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상황은 모두 정리됐다.
아이들을 악당으로 자라지 않게 하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다. 마샤는 북부의 미친개, 이안은 극악무도한 폭군, 제레미는 짱짱 나쁜 놈이 되었다.
“그래, 원래 그런 거지. 일개 빙의자 따위가 무슨 원작을 바꾸겠다고. 하하하.”
한나는 꼼꼼히도 짐을 쌌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더 이상 발버둥치지 말고 냅다 튀자.
셋 중에 누구라도 원하는 광물 손에 넣고 잘 살아 주길 바라오.
기왕이면 서로 죽이지는 말라고 마지막 말이라도 전해야겠다고 한나는 다짐했다.
“이게 바로 속세의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떠나는 건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나는 속세의 재물을 알차게 챙기는 중이었다.
똑똑.
바쁜 한나의 방문이 두드려졌다.
“시, 신관님, 계신가요?”
한나는 익숙하지 않은 다급한 목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문 앞에는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던 황제의 시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그게 지금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셔서……. 그런데 황궁의는 몸에 손도 못 대게 하시니……. 그, 너무 급해서…….”
시녀는 횡설수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다고요?”
한나의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게 어젯밤 잠을 못 주무시더니,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 이, 일단 황제 폐하께 가죠.”
이제 휴식을 취하려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던 한나는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급하게 방을 나섰다.
신관들이 머무는 궁에서 황제궁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한나는 쉬지 않고 달려 그에게 향했다.
“폐하!”
누가 열어 주지도 않았지만 한나는 황제의 침실문을 벌컥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죠?”
한나는 이안의 곁을 둘러싸고 있는 황궁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얼굴빛도 좋지 않아 진맥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면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하셔서…….”
“네?”
이안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한나는 그가 잔인한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흑빛으로 물든 얼굴을 보자, 목이고 뭐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제 목소리 들리세요?”
한나는 얇은 옷 위로 이안의 몸을 조금 흔들었다.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렸지만, 의식이 없었다. 한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보고 옆에 있는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식은땀이 나는데 왜 이렇게 아무 조치도…….”
시녀들이 난감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마 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으름장은 황궁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가…….”
이안은 이렇게 쓰러진 와중에도 여전히 옷을 껴입고, 심지어 장갑도 여전히 낀 상태였다.
‘멀쩡해 보이더니 하루 만에 이게 무슨 일이야.’
한나는 이안의 외투를 벗겨 냈다.
“시, 신관님! 그러시다가…….”
시녀 한 명이 한나를 걱정하며 말렸다.
“목이 잘리든 어쩌든, 알아서 할 테니 물수건이나 더 가져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겠다는 그 말에, 시녀장은 빠르게 지시를 따랐다.
한나는 이안의 외투를 벗기고, 갑갑한 셔츠의 단추도 풀었다. 이내 그녀의 손이 이안의 장갑에 닿았다.
이 장갑을 뺀다면 정말 자신에게도 화를 낼까?
어릴 적 상처받았던 이안은 장갑을 벗긴 자신에게 다시는 보지 않겠다며 화를 냈었는데.
“벗깁니다. 벗겨요. 대답이 없는 건 긍정으로 받아들일게요.”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비겁하긴 하지만, 일단 허락은 받은 걸로.
“어젯밤 평소와 다른 게 있었나요?”
한나는 장갑까지 벗겨 내며 시종에게 물었다.
“별다른 건……. 아, 잠이 오지 않으신다며 그 보석을 찾으셨습니다.”
“보석?”
순간 한나는 그것이 제레미가 가져온 보석이 아니길 바랐다.
“알란데 상단의 그 보석입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제 방에 정신을 맑게 하는 향초가 있어요. 초록색의 초인데, 그걸 가져와 주세요.”
보석 때문이라면 독기가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아직 광석의 정화 능력이 완전하지 않으니.
“그리고 방에 있는 성수……. 아니다, 말고 황궁에 준비된 성수 가져와 주세요.”
직접 신성력을 써서 해독을 시켜 볼까 생각했던 한나는 혹시 치료과정이 너무 아파서 더 큰일이 날까 봐 성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자신의 방에 있는 성수는 북부에서 만든 실패한 성수였다. 요즘은 아예 그 실패작을 호신용으로 챙겨 다니곤 했다.
하지만 그건 직접 치료하는 고통과 다르지 않을 테니, 황궁의 것을 쓰기로 했다.
“어서 움직여요! 그리고, 당신은 황궁에서 알란데 그자를 찾아오세요.”
“상단주 말입니까?”
“이 일의 원흉일지 모르니, 묶어서라도 끌고 와요.”
한나의 말에 시종은 거의 사색이 되어 방을 튀어 나갔다.
“성수를 가지고 왔습니다!”
“제레, 아니, 상단주는?”
“왔습니다.”
한나의 다급한 부름에 제레미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느릿한 몸짓에 한나는 복장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폐하 상태가 왜 이런 건지 설명해.”
제레미가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이안의 머리끝부터 손끝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 손끝의 색이 보랏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제레미는 제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중독 쇼크로 쓰러지신 것 같군요.”
제레미의 반응이 너무 여유로운 나머지, 한나는 혹시 제레미가 처음부터 독살을 계획한 건 아닌지 의심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해독약은?”
“이건 해독보다는…….”
“뭐, 빨리빨리 말해!”
“빠른 응급처치가 필요합니다.”
“어떤?”
그 순간, 제레미가 제 품에서 마치 쇠꼬챙이처럼 얇은 칼을 꺼내 들었다.
“폐를 찔러 호흡을 방해하는 독기를 빠져나오게 해야 합니다.”
“…….”
“…….”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농담이지?”
한나는 정말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폐하의 목숨을 앞에 두고 농담이라니요.”
이 미친 자가!
한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금 보석 때문에 이안의 숨이 꼴딱꼴딱거리는 것만으로도 목 날아가기 딱 좋은 판국에 뭐, 뭐를 어디에 찔러?
그냥 널 잡아가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냐!
“이보시오, 지금 폐하께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저런 근본 없는 치료법은 절대 허락할 수 없소!”
황궁의들이 펄쩍 뛰며 말했다.
“그래. 제레미, 그건 안 돼. 위험하잖아.”
“그 성수를 아무리 들이켜도, 황궁의들이 무슨 약을 달여 와도 소용없을 겁니다. 죽고 나면, 위험한 기회라도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죽고 나면’이라는 말에 한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걸 찌르는 정확한 이유가 뭐야.”
“독기를 빼내려는 거죠. 이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니까.”
제레미의 손에서 칼이 서슬 퍼런 빛을 뿜고 있었다.
“독기만 빼내면 된다 이거지? 그게 폐에 몰려 있다는 거고.”
“제가 한다니까요.”
제레미는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나섰지만, 한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어 접근을 막았다.
“차라리 내가 하겠어.”
“선생님이 찌른다고요?”
제레미의 얼굴에 난색이 서렸다. 방 안의 의사들과 시종들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안 찔러. 신성력으로 빼낼 거야.”
“하지만 신관님, 신관님의 능력은…….”
평소 그녀의 치료를 지켜보곤 했던 시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저 칼을 폐하의 몸에 꽂아 넣을까요?”
방긋 웃으며 한나가 묻자, 시종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전 차라리 신관님께 맡기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방 한편에서 웅성웅성 대화를 나누던 황궁의들의 의견이 합쳐졌다.
“제 방법이 확실하다는데도요.”
제레미가 한나의 한 발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굽힌 뒤 속삭였다.
“선생님이 손을 썼다 일이 잘못되면 다 뒤집어쓸 거예요. 이들은 책임을 떠넘길 사람이 필요할 뿐이지, 선생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제레미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한나의 귀에 속살거렸다.
실제로 한나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중 누구도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싶진 않을 것이고, 특히 신관이 먼저 나서 준다면 더없이 좋은 기회겠지.
더군다나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신전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 테고.
“지금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손모가지를 부러뜨릴 줄 알아. 칼 넣어.”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줄 알겠네요.”
귓가에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에 한나는 화가 났다.
이 상황에서 웃어? 웃는다고?
“넌, 나중에 보자.”
한나는 제레미에게 화를 내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일단은 이안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었다. 한나는 신관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조심스럽게 이안의 폐가 있는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읏…….”
한나가 신성력을 흘려 넣자마자 이안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몸이 들쑤셔지는 고통일 테지. 하지만 진짜로 칼로 폐가 들쑤셔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한나는 눈을 감고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한나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속눈썹이 움찔움찔 떨렸다. 분명 제레미가 말한 것처럼 폐에 응집된 독기가 느껴졌다.
신성력으로 그것을 감싸 조심스럽게 기관지를 따라 그것을 이동시켰다. 다행히 몸 안의 독기를 빼내는 일은 전에도 시도해 본 적이 있었기에,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가며 집중했다.
“…….”
“…….”
방 안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제레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여전히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대로 호흡기를 통해서 밖으로 빼내면 돼.’
살면서 무언가를 이렇게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한나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줄도 모르고 독기를 빼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끄으…….”
섬세한 작업이었다. 처음 수업을 받듯이 배울 때 빼고는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세계 최고 명의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지금 확실한 건 이안이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끙끙 앓을 만큼 치료 과정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만 넘으면…….’
성력으로 감싸진 독기가 목을 반쯤 넘어섰다.
조심조심.
한나는 더없이 신중한 손길로 그것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때까지 힘을 실었다.
“쿨럭.”
그때, 이안의 입이 열렸다.
“피! 피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이안의 입에서 터져 나온 각혈을 보고 소리쳤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황궁의들은 시트를 적신 피를 보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그 짧은 시간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이마에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분홍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독기가 나온 것 같아요.”
황궁의들이 눈이 커졌다. 정말로 이안이 뱉어 낸 피에는 검은 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
한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이런 꼴까지 보게 될 줄이야.
황제를 치료하기 위해 들어온 게 맞긴 맞나 보다.
“새 수건을 주세요.”
한나는 피가 흐른 이안의 얼굴을 닦아 냈다. 그의 호흡이 점차 안정적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한나에게 말을 건 것은 제레미였다.
“이런 방법도 괜찮네요.”
“제레미, 지금은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한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비단 자신이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황궁 모든 사람들이 제레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일 테니까.
“이제 상단주는 어떻게 합니까?”
황제의 호위 기사가 물었다. 이 상황의 책임자가 없으니,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물음이었다.
“지하 감옥에 넣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분명 폐하께서 죽을 뻔하셨으니, 이건…….”
숙덕숙덕, 대신들과 시종들은 그의 처우에 대해 입을 뗐다.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시면 그때 합당한 처분을 내리죠.”
대신 한 명이 처분을 미루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이건 대역죄입니다!”
황궁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목청을 높였다. 아마 심장이 철렁했던 순간의 공포를 꼭 제레미에게 되갚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나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의 숨이 넘어갈 지경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 황궁의 역시 지하 감옥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제가 외부인이라 모르긴 몰라도, 당신들이 제 할 일을 못 한 건 알겠는데요.”
“그, 그건……!”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죠. 여기에 죄인이 몇일지 모르잖아요. 상단주도, 황궁의도, 시종들도. 어쩌면 저까지.”
이안의 목숨을 살린 것은 맞으나, 제 몸에 손대지 말라는 명을 어겼으니 그것 또한 명령 불복종 아니겠는가.
한나는 이안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부러 사람들이 이 상황에 날뛰는 것을 막고자 그리 말했다.
“콜록, 콜록.”
그때, 이안이 다시 잔기침을 뱉어 냈다. 움찔움찔거리는 눈꺼풀이 들릴 듯 말 듯 요동쳤다.
“폐하, 정신이 드세요?”
“쿨럭.”
한나는 새로 가져온 수건을 이안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곧 이안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하얀 수건에 그의 손에 닿았다.
“폐하?”
“……정신, 들었어요.”
힘은 많이 없었으나, 분명 이안의 목소리였다.
“호흡은 어떠세요. 숨은 잘 쉬어지나요?”
한나가 이안의 몸을 살피며 말했다.
“네.”
이안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고, 한나는 재빠르게 그 동작을 도왔다. 침대에 기대앉은 이안은 제 손을 쥐었다 폈다.
“아픈 곳은요?”
“온몸이 망치로 맞은 것 같아요. 특히 여기.”
이안이 제 폐를 가리키자, 한나는 괜히 양심에 찔렸다. 아프다는 것이 제 성력 때문이 아닐까.
“선생님 손맛인 것 같은데…….”
“쿨럭.”
이번엔 아예 기침이 나왔다.
귀신같이 알아차리는군.
그 후 이안은 말없이 손을 움직이고, 목을 풀었다.
“폐하, 이 일의 처분은 어찌할까요?”
그러는 동안 시종이 다가와 이안에게 물었다.
“지금 막 깨어나신 분께 무슨 그런 이야기를…….”
“아. 괜찮아요.”
한나가 제지하려 했지만, 이안은 괜찮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 광석…….”
이안이 광석을 이야기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예. 폐하.”
“신기한 물건이군.”
이안의 말에 방 안의 모든 이들이 굳어 버렸다.
신기한 물건?
방금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걸 모르는 건가?
당황한 시종이 답했다.
“폐, 폐하, 방금 폐하께서는 그 물건 때문에 사경을 헤매셨습니다.”
“일단 이렇게 살아 있지 않나?”
“하지만 상단주는 황제 폐하를 시해할 뻔한 죄인…….”
“상단주를 제외하고 모두 자리를 비키게.”
“예?”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
“내 상단주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한나는 이안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비단 한나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당장 감옥에 넣어도 모자랄 죄인과 독대를 하겠다니.
“모두 방을 떠나라고 명한 것 같은데.”
이안의 낮은 음성이 소란을 잠재웠다. 다들 쭈뼛거리면서도 하나둘씩 방을 떠나고 있었다.
“선생님도요.”
이안의 말에 한나는 도대체 그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긴장감 없는 얼굴이었다.
저놈 때문에 간이 떨어질 뻔했던 걸 생각하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나는 제레미를 스쳐가며 나직이 읊조렸다.
“폐하와 대화가 끝나면 나 좀 보자.”
그에 제레미는 난감한 미소를 띠었다.
“도망가면 재미없을 줄 알아.”
탁.
그렇게 모두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혔다.
“이미 알고 왔겠지.”
이안은 아직 뻐근한 가슴께를 손으로 꾹 문지르며 제레미에게 말했다.
“뭘 말입니까.”
“내게 그 보석이 필요할 거란 거.”
분명 목숨이 위험했던 이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 보석이 쓰임새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을 예견한 건 아니었는지 제레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충분히.”
“그렇게 쓰러질 정도의 반응은 잘 나오는 게 아니라……. 모르는 새에 소드마스터라도 되셨나 했습니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겐 그것이 필요할 거라는 걸.”
이안의 목소리는 방금 죽었다 깨어났다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처음부터?’
쉽게 흘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제레미는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제가 황궁으로 온 목적을 달성하기 쉬워지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기에 당당하게 대꾸했다.
“확실히 그러면 좋겠지만……. 글쎄.”
이안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며, 개운하고 생기 넘치는 몸의 느낌을 만끽했다.
“문제가 있습니까?”
제레미가 또다시 물었다.
“이번엔, 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 볼까 하는데.”
“믿을 만한…… 사람?”
제레미의 신경이 예민하게 당겨졌다.
“나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제레미에겐 좋지 않은 소식임이 분명했다.
* * *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거야.”
방을 나선 한나는 방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다.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그녀를 제지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한나는 들릴 듯 말 듯, 감질나는 웅얼거림에 바짝 촉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제레미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아니, 무슨 생각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위험한 일을 더 이상 못하게 해야만 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보초병 한 명이 한나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리고 한나를 부르려 입을 떼려는 순간.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놔야 하는데.”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에 보초병은 동작을 멈췄다. 마치 지금 그녀의 모습은 건드려서는 안 될 날 선 짐승 같았다.
“허튼소리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정말 채굴권 딜을 하고 있는 거 아냐?”
한나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이지만, 만약 지금 나누는 대화가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면?
“안 되는데.”
반대로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면?
“제레미 목 날아가는 거 아냐? 그것도 안 되는데.”
이건 뭐, 그냥 둘만 두는 상황 자체가 초조 불안이었다.
“아, 진짜 안 들리네.”
한나는 문을 뚫고 나갈 것처럼 귀와 몸을 바짝 기댔다.
“문에서 떨어지시는 게…….”
보다 못한 보초병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쉿, 쉿!”
하지만 한나의 ‘쉿!’에 다시 움찔, 몸을 굳혔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끄응…….”
답답해서 딱, 숨이 넘어가려던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엄마야!”
문에 기대다시피 하고 있던 한나는 몸이 휘청거렸다. 그대로 한나는 문을 열고 나오던 제레미의 품에 폭 안기고 말았다.
“그러다 다쳐요. 선생님.”
제레미는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온 한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누굴 걱정하고 난리야?”
진짜 지금 걱정해야 할 게 누군데!
한나는 분노를 담아 뾰족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대화하겠다고 했죠?”
“어? 어……. 그랬지.”
또 홀랑 줄행랑을 칠 줄 알았는데 순순히 대화에 응하겠다고 하는 제레미의 모습이 한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니 편한 자리로 가죠.”
제레미는 자연스럽게 한나의 등 뒤를 손으로 밀듯이 받쳤다.
“어? 어……. 어?”
이안의 상태는 보고 가야 하는데?
한나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침대에 앉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제레미의 강경한 움직임에 한나는 파도처럼 쓸려가고 있었다.
“폐, 폐하! 얘기 끝나면 상태 보러 다시……!”
말이라도 제대로 하게 좀 놔둬라!
채 끝맺지 못한 말을 끝으로 한나는 빠르게 복도에서 사라졌다.
“아니, 얘는, 그렇게 얘기가 하고 싶었으면 진작 도망다니지나 말던가! 좀 천천히 가!”
한나는 제 등을 받친 제레미의 손을 홱하고 떼어 내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해?”
“우리 오랜만이잖아요.”
“날짜로 치자면 그다지 오랜만도 아닌데.”
제레미에게 다른 도시에서 훈련이 있다거나 하면 종종 길게는 한 달씩도 못 보곤 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 오랜만까지는 아니었다.
‘아니지. 기사 학교도 제대로 다닌 게 아니면, 그동안 훈련 간 건 다 뻥이었나?’
갑자기 지난 훈련들이 나쁜 짓 하러 쏘다니느라 둘러댄 변명이었다는 생각에 한나는 배신감이 치밀었다.
“어디로 가는데 숨도 안 돌리고 가.”
“어디로 가는 게 제가 유리할까요?”
“겨우 대화하는 데 유리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고함을 질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고, 혹시 맞아서 쓰러져도 흙에 구르지 않을 만한…….”
“그렇게 말하면 내가 폭력이라도 쓰는 것 같잖아!”
한나의 대답에 제레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실제로 그는 거하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나의 평소 성격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정강이 정도는 내어 줄 각오를 해야 했다.
“멀리 가면 돌아오기만 힘들어. 여기서 얘기해.”
한나는 더 이상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럼 저기로 가죠.”
제레미는 문을 열고 나가는 테라스를 눈짓했다.
“좋아.”
사방이 꽉 막힌 방이 나았으련만, 그래도 제레미는 장소를 탓할 때가 아니라는 정도의 눈치는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라스로 발을 들였다.
“설명해 봐. 견습 기사가 왜 하루아침에 상단주가 되어 나타났는지.”
제레미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했다.
“기사가 체질에 안 맞는다는 걸…….”
“말장난할 생각하지 마. 나도 알란데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아니까.”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말이다.
북부에서 자주 스쳤던 알란데 길드가 제레미의 친부가 만든 암흑길드라는 것, 그리고 지금 그 길드의 주인이 제레미라는 퍼즐 정도는 끼워 맞춘 지 오래였다.
“그 이름을 알고 있다면, 내가 설명할 건 없네요.”
“네가 알란데 길드의 수장이니?”
“네. 그렇게 됐어요.”
“언제부터?”
“솔직해야 하나요?”
제레미의 답에 한나는 그를 쏘아보았다.
“알겠어요. 1년 전부터였어요.”
“갑자기 왜?”
“제 아버지를 만났거든요.”
제레미가 테라스의 난간에 양손을 짚고 기대었다. 바람이 불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나부꼈다.
“어떻게……. 만났는데.”
“좋은 만남은 아니었어요. 죽기 직전이었으니.”
한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다.
네가 죽인 거냐고.
하지만 그 말을 쉬이 내뱉지는 못했다.
“그자는 죽어 가고 있었어요. 독에 중독되어서였죠.”
“그 사람이 널 찾은 거니?”
버려 놓고, 왜 다시 찾아와서 엄한 사람을 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지금 한나는 만약 제레미의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사람의 부하가 절 찾아왔죠. 루크라고, 지금은 제 수족이에요.”
“왜……. 왜 그런 곳에 발을 들인 거야? 넌 충분히 선택할 수 있었을 거 아니야.”
이건 겨우 배신감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걱정과 불안, 꿈이기만을 바라게 되는 간절함.
제레미는 한나의 물음에 눈을 지그시 감고 웃었다.
그의 몸이 한나의 방향으로 조금 뒤틀렸다.
“그곳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뭐였을 거 같아요?”
마치 과거의 그날을 회상하듯, 감상에 잠긴 목소리.
“무서워했어야지. 도망쳤어야지.”
“마치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렸을 때의 짜릿함, 딱 그거였어요.”
“그럴 리가. 넌 그곳과 아무 상관이 없어.”
“나를 위한 완벽한 자리가 이렇게 있었구나. 그동안의 방황은 이곳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궤변이야.”
제레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상하게 한나에게는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의 말이 마치, 그가 소설 속 이야기의 장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 결국 원작의 사건이 벌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암시처럼.
그건 한나를 두렵게 했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결말이었는데.
한나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제레미는 혼란스러운 한나를 지그시 지켜보다 느릿하게 입을 뗐다.
“두려워하는 눈을 하고 있네요.”
“…….”
“선생님은, 어딜 보고 있나요.”
제레미의 물음에 한나의 대답이 뒤늦게 떨어졌다.
“……널 보고 있지.”
하지만 제레미는 그녀의 대답에 피식 웃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대답 그대로였다.
“아뇨. 선생님은 절 보고 있지 않아요. 항상, 그 너머를 보고 있죠.”
“무슨 소리야?”
“선생님의 눈앞에 생생히 존재하는 제가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있었어요.”
한나의 숨이 들이켜졌다.
제레미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자신이 소설 속의 제레미와 현실의 제레미를 겹쳐본다는 걸 눈치챈 건가.
“늘 걱정하고, 불안해했죠.”
“…….”
“아홉 살 그때부터.”
“그건…….”
“그렇죠?”
제레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전 선생님의 그런 눈빛이 익숙해요.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눈빛.”
아닌 척 했지만, 은연중에 티가 났던 걸까.
분명 한나는 아이들이 원작과 달리 바르게 잘 자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100프로 확신하지 못하는, 그 작은 불안이 언제나 존재했다.
제레미는 촉이 좋은 아이였다. 영민하고, 눈치가 빠른.
그는 자세한 이유까진 몰라도, 한나의 불안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꼭, 불안과 걱정이 섞여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지만 제레미는 더 이상 한나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자리가 꼭 내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무슨 소리야.”
“제가 여기 몸담고 있는 한, 적어도 누군가는 항상 걱정하고, 불안해하겠죠.”
“설마 그게 이유라는 건 아니지? 고작 걱정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서 내가 이 자리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는 거였어요. 이점이야 많죠. 돈이면 돈, 힘이면 힘, 굴러들어 온 복이라고 할까요.”
그의 말에 한나는 온몸에 피가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제레미는 암흑길드가 마음에 든다는 얘기였다. 몇 마디 말로는 바꿀 수 없는 생각일 것이다.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해 왔던 일이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
한나는 테라스의 난간에 주저앉듯 앉아 버렸다. 허탈한 기분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과거의 노력이 이렇듯 물거품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멍해진 한나의 곁으로 제레미가 다가왔다. 그는 난간에 앉은 한나의 앞에서 상체를 숙였다. 그의 양팔이 한나의 좌우를 막았다.
“선생님이 뭘 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묻지 않을게요. 그냥 그렇게 계속 날 봐 줘요.”
“난, 암흑길드 수장을 돌봐 줄 생각이 없어.”
한나는 제레미의 말을 간혹 다쳐 오는 그를 치료해 주었던 것처럼, 계속 자신을 치료해 달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겨우 한 걸음 앞, 체향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한나는 목을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분홍 머리카락이 하얀 신관복 위로 흩어졌고, 금빛 눈동자에는 제레미의 얼굴이 가득 찼다.
테라스의 바람 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한나를 내려다보던 제레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거 알아요?”
묘한 긴장감에 둘 사이를 맴돌았다.
“선생님은 내가 위험할수록, 내게 눈을 떼지 못할 거예요.”
한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기 위해 제레미의 얼굴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덥석, 제 팔을 잡아오는 제레미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그의 정강이를 뻥 차고 일어섰을 것이다.
“선생님은 가엾고 불쌍한 것들에 약하니까.”
“……하.”
한나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심호흡을 했다.
제레미의 몸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한나는 그런 제레미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의 정강이를 뻥 차 버렸다.
“아!”
제레미가 단발 비명을 내질렀다. 꽤나 아픈 모양인지 손으로 정강이를 잡고 끙끙거렸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는 척을 해?”
“아……. 예고라도 하고 때리지.”
“제레미, 네가 생각하는 건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한나는 결심에 찬 표정, 단호한 어조로 제레미를 향해 말했다.
이건 오기였다. 더 이상 제레미가 제 머리 위에서 노는 꼴을 봐줄 수가 없었다.
뭐, 어쩌고 어째?
결국 지들이 나쁜 짓 하며 쌩난리를 부리고 다녀도, 다쳐서 오면 불쌍해서 돌봐 줄 거라는 앙증맞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내가 너, 갱생시킨다. 두고 봐.”
한나는 씩씩거리며 테라스 문을 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 같던 기세의 그녀가 휙, 뒤돌아 다시 제레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아까 맞지 않은 멀쩡한 반대쪽 정강이를 또 걷어찼다.
“아!”
“이건 배신자에게 주는 내 응징이다!”
한나의 말에 제레미는 황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아까 그건요?”
“그건 재수 없게 날 내려다본 벌이다!”
멀쩡하던 왼쪽 정강이까지 차 버린 후에야 한나는 다시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렇게 한나는 걸어왔던 복도를 다시 되돌아갔다.
씩씩거리는 걸음이 멀어지자, 제레미는 다리를 문지르던 손을 떼고 다시 난간에 몸을 기댔다.
“……진짜 중요한 건 물어보지도 않고 가 버리네.”
그는 이안에게 광석을 준 이유나, 자신의 앞으로의 행로를 묻지 않고 떠난 한나를 생각하며 잘게 웃었다.
이런 걸 보면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감정이 앞서는 사람.
하지만 제레미의 눈엔 그게 또 귀여웠다.
저라면 정강이뼈를 부숴 버렸을 텐데, 화가 난 와중에도 자신을 힘껏 때리지 못하는 것도.
* * *
사실 한나는 이 세계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 물론 이런 개판, 난장판이 되기 전까지 말이다.
“에라, 다 망했어. 내가 한 고생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고.”
한나는 신관복의 팔을 걷어 냈다. 몸에 열이 올라 더워서였다.
“교화시키긴 개뿔, 원작을 비틀긴 뭘 비틀어?”
한나는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쳤다.
“남들은 빙의하면 원작도 뒤틀리고 막 연애도 하고, 부둥부둥도 받더만.”
하, 참 나. 정말 억울했다.
똑같이 빙의를 해도 누구는 사소한 일에도 주인공이 남편이 되고 그러더니, 자신은 원작을 비틀려면 사막에 가서 마물을 다 때려잡고 광석을 캐야 한다는 거 아닌가.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와중에도 한나는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 사실, 이안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될 대로 되라, 나는 저기 오지 산골로 들어가서 양이나 치면서 살련다.’ 하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짐까지 다 쌌었다.
하지만 이안이 그렇게 쓰러지고,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확실하게 알게 됐다.
“제레미의 말이 맞을지도.”
앞으로도 자신은 이 아이들을 포기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심장이 뒤틀리는 아찔함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이안이든, 제레미든, 마샤든.
“너희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지.”
성큼성큼 걸어 한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폐하!”
고작 몇십 분 전 나왔던 이안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안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결의에 찬 한나의 눈빛을 본 그는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제 선생님이 많이 화가 난 듯싶어서였다.
“문은 닫고, 들어오세요.”
한나는 그의 말대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이안의 앞에 섰다. 그가 한나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뜻이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뭐든, 편하게 얘기해요.”
마치 다 들어주겠다는 양, 나긋한 목소리였다. 한나는 빙빙 돌리지 않고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북부 갈리아 산 채굴권, 저에게 주세요.”
한나는 또박또박,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말했다. 그에 이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흐음, 선생님이 그게 왜 필요할까요.”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한나가 손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한쪽 손은 야무지게 허리춤에 얹어진 상태였다.
“두 가지씩이나.”
이안은 부러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에 한나의 상태는 꼭 밑도 끝도 없이 달라고 떼쓰러 온 모양새인데, 이유를 두 가지씩이나 준비했다고 하니.
한나는 큼큼,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첫째. 사막의 안전을 지켜, 광물을 발견하는 데 공을 세운 것은, 우리 신전이다.”
“계속해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나의 손가락 하나가 더 접혔다.
“둘째, 그냥. 내가 필요하니까.”
사실 두 번째는 생각이 나지 않아서 속마음이 그대로 튀어나온 거였다. 그에 이안은 옅게 웃었다.
‘너무 막 나갔나.’
한나는 순간 자신의 말이 너무 다섯 살 아이의 떼쓰는 수준같이 느껴져 민망함이 올라오려 했다.
그런데 왜인지 이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이유가 하나라고 했으면 될 것 같은데요.”
역시. 그냥 갖고 싶다고 떼쓰는 건 오바였군.
“알겠어요. 그럼 두 번째는 삭제하고, 첫 번째 것만 참작해서…….”
한나가 민망한 마음에 그 말은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아니요.”
하지만 이안이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첫 번째는 필요 없고, 선생님이 원한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이었어요.”
“응?”
한나가 갸웃했다.
뭔 소리지? 우리 폐하께서 1, 2가 헷갈리셨나.
“선생님이 원한다면 그게 뭐든,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는 뜻이죠.”
농담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싶어 한나는 이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안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를 제외하곤,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뭘 또 그렇게…….”
한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을 못 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거나, 무리한 부탁이다, 내지는 생각을 해 보겠다, 혹은 뭐 대신들과 상의를 해 본다면서 묵묵부답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아니, 적어도 이유라도 물을 줄 알았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는 뜻이죠.’
그 말은 마치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한나는 혹시 이안이 말뜻을 이해를 못했나 싶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손수건 하나 달라고 청하는 게 아니야.”
“손수건도 드릴게요.”
물론 돌아온 답변은 더 어이없었다.
“아니! 그걸 달라는 게 아니고! 예를! ……하, 왜 갑자기 말이 안 통하는 기분이지.”
한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똑똑한 이안이 정말 자신의 말을 이해를 못 해서 이럴 리는 없고.
“갈리아 산의 채굴권을 신전에 주겠다는 거야?”
이렇게 순순히?
유혈사태까진 아니라도 오고 가는 조율도 없이?
“신전이 아니라, 선생님에게죠.”
이안이 똑 부러지게 말을 정정했다.
“혹시 아까 그 충격으로……. 머리가 아프거나…….”
한나는 이안이 아직 중독 상태이거나, 치료 과정의 충격 때문에 정신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멀쩡해요.”
“혹시 죽음의 위험에서 살려 준 은혜를……?”
“좋을 대로 생각해요.”
계속해서 의심하는 한나의 모습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이안에게 있어서 한나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냥 선생님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을 뿐이에요.”
“……진짜 이상하네.”
한나는 제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이건 분명 좋은 일인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니 또 이상하게 찜찜했다.
“내일 아침부터는 갈리아 산의 모든 권한은 선생님에게 돌아갈 거예요.”
“어, 어?”
한나가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빠를 필요까진 없는데.
사실 한나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굳이 말하자면,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달려온 거였다.
‘너희가 이걸로 치고받고 싸울 거라면, 차라리 내가 갖는다!’
―라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고, 고마워.”
얼떨떨하지만 일단 감사 인사를 했다.
“천만에요.”
“그런데 그렇게, 덥석덥석 줘도 되는 거니? 원래 그렇게 사람을 잘 믿는 타입이었나……?”
“보통 못 믿을 만한 사람들은 선생님처럼 굴러들어 온 기회를 걷어차 버릴 법한 질문은 하질 않죠.”
“아. 흠흠.”
한나가 헛기침을 했다.
괜히 헛소리로 채굴권을 날릴 뻔했다.
이안은 민망한 듯 팔을 쓸고 있는 한나에게 이어 말했다.
“앞으로도 원하는 게 있다면, 마음껏 말해요. 될 수 있으면 어려운 부탁을 해요.”
“어려운 부탁?”
“그래야 권력의 맛을 알고, 내가 필요할 거 아니에요.”
이건 무슨 성격이지.
호구 성격? 흑우? 호갱? 뭐 그런 건가.
‘내가 아는 이안은 절대 이런 성격이 아닌데…….’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는 탁한 늪 같았던 이안이었는데, 이제는 투명하고 맑은 우물이 된 것 같았다.
‘마음껏 퍼다 쓰세요.’라고 하는 것처럼.
‘왜 호의적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지.’
“그런 눈빛 보내지 않아도, 전 의심할 여지 없이 선생님의 뜻대로 움직일 거예요.”
“누, 누가 의심을 했다고.”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드릴 생각이에요. 그게 뭐든, 무엇 때문이든.”
“왜냐고 물어보면, 이것도 바보 같은 질문이야?”
“대신 선생님은 제 곁에 있어 줘요.”
“곁에?”
“네. 그냥 곁에 이렇게.”
이안은 한나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마치, 다가와 잡으라는 듯.
그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혀 들었다.
그 미소가 너무 해사해서, 저도 모르게 하얀 장갑을 덥석 잡아 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답게.
* * *
서류라 함은, 한나가 기피하는 것 중 하나였다. 공문, 보고서, 계약서 등은 그녀가 질색하는 업무였다. 고작 몇 줄의 글로 이루어지는 일들의 무게가 무서웠다.
“그러니까 이게…….”
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종이를 마주하고 있었다.
“광산의 채굴권 양도 문서입니다.”
“…….”
그냥 하얀 종이일 뿐인데, 왜 테두리에 금이라도 바른 것처럼 빛나 보이는 걸까.
황제의 보좌관이 직접 들고 온 문서에서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눈이……. 눈이 부셔.
“그럼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네. 갈리아 산의 채굴권은 모두 한나 신관님의 앞으로 돌아갑니다. 광산뿐만 아니라, 갈리아 산 전체의 권한입니다.”
오. 미친!
한나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이안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자신의 말을 수락했다.
그 후 일 처리는 일사천리.
이안이 했던 말처럼 자고 일어나니 보좌관이 붉은 융단 위로 광산 채굴 책임권을 떡하니 들고 온 것이다. 아무리 이안이 아파서 헛소리를 했다고 하나, 그게 바로 이루어진다니.
그런 사안이 황제의 한마디 말로 바뀐다는 것도 신기했다.
‘생각보다 황권이 단단한가. 내가 대신이었으면 머리 뜯고 말렸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그’ 광산인데.
“역시……. 아직 다들 몰라서 그러는 건가.”
아무도 모를 때 날름 꿀꺽인 거지.
“여기, 여기, 여기에 도장을 찍으시면 됩니다.”
보좌관은 종이의 서명 부분을 콕콕 집어 주었지만, 한나는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실 어제야 제레미의 일로 눈이 돌았다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참 위험한 일이었다.
주인 없는 광산일 때…….
아니지, 그때도 주인은 있었겠지.
하여튼 그렇게 위험한 곳이었는데, 주인이 생기고 통제라도 했다간 분명 나쁜 놈들이 주인 목을 따러 올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그게 제레미나 마샤가 아니길 바라야 하나. 어쩌면 진실을 알게 된 이안이 화가 나서 제 목을 칠지도…….
‘아 오늘따라 목 걱정 많이 하게 되네.’
걱정이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한나는 안절부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러다 번뜩 보좌관에게 질문했다.
“혹시 그곳의 주인이 저라는 걸 대외적으로 비밀로 할 수 있나요?”
“네.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도장, 찍겠어요.”
한나는 준비해 두었던 도장을 종이로 가져갔다. 그런데, 분명 찍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종이와 도장의 거리는 고작 5cm.
힘을 주어도 바들바들 떨리면서 저항하는 건, 설마…….
적색 신호를 감지한 생존 본능?!
‘찍어. 찍으라고! 목숨 좀 내걸면, 광산은 네 꺼야!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아니, 이건 아니지.’
또 이상하게 뻗어 나가던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결국 한나의 도장이 종이에 쾅, 하고 찍혔다.
“…….”
왜 눈물이 핑 도는 거지.
좋아서는 아닌 것 같고, 뭔가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충격…… 인가.
솔직히 이게 잘한 건지 아닌 건지 도통 모르겠다.
“서류는 즉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좌관이 종이를 가져가려고 했지만 한나는 손에서 종이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보좌관이 조금 더 힘주어 종이를 당겼다.
“이걸 주셔야…….”
그때, 한나가 보좌관에게 물었다.
“저, 잘한 걸까요?”
보좌관의 표정은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물론이십니다.”
거짓말!
한나는 왠지 이 종이 쪼가리가 언젠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목이 아니라 그냥 목일 수도 있고 말이다.
팔랑.
결국 보좌관은 한나의 손에서 종이를 빼내 가져갔다.
* * *
똑똑.
“선생님, 뭐하세요?”
신관들만 있는 궁에서 선생님을 찾으며 제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한나는 분주하던 손을 놓고 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마샤?”
방긋 웃으며 한나에게 손인사를 한 마샤는 한나의 방 안을 힐끗 보았다.
“짐 싸고 있는 거예요?”
가방에 한 보따리 눌러 담은 짐을 보며 마샤가 물었다. 한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풀고 있는 거야.”
“여태 짐을 안 풀었어요?”
……아니. 홀랑 도망가려고 쌌던 짐.
“뭐. 그렇게 됐지.”
한나는 그러면서 마샤의 뒤를 바라보았다. 혹시 제레미가 함께 오진 않았나 싶어서.
“뭘 찾는 거예요?”
“제레미가 같이 왔나 싶어서.”
“기다리는 중?”
“아니. 피하는 중.”
“흐음.”
마샤는 팔을 괴며 묘한 눈빛으로 한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한동안은 제레미가 선생님을 죽어라 피해 다니더니, 이제는 선생님이 제레미를 피해 다니네요.”
“그런가…….”
“둘 사이에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봐요.”
“보통 재미있는 일이면, 서로 피하고 도망치지 않을걸?”
마샤가 말하는 ‘재미’가 원수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둘만의 비밀 만드는 거예요?”
“네가 말하니까,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다?”
“그렇게 누구 편애하고 그러면 안 돼요.”
“편애 같은 소리 하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얘기였다. 편애는커녕 광산을 홀랑 가져간 걸 알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어젯밤 큰일이 있었던데.”
“황제 폐하 얘기하는 거야?”
“네. 제가 없을 때만 큰 이슈가 터진단 말이죠.”
“그거 그렇게 즐겁고 발랄한 목소리로 말할 사안은 아닐 텐데.”
도대체가 너희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발랄하게 얘기할 수가 있는 거니.
이 사이코패스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이 녀석들은 사이코패스야! 정상이 아니라고!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죠.”
“너도 갈리아 광석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지?”
혹시 마샤도 잘못될까 싶어 한나가 물었다. 그에 마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요.”
“그래. 그 자신감 꾸준히 유지하기 바란다. 그럼 용건 끝났으면 가 봐.”
“용건은 꺼내지도 않았는데요?”
여태 떠든 건 뭔데!
“혹시, 내가 지금 바쁘다는 얘기했나?”
“안 했어요. 그리고 그리 바빠 보이지도 않는데요.”
“나 굉장히 바쁜 사람이야.”
한나의 말에 마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워이, 워이. 너도 가서 일 보라고.”
한나는 얼른 마샤를 보내 버리고 싶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런 낌새를 기민하게 눈치챈 마샤가 옆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 저기 제레미…….”
‘제레미’라는 말에 한나는 퍼뜩 마샤의 손목을 잡아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퍼뜩 문을 닫았다.
“진짜 열심히 피하네.”
한나의 투명한 반응에 마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제레미 왔어? 복도야? 어디까지 왔든? 막 손에 무기 같은 거 들고 있진 않았어?”
한나가 마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뻥이었는데요.”
“야!”
뻥이라는 말에 한나는 마샤의 팔뚝을 힘껏 때렸다. 옷을 뚫고 들어간 매운 손맛이 찰싹 소리를 냈다.
“반응이 재미있네요.”
찰싹. 찰싹.
몇 차례 더 마샤의 어깨를 때리자, 폴짝폴짝 피하던 마샤는 잽싸게 다음 공격을 팔로 막았다.
“느려요.”
뭐라는 거야. 이미 맞을 거 다 맞아 놓고. 바보인가?
한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때린 김에 미리 몇 대 더 때리고 데이트해요.”
마샤가 여전히 허공에 머물고 있는 한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맞을 만한 발언이라는 건 아는 모양이지.”
한나는 이제는 무슨 헛소리냐고 열을 내는 것도 지쳤다. 마샤의 한결같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데이트가 별로면 밥이라도 먹어요. 그건 괜찮죠?”
이럴 때 보면 마샤는 참 여우 같은 면모가 있었다. 이미 그는 피할 수 없는 답으로 몰아넣은 상태지 않은가.
“정말 널 누가 당해. 그래. 밥이나 먹자.”
마샤에게 열을 내느라 배도 꺼진 상태인 한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황궁 요리는 참 맛있다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여기 머무는 건 아니고?”
“설마요. 순전히 선생님 때문이라니까.”
말은 참 잘한다.
한나는 한숨과 함께 마샤의 몸을 복도로 밀었다.
얼른 가서 탄수화물이나 채워야지.
* * *
황궁에서의 식사는 언제나 만족스러웠지만, 신전과 달리 조금 불편한 마음이 항상 존재했다. 남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 받을 때의 어색한 느낌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체할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식사를 하고 계셨나 보네요.”
다 차려진 밥상에 끼얹어진 진땀나는 상황은, 바로 제레미의 등장이었다.
“사실 전 음식이 목구멍으로 안 들어서, 물도 한 모금 못 마셨거든요.”
제레미가 한나의 옆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또르륵, 한나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그 말이 마치, ‘내 일을 수포로 만들어 준 너 때문에 난 밥도 안 넘어가.’ 라고 눈치를 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금 거들어도 되겠죠?”
“아예예. 물론입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결국 저도 모르게 한나는 극존대가 나와 버렸다.
제레미에게 냉큼 자리를 권했다. 그에 제레미는 피식 웃으며 마샤의 오른편, 한나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식당의 시종들이 빠르게 그의 접시와 식기를 가져왔다.
“고기가 좋네요.”
제레미가 식탁의 중앙에 위치한 고기를 직접 칼로 베어 내고 있었다. 아주 부드러운 동작이었지만, 한나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끼긱.
접시에 칼이 마찰되는 소리가 고요한 식탁 위에 날카롭게 끼얹어졌다.
‘왜, 왜 이렇게 섬뜩하지? 마치 저 고기가 나의 미래같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한나는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샐러드를 한입 머금었다. 제레미 역시 제 접시에 옮긴 고기를 포크와 나이프로 먹기 좋게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이죠?”
“쿨럭.”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한나는 사레가 들렸다.
“괜찮아요, 선생님?”
마샤가 수건을 건넸고, 한나는 입을 닦으며 괜찮다는 손 사인을 보냈다.
“뭐, 뭐가 나야?”
설마 광산의 채굴권에 대한 걸 묻는 건 아니겠지. 분명 비밀로 해 준다고 했는데.
한나는 괜히 불안했다.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 선생님.”
그러니까, 그 위험이란 게, 누구로부터 오는 건지부터 좀 정확히…….
그게 제레미라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기는 했다.
“내가 무슨 위험한 일을 한다고.”
속마음과 달리 한나의 대답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갔다.
“흐음.”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마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흥미진진했다. 아마 조금만 더 있으면, 둘이 서로를 피하던 이유를 아무 힘들이지 않고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마샤는 빙긋 웃으며 와인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그렇게 무작정 문만 걸어 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텐데.”
확실했다. 광산 얘기가 맞다.
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자식, 어떻게 안 거지?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 황궁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건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제레미의 정보력은 어느 정도인 걸까. 고작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그 소식을 알고 있다니.
“지금 북부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알아요?”
북부라는 말에 마샤 역시 신경이 곤두섰다.
“개판. 딱 그 말이 어울리겠네. 채굴에 대한 중심이 없으니 너도나도 한몫 챙겨 보겠다고 몰래 움직이죠. 그곳은 이미 무법지대랍니다.”
“원래도 다르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제 눈으로 목도했던 일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더 심해지겠죠.”
제레미의 접시에 있던 고기들이 먹기 좋게 모두 썰어졌다. 그는 일어나 그 접시를 한나의 앞으로 놓았다.
“…….”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순간 한나는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레미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화가 난 걸까. 자신의 일을 방해해서?
혼란스러운 와중, 제레미가 싱긋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나는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먹기 좋게 잘린 고기에선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님은 감당 못 해요.”
감정이 깃들지 않은 것 같은 건조한 목소리로 제레미가 말하자, 한나는 어딘지 조금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다.
“섣부른 판단은 좋지 않은데.”
“절대적으로 무력이 필요한 일이에요. 알량한 평화나 선의 따위로 해결될 일이 아니죠.”
채굴하는 데 무력이 필요한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지.
한나는 시큰둥하게 제레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가 준 고기를 포크로 콕 집어 입에 넣었다.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거, 자르긴 또 잘 잘랐네.’
이렇게 고기나 자르면서 조신하게 있으면 얼마나 좋아. 왜 굳이 나쁜 일을 못 해서 안달인 건지.
‘무력이라.’
한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레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대로 폐쇄령만 내려놓고 있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분명 어떤 조치가 필요할 텐데.
그걸 또 황궁의 힘을 빌리기도 애매하고, 신전에 말하려니 이 권한을 뜯고 씹고 맛보려고 혈안이 된 모 신관이 생각나고.
“저에게 맡겨요.”
한나의 갈등을 눈치챈 제레미가 뱀처럼 교묘하게 그녀의 혼란한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한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호라.
이제 보니 제레미는 저를 회유시킬 작정인 것 같았다.
하긴 그에게는 황실이든 자신이든, 권한만 얻으면 상대는 누가 되든 상관없겠지.
그래서 이렇게 고기도 예쁘장하게 잘라 줬구만?
적어도 아직은 화가 나서 저를 썰어 버리겠단 작정까지 할 정도는 아닌가 보다.
“네 눈엔 내가 그곳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겠지.”
“선생님과 어울리는 일이 아니에요. 위험해질 거예요.”
그건 네가 걱정해 주지 않아도, 그냥 신전에 가만히만 있어도 위험해진단다. 누구라도 북부를 들쑤셔 놓으면 필연적으로 신전이 나서게 된다는 건, 한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내 손에 들어온 이상 그곳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을 거야.”
“엄한 일에 등 터질 거예요.”
엄한 일이라니. 이게 다 너희를 지키는 일이란다.
자신의 숭고한 희생정신도 몰라주고, 이것참 서운한 일이었다.
“네가 말하는 무력만 있으면 되는 거니?”
“선생님.”
제레미가 반박하려는 순간, 한나가 갑자기 마샤를 바라보았다.
“마샤. 꼬꼬 풀어 놓고 키울 곳, 필요하지 않니?”
갑자기 자신에게 튄 불똥에 마샤는 움찔 놀랐다.
“꼬꼬요?”
“응. 내가 아주 좋은 땅을 하나 봐 뒀어.”
“설마…….”
순간 마샤는 그녀가 말하는 곳이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곳이라고 직감했다.
“맞아. 갈리아 산.”
한나의 말에 제레미의 얼굴이 굳어짐은 물론이고 마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 마탑, 그리고 여기, 제레미의 길드에서 원하는 그 땅의 소유주가 내가 됐거든. 아, 땅의 소유주가 아니라 광산 채굴권을 가진 거지. 정확히는.”
마샤는 갑작스러운 폭탄 선언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도 채굴권을 원해서 황궁에 온 거지?”
“뭐……. 그건 제 일은 아니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원하는 바가 같은 것 같네.”
어차피 한번은 선포를 해야 할 일이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너희는 꿈도 꾸지 말라고.
“그곳에 어중이떠중이들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겠어.”
그게 너희라 할지라도. 아니, 특히 너희는!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못할 것 있나?”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지독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죠.”
“넌 잘 아는 듯이 얘기한다?”
한나는 팔짱을 끼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정말 탐욕에 찌들어 있어서 잘 아는 걸까.
“신전의 뜻인가요.”
“신전의 뜻은 무슨, 나 지금 이 일 때문에 사직서 써야 할지도 모르는데.”
한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말 신전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그것도 골치가 아팠다.
이대로 비밀로 묻어 두는 게 최선인데.
“그래서 너희가 비밀을 지켜 줬으면 좋겠어. 신전까지 개입하면 정말 난장판이 될 것 같으니까.”
이쯤 되니 막 나가자는 거였다.
어차피 막 나갈 거라면 조금 더 욕심내 봐?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너희가 날 좀 돕는 게 어때?”
“무슨 말이죠.”
“어떻게요?”
다소 날이 선 제레미와 달리 마샤는 이 상황이 마냥 재미있어 보였다.
“생각해 봐. 너희가 갖지 못할 거라면, 다른 사람들이 승냥이처럼 훔쳐가는 꼴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
“…….”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갖지 못하게 하겠다!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야. 이득은 못 봐도, 다른 사람 잘되는 꼴은 또 못 보잖아. 우리가.”
이렇게 말하니까 상당히 악당같이 보이는데.
“우리가 합심해서 다른 사람들을 막는 게 어떨까?”
제레미와 마샤는 짧은 시간이지만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 일은 황궁과 신전이 유리한 입지에 섰다고 볼 수 있는 상황.
이대로 팽 당할 바에는, 누구도 갖지 못하게 시간이라도 버는 게 낫다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전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거든.”
먼저 답한 것은 마샤였다.
“난 뭐, 마탑의 이득이니 뭐니 관심 없기도 하고.”
애초에 마샤가 원하는 건 단순히 자신의 즐거움이었다.
이 상황에 애가 타는 건 제레미였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다.
보통 대외적인 입지를 가진 황실, 마탑, 신전이 아닌 모두가 그러하듯,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는 것은 그들의 생존방법이나 다름없었으니.
차라리 한나를 곁에 두고 지켜보는 쪽이 그에겐 나은 선택지였다. 뒤에서 자신 몰래 어떤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좋아요. 선생님 뜻대로 해요.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레미의 말에 한나가 즉각 답했다.
“뭘 하긴 뭘 해. 북부 싹 정리하러 가야지.”
“……뭔 리요?”
“정리. 제레미가 그랬잖아. 지금 거기가 난장판이라고.”
도대체 한나가 무슨 생각인지 두 사람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싹, 밀어 버리자고.”
그녀의 번뜩이는 눈빛이 자애로 가득한 신관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에 마샤는 ‘풋.’하고 웃어 버렸다. 아무래도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제레미는 옅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원하시는 대로.”
결국 식사가 끝날 때까지 제레미의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곁에 있어 달라고 한 지 겨우 하루 지난 거 알아요?”
이안은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마치 ‘거짓말쟁이’라고 질타하는 것 같았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중요한 권한을 승계받은지라.”
“그러라고 넘긴 게 아닌데.”
이안은 집무실 책상에 켜켜이 쌓인 서류들을 하나씩 넘기며 한나의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한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멀티도 잘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일단 그곳 상황이 엉망이라고 하니, 내가 쓸 만한 친구들을 데리고 정리 좀 하려고.”
“그 쓸 만한 친구들이, 마샤와 제레미인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 녀석도 황궁 곳곳에 제2, 제3의 눈이 있는 건가.
“꼭 저도 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네요.”
“바쁘신 황제 폐하께서 어딜……. 그런 건 우리끼리 움직여야죠.”
한나는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쌓여 있는 서류뭉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위험한 일을 자처하라고 채굴권을 준 게 아닌데.”
“그럼 왜 준 건데?”
“아무것도, 하지 않길 바라서요. 누구도, 아무 일도.”
어쩌면 이 상황에 갈리아 광석의 위험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이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사람으로 자신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그렇게 욕심이 없어 보였나. 이 녀석, 날 너무 믿는 거 아니야?’
“네가 믿는 게 이 하얀 신관복이야?”
“그럴 리가요. 그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은 신전에 바글바글할 텐데.”
“맞아. 신관도 다 똑같아. 욕심이 있다고. 아무나 덥석덥석 믿지 마. 아, 물론 이 상황에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이쯤 되면, 세상에서 제일 잘 속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떠벌리고 다녀도 할 말이 없었다.
마샤도 제레미도 심지어 이안 역시 제 믿음과 달리 죄다 원작대로 살고 있는 것 같으니.
“그래서, 무슨 계획이에요?”
이안이 한나에게 물었다.
“계획?”
계획이랄 게 있나.
그냥 아무도 얼씬도 못 하게 밀어 버리고 올 작정인데.
한나가 제레미와 마샤에게 말한 ‘밀어 버리자’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 편이잖아요.”
이안은 마치, 우리는 서로 한 팀이니 정보와 일정을 공유하자는 뉘앙스로 말했다.
‘딱히 이안과 편을 먹을 생각은 없는데.’
한나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의 편은커녕, 제 앞가림만으로 힘든데.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도박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계약서의 서약은 아주 무거운 것이란다. 후회해도 무르기는 없어.”
“선생님이 절 후회하게 만들 리가 없잖아요.”
이안의 말에 한나는 난감한 듯 이마를 긁었다. 요즘 이안의 저런 태도가 한나를 꽤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안은 어느 순간부터 저런 믿음이 100스푼 담긴 것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곤 했는데, 그게 난감하고 부담스러웠다.
속을 알 수 없으니, 그 모습이 오히려 의심스럽기도 하고.
“딱 한 달. 그동안 황궁에서 자리를 비울 것 같으니, 너도 그동안은 몸조심해.”
“아프면 어쩌죠?”
“그러니까 몸조심하라는 거지! 네가 유별나서 황궁의들도 손을 못 쓰니까 내가 더 마음이 무겁잖아.”
“이 주.”
요것 봐라.
이안은 이 와중에 기간을 협상하고 있었다.
“그, 내가 소풍 가는 게 아니라……. 큰일 하러 가는 거거든.”
“필요한 병력을 말해요.”
“……병력을 주게?”
“필요하다면, 직속 기사단을 보내죠.”
“……아니, 아니. 그건 과해.”
이쯤에서 다시 생각나는 그 단어.
‘호구.’
오늘도 호구미 낭낭한 이안을 구슬리는 건 꽤나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안의 과분한 호의를 거절하며 진땀을 뺀 한나는 결국 다녀와서 황궁에 딱 붙어 있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의 수락을 얻어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