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10/23)

Chapter 9.

신전의 복도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새 황제 폐하에 대해 좀 아시오?”

“새로운 황제?”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소.”

“성이 한동안 걸어 잠겨 있더니, 도대체…….”

온 제국의 사람들은 새 황제의 등극에 놀랐고, 황궁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황궁은 모두가 입을 걸어 잠근 듯, 시녀나 시종에게서도 나오는 정보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황궁에서 새어 나가는 모든 말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선황제 폐하께 지병이 있다 하지 않았소? 황손이 줄줄이 몸이 약하다 하던데.”

“그렇지. 황태자 전하도 병약했고, 2황자 전하는 벌써 운명을 달리했고…….”

“황제께선 병환으로 돌아가셨겠지.”

제도의 호사가들조차 하루아침에 변한 황궁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황궁 내부는 은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황제 폐하는 누구랍니까? 황자 전하요?”

“그 뭐라더라, 예전에 스페투 왕국에서 공녀로 왔던 궁녀가 낳은 황족이라던데.”

“아니, 그럼 반역 아니오?”

“예끼! 이 사람! 입조심하시오!”

시작은 반란이라 해도, 그것이 성공한 이상 더 이상 반란이 아니었다.

“내 궁에서 일하는 친척이 일러 준 것이, 그 황자, 아니. 새 황제의 성정이 그리 흉폭하다 하니, 허튼소리하고 다니지 마시오. 특히 이런 때에는 더욱 말조심을 해야 해.”

“그 친척에게 뭐 좀 더 물어보지 그랬소.”

“그것도 한참 전에 들은 것이라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황궁 밖으로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네.”

“새 황제가 등극했으니 대대적인 숙청이 있겠구먼.”

“그러니 쥐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어야지. 특히 우리 같은 하급 귀족들은 여차하면 휩쓸려 죽기 딱 좋으니까.”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그들이라도, 목숨은 중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궁의 공식적인 발표만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교황님께선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아십니까?”

스쳐가던 중에 그들의 대화를 들은 대신관이 교황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기도식에 참여했던 교황은 뒤숭숭한 민심을 읽었다.

“곧 무슨 소식이든 오겠지요.”

황실과 신전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보통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는 신의 선택을 받은 왕이라는 것을 이용하는 게 민심을 얻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란 건,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황제가 바뀌기 전부터 신전과 접선하는 황제들이 적지 않았다. 새 황제 역시 그런 좋은 수단을 이용하려 들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조용한 황궁이 교황으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 지금보다 더욱 신전을 배척하는 이가 황제가 되었다면, 신전으로써는 썩 좋지 않은 일이었다.

“교황 성하! 황궁에서, 황궁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드디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대신관이 놀란 듯 말했다.

“어디, 가 봅시다.”

* * *

“한나 신관님! 중앙 신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날의 일이 일단락된 후, 한나는 마을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앙 신전에서 온 연락을 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즉시 중앙 신전으로 복귀하라는 짧은 글이 전부였다.

‘뭔가 일이 있긴 한 모양이네.’

황제가 바뀌었다는 것은, 신전도 바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새 황제라…….”

그가 누구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안.”

분명 원작대로 이안이 황제가 된 것이겠지.

과연 그는 소설의 내용처럼 제 혈육들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을까?

섬뜩한 생각이 들어 한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야. 괜히 이안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자.”

대공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이안을 황제로 추대한 것은, 현 황실이 썩을 대로 썩어 있어서였다.

물론 원작에서는 더한 폭군이 탄생했지만.

“하, 이것참.”

마샤를 말리기 위해 갈라티아 마을에 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안 걱정이라니.

“이래선 원작이랑 다를 게 없잖아!”

이러다간 갈리아 산에서 다 같이 만나서 쎄쎄쎄를 할 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갈리아 산이 폐쇄된 상황이라는 것.

마샤 역시 당분간은 위험하게 마물을 잡으러 가지 않겠지.

“일단 명령도 떨어졌으니, 제도로 가야겠네.”

그런데 마샤를 어떻게 끌고 가지. 아무래도 눈에 안 보이면 걱정이 된단 말이야.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야 하나…….

“끙.”

이럴 거면 그냥 보육원 시절처럼 한곳에 모아 놓고 지키는 게 편하지.

“후. 일단 짐부터 챙기자.”

얼마 풀지 못한 짐은 딱히 챙길 것도 없었다. 한나는 짐을 챙긴 뒤, 밖으로 향했다.

“마샤에게 들렀다 가야 하나.”

즉시 귀환하라는 명령이니 미적거리고 있을 수도 없는데.

툭.

그대로 문을 닫은 한나가 신전 복도로 나섰다. 내딛는 걸음마다 마샤에게 갈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휴.”

“무슨 한숨을 그리 쉬어요?”

“엄마야!”

한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짐을 떨어뜨렸다.

“짐을 많이도 챙겨 왔네요. 오래 있을 작정이었나 봐요.”

“마샤, 네가 왜 여기 있어?”

“제도로 돌아가는 거죠? 저도 같이 데려가요.”

“네가 나랑?”

“선생님 마차는 신전 거니까, 공짜잖아요.”

마샤의 눈이 곱게 접혔다.

한나는 당황스러웠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돌아간다고?”

이렇게 쉽게 굴러 들어오다니!

“산도 폐쇄됐는데, 선생님도 없는 여기가 무슨 재미겠어요.”

마샤가 한나의 떨어진 짐을 집어 들었다.

“싫어요?”

“아, 아니. 싫을 리가. 나야 완전 좋은데……. 음.”

마샤가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하니, 뭔가 또 못내 찜찜하기도 하고…….

“저도 마탑에서 복귀 명령이 떨어져서.”

마치 신전에서 한나에게 즉각 복귀하라고 연락이 온 것을 안다는 듯 마샤가 말했다.

“마탑도 정신없을 만하지.”

황궁의 일에 민감한 건 마탑이나, 신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당분간은 선생님이 저랑 놀아 줘야겠어요.”

“참 나, 애도 아니고.”

“열 살 애 취급한 게 누군데.”

마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갈라티아 마을에서의 한나와 마샤의 대치가 허무하게 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마샤의 고집을 꺾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한나에겐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가면서 먹을 주먹밥 같은 건 없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나라에 큰일이 났는데, 왜 이리 여유롭고 난리야?

“없어.”

한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 * *

한나가 핀체프와 마차를 타고 갈라티아 마을에 올 때는 마차 안에서 투닥거리고, 멀미로 앓는 소리를 듣느라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마샤는 핀체프와 달리 멀미도 하지 않았고, 의외로 말도 없었다. 마샤는 마차에 마주앉은 지 한 시간이 넘도록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마탑도 참 바쁘네.’

광석을 찾으러 발 빠르게 움직인 것부터 시작해서 마탑이나 신전이나, 참 열심히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빼고 다 열심히 사는 건가.”

한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열심히는 아니었나 봐요.”

갑자기 들려온 마샤의 목소리에 한나는 흠칫 놀랐다.

“어휴! 놀래라!”

“여태 같이 있었는데, 새삼 왜 놀라고 그래요?”

“네가 여태 입에 꿀 발라 둔 것처럼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말을 하니까 그렇지.”

한나의 대답에 마샤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선생님. 갈라티아 마을에 온 진짜 이유가 뭐예요?”

몇 차례의 실랑이에서 충분히 설명했던 것 같은데.

“이미 말하지 않았어? 난 성수를 전달하…….”

“아뇨. 진짜 이유.”

마샤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한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이들이 보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샤가 저렇게 빤히 볼 때면,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옴짝달싹하기 힘들어진다.

“신전의 뜻이 아니라, 선생님만의 이유.”

심지어 마치 뭔가 아는 것처럼 들려서 소름이 돋았다.

“왜 나한테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해?”

“선생님은 귀찮거나 위험한 일은 질색하잖아요. 남이 시켜도 싫다고 안 할 사람인데.”

마샤가 손으로 턱을 괴며 웃었다.

의심의 이유가 그렇게 간단한 이유였다니.

“내가 촉이 좋잖아. 네가 사고 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나 보지.”

“흐음. 선생님은 감은 무딘데, 꼭 그렇게 가. 끔. 촉이 발달한단 말이죠.”

“너답지 않게 너무 예리하게 파고드는 것 같다.”

한나의 말에 마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널 그 위험한 곳에서 데리고 나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렇다고 해 두죠.”

“너 설마, 폐쇄가 끝나자마자 돌아갈 건 아니지?”

한나가 물었다.

제도에 잠자코 있다가 폐쇄가 풀리자마자 저를 따돌리고 쪼르르 달려갈 마샤의 모습이 눈에 훤히 그려져서였다.

“아니라고 하면, 믿어 주긴 할 거예요?”

아니, 이 녀석 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걸까. 화법이 묘하게 약오른단 말이지.

사실, 몇 초 전까지 의심하고 있던 게 딱 걸린 것 같아 한나는 괜히 찔렸다.

‘그런데 난 정말 마샤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수는 있나.’

역시, 이런 건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건가.

‘선생님은 너희를 믿어.’

예전에는 아이들에게 믿는다는 말이 아주 쉽게 나왔던 것 같은데. 헤어져 있던 시간 동안 달라진 건, 마샤일까, 아니면,

‘……나일까.’

한나는 마샤의 전체적인 모습을 훑었다.

단정한 제복, 짧은 머리카락, 단단해 보이는 몸, 큰 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마샤는 많이 변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이 겹쳐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샤는 마샤인 건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나의 입에서 피식, 낮은 웃음이 터졌다. 그러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마샤, 난 네가 하는 말 믿어.”

“…….”

마샤는 그런 한나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턱을 괸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는 한나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해 볼 필요가 없었다.

“항상 믿고 있어.”

저렇게 따스한 얼굴로 하는 말이 거짓일 리가 없으니.

이상하게 심장이 간질거렸다. 마샤의 철벽같던 웃는 얼굴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옮겨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는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네? 어디요?”

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대형 폭탄이 터졌다.

“황궁.”

“저더러 황궁에 가라고요?”

한나의 눈은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신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유피르 대신관에게 들은 말이, 저가 황궁으로 가야 한다는 소식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 치료할 병사들이 많다고 하는군.”

“그런 거면 저보다는 다른 치유신관들이 낫지 않나요.”

겁나서 이렇게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정말, 객관적으로 보면 웬만한 치유력은 자신보다는 다른 신관들이 황궁에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한 말이었다.

평소 한나는 제 능력은 성수나 만드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 처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요청이라는군.”

“네?”

예상 못 했는지 한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이 상황에 의문이 드는 건 바로 유피르였다.

“폐하께서 치유 신관으로 그댈 콕, 집어 말씀하셨다는 거지.”

“……아.”

이안인가.

물론 이안이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가 이번 일로 다친 곳은 없는지, 힘들진 않았는지, 혹 어떤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는 것도 많았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이안을 본다고 생각하니…….

‘어색해!’

몹시도 어색했다. 생각해 보라, 전에는 선생님과 보육원 아이의 관계였는데, 이제는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안녕. 이안? 잘 지냈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와, 딱딱하다. 딱딱해.

인사부터 호칭까지, 아주 그냥 상상만 해도 어색했다.

그것도, 즉위하고 바로라니.

뭔가를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겠는가.

‘네가 아버지를 슥삭하고, 왕이 된 거니? 호호.’

―같은 소리를 할 수도 없고.

거참…….

“난감하네.”

“새 황제 폐하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네? 아, 그……. 음, 글쎄요.”

유피르의 물음에 한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는 건 많지만, 안다고 하면 어떻게 아는지 물어보겠지.

그냥 모른다고 하는 게 상책이다.

“그럼 도대체 왜 자넬……. 하여튼, 황궁에서는 되도록 빠르게 와 달라고 요청한 것 같으니 준비해.”

“설마 저 혼자 가는 건 아니죠?”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나가 물었다.

그 어색함의 구렁텅이에 덜렁 혼자 밀어넣진 말아 주세요. 제발요.

“다른 치유신관들도 도착하는 대로 합류할 거야. 그리고…….”

“핀체프는요?”

만만한 게 핀체프였다.

“함께 보내도록 하지.”

“휴.”

한나는 안도했다.

핀체프만 모르는, 핀체프의 일정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 * *

“물귀신이냐?”

핀체프는 질린 눈으로 한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한나와 함께하는 마차가 익숙해졌다.

다행히 갈라티아 마을로 가는 험한 길과 다르게,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는 부드러운 길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믿을 사람이 너밖에 더 있니.”

“넌 분명 저승길도 나를 길동무로 삼을 거야.”

“뭘 또 그렇게까지 확대해석하고 그래.”

“그 전에 내가 널 손절해야겠어.”

“하하하하, 얘도 참. 너 나 아니면 친구도 없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핀체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망할 인간관계. 망할.

“친구를 잘못 사귀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나 정도면 좋은 친구지. 돈 주고도 못할 값진 경험을 하게 해 주잖아. 네가 또 언제 황궁 구경하겠어?”

“너 지금 황궁이 어떤 상황인지 몰라? 분명히 피비린내가 진동을 할 거라고!”

“오. 그렇게 꽥꽥 소리 지르다가 목 잘리기 딱 좋겠다.”

“너는 농담을 해도!”

농담 아닌데.

한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방금 건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시점에 황궁에 가면 입조심 해야지.

“너무 걱정하지 마. 신관을 죽이기야 하겠어?”

“넌 어째 천하태평이냐.”

설마 천하태평할 리가.

한나도 심경이 제법 복잡한 상태였다.

“황제 폐하가 어떤 분인지도 아직 모르잖아. 겪어 봐야 알지. 겪어 봐야…….”

지난 시간이 변화시켰을 이안을, 겪어 봐야 알지.

그건 핀체프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 * *

“신관님들께서 지내실 궁은 이곳입니다.”

얼마나 오래 있으라고 궁까지 내어 주는 걸까.

“여기, 이 복도에서 왼쪽으로 가시면 본궁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가시면 후원으로 가는 길과 2층 계단이 나온답니다.”

황궁의 시녀는 신관들에게 궁의 지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궁까지 통으로 주는 거래?”

핀체프가 한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핀체프. 저거 진짜 금일까?”

현재 한나는 으리으리한 황궁을 구경하는 것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황궁은 신전과 달리, 돈을 있는 대로 발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도 금, 저기도 금.

도금이라 해도 박박 긁어 가면 몇 년은 놀고먹을 수 있지 않을까.

“네가 무슨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아니야. 범죄야.”

초점이 흐려진 한나의 상태를 확인한 핀체프가 일찌감치 말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잡히지만 않으면…….”

“정신 차려.”

중앙 신전은 넓고, 아름다운 장식물이나 벽화도 많았다.

물론 그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하자면 여기 있는 금만큼이나 비싼 값을 치르겠지만, 반짝거리는 노란 것이 주는 감동은 예술품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끝내준다. 황궁.”

“그러다 신관복 벗겠어.”

“응. 저 금이 내 것이라면 못 벗을 것도 없……. 악. 왜!”

보다 못한 핀체프가 한나의 팔을 꼬집었다.

“추태 부리지 마.”

거참, 좀 신기해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또 추태라고…….

아무래도 핀체프는 부유한 집에서 자란 게 분명하다. 어떻게 이런 황금 기둥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지.

“살짝 황궁의 위상에 기가 눌리는 기분인데.”

“넌 이런 상황에도 정말 긴장감이 없구나.”

반대로 핀체프는 반란이 막 끝난 황궁에서도 이토록 여유 넘치는 한나가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런 황궁을 보고도 그렇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 인간미 없어. 알아?”

투닥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소음이 시녀의 귀에 닿았다.

“궁금하신 게 있나요?”

“아. 아닙니다.”

제발 창피하게 굴지 말라는 핀체프의 애원의 눈빛에 한나는 긍정의 끄덕임을 보냈다.

“그럼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더 궁금하신 것은 황궁의 시녀들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오늘은 따로 일정이 없으니, 지내실 방을 편하게 고르시면 될 듯싶네요.”

신관들은 어느 문을 열어도 휘황찬란했던 방을 상기하며 자신이 묵을 방을 서로 이야기했다.

“음. 이 층이 나으려나, 일 층이 나으려나.”

한나 역시 어느 방을 택할지 고민하던 그때, 설명을 해 주던 시녀가 한나에게 다가왔다.

“한나 신관님이시죠?”

“네? 네.”

시녀의 부름은 학창시절 선생님이 따로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한나를 긴장시켰다.

‘꼭 지은 죄도 없는데 긴장되는 그런 거.’

“한나 신관님께서는 저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저만요?”

“네. 폐하께서 먼저 뵙길 청하셨답니다.”

“혼자요……?”

“네.”

칼같은 답에 한나는 은근슬쩍 핀체프를 끌어들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죠. 뭐.”

방도 못 정했는데.

한나는 뒷덜미를 긁으며 방긋 웃는 시녀의 뒤를 따랐다.

* * *

“폐하를 알현하실 땐, 몇 가지를 주의하세요.”

“어떤……?”

보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라거나, 눈을 봐선 안 된다거나, 황공하옵니다, 같은 말을 써야 하는 건가.

역시 그런 건가.

한나는 진지하게 현실에서 보았던 갖가지 사극들을 떠올렸다.

“우선 절대 폐하의 몸에 닿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네?”

시녀의 말에 한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설마 자신이 아무나 덥석덥석 더듬는 파렴치한으로 보이는 걸까.

“타인의 손길에 아주 예민하시답니다. 다른 실수는 괜찮지만, 폐하의 몸에 실수로 접촉한 시녀들은 다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어요. 혹시나 해서, 신관님껜 언질을 드리는 거예요.”

시녀가 ‘황궁에서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요,’ 라는 말을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작은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왔다.

‘그 병이 또 심해진 건가.’

순간 한나는 이안의 결벽증세가 더 과도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원래 그런 증세는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하면 심해진다고 했던가…….

그런데 생각을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생겼다.

“저기, 그런데…….”

“네. 말씀하세요.”

“황제 폐하께선 치유신관이 필요하셔서 저흴 부르셨지 않나요.”

“그렇죠.”

“본인이 직접 치료받아야 할 부분도 있는 걸로 들었어요.”

“네.”

“…….”

치유력의 기본은 접촉이라는 건 이곳의 상식은 아닌 건가.

의원이 맥을 짚듯이 척하니 살과 살이 닿아 줘야 치료가 가능하지 말입니다?

치유는 해야 하지만, 손이 닿았다간 목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라…….

‘뭔 똥 같은 상황이야?’

아마 자신이 아닌 다른 신관이었다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을 상황이었을 것이다.

방금 반란을 끝낸 황제 앞에서 치료 거부를 할 텐가, 자기가 치료하라고 해 놓고 살이 닿아 기분이 나빠졌다며 쥐도 새도 모르게 슥삭 당할 것인가.

그냥 사형선고나 다름없잖아?

“도착했습니다.”

시녀의 말에 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이어진 커다랗고 화려한 문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분은 중앙 신전에서 오신 치유신관님입니다. 폐하의 명으로 오셨습니다.”

시녀가 근위대 기사에게 말하자, 남자는 한나를 확인한 뒤 문을 두드렸다.

“폐하, 치유신관께서 알현하러 왔습니다.”

기사가 알리는 말에, 한나는 이상하게도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될까.

오랜만에 이안을 만난다는 사실에 심장이 요동쳤다.

두근.

두근두근.

잠깐의 시간이 긴 침묵으로 느껴졌다.

“문을 열어라.”

안에서 들려온 굵은 목소리가 낯설었다. 

정말 이안이 맞는 걸까. 혹,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반기는 건 아닐까. 이제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달칵.

커다란 문은 예상과 달리 부드럽게 열렸다.

“…….”

문이 열렸지만 한나는 여전히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시녀가 그녀에게 들어가라는 말을 하고서야, 주춤주춤 발이 떨어졌다.

“……이안.”

오는 내내 생각했다.

‘이안을 만난다면,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황제 폐하라고 불러야지’라고.

하지만 이안의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내내 시뮬레이션했던 장면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저도 모르게 그 시절처럼 이안을 불러 버리고 말았다.

반짝이는 금발머리, 속을 알 수 없는 보랏빛 눈동자, 그 시절처럼 단정한 옷 위로 넘실거리는 붉은 망토.

빠르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주인공은 분명 이안이었다. 얼떨떨하고 감격스러운 장면에 한나는 넋이 빠졌다.

“한나.”

귓가에 울리는 따스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안의 품에 폭 안긴 뒤였다.

‘……어라?’

“그……. 저, 저기…….”

형편없는 첫인사였다. 한나는 자신의 손끝에 걸린 망토 자락 감촉이 꿈만 같았다.

이렇게 이질적인 감각이라니.

이안은 얼이 빠진 한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그의 따스한 환영에 경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황궁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달칵.

문이 닫힐 때까지 시녀들과 시종들, 기사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자신들이 목격한 광경이 ‘그’ 황제 폐하가 맞는 건지.

한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뒤늦게나마 인사는 제대로 한 건지.

시선이 어지럽게 튀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마주앉은 이안은 편안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의 주름 하나 없는 빳빳한 바지 무릎 위로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올려졌다.

한나의 시선이 그 장갑에 닿았다.

‘저 하얀 장갑은 여전하네.’

이제야 정말, 자신이 알던 이안을 만난 것 같았다.

“…….”

그렇게 꽤 한참 동안 긴장을 털어 내는 동안, 이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방금 따스한 인사가 꿈이었나 싶어 한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흔들림 없이 한나를 향하고 있던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는 그 말에 한나는 울컥, 어떤 감정이 치밀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어찌 연락 한번 없었느냐고, 탓하고 싶다가도 그 긴 시간 고된 길을 달려오느라 힘들지 않았느냐고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저 자리에 앉기까지 이안은 얼마나 죽을 만큼 노력했을까.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저 상상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황제가 되고서 자신을 찾아 주어 고맙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그대로네요.”

그에 한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너는 많이 변했어.

아주, 많이.

앳된 얼굴은 온데간데없는 이안의 모습을 오롯이 눈에 담았다. 보송보송 귀엽기만 하던 금빛 머리카락은 이제는 단정하게 턱 끝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눈매와 달리 다소 무정해 보이던 마른 눈빛은 이제 온화한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길쭉하게 뻗어 있는 다리를 보고 있자니, 새삼 방금 그의 품에 쏙 안기던 키 차이가 다시금 생각났다.

언제 이리도 크게 자랐을까.

“다시 만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려 했는데.”

이안의 낮은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습관이 무섭네요.”

그러고 보니, 이안이 처음 자신을 부른 호칭이 ‘한나’였다는 건 조금 놀랄 일이었다.

한나의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이 스쳤다.

‘다시 만나면 선생님 말고 이름으로 부를래요.’

이안은 자기가 뱉은 말을 결국 지키는 사람이구나.

“왜 이리 말이 없어요. 제가 반갑지 않아요?”

유독 이안은 그랬다.

드문드문 보던 제레미야 말할 것 없이 편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마샤에게도 이렇게 어색하진 않았는데.

유달리 이안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가 황제가 되어서? 그 자리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아주 가끔이라도 편지를 나눌 수 있었던 마샤와는 또 다른 반가움이라서일까.

“반가워. 너무 반갑…… 지요.”

일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가 난관이었다.

“풋.”

한나의 어색한 대답에 이안은 웃음이 터졌다.

“왜, 왜 그러세요?”

“하하하.”

이안은 장갑 낀 손으로 제 미간을 짚으며 진심으로 웃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한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까지 떨며 웃고 있었다.

“황궁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날 웃게 한 거 알아요?”

“왜, 왜요?”

뭐 실수라도 했나. 표정이 웃겼나.

“그 어색한 말투는 뭐에요?”

“마, 말투요?”

존대가 이상하다는 건가.

한나 역시 이안에게 존대를 하는 건 어색했지만, 황제가 된 그에게 보육원 시절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소중한 목 잘릴 일 있나!’

이안은 그런 한나의 복잡한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물론 입가의 미소는 여전했다.

“아무리 인연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황제 폐하시니…….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지요.”

“흐음.”

이안은 긴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쓸며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있었다.

혼란에 빠져 있는 한나를 보며 이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물론 지금 그가 ‘원래 하던 대로 편하게’ 대해 달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단순한 한나는 조금만 불쌍한 눈으로 예전의 모습이 보고 싶다 말하면 금방 6년 전 그때로 돌아갈 것이라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래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요.”

한나의 저 모습이 얼마나 갈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이안의 말에 침묵이 흘렀다. 사실은 한나도 저를 말려 주길 바라던 마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결국 대답을 찾지 못한 한나 대신 이안의 입이 먼저 열렸다.

“묻고 싶은 게 많지 않아요?”

그는 한나의 성격이라면 저를 만나자마자 6년간의 행적이나, 지금 황제가 되어 나타난 경위를 물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과묵한 한나는 그의 예상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어떤 물음이 날아올지, 또 어떤 답을 해 줄지 생각하는 것도 이안에게는 꽤 재미있는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한참을 심사숙고하던 한나는 겨우 입을 열어,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다친 곳은 없어?”

방금까진 예를 차려야 한다던 말조차 잊고 튀어나온 질문.

하지만 이안은 그 질문에 간질거리던 입이 턱, 막혀 버렸다.

어찌 황제가 되었냐.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 정말 반란을 한 것인지, 혹은 대공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첫 물음이 고작 몸 걱정이라니.

언제나 제 선생님은 평범한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그게 제일 궁금해요?”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나…… 요?”

한편, 한나는 속을 알 수 없는 이안의 모습이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 저가 신관이 필요하다고 불러 놓은 상황에 그럼 뭘 궁금해한단 말인가?

한나의 질문은 온전히 직업적 본능이었다. 물론 한나는 다른 것들이 궁금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소설의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당연히 일어난 일이 생긴 거겠지,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안이 상한 곳이 없는가를 제외하고서는 현재로서는 달리 궁금할 게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렇군요.”

이안의 화법은 아주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질문하라더니 답은 않고 웃고만 있으니.

한나가 답답함을 느낄 즈음 이안이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정상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응? 아니, 네?”

정상이 아니라는 말에 한나는 조금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불면증이 심한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마치 남 얘기처럼 알쏭달쏭한 어투였다.

“언제부터요?”

“식욕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심각한가요?”

잠 못 자고, 밥 못 먹은 것 치곤 얼굴은 윤기가 좌르르 했지만.

“기운이…… 없던가.”

왜 자꾸 말끝이 의문문이지.

“감정 기복이 심한 것 같기도 하네요.”

“감정 기복이라면…….”

이안의 말에 한나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얼마나 이안의 이야기에 집중했는지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많이도 기울어 있었다.

‘실수로 접촉한 시녀들은 다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어요.’

이 순간 아까 시녀가 한 말이 생각날 건 뭐람.

설마 저 감정 기복이 여차하면 사람들을 슥삭하고 다닌다는 뜻은 아니겠지.

한나의 동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런 한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이안은 그 미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치료해 주실 거죠?”

“아……. 예?”

당황한 한나가 되물었다.

신관의 능력은 만병통치, 뭐 그런 게 아닌데.

그리고 방금 한 말을 조합해 보자면, 외상보다는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건데.

“그러려고 오신 거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보살펴 주세요. 곁에 두고, 천천히.”

이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한나에게 부탁했다.

치료……. 요청……. 맞지?

왜 어감이 묘하게 들리는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만이 할 수 있을 거예요.”

뭘 할 수 있다는 말이지.

“내 영혼을 치료하는 거.”

그 답은 바로 이어 나왔지만, 한나는 어딘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을 만나서 좋은 날이네요.”

웃는 얼굴 밑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째서 영혼을 치료한다는 표현을 쓴 걸까. 설마 6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다 못해 신수가 훤해 보이는데 말이다.

“신력으로 하는 치료는 거의 외상에나 효과가 있어요.”

“그럼 외적으로 다른 치료도 함께해 주셔야겠네요.”

“하지만 그쪽 분야는 내 전문도 아니고…….”

“말씀드렸잖아요. 다른 사람은 안돼요.”

생긋 웃는 이안의 모습에 한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긋하게 말하는데 어째서 소름이 돋는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선생님이에요.”

아까부터 드는 생각이었지만, 황제 폐하의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리 제 앞에 앉아 있는 존재가 어린 시절 ‘그’ 이안이라는 걸 알고 있다지만 떨어져 있던 탓에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특히나 황제 폐하라는 타이틀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황제 폐하의 선생님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또 얼마나 궁금해서 달려들게 될지.

“폐하, 그 호칭이 좀…….”

“선생님 말인가요.”

“네. 남들이 들으면 그, 괜히 궁금해할 테고…….”

한나의 말끝이 흐려졌다. 또 왜 선생님인지를 설명하려면, 보육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그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황실 사정을 잘 모른다고 하나, 새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아직 위태로운 황권이라는 정도의 예측은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안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은 굳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을 테고.

한나는 모르긴 몰라도 사극 광팬으로서, 황제의 과거는 마치 신화처럼 굉장한 발자취로 포장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전히 배려심이 탁월하시네요.”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럼, 앞으로는 뭐라고 부르죠?”

“편하게…….?”

“한나, 한나, 한나…….”

이안은 몇 차례 한나의 이름을 입안에 굴렸다.

“역시 이름만으로 부르기엔 조금…….”

이안은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한나는 그 그림 같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이안이 빙긋 웃으며 한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신관님.”

“아, 네!”

자연스럽게 불리곤 하던 그 호칭에 한나는 깜짝 놀라 답했다. 그 팔딱거리는 반응에 이안은 하하, 웃었다.

“신관님이라는 호칭이면 될 것 같네요.”

“그……. 그러세요.”

“좋아요.”

그러라고는 했지만, 한나는 어색해서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색하다. 어색해.

어색해 죽을 것 같다!

이안과의 만남은 숨 막히는 어색함을 몰고 왔다. 그와의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 * *

“흠흠~”

이안과의 첫 만남 이후, 한나에게는 그를 정식으로 치료하게 되는 시간이 생겼다.

바로 하루에 딱 한 시간.

하루 한 시간, 한나는 이안을 치료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황궁에서의 하루는, 솔직히 말하자면 천국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살면서 이렇게 극진한 손님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정도였다.

한나 스스로 생각해도 제 인생은 대접을 받기보다는, 누군가를 돌보는 게 익숙한 삶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시간마다 따뜻하게 차려진 식사가 반기고, 시녀들의 손에 관리된 깨끗한 침구, 하다못해 신관복의 세탁마저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되다니!

“천국이네.”

호화스러운 삶이 이런 걸까.

하루 만에 이런 기분이 드는데,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는 날 눈물을 참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한나는 오늘도 가볍게 하나로 묶은 분홍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치료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가 맞나.”

한나는 첫 치료의 장소로 황궁의 중앙 정원을 택했다. 첫 만남에 어색함으로 숨 막혔던 방의 공기가 생각나 숨통이라도 트이고자 외부를 택한 것이었다.

“정원도 관리가 잘돼 있네.”

한나는 아름다운 가을의 꽃이 길게 이어진 정원을 종종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치료를 해야 하는 거지.”

신관의 치유력이란 대개 외상의 치료나 정화에 특화되어 있었다.

즉, 그녀에게는 이안이 말하는 ‘마음의 병’ 같은 걸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었다.

“흠.”

지난밤 한나는 있는 지식, 없는 지식 탈탈 털어 심리상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상담의 기본은 듣는 것이다.

일단은 이안의 잠을 방해하는 고민을 듣는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안 역시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은 편해졌지만, 오늘은 또 그 어색함을 어떻게 견딜지가 문제였다.

‘이상하게 이안은 뭔가 불편하단 말이야.’

어릴 적부터 속을 알 수 없던 이안이었다. 그런 이안이 그냥 어른도 아니고, 황제가 되어 나타났으니.

그냥 얼굴이나 보고 ‘잘 자랐구나! 축하해!’ 하고 제 갈 길 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휴, 무슨 정 없는 생각이야.’

한나는 도리질을 치며 방금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그러면서 정원 중앙의 테이블과 의자가 위치한 곳까지 가는 내내 머리를 수차례 흔들어야 했다.

* * *

“폐하, 그럼 이 사안은 대공 각하께 일임하시겠습니까?”

새 황제의 보좌관이 된 알렉스에게 이 질문은 아주 곤란한 숙제였다.

대공이 제 앞의 황제를 황좌에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본인이라 해도, 군권력에 해당하는 민감한 사안을 건드리려 하는 건 어쩌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일지 몰랐다.

그렇지만 황궁 내에서 대공의 권력에 눈치를 보지 않는 이는 없었다.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황제의 오른팔이어야 할 자신이 이렇듯 계속 대공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만 걱정과 달리 황제의 대답은 너무도 쉽게 나왔다.

“남은 것들은 황궁 재건에 관련된 사항인가?”

“네. 그렇습니다. 이번…….”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반란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 소실된 제3궁의 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소실되었는지,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꼭 그 궁을 재건해야 하나?”

제3궁은 역사적으로 아름답기로 손에 꼽히는 궁이었다.

“그럴 이유 없습니다.”

“그럼 밀어 버리고 꽃이나 심는 게 낫겠군.”

대화 내내 이안의 시선은 창밖에 머물고 있었다.

“예. 폐하의 뜻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모름지기, 조의는 꽃이 함께해야지.”

이안의 발언에 알렉스는 등골이 서늘했다.

저렇게 따스한 어투로 조의를 표하는 이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그 아비를 죽인 사람이 말을 하는 당사자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명하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이안은 일이 다 끝난 듯, 홀가분하게 몸을 돌렸다. 일찌감치 알렉스와의 대화에는 관심이 없던 그였다. 그의 시선은 내내 창밖에만 머물고 있었으니.

“그럼, 이후의 일은 나중에.”

이안은 평소 그답지 않게 바쁜 걸음을 옮겼다.

알렉스는 중요한 사안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우고 자리를 떠나는 황제의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예. 그럼…….”

인사조차 끝까지 들을 여유조차 없이 나간 황제를 보며 그는 이안이 바라보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궁의 중앙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분홍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하나로 묶고, 하얀 옷을 입은 신관이 꽃에 코를 박고 있었다.

* * *

“이것도 향이 없네.”

정원의 꽃들은 예쁘기는 한데, 왜 꽃들이 향이 없는 걸까.

한나는 아름다운 정원의 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찾아냈다.

“마력으로 피운 꽃이라 그래요.”

“아, 그렇구나. 마력으로…….”

갑작스럽게 들려온 음성에 한나가 흠칫 놀랐다.

누가 대답한 거지.

“급하게 꾸미는 데 마법의 힘을 조금 빌렸거든요.”

고개를 돌리자, 오늘도 단아한 모습의 황제 이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

한나의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그렇게 급하게 일어날 건 없는데.”

“인기척이라도 좀 내고 다니시죠.”

“신관님이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신관님’이라는 호칭이라니, 시작부터 어색했다. 한나는 어색함을 감추고자 다시 꽃으로 화제를 돌렸다.

“어째서 마력으로 꽃을 피울까요. 모름지기 꽃은 향기가 나야 하는데.”

한나의 말에 이안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뭐지? 틀린 말 했나?

“작은 소동으로 꽃들이 모두 짓밟혔거든요. 빠르게 복구시키는 데 마법이 쉬운지라.”

‘작은 소동’이란……. 그걸 뜻하는 거겠지?

짓밟은 건 사람? 말? 병사? 뭘 생각해도 아찔했다. 한마디로 반란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황궁을 빠르게 복원하느라 마법으로 꽃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군요…….”

금세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향기 없는 꽃의 전말을 알게 되자, 이제 신기함보다는 오싹함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치료, 시작할까요?”

이안이 정원의 의자를 눈짓했다.

“가시죠.”

한나 역시 서둘러 테이블과 의자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이안은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한나는 정원 곳곳에 자리한 기사들을 곁눈질했다.

이제는 같이 있는 것도, 오롯이 둘일 수가 없구나. 새삼 그의 위치가 상기되는 부분이었다.

“왜 하필 정원이에요?”

이안이 치료 장소 선정의 이유를 물었다. 그에 한나는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봤다간 숨 막혀 죽을까 봐.’라고 사실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한나는 괜히 풀밭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이런 시간 아니면 또 언제 햇빛 볼까 싶어서…… 요.”

“햇빛?”

“너 산책도 잘 안 하잖아.”

저도 모르게 반말이 툭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한나가 이안을 바라보았고, 이안은 그런 한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안 하시잖아요! 그래서 그러죠. 매일 집무실에나 콕 박혀 있을 테니까…….”

당황한 한나가 서둘러 해명을 시작했다. 어째 하는 말마다 경망스럽기 그지없는 것 같은데.

“맞는 말이네요.”

이안은 별다른 지적 없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가 황궁에 들어선 뒤, 이렇게 여유롭게 햇빛이나 받으러 정원에 나온 적이 없으니.

“편하게 마음을 비우고, 차도 한잔하죠.”

한나의 말에 이안이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종 한 명이 부리나케 그의 옆으로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따뜻한 차.”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오……. 이건 마치 마술쇼를 보는 것 같았다.

손짓 한 번에 준비되는 차라니.

치료를 시작하기 위해 한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밤에 잠을 잘못 잔 것 같아요.”

“잠요?”

“어깨가 뭉쳐서 조금 아프네요.”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데.

“아, 그럼 제가 성수를 가지고 올게요.”

그런 한나의 말에 이안은 의아한 기색으로 그녀를 보았다.

“신관님이 앞에 있는데 왜 성수가 필요하죠?”

“아.”

한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게, 제가 치유를 못 하는 건 아닌데…….”

말을 하려니 조금, 창피하기까지 했다.

“아닌데?”

이안의 얼굴에 점차 의문이 깃들었다.

“제 능력엔 특이점이 있어서…….”

“뭔가요?”

“아파요.”

한나의 대답에 이안은 잠시 생각했다.

치료를 하는데, 아프다?

“얼마나요?”

“조금……. 많이?”

“궁금하네요.”

얼마나 아프길래 저렇게 눈치를 보는 건지.

“해 주세요.”

그리고 몹시 궁금해졌다.

하지만 한나는 이안의 제안이 영 탐탁지 않았다.

“…….”

보라, 이안의 뒤로 수두룩한 기사들과 시종들을.

이안이 아파서 소리라도 지르면 제 목에 검을 들이밀어지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

한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에 이안은 그녀의 난감함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파도 참을게요.”

걱정 마요, 라는 말이 뒤따랐지만 한나는 그를 믿지 못했다. 아파 봐야 얼마나 아프겠냐 싶어 호기롭게 도전했던 많은 신도들이 돌변하는 모습을 숱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신전에서 자신더러 신도에게 치료 금지를 시켰겠는가.

“참을 수 있으시겠어요? 많이 아픈데.”

“제가 한 말은 지켜요.”

정 그러겠다고 하니, 더 이상 거부하기도 난감했다.

“……좋아요.”

차라리 한번 겪어 보는 게 낫겠지.

지 무덤 지가 판다더니.

한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이안은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하얀 장갑을 벗었다.

이안이 장갑을 벗자 멀리 있던 시종들과 시녀들이 움찔거렸지만, 한나에겐 그것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

“…….”

그의 손이 한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보통 팔목을 내밀지 않나? 왜 이렇게 손을 애틋하게 잡는 기분이지.

맞닿은 이안의 손은 따뜻했다. 뭐, 어떻게 잡는지는 상관없으니, 한나는 일단 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천천히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물론, 힐끔힐끔 이안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앞에 둔 것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소리를 지르려나. 먼저 손을 떼겠지? 어쩌면 욕을 할지도 몰라. 간혹 치료 도중 쌍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푸흡.”

“……?”

그런데 이안의 반응은 한나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푸흡’이라는 비명도 있었나?

다소 이상한 비명(?) 소리 뒤로 이안은 남아 있는 손으로 제 미간을 짚었다. 그의 표정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이안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맞잡은 손까지 타고 내려왔다.

“괘, 괜찮으세요?”

보통 이 정도에서 눈이 뒤집히던데…….

“푸하하.”

이안은 웃고 있었다. 그것도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괜찮으신 거 맞죠?”

“하하하.”

너무 아파서 미친 건 아니겠지. 설마, 아픈 걸 즐기는 변태는 아니겠지?

왜 이리 미친 사람처럼 웃어. 이건 의심을 해봐야 할 부분이다.

“하…….”

한참을 미친 듯이 웃던 이안이 조금 진정된 듯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뭔가 이상한가요?”

“아……. 아니에요. 그냥, 상상 이상이라.”

분명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라고 했는데.

“……정말, 특이한 능력이네요.”

‘특이한’이 얼마나 많이 돌려서 말하는 건지 한나는 알고 있었다.

미친 능력이겠지.

“어깨는 어때요?”

아무리 특이한 부작용이 있다고 해도, 치유력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음. 치료가 너무 강렬한 충격이라, 어깨가 아픈 건지 아닌 건지 구분이 안 되네요.”

……그 정도였냐.

“재미있네요. 선……, 아니, 신관님의 치료.”

“재미?”

어느 부분이 재미가 있다는 거지. 역시 변태인 건가.

“네. 확실히 특이하고.”

“그랬나요. 어지간하면 아프지 마세요. 치료하면서도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라…….”

마치 고문하는 기분이라고.

“아니에요. 전 좋았어요.”

변태 확정.

“적어도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이.”

좀비도 벌떡 일어나긴 할 텐데.

“제법…….”

여전히 한나의 손 위에 위치해 있던 이안의 손이 꼼지락, 움직이며 한나의 손가락을 쓸었다.

“중독성 있을 것 같기도.”

음, 확실히 이 나라 황제는 변태입니다.

한나는 이안의 특이한 취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치유력을 배우는데, 뭘 좀 잘못 배운 건지……. 유독 그렇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뒤따랐다. 왜 자신은 다른 신관들처럼 평범하지 않은 건지.

“앞으로 몸이 아프면 성수를 이용하던지, 다른 신관을…….”

“다른 신관은 필요 없어요.”

이안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하지만 방금 경험했다시피…….”

“정신 번쩍 들고 좋았어요.”

거짓말쟁이.

하지만 한나는 지금 그런 것보다 다른 게 신경 쓰였다.

“…….”

바로, 아직까지 꽉 잡혀 있는 제 손이었다. 한나의 시선이 힐끔힐끔 손으로 향했다. 꼼지락거리며 손을 떼어 낼라치면, 귀신같이 이안의 손이 한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 치료가 끝났는데요.”

“아직 시작도 안 하지 않았나요?”

“아니, 그 상담 말고…….”

한나의 시선이 손으로 떨어지자, 이안의 시선도 함께 옮겨갔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맞잡고 있는 손을 보고도 요지부동이었다.

“손.”

“지금 이대로가 편한데요.”

난감하다.

참으로 난감하도다.

한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에 있는 기사들과 시종들의 눈치를 보았다.

“상담은, 마음이 편해야 하잖아요.”

그럴싸한 논리에 대꾸할 말도 없었다.

“따뜻한 차와 다과를 준비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 타이밍에 차가 도착했다. 한나는 퍼뜩 손을 빼냈다. 그에 이안은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아주 맛있어 보이네요.”

한나는 박수까지 치며 자신의 자유로워진 손을 즐겼다. 부러 장황하게 꾸민 손동작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벗어 놓은 하얀 장갑을 다시 꼈다.

“따뜻할 때 마셔요.”

“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저 장갑은 꼭 끼고 있어야 마음이 편한 걸까. 한나의 시선은 여전히 이안의 손에 머물고 있었다.

물을까 말까, 고민하던 한나는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적어도 아직은 섣부르게 강요할 단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옛날, 자신이 멋대로 벗겨 버렸던 이안의 장갑이 생각났다. 그 후로 펑펑 울면서 후회했었지.

‘추억이네.’

지나고 보니 그 난리통도 추억이 되었다.

호로록.

차 한 모금과 추억이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해가 강렬했지만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그런 사정을 아는 건지 시종이 담요를 하나 가지고 와 한나에게 건넸다.

“감사해요.”

때마침 등장한 담요가 반가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연기를 바라보던 한나는 천천히 앞을 보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금발 머리카락, 초록의 정원, 멀리 빼곡한 기사들, 여유로운 티타임.

이 어색한 조합이 신기해 웃음이 나왔다. 이안은 이런 상황들이 익숙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을 지키는 수많은 눈과 귀, 그 속에서 태연할 수 있는 건 타고난 성격일까.

“대공 각하는 어떤 분이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안을 이렇게 키워 낸 대공이 궁금해졌다. 그는 한나에겐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었다.

원작에서도 그저 이안을 황제로 등극시키는 일등공신, 내지는 황실의 권력을 움켜쥔 인물로만 짧게 설명됐다.

그 질문에 이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대공 각하가?”

“아뇨. 우리 신관님이요.”

“응? 아니, 네?”

갑자기 왜 불똥이 자신에게 튀었는지, 한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대공을 궁금해할 줄은 몰랐거든요.”

“아…….”

너에 대해선 얼추 알고 있거든.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았을 거예요.”

“다른 뜻?”

“정치나 세력, 뭐 그런 시시콜콜한.”

“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나.

“난 그냥 네가 어떤 사람과 지냈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그러게요. 선생님은 제 기준대로 가늠하는 건 의미가 없네요.”

이안은 미지근하게 식어 가는 차를 들이켰다.

“뭐든 답해 주기로 마음먹었으니 답해 줘야겠죠.”

그는 한나가 궁금해하는 것은 모두 말해 주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떤 식의 관심이든 저를 향한 것은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칼레시안 대공은 저에겐 숙부님이시죠. 뭐, 대외적으로는요.”

대외적으로?

“망가진 정신으로 제국을 쇠퇴시키는 전 황제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황태자의 계승을 반대하던 충신……. 이랄까요.”

마치 국어책을 읽듯, 준비된 설명이었다.

“여기까지가 이 자리에서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네요.”

한나는 분명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촉이 왔다. 더 캐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던 차, 이안의 상체가 한나에게 기울었다.

“더 깊은 이야긴, 다음에 단둘이 있을 때 해요.”

비밀 이야기를 하자는 건가!

그걸 또 은밀한 어투로 말하니, 귓가가 간질거렸다.

“다른 궁금한 건?”

또 어디 질문이 있으면 던져 보라는 뉘앙스였다.

너무 가까운 얼굴이 부담스럽지만 않았다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았을 것이다.

“흠, 흠, 오늘은 네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거니 질문은 다음에 할게.”

“존대는 이제 안 하기로 한 거예요?”

“아!”

언제부터 말을 놓고 있었던 건지. 순간 놀란 한나가 퍼뜩 주위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한나의 불손한 언행에 대해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아니, 적어도 황제의 앞에선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얼마 못 갈 줄은 알고 있었어요. 편하게 해요. 편하게.”

“……그러다 감옥에 갇히고 싶진 않은데요.”

“누가, 선생님을 가둬요?”

그러게, 누가 가두지?

한나는 생각했다.

황제가 괜찮다고 하면, 다 괜찮은 건가?

“말해 봐요. 누가 선생님을 겁먹게 만들어요? 가두려는 그 손을 잘라 버릴 테니.”

“손을 잘라?”

한나의 눈이 커졌다.

“뭐, 다른 것도 잘라도 상관없죠.”

손이 아닌 다른 것……. 발? 몸? 목?

어떤 것이라 해도 살벌했다.

“누가 불편하게 했나요.”

“아, 아니. 그런 사람 없는데.”

“그럼, 전처럼 편하게 날 대해요.”

“그, 그래도…….”

“선생님마저 변하면, 제가 슬퍼지잖아요.”

위치가 바뀌고, 자리가 바뀌고, 이제는 이름마저 함부로 불러선 안 되는 존재가 된 이안에겐 사람들이 변한 것으로 보일까?

“전처럼 제 이름, 불러 줘요.”

“…….”

“처음 봤을 땐 불러 줬잖아요.”

그거야 놀라서 멋대로 튀어나온 거고…….

“어서요.”

나긋한 어투로 채근하니, 거절하기가 어려워졌다.

“…….”

“제 부탁이라고 해도 힘든가요?”

“……이안.”

결국 한나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좋네요. 선생님이 불러 주는 내 이름.”

선하게 웃는 모습이 10살 이안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자신은 혼자 커다란 벽을 만들어 놓고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럼, 이제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아. 요즘 꾸는 꿈 얘기는 어때요?”

“꿈?”

“제법 귀여운 동화 같은 꿈이에요.”

한나는 이안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진지한 얼굴에 이안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꿈속에서 저는 어린 짐승의 모습이에요.”

“어떤?”

“글쎄요. 그건 이 꿈의 끝자락에 닿아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꿈이 이어져?”

“네. 매일, 눈 감을 때마다 이야기가 진행돼요.”

꿈이 이어진다니, 신기한 이야기였다.

이안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조곤조곤했지만, 사람을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나는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유독 약하게 태어난 짐승이었나 봐요. 어미가 눈도 뜨지 못한 새끼를 물고 어디론가 가죠.”

한나의 눈매가 길어졌다.

보양이라도 시키려나.

“물소리가 나요.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폭포 소리 같기도 한……. 고막을 때리는 물소리가 들려와요.”

꼴깍. 침이 넘어갔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 건지.

“그, 그 후엔?”

“차가운 물속으로 한없이 가라앉아요.”

그럼 그냥 죽은 거 아닌가?

“팔, 다리가 허우적허우적, 새끼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발버둥치죠. 어느 순간 차갑던 물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마치, 끓는 물에 들어간 것처럼.”

보통 꿈속에서 차갑고 뜨거운 감촉이 느껴지던가?

한나는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저 물이 거슬리네요.”

말을 하던 이안은 호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나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아름답기만 한 호수가 갑자기 거슬린다는 건…….

“이참에 없애 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요, 선생님 생각은?”

“……아니. 아니야. 아주 보기 좋은데.”

굳이 있는 호수를 왜! 그것도 지금 저러는 이유는 꿈에서 물에 빠졌다는 이유 때문이지 않는가!

“그럼 별수 없네요.”

“응? 뭐가?”

“내일 저기서 뱃놀이를 하죠.”

“……어?”

잘못 들은 건가. 방금까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더니.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야죠.”

그러니까 그 나쁜 기억이 꿈……. 당황한 한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일 이 시간에는, 뱃놀이를 하죠.”

처음부터 그냥 내일은 뱃놀이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그래서 이상한 꿈 얘기를 시작한 거지.

그러니,

“괜찮죠?”

저렇게 만족스럽게 웃고 있겠지. 답정너야 뭐야?

* * *

황궁의 신관들이 회의를 끝낸 오후, 한나를 따라 걷던 핀체프가 넌지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지금 황제 폐하가 선황을 죽이는 과정이 그렇게 잔인했대.”

황궁물 먹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핀체프는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왔다.

“어디서 들었는데?”

“어디긴 어디야 시종들이 쉬쉬하면서 말하는 거 엿들었지.”

“그렇게 떠들다가 너도 잔인하게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너한테만 말하는 거지. 우리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처음부터 정신을 바로 차리고 있지 그랬어.”

“또 답답한 소리 하네. 정말 위험하다니까?”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넌 정말 쫄보야.”

한나가 고개를 저었다. 핀체프는 전투신관 주제에 간이 콩알만 했다.

“그런 소문 믿지 말고, 네가 본 것만 판단해.”

“과거로 돌아가서 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그럼 그 사건에 대해선 생각하지 마. 지금부터 보는 것만 판단의 잣대로 써.”

“이럴 때 보면 너도 참 이상해.”

핀체프가 뭐라고 하든, 한나의 기억 속 이안은 사람들이 떠드는 미치광이 폭군이 아니었다.

빗속에서 내밀던 따스한 손을 기억하고, 친구의 허물을 덮어 주던 다정한 모습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편적인 사실로만 떠들어 대는 건, 다른 사람들로 충분하다.

자신까지 거기에 동조할 필요는 없겠지.

“네가 우리 중에 제일 접점이 많으니, 조심해 둬서 나쁠 건 없잖아. 특히 넌 그 언행 때문에 큰 화를 입을지도 몰라.”

“내 언행이 왜?”

“대신관님들한테도 막 나가는 건 신전에 너밖에 없어.”

“내가 언제 막 나갔다고. 나처럼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어라?”

복도를 걷던 한나는 깜짝 놀랐다.

“저기, 막시온 대신관 아니야?”

익숙한 얼굴이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어휴, 저 양반 얼굴을 황궁에서까지 봐야 하다니.”

한나의 혼잣말에 핀체프는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런 반응이 막 나간다는 거야.”

그나마 들리지 않게라도 한 게, 다행인 지경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한나는 핀체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이미 막시온 대신관에게 가서 말을 걸고 있었다.

“교황 전하의 말씀을 전하러 왔네만.”

막시온은 예의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나도, 막시온 대신관도 서로 의미 없는 인사 같은 건 생략하는 모습이 똑 닮아 있었다.

“교황 전하께서 뭘 전하셨어요?”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지.”

“네.”

한나는 대화하기 좋은 조용한 장소로 이동했다.

* *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막시온 대신관과의 독대에서 한나는 의문이 생겼다.

“사막의 광산에 대한 소유권을 신전이 가져와야 한다는 얘기지.”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신전과 황궁의 일을 일개 신관인 자신에게 전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가 황제 폐하의 치료를 전담하게 됐다고 들었네.”

“그건 그렇죠.”

“광산에 대해 이야기를 잘해 보란 말이지.”

“그런 건 교황님께서 직접 전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한나는 이런 일에 끼고 싶지가 않았다.

“자네가 굳이 갈라티아 마을까지 갔던 건 이번 일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나?”

“네. 전혀 광산 일에는 관심이 없는데요.”

솔직히 북부에 갔던 건, 단순히 호기심이었고, 거기서 마샤를 발견하는 바람에 오래 있었을 뿐이다.

마샤가 제도로 돌아온 지금, 딱히 광산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앞으로 벌어질 북부 전쟁에 신전이 엮여서 자신이 차출되어 그곳으로 가질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즉, 신전이 좀 가만히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황궁은 뭘 하고 있나.

얼른 광산에 신전이나 마탑은 얼씬도 하지 못하게 바리게이트를 치지 않고.

“자네가 황제 폐하와 인연이 있다는 걸 알고 있네.”

“제 뒷조사를 하신 건가요.”

한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송곳같이 뾰족한 시선이 막시온에게 향했다. 이 부분은 확실히, 기분이 나빴다.

도와주려던 마음도 없었지만, 만에 하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싹 사라질 만한 발언이었다.

“각별한 사이이니, 자네가 조금만 나서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지.”

“세상에. 대신관님, 순진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순진?”

막시온은 한나의 말에 헛웃음을 쳤다.

“세상에 그렇게 대단한 광산의 권한을 고작, 어린 시절 인연 때문에 넘기는 왕이 어딨겠어요?”

무슨 손에 쥔 간식 하나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려운 일일수록 단순하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지.”

“어렵고 복잡한 일 저한테 시키지 마세요. 전 그쪽으론 영 머리가 안 돌아가요.”

“우리도 뭘 크게 기대하는 건 아니야. 그냥, 적당한 때에 한 번씩 말이나 던져 주라는 거지.”

뭘 크게 기대도 안 하면서 여기까지 와서 부탁을 하는 건 무슨 꼴이람.

“알겠어요. 저도 노력해 볼게요.”

이건 사실 순 뻥이었다. 노력할 가치도 없으니 막시온 대신관을 얼른 보내 버리자 싶어 대충 둘러대었다.

“온 김에 기다릴 만한 소식도 하나 전해 주지.”

막시온은 한나의 불편한 기색을 풀기 위해 그녀가 반가워할 화젯거리를 꺼냈다.

“소식요?”

그에 반응한 한나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사막의 마물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모양이야.”

“네? 정말요?”

사막 소식, 그것도 긍정적인 소식에 여태 시큰둥하던 한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사막에 있는 신관과 성기사들도 돌아오는 걸까.

“이번에 마지막 성수를 전달했어. 아마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겠지.”

마물의 구멍을 막든, 신관들이 죽든 어떤 식으로든.

“그렇군요…….”

하긴, 갈리아 광석이 나타났으니, 세자르 역시 머지않아 제도로 돌아올 것이라는 건 원작의 내용을 토대로 추측이 가능했다.

그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북부는 전쟁터가 되어 있을 테니 원작의 진입이 정말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얻어 낸 것을 그냥 빼앗길 수야 없지.”

그들은 광석 같은 걸 탐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마물에게 피해 입지 않게 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 건데…….

“세자르 대신관과는 원래 아는 사이였다지?”

막시온의 입에서 나온 세자르의 이름에 한나의 몸이 움찔거렸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반가움이 튀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는 거죠?”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네.”

“다행이네요.”

그나마 이런 소식을 전해 주니, 막시온 대신관과 마주한 시간이 마냥 쓸모없지는 않았다.

“전해 주셔서 감사해요.”

막시온 대신관이 뭐라 하든, 소식을 전해 준 것만으로 좋은 소득이었다.

* * *

그가 사라진 뒤, 한나는 생각에 빠졌다.

마샤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안은 광물에 관심이 있어서 갈라티아 마을에 폐쇄령을 내린 것일까.

그나마 원작과 가장 동떨어져 조용한 건 제레미인가.

“제레미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갈라티아 마을이며 황궁으로 가게 됐다고 전하지도 못해서 저를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누군가 말해 줬겠지……. 음, 그래도 편지라도 한 통 쓸까.”

괜히 마음이 찜찜해졌다. 쓰는 김에 마샤에게도 편지를 해서 딴짓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지 확인을 해 봐야겠다.

한나는 그날, 두 통의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의 편지를 더 적었다가 쓰레기통으로 넣어 버렸다.

그것은 사막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었지만, 마지막 성수가 전해진 이상 더 이상 편지를 전해 줄 이가 없다는 뜻이기에 무용해져 버린 것이다.

“진작 쓸 걸 그랬네.”

괜한 아쉬움이 뒤따랐다. 세자르는 그 뒤로 어떻게 지냈을까.

혹 다치거나 상한 곳은 없을까. 커티스나 모이세이가 어련히 잘 지키고 있겠지만.

이상하게 커티스나 모이세이는 그들 스스로 몸을 잘 챙길 거라는 믿음이 있는데, 세자르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스러웠다.

워낙 제 몸을 아끼지 않고 다니던 모습만 봐서 그런 걸까.

특히 아무거나 먹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잔다든지 하는 일상들 말이다. 사막에서도 모래에 누워 있다가 마물에게 잡아 먹히진 않았으려나.

“워낙 조심성이 없어야지.”

자신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긴 하지만.

이상하게 요즘, 아이들도 그렇고 사막의 소식도 그렇고 걱정할 것들이 늘었다. 막시온 대신관이 헛소리를 하고 가서인지 한나에게는 더 걱정스러운 날이었다.

“맨날 쓸데없는 말만 하지 말고, 성수 보내는 날이나 알려 줄 것이지.”

괜히 편지를 부치지 못한 불똥이 막시온 대신관에게 튀었다.

하여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 * *

보랏빛 하늘은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되지 않게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아래 펼쳐진 끝도 없는 사막의 모래가 별빛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처럼 빛나는 은발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하얀 옷의 사내가 갑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손바닥을 보였다.

갑옷을 입은 남자는 그의 손 위로 검을 얹었다. 그는 단숨에 검을 뽑아 자신이 밟고 있는 모래에 냅다 꽂았다.

끼엑―

찢어지는 괴수의 비명이 들려왔다. 모래가 초록의 피로 물들었다. 그는 손을 털며 돌아섰다.

“모이세이.”

“네. 세자르 님.”

그들은 세자르와 모이세이였다.

“그건 도착했나?”

“네. 이번이 마지막 보급입니다.”

“빠르면 보름 안에 도착하겠군.”

푸른 눈동자가 보랏빛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을 바라보았다.

“지긋지긋한 사막을 떠나는 날이 머지않았네요.”

그들의 대화에 커티스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는 영영 사막에서 잠들지도 모르는데.”

세자르의 짓궂은 말에 커티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막에 오래 있어서 유머 감각이 싹 말라 버리셨나 봅니다.”

“이번엔 함께 온 편지는 없었나?”

“편지 같은 건 없었습니다만.”

“…….”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무슨 편지길래 매번 기다리십니까?”

“그냥, 시시콜콜한 편지.”

“한나 선생님 아닙니까?”

커티스가 한나를 언급하고서야 세자르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만날 날이 머지않았네요. 꼬박 6년을 이곳에서 뺑이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네 말투가 언제 그렇게 불량스러워졌지?”

“6년을 마물이랑 구르다 보면 누구나 성격이 피폐해집니다.”

“흠…….”

커티스는 괜히 말을 돌리는 세자르를 향해 실눈을 뜨고 그를 관찰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뭐가.”

“보육원 선생님이 어떻게 변했을지.”

“변하다니.”

“6년이면 누구나 변하지 않습니까. 보육원 선생님도 나이가 들었을 테고, 주름이 자글자글해졌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주름이라면 자네한테 더 많을 텐데?”

“뭘 또 그렇게 정곡을…….”

커티스는 흐르는 안경을 추켜 올렸다. 그러곤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더 아름답게 변해 있을 겁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

세자르의 미의 관점이라는 건 사실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오히려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냥 그 시절이 그리운 거지. 끝도 없이 달리기만 했으니, 고여 있는 추억은 향수를 자아내.”

“그냥 보고 싶다고 하십시오.”

뭘 그리 빙빙 돌려 말하는 건지.

커티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흔들자 세자르의 입꼬리가 진하게 올랐다.

“그래.”

세자르의 시선이 마지막 보급품 더미로 향했다. 오지 않은 편지에 못내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동안 한나가 보내 주었던 편지는 그야말로 시시콜콜한 내용이 전부였다.

오늘 날씨는 어땠는지, 신전의 신관들이 어떤 실수를 했고, 이따금 신도들의 웃긴 해프닝이나, 제도의 소식들이나 전하는 일상이 담겨 있곤 했다.

하지만, 이 삭막한 사막에서 그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는, 겪어 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보고 싶은 거지.”

그렇게 세자르의 추억은 마치, 영혼의 보금자리처럼 저 사막 너머에 머물고 있었다.

* * *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요즘…….”

한나는 떨어지는 낙엽을 손으로 잡으려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량한 그녀의 운동신경으로는 무리였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혼잣말을 계속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영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란, 북부에서 우당탕탕 구르다 말고 황궁에서 뱃놀이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 멀리, 커다란 황궁의 호수에는 정말 배가 띄워져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이안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어.”

저도 어디서 사차원 소리 들으며 살았지만, 이안의 의식의 흐름은 따라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 얘기를 하다가 대뜸 뱃놀이를 하겠다는 그런 것 말이다.

한나는 호수로 종종 걸음을 옮겼다. 시종들이 바쁘게 뱃놀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씨 좋고, 바람 좋고.”

뱃놀이하기 딱 좋은 날이구만. 이 얼마나 좋은 삶인가.

남들은 치료하느라 갈려 나가는데 혼자 배나 타고 노닐고 있으니.

이 시간에 성수를 만드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칠 즈음, 멀리서 주렁주렁 인파를 몰고 오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일찍 왔네요.”

별 뜻 없는 인사말이라는 걸 아는데, 왜 괜히 뱃놀이에 신나서 빨리 온 사람이 된 기분이 드는 걸까.

“네, 뭐 저야 궁에서 하는 일도 그다지 없으니…….”

“또 얼마 못 갈 존대를.”

이안은 하루 지났다고 다시 어색해진 말투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에 한나는 그의 뒤에 줄줄이 늘어선 시종과 시녀들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보는 사람이 많으니…….”

그쪽이 괜찮다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거든요.

“뭐, 편한 대로 해요. 그럼 어디, 가 볼까요?”

“아, 응. 이야, 떨리는데.”

“뱃놀이해 본 적 없어요?”

뱃놀이를 이렇게 호수에서 해 본 적은 없지. 빙의 전에도 섬에 갈 적에나 겨우 탔던 배였는데.

“없어.”

“속이 안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멀미는 없을 거야.”

아무렴 바다 파도 위를 넘실거리며 타도 멀쩡했는데, 이런 잔잔한 호수에 저렇게 좋은 배를 타고 멀미가 있을 리가.

한나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배로 향했다. 지금 이 몸이, 전의 그 몸이 아니라는 걸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서.

* * *

“얼굴이 하얗네요.”

말 걸지 마라.

“입술이 파리한데.”

한나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의 말처럼 파리해 보여서? 아니, 갑자기 뭔가 치밀어 오르면 손으로라도 막으려고.

“괜찮을 거라면서요?”

“……인간은, 가끔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흡.”

더 입을 나불거렸다간 위험할 뻔했다.

“하필 호수 중앙까지 와서야 티가 나다니.”

애초에 처음부터 안 좋았다면 시작을 안 했을 텐데. 사실 한나 본인도 이 상황이 정말 믿을 수 없었다.

파도도 없는 호수에서 무슨 뱃멀미냐고!

보이지는 않지만 배의 하단에서 사람의 손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인지라, 꿀렁거림이 있었던 것이었다.

“무, 물.”

성수를 찾는 것처럼 다급하고 애달픈 손짓에 이안은 그녀의 손에 물잔을 쥐여 주었다. 꿀꺽꿀꺽,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일단 배를 멈추지.”

이안의 명령에 배가 멈췄다.

“후…….”

냉수를 들이켜고, 배가 멈추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그나마 살 만한 정도였지, 그렇게 좋은 컨디션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상당히 괜찮은 편이야.”

“얼굴에 핏기가 없는데?”

“배가 멈추니 괜찮아. 이제 대화도 가능할 정도야.”

“그럼 잠시 숨이나 돌리고 돌아가죠.”

조금 정신이 돌아오자, 식은땀을 부드럽게 말리는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경치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잔잔한 호수의 주위로 빼곡한 나무들은 가을의 옷을 입고 색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결에 잎이 날릴 때마다 수면 위로 우수수 떨어져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절경이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한나에게 이안이 물었다.

“……그러게.”

뱃멀미도 잊고 하염없이 바라보게 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나쁜 꿈의 기억은 덮어지지 않을까.”

“아름다운 풍경만으론 모자라요. 그 속에 선생님과 제가 있어야 완성되죠.”

“그래서, 그 꿈의 뒷이야기는 어떻게 되는데?”

이상한 소리라고 치부하긴 했으나 일단 물꼬를 튼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하긴 했다.

아니, 꿈이니 결말이 없는 걸까?

“아. 그 얘기를 해야 하죠.”

이안의 반응에 한나는 순간, 역시 꿈 얘기는 그냥 뱃놀이를 위한 밑밥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안은 의자에 깊게 기대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의 등에 둘러진 도톰한 붉은 망토가 쿠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했었죠?”

“물에 빠졌다, 무서웠다, 그러더니 호수를 보곤 기분이 나쁘다고 했지. 덕분에 우리가 여기, 호수 한가운데 있는 거고.”

“아아. 그래요. 물에 가라앉는 기분은 아주, 나빴어요. 전 원래 물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 말에 한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질색을 하던 어린 이안이 생각났다. 그 여름 어느 날, 빗속에서 손을 내밀던 이안도 함께 떠올랐다.

그날은 정말 눈을 가리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펑펑 울었었는데.

“전 수영을 못해요. 그래서 물 위에 이렇게 떠 있는 건 제법, 공포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왜 굳이 뱃놀이를 하겠다고.”

“말했잖아요. 안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야 한다고.”

“꿈일 뿐이잖아.”

“……그래요, 한낱 꿈.”

가지런한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한나는 생각했다.

감긴 눈 아래에는 어떤 것들이 떠다니고 있을까. 이안이 꾸었다는 꿈이 아른거릴까.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새끼 짐승은 결국 살아남았어요. 그날 빠졌던 차가운 물 속에 감정의 어느 부분이 영영 잠식되어 버렸지만, 일단은 숨은 붙어 있었죠.”

꿈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나 보다. 보통은 물에 빠지거나 절벽에서 떨어지면 번뜩 꿈에서 깨곤 하던데.

“짐승은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죠. 아마 그곳은 그 어린 짐승에게 제법 안락한 보금자리였을 거예요.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자기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죠.”

바람결에 이안의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아래로 따스한 빛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순간, 어째서인지 그가 꿈 얘기가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있어요. 어떤 짐승은 꼭 자기가 난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가곤 하죠.”

어딘지……. 이야기의 흐름이, 누군가의 삶의 족적과 겹쳐졌다.

“그리고?”

“……자신이 배척당했던 무리를 잔인하게, 물어뜯어, 먹어 치우죠.”

한 마디, 한 마디, 고저 없는 목소리가 한나의 귀를 파고들 때, 이안은 한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반응을 탐색하려는 것처럼.

“먹어 치운 후엔?”

한나가 물었다.

만족했을까.

혹은 후회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허무 그 자체였을까.

이안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안은 그녀의 질문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시 홀로 남았구나.”

그 대답에 한나는 멍하니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어떤 것을 망가뜨리기 위해 살게 될까.”

공허함이 서린 눈동자는 한나의 어깨 너머, 먼 곳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어린 짐승은 복수를 위해 그곳에 돌아간 것일까, 궁금했다.

“꿈은 그렇게 끝이니?”

한나는 그의 이야기가 허무한 결말이 아니길 바랐다.

“아직, 꾸고 있는 중이라.”

어느새 이안은 다시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행복해지는 길로 걸었으면 좋겠는데.”

그 어린 짐승이.

“노력 중일 겁니다. 그러니, 가장 아름다운 기억 떼어다 곁에 두었겠죠.”

“혹, 그 어린 짐승 이야기가 네 이야기야?”

한나는 어렵게 물었다. 그가 알아주길 바란다면, 기꺼이 그리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저 꿈 얘기일 뿐이에요.”

“꿈…….”

숨기려면 애당초 꿈 따위를 방패삼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안은 제 속을 내비치는 것일까.

“꿈이 아니라면, 무섭지 않겠어요?”

자신이 먹어 치운 것들이.

그런 이안의 물음에 한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가 제 부모를, 형제를, 혹은 대신들을 죽였다고 하면 무섭겠느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안이 무서웠던 건 이미 10년 전 그날부터 익숙했다.

언제 폭군으로 변해서 제 목을 뎅강 잘라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고작 수프 하나를 내어 주면서도 느끼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불안들을 잠재울 수 있었던 건 당연 이안이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불행, 성격, 살아남기 위한 배경.

그가 제 혈육들을 죽이고, 반역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오히려 자신이 황태자의 세력에 의해 제거될 상황이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은 그가 왕좌에 앉기 위해 피를 보았다고만 생각하겠지. 살기 위해 발버둥친 것을 어찌 손가락질할 수 있단 말인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한참 만에 떨어진 한나의 말에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리던 이안의 손이 움찔 멈췄다.

“무슨 뜻이죠?”

이안은 그 순간, 어쩌면 마음 따스한 제 선생님은 뭐든 괜찮다고 위로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나는 그저 그런 위로를 해 주려는 게 아니었다. 한나는 눈에 힘을 주고, 이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도 누군가 널 물어뜯으려거든, 네가 먼저 뜯어 버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건 자연의 섭리니까. 누구한테도 여린 목덜미를 내어 주지 마.”

“…….”

“그 어깨의 화려한 가죽과 털로 꽁꽁 감춰. 살아남는 것을 욕하는 자를 만나거든, 그의 혀 밑에 가시를 넣어.”

이안은 한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다 멍하게 입을 열었다.

“……아.”

제 선생님은, 역시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 어린 짐승이, 고작 나쁜 녀석들의 피로 완벽한 포식자의 발톱을 가지게 되었다면 오히려 축하할 일이지.”

겁이 없는 건지, 혹은 두려움을 뛰어넘을 만큼 자신에게 애정이 있는 건지.

이안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저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아, 경치 좋다.”

한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배의 난간을 잡고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분홍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렸다.

앉은 자리에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안은 마치 그 장면이, 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삶.

꿈마저도 무채색으로 피폐한 와중에 유일하게 색이 끼얹어진 그림.

“좋지 않아? 이렇게 살아서 바람을, 호수의 물결을, 고통도 느낀다는 거.”

“바람, 물, 고통은 맥락이 안 맞지 않나요?”

“그중 제일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건 고통이지.”

“선생님도 그런 류의 감정을 느끼면서 살고 있나요.”

이안 역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나에게 다가갔다.

“매일 느끼지.”

“오늘은 어떤 것에서 느꼈나요.”

나긋한 목소리가 한나의 등 뒤로 가까워졌다.

“외로웠을 아이의 고된 길에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는 게, 날 조금 슬프게 했지.”

“고통이군요.”

“동시에 기뻤어.”

“어떤 점이요?”

“그냥. 사소한 거지. 좋은 사람과 좋은 대화를 나누는 거.”

바람이 스쳤다.

분홍빛의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얽혔다가,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에 얽혔다가, 그것은 이안의 눈가를 간질이며 지나갔다.

한나는 난간에서 손을 떼고 이안을 향해 돌아서려고 했다. 한 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몸이 휘청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하필 그때, 배가 방향을 튼 것이 문제였다.

“엇!”

이 중요한 타이밍에 넘어진다니!

한나는 아찔한 그 순간 어떻게든 난감을 다시 잡으려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마치 떨어지는 낙엽을 놓쳐 버리던 애처로운 손짓이 재현되고 있었다.

“으아!”

차라리 엉덩방아를 찧어라, 물은 안 돼!

신관복은 무겁다.

물에 젖었다간 호수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걸어서 뭍까지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아찔했다.

차라리 가판대에 머리나 부딪혀 이 해프닝을 잊어버렸으면…….

휘청거리며 넘어가던 한나의 눈에 이안이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덥썩 붙잡아 줄지도 모른다는…….

철푸덕.

“…….”

그런 상상은 채 마치지도 못하고 한나는 바닥에 철푸덕 넘어져 있었다.

“이런.”

이안의 팔은 간발의 차이로 허공에 머물고 있었다.

“괜찮아요?”

“엉덩이……. 아파.”

꼬리뼈가 나간 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알싸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한껏 멋을 내며 대사를 던졌는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수치심이 치밀고 있었다. 찔끔 흐른 눈물이 고통 때문인지, 쪽팔려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울어요?”

“……오늘의 고통이라고 해 두자.”

한나의 말에 이안은 조금 웃었다. 민망했던 한나는 엉거주춤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잡아요.”

이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릴 적과 달리 커다란 손에 감싸인 백색의 장갑은 작은 손의 귀여움이 사라져서인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넘어지는 바람에 겨우 진정됐던 속이 다시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한나는 한숨과 함께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겠지만, 그의 손이 민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도움받는 시늉이나 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손이 하얀 장갑 위에 안착하자마자 한나는 깜짝 놀라야 했다. 예상치 못한 강한 힘에 의해 벌떡 일으켜지는 제 몸에 놀라서였다. 한나의 몸이 생각보다 많이 튀어 올랐다.

“아……?”

두 다리로 서야 하는데, 이상하게 몸이 더 기우는 것 같은……. 뺨에 단단하고 따뜻한 것이 닿았다.

두근두근.

간헐적인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안정적이지만, 힘찬 고동이.

그런데 이안의 품이 이렇게 넓었던가. 눈으로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첫날의 포옹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런 생각할 틈도 없었다.

“가깝네요.”

“아……. 미, 미안.”

멍하게 안겨 있던 한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급하게 물러나는 그녀의 팔을 단단한 손이 붙들었다.

접촉이 불편한 게 아니었나. 한나는 순간, 자신을 붙잡는 이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전히 한나는 이안의 몸에 기대어 있었다.

“좋은 향이 나네요.”

“마, 말린 청귤피를 입욕제로……. 좋으면 조금 나눠 줄까?”

정말로 향의 출처를 묻는다고 생각한 한나가 말했다. 그에 이안은 낮게 웃었다.

한나 역시 뒤늦게 황제씩이나 되는데 고작 청귤피 입욕제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항상 여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여름?”

“향도, 젖은 눈망울도, 주위를 부유하는 공기가 꼭 그래요.”

땀냄새라도 난다는 말인지, 뭔지.

어렵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기엔 창피하고.

여기서 분명한 건 지금 날씨는 늦가을, 혹은 초겨울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무슨 뜻인지…….”

“저에게도 좋아하는 계절이 하나쯤은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왜 그 말이 되는 거지?

“앞으로는 가을이나 겨울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여전히, 심장 고동이 들렸다.

조금, 아주 조금은 빨라진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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