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북부의 수호단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긴 개뿔.
그러니까 이들이 말하는 ‘북부의 수호단’이란, 한나가 수장으로 있는 조직이었다. 본인은 원치 않았는데도 말이다.
“해롭다. 해로와.”
이건 정말 정신건강에 해롭고, 심장에 해롭고, 그냥 존재 자체가 세상에 해롭다.
“부럽네요. 조직도 생기고.”
“그 입 다물라.”
“남들은 몇 년이 걸려도 어려운 일을 뚝딱 해내시네.”
“거기까지 해.”
“하긴, 옛날부터 통솔하는 데엔 재능이 있으셨나.”
“야! 코흘리개들 데리고 다니는 거랑 이거랑 같아?”
꾹꾹 누르고 있던 한나의 성질머리가 폭발해 버렸다. 마샤는 잘 구워진 통돼지 고기를 뜯으며 푸스스, 웃어 보였다.
“선생님 지금 표정 진짜 웃기다.”
“네 꼴도 썩 좋지는 않거든?”
입가에 기름이나 닦고 말할 것이지.
“제레미, 너도 배라도 채워. 창피는 내가 당할 테니.”
자포자기의 심정이다.
될 대로 되어라.
“대장님이 여기 계시네!”
한나가 모든 걸 포기한 상태인 걸 어떻게 알았는지 자칭 부하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이렇게 좋은 날, 건배사라도 하셔야죠!”
“맞습니다!”
한나는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열심히 파서 만든 쥐의 노동에는 유감이지만, 지금만큼은 꼭 필요했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그냥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 싶어 한나는 말을 짓뭉개며 건배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던 용병들은 그것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서로 잔을 치며 즐겁게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겨우 산에서 몇 번 대치한 사이, 고작 한 번 같은 편이 되어 싸웠을 뿐인데…….
“왜 또 이렇게 익숙해졌냐고.”
이 사람들이 이제 익숙하다 못해 친구 같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 또 전진!”
갑자기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원한 전우!”
다들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시끌벅적 노랫소리가 마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와. 이젠 아예 군대야?”
마샤가 감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미치겠네.”
한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이봐, 제레미. 이러다 네 라이벌이 되겠는데? 미리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마샤가 껄껄 웃으며 제레미에게 말했다. 제레미는 손에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나직이 답했다.
“미리 제거라도 하라고?”
제레미의 말에 한나가 발끈하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살벌하게 말하면 내가 오늘부터 두 다리 뻗고 자는 데 애로사항이 생기지 않겠니?”
그에 제레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농담인데.”
“네가 하는 건 농담 같지가 않다고!”
“제가 이상한 데서 신뢰도가 높네요.”
“……믿지. 널 누구보다 믿지.”
한나가 중얼거렸다.
너무 믿어서 문제지.
그러니 없는 소리 할 양반이 아니라서 발끈한 거 아니겠는가.
“이상한 소리 말고, 어떻게 수습할지나 생각해요.”
“넌 이게 수습이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그럼 이대로 수장인지 대장인지 하시든가.”
“좋은 방법 있니?”
혹시 모를 동아줄이라도 잡기 위해 한나가 눈을 반짝이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그래. 제레미라면 조직 생활을 오래했으니, ‘쉽게 조직을 파탄내는 방법.’ 같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한나의 일말의 기대를 뒤로하고, 제레미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런 게 있겠어요?”
“그래. 내가 무슨 기대를.”
그냥, 이것들은 저가 난감한 것을 즐기고 있을 뿐인 게 분명했다.
* * *
“회의를 시작하지.”
원탁에 둘러앉아 시작된 회의.
한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안건이 뭔가요.”
왼쪽에 앉은 마샤가 물었고, 한나는 손깍지를 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찌푸려진 미간, 방황하는 눈동자, 떨리는 다리. 한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조직의 이름.”
“…….”
“…….”
회의에 진지하게 임하려 했던 마샤와 제레미는 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김이 빠져서였다.
“선생님, 정말 여기서 무슨 놀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이에요?”
“음. 그게…….”
머뭇, 머뭇.
쉬이 떨어지지 않던 대답이 한나의 입술 새로 쥐어짜듯 흘러나왔다.
“정이 들어 버렸어.”
바로 이게 문제였다.
돼지 파티도 하고, 며칠 동안 동네에서 살뜰하게 인사도 나누고, 이래저래 사는 이야기도 듣다 보니 친해져 버렸다.
“그리고 귀엽지 않니? 저 사람들 일도 열심히 하고, 산도 잘 지키고. 은근히 부지런하기도 하다니까.”
심지어 ‘대장’ 소리가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나는 손을 휘휘 흔들며 말했다.
“그래. 나는 사실, 자리 욕심이 있나 봐.”
“무슨…….”
마샤는 한나의 충격 고백에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 권력의 단맛이랄까? 나만 보면 90도로 꺾어지는 인사가 짜릿한 것 같기도 하고……. 우렁찬 인사를 들으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정신 차려요.”
“맨날 신전에서 성수 만들라고 갈리기만 하다가 여기서 대접 받으니…….”
“선생님?”
이미 한나는 마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다.
“제대로 정신줄을 놓은 것 같은데.”
제레미가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도 이런 맛에 길드장이 된 거지?”
“하……?”
“이해해. 이제 알겠어. 권력은 최고야.”
“선생님은 아직 권력이랄 것도 누린 게 없지 않나요. 고작 인사에 그렇게 행복하다고?”
“하……. 나 이러다 제도로 돌아가기 싫어지면 어쩌지.”
한나는 책상 위에 팔꿈치를 붙이고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너희도 나랑 같이 여기서 즐겁게 광석이나 캐면서 살래?”
“이 녀석은 빼고, 둘은 어때요?”
의자에 깊게 묻었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마샤가 물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아직 정신줄을 다 놓으신 건 아니구나.”
아쉽다는 듯, 마샤가 다시 몸을 물렸다. 돌연 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이야.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오늘 주제는 광산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가느냐야.”
거 장난 좀 쳤다고, 사람을 정신줄 놓은 사람으로 만들다니.
한나가 혀를 내둘렀다.
사실 앞에 한 말은 모두 진심이긴 했다. 물론 정말 남을 만큼 완전히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마을이나, 그들에게 정이 조금씩 들어가는 건 사실이었다.
한나는 농담은 이제 끝났다는 듯, 제대로 된 회의를 시작했다.
“마탑에서 승인이 떨어졌으니, 꼬꼬가 산에 남는 것에 대해선, 너는 괜찮아?”
마샤에게 물었다.
“꼬꼬나 저는 찬성이죠. 꼬꼬 입장에선 이득이 많을 테고.”
혼자서 남아 있는 마물을 죽이며 광석을 섭취하는 것으로 꼬꼬에게는 엄청난 득이었다. 어찌 보면 이 상황에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꼬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주인인 마샤도 매한가지.
“제레미가 탐탁지 않은 거 아니에요?”
“딱히. 아직은.”
제레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가져올 수 없는 채굴권이라면, 빠르게 손을 떼는 게 나았다. 포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걸 다른 길드도 가지지 못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또한 후일을 도모하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선생님은 아쉽지 않아요?”
“뭐가?”
“이곳은 금광이나 다른 보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어마어마한 자원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에서 가장 부자가 될 수도 있는데.”
부자.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좋은 말이지.
목숨이 보장된다면 말이다.
“돈보다 중요한 건 목숨이지. 그중에서도 내 목숨.”
“여기까지 뛰어온 걸 보면, 배짱이 두둑한 거 같은데. 참 이중적이네요.”
“내 목표가 확고하니까.”
대답과 동시에 한나가 씩 하고 웃었다.
‘그냥, 나 살고, 너 살고, 쟤 살고, 걔 살리는 거!’
간단하게 핵심만 짚어 보자면 그렇다.
제국이나 대륙의 평화까지는 모르겠고, 일단 우리가 살 수 있는 길.
“우리가 이렇게 사이좋게 모여 있지만, 서로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신전, 마탑, 암흑길드, 서로 동맹할래야 할 수 없는 세력들이니까.
“적어도 조금 손해 보더라도, 서로의 등에 칼 꽂지는 맙시다. 이 말이에요.”
언뜻 장난스럽게 한 말 같았지만, 한나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아시겠죠. 여러분?”
원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그 누구의 속내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한나는 자기 자신조차 믿기 힘들었으니까.
신전이든 어디든, 누군가 다디단 말로 속살거리면 홀랑 넘어가 버릴지 모르는 나약한 팔랑귀니까.
“자 그럼, 광산 경비는 앞으로 꼬꼬가 맡는 걸로 하고, 차라리 여기 있는 내 부하…….”
“완전 부하로 못을 박았네요.”
“아니, 흠흠.”
마샤의 지적에 한나가 헛기침을 했다. 저도 모르게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여기 있던 용병들을 경비 인력으로 취직시키는 게 어떨까 싶어.”
“돈은요?”
“광석을 조금 팔까?”
“그러지 못하게 하려고 지키는 거 아니었어요?”
마샤가 하나 같이 맞는 말을 하자 한나는 기가 죽었다.
“……그렇지.”
“팔 거면 저희 길드에.”
그사이, 하이에나처럼 잽싸게 파고든 것은 제레미였다.
“기각. 못들은 걸로 해.”
한나는 잠시 방향성을 잃을 뻔했지만, 무사히 정신을 차렸다.
“뭘 고민해요.”
“좋은 생각 있어?”
다시 고민에 빠진 순간, 마샤가 대안을 냈다.
“여기, 제국에서 돈 제일 잘 버는 누구 씨가 있는데.”
“누구? 아……. 아? 아!”
눈이 번뜩 뜨이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제국의 검은돈을 갈퀴로 쓸어모은다는 제레미 아니던가.
“좋은 일에 자선사업 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사장님.”
돌변한 한나의 태도에 제레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차라리 채굴권을 파시죠. 선생님이 밟고 다니는 땅을 다 줄 수도 있는데.”
“누굴 바보로 아나…….”
“제가 좋은 일을 하면 두드러기가 일어서요.”
“언제부터 그런 알레르기가 있었니.”
“생겼어요. 방금.”
쫌팽이.
광석을 노리고 있는 제레미에게는 이런 태도가 당연한 거긴 하겠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성수 안 필요하니?”
“돈 주고 사면 되는걸.”
“그러니까 내가 팔게. 그 돈으로 월급 좀 주게.”
그렇다면, 정당하게 딜을 하는 수밖에.
“아. 그거라면 관심이 있어요.”
“어떤 거?”
“선생님의 실패한 성수.”
“아……. 그건 왜?”
차라리 온전히 성공한 성수가 낫지 않나?
실패한 건 폭탄 대신 쓸 만큼 끔찍하게 아픈데.
“고문할 때 유용할 것 같아서.”
“기각. 됐어. 안 팔아. 돌아가.”
한나의 거절에 제레미와 마샤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와 뭔가를 하는 건,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야.”
“그런데 선생님.”
다시 마샤가 입을 열자 한나는 이제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기대도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이미 돈줄이 있잖아요.”
“다시 말하지만, 신전 월급은 빵집에서 탕진되는 수준의 쥐꼬리야.”
“그쪽 말고, 황궁요.”
“황궁?”
“광산도 주는데, 고작 월급을 못 줄까. 차라리 경비 때문이니 병사로 채용해 달라고 하는 건 어때요?”
“병사……?”
그거 공무원 아닌가.
아무나 막 뽑아도 되는 건가.
“그게 가능해?”
“선생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가능을 불가능으로 만드는 거라면 자신 있는데…….
“밑져야 본전 아니에요?”
맞는 소리라는 듯 한나가 입을 벌렸다. 마샤의 말이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음……. 일단 그 문제는 내가 충당하던지 더 생각해 볼게.”
하지만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여러모로 빚진 기분은 썩 좋지 못하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
“또 있어요?”
무슨 회의를 이렇게 길게 하냐며 마샤는 입술을 쭉 뺐고, 제레미는 제 뒷덜미를 주물렀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해.”
“뭔데 그래요.”
“내 가명을 뭘로 할까.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좀 중성적인 이름이 어떨까 싶거든. 들어 봐 봐. 딜란, 카엘, 샤란, 리안, 반, 레…….”
“잠깐만요.”
이름들을 나열하던 와중, 마샤가 말을 끊었다.
“응? 왜? 좀 이상한가? 촌스러워?”
“그게 문제가 아니라, 가명이 왜 필요한데요?”
“생각해 봐. 내 이름을 그대로 썼다가 신전에 알려지면 안 되잖아.”
“……진심이었구나.”
“진심이네.”
“어……. 어?”
결국, 한나의 진심 어린 조직 창설의 꿈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 * *
“루루티!”
“한나 신관님 오셨어요?”
오늘도 루루티는 밝은 얼굴로 한나를 맞아 주었다.
“오늘은 왜 이리 볼이 빨개? 많이 추워?”
“아니에요. 떨어진 낙엽을 쓰느라 찬바람을 조금 많이 맞아서 그런가 봐요.”
루루티는 제 뺨을 문지르며 답했다.
“세상에, 이 작은 손으로 볼이 얼 때까지 낙엽을 쓸다니.”
이건 완전 아동착취로 신고를 해야 한다!
“그치만, 다른 신관님들이 하시면 낙엽을 버리는걸요. 모아서 고구마 구워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요.”
“세상에…….”
맛잘알.
루루티가 그런 군고구마 감성을 알고 있다니.
“그럼 같이 해 먹을까?”
“마침 고구마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아시고.”
루루티는 손으로 단단히 쥐고 있던 자신의 앞치마를 펼쳐 보였다. 안에는 실한 고구마가 들어 있었다.
“최고다! 불은……. 아, 이럴 때 마샤가 있으면 참 좋은데.”
마샤의 쓸모가 고작 장작에 불을 피우는 데에 가장 간절했다는 걸 알면, 그가 뒷덜미를 잡을 일이었다.
“불씨는 저기, 입구에 초가 있어요.”
“그렇지! 역시 신전의 초는 유용하다니까.”
경건하게 마음의 짐을 녹이라는 의미로 신전 곳곳에 놓인 초였다.
솔직히 그런 불명확한 미신보다야, 이렇게 실용적인 쓰임새가 낫지.
“얼른 붙이자! 초는 내가 가져올게!”
한나는 신이 나서 신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번이라도 기도실에 갈 때, 이렇게 가벼운 발걸음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행복한 발걸음이었다.
“호오.”
군고구마가 맛깔나게 익었다.
한나는 뜨거운 고구마를 호호 불어 가며 식힌 뒤, 정교하게 껍질을 벗겼다.
“자, 루루티 이걸로 먹어.”
그리고 그것을 루루티에게 건넸다.
“제가 해도 되는데! 감사해요.”
루루티는 조심스럽게 고구마를 받아들었고, 그녀가 까고 있던 어설프게 까진 고구마는 한나의 손으로 옮겨갔다.
“요즘은 마을이 어떤 것 같아? 아픈 사람들은 많이 줄었지?”
“음……. 마다요. 앗, 뜨!”
루루티는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었다가 뜨거워서 입을 열어 손부채질을 했다.
“천천히 먹어. 입천장 까진다! 자, 여기 우유.”
한나는 초를 가지러 가는 김에 함께 챙겨 온 우유를 건넸다.
“감사…….”
“얼른 입에 불부터 꺼.”
루루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헤……. 뜨거운데 맛있어요.”
행복하게 웃는 루루티의 모습에 한나도 따라 웃었다.
“음, 맞아요. 확실히 요즘은 환자들이 많이 오지 않아요. 마을도 활기차고.”
“다행이네. 독기에 중독된 사람들은 거의 없지?”
“네. 성수도 이제 쓰는 일이 잘 없어요. 어제는 벌에 물린 아저씨 한 분이 오긴 했는데, 하필 물린 곳이 코여서 코가 주먹만 해진 거 있죠.”
“어머, 정말?”
“성수를 조금 썼는데, 없던 콧대가 생겼다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그러더라구요.”
“풋.”
별거 아닌 이야기인데도 루루티와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조금 엉뚱한 얘기들이 끼어 있으면 더 재미있고.
“일이 많이 줄어서 다행이다.”
한동안 어린 루루티가 한참 늦은 저녁에나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었다.
이제는 그런 일은 줄어들겠지.
특히 이 작은 아이가 나쁜 녀석들 때문에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길 바란다.
진심으로.
한나가 사랑을 담은 눈빛으로 루루티를 보고 있는데, 멀리서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이 바로…….”
“글쎄, 부하가 그렇게 많이…….”
“벌써 악명이 자자하던데.”
때마침 기도를 하러 온 동네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하는 말은…….
“마녀라잖아.”
아니나 다를까 그 헛소문이었다.
루루티는 그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나를 보았다.
“신관님이 왜 마녀예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지.”
“전 눈물이 별로 없어서 괜찮아요.”
아니, 그 뜻이 아닌데.
“……뭐, 그렇다면…….”
궁금해서 반짝반짝거리는 눈망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한나는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산에 있는 것이 아주 위험하고 값어치 있는 광석이라는 것과 광산에 올라와 마기에 절여지지 말라고 사람들을 쫓아냈던 일, 어쩌다 보니 성수를 뿌리다 부하가 생긴 일, 정신 차려 보니 헛소문과 함께 대장님이 되어 있던 일까지.
“세상에……!”
모두 들은 루루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나는 내심, 대단하다든가, 멋있다든지, 청렴한 신관의 행동에 대해 찬양하지 않을까 하여 어깨에 힘을 주었다.
“저라면 신관복을 벗고 길드를 차리겠어요.”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벗어났다.
“어, 응?”
“돈이 최고죠!”
……루루티, 자라나는 새싹 같은 친구가 자본주의에 찌들었구나…….
“아니지. 아주 옳은 정신이야.”
“그렇죠?”
“맞아. 루루티, 비록 신관이라도 그 정신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해.”
“헤헤.”
루루티는 대화가 만족스러웠는지, 적당히 잘 식은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통통한 볼이 움직였다.
“그런데, 왜 한나 신관님은 광석으로 돈을 벌지 않아요? 그 광석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던데.”
누구나 궁금해할 질문이었다.
“사실 루루티. 이건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네!”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야. 광석 팔아서 떼돈을 모아서, 저 남쪽에 섬 하나 사서 으리으리한 성도 짓고, 배도 타고 다니고…….”
“그런데요?”
“하. 문제라면, 내가 막상 하면…….”
“하면?”
“너어어어어무 잘할 것 같단 말이야.”
“네에?”
한나의 허세에 루루티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든 잘하는 건 좋은 거 아닌가?
“정말 끝내주는 장사꾼이 될지 몰라. 장사꾼이면 다행이게? 최고 악당이 돼서 막, 광석도 팔고, 친구도 팔고, 신전도 팔고, 그러다 나라도 팔 수가 있다니까?”
“……무슨 소리세요.”
“뭐, 그런 이유야. 나의 잘남을 너무 잘 안달까.”
“…….”
“내가 하면 참 잘하거든.”
루루티는 컵을 들어 우유를 한 모금 삼키고, 다시 고구마를 한입 넣었다.
오물오물, 우물우물.
그렇게 오직 씹는 것에만 집중했다. 마치, 방금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 것처럼.
한나는 그런 루루티를 보며 생각했다.
은근히 단호하고 매정한 아이구나. 루루티.
“농담이야.”
그런 루루티의 행동에 은근한 상처를 받은 한나가 백기를 들었다.
“그쵸? 헤헤, 무슨 이상한 말씀을 하시나 했어요.”
“넌 정말 올곧은 품성이로구나.”
루루티는 아주 바른 사람으로 잘 자랄 것 같다.
“사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아니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진짜는 뭔데요?”
한나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고구마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것에 압도당할 것 같아서. 아주 작게 시작한 욕심이, 점점 불어나서 날 삼킬 게 분명하거든.”
“광석이 삼켜요?”
입도 없는, 무생물이 어떻게 삼킬까, 루루티는 궁금해졌다.
“응. 저걸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랬으니까. 미쳐 버려서 자신의 몸을 갉아먹고, 망가뜨릴 때까지 끝도 없이 욕망에 시달리지. 그게 잡아 먹히는 거야.”
원작 속 많은 인물들의, 혹은 지금도 제도 어디에선가는 일어났고, 일어날 일이다.
그것을 한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흐음……. 위험한 물건이란 말이죠?”
“맞아. 어디 저런 마기 속에서 만들어진 게 정상이겠어?”
한나는 피식 웃으며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
“그럼 한나 신관님은 옳은 길을 가고 계신 거네요.”
“이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어.”
“왜요? 확고한 신념이 있잖아요!”
“내가 구하고 있는 건지, 혹은 망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없거든.”
“어렵네요. 어른들의 세계는.”
루루티가 손에 작게 남은 고구마를 한입에 톡, 털어 넣었다.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없으면, 자기 한 몸이라도 구하는 쪽으로 가세요!”
“응?”
“저희 신관님이 그러셨거든요.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으면, 이 혼란한 시대에 최선을 다한 거라고.”
“그, 아프시던 분?”
“네. 그렇게 말해 놓고 자기 몸을 건사를 못하셔서…….”
“푸웁.”
뒤이어 나온 이야기에 한나는 껄껄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하하, 정말 루루티는 말을 재미있게 해.”
“전 사실만 말하는걸요.”
한나는 어깨까지 떨며 웃다 못해 배를 잡고 있었다.
“다음에 그 신관님 만나면 좋은 말씀 들었다고 전해야겠다.”
“하지만 그분은 항상 옳은 말씀을 하세요.”
한나는 광대가 아프도록 웃으며 고구마를 하나 더 꺼내 정성껏 껍질을 깠다.
“좋은 거 배웠네.”
역시,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
아.
몸 아픈 그 신관님은 나이도 많겠지만 말이다.
* * *
“대장님!”
“아, 안녕하세요. 알베르토.”
“대장님! 제 새로 맞춘 도끼 좀 구경하십시오.”
“이야, 정말 멋지네요. 루첸.”
“저도 새 갑옷 맞췄습니다!”
“와! 광이 엄청 나네요. 완전 은빛 잉어가 따로 없어! 최고예요. 마리오!”
겨우 동네 한 바퀴 도는 것뿐인데…….
어찌나 말을 거는지 과장을 조금 보태면, 세 걸음 이상 더 나아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나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응원을 건네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샤는 신나 보이는 한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선생님, 즐기고 있는 거죠?”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설마 가명도 정했어요?”
“마음에 담아 둔 게 두 개 정도 있긴 한데…….”
“제도에는 돌아갈 생각이 있는 거죠?”
“간다니까 그러네.”
한나는 자꾸만 저를 미심쩍게 보는 마샤를 흘겨보았다.
자꾸 보채니, 이상하게 가기 싫은 기분이랄까.
오늘은 꼬꼬를 산에 풀어 주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너는 꼬꼬랑 오래 헤어져 있어도 별 상관 없는 거야?”
“저야 뭐, 꼬꼬가 아니라도 워낙 강한지라.”
“음…….”
같이 산에서 성수나 던질 때는 딱히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선생님이 사람들 다치는 걸 싫어하니까 그랬던 거예요.”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래?”
“제 실력 의심했잖아요.”
물론 원작에서의 마샤의 마법 실력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을은 불바다로 만들거나, 마물들을 손가락 하나로 찢어 놓았으니.
하지만 역시 사람은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고, 매일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의심이 고개를 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네 기분 탓이야.”
“전 뛰어난 외모만큼이나 실력도 좋답니다.”
“……응.”
뭐라 대꾸하기도 힘들다.
저 왕자병.
그렇게 마샤의 자기애 넘치는 본인 자랑을 듣다 보니, 산 중턱까지는 금방이었다.
툭.
마샤는 광산 근처에 다다르자 목걸이를 풀어냈다. 이제는 익숙해진 검은 연기가 몰아쳤다.
이놈의 연기 이펙트는 좀 없앨 수 없나!
보나마나 마샤 저 녀석의 멋부림을 위한 장치일 것 같은데!
“안녕, 꼬꼬.”
[그르륵.]
오늘도 기운 넘치는 듯한 꼬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톱, 발톱 조심해 줘.”
꼬꼬가 다가올 때마다 한나는 불안했다.
“우리가 하는 얘기 혹시 다 들었니?”
[그륵!]
들었다는 거야, 아니란 거야.
마샤를 바라보자, 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럼, 꼬꼬! 잘 부탁해! 여기 오는 사람들 무섭게 쫓아 버리고, 나쁜 마물들 보면 한입에 꿀꺽 해 버려!”
[그륵! 그륵!]
마치 맞장구를 치듯 꼬꼬가 답했다.
“그럼 어디, 머리 좀 쓰다듬어 보자.”
특히 붉게 반짝거리는 저 뿔이 참으로 만져 보고 싶었었다.
[그르르륵.]
꼬꼬는 기분이 좋은 듯 얼굴을 한나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뿔 찔린다!”
과거의 어느 날, 이런 대사를 똑같이 했던 것 같은데.
꼬꼬는 얼굴을 옆으로 틀어 한나의 손에 제 머리를 비볐다. 덩치는 정말 산만 하면서, 하는 짓은 어릴 적 그대로였다.
“귀엽긴…….”
괜히 또, 이 꼬맹이(?)를 두고 가기 걱정스러워지게 말이다.
* * *
북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꼬꼬는 산을 지키고, 용병들은 광산을 지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들과 꼬꼬의 안면을 트게 하는 일은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 꼬꼬가 자꾸만 입을 벌려 대는 통에 진땀을 빼야 했다.
그나마 이제는 제법 친해져서 먹으려는 일은 없어졌다. 아무래도 마샤는 꼬꼬에게 모종의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 같았는데, 일부러 한나가 고생하는 꼴을 보며 즐기고 싶어서 그 방법을 뒤늦게 쓴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결말은 해피엔딩.
이제 한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과 신전에 인사를 하고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심 황궁에서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특히 신전에서 의심을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와. 이게 얼마 만의 황궁이야.”
“저는 외부 일정이 있어요.”
제레미는 황궁 앞에 무사히 도착하자마자 일이 있다며 가려고 했다.
“아, 응. 황궁으로 돌아오는 거야?”
“글쎄요. 광산 건을 조율하던 중에 떠나서 마무리가 안 됐으니 아마 한 번은 더 오겠죠.”
“마샤, 너는…….”
“전 황궁 보수 작업.”
마샤는 걱정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빠르게 각자 일을 봅시다.”
한나가 앞장서서 황궁으로 향했고, 제레미는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마샤는 한나의 뒤를 따랐다.
“난 폐하를 먼저 봬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전 쉴래요.”
“같이 안 가고?”
“그 얼굴 봐서 뭐해.”
“어째 너흰 서로 좀 매정한 구석이 있다?”
마샤는 대꾸 대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실 북부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생을 많이 한 것은 마샤였다.
마법은 여러모로 편리했고, 쓰임이 많아서 자주 부려먹었기 때문이었다. 불 좀 피워라, 방 좀 따뜻하게 해라, 세탁이 귀찮으니 마법으로 좀 해 달라, 그런 자잘한 일들.
양심이 있으니 푹 쉬게 하는 게 맞지.
암 그렇고말고, 한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푹 쉬어. 수고했어.”
마샤의 얼굴은 확실히 처음보다는 많이 피곤해 보이긴 했다.
전에는 얼굴에 물광이 자르르, 흘렀다면 지금은 조금 기운이 빠져서 어딘지 착 가라앉은 모습…….
이 전의 방방거리던 모습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여튼, 마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한나는 곧장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끽해야 2주도 안 됐는데 꼭 오래 자리를 비웠던 것 같은 기분이다. 애초에 제집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이었던가.”
아직 황궁 지리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떠났던 터라 한나는 길이 무척 헷갈렸다. 정문 앞 정원을 조금 헤매다 익숙한 문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 * *
“그럼 이 건은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이안의 보좌관 알렉스는 결재된 서류 더미를 책상에서 들어 올렸다.
“여기.”
그리고 새로운 서류 더미를 책상 위로 올렸다.
“이것까지는 중요한 사안이라 따로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알렉스가 말한 문서에는 붉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이안은 그것을 스르륵, 넘기며 훑어보았다.
“이 황궁에서 무엇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고작 도장을 찍는 작고 가벼운 선택들이 많은 것을 바꾸고 있었다.
자신만으로 황궁에는 파란과 같은 존재인데, 작은 행동에도 물결이 일고, 파도가 치는 것은 당연지사.
이안은 조금 지친 상태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폐하, 계신가요?”
피곤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알렉스는 챙겨 둔 서류를 들고 문으로 향했다.
끼긱―
커다란 문이 열리고, 알렉스는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폐하!”
문이 닫히고, 명랑하고 격의 없는 인사에 이안은 그저 웃었다.
“어서 와요.”
“그동안 어디 아팠어요?”
한나가 이안의 핼쑥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 혹여 자신이 없는 동안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해야 오래 봐줄 거죠?”
“참 나.”
한나는 이안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오늘은 해 줄 얘기가 많아서 오래 괴롭힐 생각이었답니다.”
“앉아요.”
자연스럽게 이안이 자리를 권했고, 한나는 쪼르르 소파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안이었다.
“소문 들었어요.”
“네? 소, 소문? 무슨?”
갑자기 불안했다.
“북부의 마녀는 분홍 머리를 가지고 있군요.”
아. 설마 했더니.
정말로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나가 우려했던 그대로였다.
“소문처럼 음습한 외향은 아닌데.”
“…….”
이안의 말에 순간 한나는 말을 잃었다.
그런 소문도 돌았나.
그래도 행색은 잘 다녔던 것 같은데.
옷도 밝은색으로 늘 챙겨입었고.
왜 음습하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듣기로는 손속이 그렇게 사납다면서요.”
손찌검하고 다닌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뭐 성수는 조금 던지고 다니긴 했다만.
“발아래에 꿇린 장정들이 마을 끝에서 끝까지 줄을 세워도…….”
“놀리지 마.”
자랑은 하기도 전에 창피한 얘기만 줄줄이었다. 한나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왠지 모르게 낯이 뜨거웠다.
“무슨 일을 하고 다녔길래 악명까지 높아진 거예요?”
한나는 몰랐겠지만, 황궁에서 이안은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하는 게 아쉬웠었다.
“뭘 하긴……. 광산 좀 지키고, 마기에 중독된 사람들 정화 좀 시키고, 악당들 교화시켜 바른 길로 이끌고……. 뭐 그런 일 한 것 같은데.”
“재미있었어요?”
맞은편에 앉은 이안이 곱게 눈을 접으며 물었다.
“재미있자고 간 거 아니거든.”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지지 않는 이안의 말에 한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아니라고 할 수 없어서 더 자존심 상했다.
왜 북부의 고생길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된 것 같지.
불과 하루 만에 말이다.
“오해이십니다.”
“방금까진 말을 놓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오해세요. 착각.”
“하여간 멋대로.”
이안은 핀잔을 하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일랑 없었다. 한나 역시 이안이 자신의 말투에는 하등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깨우쳤다.
“북부 얘기해 줘요.”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뭘요.”
“선생님 입으로 듣고 싶어요.”
“제 말재주가 변변찮은데.”
“그것마저 재미있으니까요.”
정말, 이 여우 같은 녀석은 말로 이길 수가 없었다.
하기야, 원래도 똑똑한 이안인데 말로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그럼 잘 들어 봐. 북부에 도착한 날부터 얼마나 긴장감이 넘쳤는지.”
한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안은 이렇게 소모되는 시간 때문에 등 뒤로 높게 쌓인 서류들을 안고 밤잠을 포기하게 생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긴 이야기를 끊을 생각은 없었다.
붉은 노을을 만들던 해가 어둠에 잠식될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원한다면.
* * *
“돌아온 기념으로 우리끼리 자축하죠.”
마샤는 왼손엔 포도주 병을, 오른손엔 투명한 잔 두 개를 짤랑짤랑 흔들었다.
“뭘 축하할 게 있다고.”
“무사히 돌아온 자체로 축하할 일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넌 돌아온 게 아니라 떠나온 거 아니야?”
마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거기가 완전 고향이잖아. 북부라면 좋아 죽으면서.”
한나의 말에 마샤가 빙그레 웃으며 잔을 창가의 깊은 창틀에 올렸다.
“제 고향은 선생님 있는 곳이죠.”
“고향이 원래 그렇게 유동적인 거였니.”
“그런 게 뭐 중요해요. 우리는 이 달콤한 음료나 맛보죠.”
마샤는 익숙하게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북부에 혼자 있는 꼬꼬 걱정은 안 돼?”
“안주가 일 얘기라니, 제가 더 좋은 걸 챙겨 왔어요. 기다려 봐요.”
마샤는 제 품에서 종이봉투에 담긴 육포를 꺼내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샤가 이렇게 커서 자신과 함께 술도 마시고, 일 얘기도 하고 있다니.
심지어 안주도 알뜰하게 잘 챙기다니.
“잘 자랐구나.”
한나가 중얼거렸다.
아주, 잘 자랐어. 육포라니. 육포 센스는 아무나 낼 수 없지.
“자자, 들어요.”
마샤가 한나의 손안에 포도주가 담긴 잔을 쥐여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먹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여기 복도야.”
한나는 자신이 서 있는 복도를 슥 둘러보며 말했다. 엉덩이를 붙일 곳이라곤 창틀이 고작이었다.
“눈앞에 정원이 펼쳐져 있는데, 복도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마샤는 창문틀에 걸터앉았다. 그의 붉은 제복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너도 참……. 특이해.”
한나의 말에 마샤가 픽하고 웃었다.
복도가 아니라 산 한복판에서 먹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마샤에게 장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은 그를 더없이 만족스럽게 했다.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술이면 재미없잖아요.”
“그래. 넌 재미있게 살아 좋아 보인다.”
한나는 웃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넘겼다.
서서 마시는 술이 불편하지 않았다.
함께 있는 사람이 편해서일까.
“그래. 이런 날도 나쁘진 않지.”
술에 취하고, 흥겨울 이유로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날, 그런 순간.
“어디 우리 마샤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볼까.”
“이런, 술을 가지고 겨루는 건 아름답지 못해요.”
“음, 약한 소리 하는 걸 보니 별로 못 하는구나?”
한나가 짓궂게 눈을 찡그리자 마샤는 빤히 보이는 도발을 알면서도 넘어가 주기로 했다.
“술수 쓰기 없기에요.”
“술수라니?”
“몰래 뒤에서 해독 같은 거 하면 안 돼요.”
“푸핫. 누가 성력을 고작 그런 일에 써.”
―라고 웃어넘겼지만, 한나는 사실 정곡을 찔려 당황했다.
녀석, 눈치만 빨라서.
숙취에는 성수가 직빵인데!
“그럼, 건배?”
한나는 잔을 부딪혀 오는 마샤의 행동에 미소로 답했다.
“선생님. 벌써 취한 거예요?”
마샤가 한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진 쫑알쫑알 떠들던 한나가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니죠?”
한 병을 비운 지는 오래, 새로운 술병이 두어 개 더 구를 즈음이었다.
“선생님……?”
“……자아긴, 누가 잔다고! 딸꾹!”
“이런. 완전 취했네.”
마샤 역시 취기가 올라 얼굴이 불그스름했지만, 한나 정도는 아니었다.
“으어……. 마샤. 아이고, 우리 예쁜 마샤.”
“단단히 취했군.”
마샤는 취한 한나의 모습에 푸슬푸슬 웃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귀여워요?”
“으어? 무슨 소리야, 귀엽긴 네가 더 귀엽지!”
한나는 품에 안고 있던 술병에서 양손을 떼어 냈다.
“어. 병 떨어져요.”
마샤가 빠르게 몸을 숙여 굴러떨어지는 술병을 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한나는 병이 떨어질 뻔했다는 것도 모른 채 마샤의 양 뺨을 손으로 턱, 하고 잡았다.
졸지에 마샤는 한나의 손에 의해 붕어 입술이 되었다.
“슨승님…….”
마샤는 손에 들린 병 때문에 한나의 손을 떼어 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세상에, 어쩜 어쩜 이렇게 고울까. 여전히 예쁘잖아. 마샤.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나.”
“별빛이 밝아서…….”
“음, 아냐. 이건 그런 거야. 후광! 미인의 광채!”
“고마운 칭찬이긴 한데…….”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마샤는 코앞에 들어선 한나의 얼굴에 귀까지 뜨거워졌다. 내뱉는 숨마다 달큰한 포도향이 풍겼다. 여태 멀쩡했던 정신이 아득하게 취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구오구, 우리 마샤. 장한 마샤. 선생님 말도 잘 듣는 마샤. 아이고 예뻐라.”
“네. 네. 알겠으니까, 손 좀…….”
“장한 내 새끼!”
쪽.
달큰한 향이 입술을 스쳤다. 한나의 얼굴이 다가와 마샤의 입술에 꾹 도장을 찍은 것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말 많던 마샤의 입이 얼어붙었다. 입뿐이랴. 온몸이 다 굳었다.
툭.
데굴데굴…….
마샤가 기껏 잡고 있던 술병이 복도 바닥을 굴렀다.
“으악! 아까운 술이!”
술병 입구에서 줄줄 흐르는 붉은 액체를 보고 한나가 창틀에서 폴짝 뛰어내려 병을 집었다.
“흐엉……. 술이, 술이 빠져나갔어.”
다시 병을 품에 꼬옥 끌어안은 채로 한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
마샤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흐어어엉.”
서럽게 우는 한나와 눈만 끔뻑거리며 뇌가 굳어 버린 마샤.
“이게 무슨 꼴일까.”
그리고 때마침 그 광경을 목격한 이안.
“이아아아안!”
쪼그려 앉아 있던 한나가 벌떡 일어나 복도 저편에 있는 이안에게 달려갔다. 물론 술에 취해 있어 비틀비틀하고, 느릿느릿한 발걸음이었다.
“우리 이안 왔네!”
“…….”
이안은 한나에게 풍기는 술냄새에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의 시선이 창틀, 마샤의 옆에 즐비한 술병으로 잠시 옮겨갔다 이내 한나에게 돌아왔다.
“무슨 술을 이렇게…….”
“축하! 무사 귀환 축하주를 하고 있었지! 이안, 너도 거들어! 여기 술이…….”
한나는 자신의 품속 술병을 번쩍, 눈앞에 들었다가 다시 우울해했다.
“……술이 있었는데에……. 있었는데……. 바닥에……. 저기, 바닥에…….”
“선생님.”
“술이 죽어 버렸어.”
“네?”
“얘가, 피를 다 토하고, 죽어 버렸다구우.”
맙소사.
이안은 이 우습고 난감한 상황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저 친구는, 왜 저러고 있어요?”
“으응?”
이안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 있는 마샤를 눈짓했고, 그를 등지고 있던 한나의 몸이 휙 돌아갔다.
“어라, 마샤가 왜 저러지.”
마샤는 그 순간,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났다.
자신을 이렇게 얼어붙게 만든 핵폭탄이 누군데.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나 기울이고 있단 말인가!
“……책임져요.”
“으응?”
마샤가 창틀에서 가벼운 몸짓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제 입을 틀어막은 채로 복도 반대편으로 달렸다.
“마샤?”
멀어지는 마샤의 뒷모습.
“마샤가 왜 셋이지.”
한나의 시야에 마샤의 뛰어가는 모습이 셋으로 나누어졌다.
“어어……. 예쁜 마샤가 셋……. 셋이면 더 좋은 건가. 마샤는 좋으니까, 많으면 더 좋지.”
한나는 여전히 취해 있었다. 즐겁게 제자리를 빙 도는 한나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으앗! 바닥이 다가와!”
한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이안이 그녀의 허리를 받들었다.
“……이것 참.”
이안의 귀한 무릎이 바닥에 찧어 찌르르 고통을 호소했다. 필시 내일은 멍이 들 것이었다.
“으허허허,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너도 그래?”
“내가 누군지는 알고 말하는 거예요?”
이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업혀요.”
“으……. 나 여기가 딱 좋아.”
아무데서나 잘 자던 버릇이 스멀스멀 튀어나왔다.
“안고 가야겠어요?”
“네가 힘이 어디 있다고오……. 아직 어린이가아…….”
한나는 허우적거리며 손을 가로저었다. 그런 한나를 물끄러미 보던 이안은 더 이상 회유하기를 포기하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폐하.”
소리소문없이 그를 멀리서 지키던 호위 기사가 단번에 뛰어왔지만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이나 열어 주면 좋겠군.”
이안은 멀지 않은 한나의 방문을 눈짓했고, 호위 기사는 빠르게 뛰어가 방문을 열었다.
“날아간다. 날아가고 있어어……. 보여?”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날고 있다고 기뻐하는 한나의 모습에 이안은 실소를 내뱉어야 했다.
“술은 다시는 안 먹는 게 좋겠군요.”
“아아, 내가 워언래는 이러케 취하는 사람이 아닌데에~”
“네.”
그러시겠죠, 라며 이안은 성큼성큼 방으로 향했다.
“아고, 이안, 취했어? 오늘은 혈색이 좋은데.”
한나가 이안의 볼을 조몰락거렸다. 그러자 이안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그 모습을 발견한 호위 기사의 동공이 확장됐다.
“선생님 걱정돼서 왔구나! 귀여워.”
이안에게 이런 취급은 열 네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 황제 폐하, 얼굴이 굳었쩌! 아이코, 무서워라!”
“선생님, 지금 후회할 일 만들고 있어요.”
이안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으음, 기분 좋은 날이니까 화내지 말어.”
“마샤 때문에요?”
무심코 이안이 물었다.
비단 볼 때문이 아니라, 기분 좋은 이유가 마샤 때문이라면, 조금은 화가 날지도.
“아니이……. 그것만은 아니고오, 너도 잘 있고, 마샤도, 제레미도……. 음……. 또…….”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던 한나의 눈이 스르륵 감겨들었다. 그녀의 머리가 이안의 팔에 톡, 부딪혔다.
“정말 술은 안 되겠네.”
어느새 새근새근 잠자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수도 없이 뻗어 버린 것이었다. 이안은 한나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침대가 출렁이고, 한나는 몇 차례 몸을 뒤척였다. 이안은 이불을 당겨 그녀의 몸 위로 살포시 덮었다.
“…….”
그는 우두커니 서서 한나를 살폈다.
움찔거리는 눈꺼풀, 간헐적으로 내뱉는 숨소리, 달달하고 진득한 알코올 향, 이불에 부대끼며 사부작거리는 소리까지.
모든 것들이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묘한 분위기에 이안은 서둘러 방을 나서기로 했다.
“잘 자요.”
그러곤 아직 심지가 살아 있는 초의 불을 껐다.
어둠이 내려앉고, 이안은 가벼운 발걸음조차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 * *
숙취란 무엇인가.
“으…….”
모름지기 속이 쓰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육체적 고통만이 숙취는 아니었다.
“뭔가 자꾸 아른거려.”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한 상태도 숙취의 한 종류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상하게 자꾸 말도 안 되는 환영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입술에 주둥이를 갖다 댔다거나, 머리가 깨질 뻔했다거나, 볼을 마구 꼬집고 흔들었다거나…….
“뭔가 헛소리를 한 건 틀림 없어.”
차라리 기억이 안 날 거라면, 아주 싹 잊힐 것이지.
이렇게 드문드문 수치스러운 행동만 떠오르는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한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냐. 어쩌면 더 많은 수치스러운 일을 했는데 그중 일부만 기억하는 걸 수도 있어.”
아주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마샤가 얼마나 취했었지. 설마 그 녀석은 다 기억하는 건가.”
잊으려면 같이 잊어야지!
그래야 맞는 거지! 같이 마셨는데!
한나는 자신이 취한 뒤로 마샤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혼자 둘러 마신 술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상을 부려 봐야 얼마나 부렸겠어. 그냥 꼰대처럼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나 했겠지.”
사실 한나는 보기보다 평소 자신의 행동에 객관화가 잘되어 있었다.
“그래. 마샤도 다 큰 성인인데, 술주정 정도는 이해해 줄 거야.”
한나는 몸에 찌든 것 같은 알코올 냄새를 빼기 위해 열심히 몸을 씻고 나왔다. 몸에 수분이 다 빠진 것처럼 탈수증이 온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주전자로 향했다.
이미 눈 뜨자마자 주전자째로 벌컥벌컥 물을 마신 바람에 텅 비어 있었다. 시원한 물 한잔에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 가자. 그래, 일단 먹어야 힘이 나지.”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벽에 붙어사는 이끼처럼 황궁 복도 벽에 의지해 식당까지 향했다.
“한나.”
“피……. 핀체프.”
한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너 꼴이 왜 이래? 누구랑 싸웠어?”
보통 사람이 이렇게 기운이 없으면, 어디 아프냐, 감기에 걸렸냐, 컨디션이 좋지 않느냐, 등등의 질문을 던지는 게 정상 아니었던가.
역시 핀체프라는 생각에 한나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내가 무슨 싸우고만 다니는 사람이니.”
“난 또, 어디 마물이라도 때려잡고 온 줄.”
“걱정 고맙다.”
더 싸울 기력도 없었다.
“그렇게 동료가 걱정되면, 물이나 좀 떠 와 줄래.”
“윽, 너 술 마셨어?”
“……어어.”
한나의 근처로 다가오던 핀체프가 아직도 스며 있는 술냄새에 뒷걸음질 쳤다.
“무슨 돌아오자마자 술을 그렇게……. 가서 앉아서 기다려.”
핀체프는 한나가 자리에 앉는, 아니 정확히는 풀썩 널브러지는 모습을 보고 물을 가지러 갔다.
“흐어…….”
한나는 식탁에 엎드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았다.
자신만 빼고 다들 쌩쌩하니, 행복해 보였다.
“역시 웬수야……. 웬수.”
술이든, 마샤든.
그때, 한나의 시야에 방긋, 웃고 있는 마샤의 얼굴이 들어왔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인 마샤가 입을 열었다.
“안녕, 선생님.”
엎드려 있던 한나가 벌떡 일어났다.
“마샤!”
그러곤 크게 외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샤는 생각만 해도 나타나는구나.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좋은 아침이죠?”
마샤는 숙취 따위 없다는 듯, 뽀송뽀송 윤기 흐르는 얼굴이었다.
“……그, 그러게.”
“아주 죽을 것 같진 않은가 보네요. 이렇게 밥도 먹으러 나오고.”
“하하하.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맞아요. 잘 먹어야죠.”
마샤는 한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긴 다리가 척, 하고 꼬아져 올라갔다. 한나의 시선이 불안하게 방황했다.
“그래야, 예쁜 남편도 부양하고, 그러죠.”
“그렇지. 그래야 부양……. 남……. 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한나의 고개가 삐그덕거리며 마샤에게 향했다.
“뭐, 뭔 편?”
“남. 편.”
“예?”
“예는 무슨 예에요. 책임져야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한나의 뇌에는 과부화가 오고 있었다.
갑자기, 뭘, 책임진단 말인가?
“저요?”
“네. 선생님요.”
“내가 누굴?”
동그랗게 뜬 눈을 끔벅거리는 한나를 보는 마샤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저.”
마샤는 혹시라도 잘못 들었다는 말이 쏙 들어가도록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책임질 일을 하셨으니, 책임지라구요.”
“……내가 뭘 했어?”
갑자기 한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훔쳐가셨잖아요.”
“내가……. 도벽이 있었나? 뭘 훔쳤는데? 돌려줄게. 잠시만 어제 입었던 옷이…….”
한나가 고개를 숙여 제 옷차림을 살폈다.
마샤의 마법석이라도 홀랑 훔친 걸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줬겠죠. 그거 말고.”
“말고……. 뭐, 뭐?”
땅문서? 집문서? 기밀문서?
“제 입술.”
“…….”
순간 한나는 말문이 막혔다.
입에 꿀을 발랐나.
왜 떨어지질 않는 거지.
“그래서, 기억은 나요?”
마샤의 물음에 한나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양손을 들어 분홍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차라리 기억이 한 톨도 안 난다면 나으련만.
기억이 났다.
그것도 점점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오구오구, 예쁜 마샤!’
대충 이런 말을 하며 주둥이를 들이밀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오해야.”
“오해라기엔 이렇게 산증인이 있는데.”
마샤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상체를 식탁에 기대며 다가왔다.
“사고, 그래. 사고지.”
“사고, 좋죠. 혼인신고도 사고처럼 찍으면 되겠다.”
“아니, 야! 넌 무슨 애가!”
한나는 펄쩍 뛰었다.
“세상에 입술 한번 부딪혔다고 다 혼인신고서에 도장 쾅쾅 찍으면 누구는 남편이 열댓 명은 되겠다!”
“흐음. 선생님은요?”
한나는 멈칫했다. 마샤의 물음에 즉각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잠깐, 이건 자신의 첫 키스인가.
기억을 더듬어야 할 정도로 몇 안 되는 기억을 쥐어짜 냈다.
“나 역시, 그런 식이라면 넌 내 몇 번째 남편일지 모른단다.”
“오……. 그래요?”
“그럼. 그럼.”
“그럼 전 몇 번째 남편으로 하면 되는데요?”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이 사람아.”
말이 안 통했다.
“하, 정말 제가 아까운 결혼이지만 선생님이라면 흔쾌히 허락할게요.”
기가 막혔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정은 있으니까.”
“……누가 보면 내가 프러포즈라도 한 줄 알겠다.”
“설마, 먹고 튀는 거예요?”
“단어 선택에 조금만 신중해 줄 수 있겠니.”
먹고 튀다니! 먹튀라니!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말이었다.
툭.
째쟁, 쨍.
요란스러운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구르는 것은 핀체프가 들고 오던 물이 담긴 컵이었다.
놀란 한나의 시선이 핀체프에게 돌아갔다. 핀체프와 시선이 얽혔다.
“너…….”
핀체프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너는 왜 그러는데?
“잠깐만. 핀체프 넌 왜……. 야, 야!”
핀체프는 마샤를 힐끗, 보더니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곤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스스슥, 멀어졌다.
“어디 가! 제대로 듣고 가!”
한나가 손을 뻗으며 핀체프의 오해(?)를 풀고자 했으나, 그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맙소사. 또 동네방네 소문나겠네.”
한나는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망했다. 저 촉새가 얼마나 이 재미있는(?) 얘기를 뿌리고 다닐지 눈에 선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한나는 뒤늦게라도 마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말……. 말을 좀, 조심하라고.”
“사실만 말하고 있는데.”
“그건 사고야! 피치 못 할 사고!”
“왜 그런 사고가 났죠?”
“네가 우쭈쭈! 귀여워서 그런 거지! 충동적인! 귀여운 강아지나 아기 보면 절로 쪽쪽거리는, 그런 거 몰라?”
“그럼, 범죄였어요?”
맙소사.
이건 또 무슨 말이냐고.
“시간을 줘. 제국 법 좀 공부하고 오게. 여기, 변호사는 있니?”
“우리 사이에 뭘 또 법까지.”
“그래. 말 잘했어. 네가 말하는 우리 사이 좀 짚고 넘어가자.”
“마음껏 짚어 봐요.”
마샤는 허리를 곧게 펴고 바로 앉았다. 정말 협상이라도 하려는 모양새였다.
“솔직히 10년 전을 생각해 봐. 내가 귀엽다고 뽀뽀 좀 한다고 해서 네가 인생을 책임지라는 소리를 했겠어?”
“세월이 변하고, 강산도 바뀌었는데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건지.”
“강산도 바뀌었는데 너의 마인드는 왜 한 세기도 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
“선생님. 이렇게 책임감 없는 분인 줄은 몰랐네요.”
실망했다는 기색이 뚝뚝 떨어지는 식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한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한나는 이내 마샤가 자신을 놀리려 한다고 판단했다. 늘 장난스러운 마샤이니, 충분히 그럴 법한 추측이었다. 더 당황하면, 놀림거리가 될 뿐이다.
“너와 나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것 같다. 법원에 접수하면 말해 줘. 출석할 준비할게.”
“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응. 이렇게 나갈 거야. 여기, 식당도 나갈 거야.”
“왜요. 제가 어디가 부족해요.”
마샤는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어디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럴 사이가 아니지. 너랑, 나. 딱! 느낌 오지 않아?”
“글쎄요.”
“우리 사이에 오고 간 그……. 음, 뭐랄까. 감정이라는 게 없잖아.”
“감정. 감정이라.”
마샤는 눈을 내리깔고 제 턱을 쓸었다.
얘는 놀리다 막혔다고 뭘 또 이리 진지하게 고민을 한담.
한나는 그런 마샤의 진지한 모습이 조금 웃겼다.
“그래. 서로 사랑하고, 애틋하고, 붙어 있고 싶고, 그럴 때 하는 거지. 결혼은. 애초에 연애도 안 했는데, 무슨 결혼이야.”
호호호,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는 한나의 모습은 방금까지 그녀를 당황스럽게 하던 마샤와 상황이 역전된 듯 보였다.
“그럼, 선생님이 말하는 그 감정, 이제라도 주고받아 봐요.”
잠시 고민하던 마샤가 내놓은 답에 한나는 의아해졌다.
“응?”
“잘 주고받아 보자고요. 감정인지, 뭔지.”
“…….”
맙소사.
신님, 거기 하늘에서 보고 계신가요?
이 자식이 미쳤어요.
고작 입술 한번 겹쳤다고 폭주했다고요.
“……참 진취적인 친구였네.”
“고백은 어떤 게 좋아요. 촛불을 깔까요, 반지를 준비할까요, 아니면 자연스럽게?”
“응. 다 필요 없어.”
“단호하셔라.”
마샤는 한나에게 바짝 다가가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반짝반짝 미소를 시전했다.
“왜, 왜 그렇게 다가오니.”
“많이 보라고요.”
“뭘.”
“내 잘난 얼굴.”
“……왜?”
자신의 외모에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 모습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다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이게 제 경쟁력이라.”
“……술에 뭘 넣은 거야.”
단단히 미쳤군.
한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 * *
오랜만의 치료 시간이었다.
딱히 치료할 구석은 없어 보이지만, 일단 황궁에 들어온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이안과의 치료 시간이 시작되었다.
“얼굴빛이 안 좋네요.”
“그렇게 다 티가 나나.”
다들 낯빛을 걱정할 만큼 한나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지금은 혼이 나가 있기도 했다.
“술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이안은 멀쩡한 자리에 앉지 않고 한나의 바로 앞, 테이블에 엉덩이를 기댔다. 안 그래도 큰 키인데, 꼼짝없이 올려다보아야 할 높이였다.
“책임질 일이 생겨서.”
“책임? 일이에요?”
“아니. 부양…… 이랄까.”
한나의 말에 이안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했다.
“부양……. 부양이라. 선생님이 부양할 가족이 있었던가요.”
“그러니까 말이야. 술 먹고 막 남의 얼굴 만지고 그러면 없던 부양가족이 생길 수도 있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자 이안이 느릿하게 답했다.
“많은 얼굴을 만졌나 보네.”
“만지기만 하면 다행이게. 이 주둥이도 갖다 대서 문제지.”
“입을요?”
“응.”
그 상황이 생각나서 한나는 양손으로 제 이마를 때렸다. 분홍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반동했다.
“마샤에게?”
“어떻게 알았어?”
한나의 눈이 커졌다. 대상이 마샤라는 걸 이안이 어떻게 단박에 알아차린 건지.
“기억이 안 나나 보네요.”
“어?”
또. 뭐. 왜.
왜 불안하게 하는 건데.
또 잊은 게 있던가!
“얼굴 주무른 남자가 마샤 하나는 아닌데.”
“……나 설마 다른 사람한테도……?”
“네.”
“그게 너?”
“정확하네요.”
이제 한나는 헉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마른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내, 내…… 내, 내가 실수한 건 없나요. 폐하.”
지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야무지게 꼬집고 늘렸던 말랑했던 모찌모찌 볼이 이안은 아니길.
“아주 진득하게 만졌죠.”
“……어떤 의미로?”
“이렇게 하나도 기억을 못 해서야. 제 품에 안겨서 침대까지 간 것도 모르겠네요.”
맙소사.
그냥 어디로 도피하자.
술 한 번에 무슨 흑역사를 이렇게 알뜰살뜰하게 켜켜이 쌓아 올린 건지.
“내가 뭐 책임질 일은 안 했지?”
한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마샤에게처럼 입술 도장 찍은 건 아니겠지.
이중계약이야 뭐야.
“그러게요. 그건 또 마샤에게만 하네.”
그런 한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이제 보니, 저 표정은 좋지 못한 징조로구나.
“그래서 입술은 그렇다 치고, 왜 부양까지 가는 거죠. 내가 모르는 다른 얘기도 있는 건가?”
“없어. 그냥 마샤가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더라고. 아주 오늘 붙들려서 날짜까지 잡을 뻔했어.”
이안은 말없이 한나는 내려다보다 물었다.
“왜 한 거예요?”
“응?”
“왜 선생님이 입 맞춘 건지 묻는 거예요. 넘어지다 입이 부딪혔다는 그런 변명은 애초에 넣어 두고요.”
이 녀석 눈치만 빨라서는.
대충 둘러대려 했는데, 기가 막히게 차단당했다.
“그런 거 없어. 그냥 사고야. 취한 사람이 실수한 거지. 아직도 그때 그 시절 어린 모습으로 보여서 귀여워서 그랬어. 어떡하겠어. 이건 막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라고!”
“음…….”
이안의 눈초리가 다소 날카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왜……?”
그 모습이 왜 이리 긴장감을 자아내는지.
“저도 그래요?”
“어?”
이안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점점 얼굴이 가까워졌다.
“선생님 눈에 저도 열 살 그 어린애인가요.”
이안이 그리 말했지만, 선뜻 한나는 그렇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면, 이안은 10살 그때도 조금 어려운 축에 속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하기 어려우니…….
어찌 보면 10살 그때랑 비슷한 게 맞는 것 같았다.
“뭐, 변함없긴 하지.”
이안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그렇군요.”
이안은 웃고 있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하여튼, 마샤는 나 놀리고 펄쩍 뛰는 반응 즐기는 것뿐이야.”
한나의 말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두고 보면 알 일이겠죠.”
“그나저나 내가……. 흠, 혹시 뭐 더 실수한 건 없는 거지?”
이미 황제 폐하의 볼을 꼬집고 늘린 것부터 지하감옥에 넣어질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안이 개의치 않는 것 같으니 조용히, 이대로 은근슬쩍 넘어가야지.
“실수…….”
아니. 왜 갑자기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데!
바로 없다고 해 주셔야죠. 이봐요.
“글쎄요.”
의미심장한 미소에 한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
뭔가 실수했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 아냐. 말하지 마……. 하지 마. 그냥 다 잊어 주세요. 제가 죄송해요.”
“뭘 했는지 묻지도 않고?”
“뭐든 그냥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회피 성향이 있으셨던가.”
“어서 앉으세요. 치료나 시작하죠.”
한나는 공손히 양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이안은 바람 빠지는 웃음과 함께 자리를 이동했다.
“어디 안 좋은 곳은 없으시죠?”
갑자기 존대로 변한 칼같은 선 긋기에 이안은 연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무릎이 많이 아파요.”
“무릎요?”
“네. 어제의 작은 사고 때문에 아주 멍이 들었어요.”
“……작은 사고?”
이상하기도 하지.
왜 꼭 저를 향한 말인 것 같을까.
그것도 하필 어제라니 더더욱.
“네.”
“호, 혹시 무엇 때문에……?”
이안은 싱긋, 눈매를 곱게 접었다.
“선생님 때문에요.”
쿵.
심장이 떨어진다.
우수수 떨어진다.
저 멀리 서 있는 호위 기사들의 시선이 오늘따라 따가웠던 이유는 이것이었나.
“……제가…….”
무슨 짓을 했냐고 묻기엔 오늘은 더 이상 업보를 감내할 여유가 없었다.
“잘 치료해드리죠!”
한나는 이유를 묻는 대신, 내 똥은 내가 치운다는 심정으로 말끔히 치료해 주기로 결정했다.
“이거, 야박하시네. 저한텐 왜 안 물어요?”
“우리 제국의 황제 폐하께선 과거에 연연하시는 작은 그릇이 아닐 테니까요!”
한나가 발랄한 미소로 답하자 이안은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실소했다.
“그래요?”
“그럼요! 다리는 걷으실래요? 아니면 이대로? 아아. 안 보는 게 낫겠어요. 양심통이 있을 것 같아서.”
한나가 이안의 무릎 위에 고이 올려져 있던 손을 냅다 양손으로 붙잡았다.
“제가 말끔히 치료해드리죠.”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말했다.
‘제발 한 번만 그냥 넘어갑시다.’
그 애절한 눈빛에 이안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황궁 보수는 유능한 마법사들의 손에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은 마샤의 마법까지 보태져 아주 효율이 좋았다.
“수고가 많군.”
“황제 폐하!”
마법사들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놀라 인사를 했다. 그 소란에 마법으로 기둥을 옮기던 마샤의 시선도 돌아갔다.
“황제 폐하.”
마샤는 반갑게 가벼운 묵례를 했다. 90도로 꺾인 다른 이들의 동작에 비해 다소 가벼운 인사였지만, 이안은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얼굴이 밝아 보이네.”
이안은 스스럼없이 마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이미 궁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전적이 있었다. 이안은 어색해하는 마샤에게 전처럼 편히 대하라고 허락을 한 상태였다.
“뭐, 이것저것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요.”
“아무렴 북부에서 고생하는 것보단 이곳이 낫지.”
“뭐, 제 취향은 그쪽이 조금 더 가깝긴 한데. 여긴 꽉 막혀서 꼭 감옥 같잖아요?”
마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의 마법으로 움직이던 기둥은 제자리를 찾아가 알맞게 자리 잡았다.
“궁 보수가 거의 끝나가는군.”
이안은 잘 고쳐진 궁을 보며 말했다. 밀어 버린 예전의 궁 대신 정원 옆에 작은 쉼터를 세운 것이었다.
“워낙 실력이 탁월한지라, 금방이죠.”
“그럼 이제 감옥 같은 궁을 떠날 날도 머지않았겠네.”
그 말에 마샤의 몸이 멈칫했다.
궁 보수가 끝난다. = 궁을 나간다. = 지금처럼 선생님 곁에 있기 힘들어진다.
―라는 결론까지는 채 10초가 걸리지 않았다.
“이곳이 마지막 수리 구역이었던가?”
와르르르르. 쾅!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곡차곡 잘 쌓이던 성의 석상들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이런.”
마샤는 몹시 안타까운 듯 눈을 찌푸렸다.
“부실 공사였나 봅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처음부터 다. 시 해야 할 것 같네요.”
“무너진 게 아니라, 꼭 폭파된 것처럼 으스러졌는데?”
이안은 무너졌다기엔 작은 돌멩이 크기로 깨어져 파편이 되어 버린 골조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폭파라니요. 설마 그런 짓을.”
멀리 마법사들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겨우 거의 완성한 궁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이건 분명 실수가 아니라는 생각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샤에게 향했지만, 마샤는 콧방귀를 뀌었다.
“안타까운 사고죠.”
“요즘 황궁에선 사고가 참 많군.”
“인생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사고의 연속.”
“그래. 네 말이 맞아.”
이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는 사고일 뿐이지.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건 우습고.”
마샤의 시선이 느리게 이안의 옆얼굴로 향했다.
그는 무너진 궁의 잔해를 향해 있었지만, 그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저 혼란한 잔재 속에서 보고 있는 건 뭘까.
‘사고였어!’
까랑까랑하게 식당을 울리던 한나의 목소리가 문득 마샤는 생각났다.
사고.
“네가 계속 마무리할 건가?”
이안이 웃으며 마샤를 향해 물었다.
조금 멍한 상태였던 마샤는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뭔지 몰라도, 꺼져 주길 바라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 몹시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럼요. 이대로 나갈 순 없죠. 한창…….”
마샤가 이안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가까운 거리.
호위 기사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마샤는 이안에게만 들리게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아오르려는 참인데.”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왔던 마샤였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적대감은 귀신같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장에서 살기를 느끼는 것만큼 발달된 감각이었다.
이안의 웃는 얼굴 밑으로, 옅게 스민 열기가 아주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보수를 좋아하는지 몰랐군. 그럼, 이번 사고의 책임 견적은 그대에게 보내지.”
“사고 비용 청구를 저한테 한다는 말인가요?”
마샤의 황당한 표정에 이안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러게 황궁을 무너뜨릴 땐, 조금 더 신중했어야지.”
이안은 낮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성급함이 일을 망치는 법이니까.”
바람 같은 등장에 알맞은 바람 같은 퇴장이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샤는 어깨를 으쓱이며 혼잣말을 했다.
“아무렴 성급한 게 미적거리는 것보단 낫지.”
* * *
들꽃.
한나가 좋아하는 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들이나 산에 피는 이름 모를 꽃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마샤는 그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달랑 들린 들꽃은 발품과 마음을 담아 직접 꺾어 온 것이었다.
“오늘은 어때요?”
마샤는 그 꽃을 자연스럽게 한나에게 건네고 있었다.
“뭘 어때.”
받을 생각도 없는 한나의 손을 직접 펼쳐 쥐여 준 마샤는 말했다.
“머리를 올려 봤는데, 멋지지 않아요?”
“응. 멋져.”
“그럼 그 마음도 조금 움직였나?”
마샤가 뉘 집 똥개처럼 한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헛소리를 한 지 어언 3일.
“너……. 뭐하자는 거야.”
한나는 그 행동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농담으로 넘어갈 줄 알았던 그날의 일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니!
깨지 않는 악몽 같았다.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나 좀 봐 달라고 쫓아다니는 거잖아요.”
“그……. 그걸…….”
그걸 몰라서 묻겠냐!
진짜로 투명하게 보이는 말과 행동에 스치면서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마샤는 정말로 구애를 하고 있었다.
“이 정도 매달리면 흔들릴 때도 되지 않았나.”
마샤의 땅굴파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을 해야 할지 답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잘난 연하가 쫓아다니는데.”
“자의식 과잉이 도를 넘어섰구나.”
저 왕자병은 고쳐질 기미가 없었다.
“쌀쌀맞게 말하는 것도 예쁘네요.”
이것참, 말이 통해야지.
같은 나라말을 쓰고 있는 건 맞는 거지?
“좋아해요.”
“무슨 좋아한다는 말을 숨쉬듯이 하냐고!”
“그게 문제예요?”
들은 채 만 채,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 주지 않으니 마샤는 더 한나를 자극할 만한 고백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내가 진지하면 꼬리를 말고 내뺄 거잖아요.”
그리고 여우 같은 마샤는 한나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장난스레 툭툭 던져도 경기를 일으키는데, 진지하게 고백했다간 몰래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됐다. 됐어. 거절거절거절! 그냥 거절이야! 썩 돌아가서 일이나 해!”
“벌써 열 아홉 번 차였는데, 저 불쌍하지 않아요?”
눈썹을 축 늘어트리는 마샤의 모습에 한나는 감탄했다.
표정 연기는 어찌나 잘하는지.
저렇게 짠한 눈으로 바라보면 절로 심장이 저몄다.
“안 불쌍해. 잘 가. 배웅은 하지 못하겠다.”
“좋아해요.”
“아! 진짜!”
분명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냥, 스무 번 채우려고 해 봤어요.”
세상에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가볍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한나는 아직도 마샤가 진심인 건지, 장난인 건지, 장난이라면 이렇게 집요하게 놀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있다 봐요. 선생님.”
“보지 말자. 좀.”
“안 보이면 허전할 거면서.”
마샤는 손을 크게 흔들며 멀어졌다.
어찌 보면 그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쉴 틈 없이 괴롭히다 갑자기 안 보이면 분명 허전하고 궁금할 테지.
“설마……. 조련당하고 있는 건가?”
치밀한 자식.
거기까지 계산을 하다니.
한나는 새삼 마샤가 무서워졌다.
* * *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황궁에 일을 하러 왔다고는 하나 쉬는 날은 존재했다. 평소 같았으면 방에 틀어박혀서 잠이나 잤을 날이지만, 오늘만큼은 한나는 달랐다.
“성수를 안 만들어서 그런가. 쌩쌩하네.”
신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개운한 컨디션.
이것은 모두 자신에게 황제의 치료 말고는 일이 할당되지 않는 황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딱 좋네. 마침 수확제로 나가기 딱 좋을 시기야.”
온 제국이 수확제로 축제 분위기이니, 이런 때에는 외출하기에 최적이었다.
사람 구경하면서 축제 분위기도 즐기고, 맛있는 것도 먹고.
모름지기 집순이들은 한 번의 외출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쇼핑하고, 맛있는 거 먹고, 불꽃놀이까지. 완벽해.”
오늘의 플랜은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
“핀체프 녀석, 이런 날 같이 좀 놀아 줄 것이지.”
아침부터 소개팅을 하러 간다며 신나게 뛰어나가던 핀체프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차피 차일 거면서.”
10전 10패.
여태껏 핀체프의 소개팅이 성공적이었던 전례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오늘도 시간낭비할 거면 저와 놀아 주는 게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혼자라도 가야지.”
어차피 핀체프가 있어도 쫑알쫑알거리는 게 정신 사납기만 하겠지.
하지만 역시나 좋은 짐꾼을 잃은 것 같았다. 순간 함께 놀러갈 인물로 마샤의 얼굴이 스쳤다.
“어후!”
하지만 한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 그래도 요즘 고삐 풀린 고백 인간인데, 판을 깔아 줄 수는 없었다.
“절대 안 들키고 나갈 거야.”
부르르, 몸이 떨렸다. 한나는 허리에 거는 작은 가방에 돈을 챙겨 넣었다.
“많이 쓰면 안 되니까 적당히.”
또 눈 돌아가서 과소비를 하지 않기 위해 적당한 돈을 챙겼다. 가방까지 잘 챙긴 한나는 거울 앞에 서서 한 바퀴 돌며 옷 상태를 체크했다.
작년 이맘때 산 후로 처음 꺼내 입는 드레스였다. 점원의 상술에 넘어가 이 파랑파랑하고 프릴 주렁주렁 달린 옷을 홀린 듯이 샀었다.
“예쁘군.”
좀 튀긴 하지만.
그래도 수확제 정도면 이 정도 튀는 건 받아들일 수 있는 패션 센스라고 생각됐다.
“출발, 출발.”
콧노래를 부르며 한나는 방을 나섰다.
철컥.
혹시 모르니 단단히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서자, 그곳엔 이안이 있었다.
“이안? 오늘은 치료 없는 날인데?”
혹시 자신의 휴일을 잊어버려서 마중 온 건가 싶어 한나가 황급히 말했다.
“알고 있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아, 응. 좋은 아침……. 그럼, 나한테는 왜?”
“오늘 수확제에 간다고 했잖아요.”
어제 치료에서 미주알고주알 쉬는 날에 수확제에 가서 구운 옥수수도 먹고, 빵도 먹고, 오리구이도 먹을 거라고 떠들어 댄 기억이 떠올랐다.
“아……. 기억하는구나.”
“그렇게 신나서 얘기했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그것도 하루 만에.”
“그건 그렇지. 하하. 그래서, 내가 수확제에 가는데, 왜 아침부터 온 거야?”
외출에 대해 미리 말했으면, 오히려 안 찾아오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한나의 궁금증에 답하듯 이안이 품에서 붉은 융단 주머니를 꺼냈다.
꼴깍. 뭔가, 느낌이 왔다.
‘저건 돈이다.’
놀러간다고 이렇게 여비까지 챙겨 주다니! 황궁 최고! 황제 폐하 최고! 만세!
한나의 광대가 높이 올라갔다. 기쁜 마음을 숨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조건 반사 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즐겁게 보내라는 의미에서.”
“아이참, 뭐 이런 걸 다.”
내뱉는 말과 달리 양손은 공손히 허공으로 올라갔다.
찰그락. 주머니가 손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한나는 느꼈다.
‘조금 가벼운데?’
일전에 북부에 갈 때도 받아 보았던 주머니가 그때보다 아주, 아주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황궁이 어렵나 싶어 한나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짤랑, 흔들었다.
그 모습에 이안은 풋, 웃으며 말했다.
“금화예요.”
그 한마디에,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마음씀씀이에 감사드려요.”
여태껏 어색했던 황궁 예법에 맞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철저한 자본주의 예절이었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이안의 말에 한나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답했다.
“뭐든 말만 하세요. 심부름인가요? 뭐 사 올 거라도?”
보나마나 황궁 밖에서 하는 일이라면, 어떤 물건을 사다 달라는 심부름일 거라고 추측했다.
“저도, 데리고 가 줘요.”
한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안 바쁘세요?”
“원래 황제들은 수확제 암행을 나간답니다.”
“원래…… 그런다고요?”
“네. 한 해의 농사가 잘되었는지, 제국민들은 평안한지, 분위기를 살피기 좋은 날이니까요.”
한나는 혹시 약을 파나 싶어 이안의 뒤에 서 있는 보좌관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나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몰래 가지 않나요?”
“네. 지금, 몰래 가려고요.”
그러고 보니 이안의 차림이 평소와는 달랐다. 귀족들이나 입는 일상복이었다. 물론 일상복조차 너무 하얗고 깨끗한 모습이라 부담스럽지만.
매일 무겁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망토도 없었다.
처음부터 준비를 하고 왔구나.
하지만 한나는 고민이 생겼다. 혼자 가면 심심하지만, 이 황제 폐하와 함께 가면 하루가 고단할 것 같았다.
‘분명 호위 기사들도 줄줄이 따라다닐 거고…….’
티 안 나게 따라붙어도 감시당하는 기분은 질색이었다.
“편하게 마차로 가죠.”
이안이 가리키는 창문 밖으로 척 보기에도 안락해 보이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왜 또 저렇게 편해 보인담.’
하필 손에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금화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건 뇌물이었군. 데리고 가 달라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거절하기엔…….
“갑시다. 폐하.”
돈이 최고였다.
* * *
“우리 폐하는, 뭐가 제일 보고 싶어요?”
“마을에서는 폐하는 안 돼요. 이름으로 불러요. 치료 때 하던 것처럼 편하게.”
한나의 질문에 이안이 말했다.
“오, 걱정 마세요. 그 정도 눈치는 있답니다.”
“어색한 존대도 필요 없어요.”
“당연히 그것도 가능하지.”
한나가 싱긋 웃자, 이안도 따라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제도 상점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들은 최소한의 인원만 몰래 따르고 있었는데, 숨는 실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한나가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면 누가 봐도 의심스럽겠어요.”
“아? 응, 미안. 신기해서.”
이 정도로 티가 안 나다니!
평소에는 그렇게 눈치 주면서 저를 뚫어져라 보던 이들이 말이다.
“선생님은 뭐가 하고 싶어요?”
“그냥 옷 사고, 맛있는 것 먹고, 길거리 공연이나 보고, 불꽃놀이 보고 가려고 했는데.”
“꽤 알찬 계획이네요.”
“한번 나올 때 최대한 많은 일을 해야 해서.”
“옷 쇼핑 빼고, 먹는 것도 빼고, 나머지 일정만 하죠.”
“저기요, 이건 내 일정인데?”
“황궁 재단사 통해서 맞추는 게 훨씬 나아요.”
“네. 좋습니다.”
황궁 재단사를 통한다는 건 최상급 옷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이런 기회는 놓치면 안 되었다.
“식사부터 하시죠.”
기분이 좋아진 한나는 냉큼 이안의 팔에 팔짱을 꼈다. 이안의 고개가 천천히 자신의 팔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거기에 콕 붙어 있는 분홍 정수리로.
“와, 사람 진짜 많다. 너희 어릴 때 레미아 마을 축제는 비교도 안 될 정도지?”
“……그러게요.”
대답은 하고 있으나, 영혼은 담겨 있지 않은 대답.
“그래도 거기서 제레미도 잃어버리고,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나름 재미있기도 했고.”
“그렇죠.”
“내가 축제를 좋아하는 건, 그때의 기억 때문일 거야.”
아무리 바빠도 축제라면 하루라도 즐겨야 직성이 풀렸다. 축제라는 것이 한나의 기억 속에 너무 아름답게 남아 있어서였다.
“가자. 내가 진짜 맛있는 식당 알아. 내가 쏜다!”
물론 그 돈은 이안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지만.
의기양양하게 이안을 식당으로 데리고 오는 것까지는 순탄했다.
하지만, 조금 문제가 있었다. 이안은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며 음식을 나르고는 있었다.
“왜 내 접시에만 음식이 오는 걸까?”
자신에게만.
이안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없었다.
“입맛이, 그다지.”
가볍게 말했지만,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외부음식을 꺼리는 것이란 걸 알고 있다. 이안은 입는 것, 먹는 것, 쓰는 것 모두 자신만의 정해진 틀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이렇게 축제를 보러 온 것조차 평소 이안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하루 일과를 촘촘하게 쪼개서 정해진 대로만 움직일 정도로 강박적인 성향이 있었다. 꼭 지금도 끼고 있는 장갑처럼 답답하게 말이다.
“우리 오늘 불꽃놀이까지 봐야 한다고. 굶어 죽을 작정이야?”
핀잔에도 이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아마 오늘 잠행이 황제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나오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전에는 길거리 음식도 먹고, 그랬잖아.”
“지금도 못 먹진 않아요.”
“요즘 신경이 많이 예민해?”
괜히 걱정되게스리.
“장소가 바뀌면 조금 예민해져요.”
“황궁에 와서도 많이 고생했겠네.”
“삼 일은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죠.”
“완벽하게 조성된 공간이 필요한 거야?”
“나에게 맞는 환경으로 만들던지, 혹은 하염없이 기다리죠. 편하게 느껴질 때까지.”
“으음, 그렇구나.”
한나는 그런 이안의 증세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딱히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사는 방식이야 조금 다를 수 있지.
요즘은 그냥, 자기만 만족하고 산다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배고프면 언제든 말해.”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빈말이 많이 늘었네.”
깔깔 웃으며, 함께하지만 혼자 하는 식사는 계속됐다.
* * *
식당을 나올 때까지 이안의 입에는 물 한 모금 들어가지 않았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한나는 여차하면 챙겨 온 성수나 들이부을 작정이었다.
“뭐부터 하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재밌는 게 있을까.”
“여기 입구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죠.”
“저기, 놀이 많은 곳부터 가면 안 돼?”
“순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간이 빠듯하네요. 식당에서 조금 오래 머물렀어요.”
“흐음. 혹시 시간대별로 할 일을 나눴어?”
“비슷해요.”
그 대답에 한나가 입을 벌렸다.
이런, 꽉 막힌 인간 같으니. 누가 축제를 계획에 맞춰서 보냐!
“바보 같은가요?”
이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저가 바보 같으냐고.
“아니, 뭐…….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거지.”
“전 제 문제를 잘 알고 있어요.”
“문제?”
“완벽하려 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인간.”
갑작스러운 진지한 말에 한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황궁의 치료 시간에는 잘 나오지 않던 진솔한 이야기가 왜 시끌시끌한 길에서 술술 나오는 걸까.
이것도 축제 분위기에 취해서 마음이 열린 건 아닌가 싶었다.
역시, 나오길 잘했지.
“오히려 하자가 있죠. 전 그런 사람이에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고.”
“완벽주의가 나쁜 건 아니잖아. 그래서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해 내고 있고.”
솔직히 되는 대로 충동적으로 사는 자신이 실패는 더 많이 맛봤을 텐데.
“하지만 평범한 건 아니죠.”
바로 그렇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방금 나온 식당에서 함께 식사도 못 한 걸 생각하면, 아니라고 반박하는 자체가 이안을 속이는 일 같았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오늘 여기까지 나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이런 나는 이상한 걸까요.”
적어도 자신이 이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오늘은 치료 아니고, 놀러 나온 거니까, 아무 생각 말고 놀자!”
하지만 이안의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더, 심사숙고한 뒤에 돌려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한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이안을 지나쳐 척척 걸어나갔다.
이안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척척, 걸어나가던 한나는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나무 퍼즐이네요.”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진 책상에 앉아 나무로 된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행사인가?”
“참가하세요! 제도의 상징인 드래곤 퍼즐을 맞추면 상품이 있습니다!”
“와. 상품이 있다는데?”
한나는 주최자로 보이는 남자의 뒤에 높게 쌓여 있는 선물 더미로 눈이 돌아갔다.
“해 보고 싶어요?”
“응! 나 여기서 저런 놀이 해 본 적 없어!”
그리고, 상품도 탐났다.
“이거, 어떻게 참가하나요? 참가비가 있나요?”
“참가비는 따로 없지만, 실패할 시 퍼즐을 구매하셔야 합니다.”
남자는 퍼즐 조각을 흔들며 말했다.
‘상술이네.’
속 보이는 상술에 한나의 눈매가 좁아졌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 내에 성공하시면, 퍼즐도 무료! 푸짐한 상품까지!”
“오, 정해진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30분!”
사람들이 열심히 맞추고 있는 퍼즐을 슥, 훑어보았다. 그냥 보기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자.”
“할 수 있겠어요?”
“너 지금 내 집중력 무시해? 난 또 한번 하면 아주 잘한다고!”
“좋아요.”
어차피 이 구역에서 보내려던 시간에 무리가 없는 일정이라고 판단한 이안은 흔쾌히 수락했다.
“자, 그럼 여기로 오세요! 두 분 함께하시는 거죠?”
“네.”
주최자는 분수 옆의 자리를 권해 주었다.
“이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시작되는 겁니다.”
남자가 책상 위로 모래시계 하나를 놓아주었다.
“자자, 이안 얼른 앉아.”
한나는 얼른 수건을 꺼내 의자와 책상을 닦았다. 이안이 꺼릴까 봐 그런 건 아니고, 저 하얀 옷에 뭐라도 묻으면 제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였다.
이안은 그런 한나의 모습에 풋, 웃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시작해 보죠.”
이안의 긴 팔이 모래시계로 향했다.
툭.
모래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아니, 이게 왜……. 하, 그러니까 이건 여기 아닌 것 같은데?”
“여기 맞아요. 이게 기둥 부분이니까.”
“일단 네 말대로 해 보는데, 아……. 그럼 이건 뭔데?”
한나는 솔직히 퍼즐이 쉽게 맞춰질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자신을 믿을 건 아니었고, 이안의 두뇌를 믿은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각이 부족한 것 같은데.”
이안은 아직 어지럽게 남은 퍼즐 조각들을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 그 말을 들은 한나의 시선이 주최자에게로 튀었다.
‘설마 못 맞추게 하려고 수작질을?!’
의심이 짙게 드리웠지만, 누군가 상품을 받아 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냥 우리가 못하는 건가 본데.”
남들은 받아 가는데 자신들에게만 수작을 부릴 리가 없으니.
이안의 시선이 얼마 남지 않은 모래시계로 향했다.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본 한나는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안이 고작 퍼즐 하나로 낑낑거리는 것도,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초조해하는 것도 너무 웃기지 않은가?
인생을 퍼즐 맞추듯 완벽하게 끼워 맞추며 살았던 이안에게는 이 작은 게임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하면 거슬리는 일일까.
단순히 승부욕이라면, 오히려 나은 건가.
“모래알 이제 다 떨어져 간다.”
“…….”
이안은 작은 퍼즐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고전하고 있었다. 모래시계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못 맞추겠지?”
마치 주위가 사라진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이안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이안은 옅은 한숨과 함께 퍼즐의 다른 조각을 짚었다.
“푸핫, 이안이라면 퍼즐은 앉은 자리에서 뚝딱일 줄 알았는데.”
“놀리는 거예요?”
“답답하지?”
“답답하네요.”
이안은 여전히 눈으로 퍼즐을 훑으며 퍼즐 조각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에 한나는 씩, 웃으며 퍼즐 조각들을 박박 끌어모았다.
“뭐해요?”
기껏 분류해 놓은 퍼즐이 섞이자 이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끝내려고.”
“그렇게 섞으면 더 못 맞춰요.”
“꼭 완벽하게 맞춰야만 끝나는 건 아니잖아?”
한나는 퍼즐 판을 그대로 양손으로 들었다.
후두둑, 퍼즐 조각들이 땅으로 떨어지며 이안의 눈앞을 지나갔다.
“이얍!”
한나는 그대로 퍼즐 판을 분수대에 던져 버렸다. 첨벙 소리와 함께 퍼즐 판과 조각들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곤 홀가분하게 손을 탁탁, 털었다.
“…….”
이안은 입이 딱 붙어 버렸다.
“앗. 모래시계 다 됐다.”
마침 모래시계의 모래가 마지막 한 알까지 떨어졌다.
이안은 방금 상황이 마치 꿈같았다. 제 손에 들린 퍼즐 조각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흙바닥과 물속을 구르고 있었다.
이안에게 이 상황은 경악 그 자체였다.
“…….”
이안은 멍하니 제 손에 남은 퍼즐 조각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다 맞춰야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잖아. 살다 보면 이런 끝도 있어. 이것도 나름대로 홀가분하지 않아?”
한나는 여태 씨름했던 시간을 훌훌 털어 버린 듯 호쾌하게 웃었다.
“솔직히 내가 저 퍼즐을 못 맞춘다는 걸 인정하기가 영 싫단 말이야. 그럴 땐 답이 뭐 있겠어? 그냥 엎어 버리는 거지.”
“정말, 못 말리겠네요.”
이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고! 퍼즐을 분수에 던지시면 어떡합니까!”
주최자가 놀라서 한나에게 달려왔지만, 한나는 의기양양하게 돈주머니를 꺼냈다.
“내 퍼즐을 어떻게 사용하든, 제 마음이죠!”
“분수 청소는 누가 합니까!”
“……아앗.”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한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울까요?’ 하고 물어보았다.
“에고, 제가 하죠. 기껏 축제라 차려입었는데 다 버릴 수는 없으니.”
주최자의 말에 한나는 기분 좋게 퍼즐 값을 치렀다.
“정말, 인심 좋으시다니까.”
핀잔을 듣고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한나를 보며 이안은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퍼즐만 만지작거렸다.
“가자. 이안. 그 퍼즐 조각은 기념으로 챙겨. 추억은 이렇게도 남으니까.”
한나는 쿨내 진동하는 말과 함께 빨리 일어서라며 재촉했다.
아직도 재미있는 일들이 잔뜩 남았다고.
이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즐 조각은 제 품속 주머니에 고이 챙겼다. 그러곤, 나직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게, 질문에 대한 답이군요.”
‘꼭 완벽하게 맞춰야만 끝나는 건 아니잖아?’, ‘이런 끝도 있어.’, ‘추억은 이렇게도 남으니까.’
이안은 생각했다. 이상하게, 모든 말들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 같았다.
* * *
한나에게 이끌려 다니다 보니 날은 금방 저물었다.
억지로 권해진 노점의 과일 사탕을 먹은 것이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불꽃놀이! 불꽃놀이!”
노점에 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모조리 맛본 한나가 배를 탕탕 두드리며 불꽃놀이를 흥얼거렸다.
두 사람은 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불꽃놀이 명당이라는 언덕에 올라와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한나와 이안도 호위 기사들이 잽싸게 가져다준 자리를 깔고 앉았다.
순식간에 자리를 펼치고 다시 사라진 호위 기사들을 보고, 한나는 종일 존재조차 잊고 있었는데, 정말 따라다니고 있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퍼펑―!
마침 폭죽 터지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폭죽은 끝도 없이 하늘을 수놓았다.
“세상에, 너무 아름답다. 저건 꽃 모양인가? 어때, 이안?”
한나는 하늘을 수놓은 오색찬란한 불꽃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불꽃놀이 예산을 많이 썼나 보네요.”
“와. 저 예쁜 광경을 보고 예산 얘기를 하다니. 너 너무 무섭다.”
“그런가요?”
물론 이안도 한나가 어떤 종류의 답을 원하고 물어본 질문인지는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아름답다’ 한마디로 지나갈 수 있는 대화라는 것도.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제가 이런 인간인 거, 익숙해지셔야겠네요.”
“뭐 그런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어야 세상이 굴러가는 거지. 나 같은 사람들만 바글바글하면 나라는 이미 망했을걸?”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맑게 가슴을 울렸다.
“아름답네요.”
“응. 너무 예뻐.”
이안의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는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는 걸, 한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괜찮은 하루였지?”
한나가 이안에게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는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지만, 한나의 목소리는 크게 말하지 않아도 이안의 귀에 묵직하게 꽂혀 들었다.
“정말……. 신기한 하루죠.”
“충동적으로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었지?”
오늘은 철저히 한나의 기분 따라 발길을 옮기며 지나갔다.
“그러게요.”
충동적인 건 질색인 그이지만, 지금은 충동에 행동을 얹고 싶을 만큼,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다.
이안의 장갑 낀 손이 흙바닥을 짚은 것은.
그의 몸이 여전히 하늘에 시선이 못 박힌 한나의 앞으로, 얼굴이 한 뼘 앞으로.
“오늘은 그냥, 충동적이기로 할게요.”
아슬아슬한 거리, 입술이 닿기 직전 이안은 물었다.
“……키스, 해도 돼요?”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 한나의 침묵은 그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굳어 있는 것이었다.
하나 이안은 그 해석을 저 좋을 대로 해 버렸다. 어쩌면 대답이 나와 버리는 것이 무서웠을지도.
그렇게 조금 급하게, 충동적으로, 입술이 닿았다.
먹먹하게 울리는 폭죽 소리가, 입술에 닿은 따뜻한 감촉이, 꿈같이 느껴졌다.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한나가 놀라 몸을 물리려 했지만,
이안은 흙이 묻은 장갑을 순식간에 벗어 냈다. 그의 매끈한 손이 한나의 목덜미를 감쌌다. 물러서지 못한 한나의 호흡이 속절없이 먹혀 버렸다.
술기운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와 어색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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