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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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참으로 좋았다.
한나는 모처럼 연하늘색 드레스에 레이스가 달린 보닛까지 머리에 쓰고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흡사 꽃놀이라도 가는 듯한, 화사한 옷차림이었다.
“혹시, 우리가 떠나는 길이 소풍이었나요?”
팥죽색 제복이 아닌 화려한 외출복을 입은 마샤가 한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의 말에 한나 역시 팔짱을 끼고 마샤를 아래위로 훑으며 답했다.
“너야말로 뭘 그렇게 화려한 복장이야?”
“평소엔 제복만 입으니, 한 번이라도 사복을 입을 때 한껏 꾸미자는 주의거든요.”
마샤의 말처럼 진청록 벨벳에 금자수가 놓인 옷은 저 멀리서 보아도 한껏 꾸민 티가 줄줄 흘렀다.
“뭐, 나도 비슷한 거라고 해 두자.”
매일 하얀 신관복만 입다 보니, 평상복은 조금 화려하게 고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마샤와 같은 이유라는 것이 왠지 자존심 상했다.
“제레미가 늦네. 설마 우리보다 더한 복장으로 오는 거 아니야?”
“소풍 도시락을 싸 오는 건 아닐까요.”
“너도 참, 농담도. 호호호.”
‘그’ 제레미가 피크닉 도시락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괜히 상상하다 웃음이 터진 한나는 버릇처럼 마샤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정신없이 웃고 있던 와중, 갑자기 파고든 낮은 목소리에 한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야! 넌 왜 기척도 없이!”
“도시락은 없네요.”
등 뒤에 나타난 줄도 모르고 있다 깜짝 놀란 한나와 실망의 눈빛을 보내는 마샤.
그리고 그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제레미의 얼굴엔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었다.
한나와 마샤를 살펴본 제레미가 말했다.
“소풍?”
“그 이야긴 이미 다 끝났으니 그만해. 소풍 아니고, 그냥 일상복이 조금 튀는 인간들이야. 우리가.”
한나는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제레미에게 답했다.
“아아.”
제레미는 오늘도 아주 단정하다 못해 서늘함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칙칙하구나.”
“놀러가는 게 아니니까요.”
“아냐, 비단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 왜냐하면 넌, 항상 검은 옷이니까.”
“맞아요. 미적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한나의 말에 마샤가 맞장구를 쳤다. 그에 한나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또 말을 이었다.
“모든 일이 그래. 기합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지.”
제레미는 무슨 개똥철학을 말하려는 건가 싶어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 생각해 보니 네가 매일 검은 옷만 입은 건 미적 감각 때문이 아니라…….”
암흑길드 보스라서였던 거냐.
순식간에 한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왜 악당들은 검은 옷을 좋아하는 걸까. 피가 튀어도 티가 나지 않기 위해서?
오, 이건 조금 오글거리는 추측이다.
“뭐가 묻어도 티 안 나는 건 이게 최고거든요.”
뭐야. 맞잖아. 완전 그 이유네.
제레미가 방금 ‘뭐가’라고 두루뭉술하게 감추었지만 그게 물감이나 꽃물은 아닐 거라고 한나는 확신했다.
“난 또, 암묵적으로 악당들의 복장 지침이 있는가 했지.”
그 왜, 나쁜 녀석들 대사집처럼 말이다. 갑자기 일전에 궁금했던 악당 대사 모음집이 생각났다.
“너도 혹시, 그런 대사 외우고 다니니?”
“무슨.”
제레미는 무슨 질문이 날아올지 몰랐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온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뭐 그런 거.”
한나는 정말 궁금한 마음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그리고 제레미 역시 한나가 자신을 비아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순수하게 깜박이는 눈동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니, 궁금했거든. 어떻게 다들 천편일률적인 대사를 하는가 하고. 암흑가에 발들이면 대본집이라도 나눠 주는가 했지.”
제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샤, 너는 어때. 그런 대사 안 해?”
“전 그냥 안 살려 주자는 주의인데요.”
“그런 대답을 바란 게 아닌데.”
“자, 이제 선생님도 타시죠.”
마샤는 한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 편히 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른 한나는 너무도 평온한 마샤와 제레미를 보며 조금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너흰 내가 악당 취급해도 왜 발끈하지 않지?”
이 두 사람, 자신이 대놓고 악당 취급을 해도 전혀 부인하거나 당황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거슬렸다.
“뭐, 사실이니까?”
당당한 모습, 참으로 보기 좋구나. 그래……. 솔직한 건 좋은 거지.
한나는 어딘지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 * *
“아……. 사막 공기.”
꽤 긴 시간 마차를 타고 달리던 한나는 답답한 기분에 창문을 열고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아직 사막까진 멀었어요. 여긴 모래 한 톨 없어요.”
마샤의 칼같은 선 긋기에 한나는 머쓱하게 창문을 닫았다.
“그런데 짐수레에 잔뜩 챙긴 건 뭐예요?”
마샤는 마차 뒤에 달린 짐수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한나에게 물었다. 창틀에 팔을 괴고 얼굴을 얹은 한나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내 무기.”
“무기?”
“내가 이번에 아주 쓸 만한 걸 발명했거든.”
“성수요?”
제레미의 날랜 눈썰미가 이미 수레에 실린 물건을 확인한 뒤였다.
한나가 가지고 온 무기란 성수였다. 지난번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실패한 성수를 유용하게 써먹었던 기억에 이번엔 일부러 실패한 성수를 만든 것이었다.
“저거 던지면 꽤 재미가 쏠쏠해.”
“다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그러니까 더 완벽하지. 고통스럽게 하면서 절대 죽진 않잖아.”
한나의 말에 마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예요. 그거 좀 변태적인 것 같은데.”
“어딜 봐서?”
이렇게 평화적인 무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솔직히 이 정도면 노벨평화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수준이라고.
다치는 사람 없이, 공격이 가능하다니! 모두가 건강해지는 성수!
“저 성수 맛보고 회개하고, 오래 살고, 일석이조지.”
“뭔가 대단한 걸 발명하긴 했네요.”
제레미는 한나가 발휘하는 성력의 매운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면역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따끔한 맛에 제 몸이 불타고 있다고 착각을 할 법했다.
물론, 몸은 건강해지겠지만.
“다들 건강해져서 돌아가겠네.”
“너도 건강해지고 싶지 않으면, 그 입꼬리 내리는 게 좋을 거야.”
한나는 제레미가 은근히 자신을 비꼬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여러분 사막에 도착하기 전에 정리를 한번 해 봅시다.”
슬슬 갈라티아 마을이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에 한나는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기로 했다.
“주의 사항부터 시작하죠. 첫째, 사고 치지 않는다. 둘째, 개별행동 금지. 셋째, 살인 금지.”
“죽기 직전까지는 괜찮다는 뜻인가요?”
“과도한 폭력도 금지. 성수 사용은 필수.”
마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게 가라앉았다.
“목표는 산에 기웃거리는 무리 쫓아내기. 꼬꼬 보금자리 만들기. 이상!”
“꼬꼬 의견은 안 물어보나요.”
“내가 공부를 조금 했는데, 꼬꼬는 고대 마수라 갈리아 산이 체질에 딱 맞아. 거기서 나오는 광석도 마음껏 먹게 해도 되고.”
“누구 마음대로 광석을 먹어요.”
제레미가 얼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열심히 보초 노동을 하면 보상이 있어야지. 네가 자꾸 잊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면, 주인은 나야. 내 맘대로 할 거야.”
사실 이제 두려움은 저 멀리 날아가고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상은 계륵이지만.
“그럼 저희도 보상이 있나요?”
제레미는 참으로 논리적인 질문을 했다.
“우리 사이에 보상 같은 거 운운하기야?”
한나는 상처받은 얼굴로 말했다.
“가증스러운 거 알아요?”
“그래도 미워하진 못할 거면서. 호호.”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한나는 입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말끔하게 정리하고 빠르게 복귀한다.”
“방금 그 말, 꼭 장군 같았어요.”
마샤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러게. 이러니까 뭔가 대장이 된 느낌 들고 좋은데.”
“체질에 맞는 거 아닐까요?”
오늘따라 사탕 발린 말을 해 주는 마샤 때문에 한나의 자신감은 마차 천장을 뚫고 나갈 기세로 날아올랐다.
“어떻게, 기분 내는 김에 직급이라도 정할까?”
“이 친구보다 제가 높은 직급이라면 좋아요.”
마샤는 대답과 함께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제레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꿉장난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건 아니죠?”
“정말 기분 낼 줄 모르네.”
“그러게요. 영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어. 그냥 우리끼리 정하죠. 선생님은 단장, 저는 부단장, 이 녀석은 뭐……. 음, 종자 정도로 해 둘까요?”
“하.”
마샤의 말에 제레미의 이마 근육이 꿈틀했다.
“내가 누구 밑에 있어 본 적이 없어서.”
거만하고 도도한 눈빛이었다.
하긴 저 나이에 암흑길드 수장이라면 남 밑에 있을 리가 없지.
“그러게 빨리 줄을 섰어야지.”
마샤는 제 외투 목깃을 손으로 다듬으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에 제레미가 제안했다.
“서열을 가리는 거라면, 마차에서 내려서 제대로 하는 게 어때?”
“그럼 네가 더 불리해질 텐데.”
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어휴, 남자애들 아니랄까 봐.’
뭐 이런 소꿉장난 같은 거에 발끈하는 건 둘 다 똑같구만.
한나는 그런 그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 다 보육원 시절 모습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모습은 어려서가 아니라 그냥 성격이었구나. 이렇게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산에 뛰놀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아, 물론 외향은 전혀 그때의 아이들이 아니지만 말이다.
한나는 새삼 훤칠하게 잘 자란 두 사람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제레미는 날카롭긴 하지만, 남자다운 멋이 있지.’
무뚝뚝하지만 답지 않게 세심하고 다정한 모습들이 반전 매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샤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얼굴이야.’
그냥 딱, 보았을 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수려한 얼굴이었다.
마법 같은 거 열심히 연마하지 않고 단순히 눈웃음만 흘려도 어느 나라 공주님이라도 꼬셔서 살 수 있을 텐데.
아, 이건 너무 속물적이었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둘 다 성격이 문제지.”
툭 하고 튀어나온 본심에 한나는 저도 말을 내뱉고 놀랐다.
“문제가 있어요?”
“귀가 참 밝구나.”
말을 하자마자 재깍 물어 오는 마샤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무슨 문제인데요?”
“아냐. 그냥 너희의 그 호전적인 성향이 우리 거사에 발목을 잡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단다.”
차마 한나는 그 두 사람에게 얼굴만 번지르르하고 속 빈 강정 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부디 사이좋게 지내 다오.”
“우리는 참, 좋은……. 사이죠.”
한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좋은’과 ‘사이’ 중간에 공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의 목표는 뭐다?”
“제국방위대? 영웅놀이?”
“아니지. 내가 못 먹는 떡, 남도 주지 말자! 이해됐지? 서로 좋은 마음으로 모인 건 아니라지만, 일은 확실히 하자고.”
“이럴 때만 똑 부러지시네.”
한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놈들은 글렀다. 잘 꼬드겨서 써먹기라도 하자.
* * *
그러니까 오랜만에 다시 발을 붙인 갈라티아 마을은 꼭,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바람이 불면 뭔지 모를 동그란 먼지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폐허가 된 마을 말이다.
“배경음악이 자동으로 재생되네.”
띠띠리리 띠띠띠.
그 밴조와 조하프의 악기 소리가 귓가에 자동 플레이 됐다.
“여기 짧은 시간에 많이 변했네.”
한나가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그러게요. 어째 상황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은데.”
“총이라도 한 발 쏘면 상점 문들이 벌컥 열리면서 카우보이가 우르르 나올 것 같아.”
“네?”
한나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야. 일단 신전으로 가자.”
“저희 나쁜 일 하러 온 거 아닌가요?”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뭔가 정리하거나, 밀어 버린다거나, 박살내 버리자는 구호를 외쳤으니까요?”
“아, 그랬나.”
몰랐다는 듯 한나가 중얼거렸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조금 과하게 기합을 줬더니.
그런 헛소리를 하면서 왔었구나.
“아냐. 우리 나쁜 짓 하러 온 거 아냐. 굳이 말하자면 세계의 평화를 지키러 온 쪽에 가깝지.”
“신전에서 머무를 생각이에요? 전 신전 밥은 별로인데.”
마샤는 척척 걸어나가는 한나의 뒤를 따라 걸으며 투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전 중에서도 갈라티아 신전은 더 맛없어.”
“와우. 솔직도 하셔라.”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뭐. 끼니는 외식 위주로.”
“그럼 머무는 건요?”
마샤의 질문에 한나는 고민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신전의 침대도 그다지 푹신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황제 폐하가 하사한 격려금이 있지 않은가. 도대체 뭘 격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말이다.
“좋아. 가장 좋은 숙소로 간다.”
“큭.”
한나의 얘기를 듣던 마샤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 계속 그렇게 단장님 말투로 가는 거예요?”
“……그냥 느낌에 좀 취해 있었어.”
맞춰 줄 거면 계속 맞춰 주던가. 갑자기 비웃는 건 반칙이지.
“가자.”
머쓱한 마음에 한나는 발길을 빨리했다.
“방금 이 말은 절대 명령조 아니었어.”
그러고는 마샤가 또 대장놀이 한다고 비웃을까 봐 덧붙였다.
그 말에 마샤는 소리 없이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 * *
“한나 신관님!”
“루루티!”
다시 보아도 이렇게 귀여울 수가!
한나는 달려오는 루루티를 와락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힘든 일은 없었고? 나쁜 사람들이 신전에 와서 해코지하지는 않았니?”
“네. 신전은 조금 바쁘지만, 괜찮았어요.”
“새로운 소식은 없어? 갈리아 산에 대한 거.”
“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요.”
“나쁜 소식? 뭔데?”
한나는 루루티의 말을 경청했다.
“갈리아 산이 무법천지라는 거예요. 매일같이 사상자가 나오고 있어요. 마물이 아니라 사람끼리도 싸우고, 죽이고, 난리가 났죠. 세상에 이렇게 많은 나쁜 사람들이 있었는지 새삼 놀라고 있답니다.”
분명 루루티는 발랄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하나도 발랄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충격에 익숙해져야 저런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지?
“그……. 음, 그래!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을 듣자!”
“지금이 최악이라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다는 거예요.”
“…….”
태연한 그 표정에 한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정도로 최악이니?”
“대낮에도 상점들이 무서워서 문을 못 열어요.”
“심각하네. 그런데 루루티, 그런 건 좋은 소식이라고 하지 않아. 그냥 나쁜 소식에 함께 포함해. 괜히 희망고문하는 것 같아.”
“참고할게요.”
맑게 웃는 루루티의 볼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정말 사태의 심각성에 어울리지 않는 깜찍함이었다.
“그래서 신전이 바빴구나. 산에서 다친 사람들이 많이 오는 거지?”
“독기에 중독된 사람들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 가서, 마을에서도 소동이 많아요.”
슬슬 광석의 숨겨진 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듯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빨리 흘러가네.”
“그런데 한나 신관님, 저분들은 누구신가요?”
“아.”
한나는 멀찍이 서서 신전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음…….”
제자, 친구, 동료, 나쁜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쓸모있는 사람들.
뭐 하나 딱 떨어지는 게 없었다.
“내 부하.”
“우와아…….”
루루티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로 한나를 올려다보았다.
“신관님은 부하도 거느리고 다니시는군요! 역시 비범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큰일을 하려면, 부하는 필수지.”
“그것도 저렇게 미남 부하라니!”
“응? 루루티?”
설마 그 반짝이는 눈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거니?
“오늘부터 제 우상은 한나 신관님이세요.”
“……원래는 아니었던 거야?”
그렇게 자신만 보면 멋있다고 노래를 불러 주던 루루티였는데.
신관으로서의 능력보다 미남 부하가 부러웠던 거니.
“어쨌거나 존경한다는 말이에요!”
“좋은……. 소식이네.”
“아 참, 한나 신관님도 전처럼 마을 상점가에 가는 건 조심하도록 하세요. 여차했다간 싹 털리고 코까지 베인다니까요?”
“음, 네가 하기엔 너무 살벌한 말이야. 루루티.”
“헤헤. 험한 분들을 겪다 보니.”
“너야말로 몸조심하도록 해. 나도 얼른 북부를 소탕……. 아니,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테니.”
“한나 신관님께서 직접요?”
루루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사명을 안고 이곳으로 왔어.”
“우와아아……. 역시 그래서 부하도!”
“그렇지!”
한나는 루루티에게 장단을 맞춰 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루루티, 내가 가져온 성수 좀 신전에 맡길게. 이건 환자들에게 쓰면 안 돼. 실패작이라 부작용이 있거든.”
“실패작인데 왜 보관하시는 거죠? 폐기하는 게 낫지 않나요?”
귀엽고 순둥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루루티는 아주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쓸모가 있거든. 알아보기 쉽게 따로 보관해 줘.”
“네! 알겠어요! 한나 신관님 부탁이라면 들어드려야죠!”
“나도 머무는 동안 열심히 성수 제작해서 기부할게.”
“감사해요. 헤헤.”
한나는 루루티의 몽실몽실한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었다. 그러곤, 멀리 두 사람을 큰 소리로 불렀다.
“어이! 부하 1호, 2호! 이리 와서 루루티 신관님이랑 인사해!”
“아앗, 저는 아직 견습 신관인데……!”
정식 신관이 아닌 자신을 신관이라고 칭하는 것에 루루티가 화들짝 놀라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 사소한 거에 신경 쓸 것 없어. 지금 신관님이나 미래의 신관님이나 신관은 신관이지. 이번 기회에 루루티의 견습 딱지를 떼어 줄 공로를 세우자고.”
“공로요?”
“응. 견습 기간을 모두 채우지 않아도 공로가 있으면 특진할 수 있거든.”
한나의 말에 루루티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하는 법이지. 그럴 때일수록 진급이 빠르고 말이야. 원래 전쟁 중에 장성이 많이 나오고…….”
“선생님은, 어린아이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마샤는 중얼거리는 한나의 말허리를 끊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는지 한나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루루티가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이 정도 농담은 받아들일 연령이라고 한나는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루루티의 앳된 외모 때문에 마샤는 그녀를 어리게 보고 있는 듯했다.
“안녕. 귀여운 신관님.”
그는 방긋 웃으며 루루티를 향해 인사했다. 그에 루루티는 볼을 붉히며 꾸벅 인사를 했다.
“둘은 빨리 성수 상자 좀 날라.”
“아아. 우리 대장님은 정말 알뜰하게 우릴 부려먹을 생각인가 봐요.”
마샤가 루루티를 향해 눈을 찡끗, 거렸다. 한나는 여전히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그 말에 마샤를 쏘아보았다.
“저도 도울게요!”
루루티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마차로 달려갔다. 그 모습도 참으로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런 루루티를 보고 있자니 한나는 이곳이 전쟁터와 다름없다는 것도 잊고 소풍이나 다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 *
“던져! 던지라고!”
갈라티아에 온 지 일주일.
평화로웠던 첫날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한나와 마샤, 제레미는 광산 앞에서 성수 병을 던지고 있었다.
“그냥 마법으로 밀어 버리죠.”
“저기 광부들도 있는 거 안 보여?”
“도대체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으악!”
날아오는 폭탄을 마샤는 간발의 차로 튕겨 냈다.
“집중하라고, 그러다 공짜 파마하게 생겼네.”
“선생님, 저는 그렇다 치고, 제레미 칼 뽑는데요?”
마샤의 말에 한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제레미!”
제레미는 참을성의 한계에 다다랐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점점 도를 넘어서 공격해 오는 잔당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냥 저희 길드를 부르죠. 산까지 올라올 필요도 없어요. 마을에 있을 때 싹 처리해 버려요.”
“그딴 소리 하지 마. 비켜, 내가 상대한다.”
한나는 양손에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사이에 성수 병을 촤르륵, 끼워 넣었다.
“저기, 마녀가 온다!”
악당 무리 중 한 명이 외쳤다.
“어째서 내가 마녀가 된 거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신관복을 입지 않았을 뿐인데, 일주일 만에 마녀가 되었다.
이거 어쩌면 신전에 마녀로 끌려갈 수도 있겠어.
신관이 마녀랍시고 끌려가면 교황 성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수치스럽다며 그냥 마녀가 맞다고 넘겨 버리진 않을까.
“다시 산에 몰래 올라오면 어떻게 된다고 했죠?”
그래도 한나는 친절하게 나쁜 녀석들을 대하려 노력했다. 어디 소속의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만 만나지 말자는 주의였다.
“마녀가 독약을 던진다!”
“아니, 오지 말라는데 기어코 와서 맞고 괴로워하는 게 누군데. 그리고 나 아직 던지지도 않았거든요?”
“방어막을 펼쳐!”
“얼씨구.”
오늘은 어디서 마법 용품까지 챙겨 왔는지 가관이었다. 한나는 정말 이 상황이 싫었다.
왜! 말을 하면! 못 알아듣냐고!
“너희 길드원들도 저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니?”
한나가 제레미에게 물었다.
“주로 말이 필요 없는 일만 하는지라.”
“안 봐도 뻔하네.”
한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성수 병 하나를 톡, 던졌다.
“으아악!”
“파, 팔에 묻었어!”
“찰스가 거품을 물었어!”
성수에 맞은 악당들이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 녀석들이 성수를 맞고 몸이 건강해졌다는 걸 느끼고 성수 세례를 받으러 이곳에 일부러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요란스럽긴.”
한나는 툭, 툭, 툭, 손가락에 끼워져있던 성수를 하나씩 차례대로 마저 던졌다.
그동안 어떻게 실패해야 더 아프게 부작용이 생기는지를 알게 된 한나의 성수는 더욱 발전해 있었다.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요.”
“쓰러진 사람들 묶어서 지장 찍어.”
한나는 정신을 잃은 사람들에게 강제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하고 있었다. 산에 다시 올라올 시, 광부 노예가 되겠다는 계약서였다.
뭐 실효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겁을 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소문 이상하게 난 거 알아요?”
한나는 기분 좋게 악당들의 엄지에 인주를 바르며 마샤에게 답했다.
“무슨 소문?”
“갈리아 산의 마녀가 산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제 노예로 만든다고.”
“오……. 그거 괜찮은 소문인데.”
“조금만 더 소문이 퍼지면 현상금 걸린 악당이 될 텐데?”
“소문이란 건 참, 와전이 심해.”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고.”
제레미는 열심히 계약서에 손도장을 꾹꾹 찍고 있는 한나를 보며 치를 떨었다.
악명 높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제레미였지만, 한나는 그에게도 어떤 의미로 신선하게 무서운 존재였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갈라티아 마을에 온 지 일주일차.
한나는 악명을 얻었다.
* * *
가을밤의 차가운 공기가 한나의 어깨를 스쳤다.
“으으, 낮에는 산에서 굴러, 밤에는 성수 만들어, 이러다 제도로 돌아가기 전에 요절하고 말 거야.”
처음 황궁으로 갔을 때, 꿀빨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냥 거기 있을걸.
왜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아, 춥다.”
겨울이 오려나.
한나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신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발길을 옮겼다. 신전 정문을 닫고 나서자, 한 검은 인영이 그녀를 반겼다.
“밤길은 위험하다니까요.”
“제레미, 아직 안 잤어?”
“늦을 것 같으면 차라리 신전에서 자요.”
“요즘은 마을 분위기도 많이 좋아졌는데 뭐.”
제레미는 그녀의 너스레에 답하지 않고 제 외투를 벗었다. 당연히 그 외투가 향한 곳은 한나의 썰렁한 어깨 위였다.
“걱정돼서 온 거야?”
한나는 익숙한 듯 외투를 손으로 고정하며 말했다.
“선생님이 워낙 원한을 많이 사서.”
“또 그렇게 말한다.”
츤데레도 아니고, 그냥 걱정돼서 왔다고 하면 될걸. 참 귀엽게 군다니까.
한나는 ‘후후.’ 소리를 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단한 방법을 고수할 거예요?”
“네 말은 너희 길드원들을 끌어들여서 단숨에 이곳을 장악해 버리자는 거지?”
한나가 물었다. 이제는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마샤는 마법으로 밀어 버리자, 제레미는 길드원들을 풀자.
“아서라, 아서.”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역시 수문장으로 꼬꼬를 풀어 놓는 건데…….
문제는 마탑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탑이 쫌생이처럼 굴어.”
“원래 그런 곳인 거 몰랐어요?”
“어쨌거나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이제 갈라티아 마을에 진을 치고 있던 일당들이 반은 줄었잖아?”
“어차피 시간 지나면 떨어져 나갈 잔챙이들이죠.”
“아직 뺏긴 광석도 없고.”
“선생님이 쓰러지는 게 빠를까요, 이곳이 정리되는 게 빠를까요.”
“아마 내가 쓰러지는 거?”
이건 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결정은 무식하게 하면서, 일 처리는 답답하게 해.”
“내 치하에 들어왔으면, 내 방식을 따르렴.”
한나는 제레미의 투정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의 말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엇, 저기 아직 영업하는데 우리 야식 먹을까?”
아직 불이 밝혀져 있는 식당을 한나가 가리켰다.
“숙소에 가 봐요. 빨간 머리 녀석이 요란스럽게 뭘 차려 놨어요.”
“오. 마샤는 역시 최고야.”
한나의 칭찬에 제레미는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냈다.
‘그나저나, 또 빨간 머리라고 하는 걸 보니 둘이 싸웠나.’
제레미가 마샤를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면 아주 좋음, 저 녀석이나 저놈이라고 부르면 좋음, 빨간 머리라고 부르면 좋지 않음을 뜻했다.
여기서 정확히 말해 두지만 중간은 없다.
갈라티아 마을에 온 뒤로 ‘빨간 머리’라고 부르는 빈도수가 잦아졌다.
어릴 땐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왜 이리 서로 부딪히는 건지.
아. 이건 미화된 추억인가.
“내일 선생님은 빠져요.”
갑자기 자신은 빠지라는 말에 한나가 어리둥절하게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왜?”
설마 단둘이 가서 마샤를 묻어 버리려고…….
“붉은 눈 길드가 마을에 왔어요. 당연히 산으로 갈 예정이고.”
정보가 빠른 녀석이 팀에 있다는 것은 이런 게 좋았다. 가만히 있어도 마을 돌아가는 상황이 보고가 되니.
“그곳이 뭐하는 곳인데?”
“저희 길드와 앙숙인 곳이죠.”
“똑같이 나쁜 짓……. 흠흠, 그게 아니라, 다소 험한 일을 하는 곳들 아니니?”
둘 다 똑같은 나쁜 놈들 아니냐고 말하려던 한나는 급히 말을 순화시켰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기분 상할 수 있으니 말조심을 해야 한다.
특히 제레미는 은근히 섬세한 기질이 있어서…….
“골치 아픈 놈들이에요.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녀석들이고.”
그건 너희들 세계에선 일을 잘한다는 뜻……?
“그 정도 길드가 움직였다는 건, 앞으로 더 위험해질 거라는 얘기죠.”
“좋은 소식은 아니네. 그래도 기각이야. 내일도 나는 같이 갈 거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나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제레미가 그 손을 잡아챘다.
“말 좀 들어요.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하고.”
“언제는 안 위험해서 함께했어?”
한나는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는 듯 말했고, 제레미는 조용히 산을 오르고, 성수를 던지느라 생긴 그녀의 팔 생채기들을 눈으로 살폈다.
엄지손가락이 딱지가 앉은 상처 부위를 훑고 지나갔다.
“겁먹고 내빼라고 함께했더니.”
제레미는 한나가 북부를 치열하게 겪다 보면 금방 포기할 거라 생각했었다.
“……오히려 신이 나서는.”
하지만 자신의 선생님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신나다니.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다.”
“선생님.”
거칠고 큰 손에 붙들린 손목이 불편해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제레미는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일에 선생님이 끼어들면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아요. 이렇게, 우스운 동행을 할 만큼.”
“……딱히 우리가 걸어온 길에 웃긴 일은 없었는데.”
한나는 신전에서 숙소까지의 길을 말했지만, 제레미는 제도에서 북부까지의 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엉망으로 휘말려 버린 이 길을, 어찌 마무리해야 할지.
“다른 사람은 다 돼도, 선생님은 그러지 말아요.”
“뭘 하지 말라는 거야?”
“적이 되지 말아요.”
제레미는 이대로 흘러, 최악의 결과까지 도달할까 두려웠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두렵다는 기분을 느껴 본 게 언제더라.
“날 겁주려거든, 아직 멀었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어.”
그와 달리 한나는 제레미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되는 상황은 이미 수십, 수백 번은 그려 보았었다. 더 이상 그건 저를 머뭇거리게 하는 건더기가 되지 못한다.
“네가 나를 해치지 못할 거란 건, 이미 알아.”
한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달빛이 유독,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제가 무섭지 않아요?”
“왜 널 무서워해야 하지?”
“선생님은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나든, 누구에게든.”
아마 몇 해 전까지라면 그랬다.
제레미나 이안, 마샤 중 누군가의 손에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이제 넌 아니야. 날 죽이지 못하는 것엔, 겁내지 않아.”
“확신하시네요.”
“아니라고 말하기엔, 네 눈빛을 좀 봐.”
“내 눈빛이 어떤데요?”
한나는 제레미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보다 웃었다.
“투명하고, 여린 마음.”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이토록 투명하게 내비치는 감정을.
“소중한 것을 잃을까 봐 잔뜩 겁먹었잖아.”
그런 주제에 누가 누굴 겁주려고.
“그게 나의 믿음이든, 혹은 내 신변이든.”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전 비정한 인간이에요.”
“하지만 나에겐 아니잖아.”
“제가 하는 일이 어떤 건지는 알아요?”
“직업에 귀천이 있나.”
사실 자세한 것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실망까진 아니라도, 제레미에게 훈계를 하고 싶을까 봐서였다.
이제 한나는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이 세상 속에서 암흑길드 수장으로 만들어졌다.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게 이곳의 인물들에게는 존재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행하고 있으니.”
한나는 제레미의 손을 팔에서 떼어 냈다.
“만약 우리가 경쟁하게 된다면, 난 너에게 많이 미안해질 거야.”
“어째서.”
“난 항상 너보다 유리한 입지에 있거든.”
이 세계의 굴레에서 벗어난 유일한 존재니까.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인물, 그게 바로 자신이다.
한나의 말에 제레미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에게 이 대화는 곱씹을 부분이 많았다.
“그럼 이건 어때요.”
정말, 겁나는 게 없을까.
인간이라면 그럴 리 없다.
“선생님이 나를 겨누게 되는 상황.”
그것마저 겁나지 않느냐 물었다.
“…….”
한나는 그런 가정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이들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아.”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빴다. 한나의 잔뜩 일그러진 눈살을 보며, 제레미는 옅게 웃었다.
“두려운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네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괜히 찜찜해지게.
한나는 제레미가 또 이상행동을 할까 걱정됐다.
“그래요. 그건 저한테도 너무 상처일 것 같네요.”
제레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찜찜한 대화의 마무리에 한나는 꼭 일을 보고 뒤처리를 못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말싸움에서 진 기분도 들고.
‘얘는 정말 가끔씩 속을 태운다니까.’
아픈 손가락인가.
‘하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
마샤나 이안 역시 언제 어제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한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안이 걱정되었다.
‘혹 어디 아픈 곳은 없겠지.’
이래서는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라도 모자랄 것 같다. 도망치지 않고, 싸우기로 한 이상 아이들 중 누구도 잃을 생각이 없었다.
서로 싸우게 하지 않고, 다치게 하지 않고, 죽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이 녀석들의 앞길을 막는 일이 된다고 해도.
한나는 자신이 이렇게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10년 전 그날, 처음 짐보따리를 쌌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을 텐데.
‘눈물.’
그 당시에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아이들의 눈물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여전히 그 어린아이들의 눈물이었다.
“시집, 장가보내고 나면 좀 덜어지려나.”
이 말도 안 되는 보호자병이 말이다.
* * *
“……고대 마수를 갈리아 산에 풀어 놓는 것에 승인을 해 달라.”
마탑주는 마샤에게서 도착한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녀석은, 황궁에 보내 놨더니 왜 북부에 가 있는지부터 설명을 해야지.”
밑도 끝도 없이 고대 마수를 풀어놓는 걸 허가해 달라는 편지 하나 달랑 보낸 마샤의 소식에 마탑주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게다가 더 황당한 건, 이미 광산 주인의 허락을 다 받았다는 편지 마지막 줄이었다.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는 건가.
마탑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랬다면 황실에서 공문을 보냈어야 마땅한데.
“하지만 없는 소릴 할 녀석은 아닌데.”
아무것도 모르는 마탑주의 궁금증만 더 깊어져 갔다.
똑똑.
그때 누군가 마탑주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마탑주님! 과, 광석을 정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상급 마법사 로베인은 평소 차분한 성격이었는데, 오늘은 허둥지둥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가 가지고 온 정보가 그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나온 정보지?”
마탑주가 물었다.
“광물을 노리는 음지의 길드에서 서왕국의 밀서를 입수해 알아낸 정보입니다.”
서왕국은 마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곳은 아예 나라 자체가 마법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마법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곳에 심어 둔 정보통이 기밀문서를 필사해 보냈습니다.”
마탑주는 그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의 눈이 빠르게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성물.”
그 해답은 바로 성물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성물은 교황의 소유였다.
“신전이라.”
안 그래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신전인데, 이 정보까지 넘어갔다가는 날개를 달아 주는 꼴이 될 격이었다.
“성물. 성물…….”
마탑주가 중얼거렸다.
고대부터 내려온 성물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각각 사용처와 출처에 맞게 황실, 마탑, 신전이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데, 그중 필요한 것이 하필 신전에 있었던 것이다.
“곤란하게 됐군.”
책상 위에 밀서를 내려놓은 마탑주의 손가락이 나무 책상을 손톱으로 긁으며 마샤의 편지로 옮겨갔다.
툭. 툭.
그는 한 손으로는 이마를 짚고, 한 손으로는 편지의 귀퉁이를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마탑주님?”
한참을 말이 없는 마탑주를 로베인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는 자신이 전달한 정보에 대한 어떤 지시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자네는 북부에 편지 하나만 전달하고 오게.”
“예?”
로베인이 되물었다.
이 중요한 사안을 미뤄 두고, 갑자기 편지 전달이라니?
로베인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 * *
로베인은 그날 저녁 빠르게 북부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마탑주가 빠르게 처리하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마샤의 편지에 적힌 숙소를 찾아갔다. 아쉽게도 마샤는 부재중이었다.
숙소 주인은 로베인에게 산으로 가라고 조언했다. 로베인은 어차피 기다리며 시간을 버리는 것보단 그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숙소 주인의 설명에 따라 갈리아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산을 오른 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산 중턱, 광산의 입구에는 한 여인과, 자신이 찾던 마샤, 그리고 어마어마한 용병 무리가 주둔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참으로 해괴했다. 수많은 용병들이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실 이 상황은, 로베인에게만 황당한 게 아니었다.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이여.”
한나는 여느 날처럼 산을 올랐다.
그리고 오늘은 성수를 어떻게 던져야 잘 던졌다고 소문이 나려나, 하는 우스개 생각을 하며 오늘도 아득바득 찾아올 그들을 기다렸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나의 눈앞에 나타난 용병들이 조금 반갑게 느껴졌다.
그런데 용병들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한나는 신종 전략인가 싶어 성수를 양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선 이상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희를 부하로 삼아 주십시오!”
……뭔 개똥 같은 소리를.
“그, 그게 무슨 말인지…….”
한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깜짝 놀라 무슨 헛소리냐며 성수를 던질 뻔했다.
“북부의 마녀! 그 악명이 드리우는 길에 부하로 삼아 주신다면, 이 몸을 바쳐 열심히 앞장서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북부의 마녀라니.
그딴 헛소문을 퍼트린 것도 모자라 부하가 되겠다니.
당황한 한나와 달리, 무릎을 꿇은 용병들의 우두머리가 제 심장이 위치한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존경을 담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한나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미치겠네.”
한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신관이라는 것을.
“제가 뭐, 누구를 들이고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 앞가림도 힘들다고요.”
최대한 이 사람을 설득해서 돌려보내기 위해 한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이곳에 모인 용병들, 이름 없는 길드원들은 굳게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길드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뭐라고 이러는 건데!”
“저는 마녀님을 만나고 육체와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제가 머물 곳은 마녀님의 곁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건 그냥 성수의 효과라고, 이 사람아.
“그건……. 하, 하여튼 전 그런 능력 없어요.”
“제국, 아니, 대륙을 삼키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는 피의 마녀!”
뭐, 뭔 야망?
“흑마법사를 부리고, 소드마스터를 부리지 않습니까!”
얘네 그냥 마법사랑 검사인데.
그때, 옆에서 다른 용병이 말을 거들었다.
“드래곤의 후손이라는 소문도 들었어.”
그런 건 신화에나 있는 거지.
“무슨 소리야. 사실은 숨겨진 사탄의 자식이라는 게 정설이라고!”
……사탄은 왜 맨날 자식을 숨긴다니?
“어쨌거나 광석을 독점한다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는 거지!”
“……아니라니까 그러네.”
저들끼리 웅성웅성, 자신에 대해 허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한나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마녀님! 광석을 쓸어담아 뭘 하실 겁니까?”
한 용병이 한나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할 건데…….”
정말 한나가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아무데도 쓰이지 말라고.
누구 손에도 들어가지 말고, 나쁜 곳에는 절대 쓰이지 말라고.
“역시, 우리 따위에게 큰 뜻을 쉽게 말할 수 없으시겠죠.”
이 녀석들, 대답 따위 안중에 없구나?
“황제가 되시려는 거 아닐까.”
그거 반역이야. 목 잘리기 싫으면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한나는 점점 말이 안 되는 소리에 반박할 의욕도 사라졌다.
“무슨 그런 소박한 소리를. 대륙 통일이지.”
저들끼리 허황된 꿈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댁들이 원하는 건 드래곤을 불러와도 못 할 것 같은데.’
주변이 금방 시끄러워졌다.
어느덧 용병들은 시장판처럼 소리를 높이며 원대한 야망이니, 자신의 정체가 어떠니, 하는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한참을 듣고 있던 한나는 이제는 말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만, 그만! 이제 그만들 해요.”
“저희를 부하로 삼아 주시는 겁니까?”
한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하의 ‘부’자도 꺼낸 적이 없는데, 왜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자, 제가 하는 말 잘 들어요.”
“예!”
모두의 시선이 한나에게 못 박혔다.
“첫째로 저는, 대륙 통일, 그런 거 할 생각도, 능력도 없어요.”
한나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나쁜 짓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둘째, 나쁜 짓 할 생각도 없어요.”
“그렇다면……. 아무 일이라도…….”
“셋째,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요.”
여기저기서 혼란스러운 시선이 오갔다.
“무엇보다 부하를 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역시…….”
무리의 우두머리인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나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건가.
“……역시 저희로는 성에 안 차시는 거겠죠.”
응?
“북부의 마녀께 하잘것없는 저희 재주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죠.”
시무룩한 반응에 한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 양반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역시……!”
“그랬던 건가!”
“저희의 쓸모를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무래도, 다들 오해를 단단히 한 것 같다.
“오늘부터, 마녀님을 따라다니는 추종자라도 하겠습니다!”
“언제가 우리의 쓸모를 알아주실 거야!”
“맞아!”
아니……. 아니라고.
한나는 다급하게 지금까지 조용하게 있던 마샤와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이 개판을 말려 달라고.
하지만 한나의 애절한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제레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자세로 어깨를 한번 으쓱거릴 뿐이었고,
“와우, 선생님 대단하네요.”
마샤는 눈치 없이 박수나 치고 있었다.
“대륙 통일할 땐, 저도 불러 줘요.”
아니, 눈치는 있는데 그냥 놀리는 건가.
“느히, 증믈, 이르키 글끄야? (너희 정말 이렇게 굴 거야?)”
이를 악문 한나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게 무슨 팀이냐고.
난처한 일은 나 몰라라 떠넘기다니.
“조심해요. 선생님, 신상 들키면 신전까지 따라가겠어.”
마샤는 계속 피식피식 웃으며 한나의 귀에 속삭였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
“지구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염병. 진짜네.
진짜로 신전까지 따라오겠어.
“그, 음……. 그래요. 여러분의 의견은 충분히 피력되었고, 그럼 제가 좀 심사숙고를…….”
일단 이 상황을 피하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한나는 주섬주섬 준비했던 성수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꼭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그건 나중에 서면으로 의견을 전달할게요.”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잠수 타야지.
제레미의 말대로 산에 오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러다가 마녀니 뭐니로 몰려서 추종자도 생기고, 신전에 잡혀가고, 창피하게 설명하는 등 생각만 해도 뇌가 저릿저릿거리는 상황이 그려졌다.
“그럼 오늘은 다들 해산하죠.”
“명령이십니까?”
한 용병의 질문에 한나가 움찔했다. 명령이면 진짜 부하가 된 것 같잖아.
“……그, 그냥 부탁인데요.”
제발 오버하지 말라고.
“너희도 빨리 짐 챙겨. 철수하자.”
“왜요. 한참 재미있는데.”
마샤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망할 자식.
그렇게 사람들을 달래고 상황을 일단락시키는가 싶었던 그 순간, 갑자기 산을 내려가는 길목이 시끌시끌해졌다.
“저건 또 뭐야?”
모두의 시선이 한나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향했다.
“뭐야?”
“음, 새로운 이벤트?”
한나의 물음에 마샤가 답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동안 보아 왔던 이들과는 어딘지 달랐다. 조직적인 모습이 돋보였다. 그들은 누가 봐도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었다.
검은 무리는 잔뜩 날을 세우며 광산 앞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던 그때, 검은 무리가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 중앙에 한 남자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이런 이런.”
검은색 로브에 붉은 자수가 빼곡한 펄럭거리는 옷을 입은 사내였다. 누가 보아도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옷과 달리 그의 허리에는 날렵한 검이 매어져 있었다.
그는 마치 누군가와 구면인 듯,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게 누구야.”
그의 시선이 제레미에게 향해 있었다.
“반가운 이를 이곳에서 만났구만.”
능글능글한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붉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는데, 이 상황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펠릭스.”
제레미는 차가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마 짐작하건대, 저 남자가 지난날 제레미가 경고했던 그치인 듯싶었다.
“북부의 마녀께선, 이미 거물을 협력자로 두셨군.”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 한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부하들도 그의 걸음에 맞춰 뒤따랐다.
“내가 그 자리를 좀 꿰차 볼까 했더니.”
남자는 이제 한나 일행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제레미가 한나의 앞으로 나서며 그에게 말했다.
“그 꽃은, 날 주려고 가져온 건가?”
그의 조롱에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우리 사이에 꽃이 오갈 일이라고는 장례식뿐이지 않나?”
둘의 대화를 듣던 한나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말 진짜 잘하네.’
그의 언변에 제레미가 한 방 먹은 게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이 꽃은, 이쪽.”
펠릭스는 제레미의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꽃다발을 한나에게 내밀었다. 그 꽃을 보고 있다니 또 한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 이유는 이 꽃이, ‘북부의 마녀에게’ 건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는 부정하기 애매할 정도로 자신은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이런 거물 악당들도 손잡자고 달려드는 걸 보니.
“이쪽보다는 우리 길드가 조금 더 일을 잘할 텐데 말입니다.”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는 펠릭스의 모습에 한나는 속이 울렁거릴 뻔했다. 그에 한나는 단호하게 꽃다발을 거절하며 말했다.
“일은 내가 다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기껏 애써서 구해 왔는데.”
펠릭스는 쓸모가 없어진 꽃다발을 안타까운 듯 바라보다 이내 뒤로 휙, 하고 던져 버렸다.
“내 손에, 꽃이 들려 있는 게 그나마 당신에게 좋은 상황일 텐데.”
그 말에 한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 꽃이 사라졌으니, 다른 것을 들겠다는 말인가.
입으로만 떠드는 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곧장 그의 손이 제 허리춤의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한나가 주춤 물러섰고, 제레미는 빠르게 제 검을 뽑아냈다.
캉―!
날카로운 마찰음이 귓전을 때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펠릭스의 길드원들이 일제히 검은 빼 들었다.
“마녀님을 지켜라!”
그 순간, 한나의 부하를 자처하던 무리가 우르르 일어났다. 그들은 저마다 검이나 도끼, 비수등을 꺼내 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챙―
퍽―
끼긱―
평화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무기가 충돌했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한나는 순간 굳어 버렸다. 그동안 많은 이들을 광산에서 쫓아냈지만, 이렇게 출혈이 일어나는 전투는 없었다.
“선생님!”
마샤의 부름에 한나의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이렇게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나는 잽싸게 챙겨 넣었던 성수를 다시 꺼냈다.
“마샤! 이거 받아!”
마샤에게 성수를 건넨 한나가 제레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레미는 이미 치열하게 그들과 싸우고 있었다. 검술에 무지한 한나가 보아도 살벌한 대치였다.
“대장님을 지켜라!”
순간 용병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난 댁들 대장이 아니……. 으앗!”
반박하려 했지만, 한나는 자신에게 뻗쳐 오는 공격에 호다닥, 뒤로 물러섰다.
간발의 차이로 검이 비껴갔다. 옷자락이 조금 베여 나갔다.
그래도 그간 전투 경험이 있다고 피하는 것 하나는 기똥차게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 한나를 발견한 마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출혈 없는 전투는 불가능하겠네요.”
그의 손에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말 지옥의 서막이 올랐다.
* * *
그 모습을 저 멀리 수풀 뒤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로베인은 이 상황이 난감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길래 잠시 염탐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큰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이제는 나서서 도와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를 어쩐다.”
하지만 저들이 뭘 하는 건지, 마샤가 무슨 뜻을 품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니 쉬이 정체를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마샤를 도와야 하지 않나.”
로베인이 중얼거렸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기엔 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후에 나타난 무리에도 마법사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길드 자체에 마법사를 데리고 있다는 건 그들이 한낱 잔챙이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쨌거나 내 임무는 이 편지를 전하는 거니까…….”
로베인은 마샤가 죽기라도 한다면 어차피 임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먼 길을 돌아 마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워낙 중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샤인지라 몰래 수풀에 숨어 다가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방어막, 방어막.”
어떻게든 중앙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도끼에 머리를 찍힐 수 있으니 안전하게 방어막을 둘렀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어이쿠, 조심하십시오. 그러다 다치……. 아이고, 벌써 다치셨네.”
로베인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최대한 전투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마샤에게 다가갔다.
“마샤!”
목소리 정도는 들릴 거리까지 좁혀지자, 로베인이 마샤를 불렀다. 하지만 마샤는 이미 눈이 돌아 있었다.
“마샤! 마샤 플레트!”
그가 재차 목청을 높였고, 순간 마샤의 고개가 획 돌아가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샤 플레트! 마탑주님의 서신이다!”
그를 발견한 마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타이밍 끝내주네. 허락한다는 내용이죠?”
“응? 내용까지는…….”
“내가 지금 좀 바쁘니까, 허락하는 건지 아닌지 좀 읽어 줘요.”
마샤는 로베인에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마법을 시전하며 적을 튕겨 내고 있었다.
그 긴박한 모습에 로베인은 엉겁결에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서론이 길었지만, 편지의 끝에는 분명 허락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찾았다! 허, 허락한다!”
“예쓰.”
마샤는 그의 외침에 환하게 웃으며 제 옷깃을 헤치고 목걸이를 손으로 쥐었다.
쿠르릉―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검은 연기가 마샤의 주위를 휘감았다. 방어막을 두르고 있긴 하지만, 검은 기운에 놀란 로베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밀려드는 엄청난 기운에 사람들은 전투를 하다 말고 멈춰 섰다.
하늘에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나타났다.
[끄륵―]
익숙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꼬꼬?”
가장 먼저 하늘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한나였다. 열심히 성수 병을 던지다 말고 꼬꼬와 눈이 마주쳤다.
“저건 또 뭘까.”
한편, 제레미와 검을 맞대고 있던 펠릭스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고대 마수의 모습에 잔뜩 긴장했다.
캉―
서로 힘겨루기를 하던 검이 반동과 함께 부딪히며 떨어져 나갔다. 제레미와 펠릭스는 서로 숨을 고르며 상황을 탐색했다.
“재미있는 걸 데리고 다니는군. 저건 정체가 뭐지?”
“글쎄. 알아서 뭐하겠어. 어차피 죽을 놈이.”
제레미의 빈정거림에 펠릭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떼거리로 몰고 다니는 부하 녀석들이 왜 없나 했더니, 대단한 복병을 달고 있었군.”
펠릭스의 곁으로 길드원 중 한 명이 달려왔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펠릭스가 한 걸음 물러나는 모습을 봤음에도 제레미는 그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꼬꼬를 발견한 뒤 겁을 먹고 달아날 모양새였다.
“튈 거면 빨리 튀지 그래. 이러다 네 수하들 다 죽겠는데.”
제레미는 커다란 발톱으로 펠릭스 패거리를 밟고 있는 꼬꼬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주인을 잘못 선택한 말로이려나.”
제레미는 이제 상황이 금방 진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한 펠릭스는 승산이 없는 싸움에 불나방처럼 덤벼들 치가 아니었다.
이익과 손해를 철저하게 가늠한 뒤 행동에 옮기는 녀석이었으니.
“악!”
그때, 제레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선생님!”
마샤의 외침도 동시에 터져 나왔지만 제레미가 달려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윽…….”
갑자기 나타난 꼬꼬가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외상을 입은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나는 그것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성수를 던져 대고 있었는데, 그중 중상을 입은 붉은 달 길드원을 보고 만 것이다.
즉시 허리를 깊게 베인 그에게 성수를 부으러 달려갔다.
하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던 붉은 달 길드원은 적인 한나가 다가가자 그녀에게 품속의 비수를 던진 것이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갔던지라 한나는 그 비수를 피하지 못했다.
“아……. 으…….”
어깨에 박힌 비수 때문에 한나는 고통에 몸을 떨어야 했다. 피가 새어 나오는 어깨를 움켜쥔 한나는 정신을 다잡았다. 비수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다행히도 비수는 그리 깊게 박히지 않았는지 한나의 힘에도 쉬이 딸려 나왔다.
“하윽…….”
그래도 아픈 건 마찬가지였지만.
비수가 뽑히자 출혈이 더 심해졌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떨어뜨렸던 성수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나의 병마개를 톡, 땄다.
‘……아, 이걸 나한테 붓는다고?’
비록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나, 이성은 살아 있었다. 이 성수를 뿌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상처를 치료하는 게 나을지, 그냥 비수 꽂힌 채로 아픈 게 나을지 망설여졌다.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푹―
한나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앞에 나타난 제레미가 그녀에게 비수를 던진 길드원을 검으로 찔렀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구르고 있던 길드원은 제레미의 검과 함께 흙바닥에 아예 꽂혀 버리고 말았다.
“제레미!”
놀란 한나는 더 이상 고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마개가 열린 성수를 제 어깨에 부어 버렸다.
“윽.”
붓자마자 그냥 비수 찔린 고통을 느끼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낮이었지만 눈앞에 별이 아른거렸다.
“젠장.”
욕이 절로 나왔다.
퍽―
그때 한나의 눈에 제레미가 이미 검에 찔린 길드원의 복부를 걷어차는 것이 들어왔다.
“제레미!”
한나는 이러다 사람 죽겠구나 싶어 다시 제레미를 불렀고, 그와 동시에 제레미가 몸을 돌려 한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곧장 무릎을 꿇고 한나를 살폈다.
“괜찮아요? 깊게 들어갔어요? 어디 봐요.”
제레미는 방금까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한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성수의 지독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하기도 하고, 방금 제레미의 폭력적인 모습이 충격이기도 했다.
“윽……. 제레미.”
“네. 성수는 썼어요? 제가 더 가지고 올까요?”
“아니, 아니. 여기 많이 있어.”
한나는 바닥을 구르는 성수를 집어 들어 제레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바, 방금 그 사람한테 부어 주고 와.”
“누구요.”
“네가! ……하, 네가 검으로 찌른 사람.”
제레미는 성수를 쥔 채 멀뚱히 한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누굴 죽이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야.”
그 말에 제레미가 즉시 반박했다.
“선생님이 죽을 뻔했어요.”
“안 죽었어. 당장 가서 치료해.”
“당신, 죽을 뻔했다니까.”
제레미가 정색했다. 당장 숨통을 끊어 버려도 모자랄 판국에 성수를 가져다 부으라니, 그의 기준에서 이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곳에선 내 명령에 따르기로 했지 않아?”
“들을 가치가 없네요.”
“그럼 줘. 내가 가서 치료할 테니.”
한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땅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제레미가 그런 한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
“선생님.”
“네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관여 안 해. 하지만 너도 내 가치관에 대해 논하지 마. 나는 악인이든 뭐든, 사람 죽는 꼴 보니까.”
한나가 제레미의 손을 뿌리쳐 냈다.
“내가 여기 온 건, 살인자 따위가 되고자 한 게 아니잖아.”
힘 하나 없는 동작이었지만, 제레미는 그녀의 팔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제레미가 찌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렇지만 걸음걸이는 아주 느릿했다. 후들거리는 다리 탓이었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던 제레미는 긴 숨을 내쉬고 제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한나의 손에 있는 성수를 낚아채 그녀를 지나쳐 다친 사람에게 다가갔다.
푹―
몸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 던져 버린 제레미는 그에게 성수를 쏟아부었다. 빈 병까지 남자에게 던져 버린 제레미가 뒤를 돌았다.
“됐죠?”
자신을 보고 있는 한나를 향해 말했다.
“끄아!”
성수가 끼얹어진 남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손이 제레미의 다리를 덥석 붙들었다.
지독한 고통에 자신을 해친다고 생각돼서였을까.
제레미는 자신의 다리를 붙든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거칠게 발을 빼내고 그의 손을 밟았다.
“끅!”
“봐요.”
놀란 한나에게 제레미는 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자식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면, 방금 저는 죽었겠죠. 그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제레미가 굳어 있는 한나에게 다가갔다.
“적에게 베푸는 자비만큼 멍청한 건 없어요.”
그렇게 그는 한나를 지나쳐 갔다.
“……제레미.”
멀어지는 제레미를 보고 있자니 한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벌써 말끔히 나으시다니! 역시 마녀!”
“방금 괴물까지 소환하셨다고!”
방금까지 착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몰려든 ‘부하’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신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대장 아니라니까요.”
“저기, 적들이 도망갑니다!”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붉은 달 길드원들이 후퇴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셈이 빠른 사내였다. 그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후퇴를 결정했다.
제레미에게 당해 쓰러져 있던 남자 역시 동료에게 부축을 받으며 사라졌는데, 아마 성수의 효과를 톡톡히 받고 있을 터였다.
“이겼습니다!”
“역시 대장님!”
“크하하하.”
자칭 한나의 ‘부하’들은 언제 목숨 건 전투를 했냐는 듯, 쾌활하게 웃었다.
“첫 승리를 축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팀이 아니라니까.
한나는 점점 이들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었다.
“우리 북부의 수호자 길드에게 덤비면 어떻게 되는지 알았겠지?”
그 말을 들은 한나는 황당했다.
……언제부터 그런 이상한 ‘북부의 수호자’ 같은 이름이 생긴 걸까.
5분 전? 3분 전?
“크하하, 이런 날은 돼지를 잡아야지!”
“대장님도 함께하셔야죠!”
“저 대장 아니고, 우린 길드 아니라니까요.”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는데 무슨 소리십니까! 껄껄.”
정말 뭘까, 이 상황은.
한나는 방금의 상황으로 이들에게 말려들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다들 행복해하고 있고, 자신을 도와준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 마냥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었다.
* * *
시끌벅적하던 자칭 한나의 부하들은 산을 내려갔다. 아직 산에 남은 한나는 제레미가 화가 나서 떠난 상황에 대해 마샤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사라졌군요.”
마샤는 꼬꼬의 턱을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가 실수를 한 걸까.”
“뭐 실수라고 할 건 없죠. 그냥 사는 방식이 다를 뿐.”
마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한나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자신을 돕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나선 제레미였다.
괜히 살인자라는 둥, 그런 말을 해서 상처를 준 걸까.
하지만 사람 목숨이 간당간당한 판국에 기분 상하지 않게 말을 고를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한나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사실 마샤가 생각하기에 한나가 말한 살인자 정도는 ‘그’ 악명 높다는 알란데 길드의 제레미에겐 가소로운 표현이었다.
그가 고작 그런 말로 상처를 받는 게 비웃음을 살 일이지.
아니면,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른 이도 아니고 한나이기 때문이었을까?
마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냥 선생님을 걱정하는 마음을 몰라준 거에 삐진 거 아니에요?”
“뭐?”
“기껏 걱정해서 달려갔더니, 살인자 취급이나 하면 삐질 수도 있죠. 뭐, 저처럼 도량이 넓은 위인은 그런 일로 토라지진 않지만요.”
마샤가 방긋 웃자, 꼬꼬도 기분 좋게 그르릉, 울음 소리를 냈다.
“꼬꼬, 미안해. 오랜만에 보는 건데 내가 기분 처지는 소리나 하고……. 그런데 마샤.”
“네?”
“저분은 누구셔?”
한나의 시선이 꼬꼬의 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마법사에게 향했다.
“아.”
마샤는 그제야 로베인이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 꼬꼬 발에 치여서 기절했는데 상황 끝나 가는 판이니, 그냥 누워 있게 뒀거든요. 아직도 정신이 안 돌아왔나 보네.”
그 말에 놀란 한나가 성수를 들어 올렸다.
“워워. 그거 뿌렸다가 충격에 더 사태가 나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까 나도 어깨에 부었는데 말끔하게 나았어. 효과는 끝내줘.”
어깨를 꺼내 보여 주려고 목깃을 당기자 마샤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됐어요. 증명까지 할 필요는 없고, 지금은 제가 깨울게요.”
“음……. 그래.”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요즘 느낀 건데, 점점 사람들이 아파하는 걸 즐기게 된 게 아닐까.
마샤가 마법사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푸른빛이 짧게 뿜어져 나온 뒤, 마법사의 눈이 번뜩 뜨였다.
“어흑!”
로베인은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깼어요?”
마샤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적들은?”
“쫓아냈어요.”
“……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 타이밍이 기가 막혔어요.”
“너……. 넌! 도대체 왜 북부에서! 아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로베인이 마샤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마샤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몸을 뒤로 물려 그의 손을 피했다.
“워워. 화내지 마요.”
“내가 심부름 한번 하다가 죽을 뻔했는데! 화가 안 나게 생겼어!”
“그렇게 화내면 심장에 안 좋아요. 우리 마법사들은 심장이 생명인데, 알면서.”
“……하. 진짜, 너 때문에 수명이…….”
“하여튼, 오늘 고마워요. 영감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줘요.”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설명을 해야 갈 것 아니야!”
로베인은 떠나려는 마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음…….”
마샤는 잠시 고민했다.
“북부의…… 수호자?”
마샤의 대답에 뒤에 있던 한나가 이마를 짚었다.
그 낯뜨거운 이름 좀 입 밖으로 내지 말아 줬으면.
“저, 저분은 누구지?”
그제야 한나를 발견했는지 로베인이 한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북부의…… 마녀?”
“야!”
그 순간, 마샤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한나였다.
“마녀?”
로베인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나를 보았다. 마녀라기엔 그녀에게서는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로베인은 이내 그녀가 정말 궁극의 경지에 도달해서 마력을 완벽하게 갈무리하고 있는 경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로베인의 표정을 본 마샤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구더러 마녀라는 거야.”
“이제 돌아가죠.”
마샤가 한나를 꼬꼬의 날개를 밟고 올라타게끔 이끌었다.
“설명은 마저 하고 가야지!”
로베인은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떠나려는 마샤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마샤는 가뿐하게 꼬꼬의 등에 올라타며 말했다.
“곧 돌아가서 자세히 설명한다고 전해요.”
* * *
그날 저녁, 한나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인지도 모를 만큼 배회하고 있었다.
문가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창가로.
쳇바퀴 돌듯 한참을 돌아다닌 후 결심을 한 듯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 어른스럽게 사과하고 화해하자.”
제레미와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테지만, 마샤의 말처럼 기껏 도우러 와서 살인자 운운하는 말을 들었으니, 제레미도 빈정이 상했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차피 이렇게 계속 서먹하게 지낼 수도 없으니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화해하는 게 맞았다.
한나가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레미?”
제레미가 소리도 없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역시 갑작스레 열린 문에 놀란 듯 멍하니 한나를 보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조우에 둘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한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레미의 손에 들린 약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자신의 몸 상태가 걱정돼서 온 모양이었다.
“들어올래?”
몸을 조금 비켜서며 한나가 말했다. 제레미는 군말 없이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탁.
문이 닫히고, 혼자 서성이던 방 안엔 둘이 되었다.
“편한 곳에 앉아. 차라도 한잔 내줄까?”
“선생님부터 앉아요. 상처 보러 온 거니까.”
“아…….”
그의 말에 한나는 냉큼 의자에 앉았다.
“바로 성수를 부어서 내상은 이미 말끔하게 나았어. 아무렇지도 않고…….”
횡설수설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어필하는 한나를 뒤로하고, 제레미가 약통을 협탁 위에 얹고 한나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깨의 환부를 보려면 옷깃을 젖혀야만 했다. 그의 손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내리깔린 시선이 옷깃이 흐르는 선을 따라 움직였다.
“아! 잠깐만.”
한나는 제레미가 자신의 어깨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눈치채고 옷 위로 걸치고 있던 가운을 제 손으로 젖혔다.
제레미는 흠칫 놀라며 손을 거둬들였다. 한나는 그런 제레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좋은 약이야? 너라면 좋은 약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그냥, 흉지지 말라고…….”
한나의 물음에 제레미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약통의 뚜껑을 열었다. 쌉싸름한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제레미는 연고를 한 움큼 손으로 떴다. 조금 전의 머뭇거림은 어디로 간 건지 그의 동작엔 거침이 없었다. 어깨의 상처 자국 말고는 제레미에게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도 없는 듯 보였다.
“앗.”
차가운 연고가 살에 닿자 한나는 짧게 몸을 떨었다.
“아파요?”
“아니. 갑자기 차가워서.”
이내 제레미는 말없이 연고가 흡수될 때까지 상처 부위에 조심스럽게 발라 주었다.
‘이제 화난 건 없어진 건가…….’
한나는 제레미의 집중하는 옆모습을 보며 낮의 일에 대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제레미, 낮에 있었던 일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말실수였다고?
널 비난한 게 아니라고?
“너한테 화낸 게 아니었어. 그냥 죽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알아요.”
제레미는 옷에 약이 묻지 않도록 붕대를 꺼내 들었다.
“제가 화난 건 선생님 말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그냥…….”
제레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선생님이 다친 게 화가 났던 거예요.”
순간 한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나 스스로한테 화가 나기도 했고.”
제레미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았다.
“그냥 다 답답해서.”
굳은살이 박힌 손이 계속 살에 스쳤지만, 워낙 조심스럽게 행동해서 그런지 마냥 투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선생님 말대로 우린 살아가는 방식이 많이 다르니까.”
“누가 맞고 틀리다고 할 수 없지.”
뒤탈이 없게 적을 섬멸해야 하는 제레미의 방식과, 적이라 할지라도 죽일 수는 없는 신관으로서의 신념이 부딪히더라도, 정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은 선생님 방식대로 해요.”
“대장이라서?”
무거운 분위기로 만들지 않기 위해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따라 줄 마음이 있으니까.”
“난 꽤나 유능한 대장인 모양이네.”
“글쎄요.”
지금은 비웃음처럼 작게 새어 나오는 웃음마저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해지지 마요.”
“네가 지켜 주는데, 위험할 일이 뭐 있겠어. 오늘도 날 구해 줬잖아.”
“내가 있는 곳에서든, 아닌 곳에서든.”
“딱 붙어 있든가.”
한나가 찡긋 웃으며 말하자, 제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선생님!”
발랄하게 문을 열어젖힌 마샤였다.
“……과 제레미?”
그는 한나와 제레미가 딱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단둘, 밀접한 거리, 조금 흘러내린 옷깃, 한나의 어깨에 닿아 있는 손.
“뭐하는 거야? 둘이.”
마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아, 마샤. 제레미가 약이랑 붕대를 가지고 와서…….”
“아.”
마샤는 뒤늦게 협탁 위의 약통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해한 건가?”
“우리가 뭐, 싸웠나.”
“누가 토라지긴 했죠. 꼭 어린애처럼.”
마샤의 빈정거림이 제레미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마샤가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고 붕대의 매듭짓기를 마무리할 뿐이었다.
“됐어요.”
“고마워.”
한나는 잘 매어진 붕대를 보며 옷깃을 추슬렀다.
“그런데 마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뇨. 통돼지 파티한다고 다 나오라는데요?”
“누가?”
한나는 이 밤에 무슨 파티인지 어리둥절함과 동시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선생님 부하들이요.”
마샤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한나는 그런 마샤에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지금 웃기지.”
“그럴 리가요. 선생님을 자랑스러워하는 중이랍니다.”
“어느 부분에서?”
“인재들을 거느리는……. 능력?”
마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 손 치워 봐.”
손 아래로는 웃고 있지?
응?
한나가 자신을 째려보자, 마샤는 숨기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어쨌거나 기다리고 있는데, 나가 보시죠.”
“……정말 기대되지 않는다.”
얼마나 이 상황이 난감하면 무려 고기가 기대되지 않는단 말인가.
“가요.”
마샤의 재촉에 한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제레미, 너도 가자. 뭘 축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축하파티니까.”
“왜 이리 기운이 없어요. 대자앙님.”
등을 떠미는 마샤의 손길을 느끼며 한나는 생각했다.
‘내가 난감해하는 게 그렇게 즐겁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