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으어어. 죽겠네.”
성수를 가득 싣고 달리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
멀미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이는 핀체프였다.
“토……. 토할 것 같아.”
“응. 아니야. 더 참을 수 있어.”
냉정하게 돌아온 대답.
핀체프는 한나를 쏘아보고 싶었지만, 지금 고개를 들었다간 당장 무언가를 게워 낼 것 같았다.
“하……. 내가 왜 널 따라서 북부까지……. 욱.”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핀체프는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너도 이 성수에 대한 책임이 1할쯤은 있지 않겠니.”
“내가? 왜?”
한나의 말에 핀체프는 어이가 없었다. 그냥 심부름이나 하던 자신이 무슨 책임씩이나 있는 건지.
“아니 그럼 위험한 북부를 나 혼자 갔어야 했다는 거야?”
“다른 신관 많잖아!”
“너만큼 믿을 만한 동료가 또 있겠니?”
“꼭 이럴 때만…….”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한나는 그저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로라도 신전 나와서 세상 구경도 하고 하는 거지.”
“난 제도에서도 구경 잘……. 으어…….”
핀체프의 얼굴이 점점 사색으로 물들었다. 여태 잘 참고 있었는데, 드디어 한계에 다다랐다.
“마차! 마차 좀 잠시 세워 주세요!”
핀체프가 다급하게 마차의 운전석 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마부가 큰 소리로 물었다.
“토! 토할 것 같아요!”
“어이구! 저런!”
마차가 세워졌다.
“핀체프, 괜찮…….”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핀체프가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허허.”
잽싸게 풀숲으로 달려가는 핀체프를 보며 한나 역시 마차에서 내렸다.
“신관님께서 멀미가 심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답니까?”
마부가 물었다.
“네. 뭐 시원하게 게워 내면 괜찮겠죠? 어차피 이 산만 넘으면 도착이죠?”
“우웨에에엑.”
“저런…….”
제법 멀리 달려간 핀체프였지만,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네. 내려가는 건 금방입니다.”
한나는 팔짱을 끼고 먹은 것을 확인하고 있는 핀체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라리 걸어오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어디로 토껴 버리는 건 아닌지, 이상하게 핀체프에겐 믿음이 없단 말이지.
하지만 함께 걸어 내려가 줄 만큼의 우정은 또 아닌지라.
“얼른 도착해서 쉬면 괜찮아지겠죠.”
한나는 마부에게 10분만 쉬었다 가자고 말한 뒤 산의 풍경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일 때문이라고는 하나, 제도를 벗어난 것만으로 조금 들뜬 기분이 들었다.
“철없는 건가.”
위험한 곳에 가면서 소풍 나온 기분이라니.
그래도 답답한 마차에서 내려 숲의 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았다.
“하……. 진짜 죽다 살았네.”
겨우 속이 진정된 핀체프가 한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하얀 신관복은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고생이 많네.”
“누구 때문인데.”
“신관이 신전에만 있으면 이 넓은 세상을 알아갈 기회가 있겠어? 이런 때라도 따라나서야지.”
“보기 좋게 포장하지 마. 지옥길에 나 끌어들인 거 평생 기억할 거야.”
핀체프가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눈치만 빨라 가지고.
핀체프는 계속해서 구시렁구시렁 불만을 토로했지만, 한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 풍경 감상에 집중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이놈의 신관복부터 벗어 던지자.”
“굳이?”
핀체프는 제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신관복을 입고만 있어도 따르는 이득은 많았다.
상점을 가더라도 신관복을 입고 있다는 자체로 사람들의 대우가 더 좋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무서운 사람들이 많다던데. 괜히 신관복 입고 돌아다니다 잡혀가기라도 하면 어쩔래.”
음지의 암흑길드들이 갈라티아 마을에 많이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사실 전투신관을 건드리는 멍청한 이들은 잘 없겠지만, 그들이 치유신관과 전투신관을 구분하는 법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혹여 치유력을 노리고 전투신관을 잡아가는 사태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전투신관의 힘이라고 해 봤자, 마기가 가득한 마물에게나 힘이 극대화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신관은 신성력으로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으니, 어디 잡혀가도 신성력을 쓸 수도 없을 테고.
“도대체 그렇게 위험한 곳에 왜 간다고 한 건데.”
“역사의 중심에 내가 있다! ……뭐 이런 느낌을 받고 싶었달까.”
원작 속 전쟁터의 배경이 되는 곳에 먼저 가 보고 싶기도 하고, 이래저래 궁금증도 많았기 때문이다.
“넌 어쩌면 아주 위대한 업적의 시작을 함께하는 거란다.”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핀체프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한나를 보았다.
그래. 그래.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겠지.
이해한다.
한나는 그의 그런 반응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넌 정신 붙들고 잘 따라다니기나 해.”
“……그냥 성수나 빨리 전달하고 갔으면 좋겠다.”
“가자! 다시 출발!”
즐거운 한나와 달리, 핀체프는 마차에 다시 오른다는 생각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돌아가고 싶다.”
핀체프의 공허한 목소리가 지저귀는 새소리에 묻혔다.
* * *
다행히 한나와 핀체프는 해가 지기 전에 갈라티아 마을에 도착했다.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에고고. 드디어 도착이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한나는 마부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아담하니 좋네.”
갈라티아 마을 신전은 제도의 신전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옛날 생각나네.”
레미아 마을에 있던 신전도 이렇게 소박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곳의 신전은 레미아 마을 신전처럼 산에 위치하지는 않았다. 워낙 산 근처는 무서운 곳이니.
“오늘은 쉬고, 내일 몇 시쯤 출발하면 될까요?”
한나의 물음에 마부가 말을 끌고 가며 답했다.
“갈리아 산까지 둘러보시려면 좀 일찍 서둘러야 할 겁니다. 거긴 오후만 되어도 밤처럼 어두워지거든요.”
“음, 그럼 오전 일곱 시 정도는 어떨까요?”
“괜찮네요. 저는 그럼 광부들에게 미리 언질해 두고 가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마부는 짧은 눈인사를 전한 뒤, 마차를 보관하기 위해 신전 마구간으로 향했다.
“너 괜찮아?”
핀체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나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잡았다기보다 기댄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단 쉬자.”
“쉬긴 뭘 쉬어. 여기 신관분들한테 인사하고 바로 옷 갈아입고 나와.”
“너, 진짜 악마냐?”
핀체프는 소름이 끼쳤다.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할 거 아냐. 밥 먹으면서 겸사겸사 동네 분위기나 살피자.”
“밥 생각 없어.”
“응. 난 있어. 넌 나 보호하려고 따라온 거고.”
한나는 신전 안으로 이동했다.
“아아……. 신이시여.”
핀체프는 앓는 소리를 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신전 내부로 들어서자, 저 멀리서 견습 신관 한 명이 뛰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중앙 신전에서 오신 신관님들이시지요?”
아직 어린 티가 역력한 갈색 단발머리의 견습 신관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한나와 핀체프의 앞에 멈춰 섰다.
“반가워요. 저는 중앙 신전 소속 한나라고 해요. 이쪽은 그냥 보호차 따라온 핀체프랍니다.”
“네! 저는 견습 신관 루루티라고 합니다!”
달려오는 모습부터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름도 귀여운 견습 신관이었다.
“사실 오늘 정식 신관님이 직접 두 분을 맞으셔야 했는데, 신관님께서 병상에 계셔서 나오시질 못하셨어요.”
‘병상’이라는 말이 두 사람의 귀에 쏙 박혀 들었다.
“네? 아프신 건가요?”
“얼마 전 갈리아 산에서 마물을 만나서 다치셨거든요.”
“세상에. 많이 다치셨나요?”
“치료신관님도 왔다 가시고, 성수도 사용해서 많이 좋아지셨어요. 부러진 뼈는 붙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요.”
루루티의 말에 핀체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뼈, 뼈가 부러져?”
“마물을 피하다가 산에서 구르셨거든요. 마기에 잠식된 건 아니에요.”
“……그렇군요.”
뭔가 갈라티아 마을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바짝 긴장이 되는 소식이었다.
핀체프가 말했다.
“음. 내 생각엔 아무래도 이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시작부터 발을 잘못 들였다는 직감이 든 모양이었다.
“마부 아직 안 갔겠지? 내가 데려올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던 핀체프의 손목을 한나가 붙들었다.
“어딜.”
한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핀체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신관님, 우리 숙소 좀 알려 줄래요? 핀체프, 너는 짐 들고 따라와.”
“방금 못 들었어? 마물한테 뼈가 부러졌다잖아. 이거, 아니야. 아니라고!”
“마물에게 당한 게 아니라, 산에서 굴러서 부러진 거랍니다!”
루루티가 발랄하게 답했다.
“……그 마물이 반갑다고 해서 놀란 건 아닐 거 아냐.”
“호호, 루루티 신관님. 어서 숙소 안내해 주세요.”
“아! 이리로 오세요. 두 분이 오신다고 해서 제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 뒀답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것 봐, 핀체프. 우리 신관님의 노력에 감사하며 지내야 하지 않겠어?”
“아니. 감사하게 그대로 비워 두고 돌아가야…….”
한나는 핀체프의 목을 조르다시피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돌아본 루루티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좋으시네요. 저도 동료 견습 신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답니다.”
“갈라티아 신전에는 견습 신관이 루루티 양 한 명뿐인가요?”
“네. 이런 작은 신전에는 견습 신관이 많지 않으니까요. 이 신전의 정식 신관님들은 다들 나이가 많으세요.”
“외로웠겠다. 그럼 제가 있는 동안은 친구처럼 대해요!”
“말씀이라도 감사해요.”
루루티가 조용히 웃는 모습은 또래답지 않게 의젓해 보였다.
“루루티 신관님은 몇 살인가요?”
“저는 올해 열다섯이랍니다.”
“와, 더 어리게 봤는데, 에이, 그럼 얼마 차이도 안 나네! 우리 서로 편하게 대해요. 말 편히 해도 되지?”
“네! 한나 신관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핀체프가 입을 열었다.
“뭐가 얼마 차이가 안 나? 양심이……. 읍! 읍!”
그의 입은 한나의 손으로 단단히 틀어막혔다.
“마음은 십 대거든.”
입이 막힌 채, 한나의 옆구리에 붙들려 질질 끌려가는 핀체프는 정말 울고 싶었다.
“가자, 가자! 얼른 바깥 구경해야지!”
핀체프는 속으로 외쳤다.
‘중앙 신전으로 돌아갈래!’
* * *
“아직도 속이 안 좋아?”
짐을 풀고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나선 길.
핀체프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무슨 멀미를 그렇게 심하게 해? 네가 너무 신전에만 있어서 그래.”
“지금은 멀미가 아니라 그냥 피곤한 거거든?”
도대체 요즘 젊은이들 체력이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핀체프가 발끈했다.
“그게 다 공복이라 그런 거야. 맛있는 거 배불리 먹으면 바로 기력회복이지.”
“됐다. 됐어. 말을 말자. 얼른 밥이나 먹어.”
녀석, 진작 그럴 것이지.
한나는 기분 좋게 상점가를 훑어보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맛있는 냄새가 나는 식당들이 즐비해 있었다.
“생각보다 식당이 많네. 루루티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한나는 아픈 신관에게 가야 한다며 함께 오지 못한 루루티가 마음에 걸렸다.
“너는 신관이 뼈가 부러져서 아프다는데 경각심도 안 드냐?”
“산에서 안 구르면 되지.”
“마물이 나온다잖아.”
“마물 한 번도 못 보고 자란 제도 촌놈도 아니고, 왜 이래?”
핀체프의 질려 하는 눈을 보고 있자니 양심이 조금 따끔거렸다.
“그나저나, 너는 사복도 무슨 사제스러운 옷밖에 없어? 흰색 옷 신물나지도 않아?”
사복을 입고 오랬더니, 온통 하얀 튜닉을 입고 온 핀체프였다. 신관복만 입고 지내느라 미적 감각이 굳어진 것일까.
도대체 왜 사복도 신관복처럼 보이는 건지.
“놀러온 것도 아니고 뭘 꾸미기까지 해. 편하면 그만이지.”
“산도 타고 하려면 어두운 걸 챙겼어야지.”
“왜 차라리 갑옷을 입고 오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아주 안전할 텐데, 갑옷은 무슨. 호호.”
“지금 아주 사악해 보이는 건 알지?”
“얘도 참, 뭐 먹을지나 생각해.”
한나는 핀체프의 잔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맛있어 보이고, 저기도 맛있어 보이고, 지금은 먹는 생각만 해도 모자랐다.
“저기, 저 식당에 사람이 제일 많은 걸 보니 맛집인가 보다. 저기로 가자.”
한나는 핀체프의 손을 이끌고 사람이 많은 식당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이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식당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손님이 많네요.”
한나가 식당의 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요 근래 부쩍 늘었답니다. 조용하던 마을이 시끌시끌해졌죠. 덕분에 저희 매상은 때아닌 호황이지만요.”
“마을에 무슨 축제라도 있나요?”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다 헛소문인가.
한나의 물음에 종업원은 쟁반을 꼭 안은 채 고개를 기웃거리며 답했다.
“그건 아닌데, 참 이상하죠. 주워듣기로는 광산에 뭔가 귀한 게 있나 봐요.”
종업원의 말을 듣고 한나는 가게 내부에 있는 손님들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대다수였다. 단순 관광객이라기엔 모습이 조금 험상궂은 것 같긴 했다.
“그렇군요. 아, 저희는 제일 잘나가는 메뉴로 주시겠어요?”
“돼지통구이로 하세요. 바삭, 촉촉하니 맛있답니다.”
“네. 그걸로 주세요.”
큰 고민 없이 메뉴를 선택했다.
“불만 없지 핀체프?”
“아무거나 시켜. 고민할 기운도 없다.”
“좋아. 그럼, 그걸로 이인분 주세요.”
“네! 그럼 돼지통구이로!”
종업원은 주문을 받아 돌아섰다.
“여기! 술이 다 떨어졌소!”
“네네! 갑니다!”
주문을 전달하러 가는 와중에도 손님들이 그녀를 부르기 바빴다.
“무슨, 일급 기밀인 것처럼 말해 주더니 온갖 용병이며, 길드 사람들은 여기 다 모인 것 같지?”
막시온 대신관은 마치 소수만 아는 정보처럼 말했지만, 이미 발빠른 암흑길드의 길드원이 빼곡했다.
“신전 정보가 다 그렇지.”
“세상에, 저기 검 좀 봐. 엄청 위험해 보인다.”
한나가 어느 한 곳을 보며 말했다.
“괜히 힐끗거리다 일내지 말고 조용히 식탁만 보고 있어.”
“세상에, 저기 저 사람 봤어? 마력석이 온몸에 주렁주렁……. 와. 저게 돈이 다 얼마야?”
“그만 훔쳐보라니까.”
주변 환경을 신기해하는 한나와 달리 핀체프는 연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얘는 무슨 걱정이 이리 많은지. 간이 콩알만 하네.
“내일은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해.”
“우리가 거기까지 가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너는 신전을 위해 일하는 광부들이 걱정되지도 않니?”
“그걸 왜 하필 우리가 걱정하냐고. 신전에 사람이 몇인데.”
인정머리 없는 녀석. 한나가 혀를 내둘렀다. 물론 핀체프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좋게 좋게 생각해.”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어.
맛있는 음식 먹여서 핀체프를 잘 달래 보려는 찰나, 주문한 음식이 신속하게 테이블에 올려졌다.
“음식 나왔습니다!”
“완전 빠르다.”
한나가 박수를 치며 따끈한 열기가 남아 있는 통돼지를 환영했다.
“얼른 먹어, 핀체프. 먹고 힘내야지.”
“음료는 서비스로 드릴게요, 신선한 과일 주스 어떠세요?”
“좋아요!”
서비스라는 말에 한나는 화색을 띠며 답했다.
“아, 그리고 주시는 김에 저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면 요리도…….”
쾅!
다른 테이블의 음식을 가리키고 있던 그때, 가게 한편의 테이블이 뒤집혔다.
“헉.”
“에구머니! 또 시작이네!”
“왜, 왜 저러는 거죠?”
갑자기 뒤집힌 테이블, 테이블 근처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일어서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싸움이네요. 에휴, 오늘도 치우느라 늦게 퇴근하겠어요.”
종업원은 하루이틀 겪는 일이 아닌 듯, 자연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이! 어느 길드 놈들이길래 건방을 떨어?”
밥 잘 먹다가 뭘 또 서로 건방을 떨고 그러셨대.
한나의 시선이 절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시비는 그쪽이 먼저 걸었지. 댁네들이야말로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야?”
오. 이쪽이 얼굴은 더 험상궂은데.
하지만 먼저 멱살을 잡은 건 처음 언성을 높인 사내였다.
“너 따위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따라 나와.”
“내가 댁네 키우는 똥개인 줄 아나. 어딜 오라가라야. 어이, 거기 칼 빼 들면 진짜 전쟁이라고.”
음. 이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에구, 전 사장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손님들 맛있게 드세요!”
이 상황에 맛있게 드실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종업원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나와 핀체프는 돼지고기에는 손도 못 대고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먹다가 체하기 딱 좋은 환경인걸.”
“그러게 왜 이런 곳을 와서.”
“그 말은 백 번쯤 한 것 같은데, 안 질려?”
“눈이 달렸으면 저 사람들을 봐.”
“보고 있지.”
건장하다 못해 위협적으로 보이는 남자들. 그들의 얼굴이나 팔뚝에는 오래된 상처 자욱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봐, 그만하지.”
싸우던 무리 중 한 명이 말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정상인 사람이 있는 걸까.
“놔 봐! 저 자식이 먼저 비아냥거렸다니까?”
“네 귀가 맛이 간 건 아니고?”
“이 자식이!”
아니, 말리는 시늉을 하면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셔야지. 과연 이 싸움의 끝을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했다.
“그만하라니까!”
그들을 말리던 남자가 씩씩거리는 제 동료의 팔을 붙들고 가게 밖으로 향했다.
“음. 쉽게 끝날 것 같은데?”
“아쉬운 목소리다?”
“전혀. 난 평화주의자라고.”
문가에 위치한 한나와 핀체프는 급하게 문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발끈해서 일어났던 무리는 주섬주섬 다시 자리에 앉고 있었다.
“저 사람들, 알란데 길드원들이라고.”
“뭐?”
그리고 그 순간, 한나의 귓가에 언뜻 스쳐지나가며 남자가 하는 말이 들렸다.
“잘못 걸렸다간 네가 아니라 우리 길드까지 피해를 입는다고.”
아무래도 그들이 건드린 일행이 유명한 길드의 일원들이었던 모양이었다. 짤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남자들은 가게를 나갔다.
“흠. 저 사람들이 유명한 길드 사람들인가 봐.”
“그런가 보지. 괜히 눈길 주지 마.”
“하여튼, 새가슴.”
소란이 일단락되자 가게의 주인이 나왔다.
“잠시 소란이 생겨 죄송합니다.”
그 역시 이런 일이 잦았던 것인지 자연스럽게 사과를 했다.
“동네 사람들도 힘들겠네.”
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험한 사람들이 모여드니 동네 분위기도 나빠지진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네 걱정이나 하라니까.”
“네네. 알겠습니다요! 자, 얼른 식기 전에 먹어.”
그래도 오늘 하루 고생한 핀체프를 달래기 위해 그의 접시에 통통한 돼지고기를 얹어 주었다.
한나는 툴툴거리면서도 잘 받아먹는 핀체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원작의 광산 전쟁 배경으로 돌입하는 것도 금방이겠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갈라티아 마을에 진을 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세상에 광물에 대한 정체가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말이었다.
원작의 시작 부분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빙의해 어언 10년이 흘렀다. 이곳이 소설 속 세계라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갈리아 광석까지 등장하니 이제는 정말로 이곳이 소설 속 세상이라는 게 실감이 됐다.
“다들 얌전히 잘 있으려나.”
“뭐?”
한나의 혼잣말에 핀체프가 물었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말한다 해도 믿지 못할 테니까.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게 잘 구워진 돼지고기 한 점이 한나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우물우물.
맛은 좋은데 왜 이렇게 찜찜하고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걸까.
“자! 얼른 잔 들어!”
“쓰러질 때까지 마시자고!”
“낄낄.”
음식점 안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메워졌다. 다들 방금 있었던 소란 같은 건 기억도 나지 않는지 축제라도 하는 것처럼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남자들이 말한 길드 이름이 뭔가 낯익은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한나가 과일 주스 한 모금을 마셨다. 핀체프에겐 아닌 척 했지만, 내일 갈리아 산에 가는 게 긴장되는 건지 자꾸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별일 없겠지.”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 * *
짹짹.
잠자리를 가리지 않는 것은 축복이다.
“왔어?”
우려와 달리 아주 잘 잔 한나는 아침 일찍 신전 밥을 먹으며 핀체프를 맞았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다니.”
“꼭 제도에서는 잘 자고 지낸 것처럼 말하네.”
핀체프는 저와 같이 제도에서도 수면 부족은 늘 따라다니는 고질병이었으면서 말이다.
한나는 음식을 입에 밀어넣으며 핀체프에게 말했다.
“얼른 먹고 가자. 산은 해가 금방 진다니까. 네가 말하던 위험한 상황이 나타나면 안 되잖아?”
“오늘 가서 둘러보고 바로 돌아가는 거야.”
“뭐, 상황에 따라.”
미덥지 못한 말에 핀체프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난 아침에 입맛 없어. 다 먹었으면 출발하자.”
“산에 갈 건데 든든하게 먹어 두지.”
“또 게워 내기 싫어.”
아하. 그날의 추억이 한나의 뇌리를 스쳤다. 추억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기억이.
“그래. 그게 좋겠다.”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짧게 타고 갈 테지만, 힘들다고 하면 차라리 성수를 먹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출발!”
그렇게 한나와 핀체프는 일찍부터 신전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그렇게 멀지는 않죠?”
“네. 금방입니다. 걸어서도 갈 수 있을 거리인데, 성수 때문에 마차를 이용하는 겁니다.”
“그렇군요.”
마부의 말처럼 산까지는 금방이었다.
“광부들 근처에 딱 붙어 있어.”
“네네.”
“괜히 혼자 돌아다니다 일내지 말고.”
“네네.”
“엄한 거 만지지 말고.”
“네에.”
“휴.”
핀체프의 잔소리를 듣는 그 짧은 시간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마차가 세워지고, 한나와 핀체프가 마차에서 내렸다. 광부들은 아침 일찍부터 이미 준비를 끝낸 모양인지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야, 신전이랑 일하니까 좋구만. 그 귀한 성수도 오고 말이야.”
“안녕하세요.”
“신관님들인가?”
가무잡잡한 피부에 큰 덩치를 가진 광부가 한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한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희는 중앙 신전 소속 신관이랍니다.”
“어째 귀한 분들께서 여기까지 행차를 하셨답니까.”
“신전을 위해 일해 주시는데, 안전 확인은 저희가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죠.”
핀체프는 한나를 뻔뻔스럽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한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었다.
아니, 이 정도 영업 멘트가 뭐가 어때서?
“확실히 돈만 밝히는 길드들이랑은 달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전이 최고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성수가 있으면 마기 때문에 고생할 일도 없고요.”
다른 광부가 덧붙여 말했다.
“모쪼록 오늘은 짐이 되지 않게 조용히 따라다니겠습니다.”
“거 짐 좀 되면 어때! 다치지 않게 잘 따라오셔들.”
“네. 가자, 핀체프.”
광부들은 자신들이 쓸 만큼의 성수를 제외한 성수 박스를 아지트에 옮기고 장비를 들고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나가 물었다.
“산은 많이 올라가야 하나요?”
“그리 높은 위치는 아니라오. 하지만 가는 와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니 조심해야지.”
“무슨 일이라면…….”
본격적으로 산의 초입을 오르기 시작하며 광부는 답했다.
“종종 마물이 나타난다오.”
“그럴 줄 알고, 저희가 똘똘한 전투신관을 데려왔지 말입니다.”
“전투신관?”
광부는 신기하다는 듯 뒤를 돌아 한나를 보았다.
“아, 저는 아니고 이쪽입니다.”
공손하게 두 손을 펴 핀체프를 향하게 했다.
“거 곱상하게 생긴 신관님이라 펜이나 들 줄 알았는데, 전투신관이셨구려.”
“음. 하는 일은 펜이나 드는 쪽에 가깝긴 한데…….”
실제로 핀체프는 전투신관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직접 그 실력을 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한나의 눈에 불신이 깃들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익숙하지 않은 산길을 오르느라 안 그래도 잔뜩 가시가 돋친 핀체프는 그 시선에 어이가 없었다.
“혹시 성력으로 마물 공격하는 방법은 기억하고 있는 거지?”
“너한테 치유 가능하냐고 묻는 거랑 뭐가 달라?”
“난 사실 직접적인 치유능력은 안 쓰면 감이 없어지긴 해.”
“……네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음. 저기 옆에 가서 연습이라도 하고 올래?”
“됐다. 말을 말자. 빨리 가기나 해.”
한나의 의심을 핀체프는 가볍게 무시했다. 두 사람은 점점 가팔라지는 길을 느끼며, 더 이상 불필요한 기운 빼기는 삼가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무리 신전에만 박혀 있어 체력이 없기로서니, 이들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헉……. 헉.”
“으…….”
행렬의 제일 끄트머리, 그것도 광부들 시야에서 사라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뒤를 쫓고 있었지만,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헉……. 너 먼저 가.”
“대열을 지…… 키라고.”
서로 한 걸음이라도 먼저 가라며 양보하는 아름다운 양보 정신.
“아……. 당 떨어져. 힘들어.”
“헉……. 헉…….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고 했던 사람 잡아와.”
“잡아 올 기운도 없지만, 잡아 와도 네가 뭘 하겠어?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이나 주라고.”
“해지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더니, 가는 데만 반나절이야.”
“미안한데, 산 오른 지 30분밖에 안 됐어.”
힘든 건 힘든 거고, 냉정하게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광부들의 속도가 워낙 빠르니 따라가기가 힘들 뿐이지.
“산책 온 거 아니니까 열심히 가야지.”
“으……! 이봐요! 언제 도착합니까!”
참다못한 핀체프가 있는 힘껏 목소리를 짜내 앞선 광부들에게 외쳤다.
“다 왔소! 저기 앞에 광산 입구!”
멀리서 들려온 희소식에 두 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 * *
“열악하네요.”
갱도에 들어선 감상은 열악하다였다.
한낮에도 깜깜한 이곳에서 작은 불빛에 의지해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는 것은 묘한 공포심을 자아냈다. 흙냄새도 아닌 매캐한 공기가 호흡까지 방해하니 숨쉬기도 힘들었다.
“원래도 갱도는 열악하긴 한데, 여긴 마기까지 뿜어져 나오니 더욱 힘들지. 조금 더 있으면 머리도 어지러울 거요.”
벽을 집고 가던 한나는 벽에서 떨어진 흙 때문에 기침이 나왔다.
“쿨럭, 마기는 보통 사람이 얼마나 버틸 수 있나요?”
“원래는 서너 시간밖에 작업을 못 하지. 멀쩡하다가도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 이미 안 좋은 기운이 도를 넘어선 거거든.”
“그렇군요. 그럴 때 성수를 먹으면 그래도 위험할 일은 줄어들겠네요.”
“도움이 되다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성수 덕에 여벌 목숨 하나 생긴 거지.”
“정말 위험한 일이네요.”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광부의 말에 멈칫했다.
“혹시 빛이 나는 광석을 발견하면 절대 그냥 만지면 안 된다오.”
“갈리아 광석 말씀이신가요? 그걸 본 적 있으세요?”
“내 딱 한 번 봤는데, 그걸 발견한 녀석이 덥석 손으로 집었다가 그날 황천길을 건넜다오.”
“저런…….”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하는 말이었지만, 동료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 광석을 그냥 잡으면 10분도 안 돼서 몸이 미라처럼 바싹 말라 버리더라고.”
“그럼 어떻게 가져가죠?”
“여기, 마법으로 만든 상자에 보관해서 가야 해.”
광부가 자신의 허리춤에 채워진 그물에 들어 있는 상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명심할게요.”
절대 아무거나 만지지 말 것.
“너도 들었지?”
한나가 핀체프를 보며 묻자, 그는 즉각 답했다.
“난 여기서 아무것도, 절대 아무것도 만질 생각이 없어.”
안전제일.
핀체프는 아무래도 가늘고 길게 오래 살 것 같다.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하나요?”
“작업하던 곳이 이제 곧…….”
“오! 저기 빛나는 게 있는데요?”
마침 전날 작업을 하던 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엔 광부가 말한 빛나는 광석도 있었다.
“어제 작업하다 상자가 없어 들고 가지 못한 광석이라오.”
“저런 걸 막 두고 가도 되나요?”
아주 작은 조각이었지만, 갈리아 광석이라면 아주 중요한 것인데 떡하니 두고 가다니.
“여기서 오래 버틸 수도 없는데 상자도 없으니 할 수 없었지. 그래도 누가 가져가지 않은 건 운이 좋았네.”
“이곳은 아무나 들어오나요?”
“여긴 주인이 없으니 아무나 오는 거지.”
“굴을 판 사람들이 주인인 거 아닌가요?”
“여길 판 사람들은 다 마기에 중독돼서 운명을 달리했을 텐데, 주인이 있을 수가 있나.”
“세상에.”
한나는 내심 놀랐다. 사람 목숨을 버려 가면서 굴을 팠어야 했을까.
“그땐 마기니 마물이니 잘 모르던 때라 그래. 하여튼 광부들이 애써서 만들어 놓은 곳에 요즘은 용병들이니 이상한 길드원들이니, 온갖 놈들이 다 헤집어 놓고 있으니 썩 달갑진 않지만.”
“속상하시겠네요.”
“얼른 저것부터 옮겨 담을 테니 조심들하고 계시라고.”
“네, 네.”
아주 작은 갈리아 광석을 옮기기 위해 광부들은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렴 닿기만 해도 사람이 픽픽 죽는다는데, 조심해야지.
그런데 그렇게 사람도 죽이는 갈리아 광석을 어떻게 정제해서 사용하는 걸까.
‘마법사들의 능력인가.’
바로 그때였다. 어려운 작업을 하는 그들을 보며 덩달아 숨을 삼키고 있던 핀체프가 한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응? 소리는 무슨 소리. 네 소리밖에…….”
쿵.
말을 하던 도중에 갑자기 갱도 전체가 흔들렸다. 흙이 떨어져 내리고, 쿵, 쿵, 땅을 울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뭐, 뭐죠?”
순간 놀란 일행들은 몸을 굳혔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뒷덜미가 뻐근해질 정도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광석을 상자에 옮겨 담은 광부가 소리에 집중하며 말했다.
“갱도 안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데, 밖에 소란이 일었나 본데.”
갱도에 익숙한 광부들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떡하죠?”
“일단 여길 나가야겠소. 광석은 챙겼으니, 이대로 나갑시다. 다들 오늘은 짐 풀지 말고, 바로 나갈 준비해!”
광부들의 대장 격인 그의 말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내려놓던 짐을 다시 챙겼다.
“다들 머리 조심하라고!”
들어왔던 길을 돌아서 나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있는 힘껏 달렸기 때문이었다. 한나는 달리면서 뒤에 쫓아오는 핀체프를 계속 확인했다.
“핀체프! 잘 따라와! 꼭 너 같은 애들이 넘어져서……. 으악!”
“어휴, 네 걱정이나 하라니까!”
핀체프가 돌에 걸려 넘어진 한나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아고고, 돌이 많아서 더럽게 아프네.”
그나마 두툼한 바지가 쿠션 역할을 해주어 피는 보지 않았다.
“얼른들 나오시라고! 신관님들!”
이미 갱의 입구에 도착한 광부가 그들을 재촉했다. 한나는 아픈 다리를 뒤로한 채 열심히 달렸다.
“윽……. 밖은 어때요? 무슨 일인 거죠?”
“한나!”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려는 그때, 핀체프가 팔을 붙잡아 당겼다.
쿠웅!
산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놀란 산새들이 요란하게 날갯짓하며 달아났다.
“저, 저기 마물이!”
한 광부가 멀리 손짓했고, 그곳엔 불인지 번개인지 모를 것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뭐죠?”
“근처에 마물이 나타난 모양이오. 마법사들도 있는 것 같고.”
“산을 내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필 방향이 하산하는 방향이랑 비슷해서……. 일단 가 봅시다.”
어차피 계속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광부는 하산을 결정했다.
콰앙
“……!”
향하려던 길에 벼락이 내리꽂히자 모두 놀라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떠들썩한 걸 봐서는 변종 마물이 출몰한 모양이군.”
“변종 마물요?”
“갈리아 산 근처에 생겨난 마물이라오. 광석을 흡수한 마물들인데 용병이나 마법사들은 그 마물의 배를 갈라 광석을 구하려는 거고.”
광부의 말에 궁금증이 생겼다. 저라면 밤에 몰래 광산을 털 텐데.
오늘 본 바에 의하면 광물이 그리 어렵지 않게 갱도 안에 있었으니까.
“왜 광산에서 구하지 않고, 마물을 잡아서 광석을 구하려는 거죠?”
“마물이 광석을 먹으면, 마기는 흡수되고 광석이 정제된다오. 그러면 우리가 구한 원석처럼 위험하지 않게 되지.”
한나는 모르던 정보를 알게 됐다.
원작에서는 이미 광석의 마기를 정제시키는 방법이 있었는데, 아직 그 정도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물들의 몸을 통해 마기를 정제시키는 것이 아직은 유일한 방법인 것이었다.
이제 광석을 정화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나면, 본격적으로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건가.
“이건 신전에 보고해야겠네.”
“얼른 안전한 길을 찾아 내려가자고. 다들 서둘러 쫓아오시오.”
일행들은 서둘러 하산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 옆길로 가야 할 것 같소!”
하필이면 내려가는 길목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일행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이 아닌 나무 사이로 이동했다.
“하늘에서 뭐가 날아옵니다! 다들 비켜요!”
앞쪽에서 들려온 외침에 한나는 서둘러 하늘을 보았다. 하필 불붙은 나무가 제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오! 젠장!
놀란 한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앞선 이들은 구르다시피 허겁지겁 앞으로 향했다.
콰앙!
“헉…….”
순식간에 눈앞에 불붙은 나무가 떨어졌다. 간발의 차이였다. 하마터면 나무에 깔려서 생을 마감할 뻔했다.
한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다들 괘, 괜찮은가요?”
“또 뭐가 와요!”
걱정을 마치기도 전에 하늘에서 또 검은 물체가 날아들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으악!”
한나는 바닥을 기다시피 후진했다.
콰앙!
“헉……. 헉. 으악!”
이번엔 뭔가 했더니 새카맣게 탄 마물의 시체였다.
“한나!”
하늘에서 떨어진 나무와 마물.
주위의 멀쩡하던 나무도 쓰러져 일행들이 보이지도 않게 됐다. 멀리서 들려오는 핀체프의 부름에 한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난 괜찮아!”
괜찮은데, 분명 괜찮아야 하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혹여 또 뭔가가 날아올까 싶어 하늘을 살폈다.
끼익.
하늘에 검은 것이 아른거렸다.
“또 뭐가 날아오는 거냐! 차라리 한 번에 떨어지라고!”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핀체프! 광부들이랑 얼른 내려가! 나도 알아서 내려가 볼 테니까!”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라면 내려가는 것보다 저기, 하늘나라로 가는 게 빠를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때문에 광부들이 떼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나는 급히 그들에게 하산하라고 했다.
“가란다고 어떻게 가! 꼼짝 말고 있어! 내가 그쪽으로……!”
“또 뭐 떨어지려고 하잖아! 얼른 가라니까! 너 광부들 지키러 온 거 잊었어? 그 사람들 안전하게 하산시켜!”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거라면 자신의 숭고한 죽음을 알려 줄 사람 한 명쯤은 살아야지.
그게 미덥지 못한 핀체프일지라도.
“한나!”
“핀……. 휴, 아니다.”
한나는 숙소의 서랍 두 번째 칸에 존재하는 유서의 존재를 알릴까 말까 하다가 포기했다.
이런 말 하면 마음 약한 핀체프 녀석이 더욱 못 가겠지.
“나 성수도 충분히 있으니까, 조심해서 금방 따라갈게! 광부 아저씨! 그 녀석 좀 들쳐메고 가 주세요!”
“신관 양반! 후딱 쫓아오쇼!”
“안……! 자, 잠깐!”
광부들은 빠른 상황 판단을 끝냈다. 그들은 곧장 핀체프를 업쳐 메고 걸음을 빨리했다.
“한나!”
멀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한나는 생각했다.
“…….”
사실, 그래도 자신을 챙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1%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거참, 위기 대처 능력이 좋은 분들이시네.
하지만 또 이해는 되는 게, 이곳에 사는 광부들에게는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닐 터였다.
이전부터 지금처럼 동료나 지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몇 번이고 맞닥뜨리지 않았을까.
그들끼리는 스스로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불문율일 것이다. 마기가 가득하고, 마물이 나오는 산에 올라 동료애나 챙길 여유는 없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한나는 제 뺨을 찰싹찰싹, 양손으로 때렸다.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으악!”
불에 탄 마물 시체가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보자 정신이고 뭐고, 차릴 수가 없었다. 거의 몸이 녹아내리고 있는 마물이 허우적거리자, 당장에 비명부터 나왔으니까.
“어, 엄마야!”
하산이고 뭐고 한나는 다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무서워서 당장 도망치는 것이었다.
“으아아악!”
마물은 녹아내린 피부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의 비명 소리에 저도 모르게 반응해 버려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악!”
그것도 모른 채 마물이 다가올수록 한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처음 광부가 했던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경고는 머릿속에서 휘발된 지 오래였다.
“가! 오지 마! 왜 이래! 으악!”
허겁지겁 나무 사이를 뛰어가던 한나는 결국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엎어져서 아픈 다리였는데, 결국 힘이 풀려 버렸다.
“안 돼! 저리 가!”
마물이 점점 다가왔다.
“으어어어!”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다. 갑자기 내려보낸 핀체프가 보고 싶어졌다. 번뜩, 한나는 허리춤에 달아놓은 성수가 생각나 급히 손을 뻗었다.
성수를 뿌리면 마물에게 충격을 줄 수 있겠지.
“으……. 움직여라.”
하지만 긴박한 상황에 손이 떨려 쉽게 잡히지도 않았다. 마물은 그 순간에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으악!”
코앞까지 마물이 다가온 그때, 하늘이 검어졌다. 갑자기 해라도 떨어진 건가 싶을 만큼 어두웠다.
쒸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으어!”
마물이 갑자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날뛰었다.
“으으!”
코앞에서 달려드는 마물을 보고 한나는 얼굴을 양팔로 보호했다. 단순히 쓰러지는 거라면, 잘 막으면 살 수도 있겠지라는 희망을 품으며.
“…….”
하지만 뭔가 몸을 덮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수초가 지나도록 조용했다. 정말 이상하게 마물의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나는 천천히 팔을 내리고, 웅크렸던 고개를 들어 마물을 보았다.
“……끄윽.”
마물의 몸은 꼬챙이가 꽂힌 것처럼 푸른빛이 나는 번개에 관통당해 있었다.
“……뭐, 뭐야.”
툭.
마물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마물의 뒤로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지?’
검은 로브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둘러쓴 복면인이 죽은 마물을 발로 짓눌렀다. 산에서 신고 있기엔 어울리지 않는 구둣발이었다.
마법사인가.
우락부락한 용병들과는 결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흔한 무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남자의 손에 붉은빛이 일었다. 남자는 거침없이 마물의 사체에 손을 집어넣었다. 가죽을 뚫고, 살을 가른 그는 사체에서 뭔가를 빼냈다.
“욱.”
보고 있기에 썩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한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마물의 사체에서 빠져나온 남자의 손에서는 진득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아무래도 눈앞에 서 있는 복면인의 목적은 갈리아 광석인 것 같았다.
그는 사체에서 빼낸 광석을 확인했다.
“저, 저기…….”
이유가 어쨌든, 도와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마땅히 인사를 하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마치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듯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볼일 다 봤다 이건가?’
“저기!”
크게 목청을 높이자, 순간 검은 로브 아래의 몸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복면인은 잠시 멈춰 서서 그대로 있었다.
대답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인가?
그사이에 한나는 그를 꼼꼼히 관찰했다. 남자의 키는 상당히 컸다. 몸집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고.
검은 로브 아래로 언뜻,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
순간,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잠깐만요.”
한나의 머릿속에서 혹시, 하는 생각이 스쳤다. 왜 저 복면인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러는 사이 복면인은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가볍게 사라질 것 같은 날렵한 발걸음이었다.
산이 꽤 익숙해 보였다.
“멈춰 봐요!”
한나의 평소 감은 무디지만, 가끔, 아주 가끔 촉이 좋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인 걸까.
복면인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인지 손을 들어 로브를 눌러썼다.
그리고 그 순간, 한나는 발견했다.
“마샤!”
그의 손에 끼워진 익숙한 반지를.
마샤의 이름을 부르자, 복면인의 몸이 우뚝 멈췄다.
옳거니.
“마샤!”
이내 그는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어쭈? 요것 봐라?
한나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그를 따라 달렸다.
후들거리던 다리는 마물이 죽는 순간 기운을 차린 것인지, 아니면 저 복면인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서 초인적인 힘이 난 건지 쌩쌩 내달렸다.
“마샤! 마샤! 마샤!”
빠르게 이름을 부를 때마다 로브 밑으로 움찔거리는 몸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 안 서?!”
한나는 확신했다.
그가 마샤라는 것을.
“악! 나 너무 아프네!”
이대로 쫓아가서는 턱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한나는 꾀를 부렸다.
“마물한테 맞은 건가!”
일부러 아픈 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달려가던 복면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뚫어지게 그를 응시하고 있던 한나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샤 맞지?!”
확신에 찬 물음이었다. 한나는 그대로 달려 멈춰 있는 마샤에게 돌진했다. 주춤, 뒷걸음치던 복면인의 로브가 한나의 손에 닿았다.
“악!”
전력 질주하는 바람에 적당히 멈춰지지 않은 몸이 마샤의 몸 위로 쓰러졌다. 동시에 당황한 듯한 마샤가 뒤로 밀려났다.
풀썩.
쓰러지는 와중에 단단한 손이 한나의 몸을 보호하듯 감쌌다.
“괜찮아?”
누가 한나를 병 주고 약 주기의 달인이라고 그랬던가. 한나는 자신의 밑에 쓰러진 마샤를 바라보았다.
로브는 이미 벗겨져 붉은 머리카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한나는 얼굴에 씌워진 복면을 냅다 걷어 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눈매를 곱게 접은 마샤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잡았다 요놈!
“선생님. 여기서 보니 또 반갑네요.”
“너!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
어색하게 웃고 있는 마샤도 이 상황이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한나를 만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다친 곳은 없어요?”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샤는 먼저 한나의 몸을 챙겼다.
“난 괜찮아. 너야말로 이 위험한 곳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자연스럽게 대답하던 한나는 갑자기 마물의 몸에서 광석을 뽑아내던 복면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름 끼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아주 익숙하게 하던 마샤.
“……너,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그가 이렇게 마물을 잡고, 광석을 뽑아내는 게 처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 지낸 6년간,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냐고!
“너……. 평범하게 지낸 게 아니었어? 도대체……. 도대체…….”
마탑에서 애한테 무슨 짓을 시킨 거란 말인가.
한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명할게요.”
“마샤, 넌 이곳에 있으면 안 돼.”
다른 마법사들이라면 몰라도, 마샤만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런 미래를 막기 위해 노력했던 보육원에서의 날들이 아무 의미가 없잖아.
“넌…….”
원작처럼 그런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단 말이야.
차마 내뱉지 못하는 그 말을 한나는 입술을 깨물며 삼켰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순간 숲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샤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마물이 보입니다! 이미 누군가 손을 쓴 것 같은데요?”
“얼른 찾아!”
암흑길드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물 사체에서 광석을 뽑아 간 이를 찾고 있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죠.”
마샤가 몸을 일으키자 한나의 몸도 기우뚱 기울었다. 한나가 쓰러지지 않도록 그녀의 팔을 붙든 마샤는 이내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가요.”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마샤는 저들에게 발각되면 곤란한 일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니, 저 사람들은 어디서 만나도 곤란한 일이 생기게 하는 자들인가.
휘익.
마샤가 휘파람을 불자, 하늘에서 검은 것이 날아왔다.
“꼬꼬?”
“꼬꼬 등 좀 빌리죠. 지금은 선생님이랑 둘이니까, 마법으로 갈 수가 없네요.”
마법으로 다른 이를 이동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은 텔레포트 후유증이 심했다. 마샤는 그래서 날아서 가는 것을 택했다.
“맙소사.”
갈라티아 마을에 와서 마물에게 죽을 뻔한 뒤, 꼬꼬 등을 타고 날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한나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네.”
어안이 벙벙한 한나를 보며 마샤가 피식 웃었다.
“저기 뭐가 있다!”
꼬꼬가 바닥에 착지하자, 멀리서 꼬꼬를 발견한 남자가 소리쳤다. 마샤는 재빨리 한나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그녀를 꼬꼬의 등 위로 앉혔다.
그러곤 그 뒤로 자신도 올라탔다.
“꽉 잡아요. 떨어질라.”
마샤의 경고가 끝나자마자 꼬꼬가 날아올랐다.
“하……. 하하.”
그 후로 한나의 눈에 보이는 건 온통 푸른 하늘뿐이었다.
* * *
“넌 내게 잘 설명해야 할 거야.”
마샤가 머무는 마탑의 지부에 도착한 한나는 테이블에 앉아 냉수를 앞에 두고 있었다.
까딱, 까딱.
한나의 발이 정신 사납게 움직였다. 마샤는 창밖을 날고 있는 꼬꼬에게 마력석을 던져 주고 있었다.
꼬꼬는 던져진 마력석을 넙죽넙죽 받아 삼켰다. 마치 간식을 주는 모양새였다.
“선생님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난 신전 일 때문에.”
“광부들에게 성수를 전달하러?”
“뭘 많이 알고 있는 모양이야.”
“신전이 본격적으로 광부를 모집하고 움직이기 시작해서 예의주시하고 있었죠.”
마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 낯설었다.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던 마샤가 아닌 것 같았다.
“넌 마탑이 지시한 일이니?”
“뭐, 반쯤은 그렇다고 해 두죠.”
마샤의 웃음기 어린 얼굴은 항상 보기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의중을 알 수 없게 만들어진 단단한 가면처럼 느껴졌다.
“왜 그런 위험한 일을 너한테 시키는 거야.”
“제가 유능해서 아닐까요.”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인지하고 있는 거지?”
혹 뭣 모르는 아이 꼬셔다 위험한 일을 시키는 건 아닐까. 한나는 끝까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님.”
“응.”
“전 사막과 맞닿는 북부에서 6년을 지냈어요. 저만큼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이도 드물 거예요. 더욱이 마수에 대한 것이라면.”
한나는 잠자코 마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하죠. 그리고, 이건 제가 원하는 일이기도 해요.”
“왜?”
왜 원작의 흐름을 그대로 닮아 가는 거니.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꼭 이유가 필요한가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그뿐이에요.”
“그 광석의 힘을 사용한 적 있어?”
한나가 물었다.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갈리아 광석의 힘을 이용한 사람들은 그 힘에 중독된다고 했다. 비단 강력한 힘 때문만이 아니라, 마약처럼 마기를 더욱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점점 몸도 마음도 망가져서 미치광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고.
“없어요. 그런 게 없어도 난 강하거든요. 광석은 모두 마탑으로 갈 거예요.”
“절대, 광석의 힘은 사용하지 마.”
“선생님은 이 광석에 대해 얼마나 아는 건가요.”
마샤가 제 품에서 마물의 몸에서 뽑아낸 광석을 꺼냈다. 그의 손에서 자그마한 갈리아 광석이 반짝거렸다.
한나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덜컥 겁이 났다.
“아주 위험한 물건이야. 그건 사람의 감정을 없애고, 머리를 탁하게 해.”
“아직 이것에 대한 연구는 마탑조차 전무한 수준인데. 신전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신전이 아니라…….”
또다.
뭔가를 설명하려면 이렇듯 턱턱, 입이 막히는 것들투성이였다.
“……나만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어.”
“신의 계시 같은 건가요?”
“그래. 그런 거.”
신의 계시는 아니고, 소설에서 읽은 거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마샤에게 광물의 위험성을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마샤는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한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전부를 드러내진 않는다. 이제는 선생님과 저 사이에 신전과 마탑이라는 선이 생겼다는 게 느껴졌다.
“돌아가요. 선생님.”
마샤가 말했다. 한나가 갈라티아 마을에 있다는 것은 마샤의 걱정이 늘어나는 일이었다.
“너도 돌아가.”
한나의 금빛 눈동자가 마샤에게 향했다.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두 사람은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곧은 시선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서로를 뚫어져라 보기를 한참.
결국 먼저 웃어 버린 건 마샤였다.
“선생님도 알고 있잖아요. 내 고집은 못 말린다는 거.”
“네가 열 살 아이 때처럼 군다면, 나도 널 열 살의 그때처럼 대할 수밖에 없지.”
한나는 마샤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샤라면, 딱 저렇게 나오리라고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난 너만 두고는 못 가.”
“헛수고하게 될 거예요.”
마샤가 즉답했다.
“누구 의지가 더 강한지는, 겪어 보면 알겠지.”
마샤는 완고한 한나의 모습에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한나는, 원작처럼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딱히 상관없었다.
그곳에 자신의 아이들만 없다면 말이다. 기껏 원작에서 벗어나고자 착하게 키운 아이들이다.
이곳에서 원작처럼 마기에 물든 악당이 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아.”
단 한 명이라도, 그렇게 되는 꼴은 못 본다. 눈에 흙이 들어가든, 자갈이 들어가든 말이다.
* * *
한나는 무사히 갈라티아 마을 신전으로 돌아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리고 무사히 돌아온 한나와 대화를 하던 핀체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넌 가서 신전에 보고를 해. 난 여기 남을 테니까.”
“넌 산에서 그 꼴을 당해 놓고도 여기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일이야. 마물 좀 본다고 꽁지 빠져라 도망칠 수는 없지.”
한나의 덤덤한 태도에 핀체프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그녀가 산에서 돌아오자마자 핀체프는 짐을 꾸리라고 말했다. 더 이상 위험한 곳에 있을 수 없어서였다.
“마물만 문제가 아니야. 여기 있는 암흑길드나 용병들, 마법사들이 마물 잡으면서 광부도 잡는다고!”
마물을 공격하다 광부들이 휘말린 이야기를 들은 핀체프였다.
“어쨌든 이곳이 위험하다는 건 사실이니까 넌 돌아가.”
“그럼 너 혼자 여길 지킨다고? 네가 무슨 수로?”
전투 신관인 자신도 있기 싫은 곳에 남겠다는 치유 신관을 핀체프의 머리는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나야 뭐, 다친 광부들 치료나 해 주는 거지.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생겼어.”
“뭔데.”
핀체프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기대 같지도 않은 기대마저 생겼다.
“비밀.”
“신전에 말하면 너도 당장 돌아오라고 할 거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내 입장이나 전해 줘.”
“무슨 고집이 황소고집이냐. 도대체.”
도대체가 자신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한나의 모습에 핀체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변종 마물에 대한 이야기는 꼭 전해야 해. 여기에 광석을 노리는 길드나 용병, 마법사들이 이미 주둔해 있다는 것도 전하고.”
“진짜로 안 갈 생각이군.”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어?”
“그럼 나도 못 가.”
핀체프가 한나의 맞은편에 위치한 난간에 털썩, 기대앉았다.
“넌 가야지!”
“나는 왜 가야 하는데?”
“……위험하니까?”
치유신관인 자신은 기어코 남겠다고 하면서, 전투신관더러는 위험하니 피하라고 하는 모순은 도대체 뭔지.
한나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마샤 때문에 남는 거였다.
마샤가 아니었다면 저도 짐 싸서 제도로 갔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관없는 핀체프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최대한 빨리 돌아가도록 노력할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데.”
핀체프에게만이라도 마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까 싶었지만, 그러려면 너무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마샤의 말처럼 광석에 대한 것도 많이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아는 게 많은 건 의심을 사는 행위니까.
“보고 잘 부탁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한나를 보며 핀체프는 그녀가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나는 그대로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녀에게 오늘은 너무 충격적이고 고단한 하루였다.
* * *
핀체프는 어쩔 수 없이 보고를 위해 제도로 향했다. 아침 일찍 그를 배웅한 한나는 외출복을 단단히 여몄다.
두툼한 재질의 바지 밑에는 무릎 보호용 천까지 감아 두었다. 산에서 넘어지면 무릎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아팠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푸르딩딩하게 멍이 든 무릎을 보기만 해도 넘어지던 순간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샤는 오늘도 산에 가겠지.”
오늘은 마샤가 산까지 가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일이 잘 안 풀린다면 기어코 산에 따라가겠지만.
그러려고 중무장한 차림으로 온 것이었다.
“아직 안 나갔겠지?”
한나는 어제 익혀 둔 마탑의 숙소 앞에 있었다.
“마샤!”
이른 아침부터 마탑 숙소 앞에 마샤의 이름이 쩌렁쩌렁 울렸다. 혹여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쌩하니 가 버릴까 봐, 일부러 존재감을 어필했다.
어제의 일로 마샤가 변했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귀엽기만 하던 마샤는 다 큰 성인이 된 만큼, 더 이상 몇 마디 말과 당근으로 통제 가능한 순진한 아이가 아니다.
스스로 목표하는 일이 생기고,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인 모습은 칭찬해야 마땅한 모습이었다. 그곳이 여기, 갈라티아 마을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정말. 커서도 마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상심할 필요는 없었다.
마샤가 마탑의 일 때문에, 혹은 자신의 힘에 대한 갈증으로 이곳에 있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고, 중요한 건 마샤의 내면이었다.
산에서 넘어지던 순간, 저를 보호하기 위해 감싸던 마샤의 손을 기억한다.
마샤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렇게 따스한 손길을 가진 사람인데.
“으쌰!”
한나는 숙소의 입구에서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심심하게 기다리느니, 몸이라도 푸는 게 낫지.
* * *
창가에 걸터앉은 마샤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글몽글한 분홍 머리카락이 하나로 묶인 채 망아지의 꼬리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시네.”
마샤는 한나가 체조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낮게 웃었다. 저를 산에 못 가게 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찾아온 선생님의 집념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정말 한결같아.”
선생님은 10대의 그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조금은 엉뚱하고, 허술한 모습이 말이다. 자신은 마법사고, 손가락만 까딱하면 산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알려 줘야 하나.”
앞으로도 매일 헛걸음을 하는 건 아닌지 벌써 걱정이 됐다. 찻잔을 기울이는 마샤의 눈이 나른하게 내리깔렸다.
어쩐지 꽉 묶은 머리를 통통거리며 움직이는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원해서 이곳에 있다고는 하나, 매일같이 마기를 접해 가며 마물을 죽이는 것은 썩 아름다운 환경은 아니었다.
그저 필요에 의한 행위일 뿐이지.
한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냥 빵 하나 옆구리에 챙겨 들고 소풍이라도 떠나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선생님을 마주하면, 고작 몇 분 만에 어린 시절의 그때로 돌아가 버리는 느낌이다.
호록.
적당히 식은 차가 점점 빠르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를 어쩐다.”
어떤 식으로든 선생님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긴 할 모양이었다.
“사람을 놀고 싶게 만들어.”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마샤의 눈길에 따스한 온기가 가득했다. 마샤는 늘, 의식적으로 미소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처세술에는 웃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반반한 외모에 적당한 미소는 좋은 시너지를 발휘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 호감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런 마샤가 진심으로 호의를 품고 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고대 마수를 부리면서, 위험한 북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가까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누구에게나 적당한 선을 그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 세월의 흐름 속에 형성된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을 포함한 몇몇 요소들은, 너무도 쉽게 자신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보육원, 선생님, 제레미……. 아마, 이안을 만난다 해도 같은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 가능했다.
과거의 시간을 공유했다는 게, 그렇게 큰 의미일까.
마샤는 문득 궁금했다. 과연 지금, 성인이 된 자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뭔지.
툭.
마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는 이미 다 마신 후였다. 그는 창틀에서 방의 바닥으로 내려오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휘잉.
창문을 열자 맑은 아침 공기가 그를 반겼다. 마샤는 여전히 체조에 집중하고 있는 한나가 있는 방향으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의 방은 2층에 위치했지만, 층고가 높은 마탑의 숙소는 보통 건물의 3층 높이는 되었다.
“읏차.”
하지만 마샤는 바람이 떠받쳐 주는 것처럼 안락하게 흙바닥에 안착했다. 그는 붉은 제복을 손으로 툭툭 털고, 머리까지 단정하게 손으로 쓸었다.
* * *
“마샤!”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한나가 마샤를 불렀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네요. 기분이 좋아 보여요.”
“험상궂은 얼굴로 지키고 있으면 네가 도망갈까 봐.”
“솔직하네요.”
마샤는 한나가 이렇듯 솔직하게 툭툭 말을 던지는 게 좋았다. 그럴 때마다 자신도 가식 없이 툭툭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생각 없이 대화 나눌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위험한데, 쫓아올 건가요?”
사실 마샤는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손가락 열 개로 꼽아도 모자랐다.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건, 한나가 자신을 찾겠다고 산으로 향할까 봐서였다.
“데리고 가 줄 거야?”
“안 돼죠.”
알면서 뭘 물으실까.
“그럼 그냥 너 못 가게 붙잡기나 해야지 뭐.”
“어떻게요?”
“무력으로?”
한나의 말에 마샤는 웃음이 터졌다.
“풉, 그래서 몸 풀고 있었던 거예요?”
한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농담이지. 내가 힘으로 너한테 되겠니. 다른 걸로 꼬시려고.”
“꼬셔요?”
“응. 산에서 마물 잡는 것보다 훨씬 재밌는 걸로 못 가게 꼬실 거야.”
그 순간 마샤는 정말 소풍이라도 가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뭘 해도 산에서 마물 잡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일이지 않나요.”
“그걸……. 알고 있었어?”
한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반응에 마샤는 되려 어이가 없었다.
“설마 제가 징그러운 마물이나 잡으면서 즐거워하는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어맛.”
부러 꾸며 낸 동작으로 놀라는 한나의 모습은, 저를 놀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난 또, 네가 그런 이상한 취향인 줄 알았지.”
“오. 그래요? 그럼 그 이상한 취향을 가진 저를 어떤 걸로 꼬시려 했는데요?”
마샤의 물음에 한나는 방긋, 웃으며 까치발을 들고 마샤의 어깨에 양팔을 얹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먹을 거.”
역시나.
“음. 그런 꼬심은 저기, 동네 똥강아지에겐 잘 통하겠네요.”
마샤가 진심으로 답했다.
“어, 그런데 선생님, 저건 뭐예요?”
그러고는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한나의 뒤를 가리켰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한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마샤는 그 자리에 없었다.
“튀었네.”
튀었어.
그것도 눈앞에서 홀랑 튀었어.
그제야 한나는 그가 텔레포트로 홀랑 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진작 튈 수도 있었지만, 굳이 자신을 놀리고 갔다는 것도.
“마샤 플레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한나의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흠흠.”
결국 마샤는 늘 하던 것처럼 갈리아 산에 다녀왔다. 아침의 한나를 생각하자면 조금 미안했으나,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마샤는 즐겁게 마탑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칵.
“왔어?”
마샤는 제 눈을 비볐다.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서.
“갈리아 산은 오후면 해가 진다더니, 정말 빨리빨리 오기는 하네.”
한나는 환하게 웃으며 마샤를 반겼다.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나의 자그마한 능력으로 너희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더니, 환영하면서 들여보내 주던걸?”
한나는 마치 제집 안방처럼 편안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물들이 주민들을 해치지 않게끔 미리 없애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광석을 노리고 마물을 잡는 것을 한나가 빤히 알고 있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런 좋은 일에 빠질 수가 있나.”
“무슨 수작이에요.”
“어머, 수작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살벌하게 하니. 도움이라니까. 도움. 얼른 치렁치렁한 로브 벗고 이리 와서 앉아.”
한나는 마치 천사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앞자리를 권했다. 당연히 마샤는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산에 다녀와서 독기가 많이 쌓였을 텐데, 정화해야지.”
왜 저 웃는 낯이 사신의 얼굴처럼 오싹해 보이는 걸까.
마샤는 두려움 반, 의문 반을 품고 로브를 벗고 한나에게 다가갔다.
마샤가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나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볼 것 없어. 난 그냥, 네가 산에도 계속 가겠다, 날 데려가지도 않겠다고 하니 치료라도 해 주고 싶은 좋은 마음이란다.”
마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나의 지시대로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옳지. 옳지. 편안하게 앉아. 치료라는 게 또 정신적인 교감도 중요하거든.”
마샤가 자리에 앉자,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긴장감을 자아냈다.
“신관에게 치료받아 본 적 있어?”
한나의 손이 마샤의 어깨에 닿았다.
“아뇨.”
실제로 마샤는 마력으로 독기를 누르거나, 가끔 성수를 마시는 것 외에 신전을 도움을 받은 적은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나의 손이 팔을 쓰다듬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내 마샤의 팔목, 맨살에 따뜻한 손바닥이 닿았다.
“어머, 그렇구나. 그럼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네.”
마샤는 한나가 하는 말보다 맨살에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과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더 신경 쓰였다.
“무슨…….”
왜 놀랄지 물어보려던 그 순간, 마샤의 눈이 번뜩 뜨였다.
“악!”
방 안에 그의 비명 소리가 가득 메워졌다.
“원래 치유력은 조금 아프거든.”
한나가 해맑게 웃었다. 순전히 뻥이었다. 다른 신관들이라면 신성력을 잘 컨트롤해서 아프지 않게 치료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이 그 섬세함이 부족해 잘 못 할 뿐이었지.
마침 마샤도 치료를 받아 본 적 없다니, 뻥치기 딱 좋지 않은가?
한나에게 마샤는 아주 탐스러운 먹잇감이 되었다.
“아, 아파, 아파요! 선생님!”
지금 마샤는 어떻게든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치 대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어머, 함부로 중단했다간 부작용 있을 수도 있어. 가만히 있으렴.”
“서, 선생님!”
“너는, 엄살이 왜 이리 심하니.”
악마다.
악마가 분명하다.
마샤는 그리 생각했다.
한나의 방긋 웃는 얼굴이 사탄처럼 보였다.
“음. 독기가 많이도 쌓였네. 오래 걸리겠다. 걱정 마. 아프긴 해도 효과는 정말 좋거든.”
오래 걸리겠다는 말에 마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으…….”
치료는 끝났다. 독기는 말끔하게 제거되었고, 마샤는 지금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이었다.
아, 물론 너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든 것도 한몫하긴 했다.
“보자, 내일도 산에 다녀올 거지? 이 시간에 만나면 될까?”
한나는 손을 탁탁 털며 발랄하게 말했다. 은근히 즐거워 보이는 건, 착각일까. 마샤는 내일이라는 말에 몸이 흠칫 굳었다.
“매일 오려고요?”
“응. 네가 매일 산에 가니까.”
끔찍했다.
“선생님. 그렇게 치료 안 해도 전 마력으로 충분히 독기를 몰아낼 수가 있…….”
“아냐. 아냐. 마력은 한계가 있지. 그러다 늙어서 합병증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하는 게 확실해.”
“이거, 고문이죠?”
마샤는 아직도 온몸의 혈관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생생했다.
“너는 참, 내가 뭐가 좋다고 고문을 하겠어. 다 널 위한 일이지.”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거죠?”
“누가 들으면 싸우자고 하는 줄 알겠다.”
“그 정도로 아프게 하는 건, 누가 봐도 결투 신청이에요.”
“……상처다.”
한나는 기운 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마샤는 믿지 않았다.
“연기하지 마요.”
“못 본 새 정이 많이 없어졌구나. 매정해.”
마샤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선생님, 제도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요?”
“일이 중요하겠어, 네가 중요하지.”
누가 들으면 감동적이라 할 만한 말이었지만, 마샤에게는 그 말이 이리도 섬뜩할 수가 없었다.
“미쳐 버리겠네.”
한나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마샤가 중얼거렸다.
“매일 얼굴 볼 생각하니까, 신난다. 그치?”
그 말을 듣지 못한 한나는 밝게 웃었다. 그러자 고개를 든 마샤가 한나를 바라보았다. 비록 괴롭히기 위해서, 아니, 마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한나에게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이 담긴 눈동자를 마샤는 정면으로 보고 말았다.
“…….”
차마 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원래 치유력이 그렇게 아파요?”
“응. 그렇고말고. 그래도 나쯤 되니까 이 정도인 거야.”
한나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여태 신전이 멀쩡한 게 신기하네.”
“고통은 잠시지만, 능력은 확실하잖아.”
자신의 치료를 거부하며 뛰쳐나갔던 신관들이나 신도들이 생각났지만,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마샤는 손깍지를 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한나가 굳이 아까운 시간을 할애해 가며 자신을 이곳에서 데려가는 진짜 이유가 뭘까.
“왜 그렇게 제가 여기 있는 걸 꺼리는 거예요?”
“위험하니까. 네가 위험한 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야?”
한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돌았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묻고 있었다. 지금껏 한나가 행한 모든 행동을 관통하는 유일한 주제는, 마샤의 안전이었다.
마샤가 이곳에서 안전하길 바라고, 미래에 안전하길 바라고, 흑화하지 않길 바랄 뿐.
“정말 비단 그 이유뿐인가요?”
목소리의 온도가 조금 낮아졌다.
그 찰나의 냉랭함을 느낀 한나는, 설마 마샤가 자신이 하는 일이 신전이나 마탑의 이익과 관계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세력 다툼, 정치 같은 건 관심 없어.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잠이나 자는 게 낫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것도 진심이었다.
신전이고 마탑이고 지지고 볶든 어느 곳이 망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월급이나 잘 주고 일이나 덜 시키면 그만이지.
“언제 그렇게 어른이 된 거야.”
“어른요?”
“옛날의 너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질문을 해서.”
한나는 묘한 감정이 뒤섞여 웃음이 나왔다. 대견하게 큰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괘씸하기도 하고.
“난 그럼 이제 쉬러 가야겠다. 너도 푹 쉬어. 내일 이 시간에 보자.”
한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돌아 나갔다. 마샤는 뒤늦게 일어나 그녀를 배웅하려 했지만, 한나는 이미 복도를 죽죽 가로지르고 있었다.
“…….”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한나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어쭈.”
지금 한나의 기분은 아주 저조했다.
매일같이 마샤를 찾아온 지 삼 일째 되던 날부터 마샤가 보이지 않았다.
“홀랑 튀어 버리겠다?”
고문 같은 치료를 받던 마샤가 결국 못 견디고 날라 버린 것이었다.
“흐응.”
이대로 일주일만 더 고문…… 이 아니라, 치료를 하면 돌아가겠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이제 머리 컸다고, 이렇게 내 말도 안 듣고 홀랑 도망이나 가고 말이야.”
서운해도 이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마샤, 네가 진화한 만큼, 나도 세월을 헛으로 보내진 않았다 이 말씀이야.”
‘나도 신전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
겨우 도망 정도에 마샤를 포기할 한나가 아니었다. 한나는 여관이 많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신관님! 여깁니다!”
한 여관의 주인이 나와 한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한나는 밝게 인사하며 그녀에게로 향했다.
“검은 로브를 둘러쓴 마법사 맞지요?”
“네. 그가 왔나요?”
“한 시간 전에 왔습니다.”
한나는 며칠간 쉴 새 없이 성수를 만들어 주위의 상점에 나누어 주었다. 갈라티아 마을 사람들은 독기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라, 집집마다 하나씩 비상용으로 성수를 나누어 준 것이었다.
거기에 겸해서 혹시 마샤가 어딘가 출몰한다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는 청탁……. 아니, 부탁을 했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마샤의 탈출은 이렇게 금방 덜미를 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법사는 왜 찾는 겁니까? 혹시 나쁜 사람인가요?”
“아, 그건 아니에요. 신전에서 보호를 위해서 주시하는 거랍니다. 이 층인가요?”
“예예. 여기 이건 여분 열쇠고, 이 층 오른쪽 끝방입니다.”
열쇠까지 주는 건 과한데……?
하지만 한나는 열쇠를 받아들었다. 혹시 쓸 일이 없길 바라지만, 필요할 수도 있으니.
그나마 다른 곳에 비해 시설이 좋은 편인 여관의 2층 복도는 깔끔했다.
한나는 2층 오른쪽 끝방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답이 없자 말을 곁들였다.
“마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그리고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5초쯤 지난 뒤, 스르륵 문이 열렸다. 편한 차림의 마샤가 문가에 기댄 채, 질린 눈으로 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마샤.”
마샤는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이내 그가 문에서 한 발짝 비켜섰고, 한나는 그 틈새로 쏙하고 들어갔다.
“옛날부터 머리만 기대면 그렇게 아무데서나 잘 자더니, 여전히 잠자리를 가리지 않나 봐. 참 좋은 체질이야. 그렇지?”
방긋방긋, 웃으며 하는 말이 마샤의 심장에 푹푹 박혔다. 한나는 마샤가 도망친 것을 비꼬아 칭찬하고 있었다.
“선생님.”
“응. 마샤.”
커다란 침대 하나가 고작인 여관이었다. 한나는 폭신한 침대에 풀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런 그녀에게 마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지, 이렇게 나타나면 놀라서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마샤가 한나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는 한나의 양옆을 손으로 짚었다. 마샤의 무게가 더해져 침대가 꿀렁거렸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남자 혼자 있는 곳에 오면 어떡해요?”
한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게 마샤를 올려보았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에 생각한 분위기는 이게 아니었다.
저가 장악하고 있어야 할 분위기의 주도권이 이상하게 마샤의 손에 넘어간 기분이 드는 건…… 왜지?
마샤는 팔을 벌리는 바람에 실크 재질로 된 로브가 조금 벌어졌다. 탄탄한 맨가슴이 정면으로 한나의 눈에 들어왔다.
“어…….”
당황한 그녀가 마샤의 몸을 밀어내려 손을 뻗었지만, 마샤의 손이 그 손짓을 가볍게 제압했다. 그의 얼굴이 한나의 뺨을 지나, 귓가에 안착했다. 이내 느리고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위험하게.”
뭐가?
깜박깜박.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에선 아직 말리지 못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축 늘어진 곱슬머리 아래로, 나른한 눈동자가 내리깔려 있었다.
머리카락 끝에서 똑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하얀 피부 위를 또르륵 굴렀다. 뺨을 지나, 목, 쇄골의 깊이 파인 곳에 물방울이 자리 잡았다.
그제야 한나는 상황 파악을 끝낼 수 있었다.
“……너…….”
이, 몹쓸 제자 녀석이……!
한나는 자신의 붙들린 손을 힐끗 보았고, 분노에 차 눈을 희번덕 떴다.
이 자식이?
욱한 한나가 그대로 성력을 흘려보냈다.
“아야야! 아파요!”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그녀는 있는 힘껏 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마샤가 경기를 일으켰고, 잡고 있던 한나의 손을 놓고 말았다.
“아……. 진짜, 너무하네.”
마샤는 얼얼한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사실 그는 여관까지 쫓아온 한나를 보고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집요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체념할 수도 없으니, 마지막으로 겁이라도 줄 요량이었다.
정말 나쁜 마음을 품은 건 아니고, 아주 살짝, 그저 앞으로는 이 오밤중에 자신을 찾아 여관까지 오는 일만큼은 없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배은망덕한 녀석이!”
한편, 그런 마샤의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할 한나가 그대로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마샤를 찰싹찰싹 때렸다.
“아, 얼굴은 때리, 때리지 마요! 선생님!”
마샤는 양팔로 얼굴을 막았다. 얼굴만큼은 지켜야 했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그 순간, 마샤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한나에게 이런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퍽퍽퍽.
둔탁한 타격음이 방을 가득 메웠다.
“후.”
마샤를 흠씬 두드려 팬 한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 자신의 옷을 정리했다.
“정말, 너무해.”
마샤는 창틀에 기대어 불쌍한 어조로 말했다.
“너, 다시 이러기만 해 봐. 그리고 또 도망가면 다음엔 몽둥이 들고 때릴 거야.”
“폭력은 좋지 않아요! 신관이 폭력이라니!”
“사랑의 매라고 하는 거지.”
“그런 거 다 없어져야 한다니까? 그건 다 폭력이에요!”
“너 자꾸 폭력, 폭력 하면 진짜 폭력이 뭔지 보여 준다? 어디서 다 큰 녀석이.”
가차없는 한나의 모습에 마샤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선생님, 정말 너무 한 거 알죠?”
“내가? 설마. 기껏 좋은 마음으로 치료해 준다는데 도망다니는 네가 너무하지.”
“그 치료, 너무 아프다고요.”
“그게 싫으면 얼른 짐 싸서 제도로 돌아가면 될 것 아냐.”
“서럽다. 서러워.”
“응, 하나도 서러울 것 없어. 짐 챙겨. 네 숙소로 돌아가게.”
“제 숙소에 트라우마 생겼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한나는 이건 또 뭔 x소리인가 싶어 마샤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련한 눈으로 창밖을 보며 말했다.
“거기만 들어가면 치료받는 기억이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
뭘 또 그렇게 악몽처럼 말하고 난리람.
“신소리 말고 얼른 가.”
한나는 홀가분하게 옷을 털고 방을 나섰다.
처량하게 쭈굴거리고 있는 마샤에게 오늘은 굳이 치유력까진 쓰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여관 복도를 걷는 한나의 발걸음이 오늘도 매우 가벼웠다.
“근데 확실히 치료보다 손으로 때리는 게 감칠맛이 좋단 말이야.”
마샤가 들었다면, 역시 치료는 고문의 수단일 뿐이었다며 펄쩍 뛸 발언이었다.
* * *
그날 밤, 한나는 성수를 제작하고 있었다.
평소 성수를 만들 때면 제작에 집중하느라 잡생각이 달아나곤 했다. 그런 시간을 즐기기도 했던 한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에고!”
결국, 성수가 조금 이상하게 만들어지고 말았다. 신성력이 담기지 않을 만큼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었다.
“앗, 따가워.”
다만 성수가 너무 아프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성수는 무색 무미 무취의 맹물 같은 성수가 가장 상급이었다.
괜히 달게 만들거나 상큼하게 만들겠다면 이것저것 욕심부리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잘못 만들어진 성수는 마치 한나가 치료를 할 때처럼 피부에 닿으면 아팠다.
마시는 건, 말해 뭐해. 아주 식도에 불이 나는 거지.
“버려야 하나.”
기껏 만든 성수를 버리는 건 아깝지만, 이렇게까지 완전히 망한 경우에는 쓸래야 쓸 수도 없었다.
“에휴, 일단 앉아서 좀 쉬자.”
한나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오늘 집중이 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똑똑 흐르던 물방울이 생각났다. 붉은 머리카락이 아른아른거리고, 낮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남자 혼자 있는 곳에 오면 어떡해요?’
로브 아래로 결 좋은 피부, 탄탄한 가슴…….
“어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나 봐!”
한나는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무리 잘생긴 게 좋다지만, 마샤를 떠올리면서 무슨 추잡한 생각을!
“걘 왜 그렇게 또 잘 커 가지고.”
이건 다 마샤 탓이다. 괜히 쑥쑥 잘 커서, 진짜 남자 같은 얼굴을 하고 그런 말을 하니까.
그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흠씬 때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고.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까지 잊히는 건 아니었다.
“마샤가 잘생기긴 했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수려한 외모.
“키도 크고, 목소리도 좋네. 제복은 또 얼마나 잘 어울리게.”
번듯한 마샤의 모습을 생각하면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누군지 몰라도 부인은 참 좋겠어.”
결국, 한나의 머리를 번잡하게 만든 마샤의 마성의 얼굴도 엄마의 마음으로 갈무리되고 있었다.
아이들을 업어 키우다시피 한 자신이 마샤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진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체조나 해야겠네.”
잠깐이라도 번잡했던 머리를 비우기로 결정했다.
* * *
“별문제 없는 거죠?”
한나는 광부들을 만나러 왔다. 광산에서 별일은 없는지, 마기는 잘 정화되고 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이것저것 물어보던 차였다.
“덕분에 아픈 사람도 없고, 신전에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수다.”
“다행이네요. 다들 얼굴이 좋아 보여요.”
“다 우리 신관님 덕이지.”
광부들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시라우! 오늘도 힘내서 다녀올 테니.”
광부들은 즐겁게 산으로 향했고, 한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산의 입구는 며칠 전 처음 왔을 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벌써 소문이 났나.’
사람들은 돈이 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낸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마물이 출몰하는 갈리아 산이 등산하기 좋은 명소일 리도 없는데 등산준비를 마친 용병들이 잔뜩 보였으니 말이다.
“이러다 원작 시작도 금방이겠네.”
정말 이대로 마샤를 막으려고 갈라티아 마을에 눌러앉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여기 조금 있으면 무법지대가 될 텐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튀어야겠지.
“흐음.”
얼른 마샤의 마음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나는 마을 쪽으로 발을 돌렸다.
“신관인가?”
이건 또 뭐야.
뺨에 칼자국이 길게 이어진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한나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뒤를 힐끗 바라보자, 그와 같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빼곡히 진을 치고 있었다.
‘어라라.’
이거, 뭔가 상황이 이상한데.
순간 마샤가 위험한 곳이라고 경고했던 말들이 한나의 머리를 스쳤다.
‘에이, 설마. 백주 대낮에 신관을 어떻게 하겠어?’
―라는 그녀의 생각은 3초 만에 박살이 났다.
“신관 양반, 순순히 따라오시지.”
에레이.
어떻게 한 치의 벗어남도 없는 완벽한 나쁜 놈의 표본 말투냐. 저런 대사는 나쁜 놈들끼리 돌려 보는 대본집이라도 있는 건가?
“왜 그러실까요. 신전에 용건이 있으신가요?”
일단 말이라도 걸어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어떻게 이들을 떼어놓아야 할까.
갑자기 핀체프가 보고 싶은 이유는 뭘까. 역시, 이런 상황은 그 녀석과 함께해야 제맛인데……. 흠.
“순순히 따라온다면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저것도 분명 그 대본집에 있었을 거다. 악당 필수 대사 같은 거.
“제가 조금 바쁜 몸인데.”
“우리도 바쁜 사람들이야.”
어련하시겠어요.
이쯤에서 한나는 말로는 해결될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난 정말, 싸움은 싫은데.”
그 순간, 남자가 한나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이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어 냈다.
“으악!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은 대사를 해요!”
아니, 가만히 있는 사람 덥석덥석 잡아서 끌고 가려는 나쁜 놈은 자기면서 말이다. 한나가 한 행동은 지난밤 마샤에게 했던 것처럼 신성력을 흘려 넣은 것뿐이었다.
“보통 신관이 아닌가……?”
남자는 무슨 영문으로 자신이 아팠는지 모르기 때문에 바짝 긴장했다. 보호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지 파악하기 위해 한나를 관찰했다.
“신관이라고 그렇게 무시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큰코다쳐요.”
다칠 코도 없어 보이는 납작한 코였지만.
상황을 지켜보던 무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 왜, 전투신관들은 공격도 한다던데.”
물론 그건 착각이었지만, 한나는 그들이 착각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저렇게 겁먹고 떨어져 나가면 감사땡큐지.
“어차피 혼자야! 손발이라도 묶어서 데려가!”
따끔한 맛을 본 남자는 멀찍이 물러서면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참으로 비겁한 모습에 한나의 입매가 비틀려졌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숨겨 놓았던 무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건 반칙이지.”
수적으로도 불리한데 무기까지 꺼내는 게 어디 있어!
“엄마!”
그들이 하나둘씩 자신이 있는 쪽으로 뛰어들기 시작하자, 한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아, 진짜, 아침부터 일진 더럽네!’
그러고는 급히 자신의 품속을 뒤적거렸다.
한나가 품에서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성수였다.
“예끼!”
그녀는 성수를 냅다 뛰어오는 불한당들에게 던져 버렸다.
“으악!”
“이, 이게 뭐야!”
병이 박살나며, 튀어 오르는 성수에 맞은 그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니까 막 그렇게 신관 위협하고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
한나가 계속해서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그 성수는 지난밤, 한나가 제조에 실패한 성수였다. 닿기만 해도 치료받는 것처럼 피부가 불타는 느낌이 들 테지.
한나 역시 어제 성수에 닿은 손이 아직까지 아팠다. 효과가 끝내준다는 말이었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치료를 하는 성수가, 심지어 지금도 성수에 맞은 불한당들은 쌓인 독기가 치료되고 있지만, 고통스러워서 무기로 쓰게 되는 경우라니!
“이 정도면 저주받은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신성력을 쓰는 데 부작용이 있는 자신의 능력은 항상 돌연변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참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전투신관들은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공격을 하지 못하는데에 반해, 자신은 마음껏 괴롭혀도 제약에 걸리지 않는다!
“저한테 가까이 오지 마요! 진짜 그러다 큰일납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맞은 것이 성수라는 것을 모를 테니, 마음껏 으름장을 놓을 수 있었다.
사기꾼이 따로 없었다.
“어, 어쩌죠?”
겁을 먹은 한 남자가 말했다.
“전투신관인 모양이군. 어차피 전투신관은 사람을 죽이진 못해.”
꼴에 아는 것은 있는 모양인지, 대장격으로 보이는, 한나가 제일 처음 마주한 남자가 말했다.
“그런 구시대적인 제약 없어진 지 오래거든요! 거기다 여긴 위험지역이라 작은 실수 정도는 신전에서도 묵과할 거고!”
“말이 많아진 걸 보니, 분명해.”
‘눈치만 더럽게 빨라서는!’
슬슬 성수도 바닥 나가고 있었다. 허풍 떨 때 떨어져 나가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는 도망갈 구멍을 찾아야 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경비대 같은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위험한 곳에 지키는 사람 정도는 있어야지!
한나는 갑자기 본 적도 없는 경비대가 야속했다.
‘산으로 도망갈까.’
아니지. 그건 말도 안 된다. 이 짧은 다리로는 금방 잡히고 말 것이다.
한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을 쪽은 검은 무리가 막고 있었다.
‘차라리 순순히 따라가는 척 마을까지만이라도…….’
하지만 마을로 가는 게 아니라, 외진 곳에 있는 아지트로 가 버린다면? 이것도 영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머리를 굴리는 사이, 이미 검은 무리는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게끔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더럽게 아프네!”
한 남자가 한나의 팔을 낚아챘다.
“아! 진짜!”
하지만 역시나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누, 누가 이 여자 좀 잡아 봐!”
따끔한 맛을 본 녀석들은 꼭 저렇게 남 시키더라. 마치 가시를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다고 오래 버틸 것 같지도 않네.’
한나는 체념했다. 순순히 다치지 않고 협조하는 척 가기로.
“가요. 가! 내 발로 간다!”
그녀의 말에 일부는 안도했고, 일부는 뭐 이런 신관이 다 있나, 신기한 눈으로 한나를 보았다.
한나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소리쳤다.
“앞장서쇼!”
애써 유지하고 있던 존댓말은 실종되었다.
“거참, 성격 특이하네.”
“엄한 사람 납치하는 당신들이 더 이상하거든.”
아예 한나가 척척, 그들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휘익―.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짜, 겁도 없어.”
실로 반가운 얼굴, 마샤였다.
“마샤!”
마치 구세주 같은 용사님 등장이었다. 한나는 냉큼 마샤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나 구해 주러 온 거지?”
“선생님은 겁도 없어요? 맞서 싸우는 것도 기가 찬데, 그렇게 호기롭게 납치범을 따라가는 건 또 무슨 경우야.”
그 말에 한나는 곧장 발끈해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거든. 아니, 근데 너 다 보고 있었어?”
마치 지금까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말에 한나의 눈이 뾰족하게 각이 졌다.
그런데도 구해 주지는 않고 여태 구경만 했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마샤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말을 흐렸다.
“하여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겁이 없어. 겁이. 도대체 따라가서는 어떻게 하려고 한 건데요?”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지……. 뭐, 꽁꽁 묶여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흠.”
자신이 생각해도 참 무모한 짓이라 한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마샤는 시선을 피하는 한나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이번 일로 배운 게 있길 바라요.”
“그래야지……. 일단 저분들 좀 돌려보내는 드리는 게 어떨까.”
한나의 말에 마샤는 검은 옷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샤의 출현에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저 녀석은 검은 로브 마법사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매번 마물을 가로채서 짜증 났었는데, 잘됐네. 이참에 저 자식도 혼내 주자고.”
“광석도 빼앗죠!”
그들의 말을 들은 마샤는 기가 찼다.
“누가, 누굴?”
마샤에게서 노골적인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아무리 요즘 혼나고 산다고 해도, 저런 시정잡배들에게마저 무시당할 수는 없었다.
그가 땅으로 시선을 내리자, 무리의 발치에 불길이 일었다. 그러자 마치 다가오지 못할 선을 긋듯, 원형의 화염벽이 생겼다.
“왜 신관을 노리지?”
보통 암흑가의 자들이라고 해도 신전이나 신관을 위협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불문율이었다.
“뻔하지 않나? 독에 중독된 사람을 살리려고 그러는 거지.”
무리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이유에 기가 찬 한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이유면 처음부터 그냥 좀 도와 달라고 하던가.”
“저런 놈들 사정까지 귀담아듣지 마요.”
혹시나 싶어 마샤가 한나에게 답했다. 저런 놈들에게도 동정심을 느끼고 도와주겠다고 할까 봐서였다.
“신전은 아픈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신전으로 떳떳하게 오라고요!”
“선생님, 그런 거 알려 줄 필요도 없어요.”
“아니, 그건 또 신관 지침에 어긋나는 거라서.”
아무리 불량신관이라지만, 한나에게도 신관의 의무는 몸에 배어 있었다.
“이봐들, 나는 신관도 아니고 대단한 준법정신도 없어.”
마샤가 한 걸음을 앞으로 떼자, 남자들이 움찔거렸다. 불길 사이로도 마샤의 사나운 기운은 전해졌다. 마샤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저건…….’
그것을 본 한나가 덥석, 마샤의 허리춤 옷가지를 잡아당겼다. 제 옷이 당겨지는 힘을 느낀 마샤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샤. 그냥, 겁만 줘.”
한나가 둘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싸우지 말고…….”
뭐지.
마샤는 꼼지락거리는 손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 다치면 속상하니까.”
방금까지는 약병을 던져 가며 바득바득 싸우던 선생님이, 걱정이 한가득 서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겁 없던 그녀를 순식간에 겁먹게 만든 건 도대체 뭘까.
“…….”
마샤의 시선이 제 옷을 꼭 쥐고 있는 한나의 손에 못 박혔다.
‘나인가.’
한나를 순식간에 겁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건, 마샤에 대한 걱정이었다.
“……선생님.”
저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걱정을 하는 건지. 마샤는 묘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 * *
“모두 멈추시오!”
잠시간의 정적을 깬 것은, 경비대의 외침이었다.
“뭐지? 경비대?”
“이곳에 있던 군대는 다 빠져나가지 않았나? 남은 경비대는 허울뿐인…….”
납치범 무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나 역시 경비대를 발견하고 놀랐다.
찾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일 다 끝나 가니까 나타나는 꼴이란!
“경비대가 왔대!”
그래도 반갑긴 했다.
“경비대?”
그들을 반기는 한나와 달리 마샤는 그들의 출현이 의아했다.
‘이 산 근처의 병력은 모두 황궁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경비라고 하기엔 부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족히 두세 개의 부대는 되어 보였다.
“이곳은 오늘부로 황실의 명으로 폐쇄되었소! 갈리아 산은 물론, 마을 주민을 제외한 자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시오!”
“저게 무슨 말이야?”
“폐쇄라니?”
일이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납치범 무리 역시, 이제는 한나와 마샤보다 경비대의 말에 더 관심이 있었다.
“무슨 말이오?”
“방금 말한 대로, 황실에서 이곳을 폐쇄했으니, 당장 떠나시오! 더 이상 소란을 피운다면 모두 즉각 처단하겠소!”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기사의 강경한 반응에 납치범들은 움츠러들었다. 마샤 역시 얼굴이 구겨졌다.
“왜 갑자기 폐쇄된다는 겁니까?”
“황궁의 명이오. 위험 때문이니 그리 알고 얼른 떠나시오.”
황궁은 분명, 갈리아 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야 정상이었다.
“황궁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뭔가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오늘부로 새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셨소.”
그 말에 한나를 포함한 모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새 황제.
“맙소사.”
경악한 한나와,
“이런.”
심기가 불편해진 마샤.
밤사이 제국은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고, 한나와 마샤 역시, 새로운 기로에 들어섰다.
한나는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발의 한 소년이.
“……!”
한나가 놀란 상태로 마샤를 바라보았다. 마샤 역시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리는 각자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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