람들은 동요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자신들이 숭배하다시피 하는 진짜 영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기사들이 마을의 입구를 지났다. 뒤를 이어 신관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자신들을 환대하는 주민들을 보며 웃어 보였다. 돌아오는 사막 길이 너무 고된 나머지 제국으로 돌아왔다는 감동을 만끽할 여유조차 없는 그들이었다.
긴 행렬의 중앙에 세자르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불러도 늘 그렇듯 표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신성하게만 느껴진 사람들은, 가히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상태였다.
“대신관님!”
그때, 한 전령이 세자르를 향해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신전에서 보낸 서신이 들려 있었다. 전령이 세자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에게 서신을 건넸다.
세자르는 그의 서신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귀가 먹먹할 만큼 주위에는 환호성과 경배를 전하는 말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세자르의 세상은 더없이 고요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교황께서 승하하셨다.]
* * *
“말도 안 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한나는 소식을 접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한나와 핀체프를 비롯한 신관들은 신전에 다다르고서야 겨우 이 소식이 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신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침통했다. 현직 교황이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것은 단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150년 전, 17대 교황의 사인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황실의 소행이라는 것이 꼬박 50년 만에 밝혀진 이후, 이런 충격적인 사건은 처음이었다.
“유피르 대신관님!”
교황의 장례식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한나는 교황의 방에 들어선 유피르를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한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어젯밤 교황 성하께서 지하 기도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셨단다.”
“사, 사인이 뭔데요. 세간에 타살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아니…… 죠?”
“……아직 확답은 어렵겠구나.”
그러한 유피르의 반응에 한나는 순간, 세간의 소문이 완전히 헛소문은 아닐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상처가 있었나요.”
“그런 건 없었어. 하지만…….”
“하지만?”
“사망 후 입술과 손끝이 푸르게 변했다. 몸에 정체불명의 검은 점들도 생겼고.”
“그건…….”
독살을 의미하는 것인가.
“도대체 누가 교황 성하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고, 신전은 그 평화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사막의 승전 소식으로 온 제국이 떠들썩하지 않은가.
“믿기지가 않아요.”
한나가 중얼거렸다.
교황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서도.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관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교황의 모습은 유피르의 말대로 입술이 푸르게 변해 있었다.
“그럼 신전은 이제 어떻게 하죠? 장례는……. 아니, 범인은 어떻게 찾아낼 생각인가요.”
이 세계에서 과학수사가 발달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최대한 신전 내부에서 범인의 단서를 찾아야 하는 건가.
“신전과 황궁, 마탑이 모두 범인을 찾는 데 협조할 거야.”
“……왜죠. 교황 성하를 죽여서 이익을 얻는 곳이 어디죠.”
“지하 기도실은 기도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야.”
유피르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신중하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는, 성물을 보관하는 비밀장소가 있어.”
“아…….”
언뜻, 신전 어디엔가 성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니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지만.
“설마, 성물 때문인가요.”
“성물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군.”
“무슨 용도의 성물이죠.”
“용도가 밝혀지지도 않은 고대의 성물. 고서에는 해독능력이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아무도 사용해 본 적이 없지.”
“해독……?”
한나가 중얼거렸다.
나라라도 날려 버릴 무기도 아니고, 해독 용도의 성물을 가져갔다? 그것도 교황을 살해하면서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쓸모가 있다는 뜻이겠지.”
“고작, 성물 때문에……. 그게 뭐라고…….”
인간의 욕심이 아무리 끝이 없다지만, 이건 재앙이었다.
“교황 성하께선 이렇게 돌아가셔선 안 될 분이었어요.”
그를 깊이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세상에 이로운 존재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
어리석은 자신이 보아도 그러한데, 유피르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지. 이 날벼락 같은 소식과 성물에 대한 생각에 한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제국은 영웅의 귀환으로 축제 분위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죽은 승전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세자르의 얼굴이 한나의 뇌리를 스쳤다.
5년 만에 돌아오는 길인데.
그가 가장 행복해야 할 오늘이, 오래도록 아름답게 추억해야 할 오늘이, 슬픈 날이 되겠구나.
“……오늘 그들이 돌아온다고 했는데.”
“상심이 크겠지.”
유피르도 그 생각에 속이 말이 아니었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교황과 그들의 환영 축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으니까.
“대신관님! 한나!”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다른 신관들과 이야기를 하러 갔던 핀체프가 두 사람을 불렀다.
“도착했어!”
사막의 일행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 * *
신관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들을 반갑게 환영해야 했지만, 신전의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다.
물론, 소식을 접한 일행들 또한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다른 누구보다 세자르는 빠르게 교황의 방으로 향했다.
모이세이와 커티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교황은 세자르를 신전으로 데리고 와 기른 장본인이었다.
속을 알 수 없고 매사 딱딱하기로는 신전 제일이라는 그가 정을 주고 키운 유일한 이가 세자르였다. 그는 가족을 잃은 세자르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세자…….”
숨도 돌리지 않고 급한 발걸음을 옮기는 세자르를 마주한 핀체프가 그의 이름을 채 다 부르기도 전에 세자르는 방으로 쌩하니 들어갔다. 유피르를 지나쳐, 한나의 앞을 스쳐갔다.
“…….”
그는 바로 검은 관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투명한 냇물 같은 그의 눈동자에 교황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
그것은 세자르에게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흔하게 접하던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가 죽인 마물이 손가락 열 개를 다 접어도 모자랄 정도였으니.
하나 그런 것과는 달랐다.
“…….”
세자르는 몸이 굳고, 입이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이 교황의 손으로 향했다.
손끝을 확인하고, 시신의 손에 조금 흘러내린 묵주를 제대로 끼워 준 후, 그 손을 가지런히 가슴 위에 올렸다.
평소 흐트러짐 없던 교황의 모습처럼.
“누굽니까.”
목소리가 무기가 된다면 꼭 이런 온도일까 싶은 냉랭한 목소리였다. 세자르는 교황이 독살당한 것이란 걸 단박에 눈치챘다.
죽음과 늘 가까이 있던 그에게 이 정도 유추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피르가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답했다.
“……그게, 아직…….”
“찾아내 주십시오.”
“…….”
열기가 스미지 않은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유피르는 그 안에 눌러 담은 분노를 모를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복수를 하러 달려나가고 싶겠지.
그 후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자르는 한참 동안 교황의 앞을 지켰다. 그는 품에서 목각인형을 꺼내 관 속에 넣었다.
선명한 외로움과 희미한 그리움이 몰아치는 사막의 숱한 밤들.
그럴 때마다 세자르는 어릴 적, 힘든 일이 있으면 다른 일에 몰두해 보라며 교황이 권했던 나무를 조각하는 일에 열중했었다.
이건 그중에서도 곱게 깎인 조각 중 하나였다. 웃으며 건넬 미래를 상상하며 깎은 조각은, 차가운 시신 옆에 놓이게 되었다.
“말씀하신 대로, 잘 다녀왔습니다.”
세자르는 이 인사에 교황이 자랑스럽다고 온기 가득한 말투로 답해 주리라, 미래를 그렸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하지만 주인을 잃은 인사에는 더 이상 따스함이 깃들 수 없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차가운, 재회였다.
* * *
세자르는 그렇게 교황과의 만남 후, 말없이 떠났다.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심한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커티스 님, 모이세이 님.”
한나는 교황의 방 밖에 서서 커티스와 모이세이가 교황의 시신에 조의를 표하고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인사를 건넸다.
“한나 선생님.”
커티스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다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비록 분위기는 안 좋아도, 그들이 무탈하게 돌아온 것은 축하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한나 선생님, 아니지. 이제는 신관님이죠. 한나 신관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여러분들이 지켜 주신 제국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지냈죠.”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습니다.”
요즘 황궁에서 잘 먹고 잘 자고 늘어지게 안락한 생활을 했던 한나의 얼굴에서는 광이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렇게 까마득히 오래됐네요. 커티스 님과 모이세이 님은 여전하세요. 그때랑 변한 게 없네요.”
“많이 상했을 텐데, 고마운 말이군요.”
6년 전보다 더 늠름해진 모이세이의 모습과 여전히 빈틈없이 정갈한 커티스의 모습은 묘한 향수와 낯섦을 동시에 일으켰다.
“환대를 해드렸어야 하는데…….”
“충분히 환영받았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걸음걸음마다 꽃과 칭송이 수놓아지는 길을 따라 신전까지 다다른 그들에게는 평생의 환대는 오늘 다 받은 기분이었다.
“오시는 길 고단하셨을 텐데,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겠네요.”
괜히 껄끄러운 대화 주제가 나올까 싶어, 한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들의 길을 터 주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커티스와 모이세이는 짧게 인사를 하고 복도를 떠났다.
“…….”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나의 기분은 참으로 오묘했다. 그냥 오늘은 마냥 반가워하고, 마냥 기뻐할 수 있는 날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신전은 여러 의미로 시끌시끌했다.
교황의 죽음에 대한 일로 비상이 걸렸고, 세자르의 일행이 돌아왔다는 것도 소란에 한몫을 거들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신전에도 밤은 왔다. 무슨 난리가 나도 하늘은 고요하고, 달빛은 아름다웠다. 구름조차 한 점 없는, 환한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던 한나는 얇은 외투 망토 하나를 누르고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낮의 소란이 남아 있는 멍멍한 고막을 씻어 냈다.
“그냥 매일 똑같은 신전의 하루 같은데.”
그렇게 많은 일들이 터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밤.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덧 산책로는 끝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떨쳐 내지 못한 근심들을 싣고 한나는 신전 안을 계속 걸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지칠 때까지 걸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도한 곳은 교황의 방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제 근심과 맞닿아 있어서일까.
훤히 열려 있는 문과, 아른거리는 촛불의 불빛에 이끌리듯 그곳에 닿았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교황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잇새로 새어 나가는 울음소리를 애써 삼키는 이.
그의 은빛 머리카락은 작은 창을 통과한 달빛에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반짝이는 것은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그의 숙여진 얼굴 밑으로 슬픔이 뚝. 뚝.
‘세자르…….’
문을 잡고 있는 한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달려가 그의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세자르는 저만의 이별을 하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한나라도 교황과 세자르의 틈새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오늘 낮, 세자르는 충격을 겪고도 자신의 일행들을 챙기느라 여느 때처럼 행동했었다. 공로를 치하하고, 긴 휴가를 주고, 자신의 팀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은 여느 전장의 장군처럼 믿음직했다.
그 모든 모습이 슬픔을 눌러 담고 행한 일이라는 것이 한나의 마음을 저리게 만들었다.
완벽한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일까.
한나는 숨을 죽이고 그 슬픔을 그저 눈에 담았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자신의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세자르를 위해 조심스럽게 문을 닫아 주었다.
또 누군가에게 세자르의 슬픔이 들키지 않도록.
* * *
날이 밝자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들이 신전의 식당에 모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모이세이 님.”
비어 있는 모이세이의 앞자리에 냉큼 앉으며 한나가 인사했다.
“고단하셨을 텐데,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침 수련이 몸에 익어 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모이세이는 여전히 선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몸이 더 좋아지신 것 같아요. 비결은 역시, 아침 수련?”
“하하. 과찬이십니다.”
조금만 쑥스럽게 만들면 멋쩍게 웃는 모습도 여전했다.
“제가 아는 기사님 중에는 모이세이 님이 제일 늠름하신걸요.”
“하는 일이 전투뿐이니 따로 수련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 제레미는 잘 있습니까?”
모이세이가 제레미에 대해 물었다. 아마 그도 자신이 떠난 뒤, 제레미가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이럴 때, ‘제레미는 건실하게 자라 용감한 기사님이 되었답니다!’ 라고 답할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했건만…….
“……잘 지낸답니다.”
“기사 학교는 졸업했습니까?”
“아……. 뭐, 음……. 아직 애를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도저히 ‘사실 제레미는 악당 보스가 되었어요!’ 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가 제레미를 향한 모이세이의 기대가 크다면 더더욱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잘 자랐습니까? 기사 학교 적응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직접 만나서 물어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한나가 겨우겨우 말을 내뱉었다.
분명히 제레미는 잘은 자랐다. 그렇게 건장하게 자라서 사람도 거느리고, 길드 수장도 하고…….
아니, 이렇게 보면 그 녀석 정말 열심히 살았잖아?
“뭐든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좋죠.”
그 순간 한나는 제레미가 모이세이를 만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참으로 궁금해졌다.
그 좋은 구경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벌써 와 계셨군요.”
모이세이의 옆자리에 커티스가 앉았다.
“커티스 님, 어서 오세요.”
한나는 커티스의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혹, 세자르는 오지 않았나 싶어서.
잠이 들기 직전까지 숨죽여 통곡하던 세자르의 무너진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세자르 님은 식사를 거르시나 봐요.”
“정화의식 기도와, 교황 성하의 장례기도를 시작하셔서 아마 얼굴 보기가 힘들 듯싶습니다.”
“그렇군요…….”
그 말에 한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아직 이렇다 할 환영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동안 잘 지냈냐, 몸 아픈 곳은 없느냐, 사막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는데.
“어서 드세요. 커티스 님.”
“한나 선생님은, 아……. 이런, 호칭을 바꾸는 게 쉽지 않군요.”
커티스는 입에 붙은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신관으로 부르는 것이 아직 낯선 모양이었다.
“한나 신관님께선 신전에 잘 적응하신 모양입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적응 못 할 게 있나요.”
“아이들은 잘 있습니까?”
커티스 역시 아이들에 대해 물었다.
“잘 자라서 잘 있죠. 아차.”
자연스럽게 대답하던 한나가 멈칫했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혹시, 여러분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신 건 알고 계시죠?”
“예. 듣긴 들었습니다.”
커티스가 대답했다. 아무리 사막에 있어도 그 정도 정보를 모를쏘냐, 당연히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럼 그분이 여러분도 익히 아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계세요?”
“예?”
“그 황제 폐하가, 보육원에 있던 이안이거든요.”
“……예?”
“네?”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그, 똘똘하고 귀여운데 아이답지 않게 잘생기기까지 했던 이안요.”
“…….”
“…….”
모이세이는 손에 들고 있던 스푼까지 놓쳐 버렸다. 많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모르셨군요.”
별일 아니라는 듯, 한나는 식사를 이어 갔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참 신기하죠?”
“정말……. 충격적이군요.”
“아마 사막의 일로 황궁에서도 상을 내릴 텐데, 알현하게 돼도 너무 놀라지 말라고 알려드려요. 촌스럽게 어버버 말을 더듬거나, 바보같이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을…….”
“꼭 경험담 같습니다?”
커티스가 예리하게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는…….
“……네. 그런 건 제가 다 했으니까 두 번 하지 말자고요…….”
흑역사가 되살아나자, 한나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한나 님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갑자기 신전에 협조 요청이 와서 황궁에 가서야 알았죠. 저도 5년간 연락이 되지 않았기도 하고…….”
“대공가로 간 뒤로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커티스는 이안이 주위 관계를 정리하면서 조용히 움츠려 있었던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본래 큰일을 도모하는 데에는 주위에 입이 없을수록 좋을 테고, 혹 그의 황위 찬탈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주위 사람들까지 화를 입을 테니 누군가를 함부로 곁에 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외로운 길을 묵묵히 견뎌야 했을 어린 이안을 생각하면 사막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자신들처럼 그도 힘든 전투를 이어 왔으리라, 생각됐다.
“마샤는 훌륭한 마법사가 됐고……. 제레미도 좋은 일 하고 있답니다. 뭐, 둘 다 직접 만나 보는 게 낫겠네요.
뭐라 한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 친구들이니.
“궁금하군요. 다들 어떻게 성장했을지.”
“그런데 모이세이 님도 커티스 님도 정말 변함이 없으신 것 같아요. 사막에는 시간이 빗겨 가나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물론 칭찬이죠.”
“한나 님은 많이 변하셨습니다.”
커티스의 말에 한나는 고기를 찍었던 포크를 접시 위에 떨어뜨렸다.
설마, 늙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부가 많이 상했던가.
아니, 늙었다고 해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게 어디 있는가!
솔직히 자신도 모이세이와 커티스가 정말 변함없어서 변한 게 없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때의 느낌이 그대로라는 거지.
엄밀히 돋보기 눈을 장착하고 보자면, 눈가의 주름이나 조금 성숙해진 선이라든지, 남자다워진 모습이라든지…….
아, 또 칭찬으로 흘러가네.
“완전히 여인이 되셨습니다.”
“여전히 소녀 같은데.”
커티스의 말에 모이세이가 툭, 하고 말을 덧붙였다.
뭐야 이 사람들…….
둘 다 좋은 말이긴 한데,
“모이세이 님, 여기 고기도 드셔요.”
한나는 고기가 담긴 접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상하게 모이세이에게 고기 한 점을 덜어 주게 되는 이 마음은 뭘까.
그 모습을 본 커티스는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우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를 좋게 봐 주시다니. 그럼 어디 좋은 신랑감 친구 좀 소개해 주세요. 본인이 등판하셔도 괜찮……. 아니에요.”
재미있으라고 한 말인데 조금 몸을 물리는 커티스의 반응에 한나는 빠른 철회를 했다.
이러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신고당하겠다.
“일 년 후면 신전에서 주는 집도 나오는데, 참한 남편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라……. 아, 두 분은 집을 받으셨겠네요?”
신전의 최고 복지라면 바로 이것이었다.
7년 차에 나온다는 개인 소유의 집!
“신전에서 생활하는 게 편해 관리할 여력이 없어서 미루고 있습니다.”
“관리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꼭 받아 두세요. 신전이 도산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있을 때 챙겨야지.”
“음……. 그런 것까지 생각하시는군요.”
커티스는 7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전이 망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한나 한 명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신관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신기했다.
“은퇴 준비는 빨리빨리 할수록 좋죠.”
“잘 사실 것 같네요. 저나 모이세이는 특히 그런 것엔 영 관심이 없어서.”
“앞으로는 관심을 가져 보세요.”
“아침부터 유익한 대화군요.”
“하하하…….”
교황 성하의 일도 그렇고, 위기의 신전을 생각하면 자신의 걱정이 꼭 말도 안 되는 걱정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한나는 생각했다.
“그런 조언은 세자르 님이 제일 필요할 것 같네요. 기회가 된다면 세자르 님께도 꼭 부탁드립니다.”
“이 얘기를요?”
“예. 그 남편 후보 등판 얘기도 꼭 함께요.”
“……에?”
그 말에 한나는 커티스를 ‘진심이냐.’는 황당한 얼굴로 보았다. 커티스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미소를 띠었다.
“식사 끝나고는 뭐 하세요?”
“회의에 갑니다. 사막 전투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저런, 보고서라니.”
한나는 절로 스미는 안쓰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안 그래도 귀찮아 죽을 것 같은 보고서인데, 6년간의 전투 보고서라니.
이건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슬픈 이야기가 따로 없었다.
“좋은 거 많이 챙겨 드세요.”
“어째 사막으로 가던 때보다 더 슬픈 눈을 하십니다.”
“비슷한 심정이에요.”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한나의 고개에 커티스는 웃었다. 한나의 저런 모습이 꼭 세자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또 식사시간에 뵐 수 있으면 봬요.”
한나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아차, 세자르 님도 회의에 참여하시나요?”
“예. 오늘은 필수로 오실 겁니다.”
“그럼 잠시 기다리세요!”
그 말과 함께 한나는 식당의 주방으로 뛰어갔다.
몇 분 후, 한나가 바리바리 챙겨 온 것은 따뜻하게 데워진 빵이었다.
“아침도 거르셨는데 출출하시다고 하면 드시라고 챙겨 주세요.”
빵 봉투에 가득 담긴 따끈한 빵에서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입맛이 없다고 하시면 억지로는 드실 것 없지만……. 그래도 신전에 와서 따뜻한 밥이라도 챙겨 드시면 좋잖아요. 사막에서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텐데.”
“예. 아마 이건 드실 겁니다.”
한나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들은 사막에서 지겹게 먹었던 빵이라면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세자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마 자신이나 모이세이가 챙겨 온 빵이 아닌, 한나가 챙긴 빵이라면 꼭 세자르의 입으로 들어갈 거라는 확신이 커티스는 들었다.
“감사합니다.”
* * *
이곳엔 마물도, 지긋지긋한 마기도, 탁한 공기도, 목숨을 건 전투도 없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대신 잘 닦인 대리석 위를 걷는 것은 구름을 밟는 것 같았지만, 발걸음이 무겁기는 오히려 이곳이 더했다.
세자르는 천근같이 무겁게 느껴지는 회의실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이미 사막의 일행들이 일찍 자리해있었다.
“이렇게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네요. 늘 사막의 임시 막사에서 하던 회의가 꿈같네요.”
“전 눈뜨면 사막의 보랏빛 하늘이 안 보이는 게 어찌나 신기한지 몰라요.”
“오히려 돌아온 게 꿈같지 않나요?”
다들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세자르는 비어 있는 중앙의 자리에 앉았다.
“시작하지.”
그의 시작을 알리는 말에 커티스가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회의하시면서 요기 좀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막에서는 식사와 회의의 경계가 모호하기가 일쑤였다. 먹는 시간도 쪼개야 하는 일정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자르는 지금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됐어. 나중에 따로…….”
“한나 신관님께서 세자르 님 끼니 걱정에 직. 접. 챙겨 주신 겁니다.”
하지만 그 말에 거절을 하려던 세자르의 입이 닫혔다.
“아직 따뜻합니다만.”
커티스가 웃으며 재차 권하자, 세자르는 멍하니 빵을 보았다.
분명 없던 식욕이 조금 자극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정신이 없어서 아직 제대로 인사조차 못 한 누군가가 생각났다.
그가 손을 빵으로 가져갔다.
톡.
따뜻하고 말랑한 흰 빵을 한 조각 떼어 낸 세자르의 입이 열렸다.
“시작하지.”
조용히 오물거리며 회의가 시작됐다.
* * *
늘 그렇듯 그들의 회의는 핵심만 주고받는 편이었다. 길게 떠드는 것을 질색하는 세자르의 성격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일행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마지막까지 남은 커티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세자르에게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들 사이에선 차기 교황에 대한 얘기가 분분하던데. 들으셨습니까?”
“장례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언제까지 공석으로 둘 수도 없고, 세간에 교황 성하의 죽음이 알려지면 빠르게 차기 교황에 대한 언급을 해 주어야 하니까요.”
세자르는 대신관들이 차기 교황에 대해 분분히 떠들어 댈 말들이 벌써부터 진절머리가 났다. 신전의 정치도 여느 정치와 다를 것이 없었다. 개인의 이권을 위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설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세자르 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내 생각이 중요한가?”
“어쩌면 그 자리가 세자르 님의 것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커티스의 말에 세자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제국민들은 세자르 님을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차기 교황에 대한 이야기가 돌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도 세자르 님이겠죠.”
세자르가 아직 새파랗게 젊긴 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교황이 꼭 나이 든 사람만 임명되지는 않았다.
세상 하직한 선대 교황만 하더라도 서른 중반의 나이에 교황의 자리에 올랐으니.
“나 같은 치가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지.”
세자르가 중얼거렸다. 욕심이 없다기보다, 그 자리가 탐나기는커녕 귀찮았다. 대신관의 영대조차 어떤 날은 온몸을 짓누를 만큼 벅차게 만드는데 교황이라니.
“그런 자리는 관리자에 걸맞는 사람이나 하는 거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아마 신전이 원하는 지도자는 그런 류가 아닐 겁니다.”
“교황이 마스코트도 아니고, 언제부터 유명세로 줄을 세웠다고.”
“신도들이 열광하고 찬양할 존재가 교황이라면, 신앙심이 더 탄탄해질 테니까요.”
“그 자리에 목맨 대신관들 널렸는데, 누구라도 던져 주면 그만이지.”
하등 관심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선 세자르의 시선이 아직 반 이상 남은 빵으로 향했다.
그는 빵 봉투를 챙겨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커티스가 낮게 웃었다. 그러곤 스쳐가는 세자르에게 가벼운 어조로 흘리듯 말했다.
“세자르 님께서 어느 자리, 어느 곳을 바라보던 따를 겁니다.”
“신소리는.”
세자르는 그대로 문을 열고 다시 기도실로 향했다.
* * *
모두가 바빴다.
한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3일의 장례 중 하루는 성직자들만, 하루는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마지막 하루는 모든 신도들이 참배 가능했다.
신관들에게 이 3일 동안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앞으로 3일은 잠도 제대로 못 자겠네.”
이미 비공식적인 하루는 지나갔다. 내일은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신전에 올 것이었다.
대신관들은 차기 교황에 대한 문제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황제의 방문에 얼굴도장을 찍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아무래도 차기 교황의 자리는 신전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촉을 곤두세우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어도 서로 자리 생각만 하다니.”
특히 막시온 대신관의 무리는 아주 작정을 하고 교황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뭣 모르는 자신에게도 그리 보일 정도면 다른 이들에겐 더하겠지.
“으휴.”
한나는 내일 장례식에 사용될 꽃에 축복을 내리는 작업을 하루 종일 하다가 겨우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는 가을꽃이 만연했지만, 온종일을 꽃에 축복을 새기는 일을 하고 난 뒤라 꽃이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차라리 하늘의 달이나 보고 말지.
한나는 고개를 들어 유난히 검은 하늘을 보았다. 잠들기 좋은 밤이었다.
“별도 없나.”
때마침 종종 신력 때문에 바닥난 정신력으로 숙소까지 갈 힘이 없을 때 종종 잠들곤 했었던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한나는 고민하지 않고 벤치에 드러눕다시피 풀썩 몸을 던졌다.
“아, 시원하고 좋다.”
종일 감옥 같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맑은 공기에 바람 솔솔 부는 정원은 쉬기 딱 좋은 장소였다.
가만히 벤치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니 한나는 눈이 절로 감겼다.
이곳에서 잠들었다가는 감기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인데,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목을 조이는 망토 끈을 손으로 당기자, 부드럽게 흘러내린 망토가 벤치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울 힘도 없는데.”
나중에, 하고 줍는 것을 미뤄 둔 그때, 누군가 한나의 망토를 주워 그녀의 무릎 위로 얹었다.
감겼던 한나의 눈이 뜨였다. 동공에 환한 달빛이 가득 담겼다.
“아.”
달빛이 아니라 빛나는 머리칼이구나.
“누군가 내게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다간 입 돌아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웃음기 스민 그 말에 한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다에서 막 건져 낸 미역 같다고 했던가.”
“해파리였어요.”
이 와중에도 한나는 그의 말에서 틀린 부분을 짚어 주었다.
“그래. 그거. 지금 그대 모습도 꼭 그렇군.”
어이없는 농담에 한나는 웃음이 터졌다.
어쩜 6년 전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잘 지낸 것 같군.”
“입 돌아간 거 안 보이세요?”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세자르는 허리를 숙여 한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빤한 그의 시선에 한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무 가깝지 않나.
한나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세자르가 말했다.
“여전히 예쁜데.”
얼굴이 아니라, 귀 끝까지 붉어져 버렸다.
“무, 무슨 사막에서 뭘 배워 오신 거예요!”
“눈코입, 반듯하다는 뜻이었어.”
“크흠!”
혼자 이상하게 받아들인 건지 멋쩍어진 한나는 괜히 목덜미를 긁으며 벤치 옆으로 조금 엉덩이를 옮겼다.
“앉으세요. 쉬러 오신 거죠?”
“예나 지금이나 여기가 명당이군.”
“중앙 신전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요.”
6년간 많은 것이 바뀌었다지만, 한나는 자신이 세자르와 이렇게 중앙 신전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두 사람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마주보고 있던 시선은 이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참 예쁘죠?”
“그러게.”
세자르의 대답에 한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대답과 달리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에 한나는 어이가 없었다.
“눈도 안 뜨신 분이.”
한나의 퉁명스러운 말에 세자르가 옅게 웃었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지.”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라면, 생각이나 기억, 추억 같은 걸까.
“사막에선, 눈감으면 보이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고.”
“무슨 아름다운 걸 그리셨는데요?”
“꽃, 별, 초록 언덕, 파란 하늘, 뭐 그런 평범한 거.”
“평범하다고 하기엔 귀한 것들이네요.”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도.”
지금 그가 그리워하는 이는 교황 성하가 아닐까, 한나는 생각했다. 그를 배려해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어 입을 다물었다.
이내 세자르의 눈이 뜨이고, 고개가 돌아갔다.
두 시선이 곧게 마주쳤다.
“오늘은 눈을 뜨고 보는 게 더 나은 것 같군.”
그의 파란 눈동자에 담긴 제 모습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
고른 호흡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에 스치는 낙엽 소리가 심장 소리에 얹어졌다.
그 순간 한나는 그 잔잔한 불협화음이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한나가 말했다. 이제야, 진작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많이 걱정했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도.”
“걱정하기엔, 내가 그리 못 미더운 존재는 아닐 텐데.”
“물론, 의심할 여지 없이 잘 돌아오실 줄은 알았죠. 그래도……. 그냥, 할 수 있는 게 걱정이나 응원밖에 없으니까요.”
하루라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이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어쩌면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평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고, 우리는 그들의 시간에 빚지며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그대는 몇 번이나 나를, 우리를 살렸는걸.”
“성수가 효과가 좋았던가요.”
그래도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성수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것 말고도, 또 있지.”
“네?”
“축복해 줬지 않나.”
“축복…….”
한나가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어느 날 그가 했던 장난이 생각났다.
“여전히 짓궂으시네요. 흑역사는 이제 잊으려나 했더니.”
한나의 뾰족한 눈초리에 세자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에겐 흑역사였나 보군. 내겐 좋은 기억이었는데.”
“일부러 축복을 이상하게 알려 줬잖아요. 제가 곧이곧대로 믿고 여기저기 입술 부딪히고 다녔으면 어쩌려고.”
“그랬나?”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세자르의 늘어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아래로 장난스럽게 휘어진 눈매가 보였다.
“네. 많이 했죠. 신관들에게는 아침마다, 신도들에게도, 높으신 분들께도.”
“오.”
세자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농담을 하는 한나의 입가에 미소가 얹어졌다. 이제는 축복을 내릴 때에 굳이 입술 키스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손등에 하는 키스도 그냥 퍼포먼스일 뿐, 딱히 효과가 없다는 것도.
“그래서 이젠 제법 잘한답니다.”
“그거, 잘됐군.”
“뭐가 잘돼요!”
한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농담을 한다고 그대로 다 받아들이다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 잘하는 축복, 나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관님.”
“참 나……. ”
이제 보니, 세자르는 추억이 미화되어 진중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나 보다.
이렇듯 저보다 장난기 심한 사람이었는데.
“아무나 안 해 드려요. 저도 제법 몸값이 귀한 신관이 돼서.”
한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도도하게 말했다.
“아쉬운 일이군.”
“하긴, 지금은 저보단 세자르 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겠네요. 영웅의 축복이라니. 돈 주고도 못 사려나.”
비아냥거리는 한나의 말에도 세자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돈을 얼마를 가져와도 줄 수 없지.”
정말 비싼 축복이 되겠네.
한나는 다시금 세자르가 얼마나 바빠질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귀하신 몸에게 막 장난을 쳐도 되는 건가 하는 위화감도 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와중, 세자르가 손을 뻗었다. 멍하게 있던 한나는 제 손을 이끄는 세자르의 행동에 놀라 제 손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주의라.”
그의 고개가 숙여지고,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분명 이건 신관들이 흔히 행하는 축복의 동작이었다.
그러나 한나의 심장은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었다. 짧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내려앉았던 세자르의 시선이 다시 한나의 얼굴에 닿았다.
“누구랑 달리.”
짙게 올라간 입꼬리가 여전히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저……. 저도 아무한테나 그러지 않았거든요. 농담, 농담이죠.”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한나는 화끈한 볼을 손부채질하며 말했다.
“사막에 오래 계셔서 요즘 농담도 모르시나.”
요즘 그런 농담 같은 건 없었지만, 뭐 어쨌거나 나오는 대로 말했다. 한나의 손부채질을 따라 분홍 머리카락이 나풀나풀거렸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다고요.”
입에 하는 축복 같은 건 말이다. 그런데 왜 이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건지.
갑자기 한나는 저 혼자 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단한 축복이었지.”
“대단할 것까진……?”
그냥 입술이나 살짝 닿았다 떨어진 것뿐인걸.
아. 기술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
말을 하고 보니 한나는 아차 싶었다.
“날 이렇게 살아 돌아오게 했잖아.”
세자르가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그냥 세자르 님 능력이죠.”
한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 때문이 맞아.”
“그렇게 치하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래도 세자르가 그리 말해 주니 기분은 좋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꼭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거든.”
한나의 두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세자르는 가끔 이해할 수가 없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도, 저를 놀리는 건지, 진지한 건지…….
가늠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처럼 혼자 질주하는 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한나는 마른기침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흠. 뭐 잘 돌아왔으니 됐죠.”
생각했던 재회는 이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너무 기뻐서 심장이 터질까, 혹 눈물이 나지는 않을까.
수없이 그려 봤던 모습 중에 이런 재회는 없었다. 이토록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 같은 모습은.
서로 반가워할 경황이 없이 지나친 순간이라 그렇겠지만.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히 여유로운 휴식을 즐겼다. 혼자 보는 하늘보다는, 둘이 보는 하늘이 더 아름다웠다.
* * *
교황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신관들만 모이는 첫날이 지나고, 오늘은 각국의 주요 인물들이 행차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제국의 황제나, 마탑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모이기 힘든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면 언제나 긴장된 분위기가 감돈다. 모두 온화하게 웃고는 있지만, 그 살얼음판 아래에는 요동치는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다가 교황 성하께서 돌아가신 거래?”
“타살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말도 안 돼.”
소곤거린다고는 하나, 여기저기서 흩어지는 말소리는 드문드문 귀로 들어왔다.
한나는 힐끔, 세자르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그도 들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황께서는 참으로 좋은 성직자셨는데요.”
마탑주가 대신관 중 안면이 있는 막시온에게 말을 걸었다.
“신전으로써는 통탄할 일이죠.”
“흠, 신전이 여러모로 바빠지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바빠진다는 것은, 차기 교황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쪽이, 그 소문의 영웅이군요.”
마탑주는 세자르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세자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아직 젊은 분이 대단하십니다.”
살갑게 말을 건네는데도 세자르는 그저 꾸벅 인사를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슬픈 날인데,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군요.”
눈치 빠른 마탑주는 웃으며 세자르의 팔뚝을 두드리곤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마샤와 눈이 마주쳤다.
마샤의 초롱초롱한 눈은 인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설마 여기서 반갑게 ‘안녕!’ 손이라도 흔들까 봐 한나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샤는 풀죽은 표정이 되었다.
‘하여튼, 상황 파악 못 하지.’
한나의 단호한 눈초리에 마샤는 조용히 마탑주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남은 건…….
“신전에서 상심이 크겠습니다.”
황제 폐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당 와야 할 자리죠.”
이안은 한나가 밤새 새긴 축복이 담긴 하얀 꽃을 교황의 관에 넣었다. 짧은 묵념이 끝나자 그는 뒤를 돌았다.
‘아. 눈 마주쳤다.’
이안이 한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너도 웃지 말라고!’
한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안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오랜만입니다.”
하지만 이안이 인사를 건넨 것은 세자르였다. 의외라는 듯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자르는 이안을 빤히 보고 있었다.
‘못 알아본 건가?’
설마, 그래도 어릴 적 얼굴이 조금…… 은 남아 있는데.
“오랜만입니다.”
세자르는 다행히 이안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릴 적 투닥거릴 때처럼 편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이가 된 것은 조금 씁쓸한 광경이었다.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만큼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게요. 여전히 얼굴이 좋은 걸 보니, 소문만큼 힘들진 않았나 봅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한나는 당황스러웠다.
농담이지? 농담 맞는 거지?
서로 좋은 대화가 오가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쎄한 기분이 들었다.
이쯤에서 옆에서 누군가가 ‘호호호. 유머 있으셔라.’라며 웃어 줘야 하는 타이밍인데.
저들이 말하는 게 사막에서 마물을 때려잡고, 반역을 한 얘기라는 걸 알면서 들으니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정말 왜들 저러냐고.
“곧 황실에서도 사막의 영웅들에게 포상을 할 겁니다.”
“고작 몇 푼 받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고작 소리는 안 나오도록 노력해 보죠.”
그러니까, 그렇게 살벌하게 얘기하지들 마시라고요.
나라에서 준다고 하면 그냥 냅다 받으시라고.
한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슬금슬금 세자르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쿡 찔렀다.
세자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한나를 보았다.
“그, 언사를 조금……. 흠. 보는 눈이……. 흠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한나의 말에 세자르는 피식 웃었다.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제대로 반응하는 세자르봇.
한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한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이 말했다.
“신관님껜 따로 드릴 말이 있는데.”
“저요?”
한나는 조금 놀라 움찔했다.
“네.”
“여기서 하시면…….”
“둘이서만.”
뭘 또 단둘이 얘기를 하겠다는 건지.
못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새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알겠어요.”
한나의 대답에 이안은 세자르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식장을 떠났다. 세자르는 표정 변화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손님 오셨는데요.”
다른 객이 왔다는 것도 잊은 채.
한나는 또 세자르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그제야 잠시 다른 곳에 머물렀던 세자르의 정신이 돌아왔다.
* * *
참 묘한 광경이었다.
“어떻게 셋 다 여기 있는 거지.”
장례식을 진행 중인 기도실을 나서자 아주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신전의 여신상이 있는 홀에 익숙한 인물들이 서 있었다.
먼저 기도실에서 얼굴을 보았던 이안과 마샤, 그리고 언제 도착해 있었는지 모를 제레미까지.
제레미는 재상의 수행원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여신상에 기도를 드리는 모양새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네.”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한나가 말했다. 저렇게 다 큰 세 사람이 동시에 있는 모습이라니.
묘하게 익숙해 보이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한나는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꽤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의아한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래서 교황 성하가 누구의 손에 죽은 거라던가.”
순간, 복도를 지나는 다른 신전의 신관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중앙 신전에서 나온 얘기인데, 성물이 없어졌다더군.”
“그걸 가져간 자가 범인이겠군.”
“무슨 성물인데 그래?”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하여튼 이번 사건 이후에 무슨 파란이 있을지 모른다는 거지.”
“신전은 장례식이 끝나도 비상이겠네.”
신관들 사이에서는 교황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비밀이라는 건 꼭 새어 나가기 마련이니.
교황 성하, 타살, 성물, 범인…….
한나의 시선이 여신상 앞의 세 사람에게 닿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찜찜한……. 기분.
“설마.”
그 범인이 저 중에 있는 건…….
‘아니지. 이건 너무 비약이 심해.’
하지만 교황의 죽음과 성물이 다른 어떤 사건의 전조가 될 것이란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의심은 좋지 않은데.
‘성물……. 성물.’
왜인지 안 좋은 예감이 지워지질 않았다.
* * *
“바쁜 사람들이 다 모였군.”
이안의 말에 마샤와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지금 마주한 세 사람만 보더라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들이었으니.
“이런 일로 모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일은 드물죠.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고.”
종말이 온다고 해도 절대 융합되지 못할 인물들이 나란히 추모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면, 평화나 대통합 같은 건 의외의 모습으로 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추모하는 자리에는 칼을 감추고 오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살 만한 세상인가 싶기도 하고.”
제레미가 말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손에 칼이 없는 건 아니지.”
이안이 대답했다.
“적어도 우리 사이엔 없지 않습니까?”
마샤는 제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우리 사이를 그런 관계에 빗대다니, 상처야.”
이안은 장난스레 답했다.
“그런데, 그새 재상과는 무슨 사이가 된 거지?”
“이런 자리에서 일적인 건 묻는 게 아닌 걸로 아는데요.”
“꼭 이런 거에만 성실하다니까.”
내심 궁금했던 마샤도 맞장구를 쳤지만 제레미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교황 성하의 죽음으로 다들 바빠지겠군.”
“물론 신전이 제일이겠지만.”
“그러니 너무 바쁜 티는 내지 말라고. 제일 바쁜 쪽이 의심을 살 테니.”
이안은 마샤와 제레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몸을 돌렸다.
짧은 인사였다.
“그렇게 말하는 분이 제일 바쁘게 자리를 옮기는 것 같은데.”
제레미는 멀어지는 이안을 보며 말했다.
이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황궁 사람들이 달라붙어 교황의 추모로 인해 잠시 미뤄진 업무를 전달했다.
“황제 폐하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너도 너무 바쁘게 굴지 말라고.”
“바쁘긴 마탑이 제일 바빠 보이던데?”
“그래 봐야 황궁만 할까. 이미 세간에선 사막의 마물을 잠재운 이후로 신전의 위세가 황권을 위협해서 황실이 이 일을 벌였다고 소문이 돌던데.”
마샤의 말에 제레미는 피식 웃었다.
“상상력들이 지나치지.”
“뭐……. 꼭, 없는 말만은 아니지. 황제가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판국에, 거기다 황제의 정통성은 말이 많고. 나라도 무서운 상황이었을 텐데.”
“우리끼리 의심하지 말자고.”
제레미는 마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폭.
자신의 어깨에 떨어진 제레미의 손을 힐끗 바라본 마샤의 시선이 제레미의 얼굴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다고, 내가 꼭 황실만 의심하는 건 아닌데.”
“그 눈빛은, 꼭 나까지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네.”
“글쎄. 요즘 두문불출했던 누구라서.”
마샤의 손이 제레미의 팔을 치워 냈다.
“슬픈 일이네. 우리끼리 이러는 건.”
제레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그 성물이 가장 탐나는 건, 마탑인 걸 알지만 난 한마디도 안 하는 데 말이야.”
“이제 했네.”
마샤는 껄껄 웃으며 몸을 돌렸다.
“다음번에는 좋은 일로 모이자고. 이런 자리 말고.”
“그러던지.”
세 사람은 여전히 서로 가까웠지만, 또 완벽하게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0살 그 시절이라면 아무 이유가 필요 없을 믿음이, 이제는 따져야 할 것들이 지천에 시한폭탄처럼 깔려 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빼곡히.
* * *
“폐하!”
한나는 식이 조금 정리되자마자 이안에게 달려갔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못했는데, 이안은 신전의 응접실에서 보좌관과 무려, 업무를 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일할 거면 그냥 황궁 가서 일했겠다!’
분명 속으로 생각한 거였는데, 이안은 한나의 눈빛을 단박에 알아챘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여기도 집중이 잘되네요.”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더니 알렉스에게 건네면서.
“그럼.”
알렉스는 한나가 열고 들어온 문을 닫으며 나갔다.
“또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이제는 한나의 5분을 가지 못할 존대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제가 항상 그렇게 아픈 사람인가요.”
“……아마, 대부분은?”
그게 아니었다면 꾀병을 부린 거고.
“앉아요. 종일 서 있었을 텐데.”
이안의 말에 한나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장례의 진행을 돕는 일은 안 그래도 부실한 하체를 혹사시키는 일이었다.
종일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인사에, 진행 돕기에, 다행히 웃을 필요는 없어 입꼬리는 괜찮았지만, 다리만은 무사하지 못했다.
“휴, 맞아. 종일 서 있고, 다들 높으신 분들이라고 바짝 긴장해야 하고, 하루가 길다. 길어.”
높으신 분들 앞에서 긴장을 해야 했다던 한나는 황제의 앞에서 털썩, 소파에 앉았다. 이제는 다리를 올려 종아리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누가 그렇게 어려워요?”
“한둘인가, 걸리는 게 왕이고 대신이고, 주눅들어 죽겠네.”
“흐음.”
평소 한나가 주눅든다는 말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걸 잘 아는 이안이었다.
이건 그냥 힘들다는 뜻일 뿐이겠지.
“그럼 황궁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요?”
“엑?”
이안의 제안에 한나가 경악했다.
“어차피 신관은 많은데, 굳이 선생님이 고생해야 하나.”
“그 뭐, 네가 보기엔 내가 막 놀고 먹는 사람 같겠지만 내 입지가 신전에서 좀 괜찮거든.”
“그래요?”
“이런 날 얼굴 보는 대신들도 제법 안면 있는 사람도 많고.”
“치료했어요?”
“응. 아까 봤던 서왕국 왕자님은 내가 치료하다가 너무 아프다고 날 죽이려고 했어.”
“……아?”
그 이야기에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누굴 죽여?
“그런데 알다시피 내 치료가 아프긴 해도 효과가 끝내주잖아. 결국 수고비를 곱절로 주면서 감사를 표했지. 덕분에 지금은 절친이야. 절친. 아 참, 이건 비밀인데 그때 치료한 게, 탈모였어.”
한나는 말을 끝낸 뒤 깔깔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과연, 현대과학도 치료하지 못한 탈모를 치료할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풍성해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와 제 손을 덥썩 잡던 서왕국 왕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요?”
이안은 숱이 빼곡한 단발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던 왕자를 떠올렸다.
어쩐지 돌아가는 마당에 한나의 손을 그리 꼭 잡고 흔들며 끝내 포옹까지 하고 사라지더라니.
이안은 신전에 들어선 뒤로 한나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뒤통수에도 달린 사람처럼.
“하여튼 그렇다는 거지. 나는 이런 행사에 얼굴을 내비치기 딱 좋은 인물이야. 객관적으로 얼굴도 번드르르하지 않니.”
“……네.”
“너 방금 수긍하기 전에 텀이 조금 길었다?”
“설마요. 기분 탓이겠죠.”
선하게 웃는 이안의 얼굴에 더 따지고 싶었던 한나의 전투력이 상실되었다.
“고로 그런 이유로 나는 황궁으로 갈 수가 없다는 거지.”
“장례가 끝난 뒤에는 돌아와야죠.”
“사실 그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네.”
이안은 꼬아 올린 다리 위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이제 황궁을 나와서 신전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차기 교황 문제도 그렇고, 여러모로 신전이 바빠질 테니까…….”
이안이라면 무슨 말이든 잘 들어주니 이번에도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건 곤란해요.”
부드러운 목소리도 흘러나오는 말이 긍정의 뜻이라 순간 한나는 착각할 뻔했다.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이라니!
“어디 아프지도 않고, 황궁은 이제 신관들 도움이 없어도 괜찮지 않나……?”
이미 다른 신관들은 황궁 병사들의 치료를 거의 끝낸 상태였다.
이미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혹은 이번에 마지막으로 둘러본 뒤 돌아오겠다는 핀체프도 있었다.
“선생님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어요.”
“뭔데?”
“약속했잖아요. 곁에 있어 주겠다고.”
그런 약속을 했던가. 평소 허언증이 있는 건 아닌데.
이건 과거를 곰곰이 되짚어 봐야 했다.
어쩌지. 물러야 하나. 한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렵지 않은 약속이에요. 잘 생각해 봐요. 전 모든 걸 다 줄 수 있고, 선생님은 작은 약속 하나만 지키면 돼요.”
매우 간단하다는 듯 이안이 말을 이어 나갔다.
작은 약속이라.
작다기엔 곁에 있는 건 근무지가 바뀌는 일인데.
잠깐만, 이거 근무지만 바뀌는 일이 아닌 거 아니야?
한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잘못 걸려든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받아 간 것도 있으면서 이렇게 발뺌하는 건 곤란한 일이죠.”
애석하다는 듯, 상처받은 얼굴로 이안이 말했다.
“…….”
“서류에 사인도 했잖아요.”
이안은 제 품에서 광산 소유권 서류를 꺼내 한나의 눈앞에 흔들었다.
‘아니, 저걸 챙겨 다니는 건 뭐야?’
그런 한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안이 말을 덧붙였다.
“매일 챙기진 않는데, 오늘은 꼭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 들더라고요. 꼭, 지금 이런 상황 같은?”
한나가 입을 쩍 하니 벌렸다.
귀신이네.
귀신이 따로 없다. 예지력이 있는 건가.
“약속을 지켜요.”
아무래도 이대로 신전에 눌어붙어 있는 건 실패지 싶다.
“다른 건 몰라도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건, 아주 싫어하는 편이라.”
이안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한나를 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모든 상황을 싫어했다.
하루를 시간, 혹은 분 단위로 쪼개서 맞추고 사는 사람이니, 누군가 약속을 어겨 일이 어그러진다는 건 그에게 눈이 뒤집힐 만한 사건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은 알잖아요.”
그림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는 이안의 모습에 한나는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여튼, 이안은 강박적인 구석이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만……. 차기 교황에 대한 정리는 끝나고 갈게.”
결국 한나가 한발 물러섰고, 그에 조금 곤두섰던 이안의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요. 그 정도도 못 기다려 줄 인내심은 아니라.”
“참 감사하네요.”
빈정거리듯 대꾸하는 한나의 모습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얘기가 통하니, 참 좋죠?”
얘기가 아니라 협박이겠지.
한나가 고개를 끄덕했고, 이안은 그제야 손에 들린 서류를 곱게 접어 다시 품에 넣었다.
어디서 저런 나쁜 것만 배워 온 거야.
마치 한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안이 말했다.
“선생님도 협상을 썩 못하는 편은 아니에요.”
하, 이제는 칭찬까지 들었다.
분명 완벽하게 진 것 같은데, 칭찬을 듣고 있자니 또 스멀스멀 기분이 좋아지는 게…….
‘나도 제정신은 아니야.’
한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이안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때, 이안이 자신의 옆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한나의 앞에 놓았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황궁 간식이에요. 바빠서 밥도 못 챙길까 봐.”
이건, 분명 조련당하고 있는 게 맞다.
“아니, 뭐 이런 걸 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 귀신같이 준비한 건지.
머리가 좋은 건지, 꾀가 말짱한 건지.
그도 아니라면,
“여전히 자상하네.”
그냥 이안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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