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15/20)

12장

“야, 꼭 장례식장에서 이래야 한대? 재산 압류신청도 했다면서 그냥 집으로 찾아가면 되는 거 아냐? 그래도 충분히 겁먹을 거 같은데.”

“새끼, 쫄보 티 내냐? 그 맹랑한 놈이 제 아빠 과로사라고 산재 청구할 거라 했다잖아. 친구 운송회사 거덜나게 생겼다고 사장 길길이 날뛰는 거 못 봤어? 회사가 곱게 얘기하니 안 먹힌다고 당장 찾아가라던 말 못 들었냐고!”

깍두기머리 남자와 노란색 염색을 한 곱슬머리 남자가 장례식장으로 건들건들 들어서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었으나 어떻게 봐도 말투가 양아치인 두 사람이었다.

“그래도 난 이런 덴 영 찜찜한데. 우리 어머니가 올해 나 사주 사납다고, 장례식장 같은 데는 되도록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웃기는 새끼. 조폭 새끼가 사주 타령은. 사주 좋은 놈이 해결사 짓이나 하고 다니냐? 누군 뭐 좋아서 왔겠냐고.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아, 씨바. 그나저나 아직도 머리통이 얼얼하네. 땜빵까지 생겼어. 이 일 끝나고 나면 그 재수 없는 년부터 단단히 손 좀 봐야겠다. 다시는 손모가지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확 꺾어 놔야겠어.”

“아아, 그 여잔 나도 재수 없더라. 애인이라는 새끼는 더 밥맛 없는 놈이고. 쩝.”

“순경 주제에 꼴에 경찰이라고 나서는 거 봐. 지랄. 삶아놓은 호박같이 물렁하게 생겨가지곤 지 애인이라고 어리바리 나서기는. 병신 새끼. 봐, 증거물 없어졌는지도 모르더라.”

곱슬머리 남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며 키득키득 웃었다.

“배지 아냐. 그게 왜?”

“흐, 조서 꾸민다고 어리바리하는 사이에 슬쩍했지. 증거물 보관소행이라고 돼 있었으니 아마도 사건 증거물이겠지? 무슨 사건인진 모르겠지만 애 좀 먹을 거다. 새끼.”

“야, 거기 CCTV 다 있었을 텐데 찍혔으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병신이냐? 당연히 카메라 각도를 봤지. 그 자린 찍히는 자리가 아니었다고.”

“그래? 그러면야……. 어디 한번 봐봐.”

“별거 없었어. 피 한 방울 안 묻어 있던데? 그냥 단순한 배지야. 맘에 들면 너 가져.”

깍두기머리 남자가 내민 손 위에 툭 던지듯이 배지를 건네준 곱슬머리 남자가 인심 쓰듯 말했다.

“크큭, 제대로 엿 먹였네. 잘했다, 새끼야. 그런데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식장이 어디지? 이름이…….”

경찰 엿먹인 배지를 기분 좋게 내려다보던 깍두기머리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배지를 자신의 소중한 칼이 든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본분을 다하기 위해 장례식장 로비 보드판에 붙어 있는 명단을 훑었다.

“자식이, 볼 거나 있냐? 김철수. 1층 D룸. 다른 하나는 여자잖아, 여자. 장지혜. 다행히 오늘은 두 군데밖에 예약이 안 잡힌 모양인데? 잘됐다. 제대로 겁줘도 되겠어. 흐흐.”

룸이 서로 반대편에 있는 거란 사실을 확인한 두 양아치들이 입가에 야비한 미소를 머금었을 때였다. 막 돌아서 D룸으로 향하려는데 누군가와 툭 부딪쳤다.

“어떤 새끼가 눈깔 똑바로 안 뜨고 다녀?”

곱슬머리 남자가 찢어진 눈을 더 길게 찢으며 상대방을 쳐다봤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뭐야? 이 영감탱이가!”

곱슬머리 남자가 중년 남자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곱슬머리 남자가 상대해야 할 이는 중년 남자의 경호원이었다.

중년 남자는 태연하게 통화를 계속했다.

“아닙니다, 한 소장님. 한 소장님 말씀대로 장 교수님 딸 장례식에 왔더니 양아치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요. 요새는 장례식장도 양아치들이 접수하는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저야 항상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니까요. 네. 제가 한 소장님 못 오신 사연은 잘 전하겠습니다. 뭐 새로운 유물이라도 발견되면 저에게도 연락 주십시오. 네, 들어가십시오.”

한 소장과 통화를 마친 김 이사가 양아치 쪽은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스윽 보드판을 확인했다.

그리곤 비웃듯 양아치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장지혜의 장례식장인 특A룸을 향해 태연하게 걸어갔다.

“씨발, 저 영감탱이가 사람 치고 그냥 가네. 야! 너 거기 안 서! 윽, 이거 안 놔?”

“먼저 와서 부딪힌 건 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꺼져라.”

김 이사의 경호원이 김 이사를 쫓아가려는 곱슬머리 사내의 팔을 단번에 잡아 꺾고 차가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가겠습니다. 갈 테니 그 손, 그 친구 손 풀어 주십시오. 식아, 우리 일 아직 안 끝났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그만 가자.”

딱 봐도 전문가의 솜씨임을 눈치챈 깍두기머리 남자가 일행에게 그만하란 눈짓을 하며 비굴하게 말했다.

소란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던 경호원도 바로 곱슬머리 남자를 놓아주었다.

“저분 눈에 다신 안 띄는 게 좋을 거다. 가라.”

“이 개자식이…….”

곱슬머리 남자는 분을 참지 못해 경호원을 사납게 노려보며 위협용으로 들고 다니는 칼을 상의 주머니에서 꺼내려 했다.

하지만 깍두기머리 남자가 먼저 눈치채고 곱슬머리 남자를 확 잡아채 갔다.

“야, 그만해. 우리 일 아직 시작도 안 했다니까.”

곱슬머리 남자는 일행이 이끄는 손길에 못 이기는 척 D룸의 식장으로 향해야 했다.

장례식장 로비에 있던 인간들이 모두 제 갈 길을 갔지만, 그곳엔 인간이 아닌 존재도 같이 있었다.

단지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라져라!』

신참차사가 장례식장에 숨어 있던, 시커멓게 형체만 남은 마지막 원귀를 차사검으로 베어 소멸시켰다.

그런데 신참차사의 신경은 원귀보다는 방금 전까지 같은 공간에 있던 인간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온통 가 있었다.

『저놈들, 방금 주머니에서 칼이 보였던 거 같은데요. 설마 장례식장에 있는 사람들과 칼부림이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강림차사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참차사의 옆엔 강림차사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강림차사는 아까부터 물끄러미 보드판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철수.』

신참차사의 물음을 듣지도 못했는지 멍하니 다른 말을 중얼거리며 미간만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차사 님?』

『수명부 받은 게 있느냐. 오늘 여기서 죽는 인간이 있느냐고.』

『없죠. 있었으면 차사 님 따라 특별조사단에도 못 들었겠죠.』

뜬금없이 수명부를 받았냐고 묻는 강림차사의 말에 막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맹하게 대답했다.

『다른 차사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칼부림이 난다 해도 죽어 나가는 사람은 없단 뜻이겠지. 수명부가 내려오지 않았는데도 죽어 나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수명강탈자’를 바로 찾아내는 일이 될 테고.』

현재 명부가 발칵 뒤집어졌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인간의 영이 며칠 사이에 벌써 셋이나 들어왔기 때문이다.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희귀한 일이 현재 줄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차사들의 눈에 띄어 명부에 든 인간이 셋이었지, 어쩌면 그보다 더 있을 수도 있었다.

차사들의 눈에 띄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영들이.

그래서 특별조사단이 꾸려졌고, 강림차사가 그 지휘를 맡게 됐다.

가장 최근에 사건이 벌어진 장지혜의 주변이 제일 먼저 수사 선상에 올랐다.

그게 이들이 여기에 온 이유였다.

『아! 그렇겠네요.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김철수. 내가 얼마 전에 데려간 영인 거 같아서.』

평소와 다르지 않은 감정 없는 목소리였으나 강림차사의 시선이 왠지 자꾸만 방금 전 양아치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아들을 끔찍히 생각해 차사에게조차 반항하던 김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불어 당차게 끼어들었던 한 여인과 그 여인을 제 목숨처럼 지키려 하던 무율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안됐네요. 하필 저런 인간들과 연이 닿다니.』

『죽지는 않을 테지. 그만 가자. 장지혜는 저쪽인 거 같구나.』

김철수의 아들이 어떻게 되든 그건 남겨진 자의 몫이다.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윈 없었다.

『앗! 같이 가요, 차사 님!』

특A룸을 향해 촛불 꺼지듯 사라져 버린 강림차사를 쫓아 신참차사도 부리나케 공간이동을 했다.

* * *

긴장한 표정의 주희와 신우가 주변을 신경 쓰며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장례식장엔 원래 원귀 한둘은 있기 마련인데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로비까지 오는 동안 몇몇 오가는 사람들만 봤을 뿐 귀신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깨끗한데…….”

신우도 눈을 날카롭게 뜨고 주변을 살폈지만 귀신은 찾을 수 없었다.

상자의 효과가 사라졌나 싶어 상자를 자세히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주희의 말을 들으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마치 누군가가 널 위해 청소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명부의 청소부가 다녀간 건가, 하는 생각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에요?”

신우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주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이름이 장지혜라고 했지. 그럼 특…….”

신우가 보드판에 붙어 있는 특A룸의 이름을 보다가 그 옆 D룸에도 낯익은 이름이 보이자 멈칫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상주 가족을 보니 아들 하나뿐이었다.

주희에겐 아직 김철수의 아들을 찾았단 말을 하지 못했다.

슬쩍 주희를 봤더니 그녀는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 식장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안의 소리는 결코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곡소리가 아니었다.

“이 새끼,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먹지!”

“하지 마요! 하지 말라고요! 주세요! 어서요!”

건장한 곱슬머리 사내가 영정사진인 듯한 것을 높이 들고 있었고, 상복을 입은 남자아이가 그 사진을 뺏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옆에서 깍두기머리 사내는 팔짱을 끼고 히죽거리며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희의 시선이 심상찮아 신우는 한숨을 쉬었다. 저들의 내막도 모르면서 또 끼어들 게 빤히 보여서.

“눈깔 똑똑히 뜨고 봐라! 네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앞으로 너도 어떻게 되는지.”

“하지 마요! 안 돼!”

남자아이의 거센 항의에도 곱슬머리 사내는 들고 있던 영정사진을 부서져라 내던졌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액자가 산산조각 나고도 사진이 주르륵 밀릴 정도였다.

“……!”

거리가 있었지만 사방으로 파편이 튀는 것을 본 신우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주희의 앞을 막아섰다.

툭!

파편이 날아오진 않았으나 발치에 중년 남자의 영정사진이 와 부딪혔다.

평범한 중년 남자의 사진을 봤을 때도 신우의 무심한 시선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아저씨…….”

남자아이의 절규와 떨리는 주희의 목소리를 듣고야 영정사진 속의 남자가 누군지 알게 됐다.

김철수.

휴게소에서도 그는 김철수의 귀신을 직접 볼 수가 없었기에 몰랐다. 이 남자가 자신이 조사시킨 김철수라는 걸.

“어딜!”

남자아이가 달려들어 사진을 주우려는 순간 곱슬머리 남자가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채 던졌다.

아이가 넘어지는 소리와 그 모습을 본 주희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꼬마야, 잘 봐라. 너 따위 지렁인 아무리 발악해 봐야 이렇게 밟힐 뿐이라는 걸.”

“안 돼!”

곱슬머리 남자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구둣발을 들어 사진을 밟으려 들었다.

아이의 절규를 피식 웃어넘긴 곱슬머리가 더 세게 사진을 짓밟으려던 순간이었다.

퍽! 쿠당탕!

신우의 성질이 담긴 발길질 한 번에 곱슬머리 남자의 큰 덩치가 바닥을 굴렀다.

뒤에서 팔짱만 끼고 있던 깍두기머리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으윽! 이, 이 새끼!”

험악하게 달려드는 두 양아치의 기세에도 아랑곳없이 신우는 매우 짜증난 시선으로 양아치들을 쏘아봤다.

그 옆에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줍고 있는 주희를 보니 더 화가 솟구쳤다.

자신은 주희가 놀랄까 봐 매 순간 눈치 보고 조바심을 치는데, 이 썩을 놈들은 주희의 얼굴색이 변하게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놀라서 손까지 떨게 만들고 있었다.

“여긴 장례식장이지 조폭 사무실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뼈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주희의 시선을 생각해 말로 타일렀다.

“뭐야? 이 새끼가!”

“어라? 이가서림의 책방 주인이 왜 여기에?”

부르르 떠는 곱슬머리와 달리 깍두기머리가 신우의 뒤에 있는 주희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때부터 신우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

주희가 이런 양아치들과 좋은 사이였을 리 없을 거라는 짐작을 떠나 명새미에 대한 보고를 받을 때 들었던 양아치들이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뭐야, 애인 없이 혼자라고 하지 않았어? 아버지도 만날 땅 파러 다녀서 문제 생길 일 없을 거랬고.”

“아! 가끔 잡지책 사가시던…….”

주희는 그제야 이들이 아주 가끔 만화책이나 잡지책을 사러 오던 사람들이란 걸 알아봤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신우가 먼저 물었다.

“너희들인가? 어젯밤 명새미 씨와 싸움이 났던 놈들이?”

신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꾹꾹 눌러 담으며 그래도 먼저 말로 물었다.

“뭐? 아 씨바, 그 짭새 새끼. 그새 입을 나불거렸나 보네. 하여튼…… 헉!”

곱슬머리 사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퍽! 퍽!

쿠당탕탕!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우가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두 양아치들을 걷어차 버렸다.

“윽, 저년 저거 완전히 재수 옴 붙은 년이었네. 씹, 아직 건드려 보지도 못했는데 어제 그년도 그렇고 완전 지랄 같은 것들만 붙어 다녀.”

아마 핀이 나간다는 소린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설마…… 어제 새미가 싸운 이유가…… 나 때문이었어요?”

주희가 입술을 꾹 깨물며 물었다.

하지만 그녀 따윈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던 듯 곱슬머리 사내가 일어나자마자 신우의 얼굴을 향해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이 새끼가!”

휘익, 사납게 스치는 소리가 무색하게 신우가 아주 살짝 고개를 뒤로 빼는 것으로 발길질이 빗나갔다.

곱슬머리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렸고, 신우의 발은 당연한 듯 놈의 등을 걷어차 버렸다.

콰당탕!

곱슬머리 남자가 바닥을 구르는 건 보지도 않고 신우는 주희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주희의 어두워진 안색만큼 신우의 마음도 어두워졌다.

그런데 주희에게 말을 거는 그 작은 빈틈을 타 깍두기머리 남자가 주먹을 내질렀다.

턱!

신우는 보지도 않고 사내의 주먹을 잡아냈다.

“난, 건방진 양아치도 싫지만, 야비한 양아치는 더 싫어.”

퍽!

점점 화를 증폭시켜 가는 놈들의 행태에 그만 짜증이 난 신우가 놈의 명치를 세게 질러 버렸다.

“허억!”

깍두기머리 남자도 그대로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주저앉았다.

쓰러진 남자를 잠시 내려다본 신우는 주저앉아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내아이를 일으켜 주희의 옆으로 데려다주었다.

“괜찮니?”

“누, 누구신진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아버지세요.”

사내아이는 자신을 구해 줘 고마운 게 아니라 사진이 짓밟히지 않게 해준 게 더 고맙다는 듯 주희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이 데리고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

다시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 곱슬머리 양아치를 본 신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신은 다쳐도 금방 아물 테니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혹시라도 눈먼 파편이 주희에게 튈까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다.

“개자식! 너 오늘 주우욱었어!”

찰칵, 흥분한 곱슬머리 사내가 상의 주머니에서 호신용 칼을 꺼내 들어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여튼 뇌가 없는 것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자신의 실력을 가늠할 줄 모르는 양아치를 보며 주희의 신변 경호를 더 빨리 강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곱슬머리 남자가 신우의 명치를 향해 푹 찔렀는데,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아니라 깡, 하는 쇳소리가 났다.

신우가 들고 있던 상자와 부딪혀서 난 소리였다.

“이, 이 새끼가!”

곱슬머리가 성질나는 대로 휙휙, 칼질을 했고, 신우는 그때마다 빠짐없이 귀신상자로 전부 막아냈다.

그 정도면 아무리 초딩이라도 상대방과 실력 차가 얼마나 나는지 충분히 느낄 것 같은데 바보 같은 놈은 끝까지 제 한계를 몰랐다.

힐끗, 멀리 있는 CCTV를 보며 적당히 당할 만큼 당해 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신우의 참을성도 한계점을 찍었다.

칼날을 피하는 척하며 실수인 척 귀신상자로 놈의 머리를 가격해 버렸다.

퍽!

곱슬머리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쓰러졌다.

아마 제법 시간이 흘러야 일어날 수 있을 터였다.

신우는 곱슬머리 남자가 아니라 귀신상자를 먼저 살폈다.

“다행히 보기만큼 견고하네.”

칼을 막을 무기가 없어 일단 상자를 쓰긴 했는데 선물로 받은 상자이고 보니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때였다.

“신우 씨, 뒤!”

주희의 비명 전에 이미 지금까지와는 다른 서늘한 바람 소리가 들려 신우는 무심코 다시 상자로 바람을 막았다.

쾅!

칼이 쇠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아니라 거의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상자에 가해진 강한 충격에 손아귀 안까지 얼얼한 반동이 남았다.

‘이건 뭐지?’

사실 좀 놀랐다.

방금 전까지 그가 파악했던 깍두기머리 사내의 힘과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마치 순간적으로 힘을 내는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힘의 강도가 달랐다.

게다가 어딘지 사내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지금 마주한 놈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눈빛은 방금 전 그가 파악한 야비한 양아치와는 그 갭 차이가 너무 컸다. 마치 딴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힘을 숨겼던 건가.”

신우가 묻고 있었지만 깍두기머리 남자는 들은 척도 않고 거만하게 고개를 쳐든 채 장내를 스윽 훑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초승달처럼 휘어진 호신용 칼을 빙글 돌려 보며 피식 웃었다.

“글쎄.”

방금 전 깍두기머리 남자와는 말투마저 달랐지만 그 안에 숨은 영묵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말투가 달라도, 행동이 달라도 경험상 아무도 이 몸 안에 다른 이가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할 테니까.

김 이사를 제거할 결심을 굳혔었다. 그리고 알리바이를 확보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 생각했다.

전화 통화를 통해 김 이사가 장례식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술법을 건 배지 중 장례식장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배지를 찾았다.

그랬더니 때마침 배지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 있었다.

그것도 빙의하고 보니 건장한 신체에 무기까지 들고 있었다.

인간의 몸에 빙의해선 그 인간이 가진 근력을 바탕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게 항상 불만이었는데, 이 정도의 탄탄한 몸이라면 웬만해선 그의 검술을 다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발굴장에 있으면서도 계속 신경 쓰이던 귀신상자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더더욱 기뻤다.

방금 전 자신의 칼을 막아낸 상자. 신우의 손에 쥐어진 무늬 없는 상자가 바로 그 귀신상자임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마음에 걸리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신우는 분명 팔을 다쳤었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 정도로 다친 팔이 하루이틀 만에 다 낫는 인간이 있다?

크게 다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도 아픈데 옷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영묵의 싸늘한 시선이 잠시 신우가 가진 상자에 닿았다.

당장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쉬익! 깡!

영묵이 다짜고짜 호신용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신우가 아까보다 조금 더 놀란 눈빛으로 칼을 막아 나갔다.

시린 은빛이 실선을 그으며 신우가 들고 있는 상자에 부딪혀 몇 번이나 강렬한 불꽃을 틔웠다.

너무 담담하게 막아내고 있는 신우의 모습에 영묵의 눈 속에 의심의 골이 깊어져 갔다.

한성의 박 회장이 무술 실력 좋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자신이 아무리 인간의 몸을 빌려 공격하고 있다지만 보통 인간들의 무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런데도 검법이 번번이 막히고 있었다.

‘설마 저 상자에서 힘을 받는 건가?’

갑자기 든 생각에 양아치의 탈을 쓴 영묵의 눈빛에 짙은 살의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휴대폰 있어요?”

양아치의 살벌한 모습에 다급해진 건 주희였다.

신우의 표정마저 굳어 보여 아이에게 휴대폰이 있는지를 물었다.

경찰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 것이다.

“어, 저, 저기 식장 안에 두고……. 아, 제가 가서 다른 식장 사람들에게 부탁해 볼게요.”

아이도 그제야 경찰을 불러야 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잽싸게 다른 룸을 향해 달려가려 할 때였다.

주희와 아이의 대화를 들은 영묵이 순간적으로 칼을 거두고는 옆에 세워져 있는 큰 화분의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다.

나뭇가지가 화살처럼 날아가자 신우가 놀라 오른팔로 쳐냈다.

“팔이…… 다 나았구나.”

영묵의 입에서 으스스한 한기가 담긴 목소리가 흘렀다. 상자를 반드시 빼앗아야 할 이유가 더 확실해졌다.

“넌, 누구냐.”

신우의 입에서도 전에 없이 시린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그가 팔을 다친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깍두기머리는 오늘 처음 본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건 누군가의 하수인이라는 말이 된다.

“상자를 내놔라.”

깍두기머리 남자의 뜬금없는 말에 신우가 새삼 상자를 내려다봤다.

‘상자? 이 귀신상자를 탐내는 자인가? 왜?’

이 상자의 내막을 알고 뺏으려는 것인가?

하지만 안다 해도 보통은 귀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귀신상자를 탐한다는 건 이 상자에 뭔가 장치가 있거나 상자 안에 다른 게 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왜 이 상자를 탐내는지는 말해 주지 않겠지? 미안하지만 나도 선물 받은 거라 줄 수가 없어. 능력 있으면 가져가 보든가.”

좀 더 멀찍이 물러난 주희를 보고 안심한 신우가 대놓고 도발을 시도했다.

“건방진 놈!”

살벌한 칼부림이 시작됐다.

이제 칼과 상자에서 불꽃이 튀는 것뿐만 아니라 휙휙 칼바람이 스칠 때마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마저 일었다.

줄줄이 세워져 있는 근조환들이 부서지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누나! 경찰 불렀어요.”

“허억! 저게 뭐야?”

경찰을 부르러 갔던 아이가 뛰어오고 있었고, 그 뒤로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고 있었다.

싸우는 중에 힐끗 사람들을 돌아본 깍두기머리 남자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거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망갈 준비를 하는 거라 생각했다.

신우가 눈을 가늘게 떠 도망가지 못하게 잡으려 할 때였다.

『주희 씨?』

난데없이 주희를 부르는 차사의 목소리가 들려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신참차사뿐만 아니라 강림차사까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더 놀랄 때였다.

쉬이이익!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같은 섬찟한 소리가 귓가를 스치며 칼이 날아가고 있었다.

“안 돼!”

신우가 절박하게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칼을 따라갔지만 신의 힘을 찾지 못한 그의 다리는 날아가는 칼날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대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헉!”

“꺄악!”

몰려들던 사람들이 놀라 발길을 멈추고 비명을 지르며 경악을 했다.

깡!

그런데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사람만큼 큰 칼날이 나타나더니 주희의 눈앞까지 다가온 칼날을 쳐냈다.

“히익!”

주희의 옆에 있던 사내아이가 작은 칼날보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무시무시한 검에 놀라 주저앉았다.

“뭐, 뭐야? 바, 방금 그거 뭐였지? 허공에서…….”

“저, 저승사자가 노한 거야. 장례식장에서 칼부림이……. 나, 나 먼저 간다. 괜히 더 있다가 살이라도 맞으면……. 안 돼. 나, 난 5대 독자라고.”

“야, 같이 가. 나도.”

허공에 나타났다 사라진 무시무시한 칼을 본 사람들은 저승검에만 신경을 빼앗겨 그 저승검이 주희에게 날아들던 칼을 쳐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직 제 살길만 찾아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혼비백산해 사라질 뿐이었다.

남은 사람들 중 저승검을 보지 못한 사람들만 무슨 소란인지 궁금해하며 기웃거렸다.

“……주희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정면으로 날아들던 칼날에 온몸이 얼어붙어 선 채로 기절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주희는 어깨에 닿은 신우의 손길을 느끼고야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스르르르, 다리의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신우까지 덩달아 같이 주저앉아 그녀를 감싸 안았다.

“신, 신우 씨.”

“괜찮아. 이제 괜찮아.”

주희의 몸이 뒤늦게 떨려오기 시작하는데, 주희를 껴안은 신우의 팔은 주희보다 더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싸늘하게 살기가 실린 신우의 눈동자가 칼을 던진 깍두기머리 남자를 쏘아봤다.

남자는 칼을 던진 순간부터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신우가 무섭게 쏘아본 탓일까, 깍두기머리 남자가 몸을 꿈틀대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아야, 뭐야. 분명히 명치를 맞았는데 왜 머리가 아프지? 헉! 이, 이건 또 다 뭐야?”

자기가 부순 근조환이며 집기들을 보며 움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깍두기머리 남자를 신우가 냉랭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저놈이 아니다. 저놈은, 절대 방금 전의 그놈일 수 없어.’

칼날을 거머쥔 남자를 봤을 때부터 기세가 다르다 생각했지만 지금 저 맹한 양아치를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걸.

“헉! 내 칼. 저, 저건 내 칼 같은데.”

깍두기머리 사내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낯익은 칼을 보고는 칼 타령을 하며 상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다른 칼이 또 있었던가, 긴장하는데 깍두기머리 남자가 꺼낸 건 배지 하나였다.

“없어, 없어. 분명 배지랑 같이 넣어……. 그럼 저게 내 칼? 아니, 저게 얼마짜린데…….”

깍두기머리 남자가 배지를 바닥에 툭 던지고는 엉금엉금 기어 칼을 주우러 갈 때였다.

“신우 님?”

신우가 가서 남자를 제압하려는데 응산이 장례식장 로비로 들어서며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아마 저 두 양아치들을 쫓아온 모양이다.

난장판이 된 로비를 본 응산이 빠르게 달려오다 주희의 옆에 서 있는 차사들을 보고는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지체하지 않고 달려왔고, 두 양아치와 주저앉아 있는 주희를 보고는 신음 소리를 삼켰다.

“저놈부터 제압해 경찰에 넘겨. 저놈들이 칼부림한 CCTV 확보해서 확실하게 유치장 보내. 그리고 저 바닥에 있는 배지. 아무래도 경찰서에서 훔친 증거물인 것 같으니 죄목에 추가하게 가져다주고.”

김 순경이 얘기했던 잃어버린 배지와 어제 연행됐었다는 두 양아치의 상황을 짚어 보니 아귀가 딱 맞아떨어져 지시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는 이가 있었다.

“으아악! 저, 저놈은 뭔데 또 배지를 가지고 있지? 뭐냐고? 뭐? 굴착기 기사도 배지. 이젠 조폭도 배지! 왜 자꾸 배지가 돌아다니는 거냐고? 저놈도 한 문화재연구소 소속이라는 거야?”

언제 온 건지, 김 이사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겁에 질린 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더니 마치 배지가 위험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뒷걸음질을 치더니 도망을 가버렸다.

김 이사의 뒤를 그의 경호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쫓아갔다.

김 이사가 그를 알은척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지만 신우는 상관없었다.

그보단 김 이사의 말이 신우의 눈빛을 더 매섭게 만들었다.

굴착기 기사도 배지가 있었다고?

이건 뭔가 아주 많이 이상했다.

“이상해요.”

주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놀란 와중에도 그를 보며 말했다.

“알아볼게. 장례식장은 이대론 곤란할 것 같은데.”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상태로 남을 위로하러 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네요. 가면 오히려 폐만 끼칠 것 같아요. 저기 저 아이에게는…….”

다행히 주희도 동의했다. 그런데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이 먼저 보이는지 아이를 신경 썼다.

“걱정 마. 네가 걱정하지 않게 알아서 할 테니. 네가, 김철수 씨 아들이지?”

신우가 주희를 다독거리고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제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얘기 좀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장례식 끝나면 네게 사람이 찾아갈 거야. 한성그룹 법무팀에서. 네게 필요한 일을 봐줄 테니 넌 걱정 말고 장례식이나 잘 치르도록 해.”

“하, 한성그룹 법무팀요? 어, 어떻게…….”

“자세한 얘기는 장례식 끝나고 다시 하자. 너도 보면 알겠지만 지금은 주희가 많이 놀랐거든. 안정을 취해야 해.”

“아, 맞아요. 아까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어서 병원부터 가보세요.”

칼이 날아들던 상황이 다시 떠올랐는지 아이가 새삼 부르르 떨며 병원부터 재촉했다.

때맞춰 경찰들이 도착했고,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신우가 조심스레 주희를 안아 올렸다.

“감사합니다.”

신우는 그제야 강림차사에게 주희를 구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이었지만 말이라도 해야 주희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완전한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고마워할 거 없다. 오늘 여기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없다기에 그렇게 한 것뿐이니까. 그런데 내가 보이는 건가? 저번엔 보지 못하는 거 같았는데.』

강림차사가 생긴 것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신참차사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 그건 저분이 들고 있는 귀신상자 때문이에요. 저걸 들고 있으면 차사도, 귀신도 다 보인대요.』

하지만 아무도 신참차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보단 오히려 주희가 뒤늦게 지른 탄성에 시선이 모두 주희를 향했다.

“앗!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잊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주희는 죽음의 문턱을 오간 탓에 완전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신우의 감사 인사를 듣고야 강림차사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이 생각나 뒤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두 차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두 분, 나가서 저희랑 얘기 좀 하고 가세요.”

신우도 같은 얘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주희가 먼저 얘기를 꺼내자 가만히 두 차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저 여자 뭐야? 왜 허공에 대고 얘기를 하지?”

“쯧쯧, 젊은 처자가 안됐네.”

몇몇 남아 있던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들렸지만 못 들은 척 차사들만 빤히 쳐다봤다.

『그러지. 나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어.』

* * *

주희가 차사의 발길을 붙든 건 장지혜의 얘기를 묻고자 함이었던 것 같은데 차사의 얘기를 듣고 난 주희의 표정은 더욱 힘들어 보였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조사단까지 편성됐다는 명부의 일이 해결된다 해도 사라진 지혜의 수명을 다시 되돌릴 순 없다는 걸.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해줄 수 없어 신우도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림차사와 명부의 얘기를 주고받는 걸 그녀가 들으면 더 힘들어할 것 같아, 강림차사를 눈짓해 그녀에게서 몇 발짝 떨어져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신우는 강림차사에게 먼저 배지에 대한 의문스러운 점을 얘기했다.

단서가 될 만한 게 아직 아무것도 없던 강림차사는 눈에 이채를 띠며 신우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명부에 들었다는 세 명 모두 아무런 개연성이 없는 이들이었지만 단 하나, 사건 때마다 공통적으로 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제신리 사고며 양아치들 사건 때도 모두 배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함께 조사해 보라며 권했다.

강림차사는 표정을 더욱 무섭게 하며 업경대에 기록된 기록을 다시 조사해야겠다고 했다.

강림차사와의 사건 얘기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얘기가 끝났으니 곧장 명부로 사라질 줄 알았는데 강림차사답지 않게 신우를 힐끗거리며 머뭇거렸다.

“더 할 말 있으십니까?”

『그분껜, 정말 살아 있다는 걸 알리지 않을 생각인 거냐?』

신우가 더 할 말 있냐고 물은 후에야 속에 있는 말을 꺼내 놓았다.

“무슨 말입니까? 차사 님 말은, 지금까지 내가 명부에선 죽은 존재이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강림의 물음이 이해가 되지 않아 신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날, 네 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지금도 네 몸에선 본래의 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아주 약하지만 천계의 기운이 느껴지지. 네가 왜 천계의 기운을 가지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린 모두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막연히 아버지가 왜 자신을 찾지 않았을까, 혼자 괴로워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버진 그를 미워해서, 무관심해서 찾지 않은 게 아니었다.

강림차사가 말한 ‘죽음’이란 단어가 그의 내면에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던 괴로움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것 같았다.

그거면 됐다.

“……이미 죽은 존재란 말이죠. 그럼 됐습니다. 얘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는 알고 싶네요. 나를 그렇게 만든 그 명부신은 도대체 누구였습니까?”

신우의 오래전 기억 속, 명부에서 마지막 손를 겨뤘던 독한 손속을 지닌 명부신이 떠올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영묵. 네 아버지의 자릴 탐내다 명부에서 쫓겨난 자다.』

“그를 잡았습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되물었지만 신우의 내면에 숨길 수 없는 살기가 일렁거렸다.

『아직. 찾고 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할 정도면 그놈이 얼마나 교활하고 강한 놈인지 알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직접 잡고 싶었다.

하지만 신의 능력을 모두 상실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신우의 안에선 살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층 날카로워진 신우의 차가운 눈에 문득,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주희를 위로하고 있는 신참차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주희 씨, 좀 앉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계속 서 있다간 쓰러지겠어요.』

신참차사는 주희의 주변을 정신 사납게 뱅뱅 돌며 안전부절못하고 있었다.

인간을 위로하는 차사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저게 진짜 차사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신우의 마음을 긁어댔다. 덕분에 내면에서 뻗치던 살기마저 누그러졌다.

“저 신참차사는……. 아닙니다. 그만 가보십시오.”

하마터면 저놈 뭐냐고 물을 뻔했다.

안 그래도 주희 주변에서 걸리적거리는 모든 생물이 싫어지고 있는데, 지금 보니 저 신참차사가 김 순경보다 더 싫은 것 같다.

『너…….』

“그 얘긴 더 이상 꺼내지 마시고요. 앞으로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저에게도. 사건 해결이나 빨리해 주십시오. 혹시 또 주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요. 그럼.”

강림차사에게 할 말을 끝낸 신우는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나 주희와 신참차사의 사이에 휙 끼어들었다.

“비켜.”

순간 주희가 흠칫 놀랐다.

“아…… 신우 씨. 얘기 다 끝났어요?”

나타난 사람이 그인 걸 깨닫고는 곧장 표정을 수습했지만 좀 전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을 숨길 순 없었다.

아무래도 정면으로 날아들던 칼날의 후유증인 듯했다.

“그만 가자.”

주희를 다짜고짜 안고 차를 향해 걸었다. 차사들이 사라지든 멍청히 보고 있든 신경 쓰지 않았다.

부우우웅!

두 사람이 차에 오르자마자 차는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화가 났다. 그런 눈먼 칼 하나 막지 못해 주희가 이렇게 겁을 먹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만약 그 자리에 강림차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차가 출발하고도 한참을 침묵하던 주희가 멍하니 창밖을 보다 이상함을 느꼈는지 물었다.

차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이가서림으로 가는 길과는 정반대 방향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현와원에.”

신우가 짧게 답했다.

“안 돼요. 도 실장님이 걱정할 거예요.”

“지금 도 실장을 걱정할 여유가 있어?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주희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다 못해 백지장 같았다.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래요. 자고 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안 괜찮아.”

“…….”

“네가 옆에 없으면 내가 미칠 것 같다고! 그러니 오늘은 제발 내 옆에 있어. 내가 보이는 곳에.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으란 말이야.”

덤덤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자칫 잘못했으면 그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나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말았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무슨 한심한 짓인지.

속에서 저절로 신음 소리가 샜다.

“다 왔어. 김 박사님 도착해 계실 거야. 갈 때 가더라도 진료받고 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말하고 있는 신우의 말에 밖을 보니 어느새 차가 현와원에 도착해 있었다.

주희는 내리지 않고 한동안 더 가만히 신우를 쳐다봤다.

신우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차에서 내리려 했다.

“기다려요. 미…….”

주희가 운전석에서 내리려는 신우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진료만이라도 받아. 신경질 부려서 미안해.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그냥 내가, 내가 좀 겁이 나서 그랬어. 진료받고 데려다줄 테니까 들어가서 진료 받아.”

신우는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자책하듯 한숨을 쉬며 사과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가 겁이 나서 그랬단다.

그랬다. 신우도 그녀만큼 겁이 났던 거다.

매 순간 자신을 대신해 몸을 던지는 남자이니 죽음의 공포는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좋을까.

이렇게 매 순간 고맙고, 매 순간 미안한 사람을.

주희는 신우의 팔을 더 꽉 붙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당신 생각을 못 했어요. 당신도 나만큼 겁이 났을 텐데. 그래요, 같이 있을게요. 당신 곁에, 당신 보이는 곳에, 당신 손이 닿는 곳에 있을게요.”

주희는 그의 귓가에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마음을 쏟아냈다.

그제야 굳었던 그의 몸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

안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내면에서도 의식하지 못했던 안도의 숨이 흘렀다.

현와원에서의 밤은 그렇게 오직 서로에게 애틋한 위로의 밤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미안해. 고용인들을 부른다는 걸 잊었어.”

김 박사가 안정만 취하면 괜찮겠다는 진단을 내리고 간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배 많이 고플 텐데. 내가 뭐라도 만들어 볼 테니 넌 가서 씻고 와.”

그녀는 전혀 배고프지 않은데 그는 마치 손님을 불러 놓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주인처럼 미안해했다.

“신우 씨가 요리를 할 줄 알아요?”

정말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궁금해서 물었다.

생긴 거나 평소의 황제 포스로 봐선 손에 물 한 방울 묻혀 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요리라니, 상상이 되지 않아서.

“요리가 뭐 별건가. 먹을 수만 있으면 되지. 뭐가 먹고 싶은데?”

“뭘 만들 수 있는데요?”

“뭐든지. 네가 먹고 싶은 거라면 뭐든지 만들 수 있어.”

딱 봐도 아닐 거 같은데 호언장담을 하는 신우가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이러고 있으니 점점 긴장도 풀리는 것 같아 이 말랑한 기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졌다.

“그래요? 그럼 전 와인이 곁들여진 스테이크 요리요. 그런 것도 가능해요?”

과하다는 걸 알면서 한 주문이었는데, 그는 못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완전 허세의 장인이 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할 수 있어.”

웃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고마워요. 그럼 전 씻고 올게요.”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냥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잠이 들면 악몽을 꿀 게 뻔했기에 어떻게든 좀 더 깨어 있어야 했다.

“샤워할 때 시중들 사람 필요하면 얘기해. 사람 보내 줄 테니까.”

“신우 씨가 시중들어 주게요?”

그의 이런 농담들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흑심이 깔려 있긴 하겠지만 음흉하다기보다 그녀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기 위해 하는 행동들같이 느껴졌다.

그답지 않은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간질거리며 심장에 콕콕 박혀든다.

이렇게 신우와 투덕거리다 보면 어쩌면 정말 공포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보다 잘할 사람 없어.”

“말만 들어도 감사하지만 아직 샤워는 혼자 하고 싶네요. 신우 씨 옷만 좀 빌려 입을게요.”

“그냥 나도 같이 씻을까?”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의 제의에 주희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 당황해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 배고파요! 스테이크 먹고 싶어요. 그럼 맛있게 부탁해요.”

그녀의 강경한 부정에도 그는 마음 상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씻어.”

그가 피식 웃는 걸 보고야 장난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맛없기만 해요.”

자신이 바보라 속은 거지만 뭔지 모르게 억울해 눈을 흘겼다. 그리곤 휙 뒤돌아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벗어났다.

쏴아아아!

샤워를 끝내고 나온 주희는 신우의 니트를 원피스로 연출해 입었다.

머리를 말려야 했지만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수건으로 둘둘 말고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오니 냄새가 더 지독했다.

놀라 주방으로 달려갔더니 웬만한 식당 못지않게 넓은 주방에 연기가 자욱했고, 주방 조리대에선 화악 불꽃이 치솟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요리를 어떻게 하면 저런 불쇼가 벌어지는 것인지. 불꽃이 배기후드까지 치솟고 있었다.

“신우 씨!”

“오지 마!”

그녀가 놀라 소리치자 그는 더 당황해 그녀를 오지 못하게 했다.

도대체 뭘 구운 것인지 불꽃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고, 연기마저 매캐하게 치솟고 있었다.

이러다 불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불안해 소화기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찌르르릉!

화재 벨이 울리자마자 주방 자동 소화장치가 작동됐는지 배기후드 쪽에서 쏴아아 소화기가 분사됐다.

매캐한 연기 탓에 머리 위에서 스프링 쿨러도 작동됐다.

촤아악!

불은 단번에 꺼졌지만 정말 한순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회장님!”

화재경보 때문인지 집안 경호원까지 놀라서 달려왔다.

“괜찮아. 경보기 해제시켜. 내일 주방직원들 오면 여기 청소 좀 부탁해. 그리고…… 그만 나가 봐.”

경호원은 검댕과 소화액이 묻은 채 근엄하게 명령하는 신우의 모습에 폭소를 터트릴 뻔했지만 그 옆에 주희가 물벼락을 맞은 채 얼어 있는 것을 보고는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미안해. 밥은 나가서 먹어야 할 거 같아.”

“도대체 어떤 요리를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난 분명 레시피대로 한 것 같은데 왜……. 미안, 금방 씻고 나왔는데 또.”

얼굴에 검댕과 소화액이 절묘하게 묻어 있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횡설수설하고 있는 그는 아무리 봐도 야단맞는 아이 같았다.

속에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런데 무슨 남자가 검댕이 묻었는데도 잘생겼다.

방금 전의 물벼락과 눈앞에 있는 검댕이 묻은 남자의 퍼포먼스가 남아 있던 공포를 깨끗하게 씻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젠 ‘다음에’ 타령하며 뒤로 내빼지도 못하겠다.

이렇게 볼 때마다 사랑스러워지는 남자를 당장 가지고 싶어졌다.

“그래요. 당신 때문에 또 씻게 생겼네요.”

주르륵, 흘러내리는 머리에 썼던 수건을 손에 꽉 거머쥐며 결심했다.

그를 유혹하기로.

“같이 씻을래요?”

아주 당차게 유혹할 생각이었는데 실제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너무도 티가 나게 떨렸다.

누가 들어도 목적이 분명한 물음인데 그는 대답이 없었다. 검댕이 묻은 얼굴 탓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틈만 나면 대시하더니 왜 갑자기 침묵하는지 조금 불안해지려 할 때였다.

그가 마치 참았던 숨을 뱉어내듯 크게 숨을 뱉어냈다.

“느리긴.”

그리곤 매우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댔다.

손에 묻은 검댕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린 신우는 그녀에게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기다렸잖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던 중이었다고.”

기다렸다니. 설마 장례식 가기 전에 그를 거절했던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설마 나 현와원으로 데리고 온 거, 처음부터 그런 흑심이었어요?”

뒤집어쓴 찬물 탓에 점점 몸 온도가 내려가는 만큼 머릿속 온도도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주희가 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땐 당연히 위로였고, 널 향한 흑심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가득해.”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한 쿨한 대답에 그만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좀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히 하지. 방금 전 날 유혹한 건 당신이란 걸.”

“그건…….”

뭔가 되게 억울한 것 같은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나 지금 셀프 칭찬 중이야. 기다리길 잘했다고. 넌 네 입으로 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 지키니까. 그 점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해. 자, 그럼 가실까요, 여왕님.”

신우는 스스로의 말에 도취된 듯 흐뭇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리곤 일순 정색을 하며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그녀를 달랑 안아 올렸다.

“나 왠지 당한 것 같아 억울한데요. 내가 지금이라도 싫다고 하면 어떡할래요?”

그에게 안기니 추위가 좀 가시는 것 같아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올려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하지만 네 의사는 이미 완벽하게 접수 끝났어. 우린 오늘 서로를 가지는 데 합의한 거지. 내 강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네 유혹으로 인해서.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번복은 없어. 우린 이제 본능에 충실해지면 되는 거야.”

신우가 어떤 일이 있어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딱 잘라 거절 의사를 표했다.

“내가 배가 고프다고 해도요?”

그녀의 배배 꼬인 말 한마디에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검댕이 묻었는데도 실룩거리는 그의 두 볼 때문에 그의 표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배가…… 고프다고 했었지.”

본능에 충실할 거라고 그렇게 딱 잘라 말하더니 배고프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결심이 심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풋, 이 남자 정말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작은 불만들이 그의 행동 하나에 씻은 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아직 많이 고픈 건 아니니 좀 참아 볼게요. 나중에…….”

아주 인심을 팍팍 쓰는 것처럼 목소리를 깔고 얘기하던 주희는 뒷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그의 발걸음에 갑자기 너무 가속도가 붙은 탓에.

욕실에 뛰어들 듯이 들어간 신우는 초고속으로 검댕을 씻어내고 옷을 벗어 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두 눈은 결코 즐겁지 못했다.

쏴아아!

샤워기 물줄기 아래서 상의가 벗겨졌을 때만 해도 숨을 참으며 그의 조각 같은 보디라인을 눈으로 즐겼지만 망설임 하나 없이 바지 단추를 풀고 있는 그의 손길을 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차라리 눈을 감았어야 했다.

이 집 거울은 습기도 차지 않는지 정면 거울을 통해 탈의하는 그의 모습이 오롯이 다 보였던 것이다.

속옷 한 장만 입은 채 움직이는 그의 하복부며 꿈틀거리는 허벅지 근육이 너무도 강렬하게 시선을 붙잡아서 너무나 당황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거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넋을 놨던 모양이다.

“언제까지 거울만 탐내고 있을 거지? 내가 거울까지 질투해야겠어?”

거울 속의 그가 순간적으로 커지는가 싶더니 와락 백허그를 당하고야 자동차 백미러에 써져 있는 말을 백 프로 공감했다. 사물이 실제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라는 말을.

갑자기 훅 끼쳐오는 그의 살냄새는 이미 합의를 했음에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아, 아. 저, 저기. 잠깐만요! 좀 천천…… 앗!”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좀 더 천천히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버버 말을 더듬는 사이, 축 늘어진 니트가 제대로 반항해 볼 새도 없이 거침없는 손길에 단번에 벗겨졌다.

갑자기 무거운 옷이 사라져 버리니 속옷을 입었는데도 완전히 알몸이 된 기분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팔이 저절로 가슴으로 향했다.

“……러지 마. 보고 싶었다고.”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잠긴 목소리에 이어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하필이면 샤워기 아래를 통과했고, 그녀가 입고 있는 브래지어와 팬티가 고스란히 물줄기에 젖어 들었다.

쏴아아!

이미 젖어 있는 그의 몸도 샤워기 아래를 통과했다.

방울방울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그의 얼굴이 그녀와 점점 가까워졌다.

“거울 말고…… 나를 탐내 주면 좋겠는데. ……이렇게.”

그녀의 입술 위에서 허스키하게 속삭인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달콤하게 핥기 시작했다.

샤워기 물이 뜨거운 건지, 그의 입술이 뜨거운 건지, 그의 입술이 스치는 곳마다 화끈거리는 듯한 열감이 느껴졌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물줄기를 따라 쇄골을 지나 가슴골로 향했을 때였다.

갑자기 가슴을 옥죄는 것처럼 젖어 든 브래지어의 호크가 툭 풀어지고 젖가슴이 불쑥 날것으로 드러났다.

신우가 기다렸다는 듯 젖가슴을 덥석 크게 베어 물었다.

“흡!”

그녀의 놀람 소리에 아랑곳없이 신우는 흡족해하며 입 안에 든 알맹이를 혀끝으로 지분거렸다.

“아, 아! 시, 신우 씨.”

혀끝이 젖꼭지를 건드릴 때마다 주희가 움찔움찔 몸을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신우의 욕망을 더더욱 끌어올렸다. 저도 모르게 젖꼭지를 살짝 깨물고 말았다.

“흡!”

그녀의 입에서 격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나더니 몸이 바르르 떨렸다.

“쉬, 괜찮아. 넌 지금처럼 계속 날 탐하기만 하면 돼.”

그녀의 가슴에서 입을 뗀 신우가 아쉬운 듯 꼿꼿하게 일어선 유두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주희는 그 말을 듣고야 자신의 손이 그의 젖은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름다워.”

그녀가 해야 할 말을 그가 대신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음 소리처럼 내뱉는 그의 잠긴 목소리엔 황홀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이 남자는 거울도 보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의 눈에 이상한 콩깍지가 씐 걸까.

어떻게 매일 거울을 보면서 타인에게 이토록 쉽게 아름답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

이 남자의 미의 기준이 매우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말은 마법의 단어인지 그녀의 뇌를 말랑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이 마치 그의 하수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요구대로 마구 그의 몸을 더듬어대기 시작했다. 태평양 어깨에서 시작된 그녀의 열기 띤 손길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더듬었다. 곧바로 흡,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더 단단해지는 걸 보니 왠지 신기했다.

그녀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손바닥 밑의 근육이 꿈틀꿈틀하는 게 재미있어 신들린 듯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부를 손바닥으로 스윽 쓸어내리자 헬스장에서 전시용으로 붙여놓은 울룩불룩 징그러운 근육과는 뭔가 다른 자작자작한 근육이 만져졌다.

어떻게 하면 몸에 이런 예쁜 굴곡이 생기는 걸까.

그녀의 호기심 많은 손이 그의 하복부를 중심으로 좌우로 멋지게 자리 잡은 골반 라인까지 더듬어 접수했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그의 골반을 더듬어대는 음흉한 손을 탁 붙들었다.

“왜요? 만져 달라면서요? 기분이 별로예요?”

“끙. 그걸 말이라고. 여기서 끝까지 가고 싶은 거야? 욕실에서?”

신우의 입에서 화가 난 것 같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뱉어졌다. 하지만 주희는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공평하잖아요. 난 다 벗겨놓고 신우 씨는 아직 아니잖아요.”

그녀의 손이 그의 몸을 탐하는 동안 어느새 그녀의 마지막 속옷마저 제거돼 있었다. 그래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주희는 왠지 모를 아쉬움에 살짝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천천히 가자고 한 게 누군데……. 재촉한 건 너니까 뒷감당도 네가 해.”

신우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그의 골반에 얹어진 그녀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분위기 파악이 안 된 그녀는 여전히 불만 섞인 목소리로 ‘내가 벗길 수 있는데’라고 꿍얼거린 것도 같다.

그런데 막상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진 마지막 속옷을 벗어 던지는 스트립쇼는 말 그대로 충격 그 자체였다.

신우의 신경질적인 손길 한 번에 몸을 가리고 있던 브리프가 단번엔 제거되고, 그녀 생애 처음 보는 거대한 물건이 불쑥 드러나 생생하게 끄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흡!”

주희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인간의 인체 구조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중심에 나타난 저건 도대체 어느 외계생물인 것인지.

흥분한 남자는 다 저런 모습인가?

가끔 가게로 들어오는 책 중에 빨간책이 있었다. 살색들이 많을 것 같은 잡지였는데 도 실장이 눈 버리는 책이라며 그때마다 가져가 버려 빨간책을 넘겨볼 기회가 없었다.

갑자기 도 실장이 몰래 감춰 뒀던 그 책이 생각났다. 미리 좀 꼼꼼하게 챙겨서 알아둘 걸 하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들었다.

어디 비교할 데라도 있어야 ‘당신 그거 정상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라도 해볼 테니.

어쨌든 눈앞의 저 외계생물이 장식으로 달려 있는 건 아닐 테니 당연히 겁부터 났다.

상상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연 상상이 됐고,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해 슬금 뒷걸음질을 치게 됐다.

“어딜. 그러면 곤란하지. 네가 이렇게 만들어 놨으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내, 내가 언제요? 나, 난 그렇게 커지라고 말한 적 없다고요.”

“했어. 손으로. 네가 이렇게 더듬었잖아. 으음…… 네가 주문을 건 거라고.”

신우는 주희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몸을 다시 강제로 쓸게 만들면서 고집을 부렸다.

주희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 몸 안에서 전율이 흘렀다. 그때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끄덕대는 물건의 위협적인 존재감이라니.

주희의 놀란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그의 페니스에 못 박힌 듯 굳어져 있었다.

“그러니 당장 책임져. 네 입으로 한 약속이니 도망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 믿어.”

딱 봐도 도망갈 태세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가 도망가게 놔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약속을 핑계로 한 번 더 주희를 옭아맨 신우는 그녀가 다른 변명거릴 만들어내기 전에 휙 안아 올렸다.

“우왓! 신우 씨, 나, 나 아직 다 안 씻었어요. 아직.”

“지금도 충분히 반짝반짝해. 여기서 더 예뻐지면 아마 네가 무척 힘들어질 거야. 그래도 좋다면 내가 씻겨주지. 씻을까?”

신우는 당장 그녀를 내려 직접 손으로 씻겨줄 것같이 말했다. 그랬더니 당장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아, 아니요. 시, 신우 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죠. 그냥 가요.”

그녀가 절대 내릴 생각이 없다는 듯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체하지 않고 곧장 침실로 들어선 신우는 거친 발걸음과 달리 그의 침대 위에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놓았다.

까만 침대 시트 위에 젖은 모습 그대로 누워 있는 주희의 눈부신 나신은 너무도 아름다워 눈이 멀 것 같았다. 겨우 꾹꾹 눌러 두고 있던 그의 이성이 한순간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몸속 욕망의 괴물이 꿈틀대며 당장에 그녀를 집어삼키고만 싶었다.

“신우 씨…….”

그녀에게 이름이 불리고야 붉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던 이성이 돌아왔다.

“괜찮아. 천천히 갈게. 아프면 얘기해.”

다리 벌려 그녀를 사이에 가둔 채 엎드려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천천히 입술을 탐하며 그녀의 단 숨을 마셨다.

그의 뜨거워진 혀가 그녀의 입 안 깊숙한 곳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단내 나는 그녀의 혀를 휘감아 그녀를 송두리째 빨아들였다.

“하아…….”

숨소리가 차츰 관능적인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입술에서 만족하지 못한 그의 혀가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 움푹하게 파인 쇄골에 고인 물기를 할짝대며 핥아댔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탁한 비음이 새는 것을 들으며 신우는 욕실에서 맛본 적 있는 탐스런 과실을 덥석 다시 깨물었다.

“흣!”

주희가 억누른 신음 소리를 흘리며 허리를 꿈틀거렸다.

그의 허벅지 안쪽을 건드리는 그 몸짓에 그의 페니스가 비명을 질러대며 용틀임을 했지만 눈을 질끈 감으며 참았다.

그는 욕심을 부렸다. 그녀의 입에서 먼저 그를 원한다는 소리가 나오길.

다디단 그녀의 가슴 꼭지를 혀끝으로 감고 누르길 멈추지 않으며, 그의 손은 더 은밀한 곳을 찾아 그녀의 납작한 배를 더듬어 내려갔다.

가만히 검은 숲을 헤매던 손가락 하나가 참으로 무례하게 불쑥 그녀의 따스한 샘을 침범했다.

흠칫, 그녀의 두 다리가 놀라 그의 손을 허벅지 사이에 가둬 버렸다.

욕망에 흐려져 어쩔 줄 몰라 감겨 있던 그녀의 두 눈도 번쩍 떠졌다.

“괜찮아. 원래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여자랑 키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주제에 섹스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알 게 뭔가.

그냥 이건 본능이었다. 내 자리를 찾아가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의 거짓말에 다행히 그녀가 속아 넘어갔다.

신우는 다시 정성스레 그녀의 탐스런 가슴을 핥기 시작했다. 덕분에 불안해 보이던 눈동자가 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그의 팔을 옥죄고 있는 그녀의 허벅지 힘도 점점 느슨해졌다.

여전히 그녀의 샘에 잠겨 있는 그의 손가락에서부터 내면 온도가 점점 상승했다. 손가락이 아니라 당장 그의 물건을 집어넣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강한 의지로 욕망을 꾹 눌러 삼키며 그녀의 더 깊은 샘으로 손가락을 살짝 밀어 넣었다. 동시에 엄지로 그녀의 작은 돌기를 꾹꾹 눌러 그녀를 더 자극했다.

그녀의 다리가 다시 확 오므려지더니 바르르 떨렸다. 마치 그녀의 안에 손가락이 아니라 자신의 물건이 갇힌 것 같은 욕망이 들끓어댔다.

코에 뜨거운 열이 고이는 것만 같았다.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아, 안 되겠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미안한데 나 지금만 나쁜 놈 하면 안 될까? 제발…….”

“아픈 거예요? 표정이…….”

그의 물건이 빳빳하게 서다 못해 꿈틀대며 끄덕대고 있었지만 엎드려 있는 탓에 그녀에겐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만 보인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에 동정의 표정이 나타났다.

“아파……. 네게 들어가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더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내가 허락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해요. 더 이상 아파하지 말고.”

“고마워. 눈 감아도 돼.”

그녀가 자신의 물건을 보면 또 놀랄 것 같아 눈부터 감을 것을 요구했다.

키스할 때처럼 지금도 그녀는 착실하게 그의 말을 잘 따랐다.

그녀의 두 눈이 살며시 감긴 틈을 타 그는 허둥지둥 그녀의 다리 사이에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안이 너무 좁아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단호한 손길로 그녀의 두 다리를 활짝 벌려 무릎을 세웠다. 그리곤 그녀의 촉촉한 샘 입구에 물건을 가져다 살며시 비볐다.

그녀가 숨을 죽인 채 허벅지를 움찔움찔했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그 숨죽인 모습이 너무도 황홀해 그는 더 이상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 꾹, 몸에 힘을 줘 물건을 그녀의 안에 밀어 넣어 버렸다.

“……!”

순간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당연히 그의 중심은 머리만 디민 채 그녀의 좁디좁은 틈에 갇히고 말았다.

그가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렬한 쾌락이 찾아들었다. 그녀의 몸이 왜 굳어졌는지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욕망이란 이기적인 유전자가 그 이유를 모른 척 무시했다.

그는 물건의 끝에서만 전해져오는 쾌락이 아닌 온전한 것을 느끼고 싶어졌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그녀의 입에서 당장 그만하란 말이 나오기 전에 그녀의 안에 잠긴 물건을 더욱 세게 푹 밀어 넣어 버렸다.

그녀의 내벽이 부르르 떨리며 그의 페니스를 미친 듯이 조여댔다.

“윽!”

사실은 그녀가 비명을 질러도 들어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얗게 노려볼 정도로 기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미안. 네 고통이 줄어든다면 할퀴어도 좋고 깨물어도 좋아. 나가라고만 하지 마.”

미리 자신의 최선을 얘기했다.

화가 난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지만 그는 그 싸늘한 눈초리를 전부 받아내며 그녀의 안에서 가만히 굳어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는데요?”

“몰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른다니요? 설마 아침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건 싫어요. 아프다고요.”

그녀의 얼굴이 좀 더 하얗게 질렸고, 몸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윽, 윽. 제발. 네가 덜 아파지면 움직이려고 참고 있는데, 자꾸 이렇게 꿈틀대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그냥 해버릴지도 몰라.”

끝까지 밀어 넣고 보니 숨 쉬기 힘든 쾌락이 찾아든 건 좋았지만, 이 쾌락을 만끽하지 못하고 계속 이대로 있어야 한다는 건 또 다른 고문이었다.

“차라리 그냥 해요. 이러고 있으면 고통만 더 길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만둘 거 아니면 당장 빨리해요.”

“그래도 돼?”

“지금 안 할 거면 당장 나가요.”

신우는 그녀의 싸늘한 축객령이 마치 축복의 팡파레이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도 않고 곧바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꽉꽉 조여대는 그녀의 내벽에 쓸리는 감각이 쭈삣 소름이 일 정도로 강렬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이상했다. 그녀의 몸은 마법의 공간이기라도 한 건지 도저히 담을 수 없을 것 같던 그의 몸을 오롯이 다 담아내고 있었다.

스윽스윽, 물건의 머리 부분까지 아슬아슬 빼냈다가 푹 다시 찔러 넣기를 천천히 반복했다.

의외로 그녀의 표정에서 점점 고통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고통이 사라져가는 만큼 그의 중심에서 올라오는 쾌감도 커져가는 것만 같았다.

“으음…….”

분명 들었다. 아주 작은 신음 소리였지만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아닌 야릇한 비음이 흘렀다.

“이제 아프지 않아?”

그녀의 눈가에 살짝 핑크빛 물이 들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야한지 안 그래도 흘러넘치고 있는 욕망을 더 부채질했다.

“아프진 않지만 뭔가…… 아, 아니에요. 그냥 해요.”

정말 이제 아프지 않았다. 처음엔 몸이 꿰뚫리는 듯한 충격적인 아픔이었는데 막상 그가 움직이니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냥 좀 불편했다.

그 커다랗던 그의 물건이 전부 몸 안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불편한 것이겠지만 그 불편함을 감안하고도 뭔가 좀 묘한 느낌이 더해졌다.

몸 안으로 따스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원래 섹스가 이런 기분인 걸까?

비교할 데가 없었지만 이 이상한 감각이 싫지만은 않았다.

너무 원색적인 행위라 낯이 뜨거운 것만 제외하면 몸 안을 가득 채워 주는 야릇한 느낌이 좋았다.

“그럼 조금만 더 빨리 가도 될까?”

그가 물었고,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가 숨을 뱉어내며 고맙다고 한 순간, 그의 몸이 갑자기 그녀를 향해 거세게 다가들었다.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쾌락에 그녀가 놀라 부르르 떨었고, 그녀의 손도 놀라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힘들면 목에 매달려도 좋아.”

욕망에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몸에 적나라하게 부딪혀 오는 힘이 달라졌다.

스윽! 스윽!

그녀의 몸 안을 치고 들어오는 젖은 소리의 박자도 빨라졌다.

주희는 그의 목에 꽉 매달려야 했다.

그렇게 하면 멀미가 일 것 같은 몸 안의 이상한 반응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흣!”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나는 신음 소리가 커져갔다.

“그래, 그렇게 소리를 내줘. 내 이름을 불러줘.”

“아아, 시, 신우 씨…….”

그녀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신음 소리를 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아, 하아. ……좋아. 네가 좋아 미칠 것 같아.”

신우는 자신의 분신을 욕심껏 뿌리 끝까지 푹푹 밀어 넣었다. 그녀의 골반이 또다시 바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의 욕심을 한껏 받아내 주었다.

조금 더 욕심을 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붉게 물들었고, 그의 몸은 점점 더 욕망의 짐승이 되어갔다.

스윽, 스윽! 철퍽! 철퍽!

그녀의 내벽을 오가는 젖은 소리와 살과 살이 부딪치는 적나라한 소리가 두 귀를 후끈하게 달궜다.

“하, 제, 제발 신우 씨…… 강도가 너무…… 하아…….”

광폭하게 흔들어대는 그의 거친 몸짓에 따라 출렁거리는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도 거세졌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점점 더 그의 몸 안의 불길을 강도 높게 달궜다.

“좋아. 네가 이렇게 버텨줘서 너무 좋아. 조금만, 조금만 더 깊이…….”

길들인다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몸은 그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렇게 힘들어하더니 이젠 욕심껏 몸을 흔들어대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리로 날 감아.”

이런 야한 요구에도 그녀는 반항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허리를 감아왔다.

더 깊이 삽입되는 쾌락의 깊이보다 그녀가 허리를 감아올 정도로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를 더 행복하게 했다.

“좋아해.”

“……좋아해요.”

이미 빈틈없이 꽉 껴안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더 세게 서로를 껴안았다.

그렇게 서로를 품어 하나가 된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갈구하는 하나의 선율로 흔들렸다.

신우가 과격한 쾌락을 위해 짓쳐 들면 그녀의 입에서도 격한 호흡 소리가 흘렀고, 느릿하게 세포 하나하나의 감각을 일깨우듯 짓쳐 들 때면 그녀의 신음 소리도 보채듯이 흘렀다.

지칠 줄 모르고 흔들리던 두 사람의 몸이 어느 순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행복을 연주한 세포들이 몸에서 몸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서로가 마지막 떨림을 끝낼 때까지 서로를 품은 몸을 놓지 않았다.

스르르, 마지막까지 함께하느라 힘겨웠던 주희의 팔과 다리가 힘없이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 잘래요.”

“……고마워.”

그녀의 몸 안에서 빠져나온 신우는 가만히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 방금 전의 그 뜨거웠던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근대며 천사 같은 잠을 자고 있었다.

“널 놓지 않을 거다.”

그가 인간이 아니란 걸 알면 그녀는 어쩌면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전부를 걸고서라도 그녀를 잡을 생각이었다.

주희와의 이 짧은 행복의 시간이 끝난 뒤 남은 수천 년의 세월을 그리움에 저당 잡힌다 해도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구도 널 해치게 놔두지 않을 거다.”

가만히 그녀에게 속삭인 신우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침대를 내려왔다.

결심을 굳혔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시는 장례식장에서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선 안 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했다.

드레스룸에서 옷을 꺼내 입는 신우의 눈빛은 어느새 누군가를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자의 눈빛으로 변해 냉정하게 빛났다.

드레스룸을 나온 신우가 침대가에 다가서 다시 한번 주희를 눈에 담고 돌아설 때였다.

문득 침대 협탁 위에 놓인 귀신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신우는 무의식적으로 상자를 집어 방을 나섰다.

* * *

그 시각, 제신리도 캄캄한 어둠에 휩싸인 채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덜컥, 발굴단의 숙소 제일 안쪽에 마련된 한 소장의 방문이 열렸고, 드르륵 캐리어를 끈 한 소장이 마치 유령같이 해쓱해진 얼굴로 밖을 나섰다.

“그놈이 가지고 있던 상자, 반드시 직접 확인해야 해.”

귀신상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그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물건 중에도 가끔 이상한 기물들이 있긴 하지만 현신하지 않은 차사의 목소릴 듣거나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실린 물건을 만들진 못했다.

그런데 박 회장은 분명 ‘주희’라는 이름을 부르는 차사의 목소리에 반응했었다.

차사가 둘이나 장례식장에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귀신상자를 든 박 회장의 반응이 그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귀신상자가 신물이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신물일 가능성이 더 높아졌기에 직접 손에 넣어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어야 했다.

방금 전의 빙의로 아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한 소장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무섭게 빛을 발했다.

탁!

향로가 든 캐리어를 차에 실었을 때였다.

“한 소장님?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맥주를 사들고 들어가던 임 팀장이 캐리어까지 차에 싣는 한 소장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서울에 일이 좀 생겼네.”

“이 늦은 시간에 서울에 가신다고요? 아니, 무슨 급한 일이시기에. 내일 가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가로등 불빛 탓이겠지만 한 소장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 보여 무심코 한 말이었다.

하지만 괜한 관심인 듯했다.

“개인적인 일이니 신경 쓸 거 없네. 그보다 새 유적이 발견되면 즉시 연락 주는 거나 잊지 말게.”

귀신 같은 허연 얼굴만큼이나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러지요. 다녀오십시오.”

씁쓸해하는 임 팀장의 인사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급하게 차에 오르는 한 소장이었다.

부아앙!

“몸도 안 좋아 보이는구만, 어딜 저렇게 꽁지 빠지게 쫓아가는 거지? 아아, 뭐. 내 알 바 아니지. 어쨌든 한 소장 없으면 내일은 스트레스 좀 덜 받을 거야. 무슨 일인지 몰라도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네. 카악, 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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