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16/20)

13장

서재로 향하는 신우의 손에는 방금 전 협탁 위에서 집어온 귀신상자가 들려 있었다. 가만히 상자를 살피던 신우의 눈가가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렇게 험하게 다뤘으니…….”

상자 여기저기가 마구 찍혀 있고 귀퉁이 부분은 틀어져서 자칫하면 틈이 벌어질 것같이 금이 가 있었다.

상자의 가치를 훼손시켜서가 아니라 선물 받은 것이기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복원가를 불러야겠군. 쯧, 다음부턴 호신용 무기라도 지니고 다녀야겠어.”

복원도 복원이지만 오늘같이 상자를 방패로 활용하지 않기 위해선 다른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서의 그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것의 정체가 뭐였든,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없어.”

달칵, 거칠게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선 신우의 입에서 어느 때보다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깍두기머리 남자가 칼을 날리던 순간을 떠올리니 또다시 몸 안에 한기가 고이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끼긱!

“아.”

급하게 손아귀의 힘을 뺐지만 아슬아슬 금이 가 있던 모서리가 결국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스스로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어 황당한 시선으로 상자를 쳐다봤다.

그 벌어진 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신우의 눈빛이 어느 순간 변했다.

신우는 상자를 불빛 가까이 가져갔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벌어진 작은 틈 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상자를 내려다보는 신우의 눈빛에 잠시 망설임이 일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우지끈!

벌어진 틈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거무튀튀한 상자를 완전히 뜯어내 버렸다.

견고한 상자였지만 이미 틈이 생긴 탓에 그의 힘을 견뎌내지 못했다.

겉상자를 걷어내니 속에 다른 상자가 또 있었다. 상자를 뜯어내다 손가락이 베여 핏물이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건…….”

새로이 드러난 검은 상자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에 잠시 넋을 놨다.

아름답게 빛나는 부분이 마치 승천하는 거북처럼 보이지만 이건 분명 현무였다.

신우는 저도 모르게 상자의 표면을 가만히 만졌다.

그런데 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에 묻은 핏물이 갑자기 상자 표면으로 스스스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놀라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다행히 놓치지는 않았다.

마치 피를 빨아들이는 것같이 스며든 핏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신우는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 순간 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달칵, 빈틈조차 보이지 않던 검은 상자가 갑자기 열린 것이다.

상자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보석에서 빛이 쏟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검은 밤을 낮으로 바꿀 것 같은 섬광이었다.

신우는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섬광에 노출됐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신우를 덮치고 들었다.

단순히 빛을 쐬었을 뿐인데 해일처럼 밀어닥친 빛무리가 마치 세포 하나하나를 다시 조립하는 것 같은 극렬한 고통을 동반했다.

“……!”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고, 얼굴이 시퍼렇게 얼었다가 시뻘겋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온몸을 태울 듯이 요동치던 빛무리가 신우의 몸속으로 온전히 빨려 들어가더니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털썩, 온몸으로 버텨내던 신우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툭! 데구루루!

쥐고 있던 상자가 바닥을 굴렀다.

책장에 부딪혀 멈춘 상자의 표면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문양이 어느새 거무튀튀하게 퇴색되어 있었다.

후우우!

길게 숨을 뱉어내며 숨을 쉬던 신우는 자신의 몸이 변화했다는 걸 느꼈다.

아주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매우 익숙한 본연의 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예전엔 없던 다른 기운이 하나 더 느껴졌다.

당황스럽게도 이건 아무래도 천계의 기운인 것 같았다.

강림차사가 말했던 그 천계의 기운인가 보다.

자신의 몸에 왜 난데없이 천계의 기운이 감도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이질적이어야 할 이 기운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자신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신우는 문득 힘이 돌아온 걸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신우는 가만히 귀에 기를 집중시켰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존재가 있는 곳, 자신의 침실에 귀를 기울이니 침실에서 자고 있는 주희의 새근대는 숨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

기쁨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탄식이 흘렀다. 비로소 힘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책장 옆에 제멋대로 구르고 있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단순한 귀신상자가 아니었다. 인간계의 물건이 아닌 신물이었다. 그것도 몸으로 직접 받아 본 그의 느낌으론 분명 명부의 신물이었다.

명부의 신물이 왜 인간계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신의 안배든, 인과의 법칙이든 그 어느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그에겐 힘이 필요했고, 때마침 신물의 도움으로 힘을 되돌릴 수 있게 됐다는 게 중요했다.

“이제 주희 널 지킬 수 있게 되었어.”

주희에겐 여전히 자신이 명부신이라는 걸 말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그는 만족했다.

그때, 서재 밖에서 누군가 다가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신의 힘을 잃었을 땐 읽을 수 없던 감각. 도깨비의 기운이었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래도 명색이 명부신인데 도깨비의 기운이 반갑게 느껴졌다.

“들어와.”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그가 먼저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서재 문이 열리고, 예상했던 대로 응산이 들어왔다.

“신우 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왜 바닥에……?”

응산의 눈에 걱정스러운 빛이 담기는 것을 본 신우가 또다시 피식 웃었다.

도깨비는 신들만큼이나 정이 없다고 들었는데, 응산은 아무래도 예외인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힘이 빠졌어. 그래, 갔던 일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장례식장의 그놈들 얘기를 물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현와원 정원에 아주 미세하지만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신우의 눈매가 순간적으로 가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팟!

응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로부터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신우가 다시 나타났다.

“정원에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들었나 보군. 너무 오랜만에 힘을 회복해서 좀 예민했나.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신우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었지만 응산은 온몸을 긴장시킨 채 신우를 경계했다.

“누구십니까? 신우 님을 어떻게 한 겁니까?”

응산이 허공에서 도깨비검까지 소환해내며 당장이라도 덤벼들 태세로 싸늘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신우는 한동안 응산을 빤히 쳐다봤다.

“……이거, 기분이 묘한데.”

박신우란 인물을 지키기 위해 신의 힘을 가진 존재에게도 덤벼들 태세를 취하고 있는 응산을 보니 생각보다 더 기쁜 나머지 자꾸 웃음이 나려고 했다.

“명부신이신 거 같은데, 신우 님을 어떻게 하신 겁니까?”

신우의 동문서답에 응산의 기가 더 날카로워졌고, 검끝이 신우를 향했다.

“응산, 날 지켜주겠다는 마음은 고마운데, 앞으로 다른 신을 만나면 이렇게 칼 겨누지 마. 신들의 성정이 대체로 곱지 않아서 네가 위험해질 테니까. 대신 내일부터 주희를 경호할 때만큼은 이렇게 나를 지키듯 최선을 다해 주면 좋겠어.”

내일부터 응산이 주희의 경호를 하게 된 건 신우와 응산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응산의 눈빛에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내가 진짜 박신우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뭘 더 얘기해야 하지? 서재 창밖에 보이는 정원에 심어놓은 작약 구근이면 되나?”

좀 더 확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 같아 작약 이야길 했더니 그제야 완전히 이해했는지 도깨비검이 사라졌다.

하지만 응산의 눈빛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의 빛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거지?”

“하지만…….”

“놀랄 거 없어. 그냥 잃었던 힘을 되찾은 것뿐이니까. 이것 덕분에.”

마치 잃었던 물건을 되찾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현을 쓰며 신우가 책장 앞에 떨어져 있던 상자를 주웠다.

“그건.”

“맞아. 제신리에서 가져온 그 귀신상자야. 이건 단순히 귀신상자가 아니었어. 내 힘이 다시 돌아온 걸 보면, 아무래도 명부의 신물인 거 같아.”

“신우 님, 명부신이셨습니까? 그래서…….”

순간 그래서 염라대왕이 직접 부탁한 거였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거기까지 묻진 않았다. 신우가 아직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먼저 말을 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예전엔. 지금은 아니야. 명부에서 난 이미 잊힌 존재거든. 그러니까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힘을 찾았다 해도 난 지금까지 네가 알고 있던 그 박신우일 뿐이니까. 누군가를 지켜내는 데 조금 더 수월해진 것 외엔 어떤 변화도 없어. 그래서, 그놈들은 어떻게 됐어?”

명부에서 잊힌 존재.

신우의 말을 들어도 짐작이 가지 않아 염라대왕의 이야긴 더 꺼낼 수 없었다.

“유치장에 넣고 왔습니다. 그 아이가 처한 상황도 같이 전했으니 법무팀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할 땐 우선 계약에만 충실해야 했다.

마응산이 새로이 계약을 맺은 상대는 박신우이니 그는 박신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신우가 계속 명부에서 잊힌 존재로 살길 원하는데 굳이 그가 나서서 설레발을 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지금의 신우가 원하는 대로 그저 주희를 지키는 데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정원 한편의 어둠 속, 그런 신우와 응산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너무 놀라 신우에게 들킬 뻔하긴 했지만 다행히 신우가 눈치채기 전에 기를 완전히 숨긴 염라였다.

기쁨으로 떨리는 눈동자는 짙은 어둠으로도 숨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명부의 신물이 신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네가 인간계에 남길 원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명부에서도 딱히 정을 붙이지 못하던 아이였다. 그러니 신우가 인간계에 남길 원한다면 굳이 신우를 다시 명부로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단 하나, 그 이유가 주희 때문이라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 * *

다음 날.

현와원의 아침은 난장판이 된 주방일로 주방직원들은 물론이고 전 직원이 동원돼 여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슥슥슥!

주방에서 밀대로 바닥을 닦고 있던 여직원 하나가 걸레질을 하다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탁 밀대를 집어 던졌다.

“아이씨, 더 이상은 못 해! 야, 종우. 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여기 일 없다며? 그런데 이게 뭐야? 주말에 불려 나오질 않나, 물바다가 된 주방 청소를 하질 않나. 막노동을 해도 이보다 더 힘들진 않겠다.”

새로 채용된 지 2주일밖에 되지 않은 신입 직원이 주방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친구를 향해 바락 짜증을 부렸다.

“미, 미안, 화선아. 하지만 정말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회장님, 집에서 식사도 안 하실 때가 많아서 정말 한가한 곳이란 말이야.”

화선을 이 집에 추천한 순둥이 종우가 같이 밀대질을 하다 말고 움찔 놀라며 변명을 했다.

“지랄. 페이가 두 배? 그럼 뭐해? 내 허리가 먼저 망가지게 생겼는데!”

“여, 여긴 내가 다 할게. 화선이 넌 좀 쉬어.”

“너 바보니? 주방장이 자기 올 때까지 다 해놓지 않으면 잘라 버리겠다고 한 거 못 들었어? 넌 내가 잘리는 거 보고 싶지?”

“그런 게 아니라, 난 그냥 네가 너무 힘든 거 같아서…….”

이래도 짜증, 저래도 짜증. 화선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짜증을 부려댔지만 종우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아우, 짜증나. 그 여잔 아무리 봐도 예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던데, 도대체 어떻게 회장님을 홀린 거지?”

화선이 현와원에 취직한 건 페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혹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바로 박신우 회장이었다.

집주인이 혈기왕성한 젊은 회장이라고 해서.

절대 남에게 빠지는 외모가 아닌 화선은 어떻게든 회장의 눈에 띄어 보려 갖은 애를 다 썼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회장은 모든 여자를 마치 썩은 고목나무처럼 취급했다.

그래서 당연히 취향이 여자가 아닌 남자 쪽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여자를 데려왔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일까, 얼마나 대단한 집안일까 궁금했었다.

하지만 질투했던 게 무색하게 키도 작고 예쁘지도 않은, 아주 평범하디평범한 여자를 데려와 마치 여신 떠받들듯 모시고 있었다.

오늘 이 난장판이 된 물바다도 그 여인을 위해 직접 요리를 하려다 벌어진 사태란 소문이 돌았다.

차 실장이나 다른 고용인들은 이제 예전처럼 다시 현와원이 활기를 띨지도 모른다고 좋아했지만 화선이 보기엔 다들 미친 사람들 같았다.

일거리가 늘어나는데 왜 좋아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군 허리 부서져라 바닥을 닦고 있는데, 어떤 여잔 아직도 침실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다니 세상 참 불공평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돈은 벌어야 했다.

주방 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화선은 재빨리 밀대를 다시 집어 들고 열심히 바닥을 닦았다.

“뭐야, 아직 다 못 했어? 빨리해, 빨리! 주희 님 깨어나시기 전에 요리 나갈 수 있게 빨리하라고!”

“어머, 주방장님! 저 이 연약한 팔이 보이지도 않게 열심히 밀대질 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 돼요.”

화선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적응을 하지 못한 종우만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주방직원도 아닌 화선이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종우 넌 왜 멍청히 서 있는 거야? 빨랑 안 움직여!”

주방장의 불똥이 종우에게 튀었지만 화선은 태연했고, 종우도 반박하지 않았다. 묵묵히 같이 밀대질을 할 뿐이었다.

십여 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모두 주방과 식당을 오가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신우의 침실 근처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다 들릴 만큼 조용했다.

침실 근처엔 무슨 일이 있어도 얼씬거리지 말라는 집주인의 강력한 지시 때문이었다.

신우의 침실은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고요했다.

주희의 새근대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침실 공간을 지배하는 소리의 전부였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다.

침대가에 앉아 주희를 지켜보는 신우의 얼굴에 점점 걱정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제 너무 무리하게 관계를 가진 자신의 탓인 거 같아 더 그랬다.

“좀 더 자중했어야 하는데……. 혹 저것 때문에 더 못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주원인이야 이미 뻔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너무 애가 타는 탓에 괜스레 어젯밤 고당에서 가져다 놓은 박쥐 촛대를 탓했다.

현대식 킹사이즈 침대와는 어울리지 않게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백동 박쥐 촛대.

고풍스럽다기보다 골동품에 가까운 촛대였지만 주희가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거 같아 가져다가 향초를 밝혀 두었다.

“향초를 너무 오래 켜뒀나?”

생각과 동시에 탁,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바람 한 점 없던 실내에서 타오르던 촛불이 갑자기 훅 꺼졌다.

촛불이 꺼지며 잿빛 연기가 가는 실선을 그리면서 올라갈 때였다.

주희에게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의 눈꺼풀이 올라가고 있었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지 몇 번 눈을 떴다 감았다 반복했다.

신우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투명한 구슬 같은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너무 늦잠을 잤나 봐요.”

눈을 뜨자마자 신우와 시선이 마주친 주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잠이 깨지 않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니, 피곤하면 더 자도 돼.”

신우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태연하게 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창밖을 본 주희의 눈동자가 놀라 휘둥그레졌다.

“태양이……. 며, 몇 시예요? 출근해야…… 앗!”

이불 속의 몸이 알몸이란 사실을 잊은 채 튕기듯 몸을 일으킨 주희가 더 놀라 허둥지둥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음…… 넌 어떻게 갈수록 예뻐지는 거지? 너무 반짝거려서 이러다 눈이 멀어 버리는 게 아닐까 겁이 나.”

“너무 과한 립서비스네요.”

“립서비스 아니야. 난 네 아름다움을 얘기할 땐 항상 진실만 얘기해.”

무슨 남자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입에 기름 바른 듯 매끄럽게 하는지.

“그 말이 왜 또 책임지라는 말로 들리는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책방 출근해야 하니 좀 나가 있어 주세요.”

오늘쯤 장례식이 어떻게 됐는지 묻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로 보면 전화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번엔 특별한 경우이니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하실 것 같았다.

만약 이미 전화가 왔고, 도 실장이 곧이곧대로 얘기해 버렸다면 손쓸 방법이 없겠지만 우선은 출근이 먼저였다.

“얼른요.”

마음이 다급해 또다시 재촉하자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싫어.”

그리고 돌아온 건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싫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가지 않겠다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을 게 아니라 깨웠어야죠. 외박한 것도 모자라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는데 도 실장님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시겠냐고요!”

저도 모르게 눈을 흘기며 화를 냈다.

“뭐긴, 당연히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같이 보냈구나 했겠지. 그리고 생각만이 아니라 이미 어젯밤에 다녀갔어.”

“……어, 어젯밤에 도 실장님이 다녀갔다고요? 내,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봤고요?”

“협탁 위에 네 새 옷 가져다 놓고 갔어. 조만간 도깨비길을 막아 버리든지 해야지, 현와원을 아주 제집 드나들듯 하더군.”

말문이 막히다 못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낯빛이 하얘졌다가 이내 귓불까지 시뻘게졌다.

“신우 씨!”

“흥분할 거 없어. 도깨비 경력이 얼만데. 제 주인 잠자리 후의 모습 보는 거 처음도 아닐 테니 신경 끄고 죽이나 먹어. 주방장이 전복죽 준비해 줬어.”

“당장 나가요.”

옆에 있는 베개라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신우가 방어막처럼 죽 그릇을 들고 있어 던지지도 못했다.

“이거 다 먹으면. 자, 아 해.”

이런 와중에 아, 하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재난 상황인지 모르겠다.

너무 어이없어 눈을 흘겼지만 신우의 똥고집 눈매로 봐서는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이럴 땐 같이 고집을 피워봐야 그녀만 손해였다.

못마땅하면서도 앞에 내밀어진 숟가락을 제비 새끼처럼 받아먹었다.

그런데 전복죽 맛은 그녀의 기분과는 별개였다.

입에 착착 감기는 고소한 감칠맛은 신경을 곤두세웠던 그녀의 까칠함을 걷어낼 정도로 맛있었다.

“주방장이 신경 좀 썼다던데, 맛 괜찮아?”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다행이다. 자, 아아아.”

그는 이런 소름 돋을 정도의 닭살 행동들이 재밌는 모양이다.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이것도 익숙해지는 것인지, 휴게소에선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더니 지금은 음식 맛에 집중이 됐다.

사양 한 번 하지 않고 잘도 오물거리며 납죽납죽 받아먹었다.

“더 가져오라고 할까?”

어느새 하얀 백자 죽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처음 눈을 흘겼던 게 미안할 정도로 죽은 너무 맛있었다.

“아뇨, 많이 먹었어요. 배불러요. 그보다 이제 다 먹었으니까 약속대로 나가 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죽이 맛있어도 시간을 더 지체할 순 없었다.

달그락, 신우가 죽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래, 그럼. 이제 출근 준비하러 가야지.”

“앗! 뭐, 뭐 하는 거예요?”

신우가 갑자기 이불을 확 벗겨내더니 그녀를 달랑 들어 안았다. 주희가 놀라 버둥거리는데도 아랑곳없이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어제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힘들 거 아냐. 걷기 힘들 것 같아서 내가 도와주려고.”

“괜찮아요, 괜찮아. 전혀 힘들지 않아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 혼자…….”

주희가 기겁을 하며 최선을 다해 혼자 씻겠다고 외쳤다.

“그래? 그럼 지금 다시 하는 것도 가능해? 나 사실 아까부터 많이 참고 있거든.”

신우가 힐끗 자신의 아래를 쳐다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농담으로라도 받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안 돼요. 절대. 지금은 절대 안 돼요.”

어물쩍 그의 말을 받아 줬다간 오늘 출근은 완전히 물 건너갈 것 같았다.

“지금은 안 된단 말이지.”

“네, 절대로.”

“하는 수 없지. 내가 좀 참는 수밖에. 오늘 밤까지 기다리지.”

“오늘 밤…….”

또 그의 술수에 당한 것 같았다. 주희는 멍하니 오늘 밤을 중얼거렸다.

“오늘 밤. 더 이상은 양보 안 돼.”

멍하니 오늘 밤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신우가 딱 잘라 말했다.

사실 그와의 관계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온몸이 떨릴 정도로 좋았었다.

그런데도 망설여지는 건, 그 전율스런 감각에 너무 익숙해져 버릴 것 같아서다.

이미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발을 담가 버렸다는 걸 아는데도 자꾸만 주춤거리게 된다.

그에게 빠져든 만큼, 그를 기억하는 아픔도 클 것 같아서.

남은 수천 년의 시간을 그와의 기억에 갇혀 지내게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인간의 한평생이 너무도 짧다는 걸 알기에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기도 했다.

“좋아요. 대신 도 실장님을 잡음 없이 설득하는 건 신우 씨 몫이에요. 안 그럼 오늘 밤도 없어요.”

“도 실장을?”

뭔가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지만 생각에 빠져드는 것으로 보아 도 실장을 어떻게 회유할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네, 도 실장님을요.”

그렇게 두 사람은 오늘 밤을 전제로 타협을 봤고, 늦은 출근을 서둘렀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다가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응산은 아니었다.

침실 근처엔 누구도 얼씬거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무슨 일이지, 생각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회장님.”

그가 들어오라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와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려 주희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는데도 주희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덩달아 신우의 얼굴도 싸늘하게 굳어졌다.

고개만 돌려 문 앞에 선 이를 보니 몇 번 본 적이 있는 현와원 여직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키운 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매우 불쾌했다.

“나가.”

“앗, 죄송합니다. 주방장님께서 식사를 어떻게 하실 건지 여쭤 보라고 하셔서…….”

“나가.”

“앗, 죄송합니다.”

싸늘한 말을 두 번 반복하고야 직원이 다급하게 나가며 문을 닫았다.

“신우 씨, 내려주세요.”

주희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변해 있었다.

지금까진 그의 억지를 제법 호의적으로 받아 주었으나 이제 아니라는 뜻이었다.

신우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씻고 나올게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좀 더 따끈따끈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는데 한순간에 그들만의 시간을 깨버린 문제의 직원에게 원망의 화살이 날아갔다.

“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내 지시를 어겼어.”

침실을 드나들면서 안에서 대답이 있기도 전에 문을 여는 아주 기본적인 지침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현와원의 직원이라니.

신경을 집중하자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방금 그 여직원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아우, 재수 없어. 저 여자 정말 뭐야? 지가 무슨 공주라도 되는 줄 아나.”

그 짜증스런 말이 신우의 차가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넌, 오늘부로 해고다.”

주희를 나쁘게 말하는 이는 그 누구라도 현와원에 둘 생각이 없었다.

* * *

“이실직고해. 어젯밤 어디 있었던 거야?”

누구한테 소식을 들은 건지 새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자신의 가게엔 ‘잠시 외출 중입니다’라는 문구까지 걸어 놓았단다.

그리곤 벌써 몇 번째 비슷한 질문으로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

도 실장이 웬일로 그녀에 대한 얘기를 아직 떠벌리고 다니지 않은 모양이다.

“장례식장에…….”

“설마,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고 이 시간까지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려는 건 아니지? 이번엔 도 실장님도 입을 딱 닫아 버리고. 뭐니?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네가 누구랑 장례식장에 갔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사실대로 말하기 난감해 장례식장을 핑계로 대보려 했지만 역시 눈치 빠른 새미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게…… 현와원에…….”

주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장례식장에서 죽을 뻔한 일이 있었긴 하지만, 새미가 걱정할 걸 알면서 그 얘기까지 할 순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대답은 단순히 연애 감정에 불타올라 현와원에서 밤을 보내고 온 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현와원의 밤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팩트였다.

새미가 듣고자 하는 게 그녀가 남자랑 잠을 잤느냐의 여부였고,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실제로 신우와 뜨거운 밤을 보냈으니.

“대박! 젊은 남녀가 한집에 있었는데 고이 잠만 자지는 않았을 테고. 내 19금 상상이 맞는 거지? 이주희, 정말 대견하다, 대견해. 너한테 남자라니……. 그것도 하필 상대가…… 세상에!”

새미가 호들갑을 떨다 뭔가를 상상했는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걸 아는 주희의 얼굴도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

“야, 여기서 네가 얼굴을 붉히면 어떡해! ……그렇게 좋았어? 그 사람, 그렇게 좋아?”

“그런 것 같아.”

“기집애! 생각하는 척도 않고 곧바로 좋다는 거 봐. 어쨌든 축하한다, 축하해. 그런데 여기 왜 이렇게 덥냐? 난방 좀 끄자.”

새미가 얼굴에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며 그녀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새미의 얼굴이 달아오른 만큼 주희의 얼굴에 오른 열도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 그러자. 좀 더운 것 같아.”

도 실장이 밥 차려오겠다며 안채로 들어가는 걸 말리지 않은 게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도 실장이 지금까지 어떤 추궁도 않고 있어 그녀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바락바락 따지고 드는 게 더 마음 편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외박 건에 대해선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주희야, 이 히터 바꿀 때 된 거 아냐? 곰팡이 냄새가 좀 심해진 것 같아.”

“할아버지 때부터 쓰던 거라 15년은 됐…….”

새미가 괜히 무안해서 하는 소리란 걸 알았기에 그녀도 별 의미 없이 대답할 때였다.

주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가게 밖을 내다봤다.

신참차사였다.

딸랑!

차사가 가게 앞에 나타나는가 싶더니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보지 못했는지 슈욱 유리문을 통과해 책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희 씨!』

당황한 주희가 힐끗 새미를 보는 사이, 더 기함할 일이 벌어졌다.

“주희 씨, 저 이제 현신할 수 있게 됐어요. 스승님께서 도와……. 으악! 인간이!”

차사의 모습 그대로 현신해 그녀 앞에서 기쁜 듯 춤추며 빙글 돌기까지 하던 차사가 뒤늦게 새미를 발견했는지 비명을 질러댔다.

주희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몰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주희야, 오늘 이 근처에 사극 촬영 있니? 저 칠렐레팔렐레 예쁜이는 처음 보는 남자네? 어떤 사이야?”

“아무 사이도 아냐. 그냥 몇 번 일 때문에 마주친 것뿐이야.”

다행히 새미의 오해로 차사의 일은 쉽게 해결이 될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신참차사를 나무라듯 흘겨봤다.

“그런데 주희야, 음…… 혹시 네 그 대단하신 남자친구도 저 예쁜이와 아는 사이니? 내가 본 박신우의 표정 중 가장 험악하게 살 떨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새미의 말에 휙 고개를 돌려 가게 밖을 보니 신우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신우의 시선이 현신해 있는 신참차사에게 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신우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 자리가 무척이나 거북하게 느껴졌다.

“저녁에 오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재계약 계약서 때문에 왔는데 여기 있어선 안 되는 놈이 있군. 제 직무가 뭔지조차 잊은 건가?”

히터를 끈 탓인지, 아니면 신우의 싸늘함 때문인지 책방 안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하지만 신우가 차가워진 이유보다 차사가 왜 이곳에 왔는지가 더 궁금해 주희도 신참차사를 빤히 쳐다봤다.

좌불안석이 된 차사가 새미를 쳐다봤다가 주희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삼각인지 사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는 쌓아 두면 독이 되지. 자, 자, 두 분. 이 집이 오래되긴 했어도 기둥 안 무너지니 자리에 좀 앉아서 얘기하시죠. 주희 너도. 신우 씬, 그 눈에 힘 좀 푸시고요. 딱 봐도 신우 씨 살기를 받기엔 너무 연약해 보이는데 좀 살살 하시고요. 그런데 예쁜 자긴, 이름이 뭐야?”

모르면 더 강하다고 했던가?

새미는 이곳의 주인 역, 마담 역을 자처하며 감히 차사에게 동정표를 주는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물었다.

“전륜……입니다.”

그런데 차사는 새미를 보는 게 아니라 주희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절륜? 으음, 어디로 보나 별로 절륜해 보이진 않는데. 과하게 힘이 많이 들어간 이름이네.”

맙소사! 반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름으로 비꼬기까지.

차사가 제대로 화나기 전에 새미를 멈춰야겠다 생각했다.

“절륜이 아니라 전륜입니다. 스승님께선 절 륜이라 부르시고요.”

하지만 이번에도 차사는 새미를 아주 잠시 힐끗거리기만 했을 뿐 주희를 보며 답했다.

“륜? 오, 이렇게 부르니 느낌이 좀 새롭긴 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지? 히터를 꺼서 그런가. 히터 다시 켤까, 주희야?”

차사를 쳐다보는 시선이 점점 더 무시무시해지고 있는 신우의 모습이 주희의 눈에도 잡혔다.

“새, 새미야. 나 계약서 다시 써야 할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될까.”

“아참, 신우 씨 계약서 때문에 왔다고 했었지. 잘됐다. 나도 궁금증 해결됐으니 이만 가봐야지. 나중에 봐. 륜아, 너도 다음에 또 보자.”

새미가 시계를 힐끗거리더니 차사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이고는 쿨하게 책방을 나갔다.

그리고 나가면서 신우에게 귓속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질투하는 남잔 매력 없어요. 내 말 명심해요.”

질투.

새미의 말에 전륜차사를 쏘아보던 신우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륜 차사 님, 현신할 수 있게 된 거 축하드려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주희는 신우의 눈치를 보며 차사에게 조심스레 용건을 물었다.

그런데 차사가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마치 기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뭘 물어? 또, 영을 놓친 거겠지.”

신우가 방금 전 들은 새미의 말은 잊었는지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며 까칠하게 말했다.

“주희 씨, 제가 그만큼 경고했는데 왜 아직도 저놈을 가까이하시는 겁니까? 하루빨리 인연을 끊으시는 게 좋다니까요.”

주희를 보던 시선과 달리 신우를 쳐다보는 차사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신우는 주희에게 인연을 끊을 것을 조언하는 차사로 인해 자칫 주희 앞에서 기를 뿜어낼 뻔했다.

하지만 이를 꽉 다물며 냉랭하게 노려보는 것으로 화를 참아냈다.

“오늘 제가 온 건 주희 씨에게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섭니다. 업경대의 기록을 조사해 본 결과, 정말로 세 명 다 그 배지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한 문화재연구소 배지들 모두 그런 건지는 아직 모릅니다. 배지에 대한 조사가 끝날 때까진 혹시나 배지를 보게 돼도 되도록 만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사의 얘기를 듣던 신우는 문득 주희가 가지고 있던 배지가 생각나 주희를 쳐다봤다.

“배지라면 저도 하나 가지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이번에 한 문화재연구소 일을 맡게 돼서 받아오셨거든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조사할 때 참고가 되면 좋겠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배지에 대한 이야길 했다.

“아니야. 내가 가져오지. 넌 여기 있어.”

위험한 물건이라면 잠시 잠깐이라도 주희의 손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 신우가 나설 때였다.

달칵, 안채 문이 열리고 도 실장과 석이 나타났다.

“어? 박 회장님……. 우아아악! 이 망할 놈의 차사! 왜 또 온 거야? 모습 좀 바꿨다고 내가 네 구린 냄새를 못 맡을 것 같아? 훠이, 훠이. 꺼져라, 꺼져! 여기가 무슨 차사흥신소라도 되는 줄 알아? 꺼져라. 훠이, 훠이!”

도 실장이 혹시나 해서 책방에 준비해 둔 소금과 팥을 마구 뿌려댔다.

도 실장의 머리 위에 있던 석이마저 카아악 소리를 질러댔다.

전륜차사의 턱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고, 주희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신우만큼은 아주 흡족한 시선으로 도 실장과 석을 쳐다봤다.

“도 실장니이임, 그만하시고 안채에 들어가서 배지 좀 가져다주세요. 륜 차사 님 말씀이, 그 배지가 위험한 물건일지도 모른대요.”

차사가 검을 뽑아 들기 전에 둘을 떼어놔야 도 실장이 덜 위험할 것 같아 도 실장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배지요? 박사님이 주신 그 배지요? 우씨, 내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박 회장님! 제가 안채에 다녀올 동안 우리 주인님 좀 부탁합니다. 밤을 같이 보낸 사이이니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죠?”

이게 무슨 말인지.

도 실장의 폭탄 발언에 주희는 질끈 눈을 감으며 신음 소리를 삼켜야 했다.

“물론이지. 밤을 같이 보낸 것뿐 아니라 마음도 같이 나누는 사이이니, 난 영원한 주희의 기사다. 그러니 당연히 주희를 지켜야지.”

“좋아요. 우리 주인님의 남자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죠.”

도 실장이 엄지를 척 들어 보이곤 책방에서 사라졌다.

“저, 정말입니까? 주희 씨가 밤을……. 아니, 왜 저런 놈과…….”

차사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희를 쳐다보며 표정만큼이나 넋 빠진 질문을 했다.

왠지 그냥 지나쳐선 안 될 것 같은 차사의 말투에 주희가 감고 있던 눈을 떠 차사를 똑바로 쳐다봤다.

“차사 님, 제가 신우 씨와 밤을 보내든, 사랑을 나누든 그건 차사 님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또 언제 뵙게 될지 모르겠지만, 신우 씨에 대한 말은 삼가 주세요.”

주희의 단호한 말에 신우의 가슴에서 때 아닌 꽃이 폈다.

“아, 아니. 난 그냥 주희 씨가 좀 더……. 아, 아닙니다. 주희 씨 말이 맞아요. 주희 씨의 인생인데 차사가 관여해서 좋을 일은 없죠.”

차사가 이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되어서 차사 일은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될 정도로 심하게 속이 다 읽혔다.

그런 차사의 얼굴을 보고 있던 신우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땅으로 꺼질 듯 한숨까지 쉬는 차사를 보니 주희의 마음도 영 편치 않았지만 차사를 다독일 순 없었다.

받아 주지 않을 거면 처음부터 냉정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다행히 침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여깄어요. 가져가요.”

도 실장이 돌아와서 마치 불길한 물건을 던지듯 배지를 차사에게 주었다.

“그동안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되도록 늦게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차사는 도 실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주희만을 쳐다보며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인사를 마음 아파하며 했다.

그리곤 이내 팟, 허공으로 사라졌다.

“뭐야? 무슨 꿍꿍이속이길래 차사가 저따위 표정을 짓지? 주인님, 또 뭐 부탁받았어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도 실장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 주희를 봤다.

“그런 거 없어요. 륜 차사 님이 마음이 좀 여린 분이라서 그래요.”

“차사가 마음이 여려요? 헐, 도깨비 생애 처음 들어 보는 말이네요. 그것도 인간의 입에서. 그건 그렇고, 박 회장님께선 어쩐 일이세요? 우리 주인님 눈에 들려면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그 예로, 주인님은 전대 박 회장님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설마 또 일을 내팽개치고 오신 건 아니겠죠?”

이미 회장직을 내려놓을 생각이었던 신우는 뜨끔했다. 아무래도 일에 대해선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회장직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일을 더 봐줄 차 실장의 이사 승진을 더 빨리 추진하는 방향으로.

“지금 온 건 계약서 때문이야. 아직 공식적으론 두 번의 맞선뿐이었지만 지금 재계약을 해도 좋겠다 싶어서. 뭐, 다음에 써도 좋다면 다음에 다시 와도 되고.”

신우가 속마음은 숨긴 채 도 실장을 도발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주희의 관심을 사라진 차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돌릴 수 있었다.

“계약! 재계약요! 앉으십시오, 박 회장님. 어떤 차를 내올까요?”

도 실장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다 못해 귀에 걸렸다. 태도가 왕을 영접하듯 공손해졌다.

신우는 주희를 가만히 바라보며 새로이 가져온 계약서의 계약 기간이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라는 말은 미리 하지 않았다.

* * *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진 아무도 서재로 들이지 마.”

“알고 있습니다.”

한 소장의 말에 고용인 최 씨가 우직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꽤 많은 고용인을 두었었지만 최 씨만큼 우직하게 곧이곧대로 행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 덕에 최 씨는 올해로 벌써 5년째 이 집에서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근 한 소장은 곧장 수묵화가 그려진 비밀 벽장을 열었다.

그리고 캐리어에 담아갔던 향로를 조심스럽게 꺼내 돌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스르르, 벽장 문이 닫히고 희미한 벽등만이 켜졌다.

“이제 술법을 건 배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

칙, 향을 피우며 한 소장의 몸을 빌린 영묵이 빨갛게 타오르는 향을 보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의 피로 술법을 건 배지를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들어 번번이 경찰에서 배지를 증거품으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상자는 박 회장이 가져갔겠지. 그럼 현와원에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을 물색해 봐야 해.”

현와원 직원들에게 빙의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둠의 술법으로 빙의를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작은 어둠이라도 있어야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탐욕과 시기, 질투, 나태, 분노, 색욕, 혹은 앙심과 같은 감정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있으면 빙의가 가능했다.

아주 가끔 빙의가 되지 않는 인간이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박 회장의 경호원이 도깨비라는 거였다.

인간의 몸에 빙의했을 때는 명부의 기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래도 눈치 빠른 놈이라면 신경이 쓰였다.

영묵은 돌침대에 몸을 뉘었다.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니 그리 힘들진 않겠지만 가장 적절한 인물을 물색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먼저 현와원 직원들이 의심하지 않게 누가 배지를 지니고 다니게 하느냐가 중요했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한눈에 반할 만한 놈이어야겠지. 그렇다면 그놈뿐이겠군.”

가끔 색욕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녀석이 떠올랐다.

부끄러움이 많은지 항상 안경과 넉넉한 점퍼로 몸매를 가리고 다니는 놈이었지만 벗겨놓으면 가히 최고라 해도 좋았다.

색욕을 채우기 위해 몇몇 다른 남자들에 빙의해 봤지만 여자들이 가장 만족스러워하는 물건을 가진 놈은 그놈뿐이었다.

“귀찮아. 어서 이런 잡스런 술법을 쓰지 않게 돼야 해.”

명부신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같이 항상 한진태의 몸을 빌려야 한다는 게 점점 짜증스러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진태 소장의 몸을 오래 비울 수도 없었다. 한진태의 영혼을 이미 파괴해 버렸기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한진태의 몸은 바로 시체화되어 버린다.

그의 피로 만든 향이었지만 연기에 의존하는 건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짜증스런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기를 집중시키자 위로 뻗어 올라가던 향이 영묵의 몸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잿빛 연기가 점점 기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영묵이 사라진 한진태의 몸은 곧 시체처럼 변했다.

현와원 직원들의 퇴근 시간이었다.

정문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고, 각자 자신들이 타고 온 차에 올라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조금 뒤늦게 두 사람이 더 나왔다.

“아악! 내가 왜? 내가 왜 잘려야 하는데!”

정문을 나서자마자 발광하며 바락 고함을 지른 여인은 화선이었다.

“회장님께 가서 식사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라고 한 건 주방장이었단 말이야. 아악! 짜증나!”

“하지만 차 실장님 말론, 침실에 들어가면서 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고…….”

“그래서 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하지만 현와원의 기본 근무지침 사항이 회장님 침실과 서재잖아. 항상 조심하라고. 그런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월급을 두 배 더 주는 거라고 명시돼 있고.”

“뭐야? 종우 넌 누구 편이니? 지금 내가 잘렸는데도 현와원 편을 드는 거니? 그런 거야?”

맹한 목소리였지만 따박따박 대꾸해대는 종우가 화선의 신경질을 더 크게 돋웠다.

화선은 종우를 사납게 쏘아보며 사납게 짖었다.

“아니, 난, 난, 당연히 네 친구니까 네 편이야. 하지만 일단 잘못했으니 사과부터 하자. 그리고 내일 다시 부탁해 보자. 응? 화선아.”

“시끄러! 그 꼴을 당했는데 어떻게 또 가? 아우, 열 뻗쳐! 이대로 집에 들어갔다간 잠도 못 잘 것 같아. 난 한잔하고 들어갈래. 술이라도 들어가야 이 꿀꿀한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아. 넌 어떡할래?”

“어, 저, 난 술 못하잖아……. 아냐, 아냐. 같이 갈게. 가자. 네 기분이 풀린다면 가야지.”

화선은 그렇게 또 호구 하나를 엮어 자신의 술지갑으로 확보했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차에 올랐다. 화선의 차를 따라 종우의 차도 같은 곳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한가하게 차에 기대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현와원 직원 중에 너 같은 애가 있었군. 훗, 아주 쉽게 홀릴 수 있겠어.”

연예인 수준의 훤칠한 미모를 지닌 몸에 빙의한 영묵이 맞춤인 듯한 먹이를 발견하고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영묵은 두 사람의 행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차에 올라 그들의 뒤를 따랐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술집 거리, 바에 앉은 화선과 종우의 밤이 깊어갔다.

종우는 싱글몰트 한 잔에 이미 나가떨어져 있었다.

“바보. 도움이 안 돼. 발렌타인30이나 먹어 버릴까 보다.”

화선이 다시 채워진 잔을 홀짝 마시곤 툴툴거릴 때였다.

“죄송하지만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오늘 같은 날은 집적거리는 남자도 싫어 저리 꺼지란 말을 하기 위해 돌아봤다. 순간 화선의 두 눈동자가 대놓고 커질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묻고 있었다.

“앉으라고 있는 자리잖아요.”

“감사합니다. 여기, 발렌타인30. 이 아름다운 여성분에게 먼저 따라 주시고요. 제가 한잔 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수완이 좋으시네요. 마침 필요할 때 다가오시는 걸 보니.”

“당신같이 아름다운 분이 흔한 건 아니니까요.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죠.”

그렇게 수작과 수작질이 난무하는 여우와 악마의 밤이 깊어갔다.

술이 술을 먹어 아주 작은 경계심마저 모두 사라진 밤, 화선과 영묵은 자연스럽게 호텔로 향했다.

“난 좀 거친 걸 좋아하는데 괜찮겠어?”

“나도 마찬가지예요. 미적지근한 건 제 취향이 아니죠. 얼굴만큼 물건도 확실한가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어 던진 화선의 노골적인 시선이 마주 헐벗기 시작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직접 넣고 판단해.”

사내가 풀어 헤친 셔츠만 걸친 채 하의까지 벗어 던진 순간 화선은 숨을 멈췄다. 말쑥한 얼굴과는 달리 아주 흉측한 물건이 벌겋게 달아올라 끄덕대고 있었던 것이다.

“기술도 좋았으면 좋겠네요.”

화선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기분 좋은 비음 소릴 냈다.

“여긴 방음이 잘되는 모양이더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도 될 거야.”

사내가 화선의 몸을 거칠게 잡아채 침대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꺄악!”

살짝 놀란 화선이 흥분해 작은 비명을 질렀다.

키스나 전희 따윈 없었다.

벌거벗은 화선의 몸을 엎드리게 하더니 거칠게 머리를 누르고 허리를 치켜세웠다.

두 손으로 화선의 둔부를 단단히 고정한 남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페니스를 뒤에서부터 거칠게 푹 박아 넣었다.

“하악!”

여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고통이 아닌 쾌락의 몸부림이란 걸 영묵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엎드린 여자의 뒤통수만 보며 스윽스윽, 질척거리는 여자의 내벽을 드나들었다.

음탕한 욕망을 뿜어내는 여자가 자신의 물건을 먹어갔고, 그도 오랜만에 꽤 괜찮은 음욕을 맘껏 채웠다.

철퍽! 철퍽!

살과 살이 쉼 없이 부딪쳤고, 여자의 안에서 흘러내린 물이 젖은 소리를 내며 더욱 음탕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하악! 더 세게! 더 세게요!”

여자의 요구에 비릿하게 입가를 비틀어 올린 영묵은 퍽퍽, 더 거칠게 하체를 몰아가며 여자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하아! 좋아! 너무 좋아요! 더 거칠게 날 죽여줘요!”

“그래, 죽여주지.”

퍽! 퍽! 퍽!

거칠게 물건을 박아 넣을 때마다 여자의 몸 안이 부르르 떨며 요동을 쳤고, 여자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 소리가 계속 흘렀다.

“아악! 허억, 허억. 나 죽어. 좋아. 죽을 것 같아. 하아, 하아. 제발, 제발 더, 더, 더!”

여자는 까무러치면서도 더를 외쳤다.

여자의 몸이 축 처졌지만 영묵은 아직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욕망을 계속해서 채우며 아랫도리를 여인의 몸에 박아댔다.

여자의 반응이 없으니 재미가 덜했지만 마지막 한 방울의 진액까지 쏟아내고야 부르르 몸을 떨며 물건을 빼냈다. 그리곤 시간을 힐끗 확인한 뒤 곧바로 옷을 입었다.

“일어나.”

눈도 잘 뜨지 못하는 여자를 억지로 깨웠다.

“못 일어나요. 더는 못 해요.”

“다음에 또 하고 싶으면 이걸 잘 간직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 이건 내일을 약속하는 증표 같은 거야. 그럼 우린 또 만날 수 있고, 오늘 같은 밤을 보낼 수 있어.”

여자가 한쪽 눈을 떠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배지를 보이며 최면을 걸었다.

“또 이런 밤을 약속하는 거예요?”

“그래, 약속하지.”

여자는 완전히 기절했고, 영묵은 여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배지를 놓았다.

순간 영묵의 혼이 남자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핫! 뭐, 뭐, 내가 또 왜 여기에. 내, 내가 또 정신이 나갔던…… 히익!”

방금 전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침대 위에 벌거벗은 여자가 너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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