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흥흥~”
한나는 오늘도 기분이 좋았다. 어제를 재미있게 보내서인 것인지, 아니면 휴일이라는 것이 주는 마음의 안정 때문일까?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새 옷은 신전으로 배달받기로 했으니, 이제 신발을 좀 보러 갈까.”
이미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옷 쇼핑을 마친 한나는 다음 쇼핑 목록을 생각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시장을 지나는데, 예쁜 꽃이 늘어진 노점이 한나의 눈에 들어왔다.
“음…….”
평소라면 무슨 신전 정원에도 널린 꽃을 돈 주고 사냐며 지나쳤을 테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화병에 담을 꽃 몇 송이만 살까.”
결국 발걸음이 좌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주인의 밝은 인사에 한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화병에 담을 꽃 좀 볼게요.”
“네. 전부 오늘 새벽에 꽃시장에서 가져온 것들이에요. 병에 담아 두실 거라면, 아직 봉오리가 안 터진 것들이 좋겠네요.”
“아, 그런가요?”
꽃은 종류도 많고, 색도 다양했다.
“노란색도 괜찮겠다.”
발랄한 노란 꽃은 작업실에 두면 좋으려나.
“음, 파란색도 있네.”
신기한 파란 꽃은 침실 머리맡에 잘 어울릴 것 같고.
한나의 손이 파란 꽃의 꽃잎에 닿았다.
“빨간…….”
빨간 꽃이 가득 꽂혀 있는 바구니로 손이 옮겨갔다.
툭.
“음?”
그때, 손이 다른 사람의 손과 부딪혔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었다.
“아. 죄송…….”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상대방의 중지에 자리한 반지 보석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눈을 찌르는 빛에 한나는 절로 눈이 감겼다.
‘아. 눈부셔.’
눈을 감았다 뜨자, 상대방의 손이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한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미성의 목소리.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은, 상당한 미남자였다.
붉은 머리카락은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고, 귀에는 반지처럼 반짝이는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남자가 귀걸이 한 모습이야 많이 봤지만,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얼굴이 유난히 희고, 고와서일까.
‘제복?’
하지만, 남자는 예쁘고 여리여리한 얼굴과 달리 깃이 빳빳하게 선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기사들의 제복과는 색이나 모양이 달랐다.
‘보통 신전은 흰색, 황궁은 검은색이나 금색인데.’
남자의 제복은 와인이나, 팥죽색을 닮아 있었는데, 그의 붉은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렸다.
“꽃을 사러 오셨나 봐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네, 네!”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던 한나는 화들짝 놀라 답했다.
‘이거, 침이라도 흐른 거 아니야?’
퍼뜩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다행히 촉촉한 것은 없었다.
“음…….”
한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좌판의 꽃들에게 향했다. 그는 고민하듯 손으로 턱을 만졌다. 붉은 알이 박힌 반지가 또 반짝였다.
‘왜지.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왜, 처음 보는 이 남자가 낯이 익은 걸까.
‘특히 저 반지…….’
한나의 머릿속에서 뭔가 톡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반지……. 반지……. 붉은 반지.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
‘설마.’
한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혹시?
에이, 설마.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나는 획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남자를 관찰했다.
붉은 곱슬머리는 짧고 단정했고, 칼 같은 각이 살아 있는 제복은 분명 바지였다.
‘설마…….’
그런데 왜 이 남자에게…….
‘마샤가 겹쳐 보이는 걸까.’
“이 꽃이, 어울릴 것 같은데요.”
한나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노란 꽃을 집어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나의 시선은 꽃이 아니라 그의 손에 못 박혀 있었다. 저 반지, 아무리 봐도 마샤에게 준 마지막 선물과 똑 닮았다.
어떻게 잊을까.
‘그 반지를 고르면서 삼 일 밤낮을 고민했는데.’
6년이 지나도 선명한 기억이었다.
‘잊을 리가 없잖아.’
한나의 시선이 떨리며, 그의 얼굴로 향했다. 남자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생님 눈동자 색이랑 비슷하잖아요.”
선생님.
그 한마디에 한나는 목구멍을 치고 나오는 비명을 양손으로 막았다.
“너! 너……!”
동그랗게 커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
너무 놀라면 말문이 막힌다고 하던가.
“네. 선생님.”
어떻게, 네가, 여기에.
분명 입 밖으로 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많이 놀랐나 보네.”
마샤는 한나의 손을 이끌어 제 손에 쥐고 있던 노란 꽃을 들려주었다. 한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그 꽃을 받아 들었다.
어떻게 안 놀란단 말인가?
자그마치 6년이었다. 6년 만의 재회.
‘어떻게 마샤가…….’
가장 놀라운 것은, 마샤가 완전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정한 제복에 짧은 머리카락.
그나마 어릴 적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고운 얼굴뿐이었다.
“마샤!”
겨우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네, 선생님.”
한나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마샤는 무릎을 낮춰 한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한나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몸이 허공을 날았다.
마샤가 왔다! 어린 마샤가 자라, 성인이 되어 돌아왔다.
제 몸을 달랑 안아 들어도 하나 힘들지 않은 건장한 남자가 되어서!
툭.
그에게 안겨 세 바퀴나 빙글빙글 돌던 한나의 발이 다시 땅에 닿았다.
“언제 돌아온 거야? 세상에, 왜 진작 만나러 오지 않은 거야?”
한나가 쉬지 않고 질문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오늘 왔어요. 꽃 사 들고 신전으로 가려고 했는데, 보고 싶은 마음이 닿은 건지 선생님이 마중을 나와 있네. 꼭 운명같이 말이에요.”
“아니, 온다고 편지라도 하지! 세상에!”
자신이 신전에 없을 때 마샤가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뭐, 어쨌든 이렇게 만났잖아요.”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한나는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너무 놀라는 거 아니에요? 이맘때쯤 돌아온다고 편지도 했던 것 같은데.”
마샤가 마탑으로 가고, 한나가 중앙 신전으로 온 뒤, 둘은 편지로만 연락할 수 있었다.
평범한 마법사들과 달리 마샤는 고대 마수를 곁에 두어야 하는지라 평범하게 제도를 누비고 다닐 수가 없었다. 꼬꼬가 커질수록 위험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북부에 위치한 마탑 지부로 가서 생활해야 했다. 심지어 그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라 한나가 마샤를 보러 가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그런 마샤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편지였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마샤에게 한나가 펄쩍 뛰며 말했다.
“오는 날이 언제인지도 알려 줬어야지!”
몇 년 만의 만남인데.
무려 6년 만의 만남이 엇갈릴 뻔했다니!
“저도 그게 오늘이 될 줄은 몰랐어요. 작은 임무를 하나 하고 와야 했는데, 일찍 끝났어요.”
마샤는 아직도 어버버, 거리며 눈을 끔뻑이는 한나를 보며 푸스스 웃었다.
“언제까지 영혼 빠진 표정으로 볼 거예요?”
“그치만……. 그치만…….!”
이내 한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어, 우는 거예요?”
“넌……. 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해! 으엉.”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한나의 모습에 마샤는 난감해졌다.
도대체 기뻐서 우는 건지, 놀라서 우는 건지, 혹은 온다고 미리 알리지 않아서 화가 나서 우는 건지.
“선생님?”
“으어어엉. 이 나쁜 놈! 오면, 온다! 언제 온다! 준비해라! 했어야지!”
“……아니, 뭐, 그렇게까지…….”
“무려 6년이라고! 6년 만에 겨우 보는 건데…….”
“내가 잘못했어요. 선생님. 응? 울지 마요.”
사실 한나 역시 왜 이리 슬픈 건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네가 잘못했다는 건 아냐! 몸 건강히 잘 지냈으면 됐는데……. 된 건데……. 아, 왜 이러지.”
한나가 뚝뚝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여기.”
마샤는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한나에게 내밀었다. 그 손수건을 본 한나의 눈에 눈물이 더욱 가득 차올랐다.
“손수건……. 마샤가……. 마샤가 손수건을 갖고 다닌다니……! 엉엉. 흐윽.”
마샤가 내미는 손수건에서 그동안 멀어져 있던 시간이 새삼 훅 와닿아서였다.
천방지축 개구쟁이 마샤가 손수건도 챙길 줄 아는 어른이 되어 있다니! 변한 모습만큼,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반면, 마샤는 황당했다. 도대체, 주머니에서 손수건이 나왔다고 대성통곡하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음, 선생님……?”
“완벽하게 자랐잖아. 내가 너를, 흑, 얼마나, 흑,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잘 자랐으면서!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고! 으앙.”
그리고 그 순간, 한나가 마샤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런.”
이제는 제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는 한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마샤의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괜찮아요?”
“흑……. 나쁜 마샤. 이렇게, 이렇게 멋지게 클 필욘 없었잖아!”
“음, 제가 잘 자란 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
마샤는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보고 싶었다는 말이죠?”
그는 횡설수설, 왜 잘 자랐냐고 타박하는 말들이 결국 자신이 보고 싶었다는 말임을 깨달았다.
“당연하지!”
마샤의 가슴팍에 폭 묻혀 있던 한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너어어어어무, 보고 싶었어. 마샤.”
한나는 행복했다. 보고 싶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었던 마샤가 눈으로, 냄새로, 손의 감촉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6년 동안, 내 모든 기도마다 네가 있었다고.”
“……선생님, 이렇게 감동을 주면, 곤란한데.”
마샤의 손이 한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으엉……. 왜 이제야 온 거야.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우는 모습도 곤란하고.”
정말 마샤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쳤다. 그것을 본 한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응? 나 콧물 범벅이야?”
이렇게 반가워서 감동이 몰아치는 와중에 콧물 사정까지 챙길 틈이 어디 있어?
거참, 좀 망가질 수도 있지.
한나는 마샤를 살짝 흘겨보며 킁, 하고 코를 들이마셨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여전했다. 그에 마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게 아니라.”
그러곤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한나의 귓가로 다가왔다.
뒤통수를 단단히 받친 손.
다가온 얼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마샤의 머리카락이 간지럽게 뺨을 스쳤다. 그리고, 한나 외에는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곤란할 정도로 예뻐요. 선생님.”
* * *
한나의 터진 눈물샘이 겨우 막힌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훌쩍.”
펭―
벤치에 앉은 한나는 마샤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콧물도 닦았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지.”
눈은 팅팅 부었고, 코는 하도 풀어서 얼얼했다. 보나마나 술 취한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겠거니, 한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통곡할 줄은 몰랐는데.”
“놀라서 그래. 놀라서.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니까 놀라지.”
“반가워서면서.”
마샤는 벤치에 앉은 한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부드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몽실몽실 움직였다.
꼭 자신을 닮은 노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담고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안 반가워? 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지?”
한나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자신은 6년 만의 만남에 감격해서 1년치 눈물을 다 쏟아 냈는데, 마샤는 싱글벙글 즐겁기만 한 얼굴이지 않은가?
“울면 잘생긴 얼굴 망가지잖아요.”
“…….”
순간 한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기껏, 선생님 만난다고 예쁘게 다듬고 왔는데.”
뭐지, 이 왕자병은.
“하긴, 사실 전, 우는 모습도 잘났긴 해요.”
“……마탑에서 머리를 다친 건 아니지?”
순간, 한나는 마샤의 상태가 걱정됐다.
원래도 예쁜 걸 좋아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 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어째 그 귀여운 드레스 차림으로 하던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자뻑.
그래. 꼭 자뻑 왕자 같아.
“예쁘게 우는 게 취향이에요?”
이상하게 대화가 겉도는 느낌인데.
“너, 어디서 이상한 물이 든 거야?”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마샤는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은 변한 게 없네요.”
마샤의 시선이 한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키, 얼굴, 이목구비, 어디 하나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그대로예요? 선생님 시간만 멈춰 있나?”
“나도 변했지! 주름도 늘었고, 키도 조금……. 은 컸을걸?”
“어디 봐요. 주름 있나.”
마샤가 벤치의 손잡이를 손으로 짚으며 얼굴 가까이 다가오자, 한나는 슬금슬금 몸을 젖혔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흐음, 확실히 조금 변한 것 같기는 하네요.”
“뭐? 어디? 주름? 다크서클?”
그래도 막상 어딘가 변했다니, 기분이 묘해진 한나는 번뜩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원래는 그냥 예뻤는데, 지금은 눈 돌아가게 예뻐요.”
“……하, 참 나. 하하.”
괜히 낯뜨거워진 한나는 손부채질을 했다.
“6년 만에 만나서는, 아주 놀리는 거만 재미있지?”
“놀리는 거 아닌데.”
마샤는 펄쩍펄쩍 뛰는 한나의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까마득한 어른 같았던 선생님이었는데.
쿡 찌를 때마다 귀여운 반응을 보이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난 어때요?”
“응?”
“난 많이 변했어요?”
“음…….”
뜨겁게 열이 올랐던 얼굴이 식자, 한나는 마샤를 뜯어보았다.
“일단 조금 떨어져 봐.”
여전히 코앞에 있던 마샤가 벤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마샤는, 6년간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단 머리가, 짧아.”
“단정하죠?”
“제복, 바지를 입었고.”
“잘 어울려요?”
“반질반질한 구두를 신었어.”
“선생님 보러 오는 날이라 광 좀 냈죠.”
마샤가 천천히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마치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만의 패션쇼를 하는 것처럼.
“키가 많이 컸어.”
“이제는 내가 올려다보던 만큼 선생님이 올려다보게 됐죠.”
“음……. 목소리도 굵어졌어.”
“그래도 이만한 미성은 없지 않나?”
자신의 어느 한 부분도 사랑하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처럼,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런 내가 이상해요?’
10년 전, 자신의 정체성에 흔들리던 어린 마샤는 어디에도 없었다.
“얼굴은…….”
“그때도 지금도 아름답고.”
“푸핫.”
결국 한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세상에, 저 잘났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너뿐일 거야.”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마샤는 어깨를 으쓱이며 벤치로 다가왔다. 어릴 적엔 작은 걸음으로 총총 달려오던 마샤가 이제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가 한나의 옆자리에 앉아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감상은 재미있게 했어요?”
“응. 썩 보기 좋네.”
한나의 대답에 마샤는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달라졌다곤 했지만…….’
여전히 마샤의 반짝이는 눈 속에 개구쟁이 마샤가 존재했다. 이렇게 유쾌한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그때, 한나의 시선이 마샤의 뺨에 얹어진 손가락으로 향했다.
“어, 그런데 마샤.”
“네.”
“그……. 그 반지, 내가 선물한 거 아니야?”
“맞아요.”
마샤가 손을 내려 한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게 아직도 있어? 마력석은 마력을 다 쓰고 나면 망가진다고 하던데…….”
반지를 살 때, 마력석 가게의 주인이 해 줬던 설명에 따르면 마력석은 모든 마력을 뽑아 쓰고 나면 바스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그 마력석은 초보자용이었다.
“지금 넌, 그런 초보자용은 효과도 없지 않아…….?”
설마, 자기가 준 거라고 아까워서 못 쓰다가 이제야 낀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준 거잖아요.”
“아끼다가 똥 된다니까! 얼른 쓰고 버렸어야지!”
“난 이거 영원히 낄 건데요?”
보통 마법사들은 자신의 마력을 증폭시키는 보석을 몸이 둘둘 두르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었다. 마력석이 박힌 장신구는 그저,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나가 선물한 반지는 갓 마력을 운용할 때나 유용한 것이었으니, 지금 마샤가 쓰기에 마력을 담는 그릇이 턱없이 작았다.
한마디로 지금 마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강한 마력이 흘러 들어가 보석이 깨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귀찮음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한나는 마샤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가 몸에 착용한 장신구라고는 자신이 선물한 반지와 귀에 박힌 귀걸이가 전부였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신의 마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마법사의 몸에 마력석이 많이 달려 있을수록 대단한 마법사라고 짐작하고는 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자린고비가 된 거야?”
아니, 반짝반짝 예쁜 보석이라면 마샤가 좋아서 둘둘 두르고 다니던 것 아닌가?
물론, 원작에서 말이다.
“무슨 소리예요?”
마샤는 무슨 뜻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좋아하는 보석을 왜 안 두르고…….”
“왜 제가 보석을 좋아할 거라 생각해요?”
응? 원작에서 그랬으니까.
넌 보석이 빼곡한 드레스를 입고, 집이나 창고에도 마력석을 그득 채워 놓는 욕심쟁이였으니까……?
“음…….”
하긴, 마샤가 이렇게 여장도 안 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부터 이미 원작과는 백억 광년 떨어진 현실이었다.
“예쁜 걸 좋아하니까?”
어떻게 변명을 짜내긴 했다.
“세상에 제일 예쁜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게 탐이 날 리가.”
마샤가 빨간 보석이 잘 보이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 선물을 좋아해 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인데…….
‘어째, 많이 느끼해졌어.’
마샤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으며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정말 나 마중 나온 건 아닐 테고.”
“아! 내가 오늘부터 휴일이거든. 쇼핑도 하고, 빵집에 갔다가 제레미도……. 아! 제레미!”
어차피 제레미를 보기로 했으니, 마샤와 제레미도 재회하는 건가!
“마샤, 너도 제레미 보고 싶지?”
“음, 살아는 있어요?”
“얘는, 무슨 매정한 소리야.”
“그런데 제레미는 갑자기 왜요?”
“오늘 제레미를 보기로 했거든.”
한나의 말에 마샤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자주 만나요?”
“음, 가끔 신전에도 오고, 쉬는 날에도 보고. 그나마 연락이 되고, 가까이 있는 건 제레미뿐이니까.”
마샤는 제레미가 그렇게 주위 사람을 챙기는 살가운 성격이었나 곱씹어 보았다.
“그 녀석 성격에 안 어울리긴 하지만, 덕분에 선생님이 쓸쓸하진 않았을 테니 좋네요.”
“널 보면 정말 반가워할 거야.”
한나는 신난 물개처럼 손뼉을 쳤다.
“그 녀석이요?”
재미있는 농담을 한다는 듯, 마샤는 웃었다.
“당연하지!”
한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기세였다. 마샤 역시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 녀석은 요즘 어때요?”
“음, 제레미는 열심히 기사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아직도 기사 서임을 못 받은 게 아쉽긴 하지만,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니 됐지, 뭐.”
암암. 이러니저러니 해도 건강한 게 최고지.
그리고 우리 제레미가 어디 가서 빠지는 실력이 아닌데, 저가 마음만 먹으면 기사 서임쯤이야, 문제없지!
“기사, 라.”
마샤는 제 턱을 문지르며 ‘기사’라는 표현을 입안에 굴렸다.
“꽤 깜찍하네.”
마샤는 제 어릴 적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마샤.”
“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샤는 상념을 떨쳐 냈다.
“꼬꼬는 어디 있어?”
깜박, 깜박.
황금빛 눈동자에 궁금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꼬꼬는? 얼마나 컸지? 설마, 너무 커서 같이 못 온 거야? 혼자 왔어?”
응? 응?
한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샤의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가며 꼬꼬를 찾는 시늉을 했다.
“설마, 우리 꼬꼬를 탕 끓여 먹은 건 아니지?”
어릴 적, 꼬꼬가 말썽을 부릴 적이면 백숙을 만들어 먹겠다며 농담을 하곤 했었던 기억을 더듬어 던진 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잉?”
한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꼬꼬 녀석 너무 자라 버려서 식비가 많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털 뽑아서 꿀꺽해 버렸지.”
“뭐어?”
설마, 말도 안 돼.
마샤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혹시나, 악당 본능이 깨어나서 꼬꼬를……?
원작의 마샤라면, 마수고 뭐고 마력에 도움만 된다면 다 발라 먹을 성격이긴 했다.
‘헛, 그럼 정말?’
꼴깍. 침이 넘어갔다. 마샤를 못 믿는 건 아니다. 정말이다.
다만, 6년의 지난 시간을 못 믿을 뿐.
“……아니지?”
한나가 조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흐응.”
마샤의 눈이 좁혀들었다. 농담을 던지긴 했지만, 정말 자신을 의심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의심하는 거예요?”
마샤의 조금 찡그려진 미간을 발견한 한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무슨 그런 소리를. 연기해 봤어. 연기! 농담이지. 설마 우리 마샤가 가족…….”
잠깐, 원작의 마샤는 가족도 죽였던가? 아, 아냐. 그건 이안이나 제레미 쪽이었지.
“가족 같은 소중한 꼬꼬를 해칠 리가 없지.”
“어딘지 찜찜한 대답인데.”
“호호호, 너도 참. 마탑은 고리타분한 사람들밖에 없니? 농담을 받아들이질 못하니. 호호호.”
식은땀이 송골, 맺혔지만 한나는 부러 큰 동작으로 머리 정리를 하며 땀을 닦아 냈다.
“보고 싶어요, 꼬꼬?”
“응? 당연하지!”
한나의 대답에 멈춰 선 마샤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럼 마음의 준비해요.”
“마음의 준비?”
“놀랄 테니까.”
무슨 소리일까. 몇 년을 함께 지낸 꼬꼬를 보고 놀라다니? 그만큼 많이 자랐다는 뜻인가? 아니면, 외양이 흉측하게 자랐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든, 걱정이 되긴 했다.
“꼬꼬가 어디 있는데? 지금 바로 보러 가는 거야?”
제도에 함께 오긴 한 모양이구나. 한나는 꼬꼬가 너무 먼 곳에 있으면 제레미와의 약속에 늦을까 걱정됐다.
“어디로 갈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 가만히 서 있어요.”
“응?”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기울이자, 마샤가 반지가 있는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뭘 하려는 거지?’
어리둥절, 상황 파악을 하려는 와중, 마샤의 손가락 끝에 검은 가루가 흩날렸다.
‘마샤의 손에서 나오는 건가?’
처음엔 먼지처럼 흩날리던 검은 가루가 점점 짙어졌다. 손끝을 타고 조금씩 흩날리던 검은 가루가 이제는 마샤의 주위를 온통 검게 물들일 정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읏.”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한나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마법?’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한 나머지 실눈을 떴지만, 검은 연기에 휩싸인 마샤의 모습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마샤……!”
혹시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해서, 그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들이닥친 돌풍으로 인해 호흡이 흐트러졌다.
“하아…….”
겨우 숨쉬기 편해진 한나는 슬그머니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워 냈다.
‘밤?’
주위가 어두웠다.
“뭐야?”
갑자기 밤이라도 된 거야?
한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샤를 바라보자,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 하던 꼬꼬가 왔잖아요.”
“응? 어디?”
한나는 자신의 좌우를 살피고, 마샤의 양옆도 살폈다.
‘그 녀석이 콩알만 할 리도 없는데, 왜 안 보여?’
“위를 봐요. 선생님.”
“응?”
마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하늘로 향했다. 그 손가락 방향을 따라 한나의 시선도 옮겨갔다.
“무슨 말이야. 온통 검기만…….”
―한데, 라고 말하려던 한나는 입이 얼어붙었다.
“……꼬꼬?”
맙소사.
검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하늘이 아니었다.
“꼬…….”
이게 꼬꼬라고?
검은 것은 하늘을 날고 있는 꼬꼬의 날개 그늘이었다.
“……말도 안 돼.”
꼬꼬의 크기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컸다. 눈을 맞추고,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꼬꼬는 사람의 열 배, 아니 스무 배는 넘는 크기로 자라 있었다. 심지어 귀엽고 동글동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 하하하…….”
이거,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 거지?
‘들리니! 꼬꼬!’ 하고 소리라도 질러야 하나?
한나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많이 자랐죠?”
“……어, 응, 어, 그래.”
‘많이’라는 말로 표현이 안 될 만큼 자랐잖아!
“이래서, 제도에서 있을 수가 없었구나…….”
이제야 마샤가 저 멀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야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
“목 아프지 않아요?”
거의 고개가 넘어갈 듯 꺾인 한나의 시선에 마샤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인사하는 게 들릴까.”
“그럼요. 귀가 밝으니까.”
“꼬꼬, 잘……. 지냈니?”
안 물어봐도 잘 지낸 것 같지만.
[꾸륵.]
그때 마치, 하늘이 진동하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꼬꼬의 목소리였다.
“엄마야!”
그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그, 그런데 이렇게 여기 있어도 돼?”
한적한 공원이라고는 하나, 꼬꼬의 크기가 어지간하지 않으니 멀리서도 훤히 보일 텐데.
누군가 마수라도 나타났다고 신고라도 하면…….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은데.”
“네. 아무래도 오래 세워 두기엔 그렇죠.”
푸득.
순간, 꼬꼬가 움직였고, 작은 움직임에도 거대한 존재감에 한나는 또 몸이 움찔했다.
‘워! 간 떨어질 뻔했네!’
혹시 잘못 날개를 펄럭였다가 저가 날아가기라도 할까 무서울 지경이었다. 순간 한나는 마샤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아니! 내가 그, 꼬꼬가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가 너무 놀랐나 싶어 한나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한 거야.”
“당황할 만한 크기긴 해요.”
마샤는 평소 자주 보니 이 모습에 익숙했지만, 제 선생님은 아닐 것이란 걸 알았다.
“아니, 평소엔 어디에 있는 거야? 네가 막 소환하는 거니?”
한나는 꼬꼬가 갑자기 나타난 방법이 궁금했다.
“꼬꼬는 본래의 모습으로만 있지 않아요. 원한다면 순수한 마력의 형태로도 변할 수 있어요.”
“마력?”
“네. 실제하는 형체가 없어도 된다는 거예요.”
신기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는 건, 꼬꼬는 정확히 말하면 새가 아닌 건가?
“그럼 꼬꼬는 밀가루 반죽처럼 여러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거야?”
“지금은 새의 모습으로밖에 변하지 않아요.”
“그럼, 다른 동물, 아니지.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거야?”
“음……. 아마 자기가 원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직 다른 모습으로 변한 적은 없어요.”
“와……. 와! 대단하잖아!”
설마설마했지만, 이러다 언젠가 꼬꼬가 사람의 모습으로 ‘안녕. 인간.’ 하고 인사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잖아?
“꼬꼬는 고대 마수의 기준으로는 아직 갓난쟁이에 불과해요. 아마 선생님이 생각하는 건 수백 년은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 아쉽네. 그건.”
한나는 아쉬움에 탄식했다.
순간, 하늘에서 움직이던 꼬꼬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륵!]
“으악! 놀라라!”
큰 소리에 한나는 귀를 막아야 했다.
“선생님이 반가운가 봐요.”
“저, 정말?”
꼬꼬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움찔.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 커다란 눈동자가 무서웠다.
‘그 귀엽던 꼬꼬가……. 맙소사.’
이제는 정말 마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륵!]
아니, 우는 소리가 지천을 흔들 만큼 크긴 하지만, 예전의 귀여운 꼬꼬 울음소리와 똑같은 거 같기도……?
점점 꼬꼬의 얼굴이 한나에게 다가왔다.
“어……. 어…….”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긴 했지만, 한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마샤도 곁에 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봐야, 저 큰 부리로 자신을 꿀꺽 삼키는…….
‘그건 큰일이잖아!’
“저기, 마샤. 꼬꼬가 사람을 먹거나 하진 않지?”
정말 혹시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다.
“풋. 선생님, 꼬꼬가 선생님을 먹을까 봐 그래요?”
아니, 저 커다란 부리를 보라고!
저를 한입에 꿀꺽 삼키기에 최적화된 크기였다. 심지어 뿔은 왜 저렇게 날카롭게 벼려져 있냐고.
혹시 옛날처럼 반갑다고 얼굴이라도 비비다간, 옆구리에 구멍이 나서 과다 출혈로 죽을 거다.
“걱정 말아요. 제가 곁에 있잖아요. 물론, 꼬꼬도 선생님을 먹을 마음은 없을 거예요.”
‘한 길 사람 마음도 모르는데, 꼬꼬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아니?’라고 반박하는 건 너무 없어 보인다는 생각에 한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꿀꺽 삼켰다.
“꼬꼬?”
꼬꼬의 얼굴이 한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깜박거리는 눈이 제 몸 반만 했다.
“잘 지냈어?”
한나는 용기를 내서 손을 뻗어 보았다. 꼬꼬의 얼굴에 손이 닿기 직전, 혹시 만지면 안 되는지 묻기 위해 마샤를 바라보았다.
마샤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슥.
꼬꼬의 털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전처럼 보송보송 귀여운 털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털을 만지는 순간 과거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초록의 언덕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돌아다니던 귀여운 꼬꼬.
“꼬꼬…….”
비록 몸은 거대해졌다고 하나, 얼굴도 부리부리, 무섭게 변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꼬꼬는 꼬꼬였다.
커다란 눈망울에 반가움이 묻어 나오는 걸 보자면, 분명했다.
“세상에! 너무 멋지게 자랐잖아!”
그래!
무섭고 뭐고, 이렇게 대단한 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갑자기 한나는 꼬꼬가 이렇게 늠름하게 자란 것이 뿌듯해졌다.
“이제 누가 잡아갈까 봐 겁먹지 않아도 되겠네.”
“이 녀석을 잡아가다니. 불가능이죠.”
꼬꼬의 정체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게 살았던 날들을 떠올려 보자면, 지금 이 모습은 감개무량했다. 한나가 싱긋 웃었다.
“너무 반가워. 꼬꼬.”
[그륵.]
“마샤가 밥은 잘 챙겨 줬어? 아, 잘 먹은 것 같다.”
이렇게 큰 덩치면 하루에 소를 몇 마리 잡아먹어야 하나?
“이 녀석, 사람 음식 먹는 건 그냥 재미로 먹는 거예요. 제 마력을 먹거든요.”
“뭐?!”
그럼 그동안 보육원에서 그렇게 먹었던 건 뭔데!
덕분에 식비 충당하느라 얼마나 허덕였는데!
[그르륵.]
“……귀, 귀여우니까 봐준다.”
절대 따지기 무서운 게 아니다. 지금 말고, 그때는 귀여웠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모습으로 계속 있어도 되는 거야?”
“꼬꼬는 이렇게 있는 걸 좋아하지만……. 음, 제가 곤란하겠네요.”
“네가?”
왜 곤란하냐는 말을 하려던 그 순간, 한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샤 플레트!”
분명 둘뿐이었던 공원에 검은 망토를 펄럭이는 마법사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언제 사람이 온 거야?’
분명 방금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들은 마법으로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실수를 했네요.”
“곤란한 일이야?”
“제도 내에서 마수를 불러내는 건 금지라서요.”
“뭐? 그건 실수 정도가 아니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꼬꼬는 우리에게만 귀여운 꼬꼬인 거지,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마수인데.
“큰일나는 거 아니야?”
한나는 걱정이 됐다.
“괜찮아요. 잔소리는 조금 듣겠지만.”
하지만 마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선생님이랑 오붓하게 더 있지는 못하겠네요. 많이 화난 걸 보니, 절 묶어서 끌고 갈 기세인데요?”
마샤는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레 웃었다.
“어……. 어?”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하다니. 한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륵.]
마샤가 손을 내밀자, 꼬꼬가 다시 검은 연기가 되어 마샤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나는 측은하게 꼬꼬를 바라보았지만, 꼬꼬의 표정은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검은 연기가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네.’
꼬꼬의 검은 연기가 팔을 휘감고, 마샤의 가슴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서히 빨려 들어가던 검은 연기가 순간 돌풍을 일으키며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읏.”
펄럭이는 옷자락을 한나가 붙잡았다.
“눈떠도 돼요.”
이내 주위가 잠잠해졌고, 마샤의 말에 눈을 떴다.
“꼬꼬는 어디로 간 거야? 네 몸속으로?”
“몸 안으로 오는 건 조금 끔찍한 상상인데요. 여기 있어요.”
마샤가 제 옷깃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고, 이내 목걸이 줄이 딸려 나왔다.
“어라, 그건…….”
“많이 본 거죠?”
“꼬꼬의 목걸이?”
분명, 자신이 꼬꼬에게 선물로 줬던 목걸이였다.
“보석은 달라요. 선생님이 준 건 약해서. 최대한 비슷한 알맹이로 바꿨어요.”
마법석을 바꿨다고 하나, 색이나 모양이 선물했던 것과 거의 똑같았다. 일부러 비슷하게 세공한 티가 났다.
“이제 꼬꼬 목에는 어림도 없거든요.”
“그렇겠지.”
당시에는 넉넉하다고 생각됐던 목걸이 줄 길이는 이제 꼬꼬 발톱에도 안 둘러질 길이였다.
“마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마법사가 마샤를 불렀다.
“하하, 뭘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와. 그것도 이렇게 떼거리로.”
“헉……. 도대체 제도에서 무슨…….! 제도에 왔으면 마탑부터 왔어야지!”
“마탑보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제야 마법사가 마샤의 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한나를 바라보았다.
“누구…….”
“인사해요. 선생님. 이쪽은 마탑 동료.”
“아, 안녕하세요.”
한나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마샤 또래의 금발의 마법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궁금증을 담은 눈으로 한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마법사는 아니야.”
마샤가 답했다.
“마수가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마탑이 비상사태라고!”
“제도에 온 지가 워낙 오래돼서, 깜박했네.”
거짓말쟁이.
한나는 마샤가 알면서도 자신과 꼬꼬를 만나게 해 주려고 불렀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해지는 건 아닌지.’
고맙긴 하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휴, 더 이상 사고 일으키지 말고 마탑으로 가자.”
그 말에 마샤는 한나를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나자마자 헤어지네요.”
“앞으로 제도에 있는 거야?”
“아마 종종?”
“그래……. 그럼 됐지. 또 보면 되는걸.”
“오늘은 얼굴 본 걸로 만족할게요.”
마샤는 아쉬움이 그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에 한나는 마음이 짠해졌다.
6년 만의 만남인데. 갑작스러운 재회가 짧아도 너무 짧았다.
“걱정하지 마요. 금방 다시 볼 테니.”
한나의 짠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샤는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선생님.”
“응. 마샤, 신전으로 언제든 와!”
급하게 그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마샤가 돌아섰다. 한나는 마법사들의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마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언제 저렇게 컸담.’
돌아선 마샤는 마주하고 있을 때와 달리 낯설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저가 알던 마샤와 너무 달랐으니까.
키는 또 어찌나 잘 자랐는지, 마법사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큰 키였다.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던 재회는 가슴 한구석에 휑한 자리를 남기고 끝이 났다.
“마샤…….”
* * *
한나는 마샤를 보낸 뒤 쓸쓸한 마음을 안고 제레미의 기사 학교로 향했다.
“제레미!”
학교의 정문에 검은 옷을 입은 제레미가 서 있었다.
“선생님.”
자신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 제레미를 보자, 휑했던 마음이 조금 달래졌다.
“제레미! 제레미! 내가 오늘 누굴 봤는지 알아?”
한나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어 제레미에게 다가갔다.
“귀신이라도 봤어요?”
제레미는 머리까지 바람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달려오는 한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귀신 조상님보다 더한 사람을 봤지!”
“음, 누구이려나.”
제레미는 한나가 이렇게까지 반길 만한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마샤를 봤어!”
“……아?”
한나의 대답에 제레미는 조금 놀랐다.
“마샤?”
“응응! 마샤가 제도에 돌아왔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디에서요?”
제 선생님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고 하나, 마탑까지 다녀왔을 리는 없고.
“시장에서 만났어. 내가 꽃을 구경하는데, 손이 이렇게 툭! 하고 부딪혔는데, 그게 마샤! 아니, 마샤가 바지를!”
횡설수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도 없을 만큼 급하게 말하고 있는 한나의 말을 제레미는 묵묵히 들어 주었다.
“근사한 제복을 입고 있는데! 내가 못 알아봤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웃는 모습이 어릴 때 그대로인 거야!”
엉망진창인 설명이었지만, 대충 이해는 되었다. 제레미의 시선이 한나의 손에 들린 노란 꽃다발로 향했다.
“완전 쑥쑥 자라서! 아마 제레미 너만큼, 음, 네 키만큼은 아니라도 하여튼, 완전 어른이 다 됐어.”
“그래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숨을 몰아쉬는 한나의 모습에, 그녀가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느껴졌다.
“널 만나러 가는 길이라 같이 보고 싶었는데…….”
“어디 갔어요?”
“꼬꼬를 불러내는 바람에 마탑의 마법사들한테 끌려갔어.”
한나가 머리를 긁으며 답하자 제레미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어릴 때랑 다르질 않네요.”
“아니, 마샤 잘못이라기보단 꼬꼬를 보고 싶다고 한 내 탓인데……. 음, 뭐 그렇게 됐어.”
“그래서 시무룩하구나.”
“응?”
“방금까진 신나서 설명하더니, 바로 울상이 됐잖아요.”
그렇게 표가 났나? 한나는 제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선생님, 좋았겠네요.”
“응? 당연하지. 마샤를 얼마 만에 본 건데.”
“꽃도 받고.”
“아.”
한나의 시선이 제레미의 시선을 따라 제 손에 들린 노란 꽃다발로 향했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었다.
“많이 좋았나 보네.”
“그럼.”
한나는 꽃에 코를 갖다 대고 향을 맡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끝났는데, 어찌 안 좋을까.
“세월이 무섭긴 하네. 그 작았던 마샤가 다 큰 남자가 되다니.”
다시 한번 마샤의 모습을 기억해 보았다. 마샤는 언제부터 드레스를 벗고 바지를 입게 됐을까.
그 과정에서 상처받는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마샤는 지금의 모습에 행복한 걸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너도 보면 놀랄 거야.”
“많이 변했나 보네요.”
“길 가다 보면 못 알아볼 정도로.”
제레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한나를 유심히 보았다.
그렇게 반가울까.
단순히 오랜만이라? 아니면, 마샤라서?
어느 쪽이라 해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거, 곤란한데.”
제 친구를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지 않은가.
“헤헤.”
저렇게 행복하게 웃으면, 정말 곤란한데.
“가자! 빵집으로!”
한나는 그 좋아하는 빵집을 가는 와중에도, 가서도, 헤어지는 순간까지 마샤의 이야기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했고, 결국 제레미는 마샤가 반갑기 이전에 심술부터 올라오게 되었다.
* * *
툭. 투툭. 툭.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나 싶더니, 굵은 빗줄기가 되어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제레미는 내일의 일정을 고민했다.
‘하필.’
비는 그에게 좋지 않은 손님이었다.
투툭. 툭. 툭.
저 간헐적인 빗소리는 유독 자신의 신경을 긁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톡톡.
빗소리 사이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들었다. 제레미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똑똑.
“이건 또 뭐람.”
제레미가 있는 집무실에 특히 창문으로 드나드는 자들은 대부분 말로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몰래 숨어드는 것도 아니고 창을 두드리는 존재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제레미는 성큼성큼 창가로 향했다.
끼익.
창문에 막혀 있던 빗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이치자, 제레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랜만.”
그리고 그 빗소리를 몰고 등장한 이를 마주한 순간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뭐야?”
“인사하러 왔지.”
열린 창문을 통해서 마샤가 폴짝, 하고 창틀을 넘었다.
“이야, 분위기 좋은데?”
제레미의 집무실을 훑어본 마샤가 말했다.
“못 본 사이에 문이랑 창문도 구분 못 하게 된 건가?”
“음? 그건 아닌데, 여긴 문을 통해서 오는 게 더 힘든 것 같아서.”
아지트를 지키는 길드원들을 생각해낸 제레미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아아. 이런, 젖어 버렸네.”
마샤는 제 어깨가 조금 젖은 것을 발견하곤 툭툭, 물방울을 털어 냈다. 저 장대비 속에서 어깨만 조금 젖은 것은 오히려 신기할 노릇이었다.
옷을 털어 낸 마샤가 방긋 웃으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잘 지냈어?”
“보다시피.”
“흐음, 일전에 봤을 때보다 수척해진 것 같기도 하고.”
6년 만에 만났던 한나와 달리 둘은 얼마 전 본 적이 있었다.
“갈라티아 마을.”
“역시 알아본 거지?”
마샤는 대략 석 달 전, 사막에 근접한 마을인 갈라티아에서 제레미를 스쳐가듯 발견했었다.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제레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체한 것인지 금방 시선을 돌려 사라졌었다.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난다고는 생각했지.”
“위험?”
제레미가 찬장을 열었다.
“술? 차?”
“음, 난 됐어. 난 마실 것보다는, 궁금한 게 많아서 말이야.”
마샤는 제레미의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갈라티아에는 왜 왔었어?”
마샤의 질문이 던져졌지만, 제레미는 의미 모를 미소와 함께 잔에 술을 따랐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움직였다.
제레미는 잔을 들고 창문틀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마샤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두드렸다. 제레미가 다시 멈췄던 말을 이었다.
“꼭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취조하는 것 같잖아. 반가워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그런 여우 같은 말도 할 줄 알고.”
마샤는 제레미의 변한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물론, 제레미가 어른이 된 마샤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보다는 덜 했지만 말이다.
드레스를 벗어 던진 각 잡힌 마샤는 제레미에게도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냥, 그 동네에 돈 되는 게 뭐가 있나 해서.”
“너희 길드가 이 동네 돈은 다 끌어모으고 있다고 소문났던데, 욕심이 끝도 없네.”
제레미는 마샤가 자신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딱히 숨겨야 할 필요가 없음이었다.
“충족이 되면, 그게 욕심인가. 그냥 목표지. 그나저나, 나한테 관심이 많나 보네.”
“없을 수가 없지. 일단 우리는 꽤, 가까운 사이고……. 갈라티아 마을은 마탑에서 예의 주시하는 곳이니까.”
진짜 목적은 후자 쪽이겠지.
제레미는 마샤가 자신에게 꽤 껄끄러운 상대가 됐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생각에 잠긴 제레미를 바라보던 마샤가 팔짱을 풀고 제레미에게 다가갔다.
제레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샤를 보며 술잔을 천천히 돌렸다.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와 빗소리가 마샤의 딱딱한 구두 소리와 어우러졌다.
“갈라티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뭐야?”
역시, 오랜만의 재회치고는 좋지 못한 대화 내용이었다.
“그건 친구로서 묻는 건가……. 아니면, 마탑을 대변해서 묻는 걸까.”
제레미가 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는 순간, 마샤가 그 잔을 빼앗아 들었다.
“권할 땐 싫다더니.”
“내가 변덕이 심한 건 익히 알고 있잖아?”
장난기 어린 미소가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결국 노랗고 달큰한 술은 마샤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뭐, 그런 머리 아픈 얘기는 다음에, 다른 자리에서 하자고. 여긴 내가 많이 불리한 판 같으니.”
확실히, 조금만 더 선을 넘으려 했다면 제레미도 더 이상 귀엽게만 봐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마샤는 그 낌새를 귀신같이 눈치채고 능구렁이처럼 말을 돌렸다. 하지만 결국 제레미는 마샤가 제도로 온 것을 마냥 반가워할 수 없게 되었다.
“뼛속까지 마법사네. 이제.”
“하하하, 내가 어디에 묶일 영혼인가? 그냥 흉내나 내고 있는 거지. 지긋지긋하다니까?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너스레를 떨며 벽을 치는 것도, 마법사들의 화법과 닮아 있었다.
“뭐 어찌 됐든, 잘 사는 모습 보니 좋네. 이렇게 임시 거처까지 으리으리하다니. 이야. 내 연구실은 여기 화장실 수준인데?”
“여기 화장실을 가 보긴 했고?”
“아아. 남의 화장실 쓰는 건 질색이라.”
마샤가 휘휘 손을 저으며 답했다.
“신전엔 자주 갔어?”
“뭐, 틈나는 대로.”
“바쁜 분이 틈이 날 리는 없고. 없는 시간도 쪼개서 갔겠지.”
제레미 알란데에게 시간은 곧 돈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제국인이 어디 있을까.
아, 한 명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알아?”
마샤의 질문에 제레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전혀 모르겠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됐다. 마샤는 한나가 낮에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음, 제레미는 열심히 기사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아직도 기사 서임을 못 받은 게 아쉽긴 하지만,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니 됐지, 뭐.’
제레미는 선생님에게 자신이 암흑길드의 수장이 됐다는 것을 여태 들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날 선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모양새는 비밀로 붙이라는 뜻일 테고.
“아아, 그렇게 열렬한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친구의 비밀은 지켜 줘야지. 안 그래?”
마샤 역시 그것을 제 입으로 전할 생각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선생님이 달가워하지 않을 소식을 전하는 건 사양이었다.
이쁨만 받아도 모자랄 판에.
“어쨌거나, 오늘은 친구를 찾아온 거니까 말이야.”
마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잔에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이렇게 만나니 좋네. 친구한테 술도 얻어먹고 말이야.”
제레미는 ‘크으.’ 소리와 함께 방긋 웃는 마샤의 얼굴에 어린 마샤가 덧대어졌다. 잠시 날이 서려고 했던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반가운 날이지.”
제레미는 술병과 잔 하나를 더 가지고 왔다. 마샤의 잔이 채워졌고, 제 손의 잔도 채웠다.
“다음에 올 때는, 제복은 사양하지.”
“아.”
마샤는 자신의 마탑 제복을 내려다보았다.
“너한테 곤란한가?”
“뭐, 내가 곤란할 건 없지만, 재수가 없으면 네가 다칠지도 몰라서 말이야.”
“흐응, 내 친구가 너무 위험한 곳에 사는 걸 탓해야 하나.”
“제복 같은 건 평생 안 입을 줄 알았더니.”
제레미의 흘리는 말에 마샤의 눈이 빛났다.
“그럼, 너한테 익숙한 드레스를 입고 오면 되려나?”
마샤의 말에 제레미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시선이 마샤의 얼굴에 닿았다.
저 얼굴로, 저 키로, 드레스?
“그냥, 제복 입고 와.”
금세 뒤집혀 버린 제레미의 말에 마샤는 껄껄 웃었다.
잠시 껄끄러웠던 대화는 어느새 여느 동무들처럼 시시콜콜한 대화로 메꾸어지고 있었다.
* * *
한나는 마샤를 다시 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마샤와 헤어지고 딱 반나절 동안 말이다.
“제도 생활이 많이 한가해?”
마샤가 신전에 출근 도장을 찍은 지 5일째 되는 날, 기도실 근무를 끝내고 나온 한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샤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에 마샤가 즉각 답했다.
“왜요. 선생님? 제가 너무 자주 와서 귀찮아요?”
말간 미소와 함께 저렇게 말하면,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지 않은가.
“아……. 아니, 뭐, 귀찮다기보다는…….”
어디서 많이 보던 한량 백수 같은 생활 패턴이 신기할 뿐. 마샤는 정확히 5일째, 신전을 제집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그가 제도에 있어도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한나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조만간 임무 때문에 북쪽으로 가야 해요. 그 전에 많이 봐 두려고 그러지.”
마샤가 생긋 웃으며 말했고, 한나는 그제야 마샤가 뻔질나게 신전에 들락이는 이유를 이해했다.
또 어디론가 일을 하러 가는구나.
“오늘 식단은 닭요리래요.”
“네가 왜 신전 식단을 꿰고 있어?”
저도 모르는 오늘 점심 메뉴를 알고 있는 마샤의 모습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조리사 이모님이 말해 주던데요?”
“왜, 왜……. 신전 조리사가 네 이모님이지?”
“잘생겨서 조카 시켜 준다던데요?”
맙소사. 조리사님.
신전의 메인 조리사는 50대 신관이었는데, 갈 때마다 마샤가 살랑거리며 눈웃음을 날려 댈 때부터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표현했었다.
기어코 조카 타이틀을 따냈구나.
“대단한 친화력이야.”
인정해야 했다. 마샤는 진화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사교성과 잘생긴 외모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엄청난 녀석으로.
“마탑에서 뭘 배운 거야?”
“미인계?”
“그런 걸 가르친다고?!”
설마설마했던 한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순수했던 애를 데려다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마샤가 아무리 예쁘장하니 잘생겼다고 해도, 그런 걸 가르쳐서 뭐에 써먹으려고! 어디 위험한 곳에 스파이로 보내려는 거 아니야?
온갖 추측이 한나의 머릿속에 난무했다.
“풋.”
한나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자, 그것을 지켜보던 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휴, 마샤.”
생각해 보면 당연히 농담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 똘망똘망 빛나는 눈으로 말하면 진실같이 느껴진단 말이지.
한나는 얄미운 마샤를 흘겨보았다.
“선생님. 저 마법사예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뭐……. 마탑도 많은 일을 하니까…….”
“상상력도 풍부하시네.”
상상력이 풍부할 수밖에 없지. 이곳은 누군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세계인 것을.
‘그리고 너흰 내 상상보다 더 엄청난 짓들을 하고 다녔었다고. 스파이 정도야 우습지.’
한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샤가 한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일은 끝난 거죠?”
“응? 아닌데.”
“우리 놀러가요.”
분명 앞에 아니라고 한 것 같은데, 귀가 막힌 건가.
“내가 방금 일 끝난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혹시 대답을 잘못했나.
“성수 만드는 날이 아니면, 딱히 할 거 없지 않아요?”
마샤는 이미 한나의 하루 일과에 대해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성수를 만드는 날은 종일 작업실에 콕 박혀서 작업을 했고, 그게 아니라면 기본 근무인 기도실 당번을 제외하면 따로 하는 일이 없었다.
“오늘은 창고 확인 좀 하려고.”
“음, 창고는 왜요?”
“요즘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내 피땀으로 만든 성수가 줄줄 새고 있는 기분이야.”
“기분 탓 아닐까요.”
한나의 발걸음은 이미 창고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를 졸졸 따르며 마샤가 괜히 일을 만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고. 내 금쪽같은 성수들이 엉엉 울면서 나를 찾지 뭐야.”
“그거, 거짓말이죠.”
생물도 아닌 성수가 엉엉 운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마샤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하지만 한나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 흔들었다.
“아냐.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어. 내가 신관이 돼서인지 요즘 묘하게 감이 좋거든?”
“신관이 된 거랑 감이 무슨 상관이에요.”
“원래 신관은 그런 촉이 발달한 거 아니겠니. 그게 다 신의 계시 같은 거지.”
사실 꿈자리 이야기는 조금 과장된 것은 맞았다. 하지만 한나는 정말로, 찜찜함을 느끼고 있었다.
근래 몰려드는 성수 요청이 과도하게 많은 것이 그 이유였다.
“오호.”
“하여튼, 창고 확인부터 하고 밥은 다음이야.”
마샤는 척척,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한나의 뒤를 따랐다.
한나와 마샤가 지나가는 동안에, 신관과 신도들의 이목이 여러 번 집중됐다. 마샤의 외모 찬양과 더불어 둘의 사이를 가늠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저분은 누군데 요즘 매일같이 보이지?’
‘누군지가 뭐가 중요해. 잘생겼는데. 제복으로 봐선, 마법사 같지?’
‘그런데 한나 신관님이랑은 무슨 사이래?’
‘설마, 애인?’
‘에이, 설마!’
‘뭐가 됐든, 자주 와서 신전 좀 환하게 밝혀 줬으면 좋겠어. 어머, 방금 나랑 눈 마주쳤어!’
들리지 않게 소곤거릴 거면, 조금 더 몰래 하던지.
그리고 ‘에이, 설마!’에 내포된 뜻은 뭐지?
당연히 그럴 리 없다는 듯, 깔깔거리면서 웃는 이유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겠어?
뻔히 들리는 말소리에 신경이 쓰여 한나는 마샤를 힐끗, 바라보았다. 혹시 이런 말들이 거북하진 않은지 살피기 위해서.
“왜요?”
하지만, 마샤는 그 말들을 다 듣고도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전 이런 게 익숙하거든요. 잘생긴 사람의 숙명 아니겠어요?”
으쓱거리는 어깨를 뽑아 버리고 싶을 만큼 능글맞은 모습이었다.
한나는 그럼 그렇지, 마샤가 어지간한 일로 마음에 상처는커녕, 스크래치도 나지 않을 위인이라는 것을 되새겼다.
“그래. 그렇다고 해 두자.”
굳이 이런 문제로 실랑이까지 하기엔 너무 창피하니.
성큼성큼 걷다 보니 창고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창고를 지키던 당번 신관이 물었다.
“성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러 왔어요.”
“아, 네. 문을 열어드리죠.”
그들은 성수를 만드는 한나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별 거부감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사실, 신전의 창고라 해 봐야 성수 말고는 훔쳐갈 것도 없으니 창고 문을 지키는 것은 형식적인 일이었다.
성수를 만드는 한나가 굳이 성수를 훔쳐갈 일도 없을 테니, 그들이 그녀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가자. 마샤.”
열심히 관리하고는 있으나 먼지를 머금은 냄새까지는 감춰지지 않는 창고.
“신전은 정말 청렴하게 돌아가나 보네.”
창고를 휙휙 둘러본 마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잡동사니밖에 보이지 않아서였다.
“여긴 보물창고가 아니고 그냥 창고야.”
“그런 곳에 성수를 보관해요?”
“뭐, 이젠 성수도 구하기 쉬우니까.”
그게 자신의 피땀에서 나온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성수는 더 이상 구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흐음. 저것들이 다 선생님이 만든 거예요?”
마샤의 손가락이 창고 구석에 잔뜩 쌓여진 병 무더기를 가리켰다.
검은 천이 올려져 있었지만, 언뜻 보이는 금빛의 액체가 성수라는 것을 모를 수 없는 자태였다.
“많네요.”
마샤의 감상은 짧았다.
많았다. 실제로 성수는 마샤의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다.
“…….”
한나는 그 많은 성수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원래 이렇게 쌓아 놓을 정도로 많아요?”
당황한 한나와 다르게 마샤는 그저 이 광경이 신기할 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마법사들에게 성수는 아주 귀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신전의 창고에는 몇 년을 써도 풍족할 만큼의 성수가 쌓여 있으니.
“값어치를 위해서 많이 안 푸는 건가요?”
마샤의 말도 이해가 갔다.
이 정도 양이면 귀한 몸값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소수만 세상에 푸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었다.
“네가 보기에도 많지?”
“누가 봐도 많은 양이네요.”
한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설마했지만, 이렇게 많은 성수가 창고에서 먼지를 먹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성수가 필요하다며 자신을 쥐어짜던 신전이 이렇게 많은 성수를 쟁여 놓고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잠깐만.”
“왜 그래요?”
한나는 창고 벽에 걸린 물건 입출 내역이 적힌 장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빠르게 장부에 적힌 성수의 입고 내역만 훑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입고 날짜를 살폈다. 공교롭게도 그 날짜들은 막시온 대신관의 명으로 성수를 만든 날짜들과 일치했다.
그것은 타지의 신전들로 나누어 주는 용도가 아닌, 전투 신관에게 할당되는 성수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하.”
그렇게 급하게 필요한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성수를 이렇게 방치했단 말인가.
“가자. 마샤.”
한나는 더 이상 창고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벌써 끝이에요?”
일이 빨리 끝나면 신나는 것은 마샤였다. 그는 드디어 한나의 일이 끝났나 싶어 신이 났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기운이 빠졌다.
“나 아주 급하게 할 일이 생겼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무슨 일인데요? 제가 도와줄 수는 없어요?”
“응. 나 지금, 상관한테 따지러 가야 하거든.”
“저도 성질이라면 잘 내는데.”
못내 아쉬운 마샤는 한나를 졸졸 따랐지만, 한나의 기세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건 내 싸움이야.”
“와우.”
싸움이라는 표현에 그는 더 이상 따를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선생님은 아주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전 선생님 편이에요.”
“응?”
갑자기 편은 무슨 말인지.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마샤는 신전의 사람도 아니니 편이고 자시고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꼭 이기고 오라고요.”
마샤가 손을 흔들었다.
“그래.”
한나는 투기를 끓어 올리며 막시온 대신관을 찾아 복도를 힘차게 걸었다.
* * *
‘그 많은 성수들이 낭비되는 꼴은 절대 못 봐.’
안 그래도 막시온 대신관은 뱀같이 교활한 사람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성수를 숨겨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더욱 그에 대한 평가가 하락했다.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막시온 대신관을 찾아가던 길에 한나는 핀체프를 만났다.
“핀체프.”
그동안 성수를 따박따박 받아 간 핀체프의 얼굴을 보자 울화가 치밀었다.
어차피 위에서 명령하는 대로 따르는 핀체프가 뭘 알겠냐마는, 그래도 지금 한나에게 막시온 대신관의 끄나풀은 다 똑같이 나쁜 놈으로 보였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이야?”
핀체프는 한나가 왜 아침부터 이렇게 화가 났는지 이유도 모른 채 잔뜩 긴장했다. 적어도 얼굴에 화가 가득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불길한 증조니까.
“너.”
당장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심호흡을 했다.
“너, 성수가 잘 전달되고 있는지 확인해 봤어?”
“성수?”
핀체프는 한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네가 항상 나를 들들 볶아서 가지고 가는 그 급하게 필요하다던 성수들 말이야.”
언제나 우는소리를 하면서 급히 필요하다던 그 성수들이 바로 쓰이고는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성수야 필요한 곳으로 갔겠지.”
너무 당연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한나 역시 당연히 그랬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역시 핀체프는 아는 게 없는 듯했다.
“막시온 대신관님 지금 신전에 계시지?”
“계시긴 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오늘 창고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어.”
핀체프는 한나의 빠른 걸음을 따라 덩달아 뛰다시피 그녀를 따랐다.
뭐가 그리 급한지,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평소 불같은 한나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자신의 상관인 막시온 대신관과 만나게 하는 일은 핀체프에겐 결단코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창고에 먹지가 가득 쌓인 채로 성수가 뒹굴고 있었어.”
“뭐?”
사실 이 말을 들은 핀체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잘못 본 거 아니야? 성수가 남아날 리가 없잖아.”
제도에 있는 신전 곳곳, 사막과 북방 지역으로 성수를 모두 보급하려면 성수가 남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없는 성수를 쥐어짜는 게 핀체프의 주요 업무나 다름없었으니.
“내가 확인했어. 분명히 내가 만든 성수였어. 장부 기록을 보면 막시온 대신관님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우리 사정 뻔히 알면서. 성수를 먼지가 쌓이게 재어 둘 수가 없는 거 알잖아.”
“그러니까 대신관님께 물어봐야지.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이미 한나는 막시온 대신관의 집무실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한나는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핀체프가 다급하게 그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
“왜? 네가 답을 줄 수도 없으니 난 대신관님을 만날 수밖에 없어.”
한나가 대답했다. 말 그대로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일단 내가 물어볼게. 내가 물어보고…….”
퍽, 소리와 함께 핀체프의 몸이 옆으로 치워졌다. 가련한 전투 신관이 갈대처럼 쓰러졌다.
“한나!”
그리 다급하게 불러 봐야, 문은 이미 열렸다.
벌컥.
“……?”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막시온 대신관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놀란 듯 문을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며 문을 연 한나와, 바닥에 쓰러진 제 수하를 보자 그의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지?”
“궁금한 게 있어서 왔습니다. 대신관님. 예의를 차릴 정신이 아닌지라, 무례는 용서하세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나는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응접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아직도 문 앞에 어색하게 굳어 있는 핀체프를 향해 말했다.
“핀체프. 와서 앉을 거 아니면, 넌 문 닫고 나가 줄래?”
그는 대신관의 눈치를 보느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 그, 음.”
지금이라도 튀어서 얽히지 말아야 할까 그는 고민했지만 결국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막시온 대신관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말해 봐. 무슨 일로 이렇게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들이닥친 건지.”
막시온의 물음에 한나는 준비라도 한 듯 바로 답했다.
“제가 오늘 모처럼 착한 일을 하느라 창고에 짐을 옮기는 일을 도왔답니다.”
“칭찬이라도 듣자는 건 아닐 테고.”
댁한테 칭찬 듣게 생겼소?
당연한 소리를 하는 막시온 대신관을 보며 한나는 다시 한번 침착하려고 애써야 했다.
“거기서 경악스러운 것을 보았어요.”
솔직히 이 정도 말하면 어련히 알아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나는 아직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대신관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동안 제 피땀으로 만든 성수들이 먼지를 맞으며 창고에 쌓여 있더군요.”
한나의 거두절미한 본론에 그제야 막시온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조금의 동요는 내비치고 있었다.
“설명해 주시겠어요? 급하게 쓰일 곳이 없다면 차라리 사막이나 변방의 신전들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것 때문에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이군.”
“저한테는 성수가 허투루 낭비되지 않는 게 꽤나 중요한 일이라서요.”
자기가 체력 긁어 가며 만드는 게 아니라서 업신여기는 건지, 한나는 언짢은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되받아쳐 주리라.
“그건 분명 쓰일 곳이 있다네. 아직 때가 아니라 모아 둔 것뿐이지.”
“그 ‘쓰일 곳’이라는 걸 저한테도 공유해 주시죠.”
한나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막시온은 이번에는 어물쩍 넘어갈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톡톡. 그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느리게 두드렸다.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모양새에 한나는 넌지시 입을 뗐다.
“타당한 쓰임이 있다면 저도 더 열심히 만들어 드리죠.”
이 정도 미끼를 던지면 적당히 물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침묵하던 막시온 대신관의 무거운 입이 떨어졌다.
“북부의 마물이 거의 정리됐다는 건 알고 있겠지?”
“사막이 있는 곳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신관과 성기사들이 마물들의 요새를 하나씩 격파하며 사막 중심으로 갔지.”
“그거야……. 제가 모를 수가 없죠.”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이라면, 아니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그들이 사막의 중심에 닿을 때가 다 된 걸로 아는데.
“사막과 인접해 있던 북부의 산에 광맥이 있어.”
“광맥요?”
“마물의 시체가 만들어 낸 광물들이 지층 깊은 곳에 숨겨져 있지.”
“그래서요?”
갑자기 광맥이니 광산이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한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 광물은 순수한 힘의 결정체라네. 지금 드러난 것으로는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조차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어.”
광물……. 광물이라.
한나가 미간을 좁혔다. 뭔가 생각이 날듯 말듯 머릿속이 간질간질거렸다.
“하지만 아직 그곳은 마기가 가득해. 그래서 성수가 필요한 거야. 그곳에서 광물을 캐면서 마기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
“잠시만요. 그런데 그 결정체니 뭐니가 왜 필요하죠?”
없이도 잘살고 있는데, 굳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성수를 대량으로 사용해 가며 얻어야 하는 것인가?
“그건 앞으로 이 세계의 판도를 바꿔 놓을 거야. 우리 신전이 가질 수 있다면 신전의 위세는 황실이나 마탑이 넘볼 수 없게 되겠지.”
“고작 파벌 싸움인가요?”
“고작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그 광물의 힘이 지나치게 유용한데.”
문득, 한나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스쳤다.
사막, 그리고 광물.
“혹시 그 광물의 이름이 뭔지 알고 계신가요.”
“정식 명칭은 없지만 마탑 쪽에서는 갈리아 광석이라고 칭하더군.”
갈리아 광석.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처음, 광맥이니 광석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갈리아 광석…….”
갈라티아 마을 바로 뒤, 사막과의 경계를 만드는 갈리아 산에서 처음 발견된 그 광석은 한나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까마득한 이 세계, [찬란한 악당들의 세계]에서 악당들이 피 터지게 싸우게 되는 원흉이었다.
순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그 광석은 마력, 신력, 검이나 체술에 이르기까지 어떤 힘에든 융합되고, 또 그 힘을 증폭시키는 물질이었다.
그러니 힘을 갈구하는 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할 수밖에.
덕분에 소설에서는 갈리아 광석을 독점하기 위해 황실, 마탑, 신전, 암흑길드까지 힘을 원하는 그 누구라도 갈리아 산으로 향했고, 그곳은 전쟁터가 되었다.
그곳에 제레미, 마샤, 이안, 세자르가 있었던 것이다.
‘뭐야…….’
순간 한나는 소름이 돋았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원작은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니.
“그 광물에 대한 소식이 많이 퍼졌나요?”
“아직은 아주 소수만 알고 있지. 나 역시 그래서 성수의 사용처를 밝히지 못했고.”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큰 파장이 일겠죠?”
“이미 소식 빠른 길드나 마탑 쪽은 움직이고 있어. 솔직히 사막의 마물을 목숨 걸고 토벌한 건 우리 신전인데, 콩고물은 저들이 먹겠다는 꼴이 우습지.”
“……큰 싸움이 일어나진 않을까요.”
원작에서처럼 사람들이 눈이 뒤집혀서 싸우게 되는 걸까.
“우리가 광물에 대한 소유권을 선점하지 못한다면 개판이 되겠지.”
그나마 지금 실정에서 광물의 소유권에 조금이나마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신전이었다.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마물을 토벌했기에 그 광물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니까.
“행여 그 힘이 불순한 무리의 손에 들어간다면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처음부터 사막이나 마물에 대해 관심도 없던 이들이 이제 와서 광물은 가지겠다고 눈을 벌겋게 뜨고 달려드는 것은 참 어이가 없는 경우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적당히 양심에 따라서 ‘신전 너희가 마물을 퇴치했으니 광석은 가져라.’ 하고 결론이 나겠는가?
인간의 욕심은 결국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일이었다.
이 세계로 오기 전 소설의 몇 줄로 보았던 것과 달리, 막상 신관으로서 이 일을 마주하니 아주 분통이 터졌다.
지금 신전에서는 당연히 광물에 대한 소유권이 신전에 귀속될 거라 조금은 기대하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말씀.
‘원작대로라면 그냥 개싸움이나 일어나겠지.’
만약 그렇다면, 막아야 한다. 그곳이 쑥대밭이 되는 것도, 사람들이 미쳐 버리는 것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원작 속 악당들이 아닌걸.’
그런데…….
어차피 누군가는 그곳에서 싸우겠지만 그게 자신과 아이들이 아니라면 굳이 상관이 있을까?
한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 가고 있었다.
“그럼 성수는 어떻게 사용된다는 거죠?”
“신전에서 고용한 광부들이 마기를 해독하는 데 쓰는 거지. 신관들도 그곳에 거의 상주하면서 동태를 살펴야 하고.”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창고에 성수들이 왜 쌓여 있었는지 납득이 됐다.
하지만 고민이 늘어 버렸다. 갈리아 광석이 몹시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흠…….”
“또 무슨 문제가 있나?”
막시온이 물었다.
어차피 광물은 세상에 드러날 운명이었고, 신전을 비롯한 다른 세력들이 움직이는 것도 막을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나의 마음속 한편에 찜찜한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갈리아 산.’
그곳으로 가서 제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었다. 원작에서 전쟁의 서막을 여는 광석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면 더 좋고.
탈탈탈.
한나의 다리가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아무런 말도 없던 핀체프는 조용히 한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오늘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그 광석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르는 관계로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한나?”
핀체프의 부름에 정신없이 덜덜거리던 한나의 다리가 뚝 멈췄다.
“결정했어요.”
대뜸 결정했다는 한마디에 막시온과 핀체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어딜?”
“무슨 소리지?”
그들은 동시에 한나에게 답했다.
“제가 갈리아 산에 다녀올게요.”
“……그대가?”
막시온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제가 만든 성수니, 제가 전달할게요. 저도 그곳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혹시 내가 위험한 곳이라는 말을 빠뜨렸나?”
막시온은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상관없어요.”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야. 그곳엔 아직도 살아 있는 마물이 있어.”
“그렇게 위험한 곳에 광부들은 보내면서요? 제가 사전답사하겠어요.”
이미 마음은 굳혀졌다. 갈라티아 마을에 가서 도울 일이 없다고 해도, 한 번쯤은 그곳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더욱이 전쟁터가 되고 나면 더더욱 갈 수 없는 곳이 될 테니까.
“그곳에 가서 얼마나 위험한지 몸소 체험하고 나면 성수도 더 열심히 만들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아직 불안한 곳이야. 그러다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절대 위험한 일은 없게 할게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 막시온 대신관님의 애제자인 핀체프를 함께 보내는 건 어떨까요?”
“……!”
뜬금없이 거론된 핀체프는 깜짝 놀랐다. 그의 동공이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나는 방긋 웃으며 핀체프를 보았다.
‘네가 가기 싫으면 어쩔 건데?’
핀체프의 밀린 업무 따위,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앞으로 제 성수가 많이 필요하실 것 같은데, 허락해 주시죠.”
막시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도 그럴 게, 한나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앞으로 필요할 성수가 까마득한데, 이런 일로 그녀와 척을 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교황님께는 내가 전하지.”
결국 그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만요! 저는요?”
듣고 있던 핀체프가 벌떡 일어나 막시온에게 물었다. 핀체프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는 갈라티아 마을로 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듣지 않았나? 동행해야지.”
물론, 언제나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진 않았다.
* * *
마법사들의 둥지라고 할 수 있는 마탑의 최상층에는 공중 화원이 있었다. 오로지 마법의 힘으로만 개화한 꽃들은 향기가 없었지만, 자태만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마샤의 눈에는 그 가짜 꽃들이 이질적이었다. 그가 푸른 초원에서 진짜 꽃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까.
“영감 취향은 한결같아.”
“지금 내 욕을 하는 게야?”
백발의 마법사가 화원으로 들어서며 마샤의 혼잣말에 답했다.
“빨리빨리 좀 다니쇼. 영감.”
의자에 늘어져 있던 마샤는 빙그레 웃으며 마탑주를 반겼다.
“고얀 놈. 제도에 왔으면 나한테 먼저 눈도장을 찍어야지.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 온 게야.”
“영감은 어째 더 젊어진 것 같네.”
“못하는 소리가 없지. 네놈도 얼른 버르장머리를 배워야 할 텐데.”
마탑주는 하얀 수염이 더 길었지만, 얼굴만은 생기가 넘쳤다. 세간의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지만, 마샤는 마탑주를 아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본래 그의 성격이 누구든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갈리아 산은 어떻게 됐어?”
마샤가 제도에 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갈리아 산에서의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기 위해 황실과 신전 사이에서 조율이 필요하니,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명령의 매듭을 짓기 위해서였다.
높은 분들이 하는 일이야 그의 관심 밖의 일이니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렇다고 두고만 보려니 감감무소식이 답답해서 그가 달려온 것이었다.
“신전 쪽은 강경하고, 황실은 지금 그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고, 냄새를 맡은 길드들은 움직이고 있고……. 썩 좋은 상태는 아니지.”
마탑주는 자신의 수염을 쓸며 뒷짐을 지었다. 사실 마탑주도 이 상황이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럼 조율이고 뭐고 필요 없는 거 아냐?”
“흠, 그렇다고 시정잡배도 아닌 우리 마탑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지.”
“그놈의 명분이 항상 문제지.”
마샤는 매사 즉흥적이고 제멋대로였지만, 각 세력들이 돌아가는 섭리를 모르지 않았다.
“황궁은 뭐 때문에 이 좋은 기회에 가만히 있겠다는 건데?”
“그곳은 북부가 문제가 아니야. 대공이 황궁을 장악했고, 황제는 황권이 위태롭다 못해 붕괴될 조짐이니.”
“흥, 그놈의 밥그릇 싸움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뭐, 우리로서는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 정세가 어지러울 때 북부에서 잇속을 챙기면 되니까.”
“우리가 나서기도 전에 이미 용병길드며, 암흑길드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어느 세월에.”
마샤는 코웃음을 쳤다. 마탑주의 말대로 잇속을 챙기기엔 마탑의 결단력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차피 필요한 건 명분 아니야?”
어렵게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은 마샤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북부는 지금 무자비한 길드들과 마물로 인해 주민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곳의 치안을 책임져 줄 황실의 군대는 밥그릇 지키려는 황제 때문에 제도로 다 빠졌다.”
마샤는 마치 책이라도 낭독하는 것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흐음.”
마탑주가 반응하자 마샤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정의의 사도인 마탑이 나서야지 않겠어?”
마샤는 고대 마수를 부리기 위해 북부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왔다. 그보다 사막에 근접한 갈라티아 마을에 대해 잘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마샤가 겪은 바, 갈라티아 마을은 정보 빠른 음지의 길드들이 이미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치안이야 말할 것도 없이 엉망.
설상가상 어중간하게 채굴을 하다만 광산 탓에 광석을 흡수한 마물까지 출몰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북부는 지금, 아비규환 그 자체.
“지금 그곳에 입지를 심어 놔야 하지 않겠어? 신전이든 황실이든 오기 전에.”
“꼭 네가 정치를 하는 것 같구나.”
“나야 그냥 무뢰배지. 내 마음대로 사냥할 수 있을 방법이 필요할 뿐이고.”
마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안 그래도 네 성향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걱정인데, 내가 허락할 것 같으냐.”
“이 답답한 마법사들.”
마법사들의 성향이 대개 소극적이면서 원칙주의적이라 마샤의 눈에는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이번에도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시간만 버리고 이득은 다른 곳이 가로챌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판 한번 제대로 흔들어 주겠다니까. 영감은 콩고물이나 챙겨.”
“하여튼, 버르장머리하고는.”
“영감이 그래서 날 좋아하는 거 다 안다고.”
“아주 내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 하는구나.”
“그렇게 머뭇거리다간 다 털려요. 얼른얼른 움직이자고.”
마탑주는 정원의 오색찬란한 꽃들을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딱 그림 나오잖아. 신전의 병력은 사막에, 황궁은 황권 문제로 제도에, 북부 광산은 빈집.”
“말처럼 쉽게 움직일 일이 아니야.”
“뜸들이다 새카맣게 타 버린다고. 아, 모르겠어. 난 하던 대로 마음대로 뛰놀 테니, 영감은 그냥 눈감아 주기만 하라고. 그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
마탑주는 마샤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지금 신전과 황궁이 신경을 쓰지 못할 때가 기회라는 것도.
“일단 일은 저지르고, 명분은 후에 찾자고. 언제나 큰일은 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
마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적색 제복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어차피 진짜 꽃도 아니면서 흙은 왜 또 진짜를 쓴담. 참 변태 같은 취향이야.”
“무릇 마력도 땅의 기운에서 파생되는 것이란다. 물, 불, 흙이나 돌멩이 하나도 다 마력의 근원이 되지.”
“네네. 또 설교 시작하겠네.”
마샤는 옷을 정리하고,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마탑주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마탑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그 소중한 돌멩이는, 내가 챙겨 올 테니, 마음 푹 놓고 있으라고.”
광석을 일컫는 마샤의 말에 마탑주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몸 잘 챙기거라. 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다 다치지 말고.”
“잘난 얼굴은 꼭 지켜보도록 할게. 영감.”
마샤가 마탑주를 지나쳤다. 당당한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그득했다.
“녀석…….”
버릇이 없다고 하나 마샤는 마탑의 큰 전력이었다. 소속이나 세력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 녀석이지만, 자신을 이만큼 성장시켜 준 마탑에 마샤는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마탑주는 앞과 뒤가 다른 음흉한 녀석들보다는 마샤의 투명한 성격이 훨씬 믿음이 갔다.
그러니 아니 예뻐할 수가 있나.
“벨제르.”
“네.”
마탑주의 부름에 그의 뒤로 한 마법사가 나타났다.
“북부로 차출할 인원 좀 꾸려 봐.”
“어느 정도 규모로 말씀입니까?”
“빠르게 움직이고 흩어지기 좋게 열 명 정도. 아, 전투마법 계열로.”
“네.”
마탑주는 모처럼 기쁜 마음으로 정원을 마법 꽃들을 가꾸었다.
“얼굴이라도 더 보고 갈 것이지.”
너무 빠르게 용건만 해결하고 간 제자가 못내 서운하긴 했으나, 끓는 피를 가진 청춘의 시간을 묶어 두기엔 자신의 시간은 너무 값어치가 없었다.
“모쪼록 재미있게 한번 놀아 보거라.”
본인에게 닿지 못할 혼잣말은 늘 그렇듯, 마샤를 응원하고 있었다.
* * *
한편, 마탑의 복도를 가로지르던 마샤의 거침없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춰 섰다. 지금이라도 당장 갈리아 산으로 달려가고 싶은 그였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선생님 얼굴은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그는 마물을 죽이는 것, 마력을 쌓는 것, 더 강해지는 것에 취해 지난 몇 해를 보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한나의 모습에서 그동안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을 느꼈다.
파괴하고, 죽이면서 얻는 피가 돌고 심장이 뛰는 것과 다른 두근거림.
심장이 간질간질한 기분.
그 온도는 제 속의 어떤 것을 불지를 만큼은 아니지만 나른하게 젖어 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사실 그동안 제도에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위험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터는 그리운 얼굴을 보면, 이곳에 안주하고 싶어질까 봐 멀리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제도에 올 때면 항상 제일 먼저 한 일은 꽃을 사는 것이었다.
언제나 선생님을 다시 만날 땐 꽃을 한아름 선물해 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마샤가 제도에서 꽃을 샀던 것이 총 일곱 번이었다.
하지만 그중 여섯 번의 꽃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했다.
‘선생님.’
‘마샤?’
며칠 전, 그 길 한복판에서 선생님을 만난 건 우연이고, 기적이었다. 언제나처럼 만나고자 했던 마음은 신전에 가까워지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은 발길을 돌리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선생님은 그동안 망설였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반가운 사람이었다.
벌써 마탑에 으름장을 놓고 갈라티아 마을로 돌아갔어야 했을 일정이 이만큼 차일피일 미뤄진 것은 온전히 선생님과의 시간이 즐거워서였다.
“이번 일만 끝내고.”
하지만 지난 6년을 구르고 굴렀던 사막에서의 일을 제 손으로 매듭짓는 게 우선이었다. 이런 안락한 기분이나 만끽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행복보다는, 지금이 아니라면 잡을 수 없는 기회가 마샤에겐 더 달콤했다.
저벅저벅.
멈췄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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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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