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5/23)

Chapter 4.

다음 날, 한나는 비품 구매를 위해 아침도 거르고 일찍부터 시장으로 향했다.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밖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 오후 늦게 신전으로 돌아왔는데, 신전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왜 그러고 계세요?”

신전 입구의 기둥을 짚고 있는 세자르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푸석한 입술에 얼굴은 허옇게 떠 있고 눈빛도 탁했다.

아, 눈은 원래 저랬던가.

“……아파.”

“예? 어디가요?”

“배.”

그러고 보니 세자르는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뭐 잘못 드셨어요? 아니면 화장실?”

“…….”

세자르는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정말 몸이 좋지 않은지 기둥을 붙잡고 주륵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뭘 드셨길래 그래요? 꼭 바다에서 떠내려온 해파리 같네.”

“식당……. 밥.”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세자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를 부를까요?”

“이미……. 왔다 갔……. 어.”

평소와 다른 그 모습이 안쓰럽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의사도 왔다 간 마당에 자신이 더 해 줄 것은 없었다.

“저런……. 조심하시지. 그럼 쾌유를 빌어요.”

한나는 아예 바닥을 기고 있는 세자르를 쏙하고 피했다. 혹시 옮는 병이 아닐까 싶어 한나는 세자르를 아주 멀리 빙 둘러 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세자르는 화를 낼 힘도 없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그저 아픈 환자를 두고 가는 발걸음치고는 경쾌하게 떠나는 한나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세상에. 얘들아 왜 이래?”

“서언생님…….”

한나가 보육원 생활관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도 방금 본 세자르처럼 배를 움켜쥐고서.

“너희 신전 밥 먹었어?”

분명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따로 해 놓고 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으…… 그러게 맛없어도 선생님 밥 먹자니까.”

데굴데굴 옆에서 굴러온 제레미가 하는 말에 한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

‘너희 맛없어서 내 밥 안 먹고 신전 밥 먹으러 갔니?’라는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요즘 신전 밥이 좋아져서…….”

마샤는 대답을 촉구하는 한나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했다.

“근데 넌 어떻게 멀쩡해?”

그런데 이 와중에도 이안은 멀쩡히 책을 보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었을 텐데 혼자 멀쩡한 것이 신기해 한나가 이안에게 물었다.

“전 선생님 밥이 입맛에 맞아서요.”

“아…… 그래. 고맙다.”

그에 한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밥 맛없었구나…….’

그동안 너무 잘들 먹어서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착한 아이들이 자신을 생각해서 맛없다는 소리도 못 하고 억지로 요리를 먹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려 왔다.

“브로콜리……. 싫어…….”

제레미가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한나는 오늘 만든 음식 모든 것에 브로콜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떨이라는 말에 브로콜리를 너무 많이 구매했었다. 덕분에 얼른 먹어 버리려고 모든 음식에 넣었는데, 그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에고. 이를 어쩌니.”

입술까지 보랏빛으로 변해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똥꼬가 찢어질 것 같아요.”

“제레미…….”

“더러워…….”

마샤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제레미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어쩐다니. 우리 귀한 아가들이.”

한나의 말에 이안은 저게 어딜 봐서 ‘아가들’이냐는 비아냥을 했지만 한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파서 힘겨워하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 * *

“휴, 정말 내가 못살아.”

한나는 시장에서 사 온 물건과 식재료를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신전은 음식 하나 제대로 관리 못 해서 집단 식중독을 일으켜?

그나마 의사가 다녀가서 아이들도 약을 먹은 게 다행이긴 했지만, 뭘 먹기만 해도 아래로 쏟아 내니 음식은커녕 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꿀물이라도 만들어 가야지.”

한나는 물을 끓였다.

“꿀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찬장을 열어 꿀을 찾았다.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한나는 꿀을 듬뿍 떠 넣었다.

“이거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그리고 꿀을 넣은 물을 휘휘 저었다.

“음. 찻잎을 넣어서 향도 좋게 만들어 볼까.”

열린 찬장에 줄을 서 있는 찻잎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향이 있으면 더 잘 먹겠지.”

찻잎이 담긴 병들의 뚜껑을 열어 이것저것 향을 맡아 보고 적당히 조합해 넣었다.

“오오. 맛이 괜찮은데?”

완성된 꿀차는 생각보다 향도 맛도 괜찮았다.

“좀 더 만들어 갈까.”

아이들뿐만 아니라 신전 밥을 먹은 모두가 장염으로 고생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입구에서 보았던 세자르의 다 죽어 가던 얼굴이 아른거리기도 하고.

결국 한나는 큰 냄비에 물을 또 끓였다.

* * *

“이거 마시고 배에 이불 꼭 덮고 자는 거야. 알겠지?”

“네에.”

“네. 으어…….”

한나는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꿀물을 전했다. 배 위로 도톰한 이불까지 얹어 주고서야 한나는 아이들의 방에서 나왔다.

그 후 부엌으로 돌아가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신전으로 향했다.

“이거, 마셔요.”

집무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세자르가 한나를 보고 버석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뭐야.”

“꿀물이에요. 이거라도 마셔 봐요. 밥도 못 먹고 있을 거 아니에요.”

“……놓고 가.”

대꾸할 기운조차 없는지 세자르가 손을 휘휘 저었다. 평소보다 손의 위치가 미세하게 낮은 걸 보니 팔을 들 힘도 없나 보다.

한나는 내심 감탄했다. 저 건방진 손짓마저 짠해질 수가 있다니. 환자라는 타이틀은 대단했다.

“주전자 두고 갈 테니 오는 사람들 먹여요.”

한나는 컵을 더 꺼내 테이블 위에 주르륵 늘어놓았다. 소파 너머로 까딱거리는 손이 보였다.

원래 기운 없던 사람이 아파지면 저렇게 되는구나.

그는 바닥에 떨어진 빨랫감처럼 축 처져 있었다. 그 후 한나는 꿀물을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배탈 난 분들에게 전해 주세요.”

그나마 멀쩡한 식당 당번 신관에게 꿀물 주전자를 넘겼다. 사람들이 꿀물을 먹고 조금이나마 기력을 찾길 바라며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가는 동안 커티스와 몇몇 신관을 마주쳤는데 그들의 상황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평소 항상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다니던 커티스까지 복도 벽을 짚으며 엉금엉금 질질질, 다리를 끌고 가는 모습이 이 사태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네.”

집단 식중독의 위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하루였다.

“미음이라도 끓여야겠네.”

한나는 이 여파가 며칠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한나가 집무실을 나간 뒤에도 세자르는 여전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자세를 바꾸면 요동치는 배 때문에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탈수 현상 때문에 입술이 찢어질 듯 버석거리자, 세자르는 어쩔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나가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컵을 집어 들었다.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새가 물을 쪼아먹듯 물을 호로록 흡입했다. 꿀물은 털이 바짝 설 정도로 지독하게 달았다.

반나절 동안 입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미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꿀꺽. 꿀꺽.

세자르의 식도를 타고 달달한 꿀물이 계속해서 들어갔다.

* * *

“멀쩡하네.”

“네. 세자르 님도 멀쩡하시고 말입니다.”

커티스는 서류를 내밀며 일부러 ‘멀쩡’이란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톡. 톡.

세자르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 가볍게 부딪혔다.

“왜 멀쩡하지?”

“멀쩡해도 문제입니까?”

커티스는 3일은 꼼짝없이 죽은 몸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이 기이한 현상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하루아침에 신전 사람들이 거의 다 나았다 이거지.”

잠시 생각하던 세자르의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너.”

“네.”

“그 물 먹었어?”

“물이요?”

“꿀물.”

세자르의 말에 커티스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골골거리며 기어다니던 자신에게 모이세이가 식당에서 받아온 꿀물이라며 물을 줘서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식당에서 나눠 준 꿀물을 먹었죠.”

“꿀물…….”

지난밤 세자르는 한나가 남기고 간 꿀물을 깡그리 다 마셨었다. 누굴 나눠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 달달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독기에 절어 있는 것 같던 몸이 시원해지면서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눈이 뒤집혀 몽땅 마셨던 것이었다.

“이상하지 않아? 보육원 선생이 만들어서 준 물인데.”

“알아볼까요?”

커티스는 단박에 세자르의 뜻을 읽었다. 그는 굳이 세자르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속내를 가늠할 수 있는 눈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보육원 선생이 준 꿀물을 나눠 마신 후 신관들이 모두 말끔하게 치유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세자르는 자세한 설명이나 지시 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얼른 나가서 일하라는 의미였다.

* * *

“네?”

한나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신전의 사람들이 그 약수를 먹고 다 나았습니다.”

“약수요?”

그거 그냥 꿀물인데.

지금 커티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한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약수의 정체가 뭡니까?”

“맑은 코코스 산의 정기가 담긴 물과 사랑이 담긴 꿀 한 스푼……?”

“그것만?”

“허브티도 조금……?”

커티스는 어제 자신이 만들어 준 꿀물을 먹은 사람들이 완치가 되었다는 소식을 한나에게 전했고, 그 약수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한나는 그저 꿀을 탄 물이라는 말밖에 해 줄 말이 없었다.

“의사의 말로는 달리 고칠 방도도 없고 3일을 앓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끔히 나을 수가 있죠?”

“맑은 산의 정기 덕분일까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걸 묻는 커티스에게 한나는 달리 답을 내어 줄 수가 없었다.

그때, 둘의 대화를 듣던 제레미가 끼어들어 말했다.

“제 다친 다리도 선생님이 약수로 치료해 줬어요!”

그 말에 커티스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온천물과 약초요?”

“약초에 대해 해박하셨습니까?”

커티스는 이 일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약초를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것에 재능이 있다면 신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커티스는 보통 하루 일과를 분 단위로 쪼개서 산다고 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는데, 한나에게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부터 아주 큰 관심을 표하는 것이었다.

“전혀 모르는데요.”

한나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약초는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향이 좋아서 넣은 건데요.”

“흠.”

커티스는 턱을 문지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혹시, 전에 신력 검사를 해 본 적 있으십니까?”

“네? 아뇨.”

한나가 빠르게 부정했다. 그녀는 신전에서 자랐지만, 이 부패한 신전이 신력 검사에 필요한 장비 따위를 구매하는 일이 없었기에 신력 검사라고는 소문으로만 들었다.

“제 촉이 말하건대, 한나 선생님껜 뭔가 있습니다.”

그 촉이 얼마나 믿을 만하길래 저렇게 상기된 표정을 짓는 거지.

“……그런가요.”

하지만 한나는 그의 말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 다음에 중앙 신전에 갈 일이 있으면 받아 볼게요.”

“여기로 바로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지는…….”

한나가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한나는 자신에게 신력이니, 성력이니 하는 것이 있다 해도 한 톨도 관심이 없었다.

정말 운 좋게 신력이 있어서 신관이 된다고 치자.

악당들이 도래하는 미래의 세상에서 알량한 신력이 있다는 것은 복날 삼계탕집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처럼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 선택이다.

“전 지금 생활에 만족해서요.”

“하지만…….”

그런 한나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커티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다.

“다음에 중앙 신전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받아 볼게요.”

“선생님의 마음이 그렇다면 더 강요할 수 없지만…….”

그의 눈에 아쉬움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지금 이 세계에는 황궁에 취직한 철밥통보다 존경받는 것이 신관이었다.

신전의 위세가 날로 대단해져 황궁조차 눈치를 보는 마당에, 신전의 권력을 등에 업은 신관들은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신력을 가진 선택받은 사람들만 될 수 있다는 특별함이 그 자리의 가치를 더했다.

하지만 나중에 원작에서 뻑하면 죽어 나가는 엑스트라의 대부분은 바로 그 신관들이란 걸 한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신력 검사를 받아서 자진해서 신관이 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럼, 전 이제 아이들과 나가 볼까 하는데…….”

딱히 떠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커티스의 모습에 한나가 말했다.

“좀……. 비켜 주시죠.”

질척한 아쉬움이 뚝뚝 흐르는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한나는 열심히 시선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한나는 기어코 커티스를 밀어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생활관을 나섰다. 뒤통수로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선생님. 선생님 신관 되는 거예요?”

밖으로 나오자, 마사갸 한나의 치맛자락을 당기며 물었다. 한나는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을 묶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선생님은 너희 선생님이 좋아. 그리고 커티스 신관님이 오해하신 거야.”

“하지만 선생님이 사람들을 낫게 한 건 맞는걸요!”

제레미는 자신의 선생님이 특별하다는 것에 흥분해 있었다.

“원래 배탈은 하루 잘 자고 나면 나아.”

그리고 제레미와는 반대로 이안은 그런 한나가 이해되지 않았다. 남들은 신관이 되려고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신력을 쥐어짜 내서라도 신전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선생님은 특이해요.”

이안이 한나에게 말했다.

“얘들아,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다.”

꽃길은 못 가도 진흙탕 길을 발 벗고 들어설 필요는 없지. 암암.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사 달관한 사람처럼 말하시네요.”

“하하.”

그게 아니라 독자 버프란다.

“오늘은 야외수업이다!”

야외수업이란 한나가 아이들을 동산에 풀어놓고 여유를 즐기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상하게 몸이 노곤하단 말이야.”

어젯밤 이상하게 피곤이 몰려와 쓰러지듯 잠들었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흠.”

한나는 나무 밑에 앉아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돌리고 뒤집어 보았다.

“에이, 설마.”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의 몸이라고 해도 이렇게 아무나 신력이 있을까. 커티스의 짐작이 틀렸을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 * *

“검사를 안 받는다고?”

“뭘 또 그런 게 소문까지 났을까요.”

저녁 식사 시간, 아이들과 보육원에서 저녁을 먹으려던 차에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이 난입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식사하세요?”

“어제 일로 신전 밥은 못 믿겠어.”

“…….”

고기찜을 접시에 담고 있던 한나는 세자르의 말에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행동을 멈췄다.

“음…… 몸을 끔찍하게 아끼시는군요…….”

“워낙 귀한 몸이라.”

원형의 식탁, 아이들 사이에 앉은 세자르는 목에 수건까지 두르고 있었다.

“참…….”

밥 한 끼 먹겠다는데 치사하게 쫓아낼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먹어요.”

한나가 고기찜을 식탁 위에 얹자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죽을 먹어야 하나 했는데 너희가 너무 쌩쌩해서 기운 돋우라고 고기로 했어.”

“고기 좋아요!”

“죽 완전 싫어! 아까 낮에 당근죽이라더니 브로콜리 넣은 거 다 알아요.”

그 말에 한나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어쨌거나 브로콜리는 처리해야 했기에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갈아서 넣었는데, 제레미의 미각이 제법 날카로웠다.

“반찬 투정하면 안 돼.”

세자르가 제레미에게 말했다.

너님은 식당 투정이나 하지 마세요.

한나는 앞치마를 벗고 아이들 사이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헤헤, 고기, 고기!”

“잘 먹지.”

얼씨구. 저 자연스러운 인사를 보라.

“설마 내일도 여기서 먹을 건 아니죠?”

“신전 식당 소독과 교육이 완료될 때까진 여길 이용할 생각인데?”

“…….”

겨우 입 하나 느는 건데 왜 이렇게 귀찮음이 폭발하는 거지.

“공짜는 안 됩니다.”

“예산 5프로?”

솔깃할 뻔했다. 하지만 돈으로 때우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심지어 자기 돈도 아니고 신전 예산으로 생색이라니!

“요리할 때 같이하세요.”

“요리?”

세자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자기 먹을 음식은 스스로 해야죠.”

아이들은 음식을 오물거리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선생님. 예산이 나은 것 같은데요?”

한나의 잘못된 노선을 이안이 지적했다.

“나도 지금 말 내뱉고 후회 중이긴 해.”

한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이안의 말에 동조했다.

“좋아.”

“네?”

아니, 좋다니.

10프로라거나, 7프로라거나 좀 더 성의껏 협상을 하시죠.

이러면 안 되는데?

한나는 당황스러웠다. 곤란하면서도 이미 내뱉은 말이 있어서 번복하기도 껄끄러웠다.

정말 밥 한 끼 가지고 거래를 하는 것도 웃기기도 했고.

“그러게 그냥 예산 받으라니까.”

그런 한나를 보며 이안과 아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좀 더 빨리 말려 주지 그랬어.

그렇게 한나는 요리 보조를 획득했다.

“슨슨님!”

제레미가 입안 가득 고기를 넣은 채 한나를 불렀다.

“응? 제레미?”

“모이시이 님이 오늘 츤츤해 즈스어!”

“모이세이 님이 칭찬을 해 줬다고?”

엉망인 발음을 귀신같이 알아듣는 한나였다.

“다 삼키고 말해.”

객식구인 세자르가 음식을 튀기며 말하는 제레미에게 말했다.

꿀꺽.

제레미는 입안에 있던 것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이렇게! 팍팍! 찌르기도 했어요!”

제레미가 식탁을 팡팡 치자 세자르와 이안이 정색했다.

“식탁 치는 거 아니야.”

세자르가 또 제레미에게 말했다.

“그리고 내일은 이렇게! 베기도 한 대요!”

제레미가 의자에서 내려와 검으로 베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세자르가 또 말했다.

“먹다가 일어서는 거 아니야.”

그에 제레미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꼰대.”

세자르의 미간에 줄이 생겼다.

“이 콩만 한 녀석이.”

“왜 우리 식탁에 와서 이래라저래라 해요?”

“이래라저래라? 내가 여기 신전 대신관인데.”

“지금 어린애한테 계급장으로 거들먹거리는 거예요?”

“하?”

그 후 제레미와 세자르는 계속해서 의미 없는 말싸움을 이어 갔다. 이안은 밥맛이 떨어졌다며 조용히 입을 닦았다. 마샤는 그 모습을 보며 깔깔거렸다.

한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그냥 다 밥이나 먹어 줬으면.

* * *

“지금 뭘 두르신 건가요.”

한나는 주방에서 아주 망측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 프릴 달린 앞치마는 제 건데요?”

모처럼 기분을 내겠다고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꽃무늬 분홍 앞치마를 개시했는데 그것이 세자르의 목에 곱게 걸려 있었다.

“앞치마에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보통 남자들은 저런 샤랄라한 것들을 기피하지 않던가?

“뭐,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한나는 모르겠지만, 사실 세자르는 물건은 제 쓸모만 다하면 된다는 주의였다.

그가 신관복을 입고 살아서 망정이었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패션테러리스트를 면치 못할 그런 성향이었다.

“대충하자고. 대충.”

결국 한나는 새로 산 앞치마를 포기하고 오래 입어 낡은 앞치마를 들어 목에 걸쳤다.

“정말 요리를 하시려고요?”

“그거 뭐 어려울까.”

“오……. 아주 자신만만하시네요.”

한나는 손에 물 한번 묻혀 본 적 없어 보이는 세자르가 과연 요리를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사실 그가 실수를 하면 타박할 수 있을 상황이 조금 신이 났다.

“뭐하면 돼?”

“감자부터 스튜용으로 다듬어 주실래요?”

“어떻게?”

이것 보라! 기본적인 것부터 막히지 않는가.

“씻고 껍질을 벗겨서 네모나게 썰어요.”

“흠.”

세자르는 한나의 설명대로 천천히 감자를 씻기 시작했다. 한나는 그런 세자르를 지켜보았다.

프릴 앞치마를 입고 좁은 부엌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감자를 씻는 세자르의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박박 씻어요. 우리 이안이 감자 제대로 안 씻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감자가 맛없다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안 씻는 걸 싫어하는 건 뭐야?”

“그런 게 있어요. 깨끗이 하라면 깨끗이 해요.”

“알겠어.”

세자르는 나름 한나의 말을 고분고분 들으며 정성껏 감자를 씻어 내고, 칼질을 시작했다.

“세상에, 그렇게 알맹이까지 다 썰어 내면 뭘 먹어요?”

“이게 최선이야.”

칼질은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그거 다 우리가 직접 키운 감자인데! 에고, 아까워서 어째!”

속이 탔지만 한나는 끝까지 세자르가 마무리하도록 지켜보았다. 물론 입으로는 할머니처럼 잔소리를 끝도 없이 쏟아 내고 있었지만.

“지금 시간이면 벌써 스튜 끓이기 시작했어야 하는 거 아시죠?”

사실 그냥 이렇게 잔소리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항상 고고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세자르가 아등바등 감자를 깎는 모습이라니.

한나가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되나?”

“양이 반으로 줄었네요.”

세자르는 감자를 내밀며 내심 작은 칭찬을 바랐다. 그는 원래 어떤 일을 해도 칭송을 받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한나의 무뚝뚝한 반응에 세자르는 시무룩해졌다.

“이제 뭘 하면 되지?”

하지만 세자르는 꾹 참고 다음 일거리를 요구했다.

“이번엔 당근을 썰어 볼까요?”

“내가 감자 썰 동안 뭐했어?”

“저요? 전 세자르 님 감시했죠.”

“…….”

세자르는 어이없어 말없이 한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제야 한나는 자신이 너무 그를 놀리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할게요.”

그 후로도 한나는 세자르의 형편없는 실력에 채소를 다듬다가도 그의 옆으로 와 지적을 했다.

“아니! 정확히 한 입 거리로! 그게 안 되나요? 우리 아이들 입도 작은데 그렇게 크면 어떡해요!”

몇 번째인지 모를 한나의 지적에 세자르는 결국 참을성이 바닥나 버렸다. 툭. 당근이 세자르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냥 예산으로 하지.”

참다못한 세자르는 역시 돈으로 때우고자 마음을 먹었다.

“네? 대신관님께서 왜 한 입으로 두말을 하세요?”

하지만 한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세자르를 구박하는 이 순간순간이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즐거움은 절대 돈으로 사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

그렇게 세자르는 끝도 없는 한나의 지적과 놀림을 받으며 하루하루 칼질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 * *

“허브차 끓여 줘.”

“직접 끓여 드세요.”

“몸이 안 좋아.”

“멀쩡하시잖아요.”

한나는 이 남자가 너무 귀찮았다.

“도대체 왜 자꾸 저한테 뭘 해 달라는 건가요?”

매일같이 세자르에게 음식을 해 달라, 차를 끓여 달라, 하다못해 냉수에 나뭇잎을 띄워 달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전 대신관님 개인 하녀 같은 거 아니거든요?”

“손맛이 좋은 걸 어떡해.”

세자르가 대답했다. 지금 한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분통이 터지는 말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매일 식충이처럼 밥을 얻어먹는 것도 모자라서 뭘 자꾸 이거 달라, 저거 달라!”

그동안 아이들이 있어서 꾹꾹 눌러 참았던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식충이라니……. 말이 심하네.”

세자르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왜 자꾸 귀찮게 하세요!”

그렇게 화를 내던 중, 두 사람 외에 다른 목소리가 개입했다.

“선생님, 계십니까?”

“……아오! 이번엔 또 누구야!”

한나는 앙칼지게 부엌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모이세이 님이셨군요.”

성난 살쾡이처럼 까칠하던 한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오늘도 훈련 힘드셨죠? 어떻게, 시원한 냉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한나가 사뿐사뿐 모이세이에게 다가가 웃었다.

“아, 귀찮지 않으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모이세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세자르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분이라면 몰라도 모이세이 님께는 못 드릴 이유가 없죠.”

사실 한나를 귀찮게 하는 사람은 세자르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건 이후, 신전의 신관이고 성기사고 할 것 없이 틈만 나면 보육원 앞을 지나다니며 물 한잔을 달라고 하기 일쑤였다.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차를 마시면 이상하게 기운이 난다는 소문이 나서 많이 귀찮으실 텐데.”

“호호. 손목이 부러져도 모이세이 님께 차 한잔 못 드릴까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거리며 웃는 한나를 시큰둥한 눈으로 보던 세자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대할 때와 온도 차가 커도 너무 큰 게 티가 나서였다.

한나는 재빨리 냉차를 만들어 모이세이에게 가져갔다. 그에 세자르가 한나에게 물었다.

“왜 모이세이에겐 그렇게 친절하지?”

“네?”

“왜 저 자식한테만 손목이 부서져도 차를 준다는 거냐고.”

단단히 꼬인 팔짱만큼 세자르의 기분도 배배 꼬여 있었다.

“그야…….”

한나가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는 거냐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우리 제레미의 스승님이시니까요.”

“제레미?”

그제야 세자르는 밥상머리에서 매일 검술 얘기를 하던 꼬맹이가 생각났다. 그 꼬맹이의 스승이 성기사 중 한 명이란 걸 기억해 낸 세자르가 모이세이에게 언짢은 눈빛으로 말했다.

“너, 이중 취업이야?”

“겨우 아이 하나 가르치는 게 취업까지 됩니까?”

모이세는 황당한 얼굴로 답했다.

“그거 근로 계약 위반이야.”

“성기사는 그런 계약 없습니다만…….”

사실 신관도 겸업 금지 같은 계약 조항은 없었다.

“변두리 신전이라 할 일도 없고 한가한가 봐?”

“예?”

“아니, 왜 그렇게 심술을 부리세요?”

틱틱대는 세자르를 지켜보던 한나가 둘 사이를 몸으로 막아섰다.

“자요!”

그러곤 모이세이에게 전한 것과 같은 냉차를 세자르에게 내밀었다. 세자르가 한나의 손에 들린 잔을 쳐다보았다.

“안 마셔요?”

한나의 손이 거두어지려는 찰나, 세자르가 잽싸게 잔을 잡아챘다. 그러곤 꿀꺽꿀꺽 냉차를 마셨다.

냉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이상하게 기분이 평화로워졌다. 분명 방금까지 짜증이 났던 것 같은데.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실 즈음엔 거의 자애의 여신이 된 것처럼 인자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 아닌가?

세자르는 한 번에 차를 털어 마시고, 마치 체증환자가 막힌 속이 뚫린 것처럼 환하고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비어 있는 잔을 그대로 들고서 그는 주방 입구로 걸어갔다.

“그럼 수고해.”

언제 예민한 고슴도치처럼 굴었냐는 듯 순한 미소를 지으며 모이세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탈탈.

그러곤 고개를 한껏 들어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물잔의 물방울을 혀에 털어 내며 복도로 향했다.

“…….”

“…….”

한나는 멀어지는 세자르의 뒷모습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저 인간,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정신을 차린 한나가 모이세이를 바라보았고, 모이세이 역시 한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세자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좋은 상사를 두셨네요.”

“……예.”

딱히 해 줄 만한 위로의 말이 없어 내뱉은 말이었다.

“아니, 근데 정말 저 물 하나 먹겠다고 그 주접을 떨고 간 거야?”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아 그리고 자꾸 잔 가져가지 말라고요!”

그러나 이미 멀어진 세자르에게 들리지 않는 외침이었다.

* * *

“또 물잔 가져오셨습니까.”

“여기에 물 부어 먹을 거야.”

“세자르 님이 그러시니까 선생님이 저흴 안 반기는 거 아닙니까.”

커티스의 말에 세자르는 코웃음을 쳤다.

“너도 환영받고 싶으면 애들 중 누구라도 잡고 스승 노릇이나 해.”

“예?”

무슨 말인지 알 리 없는 커티스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세자르가 결재한 서류들을 챙겼다.

“그나저나 정말 신력 검사는 안 받는다고 하십니까?”

커티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에겐 권능이 있었다. 치유의 힘이 있는 신력이라면 마땅히 신전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별수 있나.”

“하지만……. 신전에 보고는 따로 안 합니까?”

“뭐. 여기 보육원 선생이 꿀물을 맛깔나게 만든다고?”

“아니, 그……. 하.”

세자르의 반응에 커티스는 그가 이 일을 제대로 윗선에 보고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치유 계열 능력은 희귀합니다.”

“내가 견습 신관으로 보이나?”

그 정도도 모를까 봐.

“이런 일은 신고를 하는 게 규율입니다.”

세자르는 그의 잔소리가 지겹다는 듯 턱을 괴고 손을 흔들었다. 얼른 퇴장해 달라는 의미였다.

“나중에 알려지고서 화나 입지 마십시오.”

“난 네가 더 떠들다가 화를 입지 않길 바라.”

세자르의 말에 커티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원래 커티스에게 세자르는 다루기 쉬운 상사였다.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이이기도 했고, 그의 성격이 유야무야한 편이기 때문에 신전과 커티스의 말이라면 대부분 수용했다.

무엇보다 그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맡은 바 임무는 말끔하게 처리하는 타입이었다.

느슨한 것 같은 일 처리 사이에도 날카로운 혜안으로 어려운 일을 쉽게 풀어내는 모습을 보자면 그는 천재였다.

귀찮은 일을 간소화하기 위해 극도로 발달된 지능을 가진 천재.

그런 그가 신전에 보고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어렵게 만드는 이 상황은 커티스에게 상당히 낯선 모습이라고 볼 수 있었다.

“뭐. 생각이 있으시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신전의 규율보다 세자르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이 커티스에겐 더 크다는 것이었다.

커티스가 집무실을 나서자, 나른하게 책상에 기대어 있던 세자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창가로 다가갔다.

세자르의 집무실 창문은 커튼으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그중 하나를 손으로 걷어 낸 세자르가 쏟아지는 빛줄기 아래에서 푸른 눈의 시선을 옮겼다.

초록의 동산.

아이들과 선생.

치료계열의 신력이 있다면 선생은 저 아이들과 헤어질 운명이 될 것이다. 신이 내린 권능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기어코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

아이들과 한나를 내려다보던 세자르는 보기 드물게 오래 눈부심을 감수하며 그 자리를 지켰다.

부디 신의 시선이 저들을 비껴가길, 아이들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길 기도하면서.

* * *

한나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인생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아이들과의 추억으로 채우자 금방 풍성한 여러 권의 책이 되었다.

바쁘게 달려온 그들은 세 번의 여름을 지나 네 번째 여름의 초입에 닿아 있었다.

“아이들은요?”

“밖에.”

식탁보를 정리하던 세자르가 창밖을 눈짓하며 말했다.

세자르는 그 후 삼 년 동안 가끔씩 보육원에서 끼니를 때웠다. 그가 했던 말처럼 한나의 보조를 하기도 했고, 직접 요리를 하다가 아이들을 쫄쫄 굶길 뻔한 적도 있었다.

그의 말에 수프를 담던 한나가 밖을 바라보았다.

“쟤 또 타조 타고 있네!”

“저게 어딜 봐서 타조야. 잘 봐. 쟨 새도 아니라고.”

일전에 이런 대화를 반대로 말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나는 요즘 꼬꼬를 타조라고 칭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멜론 크기였던 꼬꼬가 일 년 사이에 아이들의 덩치와 맞먹게 자랐기 때문이었다.

검은색 윤기 나는 깃털로 덮인 몸, 펼치면 성인의 키보다 큰 날개, 튼실한 다리, 뾰족한 발톱과 날카로운 부리는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특히 어릴 땐 말랑했던 뿔은 붉은색의 단단한 뿔이 되었는데, 매일같이 봐서 그렇지 처음 꼬꼬를 본다면 누구나 몸을 굳힐 만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그런 꼬꼬를 마샤가 말을 타듯 올라타고 달리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기절할 만한 풍경이었지만 그것은 보육원의 일상이었다.

“그럼 저 큰 걸 닭이라고 해요?”

“그냥 인정해. 쟨 닭도 타조도 아니야.”

한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창을 열었다.

“얘들아! 밥 먹고 놀자!”

우렁찬 한나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어기적어기적 건물로 들어왔다.

“휴. 쟨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렇게 크는 거지.”

이제 닭장도 아닌 전용 우리에 꼬꼬를 넣고 있는 마샤를 보며 한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용 우리도 솔직히 말이 전용 우리지, 꼬꼬가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꼬꼬가 마샤를 부모처럼 인식하고 있어서인지 보육원을 떠나는 일은 없었다.

세자르는 이제 익숙하게 자기의 자리에 앉아 속이 복잡한 한나를 바라보았다.

“저런 걸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해.”

“꼬꼬요? 어디서요?”

꼬꼬의 정체는 이제 신전 모두의 궁금증이 되어 있었다.

“신전 어디 박혀 있던 책에서 본 고대 마수 같은 거?”

그 어디 박혀 있던 책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은 감히 만져 볼 수도 없는 고서이긴 했지만.

“참 나. 고대 마수가 요즘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한나가 혀를 쳤다. 고대 마수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마수와 달랐다.

지금 남아 있는 마수는 그저 짐승 수준의 괴물들뿐이었지만, 전설 속 고대 마수는 지능이 있고 마법을 사용하는 고등생물이었다.

“무엇보다 쟨 안 똑똑한걸요.”

“그건 그렇지.”

세자르가 빠르게 인정했다.

“꼬꼬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세이 님!”

다 된 밥상에 모이세이가 나타났다. 그에 한나는 자연스럽게 찬장에서 접시를 하나 더 꺼냈다.

모이세이는 가끔 훈련과 제레미 수업 시간이 애매하게 겹치면 보육원에서 함께 식사를 했기에 이런 일상이 익숙했다.

“넌 맨날 여기서 밥 먹는 것 같다?”

세자르가 빈정거리듯 모이세이에게 말했다.

“어지간해선 집무실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이시는 대신관님도 여기까지 와 계신걸요.”

모이세이가 웃으며 답했다. 그 말에 세자르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맞아요. 꼬꼬는 알로 발견됐는데 부화했어요.”

“고대 마수가 부화하려면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마력을 퍼부어 부화시켜 줄 성체는 모두 멸종했으니, 어지간한 대마법사들이 몇 명이 매달려도 알에서 부화시키는 건 불가능일 텐데, 고대 마수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럼 그냥 마수겠네.”

세자르가 모이세이의 말에 덧붙였다.

“쟤가 어딜 봐서! 사람이나 해치고 다니는 마수예요!”

마수라기엔 너무 착한 아이인데.

“흐음.”

세자르의 나른한 시선이 꼬꼬에게 닿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

아이들이 뛰어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고 있던 꼬꼬의 검은 눈동자가 세자르에게 닿았다.

“선생님!”

“손 씻고 왔어요!”

“또 여기 계시네.”

아이들이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고, 모이세이와 세자르를 발견하고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이안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세자르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좋은 건 나눠 먹는 거랬다.”

“그러시겠죠.”

이안은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온 듯했다. 특히 세자르는 특유의 꼰대 기질로 아이들과 잦은 마찰이 있었다.

시끌벅적한 저녁 시간이 시작됐다.

“제레미는 요즘 검술 많이 늘었어?”

“당연한 말씀을!”

“제레미는 재능이 있습니다.”

모이세이가 제레미의 대답에 말을 얹었다.

“이러다 정말 기사님 되는 거 아니야?”

한나는 제레미의 미래를 상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암흑가 보스보다는 기사님이 훨씬 낫지. 암암.

“그래서 말인데, 제레미가 기사 학교에 가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네?”

“기사 학교?”

모이세이의 말에 한나와 제레미, 그리고 아이들이 동시에 놀랐다.

“기사 학교라면…….”

“어차피 보육원에서 보호되는 나이도 열다섯까지고 기사 학교는 열셋이면 입학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의 성인 기준은 열다섯이었다. 그래서 한나도 열다섯에 보육원을 퇴소했고, 선생님이 되었었다.

“음…….”

아이들이 퇴소한 이후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남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니 한나는 어딘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기사 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여타 학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검술에 재능이 있다면 그곳보다 좋은 곳은 없지요. 졸업까지 빠르게는 3년, 길게는 10년이 걸리지만 기숙사 제도에 성적이 좋으면 장학금도 나오니 나쁘지 않을 겁니다.”

“아무나 입학할 수 있나요?”

“기본 시험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레미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죠.”

한나는 설명을 듣고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열두 살의 제레미는 처음 만난 그때보다 확연히 다르게 자라 있었다.

“제레미는 기사가 되고 싶어?”

“완전 좋죠!”

제레미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왜 기쁘게 말하는데 조금 마음이 쓸쓸한 거지. 한나는 허전함을 느꼈다.

“뭐, 아직은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

슬슬 아이들의 미래와, 이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식사부터 맛있게 하자.”

한나는 새삼 아이들을 한 명씩 지그시 바라보았다.

매일매일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봐서 몰랐는데 4년 동안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자라 버린 것 같았다.

‘하긴, 이안은 벌써 사춘기 소년이 됐는걸.’

원래도 까칠한 구석이 있는 이안이 요즘은 통 말이 없었다. 한나는 그게 이안에게 사춘기가 와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보육원의 잔잔하던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 * *

한나는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산책을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네.”

아이들이 퇴소를 하는 날은 한나가 보육원을 그만두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레미아 신전에서는 더 이상 보육원을 운영하지 않기로 했다. 세자르가 보육원이 필요한 아이들은 중앙 신전으로 바로 인계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보육원뿐만 아니라 레미아 신전은 가까운 거리에 더 크고 좋은 신전들이 많아 천천히 사라지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흠.”

그래서 지금 보육원에 있는 마샤, 제레미, 이안은 보육원의 마지막 아이들이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나도 미래를 계획해야겠네.”

한나는 발에 치이는 돌멩이를 툭툭 발로 차며 동산의 고목나무로 향했다.

“꼬꼬는 잘 자고 있으려나.”

“아까 닭장으로 들어가던데.”

“아……. 또 닭장 부서졌겠네.”

응? 근데 지금 누가 말한 거야?

“세자르 님!”

제발 인간아, 어두운 밤에 기척 없이 있다가 갑자기 말 걸지 말라고.

이상하게 세자르는 존재감을 잘 숨겼다.

아니, 사람이 맞긴 한 건지 꼭 어느 벤치, 어디 나무 밑, 돌담, 그냥 몸만 기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늘어져 있기 일쑤였다.

“그만 놀랄 때도 되지 않았나.”

“제발 잠은 방에 가서 자라고 몇 번을 말해요.”

“야외 체질이라.”

야외 취침이 체질이면 신관 말고 어디 보물 탐험가 같은 거나 하시지.

세자르의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세자르가 가지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 옅고 푸른 눈동자, 하얀 피부가 모두 반짝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신관복도 하얀색이니.

저 희미한 색소의 조합 때문인지 그는 한나에게 유령 같은 이미지였다.

“그래서, 왜 그렇게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는 건데?”

“그냥,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조금 생각하느라. 물론 제 미래도…….”

여기서 나가면 뭐 먹고 살지도 생각해야 했다.

“할 일 없으면 신력 검사나 받아.”

“됐네요.”

한나는 즉각 거절했다. 죽어 나가는 엑스트라 자리는 사양이었다.

“잠이 안 오면 와서 좀 앉아 있던가.”

세자르가 자신의 옆자리를 눈짓했다. 한나는 터덜터덜 느린 걸음으로 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근데 대신관님은 중앙 신전으로 안 돌아가세요?”

사실 세자르가 대신관으로 이곳에 왔을 때 그가 이렇게 오래 눌러앉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항상 궁금했다.

세자르는 한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힐끗 한번 보고 말 뿐이었다.

한나는 아이들과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다 이제 세자르의 미래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막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몇 년을 변두리 신전에서 썩어도 되는 건가?

“신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고 머물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오. 얼마 만에 듣는 신관스러운 말인지.

한나는 신기한 눈으로 세자르를 보았다.

“신이란 작자는 날 아주 잘 이용해 먹거든.”

세자르는 시큰둥한 얼굴로 불경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신관스러웠다는 건 취소해야 할 듯싶었다.

그 후 한나와 세자르는 사소한 수다를 이어 갔다. 별일 없는 신전에서 별 볼 일 없는 시시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날은 달빛이 참 아름다웠다.

* * *

“대신관님!”

신전이 소란스러워졌다. 신전 앞에 마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레미아 신전에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한나도 아이들도 놀라서 신전으로 모였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어. 무슨 일이지?”

“우리 신전이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한나와 아이들은 신전 복도를 기웃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저기, 커티스 님. 무슨 일인가요?”

“저희도 지금 무슨 일인지 파악 중입니다.”

신관들은 바쁘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마을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과일 가게 아저씨랑 무기점 아주머니도 있어요.”

“그러게.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하네.”

“다들 표정이 안 좋아.”

한나는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하자, 아이들을 데리고 구석진 곳으로 옮겨갔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은 데리고 가는 게 좋겠군.”

“세자르 님?”

조용히 등장한 세자르가 한나의 어깨를 툭 하고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평소 신관복을 걸치는 둥 마는 둥 대충 입고 있던 모습과 달리, 대신관의 표식인 금빛 수가 놓인 영대까지 어깨 위에 제대로 두른 모습이었다.

평소엔 불편하다며 소파나 테이블, 혹은 복도 창틀 어딘가에 툭툭 던지고 다니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제대로 대신관복을 입은 그는 사람이 달라 보였다.

“여긴 우리 일.”

세자르가 선을 긋는 것처럼 한나에게 보육원으로 돌아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 네.”

항상 조금 멍하게 풀려 있던 세자르의 눈에 평소와 다른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한나는 지금 상황이 뭔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세자르는 한나와 아이들을 지나서 혼란스러운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꼿꼿한 자세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더욱 소리를 높였고, 세자르는 금방 인파에 가려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얘들아, 여긴 너무 혼란스러우니 우리는 돌아가자.”

한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고 난 뒤, 신전의 자초지종을 듣게 된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역병이 돌고 있다는군요.”

소식을 전해 준 것은 모이세이였다.

“역병요?”

“산 너머 소솔레티 마을에 얼마 전 역병이 돌았는데, 그게 이 마을까지 옮겨왔습니다.”

“세상에…….”

한나가 탄식했다.

역병이라니.

듣기만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단어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있는 이곳은 전염병에 취약한 중세 배경이지 않은가?

“마을 주민들은 어떤가요? 많이 안 좋은 상황인가요?”

“초기이긴 합니다만 이미 소솔레티 마을의 소식을 들어서 다들 불안감에 신전을 찾아오더군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역병이 돌면 의원이 아니라 신을 찾았다.

“역병에 걸리면 죽는 건가요?”

“경중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건강이 취약한 사람들은 위험하죠.”

“큰일이네요.”

마을 주민들의 연령대가 높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중앙 신전에서 신관들을 파견해 줄 수는 없나요?”

“앞서 다른 마을들이 더 심각한 상황이라……. 이곳까지 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저런…….”

모이세이의 말을 듣고 한나는 신전을 내려다보았다. 신전은 밤이 늦었지만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대신관님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주민들을 위해 기도문을 읊어 주고 계십니다.”

“이 늦은 시간까지요?”

유독 잠이 많은 세자르가 낮부터 이 늦은 시간까지 기도문을 읊고 있다는 말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기도실이 닫힐 때까지 계속하겠죠.”

“아니, 원래 신전 운영 시간은 한참 지나지 않았나요?”

본래 신전은 오후 7시를 마지막 기도로 문을 닫는 게 정상이었다.

“세상이 혼란할 때에는 신전은 문을 닫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밤새 기도문을 읊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다른 신관과 교대를 하시면 되는데, 글쎄요. 세자르 님이라면 쓰러질 때까지 혼자 하실 것 같습니다만.”

“예?”

한나가 되물었다. 세자르가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항상 설렁설렁 대충대충 만사 귀찮아하는 사람인데? 한나의 의아한 눈빛에 모이세이가 옅게 웃었다.

“세자르 님을 잘 모르시는군요.”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요……?”

“세자르 님은 아홉 살에 미치광이 마법사 괴투스가 폐허로 만든 자신의 마을을 위해 칠일 동안 자지도 먹지도 않고 기도를 올렸고, 그에 권능이 발현됐습니다.”

“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원래 신력을 타고나신 분이 아니었나요?”

“물론 태어날 때부터 축복을 받은 몸이기에 권능이 발현될 수 있었겠죠.”

“신력이라는 게 그냥 뚝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었나 보군요.”

“보통은 미미한 수준으로 타고나지만 그 정도의 권능은 각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금의 교황께서는 전쟁터의 죽어 가던 병사를 수천 명을 치료하고서야 생명의 권능을 얻으셨으니까요.”

그 순간, 한나는 불량 신관으로만 생각했던 세자르가 조금 달라 보였다.

권능의 발현 과정은 일종의 신의 시험 같은 것인가.

“세자르 님은 그 후로도 세상에 큰 혼란이 일어나면 몸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천성이 그런 분이십니다.”

“……대신관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군요.”

그저 선택받은 몸으로 태어나 당연히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

이것 참. 그런 줄 알았다면 평소에 신전 등골 빼먹는 월급 루팡이라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걱정이네요. 마을 사람들도 대신관님도.”

“선생님도 아이들이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아, 네. 물론이죠.”

모이세이의 당부에 한나는 위생을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해요. 당분간 바쁘실 텐데 제레미 수업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모이세이는 한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신전으로 향했다. 모이세이 역시, 세자르만큼이나 할 일이 많아 오늘 밤은 자기는 힘들 것이었다.

“…….”

내려다본 신전의 빛은 여전히 밝았다. 왠지 저 멀리서 낮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는 세자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한나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잠은 자야 할 텐데.

* * *

다음 날 한나는 고생하는 신전의 사람들을 위해 식당에 많은 양의 냉차를 준비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이 만든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 개운함을 느낀다고 하니 이 정도 봉사 정도는 밤을 꼴딱 새워 신전을 지키는 신관들에게 해 주고 싶었다.

“단단히 무장하셨네요.”

한나를 발견한 커티스가 말을 걸어왔다. 한나는 보자기를 두 겹이나 단단히 묶어 코와 입을 가리고 있었다.

“제가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있어서요.”

“잘하셨습니다. 환자가 더 늘어나면 안 되니까요.”

“신관님들도 좀 가리고 다니시는 게 낫지 않나요?”

혹시 이 세계 사람들은 전염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다들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가 하는 생각에 한나가 물었다.

커티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저희는 최대한 신도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그래도 세상이 흉흉한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관들이 병에 걸리면 중앙 신전으로 이송돼 치유 받습니다.”

“아.”

한나는 안도했다. 다행히 신관은 따로 치료하는 시스템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신관님은 아직도 기도 중이신가요?”

“고집이 워낙 세셔서요.”

“안 말리세요?”

“그분이 하시는 일을 제가 감히.”

한나는 커티스의 이런 태도가 항상 신기했다. 커티스는 세자르를 상사나 대신관 이상으로 거의 숭배하다시피 하는 것 같았다.

뭐 가끔 언행은 자유분방했지만 그가 하는 어떤 행동에도 이유가 있다는 듯 굴기 일쑤였다.

“커티스 님은 대신관님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커티스에게 차를 한잔 내밀며 한나가 물었다. 그러자 줄곧 신전 복도의 사람들을 눈으로 살피던 커티스가 한나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신관이 되어 중앙 신전에 배정받고 만났습니다만.”

“정말요? 그렇다기엔 두 분의 신뢰 관계가 너무 돈독해 보이는데요.”

한나의 말에 커티스가 고개를 한나에게 고정됐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은 제게 신과 다름없는 존재십니다.”

“일로 만난 사이라면서요.”

“저는 세자르 님이 살린 수많은 생명 중 하나이니까요.”

“세자르 님이 살려요?”

파면 팔수록 신기한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세자르의 과거가 너무 흥미진진했다.

“제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자르 님에게 목숨을 빚지고 살아갑니다.”

“왜요?”

“검은 사막의 마수들을 봉인하고 있는 성력이 세자르 님의 성력이니까요.”

“네에?”

한나의 눈이 평소보다 두 배쯤 크게 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깜짝 놀랄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북쪽에는 검은 사막이 있었다.

원래는 금빛 모래로 반짝이는 곳이었지만 그곳에 마수가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온통 검게 물들었다 해서 검은 사막이라고 불렸다.

“제가 자란 마을은 검은 사막과 맞닿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들의 손에 죽은 친구와 가족이 열 손가락을 다 접어도 모자라죠. 그때 우리와, 제국을 살린 것이 세자르 님의 성력입니다. 전 그 모습을 보고 신관의 꿈을 키웠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세자르 님이 항상 잠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곳을 유지하고 있는 성력이 계속해서 세자르 님의 힘을 빨아들이니까요.”

아. 그래서 항상 피곤에 절어 반수면 상태로 다닌 거였구나.

한 가지 궁금증이 풀린 순간이었다.

“왜 제국에 그런 이야기가 퍼지지 않은 거죠?”

“세자르 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나라면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걸어서 나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겠구만! 바보 아니야?’

그런 한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커티스가 피식 웃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감히 재단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갑자기 커티스와 모이세이의 절대적인 충성심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세자르는 탈인간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평소의 하찮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 * *

“오늘도 대신관 아저씨가 기도하네요.”

전염병 때문에 마을로 나갈 수 없어진 한나와 아이들은 동산에 앉아 신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육원이 신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어 동산에 앉아 있으면 신전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오늘도 세자르는 기도실과 입구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모이세이의 말처럼 그는 이틀째 쪽잠이나 잘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계속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너희도 대신관님을 본받아 좋은 사람으로 자라렴.”

“언젠 식충이라면서요.”

“밥버러지라고도 하지 않았어?”

“빈대라고도 했지.”

한나의 덕담을 들은 아이들은 쿵짝이 참 잘 맞았다.

‘아니. 내가 그렇게 심한 말을 했었다고?’

한나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놀랐다. 아이들 앞에서 말을 조심했어야 하는데.

자신의 경솔함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처럼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단다. 선생님이 반성할게.”

한나는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언제까지 병이 돌까요.”

마샤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솔레티 마을은 수백 명이 죽었다던데.”

제레미가 엎드린 채로 발을 통통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발랄하게 발 굴리며 말하지 말아 줄래. 제레미……?

“이곳도 금방 병이 퍼지겠지.”

이안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도 조심해야 해. 사람들과 마주치지 말고, 아무거나 먹지 말고, 신전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보자기 두르고. 알겠지?”

아이들이 마시는 물까지 팔팔 끓여 먹이며 아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위생에 신경 쓰고 있었지만 불안함은 계속되고 있었다.

신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샤가 말했다.

“그런데 점점 신전에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그러게. 다들 불안해서일까.”

한나도 마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신전은 첫날에 몰려든 인파는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 날로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제레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전에 오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소문이 났대요.”

“응? 그건 어디서 들었어?”

“모이세이 님이 검술 교본 주고 가시면서 말했어요.”

“정말 신이 전염병을 막아 준다고 믿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애초에 전염병이 돌지도 않게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한나는 심드렁하게 신전 입구의 여신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관들도 병에 걸리지 않고 있고, 실제로 우리 마을은 환자가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대요.”

“정말?”

이안의 말에 한나가 목소리가 커졌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었다.

“다른 마을은 전염병이 돌자마자 신관들이 줄줄이 중앙 신전으로 실려 갔다던걸요.”

“하긴, 저런 환경에 전염병 환자들과 섞여 있는데 병이 안 옮는 게 신기하지.”

아무리 세계가 현대와는 상식적인 부분이 다르다지만 너무 구식이었다.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은총이 내린 곳이라고 소문이 났나 봐요. 저기 봐요. 마을 주민이 아닌 사람들도 있잖아요.”

“다른 마을 사람들이 온다고?”

“저 사람들은 항구 마을 사람이에요.”

“어떻게 알아?”

마을 사람들을 전부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항구 마을 사람들이라고 이마에 적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한나는 이안의 추측이 신기했다.

“옷의 재질부터 다르잖아요. 저런 장화도 어촌에서 신는 거지 우리 마을 근처에서는 구할 수도 없어요.”

“아. 그래?”

이안의 눈썰미는 대단했다. 그저 사람이 많다고만 느꼈는데 언제 복장까지 다 파악한 건지.

“이상하긴 하네요. 어떻게 여태 신전이 멀쩡한지.”

이안의 말에 마샤와 제레미가 한나를 바라보았다.

“응? 왜?”

“난 알 것 같기도 한데.”

“뭔데?”

“역시. 그건가.”

“뭐? 뭐가?”

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이것들아! 너희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려 줘라!

“난 본인만 모르는 게 너무 재미있어.”

마샤가 키득거리며 웃었고, 제레미도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이안, 너도 알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묻자, 이안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너희 나…… 따돌리니?”

어쩐지 한나는 억울해졌다.

“선생님. 오늘은 냉차 안 주고 와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한나는 매일 오후가 되면 신전으로 냉차를 가지고 갔다.

넋 놓고 떠드느라 시간이 다 된 줄도 몰랐다니.

“물부터 끓여야 하는데, 얼른 가야겠다!”

“다녀오세요.”

다급히 일어서는 한나에게 아이들이 인사했고, 한나는 급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 * *

“너무 욕심부렸나 봐.”

평소보다 많이 만든 차를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나는 낑낑거리며 큰 냄비를 가져가고 있었다.

“악!”

순간 누군가 한나의 어깨를 잡았고, 한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도 누군가 허리를 받치는 손길에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뭘 그리 놀라.”

세자르였다.

“차 쏟을까 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한나는 양손으로 들고 있던 차 냄비를 바닥에 내려놓고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꼴이 왜 이래요?”

그는 마치 푹 삶은 시금치처럼 숨이 죽어 있었다.

“죽을 것 같아.”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은데요?”

사람의 몰골이라고 볼 수가 없는 퀭함이었다.

좀비. 좀비인가?

“물 좀 줘.”

세자르가 생명수를 달라는 듯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잠시만요.”

한나는 급히 주머니 속 바가지를 꺼내 차를 떠 주었다. 세자르는 바가지를 들 힘도 없는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세자르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어찌나 시원하게 먹는지 보고만 있는데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잠은 좀 잤어요?”

“아니.”

대답을 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즉각적으로 나오는 대답에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교대해 가면서 해요. 그러다 대신관님이 제일 먼저 신님 곁으로 가시겠어요.”

“걱정을 퍽 다정하게도 하네.”

세자르는 어이없다는 듯 한나를 보곤 그대로 복도 창가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기댄 세자르의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서서 주무세요?”

“그냥 잠시 눈만 감고 있는 거야.”

세자르는 그 후 정말 눈만 감고 있었다. 한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구경했다.

“왜 안 가.”

“아.”

한나가 움직이는 기척이 없자, 세자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정말 세자르는 원하는 차만 얻으면 가차 없어졌다.

잘 가라는 인사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으세요?

한나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런데 세자르 님.”

“왜.”

“엄청 대단한 분이시라면서요?”

한나의 물음에 세자르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막 성력으로 마수도 막고, 각성도 하시고 막, 응?”

어서 말해 달라는 듯 한나는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본인의 입으로 듣는 이야기는 얼마나 재미있을지!

감겨 있던 세자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누가 떠들었는지 알겠군.”

“아이,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 주세요. 권능이 생겼을 때 기분은 어땠어요?”

“알아서 뭐하려고.”

세자르의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보통 자기를 추켜올려 주면 조금 들뜨고 자랑하고 싶고 그러지 않나?

“그냥 궁금한 거죠. 다들 궁금할걸요?”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한나가 씨익 웃었다.

“보통 신전에서 나에게 얼마 주는지를 더 궁금해하던데.”

“얼마나 주는데요?”

한나의 눈이 반짝였다.

사실 그것도 궁금하긴 했다. 저 정도 능력자에게 신전에서 어떤 대우를 해 주는지!

“죽으면 천국에 좋은 자리 하나 내준다더군.”

“그게 가능해요?”

정말 신과 신관이 그런 자리를 막 거래하고 그럴 수가 있나? 이세계라 가능할지도?

“가능하겠어?”

세자르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너 바보냐?

“그런데 세자르 님은 계속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세자르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며 눈을 좁혔다.

“마수를 막고 있는 성력을 유지하려면 평생 그렇게 나무늘보처럼 꾸벅거리면서 살아야 하나 싶어서요.”

“그때 내 나이가 열셋이었어.”

“아! 그동안 신력이 늘었나요?”

“아니.”

그럼 그때 나이가 무슨 상관이람. 한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의 난 그때처럼 멍청하고 물렁하지 않다는 거지. 신력 낭비할 것 없이 싹 쓸어버려야지.”

“네?”

“힘 탈탈 털어 다 죽일 거라고.”

“…….”

한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세자르를 진정한 평화의 사절 정도로 평가했는데 지금 보니 세자르는 그냥 세자르였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 세자르는 악당들을 깔끔하게 몰살하고 평화를 찾겠다던 광기에 물든 신관이었지.

“음…….”

한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 곰처럼 찔러도 반응 없는 사람들이 한번 눈이 뒤집히면 미쳐 날뛰는 법 아니던가.

앞으로 세자르에겐 최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아야겠다.

“그럼. 건강하세요.”

한나는 다른 어떤 인사보다 마음을 담은 인사를 하고 냄비를 집어 들었다.

사실 냄비를 집어 들면서 정말 단 0.1%의 작은 기대를 하면서 세자르를 힐끔 보긴 했다.

보통 다른 신관이었다면 이 무거운 걸 들어 주거나 혹은 도와줬을 테니까.

휘휘.

세자르가 손을 팔랑거렸다.

매정한 사람.

한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도 0.001%의 기적이 있을까 해서 조금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팔이 후들거려서였다.

“한 손만 보태 줄 수는 없을까요?”

“뭐. 내가 더 연약해.”

“…….”

세자르가 다시 머리를 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더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바가지도 후들거리면서 드는 사람에게 무슨.

“가 볼게요.”

결국 한나는 튼실한 팔로 낑낑거리며 냄비를 들고 갔다.

“…….”

한나가 멀어지자 감겨 있던 세자르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그의 푸른 눈이 한나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이내 자신의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성력을 발현해 손을 움켜쥐자, 황금색 빛이 일렁이며 어떤 형태를 이루려 하고 있었다.

세자르는 성력을 거두어들였다.

사실 그는 한나를 만나기 전까지 정말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성력을 발현하긴커녕 스푼 하나 들 힘도 없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역시나 한나의 차를 마시고 난 뒤 그의 몸은 단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회복되고 있었다.

세자르의 복잡한 머리가 창에 툭, 툭 부딪혔다.

“…….”

생각이 많아졌다. 그의 팔이 다시 꼬아졌고, 머릿속도 꼬여 가고 있었다.

툭. 툭. 툭.

그렇게 세자르는 창문을 한참 동안 두드렸다.

* * *

높다란 원형 천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하나의 창에서 빛무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늙은 신관이 있었다.

“교황님.”

벨리시무스 펠트로, 그는 신전의 교황이었다. 대신관의 부름에도 교황은 눈감은 채 기도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익숙한 듯 대신관은 그의 등을 보며 보고를 올렸다.

“검은 사막에서 마수들이 점점 마을로 출몰하는 빈도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곳을 지탱하는 성력은 여전하지만, 아무래도 마수들이 진화하고 있다는 의견입니다.”

꾹 감겨 있던 교황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기도를 올리는 다섯 시간 내내 열린 적 없던 입이 떨어졌다.

“세자르는?”

“아직 레미아 신전에 있습니다. 불러들일까요?”

“여태 그곳에 있다라…….”

귀찮은 일을 질색인 녀석이 대장 노릇을 하겠다는 말에 얼마나 갈까 했는데, 여우굴 대장 노릇이 적성에 맞았을까.

세자르를 자식처럼 키운 교황이지만, 세자르가 워낙 괴짜인지라 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그곳은 어떤가.”

“그냥 변두리의 작은 신전입니다. 다만…….”

“다만?”

“요즘 돌고 있는 전염병 때문에…….”

“피해가 심한가?”

교황이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그게 아닙니다.”

대신관이 목 뒤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축복을 받은 신전이라고 각 지역의 신도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그 근방은 초토화가 되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만 멀쩡하니……. 아마 지금쯤이면 신전이 미어터지고 있을 겁니다.”

교황이 몸을 돌리자, 대신관은 그의 금빛 눈동자와 마주해야 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래? 그 녀석이 왜 그리 진득하게 있나 했더니…….”

‘재미있는 게 있는 모양이군.’

교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곤 천천히, 소리 없이 걸어 기도실을 떠났다.

오랜만에 자신의 아이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 * *

“여기가 축복받은 곳이라며?”

“성수를 마시면 역병에 걸리지 않는다지 뭔가!”

“그렇게 좋은 거면 이미 귀족들이 싹쓸이하지 않았나?”

“돈 주고 파는 게 아니여! 신전을 뭘로 보고!”

오늘도 신전은 와글와글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이유인즉, 레미아 신전을 다녀간 사람들은 축복을 받아 역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은 한나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거였다.

“우리 신전에 성수가 있었으면 우리부터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에 아이들은 질린 눈으로 서로 눈빛을 나누었다.

“선생님이 언제까지 저럴지 내기할래?”

“이쯤 되면 연기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마샤와 이안이 한나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치유력이 있다는 걸 이제 받아들여요.”

마샤가 답답한 마음에 앉아 있는 한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너희도 참.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네.”

한나는 사실 이 상황을 부정하는 중이었다.

신관들이 자신의 냉차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레미아 신전의 사람들이 역병에 옮기는커녕 있던 병도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긴 정말 한 게 없어서였다.

‘뭘 대단한 치유력이 있으려면 막 신의 계시도 받고 엄청난 이펙트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냥 끓인 물에 찻잎 넣고 휘휘 젓는 게 전부인데 그런 대단한 성수 같은 명칭을 붙인다는 게 얼굴이 화끈할 정도였다.

“뭐 신전은 여전히 바쁘긴 하지만 어찌 됐든 마을 사람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일이 어찌 흘러가던 사람들이 아프지 않으면 된 것 아닌가?

“아……. 그런데 너무 졸리다.”

제레미의 미뤄 뒀던 검술 수업을 오후부터 시작해서 구경하는 중이었던 한나는 평소와 달리 몸이 너무 노곤했다.

“볕이 너무 따스해서 그런가.”

더는 밀려오는 수마에 저항할 수 없어졌다.

“나 조금만 잘게. 얘들아, 수업 끝나면 깨워 줘.”

결국 한나는 동산에 그대로 벌러덩 누워 잠들고 말았다.

“우리 선생님, 이러다 큰일 나겠는데.”

“그러게. 신관님 불러올게.”

마샤와 이안은 부쩍 수척해진 한나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부를 것 없다.”

때마침 세자르가 멀리서 걸어오며 말했다.

“대신관님!”

“잘 버틴다 싶었지.”

그의 푸른 눈동자가 곤히 잠든 한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한테 아무데서나 잔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더니.”

세자르가 잠든 한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누가 자신을 옮기는 것도 모르고 한나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우리 선생님, 아픈 거예요?”

“그냥 기운이 빠져서 그래.”

마샤와 이안이 세자르를 따라 보육원 숙소로 걸었다.

“그 신력이라는 거 많이 사용하면 몸에 나쁜 건가요?”

이안이 세자르에게 질문했다.

“날 보면 알잖아.”

“나쁜 거네요.”

딱히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 예를 든 것이었는데, 이안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세자르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괜찮다는 말인데. 어딜 봐서 나쁘지?”

“대신관님이 사람 몰골인가요.”

“잠깐만, 그건 너무 심하잖아.”

세자르가 발끈했다.

“세상에 대가 없는 힘이 있던가요.”

“거참, 어린 녀석이 별 걸 다…….”

이안의 애늙은이 같은 모습에 세자르는 혀를 찼다.

무슨 인생 두 번 사는 애도 아니고 어떤 때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우니.

“그래. 네 말이 맞아. 그 대가라는 게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 신은 절대 무조건적으로 베풀지 않으니까.”

“왜요?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베푸는 거 아닌가요?”

마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신전 밥을 먹으며 어깨너머로 들은 성서 내용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애롭고 인간을 가엾이 여기는 신이 아니던가.

“신을 본떠 만든 것이 인간인데, 과연.”

세자르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저 빌어야지. 부디, 티끌만 한 자비를 함께 달라고.”

“이래서 내가 신전이 싫다니까.”

“신관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이안의 말에 세자르는 2차 발끈함을 느껴야 했다.

“대신관님도 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으신데요.”

그 말에 세자르는 항복해야 했다.

마침 지나고 있던 복도에는 여신상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 * *

다음 날, 한나는 몸을 꽁꽁 싸맨 채 마을로 향했다.

이런 시기에 굳이 사람이 많은 곳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전에 의뢰해 둔 아이들의 옷과 이불을 찾으러 가야 했다.

겸사겸사 동네의 상황이 어떤지 둘러보기도 할 요량으로 나온 것이었다.

“정말 상점들이 거의 다 닫았네.”

그래도 다른 마을에 비해 피해가 적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시장이 어느 정도는 돌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간혹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꼭 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최대한 빨리 물건만 찾아가야겠어.’

옷과 이불을 찾으러 가야 할 가게들이 문을 열었을지도 미지수였다.

‘다 닫혔으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으로 당도한 가게는 역시나 문이 잠겨 있었다. 혹시 가게의 주인도 전염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스쳤다.

“그냥 돌아가야겠네.”

모처럼 아이들의 새 옷을 지은 터라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 시국에 옷을 찾겠다고 소란을 피울 수도 없었다.

한나는 씁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상황도 둘러볼 겸 원래 지나던 지름길 대신 빙 둘러가는 길을 택했다.

‘나온 김에 동네 사람들이 잘 있는지 보는 거야.’

한참을 걷다 보니 평소 아이들과 다닐 때는 잘 지나가지 않던 빈민 골목을 지나게 되었다.

“엉엉엉.”

“거, 몸 좀 일으켜 보시오!”

“이미 다 죽은 사람 흔들어 봐야 뭣하나. 의원도 문을 걸어 잠갔어. 치료는 꿈도 못 꾼다고.”

“하지만……!”

골목 안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벽이나 기둥을 잡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너덜너덜한 더러운 천 위에 누워 피를 쏟아 내는 늙은 남자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지?’

한나는 그 참상에 입을 틀어막았다. 피를 토하는 남자에게 한 아이가 달려갔다. 그 아이는 보육원 아이들보다 두세 살이나 많을까, 언뜻 보아도 앳된 소년이었다.

“아저씨! 이렇게 죽으면 억울해서 어째요!”

“억울할 게 뭐 있다고! 평민이고 귀족이고 다 역병으로 죽어 가는 마당에! 우리 같은 걸인이 역병으로 가면 호상이지! 굶어 죽고, 맞아 죽는 신세가 아닌 게 다행 아니야?”

잔뜩 갈라진 걸걸한 목소리의 노인이 아이에게 말했다.

“걸인은 막 죽어도 된답니까. 아저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신전, 신전으로 가요.”

“신전도 이미 병에 걸린 사람은 안 받아 준다고. 특히 우리 같은 사람들을 거들떠나 보겠어?”

노인은 아이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주정뱅이 늙은이가! 뭘 안다고!”

소년은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섰다. 노인을 향해 가려던 소년이 한나를 발견했다.

“누구요?”

날카로운 물음에 한나는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소년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 골목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이 당황스러웠다.

“아……. 나는, 길을 지나다가…….”

괜히 이 길로 들었을까.

“끌끌. 더러운 꼴만 보고 가겠군.”

아이와 실랑이하던 노인이 한나를 향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왜 아픈데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죠?”

한나는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아무리 전염병에 난리가 났다고 하나 의원도 있을 것이고, 신전에 가더라도 최소한은 돌봐 줄 텐데.

왜 여기서 곧 죽을 것처럼 무기력하게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방금 피를 토한 남자는 정말 숨이 넘어갈 듯 보였다.

“우리 같은 거지들은 누구의 구제도 받지 못한다오.”

설마. 그럴 리가.

“그렇지 않아요. 신전은 사람의 지위를 가리지 않습니다.”

당연히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신전이었다. 한나는 노인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여보시게, 여긴 이미 죽음이 드리웠어. 저 안쪽을 보라고. 가망이 있어 보이나? 누가 우릴 돕는단 말인가? 산 사람이나 챙기기 바쁘겠지. 더군다나 우리 같은 거지를 동정이나 하겠는가?”

한나는 노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긴 전부 아픈 사람들이니?”

“거의 그런 편이에요.”

“왜 치료를 받지 않아?”

“저 할아버지 말처럼 노력도 못 해 보고 다들 포기하는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희망보다는 포기하는 것에 익숙하니까요.”

아이의 말에 한나는 골목으로 한 걸음 더 내딛었다. 빛도 잘 들지 않는 그곳에는 악취가 진동했다.

썩어 가는 고름 냄새에 배설물 냄새까지. 

죽음에도 냄새가 있다면 이런 향이 아닐까 싶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골목 더 깊은 곳까지 시야가 트였다. 길을 지나며 들여다보았던 초입은 정말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곳엔 살아 있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몰골이 엉망인 사람들이 가득했다.

몇몇도 아니고, 가득 말이다.

“……아.”

한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 평화롭던 마을에 이런 이면이 있었던가?

“……마르셀 아저씨?”

심지어 그곳엔 평소 스치듯 보았던, 구두 수선 상인도 있었다.

“도대체 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한나의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여긴 원래 다 걸인은 아니에요. 전염병이 돌면서 갑자기 집도 돈도 잃은 사람들도 있고, 병에 걸렸다고 집에서 버려진 사람들도 많이 생겼어요. 어찌 됐든, 곧 죽을 운명이란 건 다 똑같죠.”

“……그게 무슨……. 병에 걸렸다고 가족을 버린다니?”

“이미 다른 마을은 온 마을 전체가 죽어 나가고 난리가 났다잖아요. 겁먹은 사람들이 뭔들 못하겠어요. 여기, 이 아저씨도 원래는 큰 가구점 주인이었대요. 그 집 아들들이 여기 버리고 갔어요.”

“……하.”

보고도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신전 안에서는 그저 다른 마을보다 피해가 적다는 긍정적인 소식이나 접하고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

지옥이 있다면 이곳일까.

한나는 바닥을 기어다니는 구더기들이 제 피부 안을 기어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소름이 끼쳤다.

한나는 괜스레 착용하고 있던 입 가리개와 장갑을 더듬거리며 다시금 확인했다.

“쿨럭.”

그 순간, 피를 토했던 남자의 몸이 더 크게 들썩였다.

“아저씨!”

소년의 관심이 한나에게서 떨어졌다. 소년은 남자의 몸을 흔들었다.

“신……. 신전……. 쿨럭.”

남자의 앙상하게 마른 팔이 소년의 팔을 잡았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의 숨이 꺼져 가고 있었다.

“일어나요!”

소년은 당황해서 남자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

한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목격했다.

“쯧, 결국 이리 가는구만.”

노인이 누더기 같은 담요를 제 몸에 두르며 말했다. 노인은 옆 사람의 죽음에 익숙한 듯 보였다.

“거, 눈이라도 감겨 주어라.”

“아저씨……. 흑……. 아저씨!”

소년은 죽은 남자와 연이 있었던 것인지 서럽게 통곡했다.

“할아버지께선 병에 걸리지 않으셨나요?”

“그러게 말이야. 차라리 이 늙은 목숨이나 가져갈 것이지. 끈질기게 살아서 다른 이의 죽음이나 신물나게 보는구만.”

노인의 눈에는 생기라곤 없었다. 이미 감정 어딘가가 죽어 도려내진 것처럼.

“너는 괜찮니?”

한나가 소년에게 물었다.

“지금 괜찮으면 뭐하겠어. 이 골목에 있는 이들은 다 곧 죽을 팔자라오. 하루 일찍 가나 며칠 더 사나 그게 그거지.”

그렇게 말하는 노인은 희망 따위나 살고자 하는 욕구 자체가 없었다. 한나는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에 속이 울렁거렸다.

“욱.”

“저런. 젊은 아가씨가 못 볼 꼴을 봤으니 잠은 다 잤구먼. 이봐, 처자도 역병 옮기 싫으면 얼른 여길 떠나라고.”

“우욱.”

한나는 치미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골목 밖으로 달렸다.

“하……. 하…….”

입 가리개를 벗고 속에 있는 것을 다 게워 낸 한나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 냈다.

“이건 말도 안 돼.”

방금 자신이 본 그 광경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욱.”

다시 신물이 올라왔다.

* * *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안색은 왜 그렇습니까?”

커티스가 사색이 되어 돌아온 한나를 보며 물었다. 현재 한나는 자신이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나가 있었다.

“……커티스 님.”

“네. 말씀하세요.”

평소의 밝기만 하던 한나가 왜 이렇게 혼이 나간 건지 커티스는 궁금했다.

“마을이, 엉망이에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막…….”

말을 하다가도 아까 보았던 골목의 참상이 떠올라 한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몇 차례나 게워 냈지만 여전히 속이 울렁거려서였다.

“……안 좋은 것을 보신 모양입니다.”

커티스는 한나가 어떤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대충 짐작했다.

“아비규환이었어요. 사람들이 막 죽고……. 더러운 바닥에…….”

“전염병이 돌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레미아 마을은 양호한 편입니다.”

“얼마 전까지 웃으며 인사했던 상인도 걸인이 되어서……. 아니, 거긴 그냥 죽음의 구덩이였어요.”

“충격을 많이 받으신 모양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들과 접촉한 건 아니지요?”

커티스는 한나를 혼자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평소 마음이 여리던 선생이 얼마나 놀랐을지 쉬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대신관님을 봬야겠어요.”

한나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신전으로 향했다.

“한나 선생님?”

커티스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복도를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나는 그대로 기도실로 향했다. 그곳에 세자르는 없었다.

기도실엔 여전히 사람들이 가득했다. 문을 닫고 한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세자르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세자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나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세자르는 잠시 누워서 쉬려 했던 모양인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있었다.

“대신관님.”

평소라면 그냥 ‘세자르 님’ 정도로 불렀을 한나가 딱딱하게 자신을 ‘대신관’이라고 부르자, 세자르는 반쯤 감겨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문고리를 잡은 손도 떨리고 있었다.

세자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나?”

그의 얼굴에 미세하게 주름이 졌다.

“……세자르 님.”

한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을 다듬었다. 사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도 한나의 마음속에는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을이 엉망이에요.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막, 피를 토하고……. 가족들이 병든 사람을…….”

한꺼번에 많은 생각이 뒤섞여 횡설수설하는 한나를 보며 세자르가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우선 앉아서 얘기하지.”

세자르는 한나의 어깨를 감싸 여전히 문고리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거두어 방 안으로 이끌었다.

탁.

문이 닫히고 한나는 세자르가 이끄는 대로 소파로 향했다.

“앉아. 앉아서 숨 좀 고르고 천천히 얘기해 봐.”

한나를 소파에 앉힌 세자르가 컵에 물을 따라 그녀의 앞에 놓았다. 한나는 그 물컵을 두 손으로 쥐고 입을 열었다.

“……마을에 갔어요.”

“그래.”

맞은편 의자에 세자르가 앉았다.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주……. 아주 많았어요.”

“충격이 컸겠군.”

한나는 손에 들린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의원은 고사하고 신전에도 올 수가 없다고 했어요.”

“신전은 열려 있어. 다만, 권리도 혜택도 누려 본 사람만 누리는 거라고 엄두를 못 내는 거겠지.”

“신전에서 사람들을 도우러 나가지 않나요?”

“알다시피 중앙 신전의 인력은 더 심각한 마을에 머물고 있고, 우리 신전에서 신전 밖까지 살피기엔 인원이 부족하지.”

그것은 한나도 이미 며칠간 보아서 알고 있었다.

세자르뿐만 아니라 신관들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밀려드는 신도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걸.

그냥, 답답해서 신전을 탓한 것일지도 몰랐다.

“…….”

입이 탔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입안이 꺼끌거렸지만 차마 손에 들린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침묵을 유지하던 한나가 입을 열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건가요.”

“뭘.”

한참 만에 떨어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물음에 세자르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성력 같은 거요.”

한나의 금빛 눈동자가 세자르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봐, 무슨 생각인지 모…….”

“저에게 성력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하셨죠.”

“그건…….”

한나는 짧은 고민 끝에 마음을 굳혔다.

아니, 어쩌면 신전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에서부터, 세자르를 찾아 이 방으로 오던 복도에서, 혹은 마을에서 그들을 마주했던 그 순간, 마음이 굳어 있었을지도.

“그 검사, 지금 하죠.”

만약 정말 자신에게 힘이 있다면 지금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치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마을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비록 그게 고단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다.

대단한 인류애나 희생정신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평소 알던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성력을 눈 가리고 귀 닫고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살다가 후에 자신에게 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발 뻗고 살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혼자 아이들을 잘 키운다고 한들, 자신은 떳떳할 수 있을까?

“그대에게 힘이 있다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지 몰라. 중앙 신전에서 하이에나처럼 그대를 찾으러 올 테고, 아이들과 헤어지게 되겠지.”

세자르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고지해 주었다. 한나가 쓸쓸하게 대답했다

“미래는 미래고, 현재의 나는 이 사태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요.”

“하…….”

세자르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라리, 그런 마을을 보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댄 신관이 되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닌가?”

“……맞아요.”

한나는 동의했다.

예전의, 아니 불과 마을에 내려가기 전까지 자신은 악당들에게 픽픽 죽어 나가는 엑스트라가 되고 싶지 않아 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할래요. 절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비겁자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다.

결의에 찬 한나의 눈빛을 본 세자르는 더 이상의 회유는 통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했다.

“잘 생각해.”

“알려 줘요. 그거, 어떻게 쓰는 건지.”

“이 모든 일이 신의 시험일 수도 있어.”

세자르는 중앙 신전이나 다른 것을 차치하더라도, 한나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랐다.

“누군가의 기도가 신을 통해 저에게 닿은 것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가 몇 년간 애써 감춘 것이 물거품이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능력을 숨긴 세자르에게 징계가 내려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징계까진 아니더라도 교황의 잔소리 정도는 듣겠지.

하지만 세자르는 한나의 빛나는 눈동자 앞에 무력해져 버렸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이 지금 한나가 행하려는 길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대 방식으로 알려 주지.”

그래서 결국 세자르는 방 안의 주전자를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미천한 종이 신의 뜻을 꺾을 수 없으리란 것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돌고 돌아 그날이 오늘에야 찾아왔을 뿐.

* * *

두 사람은 신전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엔 평소 한나가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솥이 있었다.

“평소 차를 만들 때 어떤 마음으로 했지?”

“누군가 아플 땐 낫길 바라면서 끓였고……. 평소엔 다들 기운 차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했죠.”

“그게 그대의 기도겠지. 지금도 간절히 바라면서 만들어 봐.”

“……정말 될까요.”

호기롭게 시작하긴 했으나, 한나는 혹시라도 자신에게 성력 같은 게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미련 없이 쏟아 보라고.”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솥에 물을 가득 부었다. 불을 켜고 물이 데워지길 기다리면서 어딘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세자르는 말없이 물을 끓이는 한나를 주시했다. 그 역시 한나의 능력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우선 전 물을 끓여요. 보통 이 단계에서 걱정이 많이 해요.”

세자르와 한나는 서로 복잡한 속내를 품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물이 끓을 기미가 보이자, 한나는 찬장에서 찻잎을 꺼냈다.

“그리고 찻잎을 신중하게 골라요.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지만 왠지 딱 맞는 뭔가를 찾는달까요.”

몇 가지 찻잎의 향을 맡던 한나가 말린 노란 꽃의 향을 맡다 살며시 웃었다.

“오늘은 이거네요.”

하얀 손 위로 꽃잎이 탈탈 떨어졌다.

“물이 끓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져요. 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이상하게 시간이 금방 가거든요. 오늘은 식는 데 오래 걸리겠네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전 아마 미래에 오늘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네요.”

“자업자득이지.”

팔짱을 끼고 테이블에 엉덩이를 기댄 세자르가 답하자, 한나는 피식 웃었다.

“그대는 왜 신관이 되는 걸 기피하지?”

세자르가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다. 그는 누구나 열망하는 신관의 타이틀을 질색하는 한나의 모습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자르 님은 신관이 꿈이었나요?”

“사실 내 꿈은 농부였어.”

그의 대답에 한나는 웃음이 터졌다. 여태 우울했던 기분이 차를 끓이면서부터 나아지고 있었다.

“농부는 엄청 부지런해야 하거든요?”

“씨만 뿌려 두면 절로 자랄 텐데.”

“농부들이 들으면 삽으로 때리겠어요.”

세자르는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신관의 삶도 팍팍하긴 마찬가지였다. 새벽기도에 아침기도, 저녁기도까지 부지런하지 못하면 견습 딱지도 떼지 못하고 나가떨어질텐데.

“그냥, 세자르 님도 평범한 삶을 원했던 거죠?”

“그댄 평범하고 싶나?”

“네. 그냥 조용히, 아이들을 돌보다가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신관이라고 다 특별하진 않아.”

“세자르 님이 권능을 얻었을 때,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느끼지 않았나요?”

“나야 모를 수가 없지.”

다소 거만한 답이었지만 한나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특별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저도 특별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한 까닭은 당연히 있었다.

바로 자신이 소설 속 인물에 빙의했다는 것부터가 평범과는 거리가 멀고, 어쩌면 신이 자신을 이용하려 하거나, 지켜보고 있거나, 혹은 아니꼬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제가 피눈물을 쏟으면서 후회하거든, 그냥 위로해 주세요.”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

그가 낮게 대꾸했다.

지금은 저렇게 툴툴거리지만 제 낯빛을 보고 걱정을 숨기지 못하던 세자르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이제 한나는 세자르의 성격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물이 제법 식었네요.”

수다를 떨다 보니 물이 적당히 식었고, 한나는 준비해 둔 꽃잎을 손에 탈탈 털었다.

“찻잎을 넣는 건 눈치싸움이에요. 지금이다, 하는 때에 솔솔 뿌리는 거죠.”

한나의 손에 가득 담긴 노란 꽃차잎이 솥의 물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때 세자르의 눈이 빛났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는 꽃잎에 성스러운 빛이 반짝이는 금사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이게 끝이에요. 간단하죠?”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그러고 나면 피곤하진 않나?”

“음……. 요즘 잠이 많아지긴 했어요. 세자르 님 정도는 아니지만요.”

이렇게 형상을 나타낼 정도의 신력이 깃든다면 분명 평범한 신관은 멀쩡할 리 없었다. 세자르는 한나의 말처럼 그녀가 특별할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마을에 나누어 주는 건 우리가 하지.”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자발적으로 도우려는 신도들이 있을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그대의 도움을 받아 건강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연히 발 벗고 나설 테지. 다만 입단속을 한다 해도 암암리에 그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세자르는 여전히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니까.”

선하게 웃는 한나의 모습에 세자르는 가슴 한편이 찡해져 왔다. 대의를 위하는 것은 대신관인 세자르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전 여기서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 볼게요. 대신관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차를 전해 주세요.”

“성수라고 하지.”

“네?”

“겨우 차라고 하기엔 귀한 것이니. 그리고 먹는 사람들도 성수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때론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세자르의 말에 한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자신이 만든 것을 성수라고 하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한 느낌이라서 말이다.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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