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화선아!”
현와원에 도착해 본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이 몸의 주인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영묵이 뒤를 돌아봤다.
어제 술자리에 같이 있었던 직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헉헉, 오늘 안 나올 줄 알고 걱정했는데 나왔구나. 잘 생각했어. 다시 부탁이라도 해봐야지. 이런 좋은 일자리를 어디서 또 구하냐고. 헉헉! 그런데 어젠 정말 어떻게 된 거야? 가게 점장이 깨워서 일어났는데 너 다른 사람이랑 갔다고 해서 깜짝 놀랐잖아. 전화도 안 받고 해서 걱정했어.”
그거 조금 뛰었다고 숨을 헉헉 몰아쉬며 말하는 종우란 사내를 화선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감정 없는 시선으로 가만히 쳐다봤다.
“어? 너 표정이 왜 그래? 오늘 좀 이상하다?”
“……아무것도 아냐.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봐. 머리가 아파.”
부러 얼굴을 찌푸린 채 아픈 시늉을 하니 종우란 사내는 바로 속아 넘어갔다.
“미안, 내가 술이 너무 약해서 도움이 못 됐지? 이따가 차 실장님께 같이 가서 부탁해 보자.”
“그래, 고마워.”
화선의 대답에 종우가 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 머리가 많이 아픈가 보다. 하하. 오늘 청소는 쉬엄쉬엄해. 내가 이따가 도와줄게.”
본관까지 들어섰지만 영묵은 집 구조를 몰랐다.
“뭐 하고 있어? 바지런하게 굴어서 다른 사람 눈에 띄어야 다시 일하게 해줄 거 아냐? 저쪽 세탁실 가서 걸레부터 빨아와. 이번엔 침실 쪽으론 아예 가지 말고 거실이랑 서재 청소만 해.”
종우의 시선이 장소를 말할 때마다 정직하게 옮겨 다녀 수상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영묵은 세탁실 쪽으로 향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응? 화선아, 그건 뭐야? 너 문신 같은 거 안 했었잖아. 핫! 너 혹시 어제 나만 두고 갔던 게, 그거 하러 갔었던 거야? 어디 보자! 와아, 멋지다. 이건 무슨 문신이야? 거북? 아니다. 이건 현문가? 어디서 했어? 너무 멋지다.”
오른팔을 들어 요리조리 살피며 감탄사를 터트리는 종우에게서 거칠게 팔을 빼냈다.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다시 끌어 내리는 화선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종우가 놀라 움찔 뒤로 한 걸음 물러설 정도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빙의할 때마다 이 팔의 문신이 나타나고 있다는 걸.
그 빌어먹을 꼬맹이에게 당했을 때 생긴 흔적이 평생 이런 식으로 따라다니고 있었다.
“가서 일해야지.”
“아, 미, 미안해. 기분 전환하려고 했을 텐데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지. 주방 준비 작업 끝나면 네 일 도와주러 갈게.”
“아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야 좋은 점수 딸 테니까.”
화선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세탁실로 가는 모습을 종우는 멍하니 쳐다봤다.
이상하게 항상 짜증만 내던 화선보다 지금의 얌전한 화선이 더 무서웠다.
“이 바보. 얼마나 심란했으면 저런 문신까지 했겠어? 화선이 마음은 생각도 안 하고 혼자 멋지다는 말이나 연발했으니, 화선이가 화가 날 만도 하지. 그런데 저런 문신이 저렇게 금방 할 수 있는 건가? 아, 스티커인가?”
종우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 * *
신우는 곤히 잠든 주희를 깨우지 않았다.
씻고 나와 편한 바지에 로브만을 걸친 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 어제 그가 가져다 놓은 계약서 파일이 보였다.
파일을 들춰 주희의 사인이 들어간 계약서를 흡족한 시선으로 다시 한번 훑었다.
영원히란 계약 기간이 눈에 들어오며 마음에 콕 박혔다.
어제 계약서를 쓸 때 분명 계약 기간을 봤을 텐데 주희는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가 가져간 계약서 그대로 사인을 해준 것이다.
“분명 주희도 마음에 들었던 거야. 이 영원히란 계약 기간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바보짓도 스스럼없이 하며 신우는 바보 같은 웃음을 히죽 웃었다.
주희가 몸소 사인해 준 계약서에, 스스로 그의 품에 안겨와 꿀 떨어지던 행복의 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매일이 어젯밤만 같았으면 좋겠다.
히죽히죽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잘 보관해 둬야지.”
금고를 열어 소중한 계약서를 잘 보관한 신우는 문득 그 아래에 아직도 있는 옷가지를 꺼내 들었다.
“아직 있었지. 이젠 정말 태워 버려야겠군.”
이제 이 낡고 해진 옷을 보관할 이유가 없었다.
주희가 이 옷의 문양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었지만 이제 그녀가 원한다면 어디든 직접 문양을 새겨 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툭, 옷가지를 책상 위에 던져 놓고 금고를 닫았다.
“자, 이제 주희를 깨우러 가볼까? 어제처럼 혼나지 않으려면 얼른 깨워야지. 오늘은 어떻게 깨워 줄까.”
키스를 해서 깨울까, 그녀의 몸을 핥아서 깨울까. 신우의 음흉한 상상의 나래가 끝없이 펼쳐졌고, 저절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려졌다.
그러다 상상력이 지나치게 앞서 가서인지 갑자기 주희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팟!
신우는 걸어가는 시간조차 너무 길게 느껴져 침실로 곧장 공간이동을 해버렸다.
주희는 여전히 어여쁜 모습으로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슬금, 침대 위로 기어오른 신우는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할짝대며 핥았다.
그녀의 입술은 왜 이렇게 다디단지 모르겠다. 핥고 핥아도 꿀이 넘쳐흘렀다.
“주희…….”
“으음…… 하지 마요……. 더 이상은 못 버텨요.”
어젯밤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다시 웅얼거리는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신우는 엉큼한 키스로 대신 삼켰다.
“일어나서 출근해야지. 아니면 이대로 또 잡아먹을지 몰라. 그래도 돼?”
주희에게 묻는 목소리가 점점 허스키하게 변하며 작아졌지만 애석하게도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흠, 이럴 땐 그냥 못 들은 척 잡아먹혀 주면 안 되나?”
그녀의 입술과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그가 투덜거렸다.
“안 돼요. 그럼 정말 못 버텨요. 오늘은 꼭 제대로 출근해야 한다고요. 나도, 당신도. 무거우니까 좀 비켜줄래요?”
“싫다면?”
눈을 가늘게 뜨고 진심에서 우러난 투정을 부렸다. 이대로 정말 강제로 잡아먹어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손이 쑥 뻗어져 오더니 그의 얼굴을 확 잡아당겼다.
촉!
그리고 기습 키스를 당했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 줘요. 우리의 밤은 앞으로도 수없이 많으니까.”
“쳇, 겨우 뽀뽀. 완전 여우가 다 됐어.”
투덜투덜하면서도 그녀가 먼저 해준 뽀뽀가 너무 좋아 벙싯벙싯 웃으며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지칠 줄 모르는 색마에게서 내 몸을 지켜내려면, 여우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색마라고? 내가? 애걸복걸해서 겨우 하룻밤에 한 번인데?”
“그 한 번이 내가 기절할 정도이니 문제죠.”
주희가 딱 잘라 말하자 그는 할 말을 잃고 걱정스레 그녀의 몸을 시선으로 훑었다.
진심으로 걱정이 돼 주희의 안색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요. 그만큼 좋았다는 뜻도 되니까요.”
주희가 살짝 얼굴까지 붉히며 그의 걱정을 걷어갔다.
“완전 들었다 놨다 하는군.”
직설적으로 좋았다고 말하는 주희의 노골적 진심에 신우는 투덜대면서도 내면에 진심 어린 기쁨이 번져갔다.
“욕실까지 부탁해도 될까요, 신우 기사님?”
“물론입니다, 공주님. 가시지요.”
주희의 기사 놀이에 자연스럽게 동참하며 신우는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의 몸을 안아 올렸다.
작게 키득대는 그녀의 소리가 천상의 선율처럼 듣기 좋았다.
* * *
신우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서재에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대답이 있을 리 없었고,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이어지더니 여직원이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마른걸레를 든 화선이었다.
화선의 몸에 빙의한 영묵의 시선이 넓은 서재 안을 날카롭게 훑었다.
그러다 어느 한곳에 눈길이 딱 멎었다.
비밀 금고를 뒤질 필요도 없었고, 침실에 몰래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책장 장식장 한 칸에 장례식장에서 본 그 상자가 그대로 전시돼 있었다.
영묵은 재빨리 상자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런데 상자에 손을 대자마자 덜컥, 상자가 힘없이 쪼개졌다.
심장이 쿵 떨어지려는 찰나, 안에 검은 상자가 하나 더 보였다.
검은 상자를 집어내는 그의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이렇게 조립만 해놨다는 건, 이미 누군가 상자에 손을 댔다는 뜻이었다.
“이건…….”
검은 상자를 손에 든 영묵의 눈빛이 더할 수 없이 싸늘해졌다.
거무튀튀하게 퇴색됐지만 검은 상자에 그려진 문양은 분명 현무였다.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좇았던 신물 상자였다.
불길한 예감에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달칵,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이 비어 있었다. 당연히 뿜어져 나와야 할 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가 들인 공이 전부 수포로 돌아갔다.
희번덕 치켜 올라간 그의 눈동자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붉게 변했다.
‘으아아악!’
소리 내 비명을 지를 수도 없어 더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때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또 하나 매우 익숙한 것이 들어왔다.
책상 위에 어디서 많이 보던 옷이 놓여 있었다.
명부의 옷이었다.
상자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영묵이 눈을 크게 뜨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옷을 집어 들었다.
“이건…….”
손에 든 옷은 명부의 옷일 뿐만 아니라 분명 그 꼬맹이, 염라의 아들이 입고 있던 옷이었다.
옷의 문양은 물론이고 그가 직접 위해를 가한 가슴의 구멍까지, 그날의 그 옷이 분명했다.
옷을 들고 있는 그의 손과 악다문 턱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그놈이…… 그놈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지?”
그날 마지막 형체가 사라지는 것까진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 몸이 딱딱해지고 숨이 끊어진 걸 확인했었다.
그 상태에선 염라가 와도 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고, 박 회장을 마주칠 때마다 의아하게 생각되었던 천계의 기운이 갑자기 떠올랐다.
천계신이 살린 것인가?
“내 것을…… 너희 부자가 다 가져갔구나.”
이젠 무엇도 중요치 않았다.
그동안 그렇게 들인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하필 염라의 아들에게 가다니.
끓어넘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아아악!”
끝내 옷을 내팽개치고 소리를 질러 버렸다.
쾅!
서재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영묵의 영이 발 빠르게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헉!”
화선을 도와주러 온 종우였다.
화선의 비명 소리에 거칠게 문을 열었는데, 화선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어 빠르게 달려갔다.
“화선아!”
털썩.
쓰러진 화선을 큰 소리로 부르자 다행히 곧바로 눈을 떴다.
“뭐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화선이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영문을 몰라 했다.
그때였다.
“네가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지? 넌 어제부로 해고된 걸로 아는데?”
신우의 싸늘한 말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회, 회장님……. 화선이가 어젠 정말 죄송했다고, 다시 한번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청소도…….”
“내 눈엔 청소를 한 게 아니라 화풀이를 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난 한번 해고한 사람은 다시 채용하지 않아. 현와원에서 그만 나가 주면 좋겠군.”
바닥에 내팽개쳐진 옷이며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상자를 보며 신우가 냉랭하게 말했다.
“아, 이, 이건……. 화선아, 어서 잘못했다고 해. 팔에 문신까지 새길 정도로 각오를 다지고 왔잖아. 어서 잘못했다고 빌어.”
종우가 애가 타는지 화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문신이라니? 내가 그런 걸 왜 해?”
“하지만 너 아침에 분명…… 오른팔에 문신을 하고 왔었잖아. 분명 여기……. 어? 어디 갔어? 분명 아침에 출근할 때 있었잖아?”
화선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조차 이해가 안 되는데 종우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대자 더 짜증이 났다.
하지만 종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종우의 말처럼 잘못했다고 빌어서 이곳에 다시 다닐 수만 있다면 말로 하는 사과 정돈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힐끗 본 신우의 냉랭한 눈빛은 어떤 사과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아씨! 현무 문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 그딴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이딴 일자리, 내가 먼저 그만둔다. 비켜!”
화선이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며 짜증을 부리곤 씩씩대면서 거친 걸음으로 서재를 나가 버렸다.
“핫! 죄송합니다, 회장님. 어, 어, 화선아.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그 뒤를 종우가 당황한 걸음으로 쫓아 나갔다.
“현와원의 경비가 엉망인 모양이군.”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않고 지켜보던 신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 혼자만 있는 거라면 현와원 경비가 어떻든 상관이 없지만 주희가 있는 곳을 이렇게 허술하게 내버려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자를 원래대로 조립하고 떨어진 옷을 주워 들었을 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다급하게 나왔는지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나온 주희가 서재로 들어서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주희에게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얘기해서 좋을 게 없었다.
“어? 지금 들고 있는 옷, 저번의 그 옷이에요?”
“태워 버리려고 꺼냈더니 여기저기 뒹구는군.”
주희의 물음에 신우는 몇 번이나 태워 버릴 결심을 했으나 아직 태우지 못한 옷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태워요? 아니, 왜요? 그럴 거면 저 주세요.”
주희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옷에 욕심을 냈다.
“이건 못 입는 옷이야.”
“알아요. 그냥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그래요. 신우 씨 옷이니까요.”
주희가 재빨리 다가가 신우의 손에서 옷을 잡아챘다. 그리곤 큰 선물이라도 얻었다는 양 품에 꼭 안으며 빙긋 웃었다.
“그런 다 해진 옷이 아니라 차라리 옷 가게를 통째로 사달라고 하지그래.”
“옷 가게를 뭐하러요. 난 이 옷이 좋아요. 고마워요.”
딱 잘라 말하는 주희를 신우는 한동안 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넌 정말 이상한 여자야.”
“이상한 여자라니, 왠지 좋은 뜻으로 해석되지 않는데요?”
“좋은 뜻이야. 가자, 머리 말려줄게.”
신우가 피식 웃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나섰다.
그 한마디가 무슨 뜻이냐며 눈을 흘기던 주희의 의심을 싹 걷어가 버렸다.
“고마워요. 당신이 머리 말려주는 거 기분 좋아요.”
신우의 부드러운 손길을 떠올린 주희가 해죽 웃으며 신우에게 머리를 기댔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머리 말려줄 용의가 있어.”
신우가 마치 그녀의 전용 미용사라도 될 것처럼 말했다.
“쿡쿡. 그러고 싶지만 나 오늘 밤부터는 여기 못 와요.”
주희는 그런 신우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대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무슨 말이야?”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과 같이 있다 보면 나도 자꾸 깜빡 잊어버리는데, 우리 동네 소문 무서운 곳이에요. 계속 이대로 가다간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라구요. 한국의 모든 아버지들은 이 상황 절대 이해 못 하실 거예요.”
주희는 그의 굳은 표정에 살짝 당황했지만 해야 할 말은 다 했다.
그는 한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아무 대책 없는 남잔지는 몰랐다.
“뭘 그렇게 얼어붙어 있어요? 설마 계속 이대로 지낼 생각이었어요?”
주희도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아버지는 얘기가 달랐다.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와 사랑을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이야기할 터였다.
이대로 가면 조만간 ‘자네 딸이 남자와 동거한다며?’ 따위의 별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아버지 귀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신우 씨, 우리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싶지 않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아버진 나 시집보내기 싫어하시거든요.”
그녀의 말에 신우의 표정이 더 얼어붙어 갔다.
“미안. 나 혼자만의 감정에 취해서 미처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할 필요까진 없어요. 나도 그런 절차는 그냥 형식적인 거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계약서가 있어야 계약이 더 확실해지듯이 사랑에도 서약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는 생각해요.”
“사랑의 서약…… 당장 하자.”
신우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반짝거리는 신우의 눈동자가 선명한 겨울 햇살에 반사돼 눈부시게 빛났다.
* * *
좁은 공간에 잿빛 연기가 기이하게 떠돌았다.
순간 연기가 훅 빨려 들어가며 시체처럼 누워 있던 한 소장의 눈이 번쩍 떠졌다.
“……네놈의 아들까지!”
누군가에게 들킬 위기에 몸을 빼오긴 했지만 으드득 이가 갈리는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퍽!
분노의 주먹에 가까이 있던 향로가 엎어졌다.
성질대로라면 다 깨부수어도 진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하필 손에 걸린 것이 향로라 다시 세웠다.
이 향로가 없으면 그나마 지금 같은 어둠의 술법조차 구현하기 힘들었다.
향로를 세우다 보니 더욱 성질이 났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구질구질한 짓을 해야만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이다.
“가만두지 않겠다. 내 것을…… 내 것을 가로챈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주마. 두고 봐라. 네놈이 가장 아파할 것을 없애 주마.”
발굴 현장에서, 장례식장에서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던 신우가 생각난 영묵의 눈빛이 분노로 붉게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리며, 최근의 잦은 빙의로 인해 육체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새로운 몸으로 교체를 해야만 했다.
“새로운 그릇이 필요해…….”
원래라면 오래도록 몸을 숨겨야 하니 몸의 주인이 가진 배경부터 모든 것을 신경 써서 선택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 이 쇠락한 몸에 수명을 더하지 못하면 자칫 영묵의 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버릴지도 몰랐다.
달칵, 앙상하게 떨리는 손으로 침대 아래 돌상자를 열어 약봉지 하나를 꺼내고는 품에 갈무리했다.
돌침대에서 내려온 영묵이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좁은 공간을 나와 수묵화가 그려진 비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서재 한편에 진열되어있는 양주들 중 한 병을 꺼내 잔에 따랐다.
쪼르륵!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하나의 잔에 약을 탔다. 그리곤 책상 아래 비상벨을 눌렀다.
“부르셨습니까, 소장님.”
고용인 최 씨가 서재로 들어오는 모습을 영묵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충직한 하인을 원했지 자신의 그릇으로 쓸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찬찬히 몸을 살피다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큰 체구에 순한 인상.
숨어 살아야 하는 그에게 아주 맞춤인 몸이었다.
“밤늦게까지 수고가 많네. 한잔하게. 혼자 마시려니 영 내키지 않아서 말일세.”
“아, 아닙니다. 저 같은 게…….”
“사양 말게. 나도 이것만 마시고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네.”
한 잔을 건네고 남은 잔을 들어 먼저 술을 마셨다.
안절부절못하던 최 씨는 그가 빤히 쳐다보고 있자 당황해하며 고개를 돌리고 홀짝 술을 마셨다.
“소장님 안색이 많이 안 좋으…….”
말을 하던 최 씨가 갑자기 휘청하더니 눈을 부릅뜬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 * *
이제 완연한 겨울이었지만 햇살은 청명한 가을 햇살처럼 맑았다.
새미의 작고 아담한 가게는 그 가을 햇살을 잘 느낄 수 있는 큰길 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새미의 가게도 오늘은 한산했다.
제일 구석 테이블 쪽, 선글라스를 낀 채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조금 이상한 남자 손님이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주희는 햇살이 가장 잘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아침나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랑의 서약, 그 말이 이처럼 가슴 따뜻해지는 말인 줄은 미처 몰랐다.
“기집애, 뭐가 그렇게 좋아서 배실배실 웃어? 어젯밤의 열정이 다시 생각나기라도 한 거야?”
달그락, 새미가 그녀 앞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부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말을 꼬았다.
“부러우면 너도 연애해.”
“와, 이 기집애 봐. 이젠 염장 지를 줄도 아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런데 왜 불렀어? 무슨 일 있어?”
오늘 새미의 가게에 들른 건 새미가 불러서였다. 보통은 일이 있으면 새미가 먼저 달려오곤 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이쪽으로 와달라고 했다.
“어, 그게,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나 해서. 사실 오늘 아침에 한성그룹의 차 실장이라는 분한테서 연락이 왔거든. 오늘 이곳에 들르겠다고.”
“차 실장님이?”
주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표정 보니까 피싱은 아니구나?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란 말이지? 그럼 됐어.”
“무슨 일인데?”
새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쿨하게 말했지만 주희는 신경이 쓰였다.
“신경 쓰지 마. 곧 온다고 했으니 만나면 이유를 알게 되겠지, 뭐. 그보다 이거 뭐야? 너 휴대폰 샀어? 이거 완전 최신 기종인데? 네가 이런 최신형을 직접 샀을 리는 없고, 박신우 씨가 준 거야?”
새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요리조리 살피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고야 주희도 피식 웃었다.
아침에 그녀를 데려다주면서 그가 전해 준 휴대전화였다.
전화번호 저장해 두었으니 언제든 보고 싶을 때 전화하라던 그의 표정이 생각나 더 웃음이 났다.
“어, 도 실장이 무지 좋아하더라.”
휴대전화를 본 도 실장은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나 볼 때마다 제발 너 휴대폰 사게 압력 좀 넣어달라고 했으니까. 일단 내 전화번호를 저장…….”
새미가 막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약자? 벌써 저장한 사람이 있네. 서약자가 누구야?”
새미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주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주희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설마?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주희의 입에서 이런 낯간지러운 표현을 이끌어내다니, 박신우는 정말 연애 천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박신우가 아니고 왜 서약자야? 설마 사랑의 서약자, 뭐 그런 낯간지러운 의미는 아니…… 헐.”
휴대전화를 건네주며 묻던 새미가 오싹 닭이 된 표정을 지었다.
“여보세요?”
-날이 너무 좋아. 보고 싶다.
아침에 헤어지고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보고 싶단다.
마주하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빠져드는 것 같다.
“저도 보고 싶어요.”
주희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젖어 들었다.
“타임! 타임! 나 가고 나서 해. 나 완전 오징어 될 것 같아.”
-책방 아니야?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새미의 큰 목소리가 휴대전화 저편에도 들렸는지 그가 물었다.
“풋. 네, 새미네 가게예요. 차 마시러 왔어요. 새미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웃음 짓던 주희가 창밖을 보다 갑자기 얼어붙었다.
꺄아아악!
부아아아아앙!
새미의 비명 소리가 도로를 가로질러 달려드는 덤프트럭의 소리에 묻혀갔다.
-무슨 일이야?
귀에서 신우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지만 몸도 목소리도 얼어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우 씨…….”
겨우 중얼거렸을 땐 덤프트럭이 이미 인도를 덮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주희야! 이주희! 주희야…….
“꺄아아악!”
브레이크 없는 덤프트럭이 그녀가 앉은 자리를 그대로 깔아뭉개려 달려들고 있었다.
주희는 달려드는 덤프트럭을 보며 눈조차 감지 못했다.
귓가에 그녀를 애타게 부르던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아 가슴이 아팠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암흑에 휩싸인 듯 어두워졌다.
팟!
그리고 한 사람이 광폭하게 달려드는 트럭 앞에 나타났다.
“아…… 안 돼…….”
눈도 감지 못하고 있던 주희의 눈에 어둠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안 돼에에!
절규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트럭이 신우에게 덮쳐드는 순간, 주희의 의식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번쩍! 우르르르 쾅!
사방이 어둠에 잠기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쳤다. 폭우가 도시를 집어삼킬 듯 거세게 쏟아졌다.
파츠츠츠!
신우의 손에 검고 검은 현무의 검이 쥐어졌다.
콰창!
신우가 검을 휘두른 순간, 달려들던 덤프트럭이 폭발하듯 튕겨져 나갔다.
크리리릭!
뒤집어진 덤프트럭의 바퀴가 무섭게 공회전을 했다.
분노에 이성을 잠식당한 신우가 다시 한번 허공으로 날아올라 차가운 현무의 검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팟!
세상을 뒤엎는 강력한 힘의 발현에 가까이 있던 강림차사와 전륜차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 된다!”
강림차사가 신우의 앞을 막아섰다.
전륜차사도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키운 채 신우를 쳐다봤다.
전륜차사가 알고 있던 신우의 기운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검은 기운은 전륜의 생애 처음 느껴보는 가장 거대한 기운이었다.
게다가 암흑의 색을 지닌 데다 번개의 기운이 흐르는 저 검은 아무리 봐도 전설로만 전해지는 그 현무의 검인 것 같아 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키십시오. 주희를 해하는 자는 누구도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누구도, 내게서 주희를 데려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 누구도.”
신우는 오늘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주희가 없는 세상은 그의 세상이 아님을.
이건 덤프트럭 기사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지만 눈앞에 있는 명부신에게 하는 협박이기도 했다.
주희를 데려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신우의 격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음을 드러내듯 하늘에서 또 한 번 우르르릉 소리를 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지금 네 마음은 알겠다만, 저 덤프트럭을 운전한 그 사악한 놈은 이미 도망을 쳤다. 엉뚱한 살육을 할 생각은 하지 마라.”
강림차사는 냉정했다. 무율이 어떻게 힘을 되찾았는지, 어떻게 검을 발현시킬 수 있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침착해야 했다. 현재 무율이 이성을 잃은 이유는 한 가지뿐일 터였다.
힐끗, 아래를 보니 가게 안에 예의 그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저 여인을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거냐?”
강림차사의 그 말 한마디가 끝이었다.
허공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뿌려대던 무율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희야…….”
가게 안 여인의 옆에 다시 나타난 신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여인을 부르고 있었다.
“아, 주희 씨가.”
그제야 주희를 본 전륜차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멍하니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륜, 모습을 감춰라.』
강림차사의 말이 있고야 침음을 삼키며 전륜차사도 모습을 감췄다.
『저걸, 어쩌죠?』
쓰러져 있는 주희가 눈에 밟혔지만 방금 전의 무시무시한 신의 분노를 목격한 인간들이 머리를 처박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륜차사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강림차사를 쳐다봤다.
“아이고, 아이고, 저승사자님! 잘못했습니다요! 잘못했습니다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기억을 지워야지. 넌, 트럭 기사부터 살펴보고 와라. 우리가 쫓던 그 배지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지.』
『…….』
전륜차사는 신우의 품에 안겨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주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뒤집혀 있는 트럭으로 향했다.
* * *
‘안 돼에에!’
비명을 질렀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허억!”
몸을 일으키긴 했는데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통증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심한 가위 눌림이었는지 등이 축축했고, 온몸에 오한이 일이었다.
숨을 헉헉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방 안이었다.
“내가 언제 방에……. 아, 나 왜 이러지……. 왜…….”
주희는 자신이 무슨 꿈을 꾼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언제 잠이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난데없이 눈물이 흘러넘쳤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계속 제멋대로 두 볼을 타고 흘렀다.
그때 벌컥, 방문이 열리고 신우가 나타났다.
“신우…….”
신우의 얼굴을 보니 이젠 가슴까지 울컥해져서 더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신우가 꼭 껴안아 주었지만 주희는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이 감정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 나 왜 이러죠. 갑자기…….”
“괜찮아……. 괜찮아……. 그냥 나쁜 꿈을 꾼 거야. 괜찮아.”
주희는 꼬박 이틀을 깨어나지 못했다.
강림차사가 기억을 지웠다고 했지만, 기억만 지운 게 아니라 혹 다른 게 잘못된 게 아닌가 하여 걱정이 되던 차였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녀의 몸으로 보아 잔상이 남은 듯하지만 다행히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걸요. 그런데…… 그런데 가슴이 너무 아파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나…… 나, 왜 이러죠. 흑흑흑…….”
주희는 끝내 소리 내 울었다.
“주희야…….”
그녀의 울음에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난 탓에 그도 그만 울컥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신우 씨, 가지 말아요. 어디에도. 제발…… 내 옆에 있어요.”
주희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며 그를 붙들었다.
왜 갑자기 그가 사라져 버릴까 무서운지 모르겠다.
그를 껴안고 있는 팔을 풀면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미친 듯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가지 않아. 어디에도.”
어디에도 보내지 않을 거다.
신우는 주희를 품에 안은 채 속으로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오늘 달려든 덤프트럭 기사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놈이다.’
장례식장에서의 그놈.
현재 차사들이 찾고 다니는 문제의 그놈이 분명했다.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찾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물을 것이다. 왜 주희를 해하려 하는지.
신우의 눈동자에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끓어올랐지만 이런 모습을 주희에겐 보일 순 없어 조심스레 가라앉혔다.
“신우 씨…….”
신우의 다짐 같은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됐는지 주희의 팔 힘이 약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자마자 주희의 방문이 열렸다.
“어? 주인님, 깨어나셨네요! 얼씨구, 이젠 대놓고 포옹신. 이틀 동안 잠만 주무시더니 더 뻔뻔스러워지신 거 같네요.”
도 실장이 깨어 있는 주희를 보고 반가워하다 순식간에 인상을 구겼다.
“이틀요? 핫, 나 이틀 동안이나 잔 거예요?”
“그래요, 이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시면 이틀씩이나 잠을 잘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저런 망할 놈의 차사까지 주인님 목숨이 붙어 있나 안 붙어 있나 감시하러 오는 거 아닙니까.”
책방에 또 차사가 왔다. 그것도 주희가 신우의 품에 안겨 온 그날부터 아주 뻔질나게 드나드는 중이었다.
“차사 님 왔어요?”
“네. 주인님 깨어나셨는지 보고 오랍니다. 나참, 어이가 없어서. 이러다간 정말 차사사무소라도 차리게 생겼습니다. 아니 그리고,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와서 보고 가면 되지 왜 자꾸 날 괴롭히는 거냐고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던…… 우이씨, 이 망할 놈의 차사가!”
투덜투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뭔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아졌는지 도 실장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곤 걱정을 빙자해 도깨비를 업신여긴 차사 놈을 쫓아내기 위해 당장 책방으로 달려갔다.
도 실장은 흥분해서 쫓아갔지만 전륜차사가 주희를 직접 찾지 못한 건 신우의 협박 때문이었다.
주희 근처엔 얼쩡거리지 말라는.
신우가 엄포를 놓은 건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의미였는데, 전륜차사는 말 그대로 주희 방 근처에만 얼쩡거리지 않았다.
정말 더럽게 말귀 못 알아듣는 신참차사였다.
주희의 안부를 빙자해 책방 문턱이 닳을 정도로 뻔질나게 책방에 드나드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더 싫은 녀석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겠어요.”
주희는 도 실장과 전륜차사의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다 슬쩍 신우를 봤다.
“같이 나가지.”
어차피 주희의 행동을 말리지 못할 거란 걸 아는 신우였기에 괜한 미움 살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주희가 깨어났으니 본격적으로 차사에게 정보를 얻을 필요도 있었다.
차사들에 앞서 그가 먼저 놈을 잡을 생각이었다.
* * *
우당탕탕탕!
안 그래도 손님이 뜸한 이가서림이 때 아닌 차사와 도깨비의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거기 서!”
도 실장과 륜차사의 쫓고 쫓기는 살벌한 몸짓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던 책이며 쌓여 있던 책들이 허공에 난무하고, 바닥에 다시 내팽개쳐졌다.
“그러니까 왜 날 기만하냐고요! 도깨비가 그렇게 만만해요? 내가 아무리 금의 기운이라곤 쥐뿔도 없는 빈털터리 빈곤 도깨비라 해도 그렇지. 내가 차사 님한테 죄진 것도 없는데 왜 자꾸 날 괴롭히냐고요? 금을 가져다주지 못해서 미안한 건 오직 우리 주인님뿐이라고요! 내가 차사한테 죽어 들어갈 이유는 눈곱만큼도…… 으아악! 주, 주인님! 어, 언제 나오셨어요?”
도 실장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절대 입을 쉬지 않았다. 차사에 대한 불만을 있는 대로 토해내며 머리를 감싸 쥐고 책방 안을 뱅뱅 돌다가 차사보다 더 무서운 사람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륜차사 님이 거기 서라고 할 때부터요.”
물끄러미 도 실장을 쳐다보며 말하는 주희의 대답에 도 실장이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했다.”
이제 영락없이 쫓겨나게 생긴 도 실장이 넋을 놓았다.
이게 다 차사 때문인 것 같아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차사는 도깨비 하나 쫓겨나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오직 주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집에 도깨비가 사는데도 이상하게 돈이 안 들어오더라니, 그럼 그게…….”
“죄송해요. 검을 잃어버려서. 제가 있는 한 앞으로도 이 가게가 바쁠 일은 없을 거예요.”
도 실장의 말은, 앞으로도 돈이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토록 숨기고자 애를 썼으나 결국 들키고 만 진실에 도 실장의 어깨가 힘없이 축 내려앉았다.
“그래요? 그럼 앞으로도 이가서림은 지금처럼 한가할 거란 말이네요? ……잘됐네요.”
“네. 네? 무슨?”
장사가 계속 안 될 거라는데 잘됐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도 실장이 주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난 이가서림이 좋은 거지 돈이 좋은 게 아니니까요. 책방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한가한 시간도 좋아해요.”
주희가 빙긋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지만 도 실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사가 잘돼서 돈을 많이 벌어야 맛있는 것도 사먹을 수 있고 좋은 옷도 살 수 있고 그런 것인데, 돈이 좋은 게 아니라니.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가서림은 지금이 딱 좋아. 이보다 더 북적대서 정신없는 건 나도 싫군. 그러니 더 이상 금의 기운 따윈 필요 없어.”
신우까지 주희를 거들고 나섰다.
“그런데 도 실장님, 돈은 상관없는데 청소만큼은 전처럼 신경 좀 써주시면 좋겠는데요. 지금 여긴 책방이 아니라 그냥 창고보다도 못한 것 같아요.”
주희가 보란 듯이 사방을 둘러보며 엉망진창이 된 책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때까지도 꼼짝 않고 서 있는 차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차사의 시선에 담긴 마음이 너무 정직하게 다 읽혀 좀 당황스러웠다.
“핫! 물론입니다, 주인님. 여기, 여기 앉으십시오. 청소!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됩니다요. 흐흐흐.”
다행히 도 실장이 큰 목소리로 분위기를 흐려주어 덜 어색했다.
이제 도 실장은 양심의 가책 따윈 터럭만큼도 가지지 않고 이가서림에 붙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쁘다 못해 세상이 다 제 것이 된 것처럼 아량이 넓어졌다.
눈만 마주쳐도 투덕거리던 차사에게마저 관대해졌다.
“차사 님도 좀 앉으십시오. 우리 주인님을 그렇게 기다렸는데 많이 많이 보고 가셔야죠.”
그리곤 마치 정리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바닥에 떨어진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가기 시작했다.
“참, 주인님! 새미 씨 소식은 들으셨어요? 새미 씨, 갑자기 벼락부자 됐어요. 그 집엔 도깨비도 살지 않는데 어떻게 이런 대박이 터진 걸까요?”
도 실장이 책을 꽂다 갑자기 생각난 듯 새미의 소식을 큰 소리로 전했다.
“무슨 소리예요? 벼락부자라니?”
“어라? 아직 얘기 안 하셨어요?”
주희의 되물음에 도 실장이 신우를 쳐다봤다.
“아직.”
“무슨 얘긴데요? 갑자기 새미가 벼락부자가 됐다니요? 어? 잠깐만. 분명 새미가 날 불렀던 거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 왜 기억이……?”
이상했다. 새미가 불러서 가게로 갔던 일이 떠올랐는데 그게 언제였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미를 기억하려는데 왜 또 신우가 눈에 들어오는지.
왜 또다시 울컥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명새미 씨가 할아버지의 친손녀였어.”
주희의 낌새가 이상해지는 것을 눈치챈 신우가 재빨리 말을 꺼냈다.
덕분에 주희의 표정이 더 이상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주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렇다니까요! 세상에, 세상에! 내 주변에도 이런 기적이 다 일어나지 뭐예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재벌 손녀. 와우, 세상에 이런 일이! 스펙터클한 인생이지 뭡니까?”
도 실장의 찰떡같은 호들갑까지 가세하자 주희가 생각에 빠져들 타이밍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한번 만나지도 못하고…….”
느닷없이 새미가 박 회장의 친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기쁜데, 또 한편으론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워 먹먹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거예요? 할아버진 손녀의 존재조차 모르셨던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했어. 아버지에게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었더군. 혹시나 했는데,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었어.”
“아주머니가 얘기하셨던 그분이 그럼……. 새미가 5년 동안이나 찾아 헤맸어도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아, 이럴 게 아니라 새미 가게에 가봐야겠어요.”
도 실장은 재벌 손녀가 돼 좋을 거라 말했지만 그녀가 아는 새미라면 아마 무척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없을 거다. 오늘 추모관에 간다고 했었거든.”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새미 씨, 주인님 걱정 때문에 뻔질나게 책방에 드나들고 있으니까요. 아마 추모관 갔다가 또 책방에 오실걸요? 어? 아니, 리모컨이 왜 바닥에……. 쯧!”
도 실장이 걱정하지 말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 리모컨을 밟았다.
팟! TV가 켜졌다.
<한 문화재연구소 한진태 소장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기이하게도 시체의 부패 정도가 너무 심해, 약품에 의한 살인 여부를 집중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어? 저거 김 순경님 아니세요?”
신우와 주희가 TV에 등장한 한 소장의 사진을 보고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도 실장의 말에 TV를 다시 보니 정말로 김 순경이 경찰 라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야, 우리 김 순경님 출세했는데요? TV에도 다 나오고. 오면 한턱 쏘라고 해야겠네. 정리는 이만하면 된 것 같고, 이제 손님 접대를 해야지. 주인님, 커피 끓여올까요?”
“네. 다른 분들 것도 같이 부탁해요.”
도 실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책방을 둘러보더니 커피 이야기를 했고, 주희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도 실장이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갔지만 주희와 신우의 시선은 오롯이 전륜차사를 향해 있었다.
뉴스의 내용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는 추궁의 시선이었다.
“아, 저, 배지를 추적해 처음 배포한 사람을 찾아 올라가다 보니, 저 사람이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땐 이미 저 상태였고요. 벌써 다른 몸으로 갈아탄 것 같습니다. 이제 사건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강림차사 님께서는 보고할 겸 다시 명부로 들어가셨습니다.”
차사의 말에 신우와 주희의 표정도 어두워지긴 마찬가지였다.
“한 문화재연구소의 소장이었다니……. 저렇게 몸을 갈아탈 정도면 단순한 혼령은 아닐 테고, 신급이라는 말인데. 이유는 차사 님도 모르시나요?”
율법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 신이 저런 짓을 하고 다닐 리 없다.
그렇다면 쫓겨난 신이거나 자신의 존재를 들켜선 안 되는 신이라는 말인데, 명부신과 천계신 중에 그런 신이 있었던가?
“……!”
주희의 물음에 순간 전륜차사가 신우를 봤다.
무슨 얘기를 어디까지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하지만 신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그를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전륜차사는 신우가 어떤 존재인지 강림차사에게 꼬치꼬치 캐물어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런 식의 위기에서 신우의 도움은 전혀 바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유는…… 그게, 저희도 아직…….”
“아직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거예요?”
주희가 무척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또다시 무능한 차사로 낙인찍힐 것 같았다.
사실 이번에 발견된 시체를 보고 강림차사 님이 아무래도 쫓겨난 명부신의 소행인 것 같다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을 해도 좋을지는 계속 망설여졌다.
힐끗, 다시 한번 신우를 봤다.
“그게, 배지가 빙의를 위한 매개체란 걸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또 특이한 건, 빙의할 때마다 그 빙의한 사람의 팔뚝에 현무의 문신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네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호, 혹시 현무의 기운이 현세에 나타난 거예요? 제가 알기로 현무의 기를 가진 신은 어둠을 관장하긴 해도 결코 나쁜 기운을 가진 신은 아니라고 했는데. 설마, 그 나쁜 놈이 그럼 현…….”
“헉!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현무의 기운씩이나 다루는 신이 뭣 때문에 시선을 피해 인간의 몸을 전전해 다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실제 현무신은 인간인 척하고 있었지만 전륜차사는 최선을 다해 부정했다.
만약 주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시선을 신우가 마구 쏘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팔뚝의 문신, 혹시 오른팔에 생기는 건가?”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신우가 그제야 끼어들며 물었다.
“네, 오른팔입니다.”
전륜차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신우를 쳐다보며 대답했고, 신우는 그 맹랑한 시선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넌, 이런 정보를 이렇게 아무렇게나 흘려도 되는 건가? 징계받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신우가 차사에게만 들리는 전음으로 훈계를 했다.
「강림차사 님이 명계로 가시면서, 무율 님과 공조 수사하라 지시하고 가셨습니다. 이성을 잃고 날뛰면 다른 인간들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 잘 감시하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차사도 여봐란 듯이 전음으로 받아쳤다.
두 명부신은 이렇게 서로를 견제하느라 주희가 어떻게 신들의 일을 이처럼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왜? 왜 갑자기 그렇게들 노려보는 거예요? 신우 씨? 륜차사 님?”
“아무것도 아냐. 차사 님께서 아직 수거하지 못한 배지의 행방을 쫓으러 간다는군.”
“차사 님이 언제 그런 말씀을…….”
“했어. 방금 작은 소리로. 안 그렇습니까, 차사 님?”
아주 태연하게 차사에게 되묻고 있었지만 전음으로 덧붙인 설명은 친절과 거리가 멀었다.
「특별조사단이면 특별조사단답게 열심히 움직여야 차사 고과 성적이 올라가는 거 아닌가? 기억 삭제 능력까지 받으려면 더 열심히 분발해야 할 테고.」
전륜차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라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이번 덤프트럭 사건 때도 기억을 지우는 일은 모두 강림차사가 맡았던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일은 차사만이 할 수 있었는데, 아직 그는 완전한 차사의 직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움직이려 할 때였다.
Rrrrrr……!
이가서림의 가게 전화가 아주 큰 소리로 울렸다.
주희가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가려는데, 주방에 있던 도 실장이 총알같이 튀어나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이가서림 도 실장입니다. 어? 박사님! 네, 잘 있습니다요. 네? 올라오시는 중이라고요? 아! 한 문화재연구소면 방금 전에 뉴스에 나오던……. 그렇겠네요. 저희야 뭐, 걱정 말고 천천히 올라오십시오.”
주희도 신우도, 심지어 나가던 차사도 도 실장이 통화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올라오신대요?”
“네, 지금 올라오시는 중이랍니다. 한 문화재연구소 소장 일로 인해 당분간 발굴이 잠정적으로 중단됐답니다.”
“그렇겠네요. 아버지 실망하셨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위험해지시는 것보단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한 문화재연구소 일과 떨어져 있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제신리 문화재 발굴을 무척이나 기대하신 건 알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발굴도 좋지만 안전이 먼저야.”
신우도 같은 생각이라며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도 실장은 무슨 생각인지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박사님이야 그렇다 치지만, 신우 님은 이제 주희 님 방을 지금처럼 뻔질나게 드나들지 못하실 텐데. 박사님, 무지 깐깐하신 분이거든요.”
도 실장의 말에 차사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고, 신우는 와락 얼굴을 구겨야 했다.
“쿡, 맞아요. 아버지 허락을 받는 게 쉽진 않을 거예요.”
주희는 뭔가 아쉬우면서도 신우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키득대는 웃음을 웃었다.
* * *
H클럽 VIP룸에 붉은 등이 켜졌다.
“이사님, 그동안 격조하셨습니다?”
지배인이 직접 룸에 들러 김 이사를 맞이했다.
“그러게. 최근에 일이 좀 꼬여서 말이지. 오늘은 만날 사람이 있으니 애들은 됐고, 술이나 가져오게.”
김 이사는 오랜만에 출입한 H클럽의 지정 룸에 앉아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지배인을 턱으로 부렸다.
“오늘 새로 들어온 따끈따끈한 애가 있습니다.”
지배인이 은근히 배팅을 시작했다.
원래는 아무 생각이 없던 김 이사였지만 새로 온 애라는 말에 살짝 구미가 당기는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새로 온 아이라. 나중에 보고 결정하지. 지금은 나가 있게. 날 찾는 손님 있으면 이리로 안내해 주고.”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술은 항상 드시던 걸로 내오겠습니다.”
잠시만이라도 혼자 있고 싶은 듯 김 이사가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저께 시체를 봤다.
시체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그 잔상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시체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쓋! 걱정할 거 없어. 그렇게 찜찜하던 놈이 알아서 사라져 줬는데, 뭐가 문제야?”
그랬다. 이제 그의 꺼림칙한 과거를 들먹일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발굴의 뒷거래 일도 이제 완전히 묻혔으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신우가 찾아냈다는 그 명새미만 없애면 이제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것이다.
똑똑!
“들어와.”
술을 반병쯤 비웠을 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김 이사의 경호원이 룸으로 들어왔다.
“알아봤어?”
“네. 확실한 것 같습니다. DNA 분석 결과도 일치한답니다. 곧 한성 법무팀에서 움직일 것 같습니다.”
“병신 같은 새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킬 생각은 안 하고, 알지도 못하는 년까지 찾아와서 재산을 나눌 생각을 해? 이래서 주워온 놈은 안 된다는 거야. 명새미라고 했나? 공식화되기 전에 없애야 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어떤 년인지 얼굴 한 번 보고 싶은데. 가능한가?”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그럼 전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예의 그 호텔로 모시러 가면 되겠습니까?”
“그래, 내일 보지.”
김 이사는 그냥 나갈까 하다 새로 온 아이가 있다는 지배인의 말이 다시 생각나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나마 H클럽은 그가 유일하게 마음대로 놀 수 있는 곳이었다. 거친 말과 거친 욕구를 풀어내도 돈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배지로 인해 쌓였던 공포를 풀어낼 기회였다.
경호원이 나가고, 곧이어 여자가 들어왔다.
얼굴보다는 몸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 온 아이라더니, 거짓말이었나?”
가슴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노골적인 가슴라인에 걸으면 엉덩이가 보일 것 같은 초미니 원피스를 입고서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여자였다.
여자는 그의 말에 피식 웃기까지 하며 한 번쯤 빼는 것도 없이 먼저 다가섰다.
“내숭 떠는 걸 원하셨나요?”
“이런 곳에서 내숭 떠는 여잔 취향이 아니긴 하지. 문신이 잘 어울리는군.”
김 이사는 여자의 당돌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오른팔에 새긴 문신마저 그 당돌함을 더 부추기는 무기처럼 보였다.
“우린 합이 잘 맞을 것 같네요.”
여자는 자신만만하게 더 진한 미소를 짓더니 다가서자마자 그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뭐 하는 짓이지?”
“뭐 하긴요, 이걸 하려는 거죠. 평가는 그다음에 해주시죠. 2차를 갈지 여부도. 대신, 전 좀 비싸요.”
여자는 검지와 중지로 들고 있던 콘돔을 입으로 찌익 찢어내곤 곧바로 그의 물건을 세워 끼웠다. 그리곤 애무 따윈 필요 없다는 듯 그대로 그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앉았다. 그녀는 안에 속옷조차 입지 않고 있었다.
“으음…… 당돌하긴. 이름이 뭐지? 예명 말고 본명.”
김 이사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자가 주는 쾌락에 잠시 몸을 맡겼다. 페니스를 조여대는 여자의 내벽이 제법 쓸 만했다.
“화선.”
“좋아, 네 2차를 사지. 얼마나 비싼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내 지갑을 털어 봐.”
“이제 시작이에요.”
여자가 몸을 흔들기 시작했고, 김 이사는 가만히 앉아서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여자의 몸은 생각보다 더 펄떡댔고, 내벽은 과격한 여자의 몸짓보다 더 과격하게 페니스를 조여댔다.
쾌락이 강도를 더해 가면서 그동안 배지를 생각할 때마다 느꼈던 공포도 점점 옅어져 갔다.
김 이사를 껴안고 몸을 흔드는 화선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맴돌았지만 김 이사는 보지 못했다.
화선의 옆구리 지퍼 안쪽에 배지가 있다는 사실은 화선의 몸을 빌린 영묵만 아는 사실이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드디어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