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꿈을 꿨다. 주희가 대답을 해주는 행복한 꿈을.
꿈이어서인지 숨을 쉴 때마다 안개가 목을 졸라대는 것 같은 묵직한 기운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습하고 축축한 안개 속이 아니라 뽀송뽀송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집에는 연락 안 해도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응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네, 잠시 다녀왔어요. 당분간 여기에 있을게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한 주희의 목소리마저 들리는 걸 보면 정말 꿈을 꾸는 모양이다.
사박거리며 다가오는 그녀의 발소리.
달칵, 조심스레 문을 여닫는 소리도 들린다.
그녀의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숨소리마저 점점 가까워졌다.
눈을 떠 확인하고 싶었지만 신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행복해하고 싶었다.
이마에 살며시 닿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 가슴이 떨렸다.
“오늘은 무슨 이야길 해줄까요? 우리 이야길 할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 첫 만남 때도 당신은 의식이 없었네요. 25년 전 그날, 당신은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왔어요. 하늘도 슬퍼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당신을 보는 제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아팠어요. 당신을 살리지 않으면 얼음칼이 계속해서 심장을 찔러댈 것 같았죠. 아마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당신을 마음에 담아 버린 게. 그러니 당신을 본 모든 순간 당신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요, 내가 당신을 살렸어요. 그러니 내 허락 없이 죽지 말아요. 의식을 닫지 말아요. 제발…… 일어나요. 나 여기 있어요. 어서 돌아와요.”
그녀의 독백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이마에 짚고 있는 손에서 전해지는 이상할 정도로 청량한 기운 때문인지 의식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꿈이 아닌가?
방금 그녀가 이상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사랑해요, 신우 씨. 제발 일어나요.”
그리고 더 확실하게 들린 그녀의 사랑의 속삭임에 신우는 숨이 막혀와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했다.
이마에 닿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용기 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을 떴는데도 꿈은 계속됐다.
“신우 씨…….”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다렸어.”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꿈을 꾸는 것만으로 너무 행복해 투정 같은 소릴 내뱉었다.
“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요.”
곧바로 그녀의 젖은 목소리가 화답을 해왔다.
“아니, 그 말 말고, 처음 했던 말 다시 해줘. 사랑한다는 말.”
“사랑해요, 신우 씨.”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감정에 신우는 손을 뻗어 와락 그녀의 목을 껴안았다.
“주희야…….”
“네, 신우 씨.”
그는 입에 주문처럼 달라붙어 있던 주희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고, 주희는 계속해서 대답을 들려주었다.
팔을 풀어 다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주희였다.
그토록 보고 싶어 애가 달았던 그의 주희였다.
“이젠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내 곁에만.”
“네,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당신 곁에 있을게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바보같이 울고 있었던 건지, 그녀가 자신의 두 볼을 가만히 닦아 주었다.
볼에 닿은 그녀의 따스한 손의 감촉이 너무 좋아 얼굴을 그녀의 손에 비벼댔다.
“키스해 줘.”
마법은 계속됐다.
그녀의 달콤한 입술이 망설임 한번 없이 가만히 그의 입술에 닿았다.
몸을 일으켜 더 확실하게 그녀를 온몸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아직도 몸이 무거웠다.
머리부터 서서히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주희가 멀리 있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닿는 곳에 있었으니까.
이렇게 그녀의 숨결을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
“꿈이라면……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무 기분이 좋으니 목소리가 흐려졌다.
“꿈이 아니에요. 이렇게 당신의 입술에 키스하는 건 살아 있는 주희예요. 그러니 다시 잠들지 말아요, 제발……. 어떻게 해야 깨어 있을 건가요? 당신의 온몸에 키스라도 할까요?”
그의 흐려진 목소리 때문에 그녀가 착각을 한 모양이다.
그녀의 숨결이,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의 몸속 우울세포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데 말이다.
“해줘……. 너의 키스로 날 깨워 줘. 이상하게…… 네 손이 스치는 곳마다, 네 입술이 스치는 곳마다 점점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아.”
기분 좋은 그녀의 손길에 취해 약간의 엄살을 보태 그녀에게 요구했다.
“효과가…… 있어요? 사흘 동안이나 눈도 뜨지 않아서 나 이제 치유 능력이 사라진 줄 알았어요. ……만져 줄게요, 얼마든지. 키스해 줄게요.”
주희가 수줍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야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자 신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따스한 숨결이 그의 입술을 떠난 순간부터 신우는 더 이상 미소 짓지 못했다.
스윽, 자신이 로브를 입고 있었는지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 한 번에 로브의 앞자락이 열렸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침대로 올라와 그의 몸에 올라탔다.
“키스해 줄게요. 그러니 잠들지 말아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희가 곧바로 몸을 숙여 그의 입술을 막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달큼한 그녀의 숨결에 신우는 멍하니 그녀가 주는 달콤함을 받아 마셨다.
정성스레 단 숨을 불어넣어 주던 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을 타고 내리며 점점 뜨거워져 갔다.
그녀의 입술이 스치는 곳마다 신우의 내면에서도 점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그녀의 입술이 그의 쇄골 근처를 잠시 맴돌았고, 이내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그의 가슴에 닿았다.
가슴을 크게 한입 베어 무는가 싶더니 그녀는 입 안에 가둔 유두에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다디단 그녀의 혀가 입 안에서 어설프게 구를 때마다 그의 말초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해 저도 모르게 시트 자락을 움켜쥐어야 했다.
“으음…….”
기분 좋은 신음 소리가 흘렀다.
사실 신우는 그녀가 그의 몸에 올라타던 순간부터 이미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단지 아직도 그녀가 이렇게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그녀의 손길과 숨결을 하나하나 몸에 새기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요, 이렇게 반응해 주세요.”
속삭이듯 말한 주희가 더 강렬하게 그의 가슴을 빨아당겼고, 그녀의 입 안에 든 유두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때마다 그의 가슴 근육이 움찔움찔 춤을 췄다.
복부가 단단해진 건 당연지사였고, 그녀의 입술이 전에도 관심을 보이던 복부 쪽으로 향했다.
명치를 지나 누워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복부를 뜨거운 숨결과 함께 핥았다.
“음…….”
신우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정염에 탁해진 신음 소리가 샜다.
눈을 감은 채 배꼽 주위를 맴도는 그녀의 뜨거운 숨결을 즐기던 신우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떠야 했다.
그의 남성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생경한 감촉이 느껴졌던 것이다.
“여긴, 이미 괜찮아진 것 같지만 그래도 만져줄게요.”
아래를 보니 언제 벗겨진 건지 면바지와 팬티마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첫 잠자리에선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그의 중심을 그녀가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으윽!”
하지 말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이미 조물거림이 시작돼 버린 것이다. 정수리 끝까지 올라오는 것 같은 갑작스런 쾌락의 기운에 신우는 신음 소리만 내며 주희의 야한 손기술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아요?”
신우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누워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주희가 이렇게 사랑의 여신처럼 굴지 않아도,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당연히 그녀가 해주는 건 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네가…… 주는 건 다 좋아.”
신우의 목소리가 잠기다 못해 뚝뚝 끊어질 정도로 욕망에 젖어 있었다.
“뭐든지 다요?”
“응, 뭐든지.”
그녀가 물었고, 그는 격렬하게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가져요.”
주희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하나하나 옷을 벗어 던지는 걸 보고야 그녀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육체만을 원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눈부신 뽀얀 나신에 그만 멍하니 정신을 빼앗겨 버려서.
“날 가져요.”
주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다시 그의 몸에 올라타고야 신우는 당황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주…… 으음.”
그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이미 성이 나 빳빳하게 일어서 있는 그의 물건 위로 그대로 몸을 주저앉혀 버렸다.
스윽, 신우가 주희에게로 밀려들어 갔다.
“하아…… 그래요. 이렇게 날 가져요. 당신이 원한다면 내 전부를 줄게요. 그러니, 그러니 이젠 제발 잠들지 말아요.”
주희는 신우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간절히 말했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사흘을 보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않고 있는 모습이 그의 어릴 때 모습과 겹쳐 불안했었다.
분명 숨을 쉬는데도, 몸에 이상이 없는데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신우 때문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괜찮았다.
자신의 몸 안 가득 담겨 있는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의 몸의 작은 떨림 하나하나까지 다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가 이렇게 반응해 온다면 아무리 버거워도 그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우의 목에 꽉 매달린 채로 그녀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윽, 잠들지 말라니……. 이러고 잠들 수 있는 남자는 없어.”
“내가 원하던 바예요. 어떻게 움직이는 게 더 기분이 좋아요? 이렇게? 아!”
“으음…….”
주희가 본능적으로 하체를 한 번 흔들다 그만 먼저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신우의 목 안 깊숙한 곳에서도 신음 소리가 흘렀다.
살아 있는 주희의 존재가 그의 몸속 깊숙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자신을 안고 있는 존재가 확실하게 살아 있는 주희란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늦었어. 늦었다고. 곧 온다고 했으면서…….”
이젠 당사자를 앞에 두고 따질 수 있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허리를 꽉 붙잡으며 말과 함께 몸으로도 불만을 표현했다.
“네, 늦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주희도 신우의 목에 매달려 사과의 말을 하고 또 했다.
“이제 떠나지 않는 거지? 항상 내 곁에 있는 거지?”
“네. 항상 당신 곁에 있을게요. 흣!”
주희를 잃고 느꼈던 두려움을 주희를 안으며 씻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신우의 손길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의 분신이 그녀의 몸을 꿰뚫기라도 할 듯 거칠게 그녀의 내벽 속으로 박혀 들었다. 주희의 입에서 놀란 탄성이 터지고, 그녀의 아래가 바르르 잔경련을 일으켰다.
“널 가질 거야.”
“하아, 하아! 시, 신우 씨…….”
신우의 거친 질주가 시작됐다.
신우의 팔뚝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그녀의 몸이 들어 올려졌다 내려 꽂히길 반복했다.
푹푹 주저앉혀지는 그녀는 극렬한 쾌락에 몸을 뜨느라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거친 신음 소리를 내거나 신우의 이름을 부르며 더 꽉 매달리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스윽, 스윽!
그는 쉬지 않고 움직였고, 첫날밤과는 달리 아주 거친 질주를 계속했다.
주희를 파고드는 순간만이 주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절박하게 주희를 안아갔다.
“흐읏! 시, 신우 씨…… 사랑해요.”
그녀의 신음 소리 섞인 사랑 고백에 신우의 손길이 멈칫했다.
“……가지 마…… 다시는…….”
주희는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탓에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띄엄띄엄 들리는 그의 탁한 목소리만으로 그가 아직 불안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안 가요. 가지 않을게요.”
“주희야…….”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지더니 대신 그녀의 몸을 통째로 끌어안았다.
그가 떨고 있는 건지, 그녀가 떨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렬하게 보듬어 안고서야 서로가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빈틈없이 서로를 껴안은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을 가만히 정지해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요.”
신우의 입에서 사랑의 속삭임이 흘렀고, 주희의 입에서도 같은 사랑의 선율이 흘렀다.
“아, 아직 끝난 거 아니었어요?”
한참을 감정에 취해 잊고 있었건만, 그의 몸이 점점 더 존재감을 드러내자 조심스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래는 너만 보면 항상 이 모양이라 내 의지로 조절이 안 돼. 그런 데다 그런 도발을 했으니 당연히 이 정도로 끝날 리 없지. 자, 이제부터 책임질 시간이야.”
“그런…… 흣!”
그녀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의 허리가 또다시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그의 거침없는 질주가 다시 시작됐다.
“……좋아……. 네가 살아 있는 게 느껴져.”
“하아……. 그, 그래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게 느껴져요. 흐읏!”
서로가 서로의 단 숨을 집어삼키며 그들은 격렬하게 서로를 흔들고 또 흔들어댔다.
스윽스윽, 부드럽게 움직이는가 싶다가 철퍽철퍽, 돌연 온몸을 관통하는 격렬한 몸짓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갔다.
그렇게 격렬한 몸짓으로 서로를 탐하고 탐하며 생존 확인을 하는 야릇한 밤이 깊어갔다.
“으음…….”
“신…….”
깊은 밤이 새벽으로 치닫고야 신우의 몸이 마지막 쾌락의 몸짓으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주희는 그를 감당해내느라 그의 이름을 부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이제 잘 거예요……. 어디…… 가지 말아요……. 옆에 있어요.”
주희가 그의 품에서 스륵 무너져 내렸다.
“누가 할 소리를…….”
반박할 틈도 없이 그녀는 이미 새근대며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몸을 빼낸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뉘었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떼고 단정하게 쓸어 넘겨 주었다.
가만히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고 바로 코앞에서 숨 쉬고 있는 그녀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주희가 살아 있다.
비로소 그도 숨이 쉬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디에도 가지 마라.”
잠든 주희는 그가 아는 주희가 분명한데 그녀의 안에 담긴 낯선 기운이 천계의 기운이란 걸 몸을 섞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천계신.
눈앞에 살아 있는 주희를 보면서도 불안이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 이유였다.
* * *
아침이 밝았음을 눈을 뜨지 않고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을 일으키기가 싫어 꿈지럭대며 따스함이 느껴지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볼을 부비며 기분 좋은 감촉을 즐겼다.
체온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구나, 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가를 늘이던 주희가 갑자기 몸을 굳혔다.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고, 코를 박고 있는 남자의 맨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더 자도 돼.”
“이제, 이제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의 말은 무시하고 물었다.
어제 그의 행동으로 봐서는 몸이 지나치게 잘 회복된 것 같았으나 그의 입을 통해 들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괜찮아.”
“다행이네요. 그럼 얼른 일어나요. 신우 씨, 뭐 좀 먹어야 해요. 그때부터 계속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응산 씨가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얼른 씻어요.”
주희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는 신우를 채근하며 명령했다.
어제 급작스럽게 관계를 가질 때까진 의식하지 못했는데 신우의 몸이 예전과 달랐다.
객관적 아름다움의 수위야 물론 여전히 위험할 정도로 높았지만 지금 주희에게 중요한 건 신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건강이었다.
“……!”
이상했다. 신우가 반박 한마디 없이 의아할 정도로 말을 잘 들었다. 어느새 침대를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많이 고픈 건가, 라고 생각하며 의아해하는데 그가 침대를 내려가고도 욕실로 갈 생각을 않고 꼼짝도 않고 서 있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씻으러 안 가요?”
“같이 씻어.”
“아니, 난 나중에…….”
신우의 표정만으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건가?
예전 같았으면 그녀가 싫다고 해도 강제로 연행해 가곤 했는데, 지금의 신우는 그녀가 같이 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서 있었다.
“……아니에요. 같이 가요.”
주희는 침대 위에서 내려 먼저 앞장서서 욕실로 향했다.
그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왔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거 같다. 신우는 옷을 입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책방에 가봐야 한다고 했을 때도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마치 엄마 오리를 따라다니는 아기 오리처럼 졸졸졸.
딸랑!
이가서림으로 들어서는 그녀에게서 딱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신우가 따라 들어섰다.
“주인님! 어? 박 회장님! 깨어나셨네요! 잘됐네요, 잘됐어.”
도 실장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신우를 반겼다.
주희는 돌아오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도 실장도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저 주희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면 충분했다.
그냥 짐작만 했었다. 주희가 돌아온 게 신우의 힘이 아닐까 하고.
도 실장이 본 신우의 힘은 명부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이었으니, 명부에 가서 무력시위라도 해서 데려온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왠지 대견하고 기특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아버지는요?”
“연구소 새 소장님 만나러 가셨어요. 제신리 발굴 작업 다시 들어가신다고요. ……이제야 예전 박사님으로 다시 돌아오신 거 같아요.”
이 박사를 생각하니 또 코끝이 찡해진 도 실장이 코를 훌쩍댔다.
주희가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미쳐 있었다.
괴성을 지르며 화를 내다가 본격적으로 주희 찾기에 돌입한 새미와 가출이라 보는 다른 경찰들의 말을 무시하고 알음알음 경찰 라인을 동원해 주희를 찾기 시작한 김 순경.
그중에서 가장 참담한 모습을 보인 건 이 박사였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게 보일 정도로 정신을 놓고 주희를 찾아다녔다.
이러다 이 박사님마저 잘못되는 건 아닌가 생각하던 어느 날, 이 박사가 넋 나간 모습으로 현와원엘 다녀왔다.
그때부턴 정말 그가 미친 줄 알았다. 주희가 돌아온다고 했다며, 기다리라고 했다며 하루 종일 그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괜찮았다. 다 괜찮았다. 주희가 돌아온 순간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석이도 같이 갔어요?”
“네. 주인님 그렇게 되시고부터 계속 이 박사님만 따라다니더니 지금도 그러네요.”
정말 쓸모없는 녀석이었는데 처음으로 도움 되는 짓을 한 석이었다.
이 박사가 밖에서 넋을 놓을 때마다 석이 정신을 차리게 도와줬다는 이야길 몇 번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석의 밥을 더 잘 챙기는 중이었다.
“마침 시간 잘 맞춰 오셨네요. 책방 좀 봐주세요.”
“어디 가시게요?”
“떡 돌리려고요. 히힛. 주인님이 돌아오셨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마음고생한 분들께 떡이라도 돌려야죠.”
책방에 일이 있다고 오늘은 꼭 좀 오라고 해서 왔더니, 떡을 돌리기 위해서였나 보다.
“떡을…….”
주희가 어이없어하며 떡이란 말을 되풀이했지만 한껏 기분이 업된 도 실장을 차마 말릴 수는 없었다.
“경찰서랑 새미 씨 가게에 좀 다녀올게요.”
도 실장은 그 말을 하자마자 희희낙락하며 이미 준비해 둔 따끈따끈한 메밀떡 바구니를 들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책방을 나갔다.
갑자기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차 내올게요. 잠깐만 앉아 있어요.”
잠시라도 떨어져서 생각이란 걸 해야 할 것 같아 자리를 권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우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또 주방까지 따라 들어오려 했다.
주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다 화장실까지 따라올 판이었다.
“뭐가 문제예요?”
휙, 뒤돌아 그를 올려다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신우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불안하고 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된 거냐, 묻지도 않는다.
그녀도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한데 신우마저 이런 표정을 지으니 가슴 아래 묻어 두고 있던 불안감이 확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는 명부의 신이었다. 사연이 있어 잠시 힘을 잃었으나 이젠 현무의 검까지 소환해내는 명부의 신이었다.
그런 그가 인간계에 얼마나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그가 당장 명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까 봐 속으로 얼마나 불안한지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그녀가 명부를 이미 경험해 본 결과, 그곳은 그녀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천계에서 신우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명부는 그녀가 따라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명부로 언제 돌아가느냐 물어야 했지만, 되도록 늦게 묻고 싶었다.
왠지 오기가 생겨 그 말만큼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명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만 빼고 다 들어줄게요. 얘기해 봐요.”
주희가 어디 해보란 듯 씩씩대며 말했다.
“안 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따라다니기만 하더니 웬일로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가지 않을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일단 가지 않는다는 말에 한시름 놓은 기분이 됐다.
당분간은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좀 더 용기가 생겼다.
“나도 안 가요. 당신이 인간계에 머무는 한 나도 인간계에 머물 생각이에요.”
“진심이야?”
신우의 눈동자가 희열에 떨리는 걸 발견하고는 용기가 자신감으로 변해갔다.
어제의 잠자린 결코 분위기에 취한 게 아니었던 거다. 진심과 진심이 통했던 거였다.
이성적일 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빠르다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지금이 적기라 여겨졌다.
“진심이에요. 난 되도록 오래도록 인간계에 머무를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 시간에 당신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랑 결혼해 줄래요?”
목소리는 지나치게 당차게 프러포즈하고 있었지만 사실 손발이 떨렸다.
신우가 또 대답도 없이 멍해지기에 더 불안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린 지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면서도, 그의 두 눈만 뚫어져라 쳐다볼 때였다.
와락!
신우가 대답은 않고 다짜고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완전 오징어가 될 정도로 그의 품에 납작 끌어안겼는데도 불만보다는 살짝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해. 결혼하자. 제발…… 내 신부가 되어 줘.”
그리고 너무나 흡족한 예쁜 답이 돌아왔다.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 이상하게 맥이 탁 풀려 다리의 힘이 빠졌다.
스르륵, 주저앉는 그녀의 몸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 신우가 안아 올려 주었다.
너무도 익숙하고 안정적인 자세라 벌건 대낮에 가게에서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가만히 고개를 숙여오는 그의 입술에 촉, 가벼운 키스를 했다.
곧바로 그의 눈동자가 깊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깊은 키스는 안 돼요. 도 실장님이 올 때까지 가게 봐야 해요.”
“당장 가서 도 실장 데려올까?”
“안 돼요. 앞으로 되도록 신의 능력은 쓰지 말아요. 아버지와 약속했단 말이에요. 인간계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대신, 인간계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붙잡혀 일주일을 갇혀 지내야 했다. 엉엉 울어대며 인간계에 머물겠다 고집을 부리던 그녀가 겨우 약속을 받아냈을 때였다.
염라대왕이 천계로 와 그녀를 찾았고, 신우가 결계에 갇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쩜 영영 신우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정식으로 허락까지 받았다고?”
“네. 아직 결혼 허락까진 받지 못했지만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신우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버지도 아시니까 꼭 허락해 주실 거예요.”
정식 허락이라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신우를 보니 새삼 아버지에게 조금 미안해지기는 했다.
[흑흑.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잡지만 않았어도 신우 씨가 결계에 갇히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흑흑, 신우 씨가 눈을 뜨지 않잖아요. 어떡해요. 신우 씨 살려내요. 살려내라고요. 엉엉!]
현와원에 신우를 데려와서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 불안해할 때 마침 아버지가 그녀를 보러 왔었고, 그녀는 25년 만에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에게 25년 치 투정을 한꺼번에 다 부려댔다.
[곧 깨어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물끄러미 신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하신 말씀을 듣고야 신경질적으로 울어대던 울음을 그쳤었다.
그런 처절한 사연이 있는 허락이란 사실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를 다시 내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계신들이 인간계에 머무는 예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신우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주희가 다시 인간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주희가 살아 있다는 것도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데, 이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단다.
그녀를 품에 안은 그의 몸이 소중한 것을 얻은 기쁨으로 가늘게 떨렸다.
“결혼하자. 최대한…… 빨리. 사랑의 서약을 맺자. 영원히 풀리지 않는 맹세의 서약을…….”
목소리마저 기쁨에 들떠 떨려 나왔다.
“네, 결혼해요. 맹세해요.”
맹세의 말을 반복하며 서로의 시선에 취한 두 사람이 점점 욕망에 이성을 잃어 여기가 가게란 것도 잊어갈 때였다.
딸랑!
출입문 위의 종이 청량한 소리를 냈다.
“들어오세요, 김 순경님. 주인님 안에…… 으악!”
흠칫,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바르작거리는 주희와 달리 신우는 그녀를 내려 줄 생각도 않고 오히려 방해꾼의 등장에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무, 무슨 일이에요, 도 실장님! 어!”
주희를 품에 안고 있는 신우를 본 도 실장이 놀라 비명을 질렀고, 뒤따라오던 김 순경은 도 실장의 비명에 놀라 뛰어들다 신우와 주희를 발견하고는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가게에서 이게 무슨 망측한 행동입니까? 지금은 영업 시간이라고요. 지나가던 꼬맹이라도 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런 해괴한 짓은 제발 안 보이는 곳에서, 들어가서 하시라고요.”
도 실장은 멍하니 두 사람을 지켜보는 김 순경이 안돼 보여, 괜히 신우와 주희를 더 타박했다.
“안 그래도 도 실장 기다리던 중이었어. 오늘 가게는 도 실장이 봐줘야겠어. 주희는 다시 현와원으로 데려갈 거야.”
“그게 무슨! 방금 오셨잖아요.”
“급한 일이 생겼거든. 이제 도 실장이 왔으니 약속한 걸 받아내야 해.”
신우가 주희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얄궂은 소리를 하며 싱긋 웃고는 주희를 쳐다봤다.
더 깊은 키스를 꼭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난감한 와중에도 주희의 두 볼이 붉게 상기되는 바람에 분위기가 더욱 야릇해졌다.
“이, 일단 내려 주세요. 걸어갈게요.”
가지 않는다는 말은 않고 민망해서 내려 달라는 말만 했다.
하지만 주희의 의사와 달리 신우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가만히 있지. 내려 줄 맘 없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신우가 성큼성큼 걸어 출입문 앞에 있는 도 실장과 김 순경을 지나치다 눈을 가늘게 떴다.
돌이 되어 있는 김 순경을 보니, 왠지 좀 더 확실하게 못을 박아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도 실장, 우리 조만간에 결혼식 올릴 예정이니까 하객들 명단 좀 작성해 줘. 축복은 많이 받을수록 좋은 거니 하객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아.”
도 실장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시선은 김 순경을 향해 있는, 엄연한 선전포고였다. 즉시 마음을 접으라는.
“결혼식요? 주인님, 정말이세요? 정말 결혼하시는 거예요?”
도 실장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화들짝 놀라면서도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김 순경은 달랐다. 신우의 작전이 적중했는지 그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해갔던 것이다.
“네.”
무안해진 주희가 모기 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도 실장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만세! 우리 주인님이 드디어 결혼하신다! 우히히힛! 얼른, 얼른 가보세요. 두 분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작은 주희 님도 빨리 생길 거 아니에요.”
“도 실장님!”
흑심이 빤히 보이는 도 실장의 말에 주희가 빽 고함을 질렀지만 도 실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신우의 등을 떠밀 뿐이었다.
“작은 주희?”
신우는 도 실장의 단어 하나에 완전히 꽂혀 주희의 상기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장 공간이동하고 싶은 걸 주희에게 들은 말이 있어 차마 공간이동은 못 하고 책방을 나서자마자 날듯이 차를 향해 달렸다.
오늘도 현와원은 뜨거운 숨결이 오고 가는, 길고 긴 낮과 밤이 예약됐다.
* * *
“50!”
“30!”
어느 골동품점 안에서 한 중년 아주머니와 가게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좋아요, 45! 봐요, 여기 이런 특이한 모양의 향로를 어디 가서 구해요? 이런 건 충분히 50도 가능한 거 아니에요?”
“40! 더는 안 됩니다. 모양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이건 뭐, 어느 시대에 사용하던 것인지 가늠도 안 되고, 무엇보다 문양이 악귀 형상이잖습니까? 어느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사용했는지도 모르죠. 이런 걸 40만 원이나 주고 들여놓는 것도 사실 모험이라고요. 더는 쳐줄 수 없으니 싫으시면 그만 가져가십시오.”
골동품점 주인이 딱 잘라 말하자 아주머니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아, 알았어요. 40! 40만 원으로 해요.”
“이거 정말 많이 쳐드리는 겁니다. 다른 집에 가면 이렇게 못 받아요.”
주인이 덜컥, 금고를 열어 40만 원을 꺼내더니 아주머니에게 내밀며 인심 썼다는 듯 말했다.
탁, 돈을 채간 아주머니가 착착착 소리가 나게 돈을 세 액수를 확인했다.
“알았다고요. 아저씨 정말 장사 잘하세요. 갈게요. 수고하세요.”
금액을 확인한 아주머니는 비꼬듯이 인사를 하고는 바로 가게를 나섰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가게 주인의 덕담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온 중년 여인은 가게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야 얼굴에 화사한 꽃이 폈다.
“이게 웬 횡재야. 세상에, 그까짓 고물 향로가 40만 원이라니.”
최 씨가 죽어 있는 걸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게 무슨 난린가 싶었는데, 최 씨를 데려간 경찰들이 최 씨가 무연고자라는 사실을 알려온 때부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연고자가 없다는 말은 보증금을 내달라고 할 보호자도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게다가 방을 치우기 위해 짐을 정리하다 다른 건 다 고물상이나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지만 방에 엎어져 있던 향로만큼은 왠지 오래된 것 같아 혹시나 해서 가져와 본 길이었다.
“문화재연구소 소장인가 하는 사람 집에 취업했다고 하더니, 설마 거기서 가져온 거 아냐? 에이, 몰라. 난 그냥 쓰레기를 치웠을 뿐이야.”
중년의 아주머니가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골동품 가게 안에도 희열에 들뜬 남자가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굉장한 걸 얻은 것 같은데 좀 더 알아봐야겠어. 주인만 잘 만나면 최소 열 배는 부풀릴 수 있겠는걸? 아주 좋아. 이 튀어나올 듯한 악귀 형상이 특히. 이쪽 계통 좋아하는 매니아가 누가 있었는지 찾아봐야겠어. 아침부터 이게 웬 횡잰지. 흐흐.”
고물상에 버려져 어느 고철 가게로 갔으면 좋았을 향로가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다시 인간계를 떠돌게 됐다.
언제 어느 때 누구의 손에 들어가 다시 향을 피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향로는 기대하고 있었다.
언제고 다시 진득한 혈향이 피어오를 날을.
* * *
현와원 전체가 잠에서 깨어난 듯 떠들썩했다.
“종우야, 접시!”
그중에서도 현와원의 주방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쉴 새 없이 지펴대는 화력 때문에 찜통 같았다.
“옙! 준비됐습니다.”
“하객들은 어느 정도 도착했지?”
종우가 준비해 놓은 접시에 스테이크를 옮겨 담자 주방장이 물었다.
“그게, 이상합니다. 분명 100명분 이상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도착하신 하객이 50여 명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이제 곧 식 시작 시간인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성 박 회장님의 결혼식인데 청첩장을 받고도 오지 않았다는 거야?”
“그게, 지금 오신 분들도 대부분이 일반인들 같은데요. 한성 임원진이라곤 차 실장님과 몇 분 외엔 보이지 않습니다.”
“뭐지? 혹시 우리 박 회장님의 입지가 위험해졌다거나……. 아냐, 아냐. 그런 소문은 없었어. 회사가 전보다 더 잘나가고 있다고 하던데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누구한테도 결혼식 얘기를 하지 않으셨다는 말인데, 그럼 100인분 음식은 누가 먹는 거지?”
“저도 그게 잘……. 어쨌든 이것만 나가면 모든 플레이팅이 끝납니다.”
“그래, 어서 가지고 나가.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우리야 뭐 주문받은 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지. 사모님 음식이나 따로 잘 챙겨. 몸도 약해 보이시는데 오늘 많이 힘드실 거 아냐.”
“네. 좋아하시는 전복죽이랑 입가심하실 만한 것들 몇 가지 침실로 들여보냈습니다.”
“잘했어. 참, 화선이는 어떻게 됐어? 다른 곳에 취직된 거야?”
“그게, 취직했다고 해야 할지.”
종우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화선이 이상해졌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경찰서에 다녀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다시 본 화선은 예전에 그가 알던 화선 같지가 않았다.
어디 클럽에 나간다고 들었다. 옷차림도 화장도 예전의 화선이 아니었는데, 무엇보다 그를 보는 화선의 시선이 달랐다.
마치 비루한 강아지 쳐다보듯 차갑게 쳐다보던 화선의 시선이 너무 메말라 있어 무섭기까지 했다.
“취직했으면 됐지, 뭐. 그나저나 현와원 직원은 언제 보충해 준다니? 요즘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게 생겼구만. 차 실장은 말 없어?”
주방장이 예전에도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땐 레스토랑을 알아보고 있었기에 지금도 당연히 레스토랑에 취직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굳이 클럽에 나간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이젠 딴 세계에 사는 것 같은 화선이었으니까.
아마 그도 다시는 찾아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구하고 있대요.”
“그래? 잘됐군. 아, 얼른 가져가.”
“넵, 마지막 세팅하고 오겠습니다.”
김이 나는 스테이크를 든 종우의 가벼운 발걸음이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정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신우는 서재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겹겹이 껴입은 옷 위, 자줏빛 바탕에 현무의 수가 놓인 혼례복을 입은 명부신이 거기에 있었다.
명부에서도 거의 입는 예가 없다는 이 혼례복을 아버지가 이번만은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라며 명부에서 직접 제작해 가져오셨다.
발목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구조가 불편했지만 혼례복이라는 한마디에 입었다.
드디어 결혼식이다.
주희와 이미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결혼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남달랐다.
마치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 행위인 것만 같았다.
결혼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히 주희가 떠올라 침실로 그녀를 데리러 가려 할 때였다.
서재 중앙에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기가 느껴져 멈칫 걸음을 멈췄다.
팟!
갑자기 서재에 근엄한 인상의 중년 사내 모습을 한 천계신이 나타났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아마도 주희의 아버지인 옥황상제인 듯했다.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제님.”
바싹 긴장했지만 주먹을 꽉 쥐며 인사를 했다.
“내가 오지 않았어도 식을 강행했겠지?”
“죄송합니다.”
“고얀! 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나?”
상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우를 노려보며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신우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지긴 했으나 곧 다시 회복했다.
“제가 많이 모자라 마음에 자치 않으신다는 건 알지만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주희 옆엔 제가 있어야 합니다.”
“자네와 달리 주희는 칼을 가지지 못했네. 그저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하는 능력만이 저 아이가 가진 전부지. 인간이 가하는 위협 정도야 방어할 수 있겠지만 인간계에 인간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주희를 그 위험 속에 주저앉혀 놓아야겠나?”
상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당연하게 가지는 불안이고 노여움이란 걸.
하지만 주희를 놓겠다는 말은 상상으로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제가, 주희의 칼이 되겠습니다. 제가 그녀를 지킬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고집스럽게 같은 의미의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주희의 칼이 되겠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상제가 되묻는 말의 의미를 몰라 신우는 한동안 무례할 정도로 상제의 눈만 빤히 쳐다봤다.
“내 말 못 들었나? 주희 앞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자네가 언제 어느 때든 대신 칼이 되어 줄 수 있는지 물었네.”
“네. 제가, 제 목숨을 대신해서라도 그녀를 지켜내겠습니다.”
“잊지 말게. 방금 한 맹세는 천계의 상제와 한 맹세란 걸.”
“맹세합니다. 주희의 방패가 되고 칼이 되겠습니다.”
“됐네. 그 말을 꼭 듣고 싶었네. 주희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주희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 그만 가보게. 난 정원에 나가 있겠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식적인 상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주희와 결혼해도 좋다는.
감사를 말하는 신우의 목소리가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상제는 그런 신우를 잠시 바라보다 홀로그램 꺼지듯 사라졌고, 신우는 펄럭거리는 혼례복을 휘날리며 주희에게로 달려갔다.
확, 노크도 없이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
신우는 순백의 하늘거리는 혼례복을 입은 주희를 보고는 자신이 왜 뛰어왔는지도 잊고 멍하니 주희만을 바라봤다.
“와아, 명부의 혼례복은 굉장하네요. 당신이 원래부터 멋진 건 알았지만 오늘은…… 정말 최고로 멋지네요!”
주희가 대놓고 하는 칭찬에 귀가 간질거리고야 정신이 돌아왔다.
“당신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우주 최고 잘난 놈인 거 같아서 갈수록 콧대가 높아져.”
“무슨 말이에요. 당신은 처음부터 우주 최강이었어요. 콧대 높아도 돼요. 어때요? 오늘은 나도 쫌 예쁜 거 같지 않아요? 천계 옷이 원래 좀 거추장스러운데, 이 옷은 너무 예뻐서 참을 만하네요.”
“예뻐. 당신이야말로 우주 최강으로 아름다워. 내 눈이 멀어 버릴 만큼 예뻐. 더 예뻐지진 말았으면 좋겠어. 누가 채갈까 봐 겁나.”
“우와! 나 이런 낯뜨거운 칭찬은 처음 들어 봐요. 제발 이런 얘긴 우리 둘이 있을 때만 해요.”
너무도 진지하게 대답하는 신우의 말에 주희가 확 달아오른 두 볼의 열기를 가라앉히느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예쁘게 눈을 흘겼다.
“진심이야. 너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어.”
“설마, 지금 또 흑심 있어서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죠? 방금 전에 새미 다녀갔다고요. 언제 나오냐고 난리래요. 우리 당장 안 나가면 하객들이 아우성칠 거라고요.”
“그럼 당장 가야지. 방금 전에 상제님께 결혼 허락까지 받았는데 잘못되면 안 되지. 자, 가실까요, 여왕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찾아갔었어요? 그런데 결혼 허락을 하셨다고요?”
주희는 신우의 표정을 세심히 살피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나 신우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해서.
“내가 너의 기사가 되겠다는 전제하에 허락하셨지만. 내 소원이 너만의 기사가 되는 것이었으니 난 또 다른 소원까지 이룬 셈이지. 너의 곁에 있어도 좋다고 하셨어.”
신우가 티 하나 없이 맑은 웃음을 웃으며 상제의 허락을 자랑이라도 하듯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마음속에 내내 남아 있던 응어리가 신우의 속삭임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주희의 얼굴에 눈부신 햇살의 반짝임을 닮은 미소가 화사하게 번져갔다.
손을 맞잡은 주희와 신우가 하나 되는 맹세의 행진이 시작됐다.
두 신 앞에 펼쳐질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오직 두 신의 선택에 달렸다.
주희는 천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간을 돌보는 신이 되길 거부했다.
그녀는 남은 생을 인간과 함께하며 바로 곁에서 위로하는 신으로 남길 원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눈앞에 절망만이 비친 누군가의 옆에서 조용히 손잡아 줄 수 있는 신이길 원했다.
그로 인해 때로는 위험이, 때로는 아픔이, 때로는 슬픔이 그녀를 지치게 할지라도 그녀는 인간들의 편에 서서 기도하고 보살펴 주는 신의 길을 선택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돌보는 천계신과 죽은 영혼을 관장하는 명부신의 엎치락뒤치락 인간 돌보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