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이가서림의 낡은 책방에 오늘도 어김없이 불이 켜졌다.
사사삭! 사삭!
도 실장이 정성 들여 손때 묻는 책의 책 가장자리를 갉아대는 소리만이 들리는 책방 안은 여느 때와 똑같이 나른하고 한가로웠다.
“후우우우! 으헤에취! 에취!”
도 실장이 갉아낸 책 먼지를 자신의 입으로 불고는 재채기를 해댔다.
책 먼지가 앞으로 날아가지 않은 탓에 그대로 도 실장이 뒤집어쓰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도 실장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주희를 얄밉게 노려보며 눈을 흘겼다.
“제 앞으로 불지 말라고 했잖아요.”
훅 날아오는 먼지에 저도 모르게 보호막이 발동돼 버린 주희가 살짝 무안해하며 변명 조로 말했다.
“칫, 천계신이면 천계신답게 심보를 좀 곱게 쓰시는 게 어때요? 이왕 보호막을 칠 거면 저한테도 같이 쳐주셨으면 서로 좋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먼지도 같이 보호막 안에 가두라고요? 날 원망할 게 아니라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불라니까요.”
뭔가에 집중하면 주변이 눈에 보이지 않는 도 실장의 건망증은 오늘도 건재했고, 주희와 도 실장의 투덕거리는 일상도 여전했다.
도 실장은 결혼식장에서야 주희가 옥황상제의 딸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기절할 듯이 놀라 그날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 그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는 옥황상제의 딸과 계약을 맺은 도깨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고만장은 일주일을 채 가지 못했다.
천계신이면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인간일 때랑 전혀 다르지 않게 책방 돌보기만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딸랑!
반가운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에 두 사람은 투덕거림을 동시에 멈추고 문 쪽을 쳐다봤다.
“주희 씨!”
손님이 아니라 인간의 복장을 한 전륜차사가 헤실헤실 웃으며 인간처럼 문을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우, 이제 얼굴 좀 안 보나 했더니 차사가 여길 또 왜 오는 건데요?”
이제 주희가 죽을 염려가 없었기에 소금 뿌리고 팥 뿌리고 할 이유는 없어졌지만 이상하게 저 얼굴 반질반질한 차사만 보면 기분이 구려져 트집을 잡게 된다.
“도깨비 따위가 신의 일에 끼어들 계급은 아닌 것 같은데? 넌 어째 도깨비 주제에 볼 때마다 버릇이 없어지는 것 같다?”
차사가 생긴 것 같지 않게 싸늘한 시선을 실어 보내자 도 실장은 움찔 목을 움츠렸다.
“오랜만이네요, 륜차사 님. 대왕님은 잘 계신가요?”
도 실장의 까칠함과 달리 주희는 반갑게 차사를 맞았다.
“네. 주희 씨도 잘 지내셨어요?”
차사가 주희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화사하게 웃는 게, 도 실장을 볼 때와는 밤과 낮처럼 달랐다.
주희도 차사도 아무렇지 않은데 심술이 난 도 실장만이 위기감을 느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피해 주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신우가 만약을 위해 준비해 준 최신형 폰으로 토토톡 문자를 보냈다.
<긴급! 주인님 위기 상황 3단계 발발!>
문자를 전송하고 폰을 다시 주머니에 갈무리하는 것과 동시에 주방 밖에서 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밖에서 몰아치는 북풍 한파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책방 안에 휘몰아쳤다.
“신우 씨.”
아무리 거센 북풍도 주희에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지 신우를 보자마자 싱긋 웃기부터 했다.
하지만 신우는 마주 웃지 못했다.
전륜차사는 명부에서도 쓸데없이 사랑받는 존재인 듯했는데, 주희마저도 너무 말랑하게 대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전륜차사의 저 해사한 얼굴이 이상하게 그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
“잘 왔어요.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었는데. 륜차사 님이 대왕님 전갈을 가져왔나 봐요.”
주희가 차사의 대변인처럼 말을 전하자 차사를 향한 신우의 눈매가 더욱 싸늘해졌다.
“나한테 전갈할 내용이 있다면서 왜 여기로 온 거지?”
“주희 씨한테도 용건이 있어서요.”
신우가 아무리 매서운 눈을 해도 전륜차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멀뚱거리는 시선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저한테도요?”
경계심이라곤 1도 가지지 않는 주희를 보니 더 기분이 나빴다.
“네. 저번에 얘기하셨지 않습니까? 인간계에 내려왔을 때 혹 수명부가 내려오지 않았는데 위태로워 보이는 인간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요.”
“그랬었죠. 제가 만나는 사람은 한정이 돼 있으니까요.”
“그럼, 이 사람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어제 혼을 데려가다 보니 고시원 옥상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아직 수명부가 내려오지 않은 걸 보면 수명이 다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위험해 보였습니다.”
전륜차사의 손짓에 허공에 초췌한 남자의 영상 하나가 투영됐다.
고시원 옥상에 올라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네요. 제가 한번 찾아가 볼게요.”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주희의 모습에 신우는 차마 말리지 못했다. 이건 그녀의 일이었고, 그는 그저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에.
“같이 가.”
“고마워요. 당신이 같이 가주는 건 언제든 환영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회사엔 다시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내가 없을 땐 응산이 대역을 해주니까.”
따스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고마워하는 주희와 애틋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신우의 눈빛이 주변도 잊고 엉켜들었을 때였다.
분위기 파악이라곤 할 줄 모르는 전륜차사의 업무 전달이 시작됐다.
“신우 님껜 스승님 전갈입니다. 명색이 명부신인데 언제까지 놀고먹을 생각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잡아들이지 못한 원귀 중 하나를 잡아오라 하셨습니다. 여기요. 그 수명부에 있는 원귀를 정화시켜 명부로 데려오든, 소멸시키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대왕님의 전갈을 다 전했으니 전 그만 명부로 돌아가겠습니다. 주희 씨,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신우가 이게 무슨 말이냐, 묻기도 전에 전륜차사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딱딱하게 전했다. 그리곤 주희를 향해선 또 말랑한 웃음을 웃어 보이더니 신우를 다시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 자식이……. 언젠간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고 말겠어.”
손에 든 수명부를 꽉 움켜쥐며 부르르 떠는데 옆에서 주희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풋. 신우 씨, 륜차사 님을 왜 그렇게 싫어해요? 당신 륜차사 님 볼 때마다 표정이 되게 웃겨요. 마치 질투하는 남자 같다고요. 쿡쿡.”
“당연히 질투지. 난 저 자식이 널 보는 시선이 싫어. 게다가 너도 유독 예쁜 얼굴에 약한 것 같고.”
신우의 불퉁한 말투에 주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방금 그 말, 상당히 모욕적인데요. 뭐예요? 내가 불륜이라도 저지를 거 같다는 말이에요?”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주희의 정색한 얼굴을 마주하고야 신우는 아차 싶어 당황했다.
“당신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야. 이건 전적으로 내 문제야. 난 누가 당신을 빤히 쳐다보기만 해도 이상할 정도로 질투가 나거든.”
오해하는 것보단 유치하다는 말을 들어도 진실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무슨 말이에요? 내 눈이 얼마나 높은지 몰라요? 신우 씨같이 잘난 남자랑 사는 나예요. 그런 내가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올 리 있겠어요? 신우 씬 내가 살아본 모든 세상에서 최고의 남자라고요.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나누고 싶은 남잔 오직 신우 씨 하나뿐이라고요.”
아주 기분이 나쁘다는 듯 줄줄이 읊어대기 시작한 주희의 다그침이 가만히 듣다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딱딱하게 굳었던 신우의 얼굴이 점점 환해져 갔다.
“응, 너한텐 나뿐이지.”
급기야 이상한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며 주희를 와락 껴안는 신우였다.
차사가 가고 주방에서 나올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도 실장은 도저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주방에서 나왔다.
“으으, 제발 좀 그만하세요들. 수시로 닭을 잡아대서 익숙해진 나도 방금 그건 정말 힘들었거든요? 다른 손님이라도 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으, 왕닭살.”
도 실장이 양팔로 자기 몸을 껴안고는 팔을 슥슥 문질러대는 제스처를 취했다.
“눈치가 없어. 이럴 때 응산은 알아서 착착 잘만 피해 주는데 말이지.”
그 와중에도 주희를 껴안은 팔을 풀지 않고 얄밉게 끼어든 도 실장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
지금이라도 어서 꺼져 달라는 의미의 시선을.
“두 번 다신 그딴 놈이랑 절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땐 더 이상 저한테서 정보를 얻지 못하실 수도 있을 테니.”
그런데 아무래도 비교 대상을 잘못 찾았는지 도 실장이 파르르 떨며 질색했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징징 울며 응산을 찾아대더니, 평소엔 항상 저렇게 응산에게 가시를 세우기 일쑤였다.
둘 다 이유를 말할 생각을 안 하니 무슨 사연인지 알 수가 없지만 기회를 봐서 이유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시급한 건, 도 실장의 기를 누르는 거였다.
전륜차사가 앞으로도 줄곧 들락거릴 것 같은 냄새를 풍기고 가버렸으니, 정보원의 존재는 확실히 더 필요했다.
“정보? 다음부터 정보를 보내려면 더 정확하게 보내. 3단계가 아니라 5단계다. 그런 거 하나 똑바로 못 하겠으면, 반납해.”
도 실장이 최신형 휴대폰에 얼마나 즐거운 비명을 질렀는지는 사다 준 신우가 가장 잘 알았다.
예상대로 도 실장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썩어 들어갔다.
“무슨 말이에요? 정보라니? 3단계? 5단계? 반납은 또 뭐예요? 뭘 반납하라는 거예요?”
신우와 도 실장이 은어처럼 주고받는 말이 무슨 뜻인지 주희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도 실장이 신우에게 휴대폰을 얻었다는 걸 주희에게 말하지 않은 탓이었다.
최근 도깨비 통신으로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다시 반납하라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알았어요. 5단계. 앞으론 명심할 테니 두 분 다 얼른 가보세요. 고시원에 가보셔야 한다면서요?”
도 실장은 온갖 짜증이 솟구쳤지만 꾹꾹 참으며 저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신우가 더 이상 딴소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주방에서 들었던 일을 핑계로 댔다.
주희와 신우의 표정이 단번에 진지해졌고, 껴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저런 걸 보면 확실히 신은 신인데 어째 주희 님은 아무리 봐도 신 같지가 않단 말이지.”
주희와 신우가 사라지고 난 빈자리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며 도 실장이 중얼거렸다.
주희가 저렇게 사라지는 모습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우씨! 하마터면 이걸 빼앗길 뻔했잖아! 이게 얼마짜린데. 도깨비 번개 모임 가서 얼마나 자랑질을 해놨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게 다 응산이 녀석 때문이야! 보이기만 해. 가만두지 않을 테다.”
하지만 심각한 것도 잠시, 후다닥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큰일 날 뻔했다는 듯 소리를 질러대는 도 실장이었다.
도 실장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지만 정말 웃기게도 신우 때문에 쟁여진 짜증인데도, 모든 불똥은 항상 엉뚱하게도 응산에게로 튀었다.
* * *
전륜차사가 투영시켜 준 고시원 남자를 주희와 신우는 오후 내내 인간으로 현신하지 않은 채 따라다녔다.
남자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지 전단지가 붙어 있는 가게란 가게는 다 들락거리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는 다시 고시원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좁은 고시원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서는 노트북을 열었지만 파란 화면창만 오래도록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주희가 좁은 고시원 안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봉투가 보였다.
모두 다 이력서인 듯했다.
『이 남자, 돌아다니는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취직 문제 때문일까요?』
남자의 뒤에서 남자가 쳐다보고 있는 노트북을 지그시 같이 들여다보고 있는 신우를 향해 주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거 같아.』
신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르륵, 드르륵.
갑자기 책상 위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남자가 흠칫 놀라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하지만 남자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도 멍하니 휴대폰을 쳐다보기만 했다.
발신자는 할머니라고 저장된 사람이었다.
받지 않을 것처럼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던 남자가 끈질기게 드르륵대는 소리를 견디지 못했는지, 마침내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에요. 일하다가 전화 소리를 못 들었어요. 마트가 바쁠 땐 그래요. 그럼요. 별일 없어요. 할머니는 정말 별일 없으신 거죠? 네네, 정말 바빠서 그래요. 조금 한가해지면 내려갈게요. 꿈요? 에이, 꿈은 반대라잖아요. 저 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네네, 주무세요. 아! 저기, 할머니! 항상 건강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남자는 방금 전에 처져 있던 모습과는 달리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통화가 종료된 순간, 마치 방전된 배터리처럼 다시 멍해져 버렸다.
“죄송해요, 할머니. 다시 취직하면 뵈러 가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저 대학까지 보내 주셨는데…… 이젠 계약직 일도 찾을 수가 없네요. 만약 이번에도 떨어지면…….”
남자가 오열하고 있는데 드륵, 문자가 들어왔다.
<405호실 세입자에게.
남아 있던 보증금이 내일 날짜로 끝남을 알려드립니다.
입금이 되지 않으면 바로 방 빼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입금하실 계좌번호는
00은행 000-000-00000-00>
남자가 움찔 놀라며 조심스레 클릭을 하는 걸 어깨 너머로 보니 아주 정중하지만 결국 방 빼라는 절망의 소리였다.
주희는 왠지 공감이 가 같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내가 인간일 때 이랬었죠. 한겨울에 길거리에 나앉을까 봐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주희의 시선이 자연히 신우를 향했다.
『그건, 나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야. 이가서림이 정리 명단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차 실장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나 살짝 찔렸지만 신우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변명했다.
『그랬겠죠. 알고 그랬겠어요? 그런데 이분이 들여다보고 있는 회사, 신우 씨 회사 아니에요?』
남자가 노트북을 열고 클릭해서 들어가 있는 회사 홈페이지는 한성그룹의 자회사인 H유통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H유통 면접이 있었지. 내일 결과가 나가는 걸로 알고 있어.』
『무조건 합격시켜 주면 안 돼요? 그럼 아주 깔끔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 대신 합격시킬 순 없어. 그럼 예정된 다른 사람이 떨어져야 하니까.』
주희가 기대감에 들떠 물었지만 신우가 딱 잘라 대답했다.
『당신 회사 떨어지면 이 사람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안 돼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일찍 해결하고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주희가 슬쩍 신우의 눈치를 보며 일부러 피곤한 척 어설픈 연기를 해 보였다.
누가 봐도 연기였지만 신우는 매번 잘도 걸려든다.
『알았어. 이미 합격했을 수도 있지만 만약 아니면 차 이사님께 이야기해 두지. 다른 사람을 대신 떨어뜨리는 건 안 될 일이지만, 특별채용 뭐 그런 걸로 한 명 더 채용하는 건 가능할 거야.』
『고마워요!』
주희는 제가 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며 와락 신우의 목을 끌어안아 주고는 볼에 뽀뽀까지 했다.
그리곤 곧장 고시원 남자의 뒤로 가 가만히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나쁜 기운 쫓아 줄게요.』
주희가 마치 신의 은총을 내리듯 말했고, 의식을 집중하기 위해서인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주희의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 신비로운 빛이 남자의 머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남자가 스르르 눈을 감더니 책상 위에 엎드렸다.
신우는 저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해 멍하니 쳐다봤다.
자신을 살린 것도 정말 저 손이었을까?
신우는 꿈속에서 들었던 그녀의 독백 같은 말이 새삼 떠올라서 언젠가는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희의 손이 거둬졌다.
엎드려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남자의 안색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주일은 굶은 것처럼 거무죽죽해 보이던 검은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한동안은 나쁜 생각이 깃들지 못하겠군.』
『원인을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어둠은 계속해서 다시 달라붙을 거예요.』
『내일 합격 통보가 가면 달라지겠지.』
인간을 위해 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일확천금을 얻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그저 작은 희망을 갖게 해주는 것.
희망을 쌓고 쌓아 미래로 나가는 일은 이들 개개인이 만들어가야 할 업이었다.
『이만 갈까?』
신우가 주희를 향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주희는 갈 생각을 않고 갑자기 고시원 안에 있는 작은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떡해요. 냉장고가 텅 비어 있어요.』
주희가 마음이 아픈지 울상을 지었다.
『하루 정도야 이 사람이 알아서…….』
신우가 만류했지만 주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잠깐만요. 아까 가게 냉장고에 샌드위치 재료 있는 거 봤어요. 아마 도 실장이 나 들어올까 봐 샌드위치 만들어 놨을 거예요. 가져올게요. 기다려요.』
주희는 말릴 틈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신우의 입에서 저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 실장이 또 비명을 지르겠군. 그나저나 저것도 문제인 거 같은데.』
엎드려 있는 남자의 휴대폰을 쳐다봤다.
이것저것 다 해결해 주려면 끝이 없는데 주희 때문인지 신우의 눈에도 덩달아 문젯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취직도 문제였지만, 고시원에서 쫓겨나게 되면 그것 또한 작은 문제는 아닐 것 같았던 것이다.
스스스.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한 신우는 남자의 휴대폰에 온 문자메시지를 다시 클릭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엔 문자 속의 계좌번호와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명부신답지 않은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주희의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그는 어떤 귀찮은 짓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주희의 기운이 느껴진다 싶더니 바로 주희가 다시 나타났다.
『있었어요!』
주희가 샌드위치와 음료를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그걸 다 놓고 가게? 상하는 거 아니야?”
“냉장고 있잖아요? 하나만 책상 위에 두고, 나머진 냉장고에 넣어 두려고요.”
“우렁각시라도 왔다 갔는지 알겠군.”
“후훗. 심성이 고운 사람 같은데 가끔 이런 행운도 있어야죠. 그게 우리 같은 신이 존재하는 이유 아니겠어요?”
주희가 환하게 웃는 만큼 신우의 가슴에도 따스한 기운이 진하게 남았다.
이 고시원의 남자가 오늘 얻은 것은 고작 취업과 방세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의 축복을 얻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축원의 기운이 앞으로도 남자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 줄 테니까.
“이제 그만 갈까?”
“네, 가요.”
신우가 미소 지으며 주희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순간, 두 신은 다시 원래 그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불 꺼진 좁은 고시원 방엔 따스한 온기가 이상할 정도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외전
네온이 현란하게 빛나는 도심의 밤거리.
유혹의 불빛을 좇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클럽으로 찾아들었다.
깊은 밤을 향해 가고 있는 클럽 거리의 밤은 오늘도 어김없이 술에 취해 비틀대며 깊어갔다.
『생각보다 더 영악한 놈이야.』
신우가 인간들의 시야에서 신형을 숨긴 채 클럽으로 다가서며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륜차사가 전해 주고 간 명부의 도망간 영(靈)을 쫓은 지 일주일째였다.
기록에 의하면 죽은 조만택은 이 클럽의 사장이었고, 이곳에서 죽었다.
죽은 영은 본능적으로 인간 세상에 미련을 가지기에 보통은 본인의 영역을 잘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조만택의 영은 40여 일이 지난 지금까지 잘도 숨어 다니고 있었다.
조만택의 영이 담당 차사의 눈을 피해 도망친 게 어쩌면 결코 우연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그게 아니면 그 바보차사 놈이 또 뭘 착각했든지.』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기분에 거슬리는 전륜차사가 생각나 말투마저 삐딱하게 비꼬며 클럽으로 진입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낯익은 기가 느껴져 멈칫 걸음을 멈췄다.
슈욱!
마치 신우가 소환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신우의 혼잣말 속 바보차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신우의 얼굴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가 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신우 님이 왜 강림차사 님의 모습으로 변신하신 겁니까? 저한테 그 모습으로 변신하지 말라고 하신 거 잊으셨습니까?』
신우가 조만택을 찾아 나설 땐 만약을 대비해 언제나 강림차사의 모습으로 찾아다녔다.
『너와 달리 난 앞으로도 박신우의 모습으로 인간의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차사들이 내 모습을 본 인간들의 기억을 일일이 지우고 다니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조심해야지.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지?』
신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전륜차사의 찌푸려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스승님의 다른 전갈이 있어서요. 조만택의 세세한 이력을 이제야 아시고는 되도록 정화시키지 말고 그대로 명부로 송환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놈은 팔열지옥, 팔한지옥을 차례로 순례시켜 지옥 맛을 보게 해야 한다고요. 온전히 잡아가기 위해선 영혼기가 필요한데 신우 님은 차사직을 받지 못하셨으니 영혼기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왜 하필 너지? 이곳은 네 담당이 아닌 걸로 아는데?』
『신우 님이 명부까지 와서 스승님과 칼부림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명부 전체에 파다합니다. 아무도 신우 님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가 무서워서라기보다 명부신의 입장에선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대왕에게 칼을 빼든 신우가 곱게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네가 대신 자청을 했다?』
차사들이 그를 기피하는 이유야 이해가 가지만 하필 그 대타가 전륜차사라니.
되묻는 신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전륜차사의 흑심이 다분히 느껴진다는 듯 까칠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전륜차사는 애초에 감출 의도도 없었던 모양이다.
『공식적으로 주희 님을 한 번 더 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아주 대놓고 주희를 만날 수 있어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희는 내 아내다.』
신우는 질투하는 남자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목소리를 억눌러 사실만을 환기시키려 했다.
『압니다. 안타깝게도요. 보통 신들은 결혼 같은 거 잘 안 하고, 만약 한다고 해도 늦게 하는데 주희 님은 뭣 때문에 그렇게 일찍 서둘러서 결혼하신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한 백 년만 더 참으시지.』
하지만 전륜차사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주희가 일찍 결혼해서 아주 못마땅하다는 내색을 숨기지도 않고 꿍얼거려 댔다.
그런 전륜차사를 보는 신우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백 년? 왜, 백 년 더 있었으면 주희 마음이 너한테 움직였을 거 같아서? 그런 생각은 망상으로라도 떠올리지 마. 주희는 백 년이 아니라 천 년 후에 결혼했어도 나랑 했을 테니까.』
신우가 전륜차사의 코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경고했다. 하지만 전륜차사는 신우의 생각보다 더 강적이었다.
『무, 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우 님은 제가 마치 흑, 흑심이라도 품은 것같이 말씀하시는데, 전 절대로 그런 생각을 가진 적 없습니다. 주희 님을 상대로 망상이라니요? 절대로요! 전 그냥 주희 님 얼굴만 봐도 평안해지니까 그저 얼굴 한 번만 더 볼 수 있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요.』
주희 얼굴만 봐도 좋다는 고백을 주희의 남편인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주절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중요한 본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깨닫지 못한 게 분명한 바보차사였다.
얼굴만 봐도 경계심이 발동되는 녀석이었는데, 전륜차사의 마음을 읽고 나니 더 심하게 위기감이 느껴졌다.
이런 놈은 절대 말을 돌려서 해선 알아듣지 못한다.
『너, 앞으로 이가서림 출입 금지다.』
『네에? 아니, 왜요?』
어리바리 바보차사 놈이 억울하다는 듯 눈을 희번득 치뜨고는 따지고 들었다.
『왜라니? 당연히 네가 싫어서지. 특히 네가 주희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건 더 싫고. 그러니 앞으론 명부에서 다른 전갈 사항이 생겨도 다른 차사를 보내. 앞으로도 종종 나한테 이런 골치 아픈 일을 부탁할 생각이라면 말이지.』
주희의 마음이 오로지 그에게만 향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수천 년을 살아야 하는 신들의 무한한 시간에선 저 바보스러울 정도의 순수함이 어떤 변수로 변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위험은 적을수록 좋았고, 마음은 깊어지기 전에 싹을 싹둑 잘라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하, 하지만 난 이, 이가서림이…….』
책방 출입을 할 수 없다는 말이 그제야 제대로 실감되는지 전륜차사의 얼굴이 푸르댕댕 변해갔지만, 여전히 본인의 마음을 눈치챈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직접 나서서 말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명부신답지 않은 녀석의 본성으로 보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주희가 결혼을 했든 아니든 고백하려 달려들 것 같아서.
『계속 그렇게 넋 놓고 있을 생각이라면 돌아가. 일에 방해만 될 것 같으니까.』
더 차갑게 전륜차사를 몰아붙인 신우는 원망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전륜차사의 시선 따윈 무시한 채 클럽 내부를 향해 공간이동을 했다.
팟!
조만택이 혼이 된 지 오늘로써 40일째.
지금쯤이면 앙심 깊은 조만택의 성격상 자신을 죽인 자가 있는 이곳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다시 찾을 터였다.
쿵쿵! 쿠쿵쿵!
신우는 명부의 기를 완전히 숨긴 채 쿵쾅거리는 클럽 내부로 들어갔다.
현란하게 쏘아대는 레이저 조명,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와 여자들.
클럽 스테이지를 꽉 채운 인간들은 마치 흔들지 않으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신우의 뒤를 이어 클럽에 모습을 드러낸 전륜차사가 클럽 내부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클럽 출입이 처음인 전륜차사는 고막이 뚫릴 것 같은 소음에 이가서림 출입 금지 문제를 잊을 정도로 놀랐다.
『저, 저 사람들 단체로 미친 건가요? 도대체 왜 저렇게 몸을 비비 꼬고 탈탈 털고 하는 거죠?』
차사 생활 처음으로 본 난장판에 전륜차사는 자신이 미움받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인간 세상 경험 선배인 신우를 보며 물었다.
신우는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떼거리로 미쳐 날뛰어대는 인간들을 보며 무심결에 대답했다.
『인간 세상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려면 가끔 저렇게 미쳐 날뛰어줘야 몸에 쌓인 광기가 빠지거든.』
『몸에 쌓인 광기요?』
『너같이 할 말 다 하고 사는 놈은 죽을 때까지 쌓이지 않을 테니 넌 몰라도 돼. 그보단 네 임무나 완벽하게 해낼 생각…….』
전륜차사를 한껏 비꼬며 쳐다보던 신우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말을 멈췄다.
귀가 먹먹해지는 높은 데시벨의 쿵쾅거리는 음악 속에서도 신경에 거슬리는 비명 소리가 잡힌 것이다.
차가워진 신우의 시선이 어두운 클럽 내부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신우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있던 전륜차사의 표정도 차갑게 굳어졌다.
팟!
신우가 다시 촛불 꺼지듯 사라졌고, 뒤이어 전륜차사도 사라졌다.
* * *
클럽 깊숙이 자리한 사장실.
예전 조 사장이 있을 때는 사장실이 온갖 오컬트 잡동사니들로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공간이었지만 윤 사장이 인수하고부턴 평범한 클럽 사장실로 탈바꿈했다.
단 한 가지, 윤 사장의 마음에 든 특이한 모양의 향로만은 그대로 남아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윤 사장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윤 사장님…… 왜, 왜 이러는 거예요? 허억!”
한 여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느긋하게 술에 약을 타 마시고 있던 윤 사장이 갑자기 미쳤는지 칼을 빼들고 여인에게 다가서 목에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아주 살짝만 힘을 줘도 목을 꿰뚫을 것같이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살갗을 누르고 있었다.
“왜냐고? 당연히 널 죽이기 위해서지.”
싸늘하게 대답하는 윤 사장의 목소리가 약에 취해 있던 어눌한 목소리 같지 않게 살벌했다.
“자, 장난 그만하시고 카, 칼 치워요.”
“장난? 난 칼 가지곤 장난쳐 본 적이 없어. 칼을 뽑았으면 반드시 피를 봐야 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무 무슨 말씀을 하시…… 꺄아악!”
찌이익!
윤 사장이 영문 모를 말을 하며 하늘하늘한 긴 드레스를 찢었고, 마치 칼날의 날카로움을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툭툭 속옷을 잘라냈다.
“큭, 떨 거 없어. 너와 공조해 내 뒤통수를 내리쳤던 이 부장도 함께 저세상으로 보내줄 테니 말이야.”
“그걸 무슨……. 어, 어떻게 윤 사장님이…….”
여인이 조만택을 찔렀고, 이 부장이 머리를 내리쳤었다. 하지만 이 부장이 조만택의 머리를 가격했다는 사실은 윤 사장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흐, 아직도 내가 윤 사장으로 보이나? 하긴, 누가 뭐래도 가죽은 윤 사장이지. 큭, 여기서 네 목을 따버린다 해도 다 윤 사장 짓이 되는 거지. 크크큭! 그동안 그렇게 숱하게 빙의해보려 시도해도 잘되지 않더니 이렇게 쉬울 줄이야. 저 향로가 이런 훌륭한 역할을 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크큭, 역시 난 악운이 강해.”
윤 사장의 입에서 뱉어지고 있는 말에 설마설마하면서도 여인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려갈 때였다.
팟!
강림차사의 모습을 한 신우가 사장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시발! 우, 움직이지 마!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이 여자 목을 바로 찔러 버릴 거야!”
신우를 본 윤 사장이 다급하게 벌거벗겨진 여인을 잡아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곤 목에 대고 있던 칼날을 지그시 눌러 핏방울이 떨어지게 만들며 협박했다.
“흐흑. 제, 제발 살려주세요, 윤 사장님. 아, 아니, 조 사장님.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신우는 미쳐 날뛰는 윤 사장의 협박이나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여인의 흐느낌보다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 콧속을 파고든 향에 더 신경이 쓰였다.
이상할 정도의 불쾌감에 본능적으로 몸에 방어막을 치며 힐끗 문제의 향로를 쳐다봤다.
『바보 같은 짓 그만하고 조용히 따라가는 게 좋을 거다.』
하지만 높낮이 없는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를 하며 현무검을 소환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신우의 행동에 윤 사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릴 때였다.
팟!
『잠깐만요!』
전륜차사가 나타나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신우의 앞을 막아섰다.
『소멸시키면 안 된다고 내가 그렇게…… 우아악!』
신우의 앞을 막아서며 신경질을 부리던 전륜차사가 바로 눈앞에 알몸으로 붙잡혀 있는 여인을 보고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모든 경험이 부족한 전륜차사는 여자의 알몸을 본 것도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가 어질거렸고 다리의 힘이 풀려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어어? 다, 다리가 왜 이러지?』
『바보. 냄새 맡지 마. 몸에 방어막을 쳐.』
전륜차사는 일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방해하러 온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핏 손가락을 튕겨 빨갛게 타오르고 있던 향을 껐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전륜차사 때문에 멈췄던 행동을 곧바로 강행했다.
손에 힘을 주입하자 검은 기운만을 뿜어내던 현무검에서 츠츠츠 뇌기가 돌기 시작했고, 번개의 기운이 곧바로 윤 사장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츠팟!
“으아악!”
“꺄아아악!”
윤 사장이 벼락을 맞은 것같이 몸을 떨며 칼을 떨어뜨렸고, 붙잡고 있던 여인도 놓쳤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윤 사장의 소리보다 까무러칠 듯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더 컸다.
신우의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허공에서 번개가 치고, 번개가 윤 사장에게 떨어지는 모습은 여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여인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린 채 소파 뒤에 몸을 숨기고는 벼락을 맞은 윤 사장을 넋이 나간 눈으로 쳐다봤다.
츠츠츠거리는 번개의 기운에 휩싸인 채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번개에 휩싸여 발광하던 윤 사장의 눈이 돌아가더니 갑자기 몸이 뻣뻣해졌다.
그리고 순간, 윤 사장의 몸이 나무 막대기처럼 그대로 그녀의 발치 아래 풀썩 고꾸라졌다.
“꺄아악!”
여인이 다시 한번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눈을 까뒤집고는 기절했다.
신우는 여인을 동정하지 않았다.
조만택의 악행에 항상 동조해오던 여인이었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른 여인이었다.
여인에겐 조만택 못지않은 사후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번개의 기운이 여인의 눈에 보이게 한 것도 앞으로 더 이상의 악행은 저지르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작은 경고였다.
『왜, 왜…….』
뇌기의 충격에 강제로 윤 사장의 몸에서 빠져나오게 된 조만택의 영이 당황해하면서도 다시 빙의하기 위해 몇 번을 시도했다. 하지만 빙의가 되지 않았다.
『전륜, 정신 차려라. 네 역할 제대로 하지 못하겠다면 난 이대로 저놈을 없애 버릴 생각이다.』
신우가 조만택의 영을 향해 당장 현무검을 휘두를 준비 자세를 취하자, 비칠거리던 전륜차사가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품에서 사리기처럼 생긴 영혼기를 꺼내 들었다.
『조만택! 19XX년 XX월 XX일생, 20XX년 XX월 XX일 사망, 영혼을 강제 검거합니다.』
전륜차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조만택의 영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끼아악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작은 영혼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조만택의 영을 검거하는 목적은 달성했으나 전륜차사는 여전히 몸을 비틀거렸다.
『윽, 도대체 이게 무슨 향이죠? 왜 몸이……. 시, 신우 님은 괜찮으십니까?』
전륜차사의 말에 신우는 악마 형상을 한 특이한 향로 앞으로 다가갔다.
향의 연기가 콧속을 파고들자마자 냄새를 차단하긴 했지만 신우도 몸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 향로는 인간계에 떠돌아선 안 되는 귀물(鬼物) 같다. 명부로 가져가서 귀물전담팀에 넘기는 게 좋겠어.』
『이걸 그냥 가져가 버려도 괜찮을까요? 물건이 갑자기 사라지면 저 여인이…….』
전륜차사가 기절해 있는 여인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네 눈엔 저 여인이 향로를 신경 쓸 정신이 있어 보이나? 그게 아니면 혹 저 여자 알몸에 관심이 있어서?』
『신우 님!』
신우가 한껏 비꼬는 소리에 전륜차사가 버럭 불같이 화를 냈지만 신우의 자비 없는 질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명부신 주제에 겨우 여자 알몸 좀 본 거에 아까처럼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 세상에 드나들다 보면 본의 아니게 벌거벗은 이들을 볼 때가 허다할 테니까.』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있다고요. 샤워장이나 남녀가 있는 침실엔 나타나지 않으려고요.』
보통은 명부신의 기질상 그런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야 하는데 전륜차사는 조심을 한단다. 뭐 이런 감성 풍부한 명부신이 다 있나 모르겠다.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써서 차사 일을 수행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피곤할 것 같았다.
『네 일하는 방식은 내가 알 바 아니지. 맘대로 해. 대신 앞으로 네 그 조심하는 장소에 이가서림도 추가하는 것만 잊지 마.』
신우가 재차 경고하는 이가서림 출입 금지에 전륜차사는 새삼 다시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난 그만 갈 테니 마무리는 네가 해.』
이가서림 출입 금지에 충격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신우는 더욱 냉정하게 잘라 말하고 사라졌다.
* * *
현와원의 가장 깊숙한 심처.
주희가 잠들어 있는 침실로 돌아온 신우는 본능적으로 제일 먼저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주희를 시선에 담았다.
전륜차사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회복되는 것만 같았다.
주희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가로 다가가던 신우는 순간 멈칫 걸음을 멈췄다.
곤하게 자고 있는 주희가 갑자기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로 야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가 주희를 볼 때마다 미치는 건 맞는데, 자고 있는 주희를 보면서 이 정도로 과격하게 미치는 색광은 결코 아니었다.
‘그 이상한 향로의 연기 탓인가?’
점점 무거워지는 머릿속에선 자고 있는 주희를 덮치는 이상한 상상력이 제멋대로 동원되고 있기까지 했다.
‘안 되겠다.’
이곳에 더 있었다간 무의식중에 주희를 덮치고 말 것 같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몸을 돌려 침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왔어요? 갔던 일은…… 잘 해결됐어요?”
주희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잠이 다 깨지 않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어, 잘 해결됐어. 일어나지 말고 자.”
“대왕님 좋아하시겠네요. 그런데 어디 가요?”
“그게…… 회, 회사 업무가 좀 남아서 서재에.”
당황해 거짓말을 하는 신우의 목소리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주희가 그런 신우를 빤히 쳐다보다 점점 잠이 깨는지 상체를 일으켰다.
“먼저 자라니까. 일어나지 않아도 돼. 곧 돌아올 거야.”
당황해하며 일어나지 못하게 주희를 말리고 있는 신우였지만 그는 주희의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주희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이었다.
“앉아 봐요.”
주희가 더 자세히 신우의 얼굴을 살피더니 신우에게 침대가를 눈짓했다.
“좀 급한 일이라서 잠은 나중에…….”
“신우 씨.”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단호한 주희의 부름에 신우는 그만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보는 것만으로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주희의 잠옷을 벗기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강압적인 행동으로 주희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 돼……. 나 지금 좀 위험한 것 같아. 네 곁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아무리 약향에 중독된 상상이라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상에 신우는 최대한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 앉아 봐요. 난 신우 씨 눈동자에 왜 그렇게 붉은 기가 도는지 알아야겠어요. 몸 온도가 왜 그렇게 상승했는지도요.”
주희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고집스레 그를 붙드는 주희의 말에 더 이상 외면할 수도 없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영을 검거하다가 좀 이상한 향을 맡았을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신우는 어쩔 수 없이 주먹을 꼭 쥐고 침대가에 앉아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잊었어요? 내가 치유력 있는 거? 몸에 이상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주희가 작게 투덜거리며 신우의 곁에 바짝 다가앉아 이마를 짚자마자 손에서 하얗고 고운 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음, 좋아. 시원해.”
쏟아져 들어오는 시원하고 청량한 기운에 신우는 그제야 몸의 힘을 풀었다.
아무리 억눌러도 솟아나던 붉은 상상의 기운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았던 것이다.
너무 기분 좋아 저도 모르게 주희 쪽으로 머리가 기울었다.
“거봐요, 내 손은 약손…… 어, 엇!”
신우의 머리만 기운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주희에게로 기울기 시작했고, 갑자기 주희의 몸이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세차게 밀쳐졌다.
털썩, 침대에 눕혀진 주희의 몸을 신우가 잽싸게 타고 올랐다.
주희를 덮쳐 양손을 꽉 누르며 내려다보는 신우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왜 그래요? 아직 나쁜 기운이 남은 거예요?”
주희가 신우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물었다.
신우의 눈동자에 깃들었던 붉은 기는 분명 사라진 것 같은데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어. 불쾌한 기운이 사라진 걸 보면 치유가 된 것 같은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널 이대로 안고 싶은 마음은 더 강해졌어. 제어가 힘들…… 으음, 안 되겠다. 아무래도 아직 위험한 거 같아. 이 기운이 빠질 때까지 머리 좀 식히고 와야겠어. 혹시 모르니 방어막 치고 자도록 해.”
말의 내용대로라면 그녀를 배려해주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정작 그녀의 몸을 덮쳐 누른 채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는 신우의 미묘한 체위로 봐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강한 욕망에 당장이라도 그녀를 덮칠 기세였다.
‘열에 들뜬 이 몸으로 어딜 가 있겠다는 걸까?’
신우의 상태를 가만히 지켜보다 문득 든 생각에 주희는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는 말이 왜 이토록 답답하게 마음에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난 안지 말라고 한 적 없어요.”
난데없이 미친 도발의 말이 통제할 틈도 없이 튀어나가 버렸다.
“무슨…….”
덕분에 신우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확 짙어졌다.
그 모습이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새삼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최근 명부 일 때문에 신우 씨와 같이 밤을 보내지 못한 지 일주일이나 됐어요. 일이 끝났는데도 밤을 함께하지 못하는 거예요? 싫어요. 뭘 염려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감당할 테니 그냥 내 옆에 있어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진심만을 말했다.
매일 밤 그녀를 안지 못하면 앓는 소리를 하던 신우였다. 하지만 최근 일주일은 명부 일로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조차 짧았다.
일도 다 끝난 마당에 당연히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새 그에게 길들여져 그의 뜨거운 품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고마워.”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신우가 참았던 숨을 뱉어내듯 훅 내쉬었다.
순간, 뭔가를 누르고 있는 것 같던 신우의 금욕적인 표정이 사라지고 그의 전신에서 당황스러울 정도의 열기가 뻗치기 시작했다.
신우는 무릎으로 그녀의 몸을 가둔 채 상체를 일으켜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말문이 막히게 하는 신우의 아름다운 몸이 오늘따라 더 위험하고 야하게 꿈틀거려 주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신우의 스트립쇼를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 불쑥 무시무시한 존재가 갑자기 날것으로 눈앞에 드러나자 주희는 그만 눈가를 붉히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고개 돌리지 마. 날 봐. 나만 보라고.”
신우의 손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와 휙 고개를 다시 돌리게 만들었다.
좀 이상했다.
신우의 손길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바로 코앞에 있는 신우의 눈동자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여서.
‘왜?’
하지만 의문조차 품을 틈이 없었다.
찌이익!
신우의 다른 손이 힘 조절을 잘못한 것인지, 그녀의 잠옷이 벗겨진 것이 아니라 찢겨 나갔던 것이다.
“!”
헐, 이게 무슨.
주희는 할 말을 잃고 두 눈만 껌뻑였다. 하지만 정말 괴상한 건 그 상황에서도 신우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눈이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신우의 눈동자가 더 짙은 광기로 일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나만 봐, 나만.”
방금 전과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신우는 손길만 거친 것이 아니라 목소리마저 평소보다 강압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속옷마저 제거돼 알몸이 된 그녀는 그의 커다란 손에 의해 우악스럽게 장악당했다.
“윽!”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의 얼굴을 돌려 억지로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신우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고개 숙여 선득하게 드러난 그녀의 날가슴을 베어 무는 데 정신을 팔 뿐이었다.
“흣!”
주희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고, 온 신경이 가슴에 집중됐다.
자연히 가늘어진 주희의 눈매가 가슴에 머리를 박고 있는 신우의 정수리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신우가 그녀의 다리 하나를 휙 거칠게 치켜세우는가 싶더니 스윽 허벅지를 훑으며 그대로 미끄러뜨려 그녀의 숲에 닿았다. 손가락 하나가 무례할 정도로 불쑥 샘을 침범했다.
“시, 신우 씨…….”
진도가 너무 빨라 난감해할 때였다.
“젖었어.”
신우의 입에서 쏟아진 음탕한 말에 그만 주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신우가 평소에도 야한 남자란 건 알았으나 이 정도로 퇴폐적인 음란대마왕은 아니었는데 정말 왜 이러는 건지.
신우의 거침없는 손길과 음란한 말투 탓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때였다.
당황스럽게도 그녀의 발목을 붙잡은 신우가 어깨에 턱 걸치기까지 했다.
“시, 신우 씨. 처음부터 이 자세는…… 헉!”
뭉툭한 끝이 아래에 닿을 때까지도 설마설마했는데 오늘 신우는 그냥 색마였다. 그 커다란 물건이 전희도 없이 마구잡이로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완전히 준비가 되지 않은 탓에 허리가 파들파들 떨릴 정도였다. 처음 안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너무도 강압적인 행위에 주희는 저도 모르게 신우를 노려봤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거다. 누구에게도……. 넌 나만 봐야 해, 나만.”
또다. 말투도 그렇고 뭔가에 집착하는 듯한 행동도 그렇고, 아주 많이 이상했다.
마치 그녀를 누군가가 뺏어 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성질 같아선 신의 능력을 사용해 그를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향 기운이 남은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조금 참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은 거기서 끝이었다. 거대한 그의 몸을 받아들이느라 온 신경을 호흡 조절에 집중해야 했다.
스윽스윽, 그녀의 몸을 반으로 접을 듯 꾹꾹 눌러오는 그의 노골적인 반복 행위에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래져 갔다. 배려라는 말은 아주 쌈 싸 먹었는지 그녀를 압사시킬 듯이 푹푹 찔러오는 행위가 좀처럼 부드러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힘겨움과는 별개로 그는 오히려 더 쾌락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속도를 더욱 높여갔다. 퍽퍽, 그녀의 몸을 흔들며 침대를 부술 듯 박아댔다.
“하아, 하아……. 제, 제발. 하아, 하아. 조, 조금만 더 부드럽게…… 흐읏!”
결국 그녀의 입에서 항복에 가까운 애원의 목소리가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또 엉뚱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횡설수설했다.
“이렇게, 이렇게 널 가질 수 있는 것도 나뿐이야. 나뿐이라고.”
그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겠는데도 진심으로 기분이 나빴다.
그 와중에도 욕망의 전차는 그녀의 몸을 힘차게 드나들며 달궈댔다.
몸은 쾌락의 정점에 올라 열기가 식을 줄 모르는데 머리는 싸늘하게 식는 이상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말도 안 되는…… 흐흣, 소리 하지 말아요.”
신음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부루퉁한 목소리로 받아치자 갑자기 신우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잘못 말한 것도 없는데 그가 마치 화난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툭, 툭, 어깨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다리가 하나씩 다시 침대에 내려앉았고, 그의 거대한 물건이 서서히 몸에서 빠져나갔다.
‘끝난 건가?’
그가 빠져나가자 갑자기 알몸에 느껴지는 선득함을 덜어보고자 다리를 하나로 모으려 할 때였다.
“자세 바꿔.”
화난 눈길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그의 거친 손길에 의해 뒤집혔다. 침대에 코를 박음과 동시에 엉덩이가 치켜 올라갔고, 쑤욱 또다시 불덩이가 그녀의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허억!”
그녀의 안이 전쟁이라도 난 듯 부르르 떨렸다.
거칠기만 한 그의 행동에 어이가 없는데도 몸은 본능적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있어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는데 그녀의 몸은 그가 다시 들어와 기쁘다는 듯 온몸으로 반응하고 열에 들떠 앓는 소리를 냈다.
“하아…….”
퍽퍽, 신우가 하체를 튕길 때마다 주희는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처음 느껴보는 쾌락에 몸을 떨었다.
“하응…… 흐읏!”
철퍽철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다시 삐걱대기 시작한 침대의 삐걱거림이 그녀의 신음 소리와 어우러져 야하고 야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현와원의 밤이 깊어갈수록 부부의 침실은 몸살을 앓듯 뜨거운 신음 소리로 채워져갔다.
“그래, 난 네 신음 소리가 좋아. 더, 더 크게 내줘.”
그의 움직임이 점점 더 느리고 부드러워지더니 스윽 그의 상체가 그녀의 등을 덮쳤다.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신우의 손이 아래를 더듬어 그녀의 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혀로 길게 그녀의 날개뼈를 핥아댔다.
주희는 간질거리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하체를 그에게 비볐다.
“으음, 그래. 네가 이렇게 반응해주는 게 너무 좋아. 계속 반응해줘.”
신우가 음탕하고 열에 들뜬 신음 소리를 내며 더 바싹 몸을 붙여왔다.
주희는 마치 신우의 목소리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착실하게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하아, 좋아……. 그렇게……. 으윽!”
“흐읏…… 흐응! 흣!”
흔들흔들, 퍽퍽퍽!
신우와 주희는 한 톨의 이성도 남지 않은 것같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서로를 파고드는 데만 전념했다.
마치 쾌락을 처음 맛본 짐승들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또 탐했다.
“신우 씨. 자, 잠깐만요. 흐읏. 이번엔 내, 내가 당신 안고 싶어요. 자, 자세를…… 흣.”
그에게 안기고 또 안기며 신우를 감당해내느라 애쓰고 있던 주희는 이대로 계속했다간 정말 기절할 것 같아 힘을 내 떼를 썼다.
멈칫. 천만다행으로 밤새 이 자세로 파고들 것 같던 신우의 몸이 멈추더니 서서히 빠져나갔다.
“일으켜 주세요.”
너무 힘들어 침대에 그대로 뻗어 버릴 것 같았지만 신우의 몸에서 아직도 열기가 뻗치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손을 뻗었다.
“앉아서 해요.”
신우의 목에 매달리며 허벅지를 타고 올랐다. 이번에는 억지로 그가 주저앉혀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를 몸 안에 담았다. 저절로 부르르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온몸이 신우에게 밀착되고 보니, 그를 몸 안 가득 품고도 욕망에 정신을 잃기보단 안정이 찾아드는 것 같았다. 그의 넓은 등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가 왜 불안해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알려줄 생각이다.
그녀에겐 오직 신우뿐이라는 사실을.
“사랑해요.”
목을 껴안은 채 귓가에서 속삭이는 주희의 말에 신우의 몸이 굳었다.
“나쁜 기운은 내가 다 쫓아줄게요.”
주희의 한 손이 이마를 짚고 가만히 어루만지기만 하는데도 신우의 머릿속엔 청량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
신우는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끼어 있던 붉은 안개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짐을 느꼈다.
주희의 부드러운 여체를 껴안고 있던 신우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미친…….’
그 붉은 안개의 기운은 아마도 작은 욕망까지 극대화시켜 마음을 타락시키는 기운을 가졌던 모양이다.
전륜차사에 대한 질투에 눈이 먼 그가 방금 전 주희를 어떤 식으로 안았는지 떠올라 눈앞이 아득해졌다.
맙소사! 최악이다.
차라리 기억이 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신우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얼마나 색마같이 굴었는지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주희에게 무슨 짓을…….’
신우는 혹시라도 주희가 자신의 어이없는 질투를 눈치챌까 두려워 주희의 여체를 더욱 꽉 껴안았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내 눈엔 항상 신우 씨만 보이니까. 내 에로틱한 사랑은 오직 당신 하나예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도 무시해요. 의심하지 말아요.”
주희는 그토록 험악하게 다뤄지고도 그를 받아들이고 다독거리고 있었다.
“주희야…….”
주희를 부르는 신우의 목소리가 미안함에 들릴 듯 말 듯 희미했다.
“와, 이제야 내 이름 불러 주네요. 정신이 든 거예요?”
“……미안해.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정신이 나간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과부터 했다.
“그래요, 많이 미안해해야 해요. 나 정말 힘들었거든요. 색마를 영접한 기분이었다고요.”
주희가 그를 타박하는 소릴 하면서도 여전히 꼭 껴안아주고 있어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주희야, 주희야, 주희야…….”
덕분에 가슴이 벅차 그녀의 입술을 찾아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음…… 안 돼요. 더 이상은 못 해요.”
그녀를 향한 마음 때문인지 그녀의 안에서 더 커지는 그를 그녀도 느낀 모양이다.
몇 시간을 탐닉하며 달렸는데 아직도 그의 것은 수축될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 한 번만 더 안 될까? 아깐 제정신이 아니어서 기억이 잘 안 나. 살살 할게. 넌 내 목에 매달려 있기만 하면 돼.”
그녀를 올바른 정신으로 한 번 더 안고 싶은 마음에 신우는 주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살살 몸을 움직였다.
“앗! 너, 너무해요.”
“미안, 미안. 조금만 더 버텨줘.”
이미 민감하게 달궈진 그녀의 몸은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파들거리며 그를 달궜다.
“으음…… 좋아. 네 안의 이 뜨거움이 너무 좋아.”
스윽, 스윽, 그녀의 허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 갔다.
“하아…… 하아…… 흣!”
그녀의 신음 소리가 고조됨에 따라 그의 흥분도 마지막을 향해 빠르게 치달았다.
“아아! 제발, 제발…… 흐읏! 신우 씨…….”
살살 하겠다던 신우의 다짐이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주희의 항의는 없었다.
오직 신우를 절박하게 부르며 고조되는 신음 소리만이 침실에 야릇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흔들흔들, 삐걱삐걱!
신우의 과격한 손짓에 의해 침대가 몸살을 앓아갈 때쯤, 신우도 마지막을 향해 빠르게 스퍼트를 올렸다.
“으음!”
마침내 신우의 입에서도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샜고, 주희를 으스러지게 껴안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동시에 주희의 손톱이 신우의 등골에 자국을 남기며 박혀 들었다.
신우의 뜨거운 분신들이 울컥대며 주희에게 쏟아져 들어갔다.
신우는 한참을 그렇게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고 주희는 완전히 힘을 다했는지 맥없이 그에게 기대 있었다.
“고마워.”
신우가 진심을 다해 주희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일 때였다.
스르르, 주희의 몸이 흐느적거리며 흘러내렸다.
신우가 놀라 주희를 받아 안으며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새근대는 걸로 보아 극도의 피로로 인해 잠이 든 거란 사실을 알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미안함이 집채만 한 무게로 그를 눌러 댔다.
조심조심 주희를 침대에 눕힌 신우는 죄인의 눈으로 주희를 바라봤다.
“정말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널 안아도 안아도 더 안고 싶어서. 이러다, 이 못난 마음을 들켜서 네가 등을 돌릴까 봐 겁이 나.”
눈을 뜬 주희에겐 절대 할 수 없는 말을 신우는 기절하듯 잠이 든 그녀에게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 주며 중얼거렸다.
미친놈처럼 그녀를 안았던 것도 결코 향 기운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았다.
아마 그건, 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음탕한 본심이었으리라.
어둠의 기운을 빌려 욕심을 채웠다고밖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리 없다.
몸이 아까의 쾌락을 마치 각인하듯 기억했다. 그가 흔들 때마다 그녀의 안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의 말초신경 하나하나가 어떻게 전율했는지를.
“……미쳤군.”
반성은커녕 머릿속에 점점 더 노골적으로 되새겨지는 기억에 신우는 당황했다.
침실 깊숙이 침범한 달빛의 마술인지 새근새근 잠든 주희의 얼굴이 유난히 더 빛나는 것같이 보인 순간, 신우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금 전 그만큼 주희를 괴롭혀 놓고는 또 그 안에서 스멀스멀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자신의 몸에 음란마귀가 씌기라도 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머리부터 식히자.”
신우는 얼굴을 무섭게 굳히고 최대한 주희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아!
한겨울,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정수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래, 정상이 아니야. 이런 미친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다 그 이상한 향 때문인 게 분명해. 아니, 분명 향 때문이어야 해.”
입김도 얼 것 같은 찬물을 뒤집어쓰고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음욕에 신우는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스스로를 설득시키고 또 설득시키려 애썼다.
그날 밤, 기절하듯 잠이 든 주희는 몰랐지만 신우는 음흉한 마음과 싸우느라 새벽이 밝아오도록 욕실을 나오지 못했다.
* * *
눈을 감고도 햇살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침이 밝은 모양인데 이상하게 눈꺼풀이 무겁고 몸이 나른했다.
마치 인간이었을 때 감기에 걸린 증상과 비슷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잠이 달아난 순간부터 느껴지는 시선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주희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결혼하고부턴 항상 그랬듯 오늘도 어김없이 신우의 해사한 얼굴이 그녀의 아침을 맞이했다.
“내가…… 늦잠을 잤나 보네요.”
주희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고, 신우는 자동반사적으로 침대가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주희의 입술에서 촉, 나른함을 쫓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아냐, 더 자도 돼. 몸은……?”
더 자도 된다면서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 신우가 무엇을 염려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주희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뭘 걱정하는 거예요? 내가 신이라는 거 잊었어요?”
“……다행이다.”
“그게 걱정이 돼서 출근도 안 하고 기다렸던 거예요? 내가 깰 때까지?”
“너보다 더 소중한 건 없으니까.”
신우는 그냥 한번 해 보는 말로도 그녀가 두 번째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나도 그래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어디 아프거나 일이 생겼을 땐, 꼭 나한테 먼저 말해요. 어제처럼 밖에 나가 혼자 삭이겠다든지 하는 고집 안 부렸으면 좋겠어요.”
“널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났었어.”
“걱정 말아요. 정말 못 견딜 것 같으면 당신 머릿속을 제어해서라도 내 몸을 지킬 테니까. 어제 정도로 어떻게 되진 않아요.”
“정말 괜찮은 거야? 이렇게 못 일어나는데도?”
“그런 거 아니에요. 최근에 당신이 옆에 없어서 밤에 잠을 거의 못 자서 그럴 거예요.”
신우가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그럴듯한 변명을 가져다 댔다.
물론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인간일 땐 그런 적이 없었는데 결혼 후 처음으로 혼자 밤을 보내려니 잠이 잘 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옆에 없어서?”
그제야 신우의 얼굴에서 그늘이 걷히는 걸 보고 주희는 다시 한번 말랑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요. 그러니까 되도록 급한 일이 아니면 밖에서 밤을 보내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오늘, 출근하지 말까?”
얼굴에서 그늘이 걷히는 정도가 아니라 왠지 눈빛이 음흉해지는 걸 목격한 주희가 벌떡 자리를 박차며 상체를 일으켰다.
안 그래도 몸이 나른한데 또다시 어젯밤처럼 그를 받아들였다간 이번에는 정말 신열이라도 오를지 몰랐다.
“안 돼요.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난 꼭 출근해야 해요. 도 실장님 오늘 도깨비 모임 있어서 준비할 게 많다고 했어요.”
주희의 격한 반응이 너무 귀여워 신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모임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도 실장이 얼마 전에 그것 때문에 징징거렸던 거 같은데. 도깨비 모임 장소가 재개발 들어가는 바람에 당분간 모임을 할 수 없게 됐다고 말이야.”
“그랬는데 그저께 새미가 장소 제공해 주기로 했거든요. 신우 씨가 증여해 준 빌딩 옥상요. 물론 새미는 그 모임이 도깨비 모임이란 걸 모르지만요. 후후.”
새미는 신우의 허락하에 당당하게 한성그룹의 일부 지분을 받게 됐다. 그리고 박 회장의 개인 재산 중 일부인 빌딩도 받아 이젠 내로라하는 빌딩녀가 되었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지만 새미는 여전히 책방에 드나들고 찻집을 운영했다. 물론 새로 물려받은 자신의 빌딩에서.
“도깨비 모임 빌딩이라. 빌딩이 대박 나겠군. 신이 너무 한 인간을 편애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무슨 말씀이에요? 새미가 도 실장님에게 장소를 제공한 건 제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런 거예요. 복은 스스로 부르는 거죠.”
“명새미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인간 이주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준 유일한 친군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보다 요즘 새미 얼굴이 활짝 폈어요. 후훗,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요.”
“연애? 명새미 씨가? 뭐 하는 남잔데?”
성격이 너무 세 평생 혼자 살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연애를 한다니 이상한 사기꾼 놈이 붙은 건 아닌가 싶어 물었다.
새미가 타격을 받으면 가장 영향을 받을 사람이 주희일 게 뻔해서.
“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 노트북 들고 매일 출근하다시피 오던 남자래요. 언젠가 새미 가게에 미친 트럭이 돌진해 들어와 놀라 기절한 적이 있다는데, 그때 그 사람이 돌봐 줬대요. 분명 나도 그날 가게에 새미를 찾아갔었는데 이상하게 그날 일은 누가 내 머릿속을 지운 것처럼 기억이……. 신우 씬 아는군요.”
주희의 말에 당황해 살짝 낯빛이 변했던 모양이다.
주희가 당장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머릿속을 읽어 낼 것처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넘겨짚긴. 그래, 새미 씨가 마음에 둔 남자가 찻집에 항상 들르는 사람이라고?”
새미의 가게에 남자를 출근시킨 이가 그였다.
탁용호 경호원.
달려드는 덤프트럭을 박살 내는 장면을 목격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탁 경호원의 모습이 기억났다.
탁 경호원의 품에 안겨 있던 새미의 모습도.
강림차사가 기억을 모두 지웠다고 했지만 둘만의 긴박했던 감정이 은연중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응산에게 경호를 철수시키란 말을 하지 않았더니 여태 새미를 경호 중인 모양이었다.
만약 탁용호가 일 때문에 새미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새미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네, 요즘엔 그 사람이 항상 오는 시간에 오지 않으면 걱정부터 된대요.”
새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주희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탁 경호원 당장 철수시키라고 해야겠어.’
“그래, 이제 새미 씨 얘긴 그만하고 아침부터 먹자.”
“네. 도 실장님이 도깨비길로 마중 오기 전에 서둘러야겠네요.”
* * *
스르르.
이가서림 근처 큰 도로에 검은 세단 하나가 조용히 멈춰 섰다.
“다녀오세요.”
주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고 있는 신우에게 인사했다.
“오늘은 도 실장 때문에 정신없겠군.”
“가게에 붙어 있을 새가 없을 테니 오히려 더 조용할걸요? 그러고 보니 응산 씨는 모임 안 가세요?”
도깨비 모임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응산에게도 초대장이 갔을 거라는 생각에 운전석에 있는 응산에게 물었다.
“네, 전 안 갑니다.”
“왜죠? 도 실장님 말론 굉장히 재미있다던데.”
주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묻자 응산의 얼굴에 조금 난처해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그런 자리에 응산이같이 강력한 도깨비가 끼면 유희가 안 되지. 다들 주눅 들어서 응산이 눈치만 봐야 할 테니까. 도깨비들 세계는 특히 더 힘의 논리가 작용하거든.”
“네? 하지만 도 실장님은 전혀 응산 씨를 어려워하지 않던데요?”
“그거야 응산이와 도 실장만 아는 모종의 비밀이 있겠지. 자, 응산이가 곤란해하는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어서 출근…….”
응산의 난처함을 들어주려 웃으며 주희를 재촉하던 신우가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웬 놈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뱅뱅 돌며 이가서림을 기웃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그렇게 알아듣게 얘기했는데 하루도 안 가 그의 말을 씹어먹은 놈.
“어? 륜차사 님?”
주희는 신우의 속도 모르고 반갑게 전륜차사를 부르며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아, 주희 님……. 히이익!』
주희의 목소리에 뒤돌아보던 전륜차사가 갑자기 헛바람을 들이켜며 모습을 감췄다.
“륜차사 님? 왜 모습을 감추시는 거예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전륜차사의 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주희가 허공의 한 지점을 향해 의아해하며 물었다.
『!』
“어제 그렇게 알아듣게 말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멍청이인 걸 보니, 모습 좀 감춘다고 우리가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
전륜차사에게서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은 대신 신우의 비아냥이 주변 공기를 얼릴 정도로 서늘하게 뱉어졌다.
“어제 전륜차사 님도 같이 가셨던 거예요?”
“덕분에 일을 그르칠 뻔했지.”
사실 전륜차사가 딱히 잘못한 건 없었지만 말귀를 지독히 알아듣지 못하는 전륜차사를 보니 저절로 비꼬인 말이 나왔다.
신우의 말이 매우 억울했는지 전륜차사가 볼이 퉁퉁 부은 얼굴로 스스스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제 잘못만은 아니었어요. 그 이상한 향 때문이었는걸요. 귀물전담팀에 향로를 넘겼는데 회수해야 할 귀물(鬼物) 명단에 있는 물건이라고 했다고요. 팀장님이 어디서 찾았느냐고, 괜찮으냐고 몇 번이나 물으실 정도였어요. 신들에게 특히 강한 영향을 끼치는 정신을 파고드는 독향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정신을 파고드는 독향. 그랬다.
내면의 탐욕을 극대화시키는 향이란 걸 그는 이미 어젯밤 몸으로 충분히 체득했다.
‘그런데 왜 이놈은 멀쩡해 보이지?’
“향요? 륜차사 님도 맡으신 거예요? 몸 괜찮으세요? 아무 이상 없으세요?”
신우가 물을 말을 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신 물었다. 어제의 신우처럼 붉은 기운을 띠는가 싶어서.
『괜찮습니다. 머리가 조금 무겁고 어지럽긴 했는데 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뇌가 깨끗하다고 해야 할지, 정신이 깨끗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행이긴 했다.
어젯밤 미쳐서 주희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주희에 대해 육체적 욕망을 가지진 않은 것 같아서.
“그럼 주희의 치유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데 여긴 뭐하러 온 거지? 내 경고까지 무시하면서?”
『제가요, 신우 님 말씀을 정말 명심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주희 님에게 직접 전하고 싶은 좋은 소식이 생겨서 안 올 수가 없었어요. 정말 그 소식만 전하고 가려고 했습니다.』
“아까도 그러시더니 경고는 뭐고, 명심은 뭘 명심한다는 거예요? 왜요? 륜차사 님, 신우 씨한테 뭐 잘못했어요?”
주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묻는 말에 뜨끔한 건 신우였다.
「경고하는데, 이가서림 출입 금지 건은 주희 앞에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다급하게 전륜차사에게 전음을 보내고 험악하게 눈빛으로 협박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차사 일 좀 똑바로 하라고 했어. 그보다 소식이라니? 명부에서 좋은 소식이 올 게 뭐가 있지?”
주희에게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둘러대고 있었지만 전륜차사를 쏘아보는 신우의 눈빛엔 설득력 있는 좋은 소식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소정이 소식요.』
신우의 살벌한 시선과는 대조적으로 전륜차사는 생각만 해도 좋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얘기를 꺼냈다.
“소정이…… 설마?”
전륜차사의 포근포근한 표정에 주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설렘을 가득 담아 되물었다.
『네. 소정이가 드디어 환생의 길로 들어섰답니다. 태산왕 님을 그토록 못살게 졸라대더니 결국 해내네요. 태산왕 님께서 직접 나서서 월하노인 흉내를 내셨답니다.』
“내년이면 그 아일 다시 볼 수 있는 건가요?”
『네, 그럴 거예요.』
물론 태어날 아이가 그들이 아는 소정인 아니겠지만 맑고 맑은 혼은 그들이 아는 그 소정이일 터였다.
“조만간 제신리에 한번 다녀와야겠네요. 순탄하게 태어나라고 축원이라도 해줘야겠어요. 고마워요, 륜차사 님. 이렇게 좋은 소식 전해주셔서. 소정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주희의 눈이 기쁨으로 물기에 젖어 드는 모습을 보며 신우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륜차사가 갈수록 더 괜찮은 놈으로 보여 경계심을 끌어올려야 하는데도 그럴 수가 없어서.
주희를 기쁘게 하는 이를 무조건 내칠 수는 없었다.
「소식 다 전했으면 그만 가. 그리고, 다음에 일을 가져올 땐 내가 있을 때 오도록 해.」
그의 경고를 무시했으니 다음에는 얼씬도 못 하게 따끔하게 혼내야 하는데 겨우 전음으로 내쫓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앗! 저, 저, 다음에도 제가 와도 되는 겁니까?」
「일이 생겼을 때만 와! 쓸데없이 들락거리지 말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되묻는 전륜차사의 전음에 신우가 까칠하게 받아쳤다.
『신우 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희 님, 소식도 전했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륜차사가 꾸벅꾸벅 절까지 하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더 있었다간 신우가 말을 번복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주희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잽싸게 사라졌다.
“뭐가 감사하다는 거죠?”
“모르지. 저놈의 맑은 머리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
자신은 다시 태어나도 저런 맑은 정신을 가질 순 없을 것 같아 비아냥 반, 부러움 반으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덜컥!
주희에게 그만 들어가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폭 껴안고 정수리에 키스를 하려는데 이가서림의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니, 도대체 밤에 뭐 하시고 벌건 대낮에, 그것도 밖에서 그런 낯뜨거운 포즈를 연출하시는 겁니까? 이 시간에 출근하시면서 아직도 음기가 부족하신 겁니까? 좀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그러다 우리 주인님 말라 죽습니다.”
도 실장이 눈을 죽 찢으며 못마땅함을 넘어서 꼴불견이라는 투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 입, 한 번만 더 나불거리면 이대로 주희 다시 데려가 버린다. 그러면 오늘 하루 종일 이가서림을 지켜야 하는 건 도 실장일 테지?”
도깨비 모임에 가지 못할 거라는 의미를 담아 협박을 하니 도 실장의 입이 단번에 딱 다물어졌다.
신우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태연하게 주희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다녀올게.”
주희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신우의 태도에도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웃으며 신우의 허리를 껴안았다.
도 실장의 말처럼 대낮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이런 행동이라니. 예전의 그녀였으면 낯이 뜨거워야 정상인데 신우의 품은 그 부끄러움도 사라지게 했다.
“다녀오세요.”
점점 신우를 닮아가는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 따스한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싫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부드럽게 신우를 재촉하는 인사를 되돌렸다.
그렇게 마치 며칠 헤어져야 할 뜨거운 연인들처럼 출근 인사를 나눈 그들은 비로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딸랑!
주희는 신우를 보내고 이가서림 안으로 들어섰다.
종소리에 석의 잠이 깬 모양이다.
석이 자신의 지정석인 소파에 누워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잠시 주희와 눈을 맞췄다. 그리곤 마치 확인 끝났다는 듯 다시 스륵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기력을 회복하고부터 석은 다시 이가서림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왔어야 할 석이 오늘은 마치 며칠 잠을 자지 못한 녀석처럼 힘이 없었다.
“저 녀석 또 자네. 좀 이상해요. 저 식충이가 어제부터 계속 먹지도 않고 잠만 자요. 그저께 미친 듯이 먹어댄 게 탈이라도 난 걸까요?”
도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 아마 성장 시기라서 그럴 거예요.”
“성장 시기요? 다 큰 거 아니었어요? 검색해도 안 나오는 종이던데, 설마? 설마? 몸이 점점 커져서 악어처럼 커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도 실장이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는 듯 기겁을 하며 물었다.
“글쎄요. 그건 석이 마음일 거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은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확실한 건 나도 잘 몰라요.”
신의 몸으로 돌아오고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석이 평범한 도마뱀은 아닐 거라는 걸.
석이 처음에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발견됐을 때만 해도 정말 평범한 도마뱀보다 더 기력이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저 자그마한 몸집에 점점 더 커다란 힘이 생겨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석이 왜 그런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단지, 어쩌면 세상에 또 하나의 등불이 되어줄 신수가 지금 잠시 휴식 중이란 사실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석이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더니, 쯧. 됐어요. 도마뱀 주제에 커봐야 얼마나 크겠어요. 그보다 주인님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안색이 별로 안 좋다고요.”
“괜찮아요. 감기 기운이 들러붙기라도 했는지 살짝 나른하지만 아픈 덴 없어요.”
“신이 감기 걸린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다 신우 님의 병적인 집착 때문이잖습니까. 하여튼 명부신 주제에 무슨 열이 그렇게 많은지. 어쨌든 조심하십시오. 아무리 사랑해도 무조건 다 받아주지 마시고 힘들면 힘들다고 확실하게 얘기하시라고요. 아시겠어요?”
도 실장이 투덜투덜 팍팍하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걱정 마세요. 정말 힘들면 신우 씨 정신을 지배해서라도 멈출 테니까요.”
주희는 속으로 가만히 웃으며 손바닥까지 좍 펴 보이고는 걱정 말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하여튼, 말만. 뭐 약점 잡히셨어요? 신우 님한테는 왜 그렇게 항상 물렁하게 구시는 건데요?”
“훗, 좋으니까요.”
“허얼. 내가 아는 주인님이 아니야.”
도 실장이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보다 안 바쁘세요? 모임 준비 할 거 많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부터 준비해야죠. 오늘 모임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저니까요. 흐흐흐, 제가 주인님과 신우 님 덕분에 도깨비 통신 최고 스타가 됐다는 거 아닙니까. 감히 다른 도깨비들이 상상이나 해봤겠습니까? 신과 계약을 맺은 도깨비를? 크하하하! 이제 전 더 이상 쭈글이가 아닙니다. 도깨비검? 그딴 게 왜 필요하죠? 천계신, 명부신이 함께하는데 말입니다. 크하하하! 컥, 쿨럭!”
도 실장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광소를 터트리다 끝내 사레까지 걸려 쿨럭대며 과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카아악!
그 탓에 곤히 잠을 청했던 석이까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커흠, 짜식이 말이야. 부러우면 부럽다고 할 것이지 째려보긴. 흠흠. 주인님, 지금부터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그제야 자신이 좀 심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 실장이 이번엔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주희에게 물었다.
“네, 여긴 걱정 마세요. 오랜만의 나들이인데 준비 잘하셔서 잘 다녀오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주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도 실장이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주방 도깨비길이 있는 곳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도 실장의 수다스러운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가서림의 평범한 하루가 시작됐다.
주희가 드문드문 드나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동안 석인 이가서림의 안정된 공간에서 길고 긴 잠을 잤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고 어스름이 짙어지더니 이내 거리가 어둠에 물들어갔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이 하나둘 자신의 자리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유난히 더 한가했던 이가서림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벌써 신우 씨 올 시간이 다 되어가네.”
주희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문밖을 응시했을 때였다.
한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이가서림의 불빛이 부러운 듯 멍하니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딸랑!
“찾는 책이 있니? 들어와서 천천히 둘러봐도 돼.”
주희가 처음으로 호객 행위를 하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 저, 혹시 교과서도 파나요? 어, 얼마예요?”
소녀는 한 손으로 앞머리를 억지로 쓸어내리고 있었고, 한 손은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체구는 도저히 고등학생처럼 보이지 않는데 소녀가 입고 있는 교복은 그녀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복이었다.
“교과서를 팔진 않지만 S고등학교 교과서라면 공짜로 줄 수 있어. 내가 다녔던 학교거든.”
주희가 가만히 웃으며 선배라고 밝히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학교 선배님. 저, 정말 저 주셔도 되는 거예요?”
“그럼. 이제 나한텐 필요없는 것들이니까. 들어올래?”
“가, 감사합니다, 언니. 아, 아니, 선배님.”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돼.”
소녀를 이가서림 안으로 안내한 주희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어둠 속이라 설마설마했는데 불빛에 드러난 소녀의 이마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고, 이 추운 겨울에 외투도 없이 교복만 입고 있었다.
더구나 그 추워 보이는 교복마저 군데군데 뜯겨 있었다.
마치 구타라도 당한 것처럼 험한 모습이었지만 주희는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책 가지고 나올 동안 소파에 좀 앉아서 기다릴래? 보고 싶은 책 있으면 얼마든지 구경해도 되고.”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어떤 손님이 들어와도 꼼짝도 않고 잠만 자던 석이 소녀가 들어선 순간 벌떡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그리곤 빠르게 소녀에게 달려가 발밑을 뱅뱅 맴돌았다.
“만져봐도 돼요?”
소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주희를 돌아본 것과 동시에 석이 자청해서 폴짝 소녀의 손 위로 뛰어올랐다.
소녀가 잠시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석을 보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 진짜 너무 예뻐요.”
소녀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석이도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난 안채 가서 교과서 찾아올 테니 가게 좀 봐줘. 석이도 좀 봐주고.”
“네, 그럴게요.”
소녀가 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했다.
주희가 교과서를 챙겨 나올 때까지 소녀와 석은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과목이 필요한지 물어보지 않아서 다 들고 나왔어. 어떤 게 필요해?”
교복에 새겨진 고등학교 명찰의 색깔로 소녀가 1학년이란 걸 알았다.
“아, 국어랑 과학요. 정말 감사합니다.”
“국어랑 과학. 여깄네. 책 챙기고 잠깐만 여기 앉아볼래? 석아, 너 잠시 내려와.”
주희의 말에 석은 마치 그녀가 무엇을 할 건지 알아들은 것처럼 쪼르르 소녀의 손에서 내려와 탁자 위로 올라갔다. 소녀가 소파에 앉으면 보이는 위치였다.
“왜, 왜 그러시는데요?”
“방에 들어간 김에 연고가 보이길래 같이 챙겨왔거든.”
“아, 저, 저, 괜찮아요. 아주 작은 상처예요. 하나도 안 아파요. 그냥, 그냥 넘어져서 좀 다쳤을 뿐이에요.”
소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석을 보느라 잊었다가 그제야 이마의 상처가 생각났는지 상처를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치료는 하는 게 좋아. 마침 좋은 연고도 있고. 앉아.”
주희의 따스한 시선 때문이었을까. 소녀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얌전히 주희가 권한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연고가 효능이 정말 좋거든. 그리고 내 손은 약손이야. 내가 만져주면 두통도 사라져. 앞으로도 이 언니의 약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책방에 놀러와도 좋아.”
주희는 시중에 파는 평범한 연고를 바르기 시작하면서 손에 힘을 주입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는 알지 못했지만 주희의 손이 하얗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소녀의 얼굴에 가득했던 그늘이 점점 사라져갔다.
“언니, 정말…… 앞으로도 또 놀러와도 돼요?”
“얼마든지 놀러와. 여기 이가서림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니까.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넌 특히 석이랑도 잘 놀아주잖아. 그건 아주 큰 도움이거든.”
“석이랑……. 정말, 정말 고마워요, 언니. 어떡해! 석아, 나 또 놀러와도 된대.”
어두운 기운이 가신 탓인지 소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 저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할머니께서 기다리세요.”
소녀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래, 할머니를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지.”
“언니 손은 정말 약손인가 봐요. 항상 있던 두통도 사라졌어요.”
소녀가 주희를 폭 껴안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다행이네. 앞으로도 머리 아프면 찾아와. 언제든 머리 만져줄 테니까.”
“고마워요, 정말……. 석아, 내일 봐! 안녕!”
기분이 좋은 듯 소녀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날아갈 것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가서림을 나갔다.
문밖의 소녀가 아주 작아져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스스스, 갑자기 석의 모습이 변했다.
“찾았다.”
소녀는 이미 사라졌지만 그 사라진 공간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석이 열 살쯤 되는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 중얼거렸다.
“저 아이를 기다렸던 거니?”
주희가 태연하게 물었다.
“역시 놀라지 않는군요.”
“놀랐어. 네가 이렇게 빨리 각성하게 되리라곤 생각 못 했거든. 설마 청룡이 이런 어린아이의 모습일 거라곤 더더욱 예상치 못했고.”
“아직 힘을 다 되찾지 못했을 뿐이에요. 곧 성체로 나타날 수 있을 거예요. 조금만 더 이곳에 있게 해주세요.”
“얼마든지 있어도 좋아. 단, 다시 도마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조건으로. 그런 어중간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내내 책방을 돌아다니면 내가 곤란해지거든.”
“되도록 조심하도록 하죠. 그리고 잘 못 느끼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건데, 당분간은 너무 힘을 소진하시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직 너무 작긴 하지만 주희 님 안에서 다른 힘이 느껴지거든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말투는 좀처럼 어린아이가 아닌 석이 아주 당황스런 말을 하고는 팟, 다시 도마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설마…….”
주희가 놀라 배에 손을 댄 채 멍하니 석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신우가 들어섰다.
“다녀왔어.”
신우와 그녀의 아이.
생각만으로도 너무 벅차 목이 잠겼다.
“신우 씨…….”
“왜? 왜?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
주희의 탁한 목소리와 눈에 살짝 고인 물기를 확인한 신우가 놀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주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신우의 품에 푹 안겨 고개를 묻었다.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일?”
주희의 눈물이 신우를 잔뜩 긴장시켰다. 혹, 천계에서 주희를 부른 건 아닌가 해서.
“나, 아기 가졌어요.”
신우는 주희의 말에 멍해졌다.
“아기…….”
“네, 아기요. 신우 씨와 저의 아기.”
“어, 어디 봐.”
신우가 말을 더듬으며 주희의 배에 손을 가져갔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지만, 분명 주희의 기운이 아닌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너와 나의 아이…….”
신우는 가슴이 벅차 어쩔 줄 몰라 하며 주희를 꼭 껴안았다.
언제나 가슴속에 작은 불안이 존재했었다. 어쩌면 주희가 다시 천계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런데 지금, 그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의 존재가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그와 주희를 하나로 엮어주는 것만 같았다.
“고마워…… 사랑해.”
“사랑해요.”
신우와 주희의 사랑의 울림에, 온 세상이 잠시나마 짙은 사랑으로 메아리쳤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