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은 한나는 오늘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말하자면 며칠간의 병가였다.
“흥흥~”
이 세계판 육아 서적을 읽으며 얼굴 위에 잘게 썬 오이를 하나씩 붙이고 있었다. 열감기를 앓고 나니 얼굴이 눈에 띄게 푸석푸석해져서였다.
보육원 텃밭에서 잘 자란 오이는 수분도 많고 접착력도 좋았다. 한나는 몸을 뒤집으며 책의 내용에 집중했다.
“음. 일부러 못된 행동을 하는 게 관심을 갈구해서일지도 모른다 이거지.”
중간중간 도움이 되는 자료에 밑줄을 그어 가며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한나는 급히 책을 이불 안으로 넣고 정자세로 누웠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한나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빼고 말했다. 아이들이라면 저런 노크를 할 리가 없었다.
일단 문을 열고 뛰어들고 나서 ‘선생님! 저희 왔어요!’ 하며 벌써 방안을 헤집어 놨겠지.
“감기에 걸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체이슨 신관님?”
그는 체이슨이었다. 그의 얼굴에 ‘기껏 애들 아프지 않게 하라고 지원해 줬더니, 네가 감기에 걸려서 골골대고 있냐?’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흠, 가벼운 감기랍니다. 금방 나을 정도예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체이슨의 손에 약재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설마 제 약인가요?”
“예. 잘 달여드시면 금방 기운이 날 겁니다.”
체이슨이 약 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얹었고, 한나는 그의 그런 행동이 모두 아니꼽게만 보였다.
“그런데 얼굴에 그건 뭡니까?”
아차.
한나는 그제야 제 피부처럼 착 붙어 있어서 잊고 있던 오이팩이 떠올랐다.
“아……. 그, 얼굴에 오른 열을 다스리기 위한 민간요법이랄까요?”
체이슨의 얼굴에 불신이 깃들었다. 한나 딴에는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 얼굴의 열도 없애 주고 남은 오이는 먹으면서 수분 섭취도 하고. 일석이조인데.
“필요하시면 좀 드릴까요. 많이 썰어 뒀는데.”
생각보다 작은 얼굴 덕에 오이가 많이 들지 않았다. 한나는 남은 오이가 담긴 볼을 내밀었고, 체이슨이 한 걸음 물러섰다.
사실 그는 한나의 방에 들어와 놓고서도 여전히 문 가까이에 위치한 테이블 앞으로 다가서지 않고 있었다.
제 몸 걱정은 끔찍하구만. 한나는 그런 그의 철저함에 감탄했다.
“됐습니다.”
체이슨의 단호한 거절에 한나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차피 나도 주고 싶지도 않았거든?
“다음 주에 중앙 신전에서 시찰을 온다고 합니다.”
“시찰요?”
“관내시설을 평가지도 하러 온다는군요.”
그 말인즉슨 보육원을 그들에게 보이기 좋게 잘 단장하고 아이들의 행색을 반질반질하게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네. 알겠어요.”
어차피 아이들은 깨끗한 옷만 입고 있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 아이들은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으며 잘 자라고 있어 절로 윤이 나는 지경이었다.
“그럼 빨리 쾌차하십시오.”
“감사해요.”
영혼 없는 한나의 대답을 끝으로 체이슨은 방을 나섰다.
오도독.
그녀는 커다란 볼에 담긴 오이 하나를 꺼내 씹었다.
“중앙 신전의 신관들은 어떠려나. 여기처럼 썩어빠진 인간들이려나.”
사실 신전의 신관들을 겪어 본 바로는 딱히 기대가 되지 않았다.
뭐,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비슷한 사람들이겠지.
“흐음. 엇, 점심시간 끝날 시간이네.”
한나는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자신의 부재로 신전의 식단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간식이라도 챙겨 주고 싶어서였다.
* * *
역시나 아이들은 식사를 끝내고 보육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자 마샤가 가장 먼저 한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선생님, 다 나은 거예요?”
한나를 보고 기분이 좋아진 마샤가 또 끌어안기 위해 슬금슬금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음, 거의 낫긴 했는데 아직 병균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너무 다가오지 마.”
한나가 마샤를 저지하자 작은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근데 버리고 있는 건 뭐예요?”
한나는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약 꾸러미를 해체해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었다.
“아, 그냥……. 상한 거야.”
체이슨이 가져다준 약은 한나의 입 대신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 음습한 신관이 뭘 줬을 줄 알고 덥석덥석 먹는단 말인가.
그리고 감기에 약이 어디 있어? 한나는 아직도 남아 있는 오이를 또 입에 넣으며 이안과 제레미에게 손인사를 했다.
“며칠 사이에 우리 귀염둥이들 얼굴이 홀쭉해진 것 같은데?”
물론 절대 아니었다.
“내가 없어서 심심하진 않았어?”
사실 아이들은 수시로 한나의 방을 찾아왔었다.
“아니다. 우리가 이럴 게 아닌 것 같아. 우리 밖으로 놀러 나갈까?”
“밖이요?”
“응! 시장에 가자. 우리 다 같이 몇 번 갔었잖아.”
사실 한나는 한동안 침대에만 누워있는 생활을 해서 답답했었다. 아이들을 앞세워 자신의 사심을 채우고 있었다.
“좋아요!”
“그렇지?”
마샤가 발을 통통 튕기며 기뻐했다.
“맛있는 간식 사 줄 거예요? 시장에 파는 꿀빵 맛있던데.”
“오. 물론 사 줄 수 있고말고.”
“저는 새 장갑 사야 해요.”
“장갑은 창고에 많이 있…….”
“엇, 선생님! 그럼 저도 새 인형요!”
갑자기 아이들의 ‘사 주세요.’ 공격에 한나는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야 했다.
“그래! 좋다! 오늘은 완치 기념으로 사자!”
의기양양하게 아이들을 향해 외치자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 * *
“꿀빵 8개 주세요.”
“왜 8개나 사요?”
“하나씩만 먹으면 아쉽잖아.”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한나와 아이들은 꿀빵을 파는 노점으로 향했다. 갓 구워 낸 꿀빵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와아! 크다!”
꿀빵의 크기는 작지 않았다. 아이들의 얼굴만 한 크기의 호떡과 비슷한 것이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야 해. 앗뜨!”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한나는 입안에 터지는 뜨거운 꿀 때문에 비명을 질렀다.
“후.”
“후.”
“후우.”
그런 한나를 보며 아이들은 양손으로 든 꿀빵을 야무지게 식혔다. 이 한몸 희생하여 아이들의 입천장을 지킬 수 있으니 얼마나 값진 일인가. 찔끔 흐른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럼 어디 먼저 가 볼까?”
“인형요! 인형!”
마샤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음, 그럴까 그럼?”
그들을 쪼르륵 꿀빵을 입에 물고 인형 상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달콤한 꿀빵을 즐기며 신나게 걷던 한나는 순간 어느 빛이 잘 들지 않는 으슥한 골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 우릴 보고 있는 것 같지.’
냉큼 눈을 깔았다.
“슨슨님.”
제레미가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한나를 불렀다.
“제레미, 눈 내려. 눈. 바닥 구경 좀 해 보겠니?”
제레미가 방금 자신이 눈 마주쳤던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한나가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래를 바라보길 종용했다.
“어이.”
“저 아저씨가 부르는데요?”
하필 그 골목을 지나치려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한나 일행을 불렀다.
꼴깍.
한나는 바닥을 보며 걷던 시선을 골목으로 향했다.
“저, 저요?”
“그래. 거기 너.”
분명 혼자였다면 냅다 튀었다. 골목 안에는 험상궂게 생긴 남자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칼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주여!’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냅다 튀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기서 기다려 얘들아.”
하필이면 주위에 경비대나 치안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잘 없었다.
“네!”
“쩝쩝.”
“선생님?”
마샤와 제레미는 별생각이 없는 듯했고, 이안이 한나를 불렀지만 한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른들의 대화를 하고 올게. 혹시, 호옥시라도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면 저기, 저 빨간 지붕 보이지?”
“식육점요?”
“응. 그 아저씨한테 달려가. 그 아저씨가 여기서 제일 세니까.”
“…….”
이안은 한나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불안하게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한나는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얼마가 있는지 생각했다.
아직 겨우 꿀빵밖에 못 샀는데!
“왜, 왜 부르셨을까요?”
골목 안으로 들어간 한나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건달1에게 물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야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그때 같은 편인 건달2가 건달1의 뒤통수를 때렸다.
“넌 인마! 어디 털 사람이 없어서 보육원 선생을! 저기 애들 보면 몰라?”
왜 지들끼리 저래?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한나는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건달2는 자신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건달2가 아이들을 가리키며 건달 1을 나무랐다.
“아! 그게 아니라고! 그냥 저 꿀빵 어디서 샀는지 물으려고 한 거라고! 애들이 너무 맛있게 오물거리잖아!”
“그럼 그딴 불량한 목소리로 부르질 마!”
“…….”
덤앤더머인가. 개그 만담 콤비? 지금 저 건달1,2는 뭐하는 걸까. 둘 사이에 끼여 있는 한나는 상당히 이 상황이 불편했다.
“……저기, 이건 시장 입구 노점에서 산 것인데…….”
한나가 조심스레 품에서 빵을 꺼냈다.
“드실래요?”
한나가 빵을 내밀었고, 건달들은 잠시 조용해졌다.
* * *
“근데, 선생님 위험한 거 아니야?”
마샤가 이안에게 말했다.
“그걸 이제야 걱정하냐.”
“음. 난 사실 선생님이 뛰자고 할 줄 알았는데, 뭔가 결연한 표정으로 가길래. 혹시 숨겨 둔 무술 실력이라도 있나 했지.”
“정육점으로 갈까?”
한나가 제법 오래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 마샤는 머리를 긁적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레미가 조금 남은 빵을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사람 부를 것 뭐 있어! 내가 갈게!”
제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외쳤다.
“원래 내가 악당에게서 구하는 거 전문이지!”
“야, 제레미…….”
이안이 제레미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제레미는 이미 골목으로 뛰어들어 가고 있었다.
“…….”
“빠른데?”
마샤는 휘적거리며 정육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레미가 간 이상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선생님!”
힘차게 뛰어들어 간 제레미가 한나를 불렀다.
“어, 응?”
그 순간 한나가 뒤돌아보았고 건달 1, 2도 한나를 따라 제레미에게 눈길을 옮겼다.
“……뭐하세요?”
제레미는 한나가 돈이라도 뜯기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한나는 너무도 평화롭게 꿀빵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아…….”
한나는 어색하게 뒷덜미를 긁었다.
“와. 아저씨 칼 엄청 멋있다!”
아니, 제레미, 지금 그런 감상할 때야? 그리고 도대체 뭐가 멋있어?
한나는 제레미의 돌발 행동에 땀이 삐질 흘렀다. 제레미는 마치 신이 난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이대로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싶어 한나는 슬금슬금 발을 움직였다.
“……그럼 저흰 가 보겠습니다.”
“돈 받아 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건달1이 그런 한나에게 돈을 주려 했지만 사양하고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뒤로 가는 와중에 여전히 용사 포즈를 하고 서 있는 제레미를 낚아채 옆구리에 끼웠다.
제레미는 한나에게 들려 나가는 와중에도 건달들의 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칼! 읍!읍!”
제레미가 또 무기 찬양을 하려고 하자, 한나는 제레미의 입을 손으로 살포시 막았다.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비록 개그 콤비 같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들이라고!
“그럼, 수고들 하세요.”
뭘 수고하라는 건지. 결국 한나는 들어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그곳을 나왔다.
“제레미! 왜 따라 왔어!”
골목을 나서자마자 한나는 제레미에게 왜 위험하게 쫓아왔냐며 타박했다.
“근데 선생님 꿀빵은 왜 주신 거예요?”
“꿀빵?”
이안이 제레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이 못되게 생긴 아저씨들한테 꿀빵을 주고 있던데?”
너흰 모르겠지만 돈을 뜯기는 것보다 꿀빵을 뜯기는 게 낫단다. 한나는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입을 열었다.
“불쌍한 사람들이라 선생님이 조금 도와줬어.”
“그 아저씨들이요?”
“응. 배고파 보여서. 너희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꼭 도우며 살아가렴.”
한나의 뻔뻔한 말에 이안과 제레미가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마샤는?”
“정육점 갔어요.”
이안의 말에 정육점을 바라보자, 그곳엔 정육점 아저씨가 커다란 칼을 들고 마샤와 뛰어나오고 있었다.
“악! 마샤!”
한나는 곰만 한 덩치로 칼을 들고 쫓아오는 아저씨를 보고 깜짝 놀라 그들에게 달려갔다.
“저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 오지 마세요!”
열심히 손을 저으며 무사를 알렸다.
“헉…… 헉. 마샤, 참 행동이 빠르구나.”
“선생님 위험한 거 아니었어요?”
“보육원 선생, 괜찮아?”
정육점 아저씨는 고기를 살 때마다 보면서 친해진 사이였는데, 정의감이 강한 분이었다.
“괜찮아요. 아주 괜찮답니다!”
한나가 한 바퀴 빙글 돌며 무탈함을 알렸고, 냉큼 마샤를 안아 들었다. 마샤가 한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나쁜 사람들 물리쳤어요?”
“아냐, 그 사람들 나쁜 사람 아니었어. 그냥 궁금한 게 많은 선량한 시민이었어.”
“선량?”
한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선량까진 아닌 것 같았어.
“아저씨 도와주러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다음엔 그런 핏기 서린 칼은 어지간하면 들고 나오지 마세요……. 너무 무서워요.
하지만 차마 이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조심해서 다녀! 이 동네도 요즘 잡스러운 것들이 많아!”
“네. 조심할게요. 오늘 수염 멋지시네요.”
“어흠.”
한나의 칭찬에 아저씨는 쑥스러운 듯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정육점으로 돌아갔다.
“휴, 인형이나 사러 가자.”
어찌 됐든 아이들 시장 구경시켜 줄 돈은 지켰으니 됐다.
“이안, 제레미! 이리 와. 얼른 가자!”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한나에게 다가왔다. 마샤는 여전히 한나의 품에서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런 마샤에게 한나가 물었다.
“오늘은 어떤 인형 살 거야?”
“음, 모르겠어요. 곰돌이 짝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공주님도 갖고 싶어요.”
“잘 생각해서 하나만 골라 봐.”
마샤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안은 장갑 말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없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잘 떠올려 봐.”
어른인 자신도 시장에 나오면 사고 싶은 게 산더미인데, 아이가 어찌 갖고 싶은 게 없을까.
“선생님! 선생님! 저는 아까 그 칼 사 주세요!”
제레미는 저렇게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게 많은데 말이다. 제레미가 한나의 치맛자락을 툭툭 당기며 말했다.
“위험해서 안 돼.”
“아! 용사는 그런 검이 있어야 하는데!”
……넌 용사 안 돼. 그러니까 그런 검 있어 봐야 소용없어.
“안 돼. 이안, 읽고 싶은 책은 없어? 저기 인형가게 옆에 서점 있는데.”
한나는 서점의 간판을 보고 이안에게 말했고, 그래도 책에는 흥미가 있는지 이안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럼 하나만 할게요.”
수줍게 나온 대답에 한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형부터요!”
“알았어. 근데 마샤, 이제 걸을 생각 없니?”
한나는 자신의 옆구리에 매미처럼 안겨 있는 마샤가 점점 무겁게 느껴져 마샤에게 말했다.
“힝, 하지만 이게 편한데.”
그럼 다리라도 달랑거리지 말아 줄래? 결국 마샤는 기어코 그녀의 옆구리에 매달려 인형가게에 도착했다.
“와아!”
마샤가 신나게 가게로 달려가다가 멈춰 섰다.
“응? 왜 그래?”
인형가게 앞에서 멈춰 서다니! 마샤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마샤의 시선이 옆 가게에 닿아 있었다.
그곳엔 새로 생긴 가게가 있었다. 마샤의 발걸음이 홀린 듯 가게 앞으로 향했다.
“저게 뭐지?”
한나도 궁금해져 마샤의 옆으로 이동해 구경했다.
“와…….”
“이게 뭐람.”
쇼윈도 창으로 보이는 가게의 안에는 이상한 것이 잔뜩 있었다.
말린 개구리, 곤충, 피가 묻은 것 같은 깃털, 해골, 뼈다귀, 사람 머리카락 같은 것들까지.
“…….”
“대애박.”
마샤가 9살 인생에 이런 충격은 없었다는 듯 눈을 빛냈다.
“너……. 너무…….”
괴상한데.
“멋지잖아!”
“컥, 쿨럭.”
마샤의 말에 한나는 사레가 들렸다.
“멋있다고? 저게?”
“에엑, 저게 뭐야.”
한나의 옆으로 다가온 제레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거들었다.
“저 멋진 인형은 뭐죠?”
저주 인형 같은데.
“와! 해골이 광이 나잖아!”
저게 해골이란 건 알고 있구나. 마샤는 이미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없었다.
“……나 저기 들어가기 싫어.”
당연하게도 한나는 흉흉한 분위기의 가게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저긴 꼭 매부리코에 사마귀점이 있는 마녀가 물건을 팔 것 같다고.
“다녀오세요.”
어느새 이안과 제레미는 몇 발자국 떨어져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배신이냐. 한나는 어쩔 수 없이 홀로 가게로 들어서야 했다.
“선생님! 이거 봐요! 이게 쥐 피래요!”
……그런 걸 왜 파는 건데.
“어, 어……. 그렇구나.”
하지만 마샤가 너무 좋아하니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와와! 이건 뭐예요?”
마샤가 점원을 향해 물었다.
“……식인 물고기.”
옆에 있는지도 몰랐던 점원의 대답으로 인해 한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있으면 있다고 인기척을 내시라고요!
매부리코에 사마귀점 마녀는 아니었지만 어딘지 음침한 분위기의 점원이었다. 존재감도 흐릿해서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와! 징그럽게 생겼어!”
한나는 마샤의 심미안이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징그럽다고는 생각하는구나.”
“갖고 싶어!”
징그럽다며. 징그러운데 왜 갖고 싶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데.
설마 이게 요즘 아이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늙은 감성인 건가? 한나는 마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마샤는 한참을 가게를 뱅글뱅글 몇 바퀴나 돌았다. 그가 집어 올리는 것마다 징그러웠지만 한나는 억지 미소를 띠어야 했다.
“선생님!”
“응?”
기다림이 지루해서 타조 깃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마샤가 의미심장하게 불렀다.
“저 이거 갖고 싶어요!”
“음…….”
마샤의 손에 들린 것은 모조 해골이었다. 아니, 저거 가짜가 맞기는 한가. 어딘지 찜찜한 고퀄리티였다.
한나는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저걸 사 줘야 하나. 신전에 저런 걸 들고 가도 되나. 그런데 마샤의 취향이 왜…….
설마……?
순간, 마샤의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 그녀의 미래 직업과 연관되어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한번 다시 짚고 가자면, 마샤의 미래는 미치광이 흑마법사였다.
“곰돌이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니?”
마지막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물었다.
“해골!”
“…….”
결국 한나는 기운 없이 지갑을 열었다.
“얼마인가요.”
“5실버입니다.”
분명 음침하게 입 닫고 서 있던 점원이 자본주의적 미소를 지으며 가격을 말했다.
‘뭐지……? 설마, 그 음침한 존재감 없는 모습도 콘셉트였던 건가? 대, 대단한 직업 정신이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프로 정신에 감탄하며 계산을 했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한나는 해골과 소중한 월급을 교환했다. 마샤는 밝은 얼굴로 가게를 나섰다.
“저런 걸 돈 주고 샀다고?”
해골을 껴안고 나온 마샤를 보며 제레미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무덤 가서 파 오는 게 낫…….”
“제레미.”
한나는 제레미를 부른 뒤 단호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 소리 함부로 내뱉지 말라는 의미였다. 정말 무덤 파헤칠까 봐 겁난단 말이다.
* * *
“자, 그럼 서점으로 들어갈까?”
한나는 이안과 함께 서점으로 가려고 두리번두리번 그를 찾았지만, 이안은 이미 서점의 안에 있었다. 제레미가 대신 답했다.
“이미 다 골라 놓은 것 같은데요.”
이안은 이미 마샤가 해골을 고르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책을 골라 계산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좋은 일 처리구나.”
그의 빠른 행동력에 한나는 감탄했다. 언제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더니. 한나는 괜히 말과 행동이 다른 이안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얼른 서점으로 다가가 이안의 책을 계산했다.
“그 책은 무슨 책이야 이안?”
이안의 품에 꼬옥 안겨 있는 책을 보며 물었다.
“사백 년 전 전쟁에 대한 책이에요.”
“음…….”
아이들은 동화 같은 거 좋아하지 않나? 아, 저게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것일까.
하긴, 우주인 무찌르는 로봇이 없으니 그나마 전쟁이 비슷한 내용인 건가?
한나는 아이들을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선생님! 저 검요! 검!”
제레미는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장난감 칼 있잖아.”
“진짜가 갖고 싶단 말이에요!”
그는 아까의 사건으로 건달들의 검이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필 거기서 그런 걸 보냐고!
“하지만 제레미, 그런 건 너무 위험해. 조금 더 커서 가지고 놀자.”
“나만 안 사 줘!”
제레미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제레미.”
한나가 불렀지만 제레미는 고개를 휙 돌렸다.
“위험하잖아. 장난감 검 사 줄게. 응?”
“싫어!”
“잘 들어 봐. 제레미. 해적은 바다에 빠져 죽을 확률이 높고, 마법사는 마법에 죽는다니까? 검사는 뭐에 죽겠어? 칼 맞아 죽는다고! 얼마나 아프겠어!”
일부러 무서운 표정으로 한나가 말했지만, 제레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럼 선생님은요?”
“어? 응?”
“선생님은 어떻게 죽는데요?”
악당들 보육원 선생은 악당들 손에 죽겠……. 아니! 뭐래는 거니!
“안전 직업이지. 안전…….”
갑자기 억울했다. 자신은 해적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닌데 목숨 걸고 일하고 있다니.
“아! 싫어요! 진짜 검이 아니면 안 살 거야!”
제레미는 이렇게 떼를 쓰면 마음 약한 한나가 결국엔 검을 사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나는 정말 아무것도 사지 않고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 * *
“아까 시장에서 산 체리로 만든 파이란다. 얘들아!”
식탁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파이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머릿수가 하나 모자랐다.
“제레미는?”
“삐졌나 봐요. 방에서 안 나와요.”
불참한 주인공은 제레미였다. 한나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너희 손은 씻었지?”
“네네!”
“그럼 먼저 먹고 있어. 선생님이 제레미 데려올게.”
한나는 제레미의 몫으로 만든 파이를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제레미. 선생님이야.”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레미, 들어간다?”
한나는 제레미가 삐져서 대꾸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
“…….”
제레미는 몰래 먹던 쿠키를 침대 밑에 급히 숨기다가 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
다 숨길 때까지 조금 기다리고 말을 하지…….
몰래 먹다 들킨 제레미도, 그것을 목격한 한나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밥도 간식도 거두절미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허무해진 순간이었다.
제레미는 꿋꿋하게 쿠키를 침대 밑에 마저 넣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삐죽 튀어나온 입에는 과자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제레미, 낮의 일 때문에 삐졌어?”
“아니오.”
딱딱하게 굳은 말투에서 ‘나 삐졌소.’ 광고를 하고 있었다. 한나는 제레미의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제레미와 눈을 맞췄다.
“제레미, 아직 너한테 위험한 물건이라 그랬어.”
“알아요.”
“다음에, 너한테 제대로 검을 가르쳐 줄 선생님이 생기면, 그때 선생님이 꼭 사 줄게.”
“……정말?”
제레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평소 개구쟁이에 사나운 모습이지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귀여운 꼬마였다.
“응! 네 첫 검은 꼭 선생님이 사 줄게!”
사실 보육원에서 검술 선생님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한나도, 제레미도 알고 있었다.
“……약속해요.”
“자. 약속.”
한나는 새끼손가락을 펼쳐 제레미의 손에 가져다 댔다. 제레미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꼭 사 줘야 해요.”
“알았어. 알았어. 검술 선생님이 생기면 꼭 사 줄게. 그럼 이제 파이 먹으러 갈까?”
“네.”
제레미가 폴짝하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 후 한나보다 빠르게 방을 뛰어나갔다. 파이에 환장하는 제레미가 얼마나 파이가 먹고 싶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귀엽긴.”
그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한나는 제레미가 검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건달들을 보고 멋있다고 한 건 아니겠지?”
정말 걱정스러운 제레미였다. 뒷골목이 자신의 적성에 꼭 맞는다는 걸 알아본 것은 아니길…….
한나는 제레미가 달려간 복도를 따라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와!”
제레미는 식탁에 앉자마자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흥, 안 오면 내가 다 먹을랬더니.”
마샤가 새침하게 말했다. 자신의 파이 접시를 양손으로 잡은 제레미가 한참을 파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벌써 입으로 들어가 반쯤 사라졌어야 할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너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나 봐.”
마샤 역시 제레미의 파이를 보고 있었다.
“…….”
제레미의 파이 위에는 어눌하지만 검 모양으로 체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삐뚤빼뚤하네.”
퉁명스러운 말이었지만 어쩐지 제레미의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 삐뚤빼뚤한 검 모양 장식의 파이를 보면서 제레미는 한참을 베어 물지 못했다.
쉽게 삼켜 버리기엔 아까운 마음이 담겨 있어서였다.
* * *
“아, 날씨 좋구나.”
한나는 한낮의 따스한 볕을 받으며 동산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마샤의 곰돌이를 베고서.
마샤가 곰돌이에 대한 애정이 조금……. 아니, 많이 꺾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마샤! 쥐 잡아도 절대 못 들고 가!”
멀리, 땅을 파고 있는 마샤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사이 마샤의 취미가 생물 관찰로 바뀌었다. 인형 놀이를 좋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꾸만 곤충과 쥐를 잡아왔다.
한나는 이상한 것을 잡아오는 마샤를 필사적으로 말리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제레미! 나무 올라가면 위험해!”
제레미는 오늘도 기운이 넘쳤다. 나무 타기에 재미가 들린 것인지 자꾸 나무를 올랐다. 저렇게 나무도 타고, 남의 집 담장도 타고, 금고도 따고…….
제레미의 발달된 나무 타기 실력에서 싹을 틔운 상상은 끝도 없이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한나는 퍼뜩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이안! 햇빛 좀 받아!”
그리고 보육원 건물 밖으로 발을 딛지 않은 이안에게 어서 나오라고 외쳤다.
“……아, 기운 빠진다. 기운 빠져.”
한나는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력이 쇠해서였다.
“아무래도 영양제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세계에도 비타민을 파는지 잠시 고민했다.
“선생님!”
그러는 사이 마샤가 멀리서 해맑게 웃으며 달려왔다.
“선생님, 이리 와 보세요!”
“왜? 무슨 일이야?”
마샤는 얼른얼른 서두르라며 한나의 손을 양손으로 잡아끌었다. 한나는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이러나 싶어 순간 긴장했다.
“저기, 이상한 게 있어요!”
“이상한 거?”
마샤가 풀숲을 가리키며 말했고, 한나는 또 쥐시체 같은 게 있는 건 아닌지 잔뜩 긴장하며 마샤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마샤와 함께 도착한 풀숲에는 정말 뭔가 있었다.
“알?”
동그란 알이 있었다. 그것은 달걀보다 조금 큰 크기의 알이었다. 달걀이라기엔 길쭉하지 않고 아주 동그랗게 생긴 알.
“여기서 꼬꼬닭이 나오나요?”
“어……. 음…….”
자세히 보니 알 표면에 무늬도 있었다. 이건 절대 마샤가 귀엽게 말하는 꼬꼬닭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서 무슨 닭이 나와! 그냥 구워 먹자!”
제레미가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눈을 빛내며 다가와 말했다.
“내가 발견했으니까 내 꼬꼬거든!”
“네가 가지고 있어 봐야 안 태어난다니까?”
“품어 주면 태어나!”
“너 바보냐?”
“이게!”
투닥거리던 마샤와 제레미가 갑자기 한나를 바라보았고, 한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사실, 한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볕이 좋아서 졸리기만 할 뿐.
아이들의 답을 알려 달라는 눈빛을 느낀 한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그러니까 그 알은…….”
뭘까. 뭐지? 근데 인간이 품어도 태어나나?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상당히 심란했다.
“이, 일단 마샤가 발견했으니 마샤의 말대로…….”
“제가 오늘부터 꼭 안고 잘게요!”
마샤가 방긋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나중에 뭐 안 나온다고 울고불고하지나 마라!”
제레미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한나는 불안했다.
‘저 안에서 이상한 게 나오면 어쩌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보육원의 일상에 정체불명의 알이 끼얹어졌다.
* * *
그날 밤.
“마샤, 그렇게 옆에 두고 자다간 깨지지 않을까?”
한나는 마샤의 방 커튼을 닫으며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마샤가 자신의 옆자리에 알을 두고 이불을 덮어 주고 있어서였다.
“조심해서 자면 돼요!”
“네가 그렇게 한자리에서 조용히 자는 편이 아니라서 하는 말이었어.”
똑바로 잠들어도 머리와 발의 위치가 거꾸로 뒤집혀 일어나는 마샤의 옆에서 알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건 왜 이불을 덮는 거니?”
마샤는 해골을 알 옆에 놓고 거기에도 이불을 얹고 있었다.
“해골도 추우면 안 되니까요!”
걘 어차피 추위 같은 거 못 느껴. 살도 없는걸.
“……그렇구나.”
한나는 정말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아이들에겐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 것들이 많았다.
“혹시 모르니 따로 담요를 덮어 주는 건 어떨까?”
그것은 불의의 이불빨래를 막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흠.”
마샤가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너에게 깔려서 빛도 못 보고 꼬꼬가 하늘로 가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그건 안 되는데.”
“오늘도 몸의 반은 침대 밖에서 눈 떴다는 걸 기억해. 마샤.”
“음…….”
마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아침의 일은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마샤는 거의 침대에 상반신만 걸친 채 일어났었다. 누가 신전에 사는 거 아니랄까 봐 무릎까지 꿇고 경건하게 자는 건지.
“좋아요!”
금세 바뀐 마샤의 결정에 한나는 재빠르게 담요를 꺼내 침대 옆에 펼쳤다. 혹시라도 말을 번복할까 봐 담요를 최대한 폭신해 보이도록 하는 데 노력했다.
“자, 여기. 어때?”
“제가 밟지 않을까요?”
그 말에 즉시 위치를 조금 먼 곳으로 이동시켰다.
“여기는?”
“잘 안 보여요. 제가 못 볼 때 나오면 어떡해요.”
또 조금 옆으로 옮겼다.
“자, 여기는 딱이지?”
“좋아요.”
언제는 옆에 끼고도 잔다더니 까탈스럽기가 여간 아니었다. 한나는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알을 받아들고 담요 위에 얹었다.
“이 위치면 될까?”
“알 위로 담요 덮어 주세요.”
“그래.”
아주 시종 부리듯이 부리는구나. 하지만 다시 한번 이불 빨래를 생각하며 한나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자! 이제 마샤도 꼬꼬도 잘 자는 거야.”
“네!”
마샤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해골은 여전히 마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나가 촛대의 불을 끄는 순간까지 마샤는 담요에 싸여 있는 알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훅.
그 밤은 마샤에게도, 한나에게도 불안한 밤이었다.
* * *
“준비는 잘해 뒀겠지?”
“네.”
누가 보면 밀거래라도 하러 가는 줄 알 법한 진지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건 그저, 아침 회의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중앙 신전의 감사 시찰 소식에 레미아 신전은 비상이었다.
“중앙 신전은 깐깐하기가 보통이 아니니 보육원 점검 잘하라고. 애들도 관리 잘하고.”
“네.”
“트집 잡힐 건덕지를 주면 안 돼.”
솔직히 대충 훑어만 봐도 잡을 트집이 줄줄이인데, 어떻게 트집 잡히지 말라는 건지. 한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대신관은 이번 감사에 다음 분기 지원금이 결정된다며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 또 강조했다.
“이번엔 전이랑 다른 사람들이 온다던데. 예전 신관들은 조금만 챙겨 주면 점수를 쏠쏠히 줬는데 말이야.”
뒷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편한 감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신관은 까칠함이 극에 달했다.
“그럼 전 아이들 챙기러 가 볼게요.”
회의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고 있기가 지겨워진 한나는 바쁜 티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는 도착한다고 했으니 잘 준비해!”
“네!”
알겠다! 알겠다고! 몇 번을 말하냐고!
한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신관의 집무실을 나와서 보육원으로 향했다.
“내가 증거만 모아 뒀어도 아주 그냥 중앙 신전 사람들 왔을 때 다 일러바치는 건데.”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한나의 입장에서도 신전이 사라진다면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할 수도 있으니 어지간하면 신전은 유지되면서, 보육원에 헛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하여튼 복잡하다. 복잡해.”
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되도록 대신관의 말처럼 물렁한 사람들이 와서 조용히 넘어가야 할 텐데.
* * *
“얘들아!”
아침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생활관에 모여 있었다.
“우리 청소할까?”
“청소요?”
갑작스러운 한나의 청소 권유에 셋 다 표정이 밝지 못했다.
“응!”
애써 즐거운 놀이를 하는 것처럼 밝게 말했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귀찮음이 역력했다.
사실 어제도 각자의 방을 정리하느라 한나와 아이들은 진땀을 쏙 뺀 상태였었다. 마샤의 방에 특히나 공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요즘 마샤의 취미는 인형 개조하기였다.
예쁜 인형들을 괴기스럽게 개조해 흉물로 만들어 놓고, 해골도 한가득 모아 뒀다.
한나는 마샤의 보물상자를 만들어 주면서 그것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치우느라 애를 먹었다.
‘정말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징글징글한 물건들이었어.’
그때였다.
한나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이안을 발견했다.
“멈춰, 이안. 이대로 내빼면 먼지 가득한 생활관에서 구르게 될 줄 알아.”
“……아.”
한나가 세게 나가자, 이안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건네는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자. 제레미, 마샤.”
제레미와 마샤도 물걸레를 하나씩 받아들었다.
“왜 갑자기 대청소를 하는 거예요?”
“오늘 중앙 신전에서 높은 분들이 오신대.”
“높은 분들?”
아이들은 호기심이 동한 것인지 눈을 빛냈다.
“대신관님 같은 높은 분이요?”
아니. 우리 신전의 그 폐기물 같은 사람 말고.
“아냐, 마샤. 이분들은 더 대단한 분들이셔.”
단호한 한나의 말에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보다 위대한 그 이름은 자본주의 아니던가.
다음 분기 예산이 걸린 만큼 당분간은 그들이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손님이 오면 깨끗하게 청소하고 반갑게 맞아 주는 거 아니겠어?”
“정말 그냥 손님이라서 이 요란을 떠는 거라고요?”
제레미가 물걸레를 휘휘 돌리며 말했다.
“아직 너희는 몰라도 되는 세계가 있는 법이란다.”
마치 한나의 말의 뜻을 이해라도 한 듯 제레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그에 한나는 서둘러 팔을 걷어붙였다.
“자! 얼른 얼른 움직이자고! 점심시간까지 파이팅 하는 거야!”
“와아…….”
아이들의 기운 빠진 반응에도 한나는 열심히 청소를 시작했다.
다음 분기 예산도 예산이지만 트집 잡혔다가 자신을 달달 볶을 대신관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톡톡, 톡톡.
한나는 말도 없이 청소에 집중하다 겨우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청소를 잘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제레미, 이미 닦은 자리에 먼지떨이 털지 말라니까.”
제레미는 아주 청소하는 시늉만 하기로 한 것인지 성의 없이 먼지떨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네에.”
“마샤, 그러다 알 깨지겠어. 잠시 내려놓는 게 어때?”
마샤는 청소를 하면서도 알을 끼고 있었는데, 한나는 그 모습이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그치만 온기가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이안! 그거 일회용 아니야! 빨아 쓸 거야, 버리지 마!”
이안은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몽땅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있었다.
“…….”
순간 한나는 차라리 혼자 하는 청소가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아비규환이었다.
‘이것도 교육이다. 교육이야. 참아야 하느니.’
자신들의 공간을 스스로 청소하는 것도 다 교육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나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참여시키기로 했다.
한나의 지속적인 잔소리로 인해, 청소는 점점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득하기만 했던 청소가 거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휴, 그래도 제법 반질반질해졌다. 그렇지?”
깨끗하진 내부의 모습을 보며 한나가 말했다.
“네. 깨끗해요.”
아이들도 결과가 흡족했는지, 구슬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옷 갈아입어야겠는데요.”
제레미의 말에 한나는 서둘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유독 그녀의 옷은 옷으로 바닥을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더러워져 있었다.
“제레미 네가 자꾸 손을 내 옷에 닦아서 그렇잖아.”
한나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얼른 씻고 오자. 다들 꼴이 말이 아니네.”
자신도 자신이지만, 아이들의 모습도 꼬질꼬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중앙 신전 사람들을 마주했다간 대신관의 불호령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점심은 뭐 먹어요?”
열심히 노동을 해서인지 마샤는 배가 많이 고프다고 티를 냈다.
“오늘은 신전 식당 어때?”
“거긴 맛없는데.”
“전 아무거나 좋아요. 배가 너무 고파.”
제레미도 꼬르륵거리는 주린 배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 얼른 씻고 밥 먹으러 가자.”
아이들과 즐거운 점심을 상상하며 한나는 욕탕으로 향했다.
“크으!”
역시 신전의 온천은 최고였다.
* * *
“반갑습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먼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말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한나와 아이들은 신전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중앙 신전의 일행들이 도착해 있었다.
‘아니 벌써?’
오후에나 도착한다더니 예상보다도 훨씬 이른 시각이었다.
“식사도 못 챙기고 오셨을 텐데, 시장하시지요?”
대신관은 전에 본 적 없는 상냥함으로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사람들이 그 손님이에요?”
“응. 그런 것 같아.”
“되게 젊은 사람들이네. 대신관님 같은 늙은 할아버지들이 올 줄 알았는데.”
“풉.”
대신관은 머리가 벗겨지긴 했지만 그렇게 늙은 할아버지까지는 아니었는데, 한나는 마샤의 말에 빵 터졌다.
“저쪽은?”
대신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앙 신전의 일행이 한나와 아이들을 발견하고 대신관에게 물었다.
“아! 저희 신전의 보육원 선생과 아이들입니다. 아주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이죠.”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은 무슨.
대신관이 아이들의 이름이라도 알까, 한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보육원 시설이 있었죠.”
한나가 허리를 조금 굽혀 인사했고, 아이들도 그녀를 따라 꾸벅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중앙 신전 소속 커티스라고 합니다.”
앞에 보이는 중앙 신전의 일행들은 총 세 명이었는데, 두 명은 신관이었고 한 명은 성기사였다. 그중 갈색 머리 남자가 인사를 해 왔다.
“네. 안녕하세요. 보육교사 한나라고 해요. 이쪽은 마샤, 제레미, 이안이랍니다.”
“네. 반갑습니다.”
커티스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깔끔한 인상이었다. 반듯한 안경이 인상적이었는데 대충 보아도 일 처리를 기가 막히게 할 상이었다.
“아. 이쪽은 이번 감사의 책임자인 세자르 대신관님이십니다.”
“아?”
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갈색 머리 남자가 감사 일행의 책임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보스는 따로 있었다.
‘대신관?’
대신관이라면 보통 나이 들고 배 나온 아저씨를 상상하곤 했는데, 세자르라고 불린 남자는 상당히 젊었다.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반짝이는 은발 머리카락 밑으로 나른한 듯 기력 없어 보이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소개했는데 손을 조금 드는 것이 인사의 전부였다.
입에 꿀을 발라 놓은 것인지 은발 머리의 남자는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특이한 대장님이네.”
“조금 특이하긴 하시죠.”
한나의 혼잣말을 들은 커티스가 답했고, 그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들렸을 줄이야!
“이쪽은 모이세이입니다. 보다시피 성기사입니다.”
“와아.”
제레미가 성기사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저희 아이가 검에 관심이 많아서. 이맘때 아이들은 다 그렇잖아요.”
한나는 제레미의 조금 음습한 취향이 드러날까 지레 걱정하고 있었다.
“네. 그렇죠. 기사님이 있는 동안 마음껏 구경하렴.”
커티스라는 남자는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다시 대신관에게 돌아갔다.
“와. 완전 멋있어!”
“저 아저씨 좀 잘생긴 것 같아.”
“그러게.”
제레미는 온통 성기사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고, 마샤의 신관이 잘생긴 것 같다는 말에 한나는 전적으로 동감했다.
“역시 지적인 안경이 최고지.”
“아니, 아니! 은발 머리 아저씨요!”
“에? 그 눈 풀린 사람이?”
커티스란 사람을 말한 게 아니었어? 은발 머리 아저씨라니.
권태롭게 내리깔린 대신관의 눈은 한나에게 멍하게 풀린 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게 참 마음에 들어요.”
“마샤는 취향이 특이하구나.”
핏기없는 하얀 얼굴에 무기력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 뭐가 멋있다는 건지. 뭐 얼굴은 나름 곱상하니 머리카락도 반짝반짝 예쁘긴 했지만 말이다.
“밥이나 먹자.”
“그래요.”
신전 사람들이 잘생기든 말든 그들에게는 사실 아무 의미 없는 평가였다. 그래서 한나는 밥이나 먹기로 결정했다.
“제레미! 그쪽 아니야! 이리 와!”
성기사를 쫓아가려는 제레미를 붙잡아 식탁에 앉힌 한나는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가지러 갔다.
“제레미! 앉아 있으라니까!”
성기사의 검에 제레미를 끌어당기는 자석이라도 달린 것인지 자꾸만 탈출하는 제레미를 잡느라 또 정신없는 식사 시간이었다.
* * *
“와, 오늘도 빨래가 많네.”
한나는 아침부터 빨래를 탈탈 털고 있었다. 중앙 신전의 사람들이 왔다지만 신전 내부의 감사에 집중하는 것인지 아직 보육원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뭘 먹으면 좋으려나.”
그래서일까, 지금 한나는 그 사람들보다 점심식사 메뉴가 더 고민이었다.
탈탈.
동산에 길게 늘어진 빨랫줄에 야무지게 물기를 털어 낸 빨래를 널었다. 아이들의 작은 옷이 하나둘 바람에 펄럭였다.
“귀여워.”
한나는 자신에 비해 한참 작은 옷들이 귀여웠다. 마샤의 드레스는 프릴을 잘 펴서 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전 거꾸로 뒤집어진 프릴이 바로 내려오지 않는다고 툴툴거리던 마샤의 모습이 생각나 한나는 열심히 방향을 바로 잡았다.
“음. 이 정도면 됐겠지.”
잘 널린 빨래와 쏟아지는 햇볕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빨래 널기에 보육원 앞동산만 한 곳이 없었다.
“어디 조금 쉬어 볼까.”
빨래를 널고 난 뒤, 동산 나무 밑에 앉아 휴식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한나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음음~”
즐겁게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고목나무 밑으로 향하는 그녀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
하얀 신관 망토를 돌돌 말아 머리에 베고 누워 있는 은발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대신관님?”
그는 신전 감사의 책임자라던 조금 묘한 분위기의 대신관 세자르였다.
도대체, 신전을 검사하느라 바빠야 할 대장님께서 왜 여기서 오수를 즐기고 계신 걸까?
한나가 다가온 것을 뒤늦게 느낀 세자르가 뒤늦게 눈을 떴다.
방금까지 자고 일어나서인지 아니면 원래 저렇게 멍하고 나른한 눈을 가지고 있는 건지, 한나의 눈에 세자르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한나가 어색하게 인사하자, 세자르는 또 손을 까딱 올리며 인사를 받았다.
‘묘하게 건방진 것 같기도.’
그 순간 그녀는 대신관들은 다 네가지가 부족해야 될 수 있는 건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자신의 자리를 이렇게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선객이 있으니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한나가 우물쭈물하자 몸을 일으킨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앉아.”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한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목소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낮고 굵어서였다.
과장을 보태자면 땅 깊은 곳에서 울리는 흙의 노랫소리처럼 감미롭기까지 했다.
아, 방금 이 말은 너무 오글거리니 취소.
하여튼, 그의 목소리는 아주 좋았다.
“아…… 네.”
이상하게도 그의 말에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앉으라는 권유에 얼떨결에 옆에 앉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세자르의 권태로운 시선이 한나에게 스쳤다. 눈치도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보육원에서 오래 일했나?”
“아, 아니요. 얼마 안 됐어요.”
“그런 것 치곤 아이들이 잘 따르던데.”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기력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사람을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언제 보셨어요?”
세상사 관심 없어 보이는 사람인데 언제 자신과 아이들을 관찰한 건지.
“아침부터 여기 누워 있었거든.”
그가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을 바라보았고, 한나의 시선도 따라갔다. 몸을 눕혔던 자리의 풀이 잔뜩 상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잔디를 혹사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바쁘지 않으셨나 보네요.”
태평하게 여기서 잠이나 자고 있었느냐는 말을 아주 적절하게 순화시켰다.
“바빠.”
퍽이나.
“그렇죠. 바쁘게 일하는 중간에도 휴식은 필요하죠.”
냉큼 맞장구를 쳤다.
아무리 아랫사람에게 일을 다 맡기고 띵가띵가 노니는 한량 같아 보여도 책임자는 책임자일 테니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로.
“원래 새는 구멍은 신경 쓰지 않는 곳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네?”
한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안다는 듯 세자르는 제 무릎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말했다.
‘뭐야, 생긴 거랑 다르게 눈치가 장난 아니잖아?’
세자르의 시린 벽안이 한나에게 향했다. 여태 계속 반쯤 감겨 있어 몰랐는데, 그의 눈은 투명한 바닷물처럼 빛나고 있었다.
건방진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푸르름이었다.
“썩어 있는 신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을 보니 긴가민가하군.”
“예?”
“좋은 의미.”
세자르는 황당해하는 한나를 찬찬히 살폈다. 그는 이미 이 신전에 오기 전부터 신전이 자금을 횡령하고 전 책임자들에게 뇌물을 먹여 입막음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썩어빠진 신전에서 보육원의 아이들도 지원금을 받아 내기 위해 이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예상과 달리 잘 운영된 흔적이 역력한 보육원의 모습에 판단이 조금 흔들렸다.
“당신도 여기 보육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아? 아! 네.”
그 순간 한나는 진짜 한나가 보육원 출신이란 것을 기억해 내고 냉큼 답했다.
“완전히 갱생 불가할 정도는 아닐 수도 있겠군.”
세자르가 중얼거렸다. 그에 한나는 이 이상한 대신관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이 좋은 사람인 건지, 보통 사람보다 똑똑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정말 귀찮아서 막 갖다 붙이는 건지.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이 부는 대로 휘날렸다.
“대신관님은 뭔가…… 음, 특별한 성격이시군요.”
“둘러 말하지 말고 그냥 괴짜 같다고 해.”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한나는 이 사람이 지나치게 촉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쯤 되니 어쩌면 항상 피곤하고 나른해 보이는 모습이 남몰래 밤마다 열심히 일을 해서인가 싶기도 했다.
“신전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다면 해도 되는데.”
신전이 나쁜 짓을 한다면 일러바쳐도 좋다는 은근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아는 내용은 그도 알고 있는 마당에 한나가 보탤 말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이들을 몰래 팔아 치우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지금 말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되었다.
물증도 없고, 만약 이 일로 보육원이 발칵 뒤집히고 신전이 사라지면 아이들은 방방곡곡으로 흩어질 텐데.
“만약 저희 신전이 중앙 신전의 기준에 미달하면 이곳은 어떻게 되나요?”
“사라지겠지.”
“보육원도요?”
“물론.”
“그럼 아이들은…….”
“다른 신전으로 보내지겠지.”
역시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전할 내용이 있다면 전할게요.”
어쩌면 아이들과 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나는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역시 그냥 데리고 살아야 하나.’
순간 바람이 세게 불었고, 한나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앞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둘렀던 머리띠가 풀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앗!”
텁.
날아가는 터번을 세자르가 잡았다.
한나는 머리띠를 잡은 세자르의 손을 바라보았고, 무언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문신?’
그는 첫 만남에서는 손에 하얀 신관용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지금은 장갑이 없었다. 맨손등에 붉은 문신 같은 것이 보였다.
그 붉은 것은 흘러내린 신관복의 자리를 따라 길게 팔로 이어져 있었다.
‘화살……?’
마치 화살 모양을 한 붉은 문신을 발견한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신경이 거슬리는 묘한 익숙함.
‘활…… 신관…… 세자르…….’
순간 한나의 얼굴이 굳었다. 몸의 솜털이 쭈뼛 서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이내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세자르가 내민 머리끈을 멍하니 보았다.
스륵.
머리끈이 한나의 손 위로 떨어지고, 한나는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심판의 빛.’
세자르. 심판의 빛이라 불리는 그는 소설 속 악당들의 악당이었다.
악당들을 죄다 잡아 족치는 피를 뒤집어쓴 신관.
그에게 악을 심판하는 신관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악당들의 정점에 섰을 것이라는 악독한 대신관이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같은 운명으로 태어나도 난 자리에 따라 누구는 가축을 써는 백정이 되고, 누구는 전장을 누비는 장군이 된다고.
그는 적어도 신의 사랑을 받은 몸으로 태어나 악당 대신 신관이 된 케이스였다. 그의 팔에 있는 붉은 화살은 신이 준 무기였다.
세자르는 손만 움켜쥐면 금빛으로 일렁이는 활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이 빛을 발하면 끝도 없이 화살이 쏟아진다.
그것들은 보통 악당들을 죽이는 데 이용되었고.
“맙소사…….”
한나가 경악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소중한 내 새끼들의 최고 적이라니!
어떻게 그 이름을 잊고 있었지? 아니, 자신이 상상하는 악당들의 악당 세자르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악마에 가까운 살인귀의 이미지였다.
“왜 그러지?”
이렇게 맹하고 권태로운 게으름뱅이 이미지와 그 인간이 겹쳐질 리가 없었다.
“…….”
이거 사기 아니냐고!
어린 악당 셋, 악독한 악당 사냥꾼이 지금 한곳에 있다.
원작에서도 세자르가 여기에 왔었던가?
“날이 따뜻하네.”
저렇게 따뜻한 바람이나 즐기고 있는 싸가지 한량이 악당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악을 말살시키는 대신관이라니, 이거 너무 매치가 안 되잖아!
* * *
“선생님! 선생님!”
“응?”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빨래 바구니를 챙겨 보육원 내부로 들어선 한나에게 제레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마, 마샤……!”
“마샤가 왜? 설마 어디 다쳤어?”
한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제레미의 뒷말을 기다렸다.
“아…… 알!”
제레미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알?”
“꼬꼬! 꼬꼬가!”
“알? 꼬꼬?”
곰곰이 제레미의 말을 곱씹는 한나를 보며 제레미가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팡팡 쳤다.
“알에서 꼬꼬가 나왔다고요!”
“뭐라고?!”
제레미의 말에 한나는 깜짝 놀라 빨래 바구니를 놓쳤다.
맙소사. 그게 진짜 부화했다고?
“빨리요! 빨리!”
제레미가 한나의 손을 끌고 갔다.
“꼬꼬요!”
제레미의 손에 이끌려 마샤의 방에 들어서자, 방에는 마샤와 이안이 있었다.
“……마샤?”
마샤의 손에는 정말 뭔가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마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나를 반겼다. 한나는 조심스럽게 마샤의 곁으로 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샤가 제 손에 들린 작은 생명체를 한나의 눈앞에 내밀었다.
“…….”
그에 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보통 병아리들이 이런 색이니?”
그녀의 눈앞에는 노란 병아리 대신 보송보송한 회색의 털을 가진 아기 새가 있었다. 혹시 이 세계 병아리는 회색일까 싶어 한나가 물었다. 아이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머리에 뿔이 있고?”
말랑하고 뭉툭해 보이긴 하나 어디로 보나 뿔처럼 생긴 것이 이마에 달려 있었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끄엑!”
“그리고 이렇게 이상하게 울던가?”
“그럴 리가요.”
이안이 대꾸했다. 마샤의 손에 들린 정체 모를 생명체는 절대 병아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리 새끼도 아니고, 참새일 리도 없고…… 그냥, 새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머리에 뿔이라니. 뿔이라니!
“선생님! 알이 쩌적! 하고 갈라지면서 꼬꼬가 나왔어요!”
“……추, 축하해. 꼬꼬야.”
일단 생명의 탄생은 축하해야 마땅했다. 한나는 영혼 없이 박수를 쳤다.
“저를 엄마로 생각 하나 봐요! 여기 봐요!”
기특한 꼬꼬, 이하 정체불명의 새는 마샤의 볼에 제 몸을 비비고 있었다. 정말 마샤의 말처럼 아기 새가 애정표현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막 알에서 부화한 새가 저렇게 정확한 행동을 할 수 있던가? 보통 눈도 제대로 못 뜨지 않나?
“…….”
갈수록 의심스럽다.
“어떻게 돌봤길래 이렇게 예쁜 새가 나왔을까, 마샤?”
“매일매일 쓰다듬어 주고, 꼬옥 안아 줬어요!”
혹시 마수 같은 건 아니겠지. 흑마법사들은 마수를 부린다던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샤의 잠재된 마력이 마수를 깨웠다거나…….
어우!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한나는 퍼뜩 고개를 저었다.
“그치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마샤의 손에 들린 새는 이상한걸!
“이름이 꼬꼬야?”
“네! 꼬꼬가 알 상태부터 그렇게 불렀으니까 꼬꼬에요!”
“……그렇구나.”
한나는 차마 마샤에게 그건 귀여운 꼬꼬 같은 게 아니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꼬꼬…….”
태어나자마자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을 마주치는 귀여운 꼬꼬…….
“어쩌지.”
아무래도 저 꼬꼬는 잘 숨겨야 할 것 같다. 신전에서 절대 알지 못하게.
“근데 그 꼬꼬 님은 뭘 드신다니?”
아이 셋에 더해서 정체불명의 새의 먹이 걱정이 더해졌다. 제발 육고기 같은 것만 먹지 말아라. 제발.
야밤에 마샤 몰래 널 버렸다가 마샤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단 말이다.
낯선 존재의 등장에 한나의 울상은 하루 종일 펴질 수 없었다.
* * *
이쯤에서 한나는 진지하게 보육원 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했다.
보육원에는 악당 셋과 악당 사냥꾼 신관이 사이좋게 머물고 있으며, 신전은 존폐의 위기에 놓여 보육원이 하루아침에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거기에 더해서 마샤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부화시켰다.
그 존재를 들켰다간 마샤가 어디 잡혀가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건 덤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복도를 서성이던 한나는 복도 벽에 기대 머리를 콩콩 박았다.
“망했네.”
답이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아주 바람 잘 날은커녕 숨이 턱턱 막히네!”
한나는 벽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얼른 이 악몽에서 깨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아. 스트레스 받았더니 배고프네.”
한나의 발걸음이 식당으로 향했다. 낮에 먹다 남긴 파이를 생각하자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사실 한나는 걱정은 많지만 긍정적이고 태평한 편이었다. 식당으로 다가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응?”
식당으로 가는 길에 한나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체이슨 신관이었다. 이 밤중에 어딜 그리 급히 가는지.
두리번, 두리번.
그것도 저렇게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폴폴 풍기고서 말이다.
그는 뭔가를 품에 품고서 주위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정원에서 신전으로 연결된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미행하고 싶게!’
한나는 호기심이 강하고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살금살금.
결국 그녀는 체이슨의 뒤를 밟고 있었다.
이건 불가항력이다. 불가항력! 그러게 왜 저렇게 의심스럽게 구냐고.
그가 향한 곳은 신전의 욕탕이 있는 곳이었다. 한나는 차마 남자 욕실로 들어가는 그를 계속 뒤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냥 야밤에 씻으러 간 건가?’
하지만 목욕을 하러 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생각에 한나는 먼발치에서 체이슨이 나오길 기다렸다.
숨죽여 기다리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체이슨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몸을 씻었다기엔 너무 보송보송하고 빠른 퇴장이었다.
심지어 들어갈 때는 뭔가를 품고 들어갔는데, 왜 나올 땐 빈손일까.
‘이거 아무래도…….’
촉이 온다. 촉이 와.
한나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좁아 들었다. 절로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한나는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룰루.”
발걸음이 가벼운 이유는 어젯밤의 소소한 수확 덕분이었다.
대신관의 집무실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뭔가 알고 있어. 돈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죠? 자료는 폐기할까요?”
“일단 이번 감사팀이 떠나고 나면 외부로 옮기고, 애들도 빨리 처리해 버리자고. 어차피 증거만 없으면 잘못돼도 지원금 삭감이나 당하고 말겠지.”
문을 두드리려던 손이 뚝 하고 멈춰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애들을 처리……?’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했다. 아무래도 중앙 신전 신관들의 의심을 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대신관이 수를 쓰려는 것이 분명했다.
“여차하면 신전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옥살이를 하게 생겼어. 망할 중앙 신전 놈들!”
일이 단단히 꼬인 모양이었다. 저가 잘못해 놓고 뭐가 그리 억울한지 대신관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한나는 안의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리면서 어젯밤 세웠던 계획을 빨리 앞당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집무실이 조용해지자 한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한나입니다.”
“들어와.”
대신관은 여전히 짜증이 서려 있는 목소리로 한나를 맞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대신관이 질문을 던졌다.
“보육원에도 그들이 왔나?”
“아. 한 분 오셨어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날아드는 질문에 한나는 급히 대답했다.
“뭘 물어보던가?”
“별 건 없었어요. 그냥 언제부터 일했느냐 정도……?”
“이번 감사가 잘못되면 끝장이야.”
끝은 당신이나 끝이겠지. 그리고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이미 가망도 없는 것 같던데.
“잘 처신할게요.”
대신관은 전에 없이 불안해 보였다. 언뜻 지나다 볼 때면 갈색 머리 남자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진땀을 흘리고 있던데, 감사가 여간 깐깐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대신관님, 계십니까.”
문밖에서 갈색 머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예! 여기 있습니다!”
대신관이 벌떡 일어났다. 체이슨도 놀란 표정으로 일어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대신관은 직접 뛰어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이렇게 날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한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커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어딘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궁금한 것도 있고 전달할 내용도 있어서 일찍 찾아왔습니다.”
“여기 앉으십시오!”
한나는 대신관이 갈색 머리 남자에게 과하게 굽신거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전의 계급에 따르자면 대신관인 비히루드가 높은 직급이었다.
“가서 차라도 한잔 내오게.”
아무래도 상석을 내어 준 것으로 보아, 중앙 신전의 위세가 변두리 신전의 대신관쯤은 가볍게 압살하는 모양이었다.
체이슨이 얼른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보나마나 껄끄러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아 한나는 얼른 내빼고 싶었다.
“두 번 전달하지 않게 함께 들으시는 게 좋을 텐데요.”
“아, 네.”
한나는 얌전히 앉았다. 커티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듯 이글거리는 대신관의 시선이 따가워서였다.
“다들 앉으시죠.”
대신관과 체이슨이 한나의 맞은편 자리에 쪼르륵 앉았다. 커티스의 앞에는 예쁜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커티스가 가져온 종이를 넘기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꼴깍.
지은 죄도 없는데 삭막한 분위기에 한나 역시 덩달아 긴장이 됐다.
“레미아 신전에서는 여러 시설로 추가 지원금을 받고 있더군요.”
“예. 보육원과 노인시설이 있습니다.”
“이곳에 오는 노인들은 봉사를 하러 오는 것으로 알고 있던데. 오면 신전의 소일거리를 한다고.”
“그, 그럴 리가요.”
한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맞는 말이었다. 돌보아 주긴커녕 사람들을 불러다 신전의 잡일을 시키곤 했다.
“보육원의 원아가 6명으로 기재돼 있던데 나머지 3명은 어디 갔을까요?”
“나이가 차서 퇴소한 아이들이 아직 정리가 안 된 모양입니다. 하하.”
당황한 대신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그래도 숫자는 맞지 않았다. 15살을 만기로 퇴소한 아이들은 한나를 포함해 2명이었으니까.
“신전 보수비용으로 500골드를 받았던데, 시설 노후화된 곳은 여전하고.”
“아직 공사 착수가 안 되어서……. 지금 의뢰를 해 놓은 상태입니다.”
500골드라는 액수가 어째 공교롭게 그들이 아이들을 이용해 얻으려는 액수와 겹쳤다.
과연 이게 우연일까.
“시설 관리 미흡, 재정 관리 엉망, 서류는 죄다 맞는 게 없고……. 이대로 중앙 신전에 보고된다면 뒷일은 불 보듯 뻔하군요.”
그의 말에 비히루드 대신관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커티스는 천천히 서류를 더 훑었다.
그러다 그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산 삭감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뭔데! 무슨 내용인데! 그 정도로 안 끝나면 대신관 옷을 벗긴다는 얘긴가?
상당히 궁금해지는 서류 내용에 한나는 목을 길게 빼고 훔쳐보고 싶은 것을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삼 일 드리죠. 여기 서류에 표시된 부분이 삼 일 안에 시정된다면 처우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턱.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 뭉치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겨우 종이가 떨어지는 그 행동이 대신관 비히루드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한 충격인 듯, 그의 놀란 표정은 한나의 입장에서 아주 볼만했다.
“삼 일간의 유예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요.”
인자한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희망고문이었다. 어떻게 이 답도 없는 신전을 삼 일 만에 고쳐?
“그럼.”
홀가분하게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 물론 악마의 날개 말이다.
“……후.”
대신관 비히루드의 긴 한숨이 집무실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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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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