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흥흥~”
위기의 신전. 그리고 콧노래.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의 울상을 보고 나오는 한나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웠다.
“고소해 죽겠단 말이지.”
한나는 통쾌한 와중에 보육원에 다가가자 문득 걱정이 되었다.
예산 삭감이 된다면 악독한 대신관은 아이들을 팔아 치워 돈을 메꿀 것이고, 혹여 과하게 책잡혀 신전이 통째로 사라진다면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어떻게 해야 대신관만 쫒아낼 수 있을까.
‘역시 그것밖에 없어.’
한나는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열쇠는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중앙 신전 측과 딜을 해야 한다.
그날 밤, 고요한 신전.
보자기를 둘러쓴 한나가 어둠을 틈타 금녀의 구역으로 향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 * *
“아무도 없겠지?”
두리번, 두리번.
마치 체이슨이 그랬던 것처럼 한나는 열심히 주위를 살폈다.
“그래 이 새벽에 누가 때나 벗기고 있겠어.”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남자 욕탕으로 들어섰다.
‘이런 곳에 숨겨 놓으니 신전을 이 잡듯 뒤져도 못 찾았지!’
그동안 비밀 장부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금녀의 구역에 숨겨 뒀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긴 몸을 청결하게 하는 신성한 곳이라고! 여기에 장부 같은 걸 숨기는 짓은 하지 말란 말이다!’
내부는 여자 욕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안개가 서려 시야가 어두웠지만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쪼르륵, 똑. 똑.
온천수가 흐르는 소리가 적막 속에 이어졌다. 한나는 보자기로 잘 가린 얼굴을 더욱 싸매며 욕탕 근처 풀숲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야외와 이어진 이곳에 숨길 만한 곳이라면 수풀이 우거진 곳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특히 돌무더기 어딘가라던지.
꼼지락, 꼼지락.
한나는 그렇게 한참을 의심스러운 곳을 뒤적였다.
‘설마 진짜 땅 파고 묻어 놓은 거야?’
아무리 뒤져도 금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자, 혹시나 해서 주머니에 챙겨 온 삽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좋다. 파자.”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아니, 삽을 들었으면 땅이라도 파야지!
결국 삽을 꺼내 들었다.
‘어디부터 파지?’
넓은 풀숲을 다 팔 수는 없고, 그나마 의심스러운…….
“거기, 벚나무 밑.”
‘그래. 딱 이 벚나무가 뭔가 숨기기엔……. 아니, 근데 방금 누가 말한 거야?’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쪼르륵 흘렀다. 굳어서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으악!”
욕탕에 사람이 있었다. 들어올 때는 온천에서 피어오른 수증기 때문에 몰랐는데, 잔잔한 온천물에 사람이 있었다.
한나가 외쳤다.
“뭐, 뭐하세요!”
“여기서 뭘 할 것 같아?”
“어, 언제부터 계셨어요!”
“그쪽이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그는 다름 아닌 세자르였다.
들어온 지가 언젠데 왜 여태 욕탕 뒤적이는 꼴을 보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냐고!
“왜…… 왜 인기척을 안 내세요?”
“지금 질문해야 할 사람은 나 아닌가?”
그제야 한나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났다.
남자 욕탕.
“…….”
“여기서 뭐하는 거지?”
말문이 막혔다.
늦은 새벽, 삽을 들고 남자 욕탕을 기웃거리는 여자.
“……그게…….”
한나의 금빛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욕탕의 물이 출렁였다.
“와! 지금 일어나시는 건 아니죠! 악!”
세자르의 상반신이 드러나자마자 한나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런 한나를 보는 세자르의 얼굴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무표정이었다.
저벅저벅.
물에 젖은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 자식? 허튼짓을 하려고?
한나는 몰래 침입한 범죄자가 자신이라는 것도 잊고 삽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 힘 빼지. 최소한은 입고 있는데.”
세자르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한나는 그제야 천천히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다행히 세자르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휴.”
“왜 거기서 안도의 한숨이 나오지?”
“못 볼 꼴 보나 해서 긴장했더니…….”
“이봐, 못 볼 꼴까진 아니라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세자르는 은근히 자존심이 긁힌 것처럼 발끈했고, 한나는 이 상황에 그걸 따질 때인가 싶어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한나는 그제야 세자르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꽤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거 밝기만 더 밝았어도…….
한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좁히며 원단의 투명도를 가늠했다. 그리고 물이 또르륵 흐르는 그의 상반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물에 젖어 반들반들한 몸은 언뜻 보아도 탄탄하고 굴곡이 유려했다.
신관이 이렇게까지 몸이 좋을 필요가 있나? 겉으로 보기엔 비리비리 약골같이 생겼는데 의외였다.
아주 당당히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한나의 집요한 시선에 세자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뭘 찾는 거지?”
세자르는 수건을 집어 어깨 위로 둘렀다. 덕분에 한결 눈 두기가 편해졌다.
“아. 네…… 네?”
그의 말에 한 박자 늦게 한나가 반응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이제 추궁당하는 일만 남았구나.
“아니, 뭐……. 요즘 경기도 안 좋고 해서 좋은 거 없나 싶어서…….”
“신전에서 뭘 훔치려고 했다고?”
까딱 잘못 말했다간 대신관보다 자신이 먼저 쇠고랑을 차고 들어가게 생겼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한나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남탕에 삽을 들고 침입한 이유 따위가 나올 리 없었다.
“휴.”
잠시간의 고민 후 한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그냥 시원하게 말하자.
“사실 찾고 있는 게 있어요.”
“뭔데?”
“일단 본론을 꺼내기 전에!”
한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에게 정보가 하나 있어요. 이 정보가 대신관님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대신관님도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거래를 하자고?”
여태껏 시큰둥한 표정이던 세자르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일단 들어 보지.”
세자르는 만사가 귀찮아 사건 같은 것에 휘말리지 않을 타입 같았지만, 의외로 쉽게 넘어왔다.
“사실 이 신전은 썩어 있어요.”
“오.”
시작부터 거침없이 내뱉는 말에 세자르의 흥미가 한 단계 진화했다.
“대신관은 예산이며 지원금이며 빼돌리기 바쁘고, 그 부하 신관들은 보육원 아이들을 팔아치울 생각이나 하고 있어요.”
“계속해 봐.”
세자르가 팔짱을 끼며 한나의 말을 기다렸다.
“전 분명 신전 어딘가에 장부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이곳저곳을 뒤졌죠.”
그러면서 계속하라는 듯 턱짓했다.
“그런데 아무리 밤마다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제! 욕탕에 몰래 들어가는 체이슨 신관을 봤죠. 그의 손에 뭔가 들려 있었는데, 그게 딱 내가 찾는 것이겠구나. 느낌이 오지 뭐예요.”
“흐음…….”
세자르가 팔짱 낀 손을 풀어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런데 그걸 왜 그대가 찾지?”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 귀여운 아이들이 팔려 가게 생겼으니까요. 제가 장부를 찾아서 대신관을 협박하든, 대신관이 옷을 벗게 하든 어떻게든 써먹어 보려고 찾은 거죠.”
“그냥 신전에 신고해도 되지 않나?”
“물증도 없는데 믿어 줄까 싶기도 했고, 중앙 신전이 한통속은 아닌지 확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한나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혹시 신전이 잘못되면 아이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야 하니까요.”
한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흠.”
세자르는 마치 짐승처럼 귀가 있다면 바짝 접혀 있는 것처럼 기운이 빠진 한나를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일단 파지.”
세자르가 벚나무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한나는 잽싸게 벚나무 아래로 뛰어갔다.
“근데 왜 이 나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흙색도 다르고, 잡초도 없고, 흔한 떨어진 꽃잎 하나 없는 게 부자연스럽잖아.”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옆의 땅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수북했는데 유독 이곳만 깨끗했다.
한나는 감탄했다. 관찰력이 좋은데?
“전 그냥 감으로 찍었는데. 어쨌거나 의견은 같네요.”
그녀의 말에 세자르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의 얼굴 상황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한나는 열심히 땅을 파낼 뿐이었다.
퍽퍽, 퍽퍽. 툭.
“어…….”
삽 끝에 무언가 부딪혔다. 단단한 상자였다.
“이렇게 잘 풀리면 또 찜찜한데.”
일이 너무 잘 풀리면 의심해 봐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은데.
“꺼내 봐.”
세자르가 지시했다.
“아, 네.”
한나는 손으로 삽에 걸린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아주 단단했다. 물 샐 틈도 없이 완벽하게 잠겨 있었다. 그 앞에는 붉은색의 평평한 돌멩이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어…… 이거, 여는 법 아세요?”
“마법 잠금장치군.”
“와.”
순간 한나는 마법 금고 같은 것이 얼마나 비쌀지 가늠해 보았다. 장부 하나 숨기는 데 이런 비싼 것을 쓰니 횡령을 해도 해도 돈이 모자라지!
한나는 상자를 세자르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세자르는 받아들지 않고 상자를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받으세요?”
“이게 뭔 줄 알고.”
“설마, 여는 것도 제가 해야 해요?”
“거기, 돌에 비밀 문양을 그리면 열려.”
“아. 그렇구나!”
떡하니 박혀 있는 돌의 쓰임새를 알게 된 한나가 방긋 웃었다.
“뭔데요?”
비밀 문양을 묻는 질문에 세자르는 미간을 구기며 한나를 바라보았다.
“……모르시겠죠.”
저도 모르는데 어쩌죠.
한나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아는 거 없어? 대신관 생일이나 자주 쓰는 비밀번호 같은 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지금 이 몸 생일도 모르겠는 마당에.
“아!”
그때, 한나의 뇌리에 무언가 스쳤다.
“설마…….”
그때 액자 뒤에서 발견했던 숫자 그림이 떠올랐다.
“생각나는 게 있나?”
“끙…….”
한나는 그날 보았던 숫자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겨우 몇 개 안 되는 숫자가 왜 갑자기 떠오르질 않는 건지.
“2는 확실하고, 5였나, 6이었나……. 마지막은 8이었는데.”
“528.”
“음? 어떻게 알아요?”
“제스모 여신의 은총이 내려진 해지.”
세자르의 설명에 한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횡령하는 주제에 무슨 그런 날짜를 붙여. 완전 신성 모독이 따로 없네요.”
세자르 역시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어떻게 그려져 있었지?”
“동그란 원 안에 겹쳐서 써 있었어요.”
“그대로 그려.”
세자르가 얼른 해 보라며, 금고를 눈짓했다.
“그, 제가 손이 더러운데.”
한나는 처음 써 보는 마법 물품에 살짝 겁이 났다. 하지만 세자르는 그녀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나 역시 그의 의중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상관없겠죠.”
결국 한나는 손가락을 붉은 돌 위에 올렸다. 그녀의 손이 닿자 돌 내부에서 빛이 일렁였다.
“엄마야!”
놀란 한나가 상자를 떨어뜨렸고, 세자르는 자신의 발로 떨어지는 상자를 보고 재빠르게 발을 뺐다.
“……보기보다 날렵하시네요.”
세자르는 또 말없이 상자를 턱짓했고, 한나는 쪼그려 앉아 돌 위에 다시 손가락을 가져갔다.
“5……. 2……. 8…….”
결국 한나는 자신이 보았던 문양 그대로 숫자를 그렸다.
그러자 붉은 돌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자 덜컥, 소리와 함께 상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됐다.”
그곳엔 아니나 다를까 장부가 빼곡했다. 심지어 금덩이도 몇 개 보였다.
‘혼자 열어 볼걸.’
적어도 금 하나 정도는 슬쩍 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움에 탄식이 흘렀다.
“하나 챙기지 그래?”
한나의 그런 마음을 읽은 것처럼 세자르가 말했다.
“그…….”
그럴까요. 그럼? 감사히 쓰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저건 자신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죠. 다 신전의 자금인데.”
“그래?”
세자르는 건성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금괴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죠.”
그리고 그 손을 한나가 덥썩 붙들었다.
어디서, 밑장, 아니! 금괴 빼기야?!
“…….”
그녀의 저지에 세자르는 말없이 손으로 집은 금괴를 옆으로 옮겼고, 금괴 밑에 있던 장부를 집었다.
“흠흠.”
한나는 어색하게 그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분명히 금괴 하나 챙기려는 것 같았는데.
“위험한 마법이라도 걸려 있을까 봐……. 흠흠.”
“고맙군.”
세자르의 눈빛이 말했다. 응. 안 믿어.
“장부가 맞군.”
세자르의 눈이 빠르게 활자를 훑었다.
“어때요? 많이 해먹었나요?”
와중에 한나는 그게 궁금하긴 했다.
얼마나 해먹었을까? 많이 빼돌렸나? 저 정도 횡령이면 어떤 벌을 받을까? 궁금증에 몸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부탁은 뭐지?”
장부를 훑던 세자르의 눈길이 한나에게 옮겨갔다. 세자르는 한나가 말했던 거래의 조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
장부를 찾은 것에 기뻐 잠시 잊고 있었다. 한나가 말을 이었다.
“저희 보육원 없어지지 않게 힘써 주세요.”
“그러려면 신전도 사라지지 않아야 할 텐데.”
“대신관만 제대로 된 사람으로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적어도 보육원은 사라지지 않아도 되니까.
“직장 때문인가?”
“네?”
“이 일에 잘못 얽히면 그대도 그만둬야 할지도 몰라.”
“아…….”
한나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 몸의 주인이었던 한나가 대신관의 뜻에 따라 나쁜 짓을 했다면?
아니다. 그럴 리는 없었다.
남아 있는 기억 속 어디에도 떳떳하지 못한 기억은 없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보육원이 존재하길 바라요. 좋은 선생님이 생기고 아이들만 잘 자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한나는 자신이 해고되고 다른 선생과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들을 상상하자 조금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세계에, 아이들 교육에 무지한 자신보다 전문적인 사람이 오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한나는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야 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세자르의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에 한나가 제법 오랜 시간 머물렀다.
“그렇군.”
아주 늦게 들려온 대답은 여전히 무미건조했지만.
* * *
“이건 모함입니다!”
날이 밝자 신전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 장부는 생전 처음 봅니다!”
“아이들을 팔다니요?”
“이, 이보시오!”
대신관과 체이슨, 그리고 대신관의 끄나풀이었던 다른 신관들이 줄줄이 포박되어 나왔다.
“와. 일 처리가 아주 빠르네.”
한나는 그 영화 같은 광경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감탄했다.
새벽에 파헤친 장부는 커티스의 손에 들려 있었고,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수많은 성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 장부가 있고, 장부의 비밀번호는 집무실 액자 뒤에 예쁘게 적어 놓으셨더군요. 그쪽 신관이 아이들을 팔아넘긴 조직도 지금 여기와 상황이 같을 겁니다. 흑마법의 실험체라니. 신의 종이라는 작자들이 그딴 짓을 해?”
처음에는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가던 커티스는 어느 순간 화가 났는지 언성을 높였다. 여차하면 포박당해 있는 대신관을 발로 걷어찰 기세였다.
“서, 선처해 주십시오.”
대신관은 이미 틀렸다는 것을 직감하고 무릎으로 기어가 커티스의 발치에서 빌었다.
“지금 당장 성스러운 검으로 베어 버리지 않은 것으로 충분한 선처를 한 것 같은데. 하암.”
커티스의 뒤로 세자르가 하품을 하며 부스스한 몰골로 등장했다. 딱 봐도 지금 막 일어나 슬리퍼를 끌고 나온 모습이었다.
그의 등장에 성기사들이 비켜서며 길을 만들었다.
‘중앙 신전 대신관은 정말 높은 사람인 모양이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엉망진창 모습의 등장에도 성기사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세자르의 특별한 능력 때문인가.
근데 세자르는 언제 그 장부를 다 확인하고, 밀조직과 신전으로 성기사들을 부른 것일까?
무능력한 한량 같았던 그가 새롭게 보였다.
그가 항상 피곤한 건 어쩌면 새벽에 몰아서 일을 하는 편이라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선생님. 선생님, 저거 뭐예요?”
기둥 뒤에 숨어 즐거운 구경을 하던 와중, 뒤에서 마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와! 기사들이 잔뜩 있어!”
흥분한 제레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선생님. 이제 신전은 없어지나요?”
눈치 빠른 이안은 벌써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에 마샤와 제레미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뭐? 신전이 없어져?”
“대신관이 잘못해서 우리 신전 사라지는 거야?”
이안의 말에 아이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냐. 안 없어져. 걱정 마.”
한나는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정말요?”
아이들은 불안해 보였다.
다 큰 사람들도 변화는 두려운데, 자신의 보금자리가 있는 신전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불안할지는 굳이 가늠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치만, 저렇게 잡혀가는데…….”
“걱정 마. 선생님이 다 알아봤는데, 나쁜 아저씨들만 잡혀가는 거야. 신전은 그대로 있어. 너희도 그대로 있는 거고.”
한나가 눈시울이 빨개진 마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은요?”
그런 한나에게 제레미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같이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어딜 가겠어.”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떨리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깍!”
슬퍼지려던 한나의 감성을 파탄 낸 것은 꼬꼬의 울음소리였다.
까악거리는 울음소리에 놀란 한나가 잽싸게 마샤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꼬꼬의 부리를 잡았다.
“마샤, 꼬꼬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 데려오면 안 된다니까?”
갑작스러운 꼬꼬의 등장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샤의 꼬꼬는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었다.
태어난 지 삼 일 된 녀석이 벌써 보송보송한 털에 날개를 퍼덕이고 있으니, 이건 절대 평범한 새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심지어 뿔도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고!
“절대 다른 사람……. 특히 저기, 신전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돼. 알겠어?”
“끕! 끕!”
한나의 손에 부리가 잡힌 꼬꼬가 부리를 빼내려 발버둥쳤다.
하, 도대체 얜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혹시 보육원을 떠나야 한다면 꼬꼬를 훔쳐 달아나야 하는 건지. 한나는 미래가 막막했다.
콱.
그때, 몸을 비틀던 꼬꼬가 결국 부리를 빼내 한나의 손가락을 물었다. 한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악물어야 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 정말!’
“선생님, 많이 아파요?”
한나가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글썽이자 이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그래도 한나는 끝까지 아이들에게 웃어 주었다.
‘내가 저 꼬꼬인지 똥꼬인지 탕 끓여 먹어 버린다. 정말.’
* * *
“안녕히 계십시오. 잘 있으렴.”
신전의 정문 앞에서 커티스가 한나와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정들 새도 없이 이별이네요.”
정말 커티스와는 말도 몇 번 섞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 온 뒤로 그는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로 기계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신전에 있다 보면 또 인연이 닿겠죠.”
“네. 조심해서 가세요.”
한나는 보육원에서 해고되지 않았다. 대신관과 아무 접점이 없으며, 장부를 찾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신전에선 오히려 한나의 월급을 올려 주기로 했다.
아주 큰 이득이었다.
“저기…….”
한나의 옆에서 치마를 쥐고 있던 제레미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제레미가 저렇게 몸을 수줍게 비틀 때면 꼭 사고 치기 직전이었는데!
“그 검,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나요?”
제레미가 성기사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성기사는 웃으며 제레미에게 다가오라고 했다.
다행히 사고는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나는 마샤를 살폈다. 특히 호주머니 속에 뭐가 없는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휴.”
별 이상 없었다. 이안이야 걱정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 인사를 빨리 끝나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이.”
떠나는 마당에도 느지막이 나타난 세자르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 어쩜 저렇게 시종일관 변함없는 모습인지.
“꼬맹이들.”
세자르가 아이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눈 맞췄다.
“신관 아저씨.”
“난 대신관이야.”
굳이 아이들에게 그 차이를 집어야 하는 건지. 유치한 모습에 한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쁜 대신관 아저씨 쫓아내 줘서 고마워요!”
마샤가 해바라기처럼 밝게 웃으며 세자르에게 말했다.
“또 누가 나쁘게 굴면 말해도 돼요?”
마샤는 세자르를 영웅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세자르에게서 나온 단호한 거절에 한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그래, 라고 하고 가면 될 것을! 왜 우리 마샤를 상처 주고 난리야!
“너흰 이 선생님한테 말해.”
“선생님요?”
“이 선생이 나보다 일을 잘하거든.”
그의 말에 한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고, 어깨도 조금 으쓱해졌다.
“맞아요! 우리 선생님은 최고예요!”
마샤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나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도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오는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출발하지.”
세자르의 말에 제레미에게 검을 구경시켜 주던 성기사도 몸을 일으켰다.
제레미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한나가 혀를 찼다. 저렇게 무기를 좋아해서야.
“조심히 가세요. 무탈하시길 바라요.”
겨우 며칠 함께했다고 정이 든 것인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세자르는 늘 그랬듯 건성으로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성기사들의 행렬이 뒤따랐고, 대신관과 그 일행들이 묶인 채 실려 있는 수레도 탈탈거리며 따라갔다.
한나는 멀어지는 비히루드 대신관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아요. 우리.”
속이 다 후련했다. 한참을 떠나는 이들을 지켜보던 한나는 산뜻하게 발길을 돌렸다.
“자! 이제 행복한 보육원으로 돌아갈까?”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남은 이들은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
“네!”
“우리 간식 먹어요?”
“아직 점심도 안 먹었거든.”
“원래 간식은 기분 좋을 때마다 먹는 거거든?”
“난 꼬꼬부터 볼래!”
다시 아이들이 시끌벅적해졌다.
투닥거리는 제레미와 이안, 꼬꼬 노래를 부르는 마샤.
“행복한 한때지.”
아이들의 정신없는 말소리에 기력은 쭉 깎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소란스러움이야말로, 한나에겐 행복이었다.
* * *
순탄한 나날이었다. 나쁜 놈들이 없는 신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제레미! 빨래 밟았잖아!”
오늘도 한나는 동산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깔끔한 이안 덕에 날이 좋을 때면 햇빛 소독을 거를 수 없었다.
그런 소중한 이불을 제레미가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 선생님! 꼬꼬가 제 간식 가져갔단 말이에요!”
“걘 도대체 정체가 뭔데 잡식이야!”
꼬꼬의 정체는 2주가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았다. 아이 주먹만 하던 녀석이 2주 만에 멜론 크기가 됐다는 것은 아주 골치 아픈 일이었다.
“선생님! 꼬꼬 날아요!”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뿔 달고 날아다니는 회색 새를 남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걔 이족보행 연습시켜. 마샤.”
꼬꼬를 쫓아 뛰어가는 마샤를 보며 한나는 울상을 지었다.
“선생님.”
“응?”
이안이 정신없는 한나에게 다가왔다. 한나는 남은 빨래를 탈탈 털면서 이안을 돌아봤다.
“누가 온 것 같은데요.”
“누가 와?”
그의 말에 동산 밑을 내려다보니 정말 신전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누구지? 아! 새로 온 신관들인가?”
비히루드 대신관이 잡혀간 지 2주가 다 되도록 공석이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하는 일 없는 신전이라 그런지 그들이 없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마샤!”
한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온다면 분명 보육원도 확인하러 올 텐데!
“마샤! 얼른 꼬꼬 닭장에 넣어! 그리고 빨리 방에 해골이랑 귀신같은 인형들 보물 상자에 넣어!”
지금 보육원의 폭탄은 마샤였다. 누군가 마샤의 이상한 취향을 보고 까무러치면서 아이를 왜 이렇게 키우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거기다 대고 저 친구가 흑마법사의 새싹이라 취향이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꼬꼬부터 넣고 와.”
제일 문제는 꼬꼬였지만 말이다. 한나는 빨래를 대충 던져 널었다.
그에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나는 전속력으로 뛰어 마샤의 방으로 향했다.
“악!”
마샤의 방에는 해골, 저주 인형, 눈알이 빠지고 솜이 튀어나온 곰돌이, 빨간 물감을 부어 을씨년스러운 커튼이 한나를 반겼다.
한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방을 정리해야 했다.
* * *
“헉……. 헉……. 이안, 누구 왔어?”
열심히 청소를 끝낸 한나가 물었다.
“신관님이 신전으로 모이래요.”
“후. 그래. 가자.”
한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마샤, 꼬꼬는 닭장에 넣었어?”
“네. 그런데 꼬꼬가 닭들을 잡아먹으면 어쩌죠?”
“거기 닭들 보기보다 세. 그리고 꼬꼬는 생식 안 해.”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꼬꼬는 새 주제에 벌레도 먹지 않았고, 사료는 물론이고 혹시나 해서 던져 준 날고기도 먹지 않았다.
시름시름 굶어 가던 꼬꼬가 눈이 뒤집혀 아이들의 밥상에 난입해 잘 익힌 고기와 생선을 뜯어 먹는 모습을 봤을 때의 충격이란…….
“정말 이상한 녀석이지.”
이제는 한나도 꼬꼬의 정체가 궁금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 저기인가 보다.”
신관들이 회의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나가 신관들에게 인사하자 아이들도 한나를 따라 꾸벅 인사했다.
“새로운 대신관님이 오셨나요?”
“네. 지금 인사하러 가시면 됩니다.”
“감사해요.”
새로 온 신관이 제법 많았다. 신전이 드디어 제대로 굴러가려는 모양인지.
한나는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뭐지. 뭔가 익숙한 목소리인데.
끼긱, 문이 열렸다.
“…….”
“여어.”
네가 왜 여기 있냐.
“그 표정은 환영한다는 의미지?”
세자르였다.
훈훈하게 안녕을 고하며 떠나보낸 것이 2주 전.
“당신! 여기! 왜!”
도대체 왜 네가 여기 있냐고! 말문이 막혀서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한나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손으로 모았다. 우리 애기들의 숙적이 될 녀석과 다시는 얽히지 않길 바랐건만.
“잘 부탁한다는 말로 알아듣지.”
한나가 어버버거리자 세자르는 짧게 혀를 찼다.
“나가 봐.”
까딱, 까딱.
저 건방진 손을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끼익, 툭.
문이 닫히고 한나는 복도 벽에 몸을 기댔다.
‘망했다.’
이 신전에는 악당 꿈나무가 셋, 악당 잡는 살인귀가 하나.
“안녕하세요.”
그때, 커티스가 눈을 곱게 접으며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쟤도 세자르 앞잡이…….’
살인귀가 둘.
“와! 성기사님이다!”
살인귀가 셋.
“인생.”
아까까지만 해도 화창하게 눈부셔서 아름다웠던 하늘이었건만, 올려다보는데 눈물이 흐르려 하고 있었다.
‘신님, 거기 계신가요?’
한나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원작은 이제 다 틀어졌다고 계시를 내려 주세요.’
제발요.
* * *
인간의 적응력은 위대하다.
한나는 이 환장할 상황에 금방 적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는 대신관 자리에 앉아 손을 까딱이는 세자르를 보면서도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보육원 예산은 오늘 중으로 전달해드리죠.”
칼 같은 일 처리. 횡령 없는 깨끗하고 투명한 정산.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신도들이 보낸 간식이 있는데 이것도 보육원으로 보내면 좋겠군요.”
“고맙습니다.”
전에 비하면 아주 살맛나는 직장이 되었다.
솔직히 항상 건성건성, 관심도 열의도 없어 보이는 세자르가 신전을 잘 운영할까 의심이 들었었는데 의외로 신전은 너무 잘 굴러가고 있었다.
세자르의 오른팔인 커티스가 완벽주의에 가까운 일 처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저런 유능한 사람이 세자르를 주군처럼 모시는 걸까.
원작에서도 커티스는 세자르의 앞잡이 노릇을 했었다.
“아. 오늘 마을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알고 계세요?”
같은 제도 안이라고는 하나, 그들이 변방의 작은 축제까지 알지 못할 것 같아 한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축제?”
그러자 심드렁하게 서류를 뒤적이던 세자르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세자르와 눈이 마주쳤던 한나는 아주 가볍게 시선을 돌려 커티스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아세요?”
“몰랐습니다. 마을의 축제라면 한번 가 봐야겠군요.”
“그럼요. 동네 사람들과 얼굴도 트고, 제법 재미있을 거예요. 저도 오늘 아이들을 데리고 불꽃놀이를 보러 갈 거거든요.”
“불꽃놀이?”
또다시 세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 용품이라 비쌀 텐데, 제법 돈 쓰는 축제네.”
세자르의 입에서 아주 긴 말이 나왔다. 그것은 즉,
“가야겠군.”
그에게 호기심이 동하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네. 재미있게 즐기고 오세요.”
한나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같이 가자고 하지 마라.
우리 보육원 일행에 끼겠다고 하지 마라. 제발, 쳐다보지도 마라.
“나도 끼워 줘.”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세자르가 비열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커티스 님.”
“전 오늘은 바빠서 말입니다.”
저 화상 좀 치워 달라는 한나의 부탁을 사전에 잘라 버리는 커티스였다.
“……하.”
무덤을 팠구나.
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자, 선생님이 뭐라고 했지?”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이안 통과.
“마샤.”
“꼬꼬는 닭장에. 예쁜 해골이나 인형을 봐도 절대 혼자 뛰어가지 않는다.”
조금 불안하지만 통과.
“좋아, 제레미.”
“맛있는 걸 준다고 쫓아가지 않는다. 멋진 검을 봐도 만져 보겠다고 떼쓰지 않는다.”
“또.”
“욕하지 않는다.”
“좋아.”
사람이 많은 축제에서는 아이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아이들은 어떤 것에 정신이 팔리면 한나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사라지기 일쑤였다.
평소의 마을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겠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자, 자, 행동강령 준수하고! 재미있는 불꽃놀이 구경하자!”
그래도 축제는 축제인지라 한나도 조금 들떠 있었다. 모처럼 새로 산 옷을 입고 머리도 높이 묶었다. 움직일 때마다 달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
“이제 신전 입구로 가자.”
“근데 선생님, 저건 뭐예요?”
“응?”
신전 입구에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에이, 설마.”
한나는 설마설마했다.
겨우 10분이면 쪼르륵 가는 길을, 그것도 축제 구경을 가면서 마차를 타고 가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진 않았겠지.
“손님이겠지.”
―라는 생각은 정확히 빗나갔다.
“타.”
“…….”
“…….”
“…….”
한나와 아이들은 멀뚱멀뚱 눈을 끔뻑였다.
“지금 그걸 타고 다신다고요?”
“다리 아프잖아.”
마차 안에서 거의 눕듯이 기댄 세자르는 나태함의 끝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내려요. 축제 구경은 걸어서 가는 거예요.”
한나는 단호하게 하차를 요구했다.
이 인간은 놀아 본 적도 없는 건가.
싸늘한 한나와 아이들의 눈빛에 세자르가 어기적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결국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내려가고 있었다.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나였다.
“도시 촌놈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어.”
“그러게요.”
이안이 맞장구쳤고, 한나와 이안은 서로 통했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나만 빼놓고 웃지 말고 같이 웃어!”
마샤가 한나의 치마를 당기며 말했다.
“으앗! 마샤, 그러다 치마 찢어져!”
“또 종일 치마 잡고 늘어지겠네. 그러게 마샤는 떼놓고 오자니까요.”
또다시 시끌벅적해졌고, 세자르는 한나와 아이들을 뒤따르며 그것을 구경했다. 보고만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와와!”
“마을에 사람 이렇게 많은 거 처음 봐!”
아이들은 축제 구경이 처음이라고 했다. 한나가 없던 지난해는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 나와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거리 음식 맛있는 게 많대. 우리 맛난 거 다 먹자!”
“선생님! 월급 있어요?”
한나의 월급을 걱정하는 9살 꼬마의 말에 세자르가 낮게 웃었다.
“선생님 이제 돈 많아. 그리고 오늘은 물주가 있잖아!”
한나의 시선이 세자르에게 닿았고, 아이들은 이제야 세자르가 동행하는 이유를 찾은 듯 손뼉을 쳤다.
“물주였구나.”
“물주였어.”
“오해할 뻔했잖아.”
아이들의 반응에 세자르는 조금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오! 저기 약장수다!”
한나와 아이들이 요즘 푹 빠진 것은 약장수들의 공연이었다.
“가자! 가자!”
“선생님, 저번처럼 이상한 거 사면 안 돼요!”
“아니거든. 그거 효과 좋았어.”
한나의 애매한 시선 처리가 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실 얼마 전 한나는 약장수의 말에 홀랑 넘어가 커라커라약을 샀었다.
“하지만 선생님 키는 그대로인걸요!”
“……효과가 천천히 나온댔어.”
키가 큰다는 말에 혹해서였다.
사실 한나의 몸은 건강하고 튼실하며, 얼굴도 귀엽고 머리도 몽실몽실한 분홍 머리에 눈동자는 금빛으로 빛나는 객관적으로 꽤 괜찮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이 남들보다 조금 작은 키였다.
요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자 이러다 키가 따라잡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한나가 키가 큰다는 말에 홀랑 약을 사 버린 것이었다.
‘나쁜 사기꾼.’
물론 효과는 없었다. 뼈아픈 추억만 남겼을 뿐.
“우리 저거 먹어요.”
마샤가 노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뭐하세요, 얼른 오세요.”
한나는 먹거리가 늘어선 노점으로 향하며 세자르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
세자르는 급격히 피곤해졌다.
안락한 마차를 타고 이동해서 불꽃이나 보고 돌아갈 줄 알았던 일정이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정신 사나울 줄 몰랐다.
매일 이렇게 아이들과 부대끼는 한나의 정신력이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하나 먹어 볼까. 여기 마샤 거. 이안도 받아. 제레…….”
설탕이 발린 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던 한나가 갑자기 멈췄다.
“……제레미?”
제레미가 없었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제레미가 안 보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번 축제에서 사고를 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레미라고 예상을 했었다!
“이거 먹고 있어요.”
한나는 빠르게 빵을 세자르에게 넘기고 왔던 길을 뛰어갔다.
“…….”
“이번엔 어디일 것 같아?”
“무기점.”
“훗, 난 그 옆에 술집에 걸겠어. 거기 건달 아저씨들 많더라.”
이안와 마샤는 빵을 오물거리면서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저들끼리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세자르는 도통 이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았다.
“여보쇼, 계산은?”
노점 주인이 세자르를 불렀고, 그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 * *
“제레미!”
한나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무기점이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없었다.
“제레미!”
다음으로 들른 곳은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 많은 오픈형 술집이었다.
“…….”
그곳에도 제레미는 없었다.
한참을 왔던 길을 거슬러 제레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냥 뛰어다니는 것도 힘든데,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며 다니는 것은 두 배로 힘들었다.
한나는 금세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얘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너무 뛰어다니는 바람에 놀란 종아리 근육을 손으로 두드리며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설마 이상한 사람을 따라간 건 아니겠지.’
축제에는 외지사람들도 몰린 터라 평소보다 걱정됐다. 그녀는 다소 격앙된 감정을 누르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익숙한 검은 머리가 보였다.
“제레미?”
한나는 허겁지겁 제레미에게 달려갔다.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히고 있는데도 제레미는 멍하니 바닥만 보고 있었다.
“제레미!”
한달음에 뛰어간 한나가 그의 팔을 움켜쥐자, 제레미가 멍하게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
제레미의 표정이 어두웠다.
“선생님…….”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무력해 보였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제레미를 찾으면 혼쭐을 내려고 했는데, 제레미의 슬픈 얼굴을 보자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가 버렸다.
멍하게 한나를 보던 제레미의 눈시울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그러더니 제레미는 한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치 평소 마샤가 하듯이.
“제레미……?”
한나는 이런 제레미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파요.”
“어디가? 다쳤어? 어쩌다가?”
한나가 제레미의 몸을 양손으로 붙들고 몸을 살폈다. 제레미의 신발이 하나 없었다. 발목도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왜 이렇게 됐어!”
“아파요, 선생님.”
제레미의 눈에서 뚝뚝,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당황한 한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분명 이러다 이렇게 되어서 이만큼이나 아프다며 조잘조잘거렸어야 할 제레미가 그저 아프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업힐래?”
한나는 조용히 등을 내밀었다.
“…….”
머뭇거리던 제레미가 한나의 등에 업혔다.
기운 펄펄한 남자아이라 무거우려니 했지만 등에 업힌 제레미는 너무도 가벼웠다.
한나는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그저 제레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선생님.”
“응?”
“저 아빠를 봤어요.”
“아빠?”
“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내가 기억하는 아빠가 보였어요.”
한나의 등에 기댄 제레미가 말을 할 때마다 등이 울렸다.
“아…….”
한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달려갔는데……. 계속 찾았는데…….”
저도 모르게 나올 뻔한 한숨을 삼켰다.
“아빠가 아니었어요.”
그 말에 눈물이 날 뻔했다.
“그래서 신발이 벗겨지도록 달렸어?”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제레미의 슬픔이 전달됐다.
“많이 아팠어?”
발이, 또는 마음이라는 말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빠를 쫓다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어요.”
“우리가?”
“네. 그런데 그게 더 아팠어요.”
제레미는 조용히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제레미,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마. 우린 가족이잖아. 네가 돌아오는 집에 항상 있을 거야.”
“가족? 하지만 우린 피도 안 섞였잖아요.”
“피가 섞여야 가족인가?”
“그럼요?”
주위는 시끄러웠지만 한나와 제레미는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서로의 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온기를 나누고, 웃고, 싸우고……. 그러고 다음 날 또 웃으면서 밥을 먹는 게 가족이지.”
“난 가족 같은 거 싫어요.”
제레미의 단호한 말에 한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럼 친구 하지 뭐.”
어려울 게 뭐 있겠는가.
가족이 싫다면 친구를 하면 그만이고, 친구도 싫다면 그냥 잠시 곁에 있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지.
“……좋네요.”
제레미의 뺨이 한나의 등을 더욱 파고들었다.
“아빠는 내가 강하게 자라면 꼭 찾으러 온다고 했었어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왜 하는 건지.
차라리 행복하게 잘 살라고 빌어 줄 것이지. 희망 고문도 아니고.
한나는 얼굴도 모르는 제레미의 아버지가 미웠다. 그리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제레미에게 친부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니.
아주 갓난쟁이 때부터 고아가 된 마샤와 달리 이안과 제레미는 버려진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보육원에 온 지 오래된 제레미에겐 어릴 적 기억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강하게 자라고 싶었는데…….”
혹시 제레미가 검이나 무기에 유별난 집착을 보이는 게 그 이유였을까?
9살 아이가 생각하는 강함이라는 건 그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적인 강함.
“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이야.”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봐요.”
“네가 나를 구하러 골목을 뛰어 들어온 거 기억하지?”
“네.”
꿀빵을 뜯기던 그날.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아홉 살 아이는 제레미밖에 없는걸.”
“다음엔 그러지 말라면서 나무랄 땐 언제고.”
“마음은 누구보다 강하다는 말이지. 위험한 건 위험한 거야.”
“칫.”
어느덧 제레미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제레미.”
“네.”
“돌아가면 검술 배울 수 있게 해 줄게.”
“정말요?”
“응.”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한사코 막아섰던 일이었지만, 못하게 할수록 제레미는 더욱 갈망했고 충족되지 못한 호기심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차라리 정식으로 안전하게 가르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제레미의 사연을 들으니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벅저벅.
“제레미. 다음에 또 누군가를 쫓아가게 된다면 기억해.”
“뭘요?”
“네가 돌아올 집이 저기 언덕 위에 있다는 거.”
제레미의 시선이 보육원이 있는 동산에 닿았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곳이었다.
절대 잊어버릴 리 없는.
“찾기 쉬워서 좋네.”
제레미가 피식 웃자, 한나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야! 제레미!”
제레미가 한나의 등에 업혀 오자 마샤가 빽 소리를 지르며 제레미를 불렀다. 아마 오래 기다려야 해서 신경질이 났을 것이다.
제레미가 한나의 등에서 내려왔다. 멀리서 마샤가 달려왔다.
“네 빵 다 식을 뻔했잖아!”
마샤는 그를 탓하는 대신 설탕이 제일 많이 묻은 빵을 들이밀었다. 빵을 받아든 제레미는 물끄러미 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으로 빵을 가져갔다. 마샤의 말과 달리 빵은 이미 다 식어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제레미는 식은 빵을 와구와구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참 나! 그렇게 맛있냐? 하여튼, 돼지 아니랄까 봐 맛있다고 울고 그래!”
마샤는 빵 봉투를 제레미의 품에 안겨 주곤 몸을 획 돌렸다.
“가자. 이안! 아까 아줌마들이 저기가 불꽃놀이 명당이랬어!”
그러면서 이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안은 제 장갑에 닿은 손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끌려갔다.
덕분에 자존심 강한 제레미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아이고, 좋다.”
한나는 지친 몸을 온천에서 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불꽃놀이를 보고 돌아오자 녹초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날보다 수월하게 다녀온 것 같기도…….
“음. 대신관이 도움이 된 건가.”
너무 늦게 터트린 불꽃놀이로 인해 아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잠이 온다며 칭얼거렸다.
이미 다리를 삔 제레미가 한나의 등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마샤는 세자르의 등에 업혀 돌아와야 했다.
한나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평소라면 졸린 마샤를 깨워 가며 돌아왔어야 했을 텐데, 사람 한 명 늘었다고 은근히 편한 게 아닌가?
제레미를 찾으러 갔을 때도 아이 둘을 그가 데리고 있으니 마음이 놓였던 것 같다.
“다음에도 데려가도 괜찮겠어.”
대신관이 의외로 쓸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신전과 제국민이 우러러보는 대신관 세자르는 한나의 좋은 보조 교사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나저나 제레미, 삔 다리는……. 음.”
한나의 표정이 걱정스럽게 변했다. 무엇보다도 제레미의 삔 다리가 마음에 걸렸다.
제레미는 씩씩하게 푹 자고 나면 낫는다고 했지만 내일도 부어 있으면 의원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따뜻한 온천물에 족욕이라도 시켜 줄까…….”
피로가 싹 풀리는 온천물이라면 삔 다리에 좋지 않을까.
“좋다. 족욕이다.”
한나는 제레미에게 가져갈 물을 대야에 담았다.
“좀 시원한 풀도 넣어 볼까.”
온천에서 나온 한나는 욕탕 향이 좋아지라고 아무렇게나 심어 놓은 약초들을 향해 다가갔다.
말했다시피 이곳은 뒷산과 이어진 야외 욕탕이라 여기저기에 풀과 나무가 있었다.
“이게 페퍼민트처럼 시원하던데, 오. 이건 향이 좋으니까 넣자.”
그러곤 코를 킁킁거리며 향이 마음에 드는 약초와 꽃을 따서 챙겼다.
“이 정도면 완전 약수네. 약수야.”
약초의 시원하고 싸한 향과 달큰한 꽃향이 섞여 제법 기분 좋은 향이 되었다.
“어이구, 옷부터 입자.”
맨몸으로 약수 제조에 집중하던 한나는 서둘러 물기를 닦고 옷을 챙겨 입었다. 온천수 대야를 들고 수증기와 욕탕을 나온 한나의 뺨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머리엔 수건을 틀어 올린 상태였다.
“개운하구만.”
개운함을 만끽하며 제레미의 방으로 향했다.
* * *
“제레미!”
“선생님?”
“그 과자는 또 어디 숨겨 뒀던 거야?”
제레미는 오늘도 몰래 과자를 먹고 있었다. 볼이 빵빵한 것이 햄스터 같았다.
“다리는 좀 괜찮아?”
“자고 나면 낫는다니까요.”
제레미도 씻고 방으로 들어와서인지 아직 검은 머리카락에 물기가 촉촉했다.
“머리 잘 닦아야 한다니까.”
“수건 두르고 온 선생님보단 나은 것 같은데요.”
“어이고, 깜박했네.”
한나가 어색하게 웃었고, 제레미도 따라 웃었다.
“그건 뭔데요?”
“삔 다리 족욕하자. 선생님이 약초랑 풀 넣어서 약수 만들어 왔어.”
“……흠.”
제레미가 못 미더운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효과 있어요?”
“……적어도 무해한 것들만 들어가긴 했어.”
효과까지는 장담하기엔 차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서 발만 내려 봐.”
제레미는 한나의 말에 따라 침대에서 다리를 내렸다.
“에고, 많이 부었네.”
부어오른 정도가 조금 더 심해진 걸로 보아 내일 아침에는 무조건 의원행이었다.
한나는 대야를 침대 앞 바닥에 놓고 조심스럽게 제레미의 발을 차가운 물에 넣었다.
“차갑잖아요.”
한나가 미리 식혀 둔 물이었다.
“찬물 뜨거운 물 번갈아 가며 해야 해.”
“음.”
제레미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처음엔 뭔 난리인가 싶었지만 막상 가까이 가져온 물에서 좋은 향이 올라오자, 제레미는 기분 좋게 물속에서 발을 살랑거렸다.
“근데 약초는 어디서 났어요?”
“욕탕 옆 화단에서 뜯어 왔지.”
“…….”
한나가 주섬주섬 이름도 모를 약초를 뜯는 장면을 상상하던 제레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마음만 받는 것으로 하기로.
“자. 이제 따뜻한 약수!”
한나는 끝까지 뻔뻔스럽게 ‘약수’를 강조했다.
“안 뜨거워?”
“딱 좋아요.”
적당히 식어 따뜻한 물에 발목까지 담그고 있자 몸이 나른하게 풀려 왔다. 거기에 복숭아뼈에 물을 살랑살랑 부으며 살살 닿는 한나의 손길이 더해지자, 제레미는 정말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때, 통증이 좀 줄었어?”
“좋은 것 같아요.”
기분 탓인지 몰라도 정말 발목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다행이네.”
한나는 애써 준비한 보람이 있어 흐뭇했다.
물론 제레미가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비록 쪼그려 앉은 다리에 쥐가 내리긴 했지만, 제레미가 기분 좋게 다리를 흔드는 모습이 귀여워 한나는 물을 끼얹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도 내일은 의원에 가 보자.”
“맛없는 약 먹일 거잖아요.”
“다리가 튼튼해야 검술도 배우지.”
검술이라는 말에 제레미의 눈이 커졌다.
“진짜 검술 가르쳐 주는 거예요?”
“선생님이 거짓말하는 거 봤어?”
뭐 가끔 조금 과장되게 말하거나 두루뭉술하게 포장하거나, 어……. 가끔 뻥도 쳤던 것 같긴 한데.
“와!”
“선생님 못 믿었어?”
“그치만, 그건 돈도 많이 들고……. 선생님은 박봉이라 저금도 못 한다면서요.”
“내, 내가 그런 말을 했니?”
언젠가 동산에 뒹굴거리면서 박봉 노래를 불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냥 흥얼거리는 음률에 박봉~ 박봉~ 이 연속으로 반복되는 노래였다.
그땐 좀 제정신이 아니었지.
한나는 지난날을 회상하다 어색하게 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걱정 마, 제레미. 돈 들이지 않고도 최고의 선생님을 구할 수 있으니까.”
그 순간 제레미의 고개가 갸웃, 옆으로 기울었다.
“후후. 다 방법이 있단다.”
한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또 악당 웃음이네.’
제레미는 저렇게 웃는 선생님의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신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일이 잘 풀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제레미가 발을 흔들었고, 대야에서 물이 튀었다.
“앗! 제레미! 발 얌점히 둬!”
한나가 물이 튄 뺨을 소매로 닦았다. 그 모습을 본 제레미는 깔깔 웃었다.
한껏 들뜬 제레미는 발이 아프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느낌이었다. 그에 한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좋을까.
이내 한숨을 내뱉었던 입술이 기분좋게 올라갔다.
* * *
다다다다닥. 오도도도도.
벌컥!
“선생님!”
“으엉……. 음냐…….”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가 한나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깊게 잠이 든 한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니임!”
짹짹거리는 새소리도 들리기 전인데 누가 깨우는 건지.
“어……. 므어야……?”
한나가 입가에 흐른 침을 닦고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거 봐요!”
침대 옆엔 제레미가 있었다. 그것도 정신 사납게 콩콩 뛰면서.
“제레미이……. 왜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고 있어.”
한나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다리! 발목 보라니까요!”
“으, 응?”
왜 아침부터 다리를 보라는……. 발목?!
“제레미! 뭐하는 거야! 아픈 다리로!”
제레미의 삔 다리가 생각난 한나가 눈을 번뜩 뜨고 제레미를 말리려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 다 나았어요!”
“뭐, 뭐?”
한나의 시선이 제레미의 발목으로 옮겨갔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퉁퉁 부어 있던 발목이 멀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진짜 다리가 말끔하게 나았다니까요?”
“어……. 음, 그러게. 아주 멀쩡해 보이는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제레미에게 남다른 회복력이 있었던가?
“선생님 약수가 정말 효과가 있나 봐요!”
“응?”
“그러니까 다리가 하루아침에 나았죠!”
“……설마.”
“진짜라니까요! 저 애들한테 자랑하러 갈게요!”
한나가 당황한 사이에 제레미가 폴짝폴짝 뛰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와아아아아! 내 다리 봐라!”
언제 복도를 다 달린 건지 벌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제레미의 모습에 한나는 황당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제레미, 완치됐구나.
긁적긁적.
“진짜 어떻게 나은 거지.”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진짜 온천수가 성수 같은 거 아냐? 아니면 알고 보니 내가 넣은 그 풀떼기 조합이 기가 막힌 명약 조합이었나?”
흠……. 에라, 제레미만 잘 나았으면 됐지.
한나는 목덜미를 긁으며 일어난 김에 씻기 위해 방을 나섰다. 머리카락 사이를 긁고 있는 그녀의 손에 희미한 빛이 일렁이는 것을 한나는 알지 못했다.
* * *
“뭐 하세요?”
동산에 뛰노는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부르러 나온 한나는 닭장 앞의 두 사람으로 인해 굳어 버렸다.
“선생님! 꼬꼬 밥 주고 있어요!”
마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진 평범한 일상이었다.
“대신관님은요?”
저 대신관은 왜 아침부터 마샤 옆에 쪼그려 앉아서 꼬꼬를 보고 있냐고.
“이 닭, 식성이 특이하군요.”
“…….”
세자르가 하는 말에 한나는 말문이 막혔다. 꼬꼬는 마샤가 던져 준 생선찜을 맛있게 뜯어 먹고 있었다.
아니 근데 저거 오늘 아침에 먹으려고 미리 해 둔 건데.
“하…….”
제일 숨겨야 할 인간에게 정체불명의 꼬꼬를 보여 주며 깔깔거리고 있는 마샤도, 어디로 보나 수상한 꼬꼬를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는 대신관도, 황당한 그림이었다.
“아. 타조인가?”
세자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엑? 아저씨, 얜 어디로 보나 닭이죠!”
……뭐래는 거니. 걔 닭도 타조도 아니야.
숨기려 했던 꼬꼬의 존재를 허탈하게 들킨 한나는 이마를 짚었다.
* * *
“결재요.”
한나는 세자르에게 보육원 비품 결재서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세자르는 느릿한 손짓으로 서류를 팔랑팔랑 넘겼다.
무슨 종이 하나 넘기는데도 저렇게 느릿느릿, 건성건성인지.
아마 저 사람은 혈관에 피도 느릿느릿 흐를 거다.
책상에 거의 엎드린 것이나 다름없게 몸을 걸친 세자르의 모습이 어지간히 앉아 있기 싫음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결재를 기다리며 한나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의 은발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렇게 반짝이지.’
사실 이안의 머리카락도 금발이라 빛이 나긴 했지만 이렇게 하얗고 여리여리한 실크 느낌은 아니었다.
“근데, 그 타조는 어디서 데려온 거지?”
“타조 아닌데요.”
멍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구경하던 한나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그냥 타조라고 해야 쉽게 가는 일인데!
“그래. 그 닭.”
닭은 더더욱 아니거든.
한나는 세자르의 눈이 똥눈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동산에서 주웠어요.”
“신전 앞?”
“네.”
그 알을 부화시킨 건 마샤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한나가 물었다.
“뭐.”
세자르가 도장을 들어 결재서류에 쾅 하고 찍었다.
“어쩌다 저희 신전에 오신 거예요?”
“새로운 대신관 필요하다며.”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세자르는 도장을 찍은 서류를 한나에게 건넸다.
“아니……. 대신관님이 이런 변방 신전에 오실 분이 아닌 것 같아서…….”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가 보네.”
이미 알고 있는 원작의 내용으로 추측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세자르가 신전의 촉망받는 신관이라는 것은 다른 신관들이 지나가며 하는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몸이니 교황의 총애도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 그가 중앙 신전이 아닌 이런 변방의 신전에서 대신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할 노릇이었다.
“뭐, 유능하신 분인 것 같아서…….”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한나는 양심이 콕콕 찔려 오는 걸 느꼈다. 실제로 그는 누가 봐도 유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타입이었다.
매일 피곤에 절어 ‘죽지 못해 내가 여기 있는다.’ 하는 느낌으로 돌아다니니 말이다.
그의 평소 모습은 이 세계에 게임이 있다면 밤마다 헤드셋을 끼고 밤샘을 하는 게임 폐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입에 바른 소리는.”
티났나.
한나는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으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럼 가 볼게요.”
그녀의 말에 세자르는 책상에 몸을 철푸덕 엎드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나름의 인사 방식이었다.
‘거참 일관성 있게 성의 없어.’
이젠 그런 인사가 익숙해진 한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 * *
그날, 화창한 동산에서 한나는 닭장 앞에 자리를 잡고 진지하게 타조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흠…….”
빡빡빡빡. 닭들이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백조들 사이의 오리처럼 꼬꼬가 있었다.
저가 대장이라도 된 것처럼 닭들을 밀어내고 중앙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말이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니?”
[끄륵…….]
마치 자신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작은 녀석이 그릉거리자, 기분이 이상했다. 한나는 챙겨 온 빵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이거 먹으렴.”
[끄륵!]
꼬꼬가 빵을 보자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다리도 오동통하네.”
꼬꼬의 뒷다리는 아주 튼실했고, 발톱도 단단해 보였다. 한나의 눈매가 깊어졌다.
녀석의 외형을 설명하자면 전체적으로 회색빛의 털이 보송보송하게 덮여 있고, 머리와 몸통이 1대1 비율이었다.
아, 이건 아직 어려서 그렇다 치고.
부리는 또 샛노란 색이라 제법 귀여웠다. 완전 검은색인 눈동자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분홍 머리카락이 비쳐 보일 정도로 반질거렸다.
뭐 이렇게만 보자면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넌 왜 뿔이 있니.”
저 뿔이 문제였다.
이마 부분의 뿔이 너무 의심스럽게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유니콘도 아니고.
“좀 나눠 먹어. 쟤들도 빵 좋아해.”
꼬꼬는 닭장의 닭들에게 빵부스러기 한 톨마저 양보하지 않으려고 바닥을 부리로 쪼아 대고 있었다.
꼬꼬는 식탐이 많았다. 아이들이 이것저것 음식을 많이 주는 편인데도 주는 족족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도대체 그 작은 몸 어디로 음식이 다 들어가는 거니?”
한나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께름칙한 부분이 많긴 하지만 꼬꼬는 제법 귀여운 축에 속했다.
원래 보다 보면 정이 들고, 정이 들면 예뻐 보이는 법.
“넌 오래 보지 않아도 예쁘구나.”
꼬꼬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시작된 고찰은 어찌 됐든 이 녀석이 너무 귀엽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 뭐가 됐든 튼튼하게 자라 보렴.”
어차피 악당도 키우는 마당에 좀 의심쩍은 새 한 마리 더 못 키울 거 뭐 있어?
“그래도 용 같은 건 되지 말아 줘. 식비 감당 안 될 거야.”
[꾸륵!]
괴상한 울음소리까지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이미 몰래 버리는 건 한참 전에 글렀던 것이었다.
“나올래?”
한나가 닭장 문을 열자마자 통통 튀어 오르듯 꼬꼬가 밖으로 나왔다.
“볕 좋은 곳에서 낮잠이나 자자.”
꼬꼬는 짤뚱한 다리로 고목나무 밑 낮잠 포인트로 이동하는 한나의 뒤를 쫓아갔다.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누운 한나의 어깨 옆에 꼬꼬가 앉았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뿔 찔린다.”
눈을 감은 한나가 말했다. 그 말에 꼬꼬는 머리를 옆으로 조금 틀어 얼굴을 묻었다.
한나는 꼬꼬의 머리가 닿은 어깨가 꽤나 따뜻하다고 생각하며, 낮잠을 청했다.
* * *
한나는 오늘 아이들과 함께 쿠키를 구웠다. 맛있는 견과류를 잔뜩 넣어 구운 쿠키는 향도 고소하고 맛도 좋았다.
한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이 구운 쿠키를 예쁘게 접시에 담아 어디론가 향했다.
“계신가요?”
한나가 도착한 곳은 성기사들의 쉼터였다.
“아무도 안 계신가요.”
대신관이 바뀐 후로 신전에는 여러 명의 성기사가 근무하게 됐다.
아마 그들은 이런 약소한 신전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신의 사자인 세자르를 지키기 위해 따라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한나가 그들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뇌물 좀 먹이고 공짜 검술 선생님 좀 구하려 했더니, 냄새를 맡은 건가. 귀신같이 다 사라졌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성기사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아주아주 촉이 좋은 사람들이다.
“뇌물요?”
“엄마야!”
몰래 쉼터를 눈으로 훑고 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자 한나는 놀라서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 놀라셨습니까.”
“안녕하세요. 모이세이 님.”
“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놀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잡고 한나는 모이세이를 바라보았다.
“기사님들이 다 안 계시네요?”
“방금 작은 훈련을 해서 지금 다들 씻으러 갔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모이세이도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용건이 있으십니까?”
“아. 다른 게 아니라, 쿠키를 많이 구워서 맛보시라고 가져왔어요.”
한나는 환하게 웃으며 접시를 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모이세이는 어딘지 딱딱한 구석이 있었다. 기사라서 그런 것인지 원래 성격이 좀 각진 편인 건지.
한나는 쿠키를 받아드는 모이세이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흠. 그, 기사님.”
“네.”
“변두리 신전이라 중앙 신전보다는 많이 심심하시죠?”
“그렇진 않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 재미없는 시골에서 왜 심심하지 않은 거죠?
즉각적이고 단호한 모이세이의 대답에 당황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미끼를 던졌다.
“흠, 혹시 뭐 취미 생활 같은 건 없으세요?”
“네. 딱히…….”
“이 적적한 신전에서 번듯한 취미 생활도 없으시다니, 너무 안타까운 일이네요.”
“……?”
물론 전혀 안타까울 구석이 없었다.
모이세이는 한나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러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여유시간을 조금……. 할애해 줄 수 있으실까요? 취미 생활처럼 생각하셔도 되는데.”
“네……?”
몸을 배배 꼬며 얼굴을 붉히는 한나를 보며 모이세이는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건…….’
쿠키를 구워 온 여인, 시간을 할애해 달라는 말, 발그레한 볼.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고백?’
모이세이는 갑자기 이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워졌다. 보육원 선생과 자기가 이런 식으로 얽히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을 하러 온 신전에서 연애라니.
자신의 가치관과는 절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보육원 선생은 자신보다 아직 한참 어린 것 같았다. 무조건 거절해야겠다고 모이세이는 다짐했다.
보육원 선생이 예쁘긴 하지만, 아이들도 천사처럼 돌보긴 하지만, 심지어 구워 온 쿠키의 향도 기가 막히게 좋긴 하지만!
‘절대 안 될 일이지.’
한나는 모이세이의 내적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제자 한 명 키워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일하는 곳에서 사적으로 얽히는 건…….”
두 사람의 말이 거의 동시에 얽혔다.
“네?”
“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거절에 한나는 당황했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기나 한 건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자 한 명 키워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뭐라고 하셨죠?”
“아. 아닙니다.”
“사적인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모이세이의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절로 손이 얼굴을 가렸다.
“제자는 무슨 말입니까?”
모이세이는 혹시라도 자신의 망상을 들킬까 싶어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뭐지. 갑자기 왜 얼굴을 붉히고 난리야?’
한나는 갑자기 버벅거리는 모이세이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다름이 아니라 저희 보육원에 제레미라고 아시죠? 그 왜, 검은 머리에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기개가 남다른 씩씩한 친구요.”
“아. 기억합니다. 제 검을 좋아하던 아이 말입니까?”
“네! 맞아요!”
모이세이가 제레미를 기억하고 있다니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레미의 꿈이 검사거든요. 그런데 또 큰 인물이 될 우리 제레미를 아무한테나 맡길 수가 있나요. 적어도 신전 제일의 성기사님 정도는 돼야 우리 제레미를 맡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사실 한나가 성기사를 제레미의 스승으로 만들고 싶은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성기사들의 성격이 보통 사람들보다 인자해서 제레미의 별난 성격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
둘째는 그래도 성기사에게 검을 배우면 스승에 대한 예의로라도 나쁜 짓 하는 데 검을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는……
공짜로 수업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사실 세 번째가 앞의 두 가지 이유보다 앞섰다.
“제자…….”
모이세이는 아직 현직에 있는 젊은 기사였다. 그런 자신이 벌써 제자를 들인다는 건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모이세이의 입이 떨어질 때마다 한나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아직……. 제자를 들이기엔 이르…….”
거절의 말을 할수록 한나의 표정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면서 울상으로 변하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우리 제레미는 머리도 좋아서 금방금방 배워요.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두 번 어떠세요?”
“아침저녁으로 두 번?”
“너무 많으신가요? 그럼 저녁에 한 번? 두 시간?”
“두 시간은 조금…….”
“그럼 저녁 시간으로 한 시간 하면 되겠네요!”
모이세이는 절대 허락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침, 저녁 두 시간에 놀라 대꾸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한 시간으로 타협이 되고 있었다.
“그럼 제레미한테 그렇게 전할게요! 정말 좋아할 거예요. 모이세이 기사님이 멋지다고 매일 노래를 불렀거든요!”
하지만 이미 승낙한 것으로 단정 짓고 활짝 웃는 한나에게 차마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전 좋은 소식 전하러 가야겠네요.”
밝은 얼굴로 한나가 몸을 돌렸고, 모이세이는 한나를 붙잡지 못했다. 말을 번복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게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참!”
금방이라도 뛰어갈 듯 통통 튀어가던 한나가 뒤돌아 다시 모이세이에게 다가왔다.
“뭐, 뭡니까?”
그러곤 모이세이의 손을 잡았다.
“감사하단 말을 못 해서요. 정말 감사해요. 복 받으실 거예요.”
한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잡힌 손을 붕붕 아래위로 흔든 후, 다시 뛰어갔다.
탁탁탁탁.
가벼운 발걸음이 복도를 가르며 멀어졌다.
“…….”
모이세이는 눈 뜨고 코 베이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했네.”
“완전 당했지.”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동료 성기사들이 그런 그를 보며 손에 들린 접시 위의 쿠키를 집어 모이세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바삭.
고소한 쿠키가 입안에서 부서졌다.
‘맛있네.’
다행히 쿠키는 입맛에 맞았다.
* * *
“세상에, 저 늠름한 모습 좀 봐.”
“있는 대로 목검을 휘두르는 게 어디가 늠름인가요.”
“처음 하는데도 기개가 남다르잖아. 어쩌면 정말 대단한 성기사가 되는 거 아닐까?”
한나와 이안, 마샤는 나무 밑에 쪼르륵 앉아 검술 수업을 하는 제레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이세이는 기사답게 실행력이 아주 빠른 사람이었다.
얘기가 끝난……. 아니, 사기를 당한 그날 밤, 모이세이는 바로 제레미를 찾아왔고, 다음 날인 오늘부터 수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성기사는 성력이 있어야 해요.”
이안이 이런 당연한 것도 모르냐는 듯 한심함을 담은 눈으로 한나를 보았다.
“그럼 그냥 기사 하지 뭐.”
한나는 기분이 좋았다.
제레미가 원하던 검술 수업을 말 몇 마디로 얻어낸 것이 뿌듯하기도 했고, 열심히 수업을 하는 제레미를 보자 오히려 이 수업으로 인해 제레미가 선한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서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제레미 녀석 또 금방 실증낼지도 몰라요. 그치, 꼬꼬야?”
마샤가 품에 안긴 꼬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샤의 말에도 한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절대로 제레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샤, 이안. 제레미를 응원해 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축복이란다.”
한나는 평소의 제레미가 개구쟁이에 제멋대로인 이미지이긴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니, 성장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이안이랑 마샤는 뭐 되고 싶은 거 없어? 장래희망 같은 거.”
“없어요.”
이안이 즉각 대답했다.
음. 이안, 넌 없어도 돼. 어차피 황제가 될 거니까.
한나는 이안은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마샤는?”
“전 사육사 하고 싶어요!”
“동물이 좋아서?”
“꼬꼬를 키워 보니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과연 마샤는 동물 사육사가 될까 마수 사육사가 될까.
“음…….”
조금 걱정스럽긴 하지만 나쁘지 않은 장래희망이었다. 적어도 동물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했으니까.
“좋은 장래희망이네.”
그렇게 말하며 한나가 싱긋 웃었다.
제레미의 수업을 구경하는 동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너희 모두 행복한 일을 찾아서 했으면 좋겠다.”
“선생님은 행복해요?”
“응?”
“선생님이 선생님이라서 행복하냐구요.”
마샤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한나에게 물었다.
“행복…….”
이 몸에 빙의하고 신전에 적응하고, 위험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지난날이 뇌리를 스쳤다. 한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행복이라.”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지.”
누군가 똑같이 물어본다 해도 이 대답이 나왔을 것이란 거다.
사실 신전이 안정되고부터 한나는 아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까륵!]
저렇게 먹을 것만 주면 행복해하는 꼬꼬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너희도 선생님처럼 행복한 일을 하렴.”
한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제레미를 지켜보았다. 제레미를 한참 쳐다보던 이안이 다시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