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18/20)

15장

“다녀오세요.”

“그래, 다녀오마. 음, 그런데 주희야. 오늘도 박 회장 우리 집에 오는 거냐?”

이 박사가 외출하기 위해 막 책방을 나가려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주희를 빤히 쳐다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아, 아마도요.”

사실 좀 이따 점심 먹으러 온다고 했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얼버무렸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담긴 의미를 몰라 당황스러웠다.

최근 신우는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었다.

신우가 아버지에게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고, 괜찮은 사람으로 비쳤으면 좋겠기에 그녀도 옆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항상 신우를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또 먹을 거 잔뜩 사들고 오는 거겠지? 우리 딸 좋은 거 먹게 해주는 건 좋은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생각이라더냐?”

“아, 그, 그게…….”

아버지의 말투가 더 까칠해진 걸로 보아 아무래도 신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라는 생각에 크게 낙담할 때였다.

“거참, 생긴 것보다 되게 무딘 놈일세. 난 또 조만간 발굴 현장에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프러포즈를 할 거면 얼른 할 것이지, 무슨 놈의 뜸을 저리 들이는 게냐?”

프러포즈?

주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 알고 계셨어요?”

“내 눈이 장식은 아니니까. 그리고 전에 발굴 현장에서 박 회장이 널 대신해 다쳤잖느냐. 박 회장이 냉혈한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네게 마음도 없는 놈이 제 몸을 그런 식으로 희생하진 못하지.”

“그래서,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내 딸을 제 목숨보다 우선시하는 놈을 또 구하긴 쉽지 않을 테니, 너만 좋다면 난 찬성이다. 무엇보다 네 눈이 항상 그놈을 따라다니더구나. 괘씸하게 말이지.”

이 박사는 허락을 하면서도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마지막엔 결국 볼멘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마워요, 아버지.”

“어쨌든 눈치가 맹탕인 놈 같으니 네가 적당히 언질을 주도록 해라. 이번 주 안에도 그 모양이면, 판단력이 부족한 놈으로 간주해 버릴 거라고. 다녀오마. 아참! 저기 테이블 위에 치한 퇴치용품 가져다 뒀다. 새미랑 하나씩 나눠 가지도록 해라. 세상이 어찌나 험악한지, 원.”

그저께 새미에게 일이 생겼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들이 뒤를 따라오다 덮치려 든 것이다.

다행히 지나가던 누군가가 엄청난 무위를 지닌 사람이라 무사하긴 했지만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진 당장 치한 퇴치용품을 주문하셨고, 그 결과물이 저 종이상자인 듯했다.

“네. 새미한테도 가져다줄게요. 다녀오세요.”

딸랑!

아버지를 배웅한 주희는 상자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스프레이 같은 건가?”

테이프로 봉해진 종이상자를 뜯기 위해 커터칼을 찾으려 책상을 뒤질 때였다.

“어? 이거 벌써 도착했네요.”

도 실장이 언제 들어왔는지 테이블 위의 상자를 보며 반가워했다.

지이익!

커터칼도 없이 잘도 상자를 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석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뒤룩 굴리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거 아세요, 주인님? 박사님이 스프레이로 하자시는 걸 제가 박박 우겨서 전기충격기로 하자고 했어요. 그것도 아주 강력한 놈으로요.”

“전기충격기요? 그거 잘못하면 사람이 죽거나 그러는 거 아니에요?”

“호신용품인데 죽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그런 나쁜 놈들은 전기로 온몸을 지져봐야 정신을 차린다고요. 흐흐. 오, 이거 정말 좋은데요. 간편하고. 어디 한번 시범을…….”

도 실장이 스위치를 켜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석을 쳐다봤다.

카아아악!

석이 꼬리를 타다닥 쳐대며 분노를 표했다.

“설마 너한테 그러겠냐? 넌 이거 맞으면 죽어. 성인 남자들 기절시키는 용이거든. 자요. 하나는 주희 님 거, 하나는 새미 씨 거. 꾹 누르기만 해도 전원이 켜지니 조심하시고요.”

도 실장이 전해 준 손에 맞춤한 충격기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신기해하며 반복했다.

“자꾸 그러면 배터리 나가니까 적당히 좀 하세요.”

“알았어요. 이거 새미 갖다주고 올게요.”

“얼른 오셔야 해요. 수제비 끓일 거니까요.”

“금방 올 거예요. 아! 신우 씨도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 수제비 양 넉넉하게 해주세요.”

신우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도 실장에게 수제비를 부탁하는 주희의 미소가 오늘따라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이그, 머플러 하고 다니시라니까요. 밖에 춥다고요. 그리고 내가 몇 번 말합니까? 여자는 좀 적당히 내숭도 부리고 그래야 남자들이 더 애가 단다고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주희가 베이지색 외투 단추를 채우자마자 나가려는 것을 도 실장이 붙들어 머플러를 칭칭 감아 주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좋은 걸 어떻게 숨겨요? 난 도 실장님도 무지 좋아하는걸요. 머플러 고마워요, 도 실장님. 다녀올게요.”

머플러에 고개를 폭 파묻고 책방을 나서던 주희가 던진 한마디에 남겨진 도 실장의 얼굴이 따끈한 화덕처럼 화악 달아올랐다.

“아니,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나. 석아, 넌 어떻게 생각해?”

파닥파닥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봐도 열기가 가시지 않자 차가운 석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

“내가 말이야, 난 석이 너도 무지 좋아해에에! 하면 기분 좋아?”

도 실장이 주희 흉내를 내며 말랑한 목소리를 냈다. 그랬더니 석이 곧바로 카악,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서 도망쳤다.

“음, 역시 좋아하는구나.”

석의 반응을 그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도 실장은 다음엔 자신도 꼭 주인님 좋다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책방 일을 시작했다.

* * *

“이주희 씨?”

주희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제법 멀리 떨어진 큰길에 세워진 차 안에서 중년의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며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였더라 생각하다, 가만히 떠올리니 신우의 회사 사람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무슨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다가서길 기다렸다.

그런데 김 이사의 뒤를 이어 내린 한 사람 때문에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어머, 저 여자 봐. 이 추위에 저런 미니 드레스를. 쿡쿡, 미쳤나 봐.”

“미치긴, 딱 보니까 밍크코트 자랑질하고 싶어서 입었네. 뭐, 예쁘긴 하네.”

“핏, 예쁘긴! 저거 봐, 저 팔의 문신! 저런 걸 하는 여자가 그냥 예쁘기만 하겠어?”

주희의 시선만 붙잡은 것이 아니라 지나가던 여인들의 시선도 붙잡은 모양이다.

그들은 연말 시상식 포토라인에나 설 것 같은 차림의 여자를 향해 노골적으로 숙덕거려 댔다.

“같이 가요, 이사님!”

밍크코트 여자가 숙덕거리는 여인을 살벌하게 노려보더니 짜증난 목소리로 김 이사를 부르며 다가갔다.

여자가 저렇게 다급하게 부르는데도 김 이사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주희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여자와 김 이사를 번갈아 쳐다보던 주희가 더 무안해져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 안녕하세요?”

“뵙기가 무척 힘든 분이군요?”

당황한 그녀와 달리 김 이사는 빙긋 웃기까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게다가 인사말까지 이상했다.

책방을 찾기만 해도 만날 수 있는 그녀인데, 뵙기가 힘들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절 찾아오신 건가요?”

“그래요.”

혹시 신우가 보내서 왔을까, 하는 생각에 물으려 할 때였다.

큰길가에 줄줄이 세워진 차들 중 맨 뒤에 까만 세단 한 대가 더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그녀도 몇 번 신세를 진 적이 있는 신우의 차였다.

“점심만 먹고 갈 거야. 넌 회사 업무 끝났으면 여기 남아서 주희를 경호하도록 해.”

차가 멈추자마자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신우가 운전석에 있는 응산에게 지시했다.

이가서림에 있는 한 어떤 경호원을 둔 것보다 안전할 테지만 만일을 대비해 경호원을 둬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주희 님이 움직이실 때만 따라붙도록 하겠습니다.”

신우가 차에서 내리며 하는 말에 응산이 같이 따라 내리면서 대답했다.

“되도록 책방엔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게, 도 실장 때문이야? 혹시 도 실장이 검을 잃어버렸다는 게 너와 연관이 있는 건가?”

“그냥 오해가 좀 있었을 뿐입니다.”

“오해면 풀어야지, 피하기만 한다고 해답이 나오진 않아. 도깨비들끼리의 일이니 누가 관여할 일도 아니긴 하지만, 도 실장의 기분이 안 좋아지면 그 여파가 주희에게……. 어? 주희다!”

응산에게 충고 아닌 불만을 토로하며 차에서 내리던 신우가 하던 말을 멈추고 눈동자를 키웠다.

그리곤 자동반사적으로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그런데 누군가 주희에게 다가서고 있었고, 그 뒷모습이 왠지 김 이사를 닮은 것 같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걸음을 빨리해 주희에게 다가가려는데 두 여인이 지나가면서 한 소리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와, 개살벌한 거 봐. 저 오른팔 문신, 역시 저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저 밍크코트도 아마 저 앞의 중늙이가 사준 게 분명해.”

오른팔 문신이라는 단어가 들려왔을 때, 신우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차사가 말했던 배지와 함께 오른팔에 나타난다는 현무의 인.

그건 그가 명부에서 영묵이라는 낯모르던 신과 싸웠을 때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같이 가요, 이사님!”

게다가 여인의 뒷모습도 어딘가 낯익다 생각했더니 목소리를 듣고는 더 확실해졌다.

현와원의 직원, 화선이라고 했던가?

마지막 날 서재에서 주방직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문신을 했다는.

그날, 서재에 귀신상자가 나뒹굴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기억해낸 신우의 표정이 더욱 냉랭해졌다.

걸음을 빨리해 밍크코트를 입은 여인의 오른팔을 확 잡아챘다.

“……!”

“꺄악! 뭐 하는 개자……. 박 회장님?”

여자가 비명을 지르든 욕을 하든 중요치 않았다. 짧은 밍크코트 아래 반쯤 드러난 문신을 확실히 보기 위해 팔을 휙 걷어 올렸다.

문신이 현무의 모형을 본뜨긴 했으나 그건 그의 표식이 아니었다.

영묵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안도감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섬찟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저도 모르게 주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탕!

“꺄아아악!”

난데없이 울린 총성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 그리고 세상이 뒤엎어지는 기상이변이 들이닥쳤다.

천문 예고에도 없던 개기일식이 일어나 낮이 밤이 되고 벼락이 떨어졌다.

번쩍! 우르르르 쾅!

신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순간, 검고 검은 현무의 검이 번개의 기운을 뿜으며 김 이사의 몸을 갈랐다.

“꺄아아악!”

사람들이 기절할 것 같은 비명 소리를 질러댔지만 신우에겐 들리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 채 떨리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는 주희의 무너지는 몸을 받아 안기 급급했다.

그의 세상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더는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주인님!”

총소리와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도 실장의 절규 소리가 다른 세상의 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주희의 가슴에서 시작된 피가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베이지색 코트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여 가고 있었다.

코트와는 반대로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주희의 얼굴이 신우를 점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

주희를 불러야 하는데, 숨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신…… 신우…….”

“아, 안 돼. 말하지 마. 지금 병원에 데려갈 테니…… 제발……. 안 돼…….”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의 피가 더 많이 쏟아져 나왔다.

지혈하기 위해 다급하게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렀는데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넘쳤다.

선뜩한 한기가 뇌를 마비시키는 것만 같았다.

“주인님!”

“……주희야…….”

도 실장이 미친 듯이 주희를 불렀고, 신우의 입에서 꺼져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제발…….”

뭔가를 말하려는데 말하지 못하고 가쁜 숨만 내쉬고 있던 주희의 눈동자가 갑자기 공포로 더 커진 게 보였다.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의 뒤에 김교진 이사의 영혼과 명부신 영묵이 있다는 걸.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분노로 화한 건 순식간이었다.

『히익! 저, 저게 뭐야? 왜, 왜 내가…….』

『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시체를 본 김 이사의 혼이 놀라 까무러치듯 외쳤고, 영묵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으드득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듯 신우의 여자를 죽이고 곧바로 혼을 거둘 생각이었다.

정면에서 총을 발사해 확실하게 숨을 끊어 놓을 수 있게 된 것까진 계획대로였다.

그런데 쓰러지던 그녀가 김 이사의 팔을 붙잡았다 생각한 순간, 느닷없이 전기충격이 가해진 탓에 혼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 순간적인 흠칫거림에 신우의 검이 김 이사의 몸을 갈라 버렸다.

기를 숨길 수도 없을 만큼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영묵의 존재가 벌겋게 민낯으로 드러났다.

『그때…… 더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어린 시절, 그 아이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 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미 그의 기운을 감지한 염라의 추적이 시작됐을 게 뻔했다.

순간 영묵의 눈동자가 야비한 빛을 발했다.

여자를 끌어안은 채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도망이 가능할 것도 같아 보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기를 끌어모아 슬그머니 신우의 뒤로 다가섰다.

죽어가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미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 말을 하지 못했다.

영묵의 입가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력을 다해 신우의 등에 쏘아 보냈다.

텅!

영묵이 쏘아낸 힘이 마치 투명막에 부딪힌 듯 튕겨 나갔다.

파츠츠츠!

그리고 검고 검은 현무의 검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갈랐다.

『헉!』

현무의 검에 몸을 관통당한 영묵이 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쓰러졌다.

주희를 마지막 순간까지 공포로 몰아넣은 존재 때문에 신우는 분노로 정신을 놓았다.

눈앞에 번져가던 주희의 시뻘건 피가 신우를 자비라곤 없는 어둠의 신으로 바꿔 버렸다.

『으아아악! 바, 박 회장이! 카, 칼을……. 으아악! 난 아냐. 난 그냥 명새미를 죽이라고 했을 뿐이지 이주희를 죽이라고 하진 않았어. 으아악!』

가슴이 뻥 뚫린 영묵을 본 김 이사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오는 신우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상실한 명부신의 손을 피해 가진 못했다.

“하지만 주희를 쏜 건, 김교진 너의 손이었다.”

신우가 손을 뻗어 김 이사의 영혼을 붙잡았다.

끼아아악!

순간 김 이사에게서 사람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괴성이 흘러나왔고, 김 이사의 영혼이 온통 빛 속에 갇혀 빙글빙글 돌며 작아져 갔다.

파괴의 손.

신의 힘이 돌아오면서 저주의 능력까지 되찾은 게 확실해졌다.

김 이사의 영혼이 구슬만큼 작아졌을 때였다.

팟!

또 다른 신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염라대왕이 나타났고, 뒤이어 강림차사와 전륜차사도 나타났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과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신우의 모습에 염라대왕과 강림차사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게…… 이게 다 무슨…….』

전륜차사만이 주희를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끅끅!』

쓰러진 영묵에게서 쇠 긁는 것 같은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끅끅……. 니, 니놈만, 니놈만 아니었어도…… 그 자린 내 자리였…….』

영묵은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면서도 끝까지 염라대왕을 향해 원한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으득 이를 갈았다.

『이놈! 내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느냐? 원로들이 네가 가진 신의 힘보다 네 욕심이 더 크니 너에게 금제를 가해야 한다고 했을 때다. 그때, 원로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걸 지금도 후회한다. 그랬으면, 그때 무율을 잃는 아픔도 겪지 않았을 테고, 앞으로 무율이 겪어야 할 아픔도 지금과 같진 않을 테니까.』

염라대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영묵을 무거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받아쳤다.

대왕으로서 지녀야 할 자질 중에 자비가 첫 번째라고 했으나 영묵만큼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또다시 죽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슈각!

염라대왕의 언월도가 마지막까지 분노를 뿜어내고 있는 영묵의 몸을 스쳤다.

영묵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공기 중의 먼지가 되어 흩어져 갔다.

“신, 신우…….”

실낱같이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주희의 부름이 신우의 정신을 되돌렸다.

“주……희야…….”

어느새 돌아와 주희의 곁에 꿇어앉은 신우였지만 목이 잠겨 주희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녀의 손만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으로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

“당신…… 검…….”

주희가 떨리는 눈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륵,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꺾였다.

“안 돼…….”

“주인님! 어흐흑! 주인님!”

신우가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 꽉 붙들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고, 도 실장이 오열하며 주희를 불러댔다.

그때, 스윽 주희의 혼이 몸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신우도, 도 실장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어흐흑!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주인님!”

도 실장이 어린애처럼 울어댔지만 신우는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주희의 혼령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신우 씨.』

주희가 자신의 시체를 붙든 채 굳어 있는 신우를 향해 다가가려 할 때였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난, 난…… 내 손이……. 널 죽일 거야. 널…….”

버럭 고함을 지른 신우가 손을 뒤로 감추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신의 힘이 돌아왔다.

방금 전에도 확인했지만, 신의 힘이 돌아왔다는 건 영혼을 파괴하는 저주의 힘도 돌아왔다는 뜻이다.

주희의 혼이 파괴되면, 다음 생도 없었다.

다음 생의 주희는 그가 아는 주희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살아 있길 원했다.

누구라도 도와주길 바랐다. 누구라도.

넋을 놓은 그의 눈에 아버지가 비쳤다.

“아버지…… 제발…… 도와주십시오.”

신우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채지도 않고 울지도 않던 녀석이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만 가자. 이제 벌은 끝났다.』

신우가 더 아파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제 곧 천계에서 누군가가 주희를 데리러 오겠지만, 지금 신우에겐 그 시간조차 너무 힘겨워 보여 주희를 재촉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희는 신우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다가섰다.

“오지 마! 오지 마! 제발 오지…… 마라.”

신우가 힘으로 그녀를 튕겨냈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겐 통하지 않았다.

주희가 손을 뻗어 그대로 신우의 목을 껴안았다.

신우는 혹시라도 그녀가 사라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손을 앞으로 뻗지 못했다.

『쉬이,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당신 손은 누구도 해치지 않아요. 괜찮아요. 당신 손은 아주 특별한 손인걸요. 방금 그건 정화의 불꽃이에요. 어둠을 정화하는 아주 특별한 불꽃요.』

주희의 말에 같은 공간에 있던 모든 신과 도깨비들의 놀란 시선이 이젠 작아져 작은 구슬만 해진 불꽃으로 향했다.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작았지만 김 이사의 영혼은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

『저놈을 데려가라.』

염라대왕의 말에 당황한 시선으로 보고 있던 강림차사가 움직였고, 손짓 한 번에 김교진 이사의 작은 불꽃이 영혼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화의 불꽃.

그건 전설로만 전해지던 능력이었다.

염라대왕조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에 단순히 영혼을 파괴하는 어둠의 능력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화의 불꽃은 천계의 능력이었다.

『어떻게.』

자신은 뼛속까지 명부신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린은 분명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라 생각했다.

염라대왕은 갑자기 자신이 알고 있던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망연해졌다.

“주희야.”

그녀의 설명에도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 신우는 손을 뻗지 않았다.

주희는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없는 걸 알고 그에게 명령하듯 약속의 말을 했다.

『기다려요. 곧 돌아올 테니.』

그 말이 끝난 순간, 주희가 있는 공간만 어둠이 갈라지고 하늘길이 열렸다.

하늘에서 쏘아져 내려온 섬광이 모두의 눈을 멀게 하고 주희를 데려가 버렸다.

슈팟!

그리고 다시 빛이 사라졌을 땐, 한 사람의 존재만이 애초에 여기 없었던 것처럼 지워졌다.

주희의 영혼도, 주희의 시체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주희야! 주희야!”

“주인니이임!”

신우와 도 실장이 한 사람을 애타게 불렀지만 그 주인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들을 어두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염라대왕이 눈짓하자 강림차사가 빠르게 움직여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모두가 사라졌다.

응산만이 망연해진 표정으로 엉망진창이 된 사태 수습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아버지였다니…… 그런데도 일을 이따위로…….”

신우가 염라대왕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응산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냉정하기로 유명한 명부신들이라지만 일을 이따위로 엉망으로 처리하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 잃은 것같이 넋을 놓고 있는 제 주인은 어쩌란 말인지.

응산은 속으로 염라대왕에게 욕을 퍼부으며 신우를 이가서림으로 데려가 도깨비길을 통해 현와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와 경찰에 신고를 했다.

쓰러져 있는 김 이사의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기에 인간들에게는 단순 심장마비로 기록될 터였다.

문제는 도칠, 도 실장이었다.

“어흐흑, 어흑. 어떡해! 우리 주인님 어떡해. 엉엉엉! 시체조차 사라졌어. 우리 주인님, 인간으로 태어나서 나쁜 짓이라곤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왜. 왜? 어흐흐흑!”

이게 가장 문제였다.

시체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세상에선 실종으로밖에 처리가 안 되는데 그러면 남겨진 사람들이 더 힘들 터였다.

“꺄아악! 이, 이게 뭐야? 김 이사님이 왜?”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화선이 쓰러진 김 이사를 보더니 비명을 질러댔다.

곧 119와 경찰차가 도착했고, 화선은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으러 가면서도 자신은 아니라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아니야!”

* * *

현와원에 해가 뜨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다.

신우는 긴 잠을 잤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마치 시체처럼 잠을 잤다.

“기다릴게. 곧 돌아온다고 했으니…….”

주희의 마지막 말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그는 깊은 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의 정신은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당장 명부를 뒤집어엎어서라도 주희의 혼을 되찾아오고 싶어졌다.

일어나 움직이면 의식하지 못한 채 명부를 찾게 될까 두려워 이렇게 매일 뜬눈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똑똑!

문밖의 기척에 이미 응산이라는 걸 알았지만 노크 소리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응산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둘 터였다.

“신우 님, 이 박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굳이 방문자를 밝히는 응산의 말에 이번엔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첫날에도 찾아오셨던 것 같은데 그날은 그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어서 응산이 들여보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의 아버지였다.

아마 자신보다 더 힘겨워하고 있을 사람.

아무런 위안의 말도 해줄 수 없었지만 만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 박사에게 그는 실종된 딸의 남자친구였으니까.

달칵, 방문을 열자 응산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덤덤해졌다.

“서재에 계십니다.”

신우는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한 채 유령처럼 서재로 향했다.

그곳에 웬 노인 한 분이 서 있었다.

외부 일로 검게 타긴 했으나 언제나 건강미가 넘쳐나던 건장한 체구의 이 박사가 갑자기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초췌해진 모습으로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미안하네. 자네도 힘들 텐데……. 내가…… 자네 말곤 더 이상 물어볼 곳이 없어서 왔네.”

언제나 우렁차게 큰 소리로 얘기하시던 분이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앉으십시오.”

순간 이 모든 게 다 그의 죄인 것만 같아 목이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애써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이 박사는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 앉지 않았다.

“실종 신고를 했는데…… 경찰에선 가출일지도 모르니 좀 더 기다려 보자더군.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주흰 가출을 할 아이가 아니네……. 동네 마트엘 갈 때도 얘기를 하고 가는 아이네. 그런데 이렇게 오래도록 집을 비우면서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니…….”

신우가 마지막 희망의 끈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박사는 신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횡설수설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네가 왜 미안한가. 연락도 없이 사라진 건 주희인데. 그래도 혹시나 자네는 아는가 싶어 찾아왔네. 우리 주희가 어디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나, 어디 꼭 가야 할 곳이 있나 해서…….”

“모릅니다…… 아무것도……. 그녀는 그냥 기다리라고만 했습니다. 곧 돌아온다고…….”

이 박사의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도 강렬하게 와닿아 신우는 현재 그의 유일한 희망인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무슨 말인가? 우리 주희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겐가?”

갑자기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난 건지 이 박사가 신우의 어깨를 꽉 붙들며 초췌한 얼굴에 눈만 반짝이면서 물었다.

“아무것도……. 그냥 기다리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차마 그게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른다는 말은 잇지 못했다.

“아닐세. 그 아인 한 번도 빈말을 한 적이 없네. 그 아이가 그리 말했다면 반드시 돌아올 걸세. 허허, 그랬군. 주희가 돌아온다고 말을 하고 갔어. 곧 돌아온다고…….”

이 박사가 말을 하다 갑자기 힘이 빠졌는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사님!”

“괜찮네. 걱정 말게. 그냥 다리의 힘이 풀렸을 뿐이네. 허허허. 그래, 내가 결혼 허락까지 했는데……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그래, 아무 말 없이 가버렸을 리가 없지. 허허. 그래그래, 곧 돌아올 거였어.”

마침내 희망의 끈을 붙잡았다는 듯 이 박사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허허로운 웃음을 웃었다.

결혼 허락을 하셨다.

이 박사의 몸이 무너져 내리듯 신우의 가슴도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네. 주희는 빈말을 하지 않지요. 약속도 저버리지 않고요.”

“그래, 자네도 잘 아는군. 그러니 꼭 올 걸세.”

아닙니다. 그녀는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그와 사랑의 서약을 맺었고, 아직 마지막 맞선도 끝나지 않았는데 주희는 더 이상 인간 세상에 없었다.

“이만 가야겠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알았으니 기다려야지. 자네가 날 위로하려고 한 말만 아니라면…….”

“분명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짓는 이 박사를 보며 신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지? 자네도 그만 마음 추스르게. 난 그만 가보겠네. 도 실장한테도 어서 이 소식을 전해야겠어. 최근에 나보다 더 시간을 많이 보내서 상심이 큰지 요즘 증세가 좀 이상했거든. 주희가 죽지 않았다고, 자신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다니네.”

이 박사가 툭툭, 그의 등을 두들겨 주기까지 하며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서재를 나갔다.

신우는 멍하니 서 있느라 배웅조차 하지 못했다.

‘도 실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우가 머릿속에 응산을 떠올리자마자 응산이 있는 곳으로 공간이동이 됐다.

“살펴 가십시오.”

응산이 이 박사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현와원의 차 중 하나에 타는 걸 보니 응산이 기사를 시켜 이 박사를 태워 보내는 모양이었다.

“어? 자넨 언제 따라 나온 건가? 주희라면 걱정하지 말고 자네도 이제 몸 좀 추스르게. 가보겠네.”

응산의 뒤에 갑자기 나타났지만 다행히 이 박사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신우는 조금 당황하며 인사를 했다.

부웅!

차가 출발하자마자 응산의 앞으로 다가서며 다짜고짜 물었다.

“응산, 도깨비는 계약이 끝나면 더 이상 현신하지 못하나? 어느 한쪽이 죽거나 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급하게 신우 님과 계약을 맺으려 했던 겁니다.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인간들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됩니다.”

“도 실장이 사라지지 않았어. 새 계약을 맺지도 않았는데.”

“그건, 사라지는 게 도깨비마다 달라서……. 좀 더 오래 현신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건 너처럼 강력한 도깨비나 그러겠지.”

신우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작정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제 찾아가서 억지를 부려볼 핑곗거리가 생겼다.

“명부에 다녀와야겠어.”

신우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고, 입에선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신우 님!”

응산이 기겁해 소리쳤을 땐 이미 신우가 인간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 *

염라대왕의 집무실이었다.

염라대왕은 며칠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오늘도 죽은 시체 놀이를 하고 있는 신우를 보고 왔다. 가장 우려했던 사태가 그대로 벌어지고 만 것이다.

신우와 주희는 서로 좋아해도 절대 같은 길을 갈 수가 없었다.

명부와 천계는 공기부터 달랐다.

둘 다 신계를 포기하고 인간계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상제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신우에게 주희의 얘길 전하지 않은 건 살아 있는 걸 알면서 보지 못하는 아픔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생각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염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할 때였다.

“전혀요! 시간은 절대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영혼을 적절한 곳으로 보내는 태산왕부의 태산왕이 갑자기 염라대왕의 집무실에 나타나 성질을 부렸다.

“태산왕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 말썽쟁이 영혼 하나 때문에 우리 태산왕부 전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걸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썽쟁이라면?”

“전생에 소정이었다는 영혼 말입니다. 천계로 보내 줄 테니 가라고 해도 안 가고, 온갖 권력과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하는데도 아직 저리 버티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기나 하면 그나마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길 때까지 참아 주려고 했는데, 이젠 아주 사사건건 대놓고 엉뚱한 간섭까지 해댑니다.”

“왜 가지 않겠답니까?”

“왜긴요? 아이가 선택한 여인이 아직 잠자리조차 하지 않아서지요. 이러다 제가 월하빙인 흉내라도 내야 할 판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무녀의 후예에게 저런 특혜를 줘야 하는 겁니까?”

“무녀의 후예 특혜 문제에 관해서라면 저한테 물으실 게 아니라 원로들을 찾아가셔야…….”

태산왕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염라대왕이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라며 냉정하게 사실을 말해 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익숙한 기의 흐름이 느껴져 하던 말도 멈춘 채 허공을 쳐다봤다.

팟!

신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명부 최고 화제의 주인공이 벌써 나타났군.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젯거린데 현무의 검까지 소환해냈다고 차사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인이 되었더라.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태산왕이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것 같은 친근한 눈으로 신우를 맞았다.

25년의 세월쯤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태산왕에겐 그냥 어제 같고 오늘 같은 모양이었다.

“이것 말씀입니까, 태산왕 님?”

신우도 인사를 생략하고 태산왕이 호기심을 드러내는 현무의 검을 바로 소환해냈다.

“오오, 과연 현무의 검. 하하하, 멋지구나. 그래,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냐? 곧 차사 시험이 있을 예정이라던데 잘됐구나. 뭐 본신의 힘만으론 이미 판관급인 것 같다만, 그래도 단계를 확실하게 밟는 게 좋겠지. 네 아버지가 그랬듯이 말이지.”

태산왕이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벙글벙글 웃으며 신우가 당연히 명부에 복귀한 것이란 전제하에 얘기하고 있었다.

“전 돌아올 생각이 없습니다.”

“뭐? 그럼 왜 온 것이냐?”

담담하게 대답하는 신우의 말에 태산왕이 이게 무슨 뜻이냐는 듯 염라대왕과 신우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러다 염라대왕의 표정이 심상찮은 것을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런 눈길로 신우를 봤다.

“영혼 하나를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주희를 돌려주십시오.”

신우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태산왕을 향해 직설적으로 주희를 요구했다.

태산왕은 영혼의 환생을 담당하는 판관이었다. 아직 주희의 혼령이 태산왕부에 도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곧 도착할 터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신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라 태산왕이 멀뚱거리며 쳐다보는데 염라대왕이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왕? 주희라면, 혹 그 아이 아닙니까? 25년 전에 대왕의 권한으로 즉결 심판을 내렸던…….”

“태산왕!”

태산왕의 말을 염라대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중간에 잘랐다.

그제야 태산왕이 흠칫 놀라며 모든 사실을 유추해냈다.

최근에 신우가 사랑한 인간 여자가 죽었다는 소문과, 하필이면 그 상대가 주희였다는 사실을.

염라대왕이 즉결 심판을 내렸던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건 염라대왕과 태산왕뿐이었다.

심판은 염라대왕이 내렸으나 환생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은 태산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산왕만은 주희가 명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태산왕의 표정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즉결 심판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주희는…… 주희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주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태산왕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신우는 어색해진 그의 표정에 갑자기 불안해져서 다그쳐 물었다.

“명부의 룰을 몰라서 그따위 요구를 하는 것이냐. 아직 정신이 들지 않은 모양이니 그만 다시 내려가거라.”

“……싫습니다. 주희를…… 주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주희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아버지의 반응도 이상했고, 태산왕의 표정도 이상했다. 표정 관리가 누구보다 잘되는 두 판관이 이같이 어색한 반응을 보일 때에는 뭔가가 있는 거였다.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고, 자연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츠츠츠!

신우가 쥐고 있던 현무의 검에도 번개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태산왕이 처음 현무의 검을 봤을 때보다 한층 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당장 검을 거두지 못할까!”

염라대왕이 엄한 목소리로 화를 냈지만 신우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싫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희를 만나야겠습니다. 주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뭔가가 있었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주희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확인을 해야 했다. 그래야 이 바닥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이 해소될 것 같았다.

“말로 해서는 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힘으로 눌러서라도 내려보내 주마. 정신이 들거든 다시 오거라!”

파창!

염라대왕이 엄한 목소리 훈계를 끝낸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언월도가 나타났고, 그대로 현무의 검과 부딪쳐 폭발했다.

챙! 챙! 콰창!

태산왕은 세기에 다시없을 명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리까지 피해 주며 눈에 이채를 발했다.

염라대왕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아직 차사직에도 오르지 못한 신우가 막상막하로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팟!

그때 가감 없이 뻗어 나간 힘의 기류에 강림차사와 전륜차사가 집무실에 나타났다.

“헉!”

“다시 보기 힘든 명장면이다. 잘 봐둬라.”

태산왕이 숨을 들이켜고 있는 두 차사를 향해 싱글싱글 웃으며 얘기했다.

말릴 생각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는 태산왕을 강림차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봤다.

“어허, 네가 지금 내 밑에 있지 않다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냐?”

“왜 말리시지 않는 겁니까? 저러다 정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강림차사가 여전히 불량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뚱하게 받아쳤다.

“좀 다치는 게 뭐 대수겠느냐. 어차피 곧 아물 텐데. 그보단 저 부자간의 합에 내가 끼어들 수 없다. 아들을 사랑해서 입 다물고 얘기해 주지 않는 것인데 내가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 그리고 무율의 행동도 이해가 가고. 제 여자가 죽었는데 화를 내지 않으면 그게 병신이지.”

태산왕이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힐끗 강림차사를 다시 쳐다봤다. 그리곤 다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두 신에게로 시선을 돌려 쿨하게 대답하며 이건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결전임을 분명히 했다.

“주희 씨를……. 저도 그게 묻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주희 씨는 어디로 간 거죠? 분명 인간계에서 사라졌는데, 명부를 다 뒤져 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륜차사가 저도 모르게 태산왕에게 소리쳐 물었다.

사실 전륜차사는 주희를 보기 위해 명부의 모든 곳을 다 뒤지고 다녔다.

그런데 찾지 못했다. 흔적조차 없었다.

순간, 갑자기 소리가 사라졌다. 칼날이 부딪치며 튀던 불꽃도 사라졌다.

“무슨 말이야? 주희가 사라지다니?”

목소리로 얼음도 만들어낼 것 같은 냉랭한 신우의 목소리가 전륜차사의 귓전에 울렸다.

“히익!”

“무슨 말이냐고. 주희가 보이지 않다니?”

전륜차사가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신우는 아랑곳없이 다시 다그쳐 물었다.

“아니, 난, 난…… 정말 나도 궁금해서 여쭤보는 거라고요. 명부를 다 뒤져 봤는데도 보이지 않아서…….”

전륜차사의 말에 신우의 시선이 자연히 태산왕에게로 향했다.

“대왕, 이제 더 이상 숨겨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눈으로 볼 거 없다.”

태산왕이 어깨를 으쓱하며 염라대왕을 봤고, 염라대왕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주희는 어디에 있습니까? 벌써 환생을 했을 리는 없습니다. 주희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신우가 끝내 칼부림을 할 때보다 더 싸늘해진 표정으로 염라대왕에게 대들었다.

“그 아인 이곳에 없다. 주희는 이미 네가 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제가 갈 수 없는 곳이 어딥니까? 혹 그녀가…….”

심장이 조여들었다. 아버지의 말이 뜻하는 바가 혹시라도 영원한 소멸을 의미할까 두려워 말을 잇지 못했다.

“대왕, 여기서 뭘 더 숨깁니까? 아들을 아주 잡고 싶습니까? 딱 보면 모릅니까? 무율은 영원히 없다고 생각되는 것보다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살아갈 수 있는 녀석이란 걸?”

태산왕이 보다 못해 중간에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태산왕에게로 쏠렸다.

“주희는 인간이 아니다.”

“네에에?”

전륜차사가 괴상한 소리를 질렀지만 태산왕의 말은 계속됐다.

“주희는 원래 천계신이다. 수명에 관여한 죄를 지어 잠시 인간으로 환생했을 뿐. 이제 그 벌이 끝났으니 천계의 사자들이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이다.”

“어? 어? 그, 그런…….”

“그러니 포기해라. 그곳은 명부신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숨만 쉬어도 7일을 넘기지 못한다. 물론 그 전에 결계에 갇혀 천계에 진입하지도 못하겠지만.”

전륜차사의 까무라칠 듯 놀란 버벅거림도, 태산왕의 협박에 가까운 엄포도 신우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신우에게 들린 말은 오직 한 가지 사실뿐이었다.

주희가 살아 있다.

팟!

신우의 신형이 촛불 꺼지듯 명부에서 사라졌다.

“으음…… 내 판단이 잘못됐던 모양이군요. 대왕이 뭘 걱정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태산왕이 염라대왕의 눈치를 보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내버려 두십시오. 직접 느껴봐야 그곳이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죠.”

말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염라대왕의 얼굴은 불안으로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 * *

신우는 머릿속에 주희만을 담았다.

천계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공간이동을 했더니 안개 속이었다.

거기서부턴 이상하게 신의 능력을 쓸 수 없었다. 마치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고 있었다.

그래도 무작정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면 한 걸음 더 주희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걸었다.

한 시간인지, 하루인지, 일주일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주희…….”

머릿속이 몽롱해져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질 때마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털썩,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너져 내렸다.

더 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땅속으로 몸을 당기는 것 같던 안개의 기운이 그의 눈꺼풀까지 강제로 감기는 것만 같았다.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 갈 때였다.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그의 이마에 와닿았다.

“……희…….”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렇게 열심히 이름을 불렀는데도 대답 한 번 없더니 처음으로 그녀의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가 떨리고 있었지만, 너무도 기분 좋은 꿈이라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눈도 떠지지 않고, 의식이 점점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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