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14/20)

11장

이가서림에 도착한 주희는 도 실장에게 새미가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허둥지둥 새미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드르륵,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새미의 옆에서 주희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벌써 몇 번째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내가 얼마나 튼튼한 통뼈 체질인지 너 잊었어? 나 우리 엄마 딸이야.”

새미는 괜찮다, 괜찮다 말하고 있었지만 얼굴 군데군데 생채기투성이였다.

게다가 도 실장 말론 온몸이 멍투성이일 거라고 했다.

어젯밤 동네 맥주집에서 김 순경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옆 테이블과 싸움이 났단다.

바닥을 구르는 드잡이질이었다고 했다.

김 순경이 겨우 싸움을 말리긴 했다는데, 김 순경조차 새미가 싸운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도 실장 말이, 너 몸도 멍투성이일 거…….”

“윽, ……가, 간지럽잖아. 만지지 마.”

그냥 살짝 손을 댔을 뿐인데 새미가 신음 소리를 냈다.

이내 표정을 바꾸며 간지럽다 말하고 있었지만 절대 간지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휙, 감청색 유니폼 셔츠를 강제를 걷어 올렸더니 옆구리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야, 기집애가 손님들 있는데…… 야하게 왜 그래?”

커피머신에 가려 손님들에게 보이지도 않는데, 멍든 걸 보여 주기 싫었는지 다급하게 다시 옷을 끌어 내리는 새미였다.

“너…… 무슨 일로 싸운 건데? 네가 이유 없이 싸우진 않았을 거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냥 술김에 말싸움이 난 것뿐이야.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지. 넘어지다가 의자에 부딪혔거든. 너도 알겠지만 나 어디 가서 이유 없이 맞고 다닐 여자 아니잖아.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 정말 계속 여기서 영업 방해하고 있을 거야? 곧 점심시간이란 말이야. 너도 얼른 가서 일해. 자꾸 도 실장한테 다 맡겨두지 말고.”

“정말 아무 일 아냐? 혹시 여자 혼자 산다고 얕보고…….”

“얘는? 무슨 소리야? 나 그때 건이 오빠랑 같이 있었어. 그리고 정말 그런 일로 집적거린 놈이었으면 그놈의 구슬을 깨 버렸을걸? 그보다 넌 요즘 왜 그렇게 바빠? 맞선 본 얘기나 좀 들어 보려고 했더니, 얼굴 보기가 힘들어. 가게 계약 일은 잘된 거야?”

“어? 어. 뭐, 그렇지.”

“뭔가 수상한데……?”

“수상하긴 어디가? 나도 이제 가게 들어가 봐야겠다. 도 실장님 혼자 많이 피곤하셨을 거 같아. 그리고 너 정말 성질 좀 죽여. 아직도 십 대인 줄 알아?”

“엄마 같은 잔소리하려거든 그만 가. 나중에 영업 끝나고 놀러 와.”

“오늘은 안 돼. 나중에 장례식장에 갈 일 있거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장례식장엘 가? 괜찮은 거야?”

귀신을 보는 눈을 가진 걸 새미도 알기에 묻는 말이었다.

“꼭 가야 하는 자리라서. 괜찮을 거야.”

“따라가 줘?”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자신의 가게 일도 접고 따라가 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새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주희는 빙긋 웃었다.

“고맙지만 괜찮아. 이번엔 신우 씨가 따라가 준대.”

“응? 신우 씨이이이? 이 기집애 봐. 너 그 건물주랑 무슨 사이야? 똑바로 말해.”

물고 늘어질 건수를 붙잡았다는 듯 당장 추궁하려 드는 새미의 눈길을 피해 뒷걸음질 쳤다.

“다음에, 확신이 서면 말해 줄게. 나 간다.”

신우가 특별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사실 아직도 자신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다.

어릴 때 죽어가던 그 아이에 대한 연민인지, 아니면 정말로 남녀 간에 싹튼다는 그런 특별한 감정인지.

그의 모든 것에 끌리면서도, 순간순간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천계신으로 돌아가서도 이 감정이 남아 있으면 남은 생을 어떻게 감당할까 두려움이 앞섰다.

주희가 종종걸음을 치며 커피숍을 나가는 모습을 새미가 멀거니 쳐다봤다.

“뭐야? 정말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남자한텐 관심도 없더니……. 정말 사귀는 거면 좋겠다. 그럼 어제 그런 떨거지들 입에 오를 일도 없을 테니. 씨이, 건이 오빠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그 개자식들 방울을 터트려 버리는 건데.”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새미의 눈매가 주희와 같이 있을 때와는 달리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어젯밤 싸움이 붙은 건, 그녀가 아닌 주희를 두고 모의를 하던 추잡한 놈들 때문이었다.

* * *

“명새미 씨, 정말 굉장했습니다. 욕이 얼마나 차지던지, 듣고 있던 제 뇌가 다 후들거리던걸요. 주둥이를 확 찢어 버리겠다는 약과고, 달려들어서는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데 그 양아치 새끼들이 불쌍할 정도였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졌거든요. 완전 돌격대장 같은 여자였습니다.”

주희를 보내 주고 회사에 들어온 신우와 응산이 탁 경호원을 불러 어제 사고의 자초지종을 듣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찾고 있던 박민의 딸이 그도 만난 적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뭣 때문에 싸움이 난 건지는 모르고?”

신우는 박민의 딸이 확실하다는 DNA 검사 결과지를 신기한 듯 훑어보고 있었고, 응산이 눈살을 찌푸리며 싸운 이유를 물었다.

“멀리 있어서 자세한 건 잘 모르겠고, 그놈들 뇌는 없고 아랫도리만 있는지 명새미 씨가 아는 누군가를 해하려고 작당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집 아버지가 만날 땅이나 파고 돌아다녀서 혼자뿐이라는 둥 그런 말이 들렸던 거 같으니까요.”

DNA 검사 결과지를 보느라 탁용호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신우였는데 마지막 한마디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고개를 든 신우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 집 아버지가 뭘 하고 다닌다고?”

“땅 파고 돌아다녀서 집에 거의 없…….”

신우의 전신에서 냉랭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응산이 다급하게 탁용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신우의 싸늘한 기운을 접하고야 탁용호가 말하고 있는 이가 주희란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속에서 신음 소리가 샜다.

“제가 어떤 놈들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신우의 입에서 안 좋은 소리가 나오기 전에 응산이 먼저 선수를 쳤다.

“주희에게 털끝만 한 피해도 가지 않게 낱낱이 조사해. 하나도 빠뜨지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명새미 씨에게 경호부터 붙여. 그런 놈들이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이 DNA 검사 결과는 차 실장님과 다시 의논해서 결정할 테니 넌 지금 당장 나가서 그놈들 신상부터 알아봐.”

“그럼 주희 님 경호는 어떻게 할까요.”

“장례식에 참석해야 해서 오늘은 내가 곁에 있으니 괜찮겠지만 앞으론 경호원을 붙여야지. 새 경호원 더 뽑도록 해. 그때까진 당분간 네가 경호를 맡고.”

그토록 완강하게 경호원을 충원하지 않겠다더니 주희의 신변 경호를 위해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양아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휴게소에서 김 이사에게 대놓고 사귄다 선포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히 주희에게 경호를 붙이는 게 맞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차 실장님께 경호원 충원 건에 대해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그리고 그저께 사람시켜 알아보라고 했던 트럭 넘버, 기사 주소는 어떻게 됐어? 알아봤어?”

주희에게 가게 되면 말이 나올 것 같아 미리 물었다.

“신우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들이 있었습니다. 주소는 알아 놨는데 아마 장례식장에 있을 거 같습니다. 급한 얘기 아니시면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 전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어제 새벽, 신우의 도착 시간에 맞춰 도깨비길을 통해 제신리에 도착했었다.

신우와 주희가 도착해야 할 숙소에서 기다리는데 만나자마자 신우가 뜬금없는 조사를 부탁했다.

트럭 넘버와 김철수라는 이름만 주면서 주소지를 알아보라는.

오늘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 결과물을 받아 볼 수 있었다.

그가 알기로 신우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겠군.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는 건 시선을 너무 많이 끌 수도 있겠어. 다음에 전하지.”

연유를 몰랐는데 유언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동안 의아하게 생각하기만 했던 궁금증이 전부 해결됐다.

분명 또 주희가 귀신의 사연을 경청했던 모양이다.

응산은 주희가 너무 위험하게 군다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그런 행동들이 싫지 않았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가자, 용호. 네가 당분간 명새미 씨 경호를 맡아야겠다. 명새미 씨가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서 경호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제가 또 명새미 씨를요?”

신우와 응산이 주고받는 대화에 탁용호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다 자신이 호명되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명새미의 머리카락 몇 가닥 얻기 위해 일부러 셔츠에 머리카락이 꼬이게 했다가 따귀를 얻어맞을 뻔했다는 사실은 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관들 앞이라 차마 다 전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한 번만 더 그딴 입 나불거려 봐. 그땐 애초에 그딴 생각 들지도 않게 확실하게 방울을 터트려 버릴 거니까!’라던 말이.

남자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거침없이 날리던 말폭탄.

듣고 있던 모든 남자들의 아랫도리가 졸아드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물론 그 말이 그 양아치들을 더 화나게 해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억센 사람이 또 자신의 담당이라니.

“왜?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제가 잘 경호하겠습니다.”

신우가 밖으로 나가는 응산과 탁용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의 신경은 이미 모두 주희에게 가 있었다.

읽어야 할 서류로 눈을 돌렸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인터폰에 손이 갔다.

-네, 회장님.

“차 실장님, 자리에 있습니까?”

-네. 계십니다, 회장님.

“지금 내가 간다고, 어디 가지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인터폰 저편에서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곧바로 인터폰을 종료시켜 버렸다.

결재 서류들과 명새미의 검사 결과지를 함께 챙겨 든 신우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차 실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주 미안하게도 차 실장의 업무를 가중시켜 주기 위해서.

아무래도 수일 내에 차 실장을 임원진으로 발탁하는 문제를 이사회에 상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수일 내에.

원래는 좀 더 먼 미래의 일로 계획을 잡았었는데 갈수록 이 회장 자리가 거추장스러워지고 있어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 * *

“이 박사님께 다녀오셨다면서요?”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이가서림에 들른 김 순경이 책 정리를 하고 있는 주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박신우와 같이 내려갔다는 도 실장의 말에 어제부터 내내 기운이 없던 김 순경이었다.

“네. 제신리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김 순경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미안해요. 내가 같이 있었는데 새미 씨가 그렇게 다치고.”

김 순경이 마치 자신이 다치게 하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해 사과를 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김 순경님이 계셨으니까 그 사람들 경찰서까지 잡아갔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요?”

“하지만 결국 다 훈방 조치로 풀려나 버렸어요.”

그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들이 상해죄로 고소하겠다느니,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느니, 별소리를 다 하고 갔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원인이 새미가 아닌 주희 때문이었다는 건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시간만 나면 이 근처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그 나쁜 놈들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희를 어떻게 할까 봐.

“새미도 그렇고, 정말 뭣 때문에 그런 시비가 붙었는지 얘기 안 해줄 거예요? 새미, 이유 없이 화내는 애 아니거든요.”

주희가 책 정리하던 것까지 내려놓으며 빤히 김 순경을 봤다.

“아, 아니 그냥, 그냥 술김에 시비가 붙었을 뿐이에요. 이, 이유 같은 거 없었어요. 어? 이 배지가 왜…….”

주희의 시선에 거짓말이라곤 못하는 김 순경이 당황해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배지를 보고는 의아해하며 집어들었다.

“아, 그건 만지지 마세요. 이리 주세…… 아!”

김 순경이 배지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본 주희가 놀라 급히 배지를 돌려받으려 할 때였다.

발치에 쌓여 있는 책을 잊고 달려가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을 질끈 감고 넘어지면서도 내가 저걸 왜 저기다 두었을까 후회했다.

“헉, 주희 씨!”

다행히 김 순경이 타이밍 좋게 잡아 주어 꼴사납게 넘어지는 불행만은 겪지 않아도 됐다.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네요. 고마워요. 배지는 이리 주세요. 따로 보관해 둔다는 게 멀리 좀 다녀오느라 깜빡 잊고 있었어요.”

“아, 이 배지 주희 씨 거예요? 내가 아는 배지랑 너무 똑같은데요.”

“똑같은 배지요? 그러고 보니 에이스 아파트 사건 때 김 순경님도 계셨었죠.”

처음엔 김 순경이 똑같은 배지를 어떻게 아는 걸까 의아해하며 김 순경을 빤히 올려다보다 갑자기 에이스 아파트 자살 사건이 떠올랐다.

궁금증이 풀리고 나니 새삼 아직도 허릴 받치고 있는 김 순경의 손이 신경 쓰여 거리를 두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서려던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다 못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주, 주인님…….”

“무슨 대단한 대화가 오가야 그런 자세가 가능한 거지?”

도 실장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이어 얼어붙은 공기만큼이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희는 나쁜 짓 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목소리에 움찔 놀라 뒤를 돌아봤다.

신우가 가게 정문을 통하지 않고 도 실장과 함께 안채 문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

왜 거기서 나오냐고 물어야 하는데 검은색 슈트를 마치 어느 컬렉션의 메인 모델처럼 소화하고 있는 신우의 모습에 잠시 넋이 빠져 멍해지고 말았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이지 검은색이 독보적으로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와, 왔어요?”

그의 시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겨우 장례식 복장에 넋을 빼고 있는 본인의 모습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던 거냐고 물었는데 대답하기 곤란한 내용인가 보지?”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에 그녀가 대답하려는데 김 순경이 먼저 화들짝 놀라며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배, 배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히끅, 주희 씨가 이걸 급하게 받으러 오다 넘어질 뻔해서 잡아 준 거고요. 그저께 밤 사건 때 옆에 떨어져 있던 배지와 너무 똑같은 배지라서 제가 깜짝 놀라는 중이었거든요. 증거물 보관소에 넣으려고 보니 없어져서, 혹시나 해서.”

“뭐라고요! 그럼 지금 우리 주인님을 도둑 취급하셨던 겁니까? 김 순경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우리 주인님이 어딜 봐서 도둑 깜냥입니까? 그건 이 박사님이 현장 나가시기 전에 준 배지란 말입니다.”

신우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김 순경이 딸꾹질까지 해가며 열심히 변명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도 실장이 버럭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아! 아니에요! 절대! 저는 절대 주희 씨가 도둑이란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라, 그냥 같은 배지라서…….”

“그러니까 같은 배지라서 의심했다는 거잖아요? 으씨, 저 배지 아무래도 마가 꼈나 보네. 새미 씨가 가져간 거 겨우 돌려놨더니 이번엔 도둑 누명이야. 이리 주세요. 가져가서 소금이라도 팍팍 쳐놔야겠어요. 석아, 가자.”

도 실장이 거의 빼앗다시피 해서 배지를 챙기더니 안채 문을 도로 열고 나갔고, 남은 사람들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한 석은 마치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도 실장을 따라 나갔다.

그런데 주희는 묘한 기류와 상관없이 마치 충격적인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김 순경을 빤히 쳐다봤다.

그 탓에 신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지만 주희만은 느끼지 못했다.

“김 순경님, 그 배지와 똑같은 배지, 에이스 아파트 사건 때 본 거 아니었어요? 그저께 밤이라면, 다른 사건에도 그 배지가 있었던 거예요?”

“네. 그저께 밤에 대학교 옥상에서 투신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 학생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근처에 떨어져 있는 배지를 제가 나중에 주웠습니다. 배지가 흉기일 수는 없겠지만 어쩐지 좀 신경이 쓰여서요.”

김 순경의 말에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학생요? 혹, 이름이 장지혜인가요?”

“어? 주희 씨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 거죠?”

김 순경의 확답에 주희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버지에게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김 순경의 말에 의하면 자살일 확률이 높았고, 자살은 정해진 운명을 살다 간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늘 그 장례식에 가요. 장 교수님이 아버지의 은사시거든요. 그 배지, 아마 지혜 거가 맞을 거 같네요. 장 교수님이 한 문화재연구소 고문이시거든요. 그 배지, 연구소 배지예요.”

남겨진 장 교수의 안타까움을 걱정했었는데, 어쩌면 환생조차 하지 못할 지혜의 일이 더 크게 심장을 짓눌러댔다.

“아! 그런…….”

“그런데 아까 없어졌다던 건, 그럼 그 배지가 없어졌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배지를 잃어버렸다는 말이 머릿속에 남아 김 순경에게 재차 물었다.

“네. 오늘 추가로 증거물 보관소에 보내려던 거였는데, 사실은 어제 새미 씨 일로 좀 정신이 없었거든요. 없어진 걸 오늘 아침에야 알았어요.”

추궁하는 물음이 아니었는데 김 순경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자살이 맞나요? 제가 아는 지혜는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질 아이가 아니었는데.”

“아직 수사 중이지만 아마 거의 확실한 거 같습니다.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문이 있어 그쪽으로도 수사 방향을 넓히고 있습니다.”

주희의 먹먹해 보이는 표정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김 순경이 안절부절못해할 때였다.

-128번지 준 미용실에 신고 들어왔습니다. 대낮부터 취객이 난입해 영업 방해 중이랍니다. 출동 바랍니다.

위로의 말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무전기에서 치직거리며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서 가보세요. 준이 어머니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가볼게요. 장례식 잘 다녀오세요.”

딸랑!

김 순경이 완전히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주희는 그저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문밖으로 김 순경이 완전히 사라지고야 뒤돌아 신우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

신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김 순경의 품에 안겨 있는 주희를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하던 격한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의 감정 수습이 먼저였다.

‘이 여잔 쓸데없이 공감 능력이 너무 뛰어나.’

주희가 무엇에 마음 아파하는지 알았지만 딱히 위로할 말이 없어 속으로 투덜댔다.

주희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자살은 명부에서조차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 없는 말을 만들어 괜찮다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자살은 주어진 수명대로 산 게 아니니 차사가 데려가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운이 좋아 다른 차사의 눈에 띄었으면 좋겠지만, 아니면 어쩜 지금 그들이 가는 장례식장에서 지혜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최악의 경우만은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알지도 못하는 그 영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그의 품에서 가슴으로 울고 있는 작은 여인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를 바라서.

신우는 지금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자살했을지도 모르는 영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네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다.”

“알아요. 아는데…….”

주희는 신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감정 수습이 잘되지 않아 더 꼬옥 그를 껴안았다.

그녀의 모든 아픔을 다 품어 줄 것 같은 신우의 넓은 품이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다.

고개를 파묻고 가만히 있다 보니 가슴 떨리던 아픔들이 조금씩 희석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안겨 있으면 너무 편안해 잠이 들 것만 같아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장례식장, 지금 가게요?”

셔츠까지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신우였으니 물을 것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물었다. 자신은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해서.

“그럴 생각이었는데 너 보니까 안 될 거 같다. 안 그래도 약해 빠진 몸이었는데 제신리 갔다 오곤 정신적, 육체적으로 다 한계가 온 것 같아 보여.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

주희를 강제로라도 휴식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상태로 장례식장에 갔다가 또 안 좋은 일이라도 겪으면 정말로 귀신 씌는 반갑지 않은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신우가 대답을 하며 주희를 가만히 안아 올렸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본인도 느끼는지 반항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런데 완전히 안기기가 무섭게 주희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 팔! 신우 씨, 팔요! 어서 내려주세요. 붕대는 어떻게 한 거예요? 붕대가 없어서 깜빡 잊었잖아요.”

붕대를 풀어 버렸다. 주희의 다정다감한 배려가 마음에 들긴 했지만 씻고 옷 갈아입고 하는 데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가만히 있어. 자꾸 움직이면 정말 아파져.”

“그러니까 내려주세요. 덧나면 어떡해요?”

“팔 부러진 거 아니야. 그냥 껍질만 살짝 까진 정도였다고. 좋은 약이 있어 발랐더니 거의 다 나았어. 붕대는 더 이상 칭칭 감지 않아도 돼. 네가 지금처럼 꿈틀거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그의 입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 같은 유려한 거짓말에 주희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그러니까 어서 내려달라고요. 괜히 나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으로 머리 고생시키지 말고 잠이나 자.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할 거 아냐. 넌 그냥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돼.”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이대로 자도 되는 거예요?”

“그래, 자. 넌 원래부터 내가 옆에 있으면 잘 자잖아.”

강요로 받아낸 고맙다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좋아 입 근육을 실룩거리던 신우가 갑자기 자신이 내뱉은 말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져 다시 입가가 굳어졌다.

“이거 뭔가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가만 생각해 보면 주희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는 모습을 본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였다.

남자를 옆에 두고 이렇게 잘 자는 걸 순수하게 기뻐해도 되는 것인가?

그만큼 그를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남자로 보지 않기 때문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져서 어느 쪽인지 따지기 위해 그녀를 내려다봤다.

“…….”

하지만 따질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혼곤한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이렇게 힘들어할 줄 알았으면 아까 차 안에서 더 자게 내버려 둘 걸 그랬어.”

차사한테까지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가 하면, 또 이렇게 의식을 잃고 있으면 다시 눈을 뜨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연약해 보인다.

이래 가지고 연애를 할 수나 있을까?

자신은 몇 날 며칠이고 물고 빨고 싶은데 이 여잔 자신에게 머리만 닿으면 잠만 자니 말이다.

“다 몸이 약해서야. 뭘 먹여야 튼튼해지지?”

잘 먹이고 잘 재워서 몸부터 튼튼하게 해야 맘 놓고 키스라도 하겠다 싶었다.

이렇게 잠만 자는 연인을 두었다간 자신의 속이 활활 타오르다 못해 조만간 시커먼 숯덩이가 될지도 모른다.

신우가 마당을 지나 막 안채로 들어가려는데 도 실장이 문을 밀고 나왔다.

“헉! 우리 주인님 왜 이래요? 기절하신 거예요?”

도 실장의 호들갑에 따라 나오던 석까지 후다닥 그의 몸을 타고 올라 어깨에서 주희를 내려다봤다.

“아니, 그냥 잠들었을 뿐이야. 차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런가,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그럴 거예요. 장거리 여행은 처음이셨거든요. 책방 벗어나는 일도 잘 안 하시던 분인데 그 망할 놈의 차사 때문에. 어쨌든 일이 깔끔하게 해결됐다니 다행이긴 하네요. 안 그랬으면 주인님 또 며칠은 끙끙 앓으셨을 텐데 말이죠.”

도 실장의 말이 그동안에도 이런 일들로 계속 힘들어했다는 소리로 들려 신우의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장례식장은 한숨 재우고 가야 할 거 같아.”

“아, 그럼 제가 방까지 모시고 갈게요. 이리 주세요.”

“됐어. 주희가 부탁한 건 나니까 내가 방까지 데려가지. 도 실장은 가서 책방이나 봐. 석이 너도.”

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단호하게 말하자 도 실장이 움찔했고, 석마저 낑 소리를 내며 도 실장에게로 도망쳤다.

신우가 마치 제집이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하게 명령하고 안채로 들어가는 모습을 도 실장과 석이 맹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지? 여긴 분명 내 집이고 내 영역인데……, 이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은?”

도 실장의 중얼거림에 화답이라도 하듯 석마저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이미 꽉 닫힌 문을 노려봤다.

“아놔. 주희 님 몸 챙기라고 홍삼을 박스로 가져왔기에 좋아했더니, 뭐야? 설마 다른 흑심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도 실장의 맹한 중얼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석이 도 실장을 좍 째려보다 꼬리로 도 실장의 뺨을 타닥 치고 도망갔다.

“야! 거기 서! 안 서? 우씨, 잡히기만 해. 이번에야말로 도롱뇽탕을 해먹어 버릴 거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도 실장의 느려 터진 다리로는 절대 석을 따라잡지 못했다.

* * *

신우가 주희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고 가만히 이불을 끌어 올릴 때였다.

반듯하게 눕힌 자세가 불편했는지 주희가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고마…… 신…….”

그러면서 뭐라뭐라 웅얼거리기에 무슨 말인가 싶어 귀를 가까이 가져갔더니 확실하진 않아도 아마 ‘고마워요, 신우 씨’라고 한 것 같았다.

잠이 깬 건가 싶어 그녀의 감긴 눈을 빤히 들여다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감겨 있는 긴 속눈썹이 너무도 평온하게 내려앉아 떨림 하나 없었고, 새근대며 너무도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고마움을 전하는 여자라니, 그것도 그를 정확하게 지칭한 고마움.

심장이 간질간질한 게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이주희, 넌 이제 잠을 자면서도 당당하게 내 마음을 훔치는구나. 정말 알면 알수록 기묘한 여자야.”

신우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며 주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주희에게로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던 감정의 물결이 점점 거센 파도가 되어 밀려가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주희와 연관된 일이면 물불 가리지 않게 돼 버린 것 같은데 이보다 더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평생 이주희의 노예가 돼 버릴지도.

문득 든 의문에 문득 생각나 버린 즉답.

신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왕이면 노예보다는 기사가 더 좋겠는데 말이지.”

옆으로 누워 세상모르고 잠든 그녀의 말간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는 별 정신병 환자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오랫동안 머문다는 걸 자각했다.

“이런 걸 고문이라고 하는 거였군.”

여기 더 있었다간 자는 주희를 덮칠 것 같아 침대가를 벗어났다.

손목에 걸린 파우치가 그제야 의식됐다.

장례식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귀신상자를 검은색 손목 스트랩 파우치에 담아왔던 것이다.

“가져오긴 했는데 거추장스러워.”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주희의 신변 안전이 더 중요하니 당분간은 들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주희의 방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그녀의 곤히 잠든 얼굴을 확인한 신우가 거실로 나갔다.

잠시 문 앞에 서서 집 안을 훑어보던 신우는 거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주희의 사고 때문에 정신이 없어 집을 세세히 보지 못했는데, 역시나 이곳도 이가서림처럼 공기의 흐름이 묘하게 안정적이었다.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가만히 머릿속에 이 집의 구조도를 그려 보니 매우 독특한 구조를 지닌 집이었다.

진법인가?

석류나무가 심어진 마당을 중심으로 곳곳에 심어진 나무며 건축물들의 배치가 낯설지 않았다.

그가 아직 명부신이었을 때 아버지가 어떤 집에 펼치던 사방진과 비슷해 보였다.

절대적이진 않지만 웬만한 사기를 지닌 잡귀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진법이라고 했었다.

이 작은 공간에 오랜 공부를 해야 펼칠 수 있는 진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인간도 있구나.

신기해하면서도 자연히 시선이 주희의 방으로 향했다.

“저런 밝은 눈으로,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이 집 때문이었나?”

누가 진을 펼쳤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오직 이 진으로 인해 주희가 있는 곳이 제법 안전한 공간이란 사실만이 흡족할 뿐이었다.

예상외로 안전한 곳임을 알고 나니 그의 마음도 더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주희의 작은 침대가 매력적으로 떠올랐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내침을 당하기는 싫다는 생각에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 * *

“어이, 거기! 조심해서 파라고 했잖아! 그러다 유물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 박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인부 하나가 찔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몸을 돌려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봤다.

“아까 무조건 빨리 파라고 하셔서.”

“뭐야? 어떤 시러베 잡놈이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그 말 한 놈 당장 데려와. 그런 놈은 이 발굴 현장에 발붙일 자격 없으니 당장 내쫓아야 해. ”

“하지만 분명 한 소장님이 그러셨…….”

이 박사의 큰 소리에 한 소장이 천막을 걷고 나오자 인부가 눈치를 보며 말을 멈췄다.

“이 박사님, 진정하십시오. 아까 사람들이 너무 놀고 있는 것 같아 다그친다는 것이 그만, 말이 과하게 나갔던 모양입니다.”

한 소장이 유들유들한 웃음을 웃으며 이 박사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이 박사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한 소장님, 설마 여기가 왕릉 터가 아니라 실망하신 겁니까? 그래서 우리도 졸속 발굴이라도 하자는 거냐고요? 무령왕릉을 열두 시간 만에 발굴해내 세계 역사가들에게 비웃음을 산 그 부끄러운 발굴 현장처럼 말입니다.”

발굴 현장에서만큼은 대충대충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 박사가 최악의 발굴 현장으로 손꼽히는 무령왕릉까지 빗대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시굴 트렌치의 결과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대단한 유적지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그냥 제가 마음이 좀 급했던 모양입니다. 저 안에 묻힌 것이 무엇일지 상상만 해도 흥분이 돼서요.”

“그럼 기다리십시오. 위령제만 거창하게 지내면 되는 게 아니라 유물 하나하나 온전하게 파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깐 제가 너무 마음이 앞섰을 뿐이라니까요. 계속하십시오. 전 대학 연구팀과 박물관에 연락을 해야 해서 다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이 박사의 기분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듯했으나 작업을 하려는 의지가 넘쳐 다시 바닥에 쭈그리고 앉고 있었다.

그런 이 박사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한 소장의 눈빛이 잠시, 방금 전과는 너무도 다른 시린 빛을 띠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휙, 천막을 걷고 다시 안으로 들어선 한 소장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 줌거리도 되지 않는 인간 따위가 감히.”

빨리 신물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인부들을 다그친 건 분명 그의 실수였지만 저렇게 한심하다는 듯 깔보는 시선을 받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부르르 떨며 손에 힘을 줬는데 손아귀에서 퍽, 소리를 내며 뭔가가 깨졌다.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깨진 것은 토기였는데 천막을 걷고 나가기 전에 들고 있었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런데 지금 한 소장이 놀란 것은 유물 하나가 깨져서가 아니었다. 손바닥에 깊진 않지만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동안 인간의 몸에 영묵이란 신의 몸을 숨기고 한 번도 들키지 않았던 것은 그가 그만큼 조심했기 때문이다.

수명이 더 필요할 때는 필히 다른 인간에 빙의해서 수명을 거둬 왔고, 한 소장의 몸엔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게 애썼기 때문이다.

“이런 바보 같은.”

그런데 지금 한 소장의 신체에 상처가 생겼다. 작은 상처였지만 영묵의 기가 밖으로 새고 있을 터였다.

후다닥 달려가 구급상자를 들어 엎어 상처 부위를 덕지덕지 소독하고 있을 때였다.

“한 소장님! 어? 무슨 일이십니까? 구급상자는 왜……. 다치신 겁니까? ”

갑자기 인기척이 나 놀라 돌아보니 다행히 임 팀장이었다.

“오지 마!”

한 소장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임 팀장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섰다.

아주 작은 상처였지만 밴드를 몇 겹으로 붙이고 붕대까지 감았다.

“많이 다치신 모양인데 병원부터…….”

“괜찮아. 그보다 무슨 일이지?”

“아, 네. 박물관 관장님께서 오늘 직접 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었는데 전해 드린다는 걸 깜빡 잊어서요.”

“알았어. 내 연락해 보지. 바쁠 텐데 그만 나가 봐. 새로운 유적이 나타나면 날 부르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나가기 전, 임 팀장이 한 소장의 손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청한!”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렇지, 피부가 상하는 짓을 하다니.

명부신 누군가가 눈치채 영묵의 존재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이번에야말로 그는 소멸당하고 말 터였다.

염라의 아들을 죽인 그를 살려주자고 청원할 명부신은 아무도 없을테니 말이다.

곧 아물겠지만 최대한 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상처난 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도 조바심이 나 천막 안을 뱅뱅 돌았다.

그러다 문득 만일을 생각해 이곳을 벗어나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소장은 생각과 동시에 거칠게 천막을 걷고 나가 자신의 차로 향했다.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기 전 붕대를 풀고 밴드를 떼 보니 이미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느려.”

상처 아무는 속도가 예전보다 훨씬 느렸다. 겨우 작은 생채기 하나 가지고 이렇게 늦게 아물다니, 한시라도 빨리 신물을 찾아야 했다.

“저놈만 아니면 좀 더 빨리 다그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리를 땅에 박을 듯이 작업하고 있는 이 박사를 흘깃 쏘아보며 생각했다.

이제 유물 따위야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신물만 손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발굴을 해야 신물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 이 박사는 나중 문제고 가장 시급한 건 김 이사였다.

어디까지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했으니 그 의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문제는 김 이사가 배지를 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자살이 아니면 타살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빙의할 수 있는 배지를 가진 이가 누가 있는지는 술법을 펼쳐 봐야 알 것 같았다.

부우우웅!

한 소장의 차가 출발하고 채 몇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무도 없는 천막 안에 서늘한 바람이 맴도는 것 같더니 팟!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디 하나 눈에 튀는 게 없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모습을 한 염라대왕이었다.

염라대왕의 싸늘한 시선이 여기저기 엎어져 있는 구급상자의 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인간의 몸에 숨어 있었구나.』

약하지만 영묵의 기가 느껴지자마자 쫓아왔건만 아무도 없었다. 상처가 이미 아물었는지 영묵의 기도 다시 사라졌다.

인간의 몸으론 멀리 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천막 밖으로 나가 밖을 살펴보려 할 때였다.

“자, 자, 다들 새참 먹고 하자고. 따뜻한 차라도 한 잔씩 해야 몸이 풀릴 거 아냐. 얼른 들어들 와! 응? 뭐지? 왜 천막 안이 바깥보다 더 추운 것 같지?”

한 소장이 나간 걸 알고 임 팀장이 인부들을 불러 참을 먹이려 안으로 들어섰는데 천막 안이 조금 전과는 달리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추웠다.

염라대왕은 모여든 사람들 하나하나 앞에 얼굴을 들이밀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러네. 여기 왜 이렇게 춥지?”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이 박사님! 이 박사님도 차 한잔하세요!”

임 팀장이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생각 없으니 자네들이나 먹게.”

땅과 하나가 되어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더니 대답을 하자마자 다시 땅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 박사님은 괴물이라니까.”

혀를 차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이 박사뿐이었다.

고개 숙인 채 열심히 붓질을 하고 있는 이 박사의 뒤통수를 허공에 떠서 내려다보는 염라대왕의 표정이 묘했다.

『그 아이가 왜 널 선택했던 걸까.』

25년 전, 아들을 잃어 절망해 있는 그 앞에 느닷없이 천계의 상제가 찾아왔다.

상제의 뒤엔 겁에 질린 눈을 동그랗게 뜬, 아들 또래의 주희도 함께 있었다.

아들을 잃은 지 며칠 되지 않은 그에겐 또래의 아이를 보는 것만도 고문 같은 괴로움이었다.

천계의 수장에게 예우를 갖춰야 했지만 그때의 그는 아들의 일로 인해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허무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친절하지 못한 그의 물음에도 상제는 기분 나빠 하기보다 어쩐지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하실 얘기 없으시면 그만 가십시오. 천계의 아이가 명부의 공기를 오래 맡으면 안 된다는 건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서 보내고 싶은 마음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상제는 갈 생각을 않고 여전히 말을 머뭇거렸다.

먼저 얘기를 꺼낸 건 주희였다.

『대왕님, 제가 율법을 어겼어요. 죽은 사람을 살려 버렸나 봐요.』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로 쭈삣쭈삣 나서는 주희의 뜬금없는 말에 염라대왕이 상제를 빤히 쳐다봤다.

그제야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상제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명부가 발칵 뒤집어졌을 줄 알았더니,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군. 주희 말대로네. 인간계의 첫 나들이였는데 주희가 못 볼 걸 봐 버린 모양이더군.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는 아이였다는데, 주희가 그만 살려 버렸다더군.』

『수명을 건드렸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얼마나 무거운 죄인 줄 알고 있네.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러 왔네.』

상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인간의 수명을 건드렸다니. 아무리 상제의 딸이라도 그냥 보낼 수만은 없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 아인 이제 겨우 열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였는걸요. 그런데 혼자 죽어 있었단 말이에요. 흑, 그런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주희가 마치 그날을 다시 기억해낸 듯 울먹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희 넌 가만있거라.』

『그래서 어쩌길 바라시는 겁니까? 이렇게 제 앞에 바로 데려온 건 정해진 재판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상제가 그래도 되는 거냐는 다그침이 실린 말이었다.

『지금은 상제로서가 아니라 주희의 아버지로서 왔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재판대에 주희를 올리고 싶지 않아서 말일세. 대왕의 권한 중에 즉석 판결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세 번 주어지는 걸로 알고 있네.』

『제가 어떤 판결을 내릴 줄 알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재판대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벌을 내리면 어쩌시려고요?』

『그래도 자식을 가져 본 대왕만이 내 마음을 알 것 같아 이쪽으로 왔네. 결과는 이 아이의 운명인 게지. 오면서 안 좋은 소식을 들었네만…….』

『그 얘기라면 그만하십시오. 듣고 싶지 않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제가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대신 그 형량에 불만은 듣지 않겠습니다. 아이는 두고 가십시오.』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차가워졌다. 누구도 무율에 대해 얘기하는 게 싫었다. 그의 가슴에 가만히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싸늘한 눈빛으로 서 있는 염라대왕의 기세는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주희의 머리를 쓰다듬던 상제의 손길이 아주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결심을 한 듯 손길을 거뒀다.

『가겠네. 천계로 소식을 보내 주게. 주희야, 벌이 끝나면 데리러 가마.』

주희는 상제가 자리를 떠나는 순간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염라대왕의 차가운 모습만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다 후두둑, 커다란 두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넘쳤다.

『왜 우는 거냐. 상제를 따라가지 못해서 슬프기라도 한 거냐?』

염라대왕의 짜증난 목소리에도 주희는 놀라기는커녕 한 발짝 더 염라대왕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여기가, 너무 아파 보여서요.』

가만히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는 아이의 행동에 놀라 그 손을 쳐냈다.

주희의 손 주변에서 하얀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더 크게 놀랐다.

수명을 건드렸다는 상제의 말이 완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그를 대신해 울어 주고 있는 것처럼.

『넌, 설마…….』

염라대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으로 아이가 그 말을 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후에 나올 말은 천계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명부신들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었다.

『넌 인간으로 환생하게 될 거다. 신으로서의 능력은 가져가지 못한다.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속죄하다 오거라.』

아이의 형량을 길게 할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만일을 대비해 인간으로서의 한평생을 형량으로 결정 내렸다.

그리고 바로 환생의 길로 아이를 안내했다.

정식 재판부에 회부되었으면 족히 200년은 신으로 돌아오지 못할 중죄였으나 염라대왕은 세 번의 월권 중 한 번을 그렇게 형량을 줄이는 데 사용했다.

『어디에 태어날지는 네가 택해라.』

그렇게 주희의 앞에 환생할 세 곳의 갈림길이 열렸었다.

그런데 주희는 누구나 택했을 법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상제의 딸 못지않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놔두고 이가서림의 그 집을 택했다.

이가서림이 폐허가 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일은 수명을 다한 인간이 살아 있다는 보고가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의아해하며 주희와 똑같은 기를 지닌 아이를 찾아 인간계로 직접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희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주희가 살려낸 아이의 수명을 거두기 위해서.

아주 흐릿하지만 주희의 기가 느껴지는 곳을 찾은 그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아들이 있었다.

아들의 몸에선 더 이상 아무런 명부신의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고 기억도 잃은 것 같았지만, 분명 자신의 아들 무율이었다.

아들이 살아 있었다.

아들의 기가 완전히 소멸해 버린 걸 느꼈었는데, 무율이 박신우란 이름으로 인간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주희가 인간 아이를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구한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물끄러미 이 박사를 내려다봤다.

『주희가 무율만이 아니라 너도 살렸던 거구나.』

주희가 그 집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 박사는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잃었어야 했다.

아내를 너무 사랑했던 이 박사는 아마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았을 확률이 높다.

그 아이 앞에 세 갈래 길을 제시했을 때, 그 아이의 눈엔 그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군가의 아픔이 먼저 눈에 들어와 버리는 신, 상제의 첫 번째 자질이었다.

무엇보다 주희는 자신의 아들을 살려냈다.

신이 신을 살릴 수 있다는 것, 상제의 자질을 지녀야 가능했다.

명백히 주희가 차기 상제감이라는 소리였다.

주희가 상제감이라는 확신이 더해지자 염라대왕은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무율과 주희가 같이 있던 장면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무율의 눈빛이 어느 날의 자신의 눈빛과 닮은 것 같아 불안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놈부터 찾아야 해.』

팟!

물끄러미 이 박사를 내려다보던 염라대왕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기를 감춰 버린 영묵을 찾아 사라졌다.

* * *

얼마나 잔 걸까.

눈을 떴는데 방 안이 어둑어둑했다.

주희는 눈을 뜨고도 비몽사몽간에 정신이 몽롱해 한참 눈을 껌뻑였다.

“아! 장례식장…….”

정신이 드는 것과 동시에 장례식장이 떠올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신우 씬 가버린 건가?”

자신이 너무 늦게 일어나 벌써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며 벌컥 방문을 밀고 나갔다.

“……!”

신우가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맞춤 의자이기라도 한 듯 소파와 하나가 되어 머리를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건가?’

그가 가지 않아서인지, 장례식장에 혼자 가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빠르게 뛰기 시작했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았다.

발걸음을 조심스레 움직여 그에게 다가간 그녀는 그가 앉은 소파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잠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처럼 대놓고 그를 관찰할 기회가 없었기에 숨소리도 죽인 채 유심히 관찰했다.

어떤 연예인도, 어떤 모델도, 어떤 조각상도 눈앞에 있는 남자보다 잘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그는 언제 어느 때 봐도 보는 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예쁘다.”

얼마나 넋을 놓고 봤으면 그의 코앞에서 중얼거렸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두 배는 길 것 같은 속눈썹이 서서히 말려 올라가고, 칠흑같이 새까만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응시한 순간, 주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여야 했다.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그는 아직 꿈속을 헤매는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딘지 무장해제된 것 같은 그 시선에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숨을 죽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갈증의 정도도 심해져 갔다.

심장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다.

지금까지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왠지 점점 확신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이건 매우 부끄럽게도 탐욕인 모양이다.

눈앞의 이 남자를 너무도 갖고 싶은 탐욕.

갑자기 훅 들어온 감정에 놀라면서도 그녀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떡하죠. 나 당신이 너무 갖고 싶어졌어요.”

그녀의 바보 같은 중얼거림에 그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가만히 눈을 감으며 그녀의 손에 볼을 부빈다.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심장이 떨렸다.

“가져. 얼마든지.”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까지 하고 있었다.

이 남자, 아무래도 아직 꿈을 꾸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심장은 마치 고백의 답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두근두근 제멋대로 날뛰어댔다.

“대신, 끝까지 책임도 지는 거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해졌다.

언제 뜬 건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가 까만 흑요석에 빛을 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확실히 잠이 깬 듯 보였다.

“깨, 깼어요?”

어서 그의 뺨에 닿은 손을 떼어야 하는데 정말 난감하게도 오히려 그의 커다란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런 프러포즈를 받았는데 안 깰 수가 있나.”

그가 이상한 말을 했지만 주희는 아직 잠이 덜 깨 그런 거라 생각했다.

“미안해요.”

당황해 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럴 땐 미안하다가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겠다, 라고 해야지.”

“무슨…….”

그녀가 맹하게 말을 흐리자 갑자기 신우의 눈빛이 눈에 띄게 가늘어졌다.

“설마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오리발 내미는 건 아니지? 넌 날 갖고 싶다고 했고, 난 가져도 좋다고 했어. 넌 프러포즈를 했고, 난 좋다고 받아들인 거지.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해?”

방금 그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신우식으로 해석해 정리한 말을 단숨에 들으니 그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욕심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아,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면? 설마 그냥 한번 해본 소리란 건 아니지? 아니면 내가 싫은가?”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인지.

싸늘하게 내모는 그의 눈빛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싫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누가 당신 같은 사람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욕심나요. 미친 듯이. 하지만…….”

“그만, 거기까지. 네 눈 속에 네 마음이 다 들어 있는데 다른 변명이라면 듣고 싶지 않아. 난 네가 날 욕심내 주는 게 좋아. 나도 네가 욕심이 나. 네가 좋아. 더 어떤 말이 필요하지?”

그의 나직한 말에 주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횡설수설 지껄이게 될 말은 그의 말처럼 변명이거나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다.

“네 전부를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지금 이런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네게 닿을 수 있는 거지?”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아귀 힘이 조금 더 세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간절함을 넘어서 진심으로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애원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던 다음 생에 대한 걱정이 그의 눈빛 하나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주희가 그때까지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다른 한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닿았어요. 충분히. 그래요, 나 당신이 좋아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호하기까지 한 그녀의 말에 신우가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고마워.”

안도의 숨이 깃든 그의 말에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절대 알 리가 없는데 마치 신우가 자신을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신우 씨, 손은 멈춰요. 오늘은 더 이상 안 돼요.”

주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를 껴안았던 그의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그녀의 등골을 훑고 있었다.

발가락까지 예민해지는 감각에 주희가 매정하게 한 소리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안 돼?”

“안 돼요.”

그가 살짝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딱 잘라 거절했다.

“야한 생각이 또 신우 씨 뇌를 장악한 모양인데, 우린 지금 장례식장 가야 해요.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단호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말에 허리에 둘러진 신우의 팔이 풀어졌다. 하지만 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따라 그가 일어서자 주희는 한 번 더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딜 따라와요? 기다려요. 꼼짝 말고 여기서. 금방 나올게요.”

그녀가 경고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신우의 눈가가 꿈틀거렸지만 의외로 순순히 그녀의 말에 잘 따랐다.

정말로 그는 그녀가 나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들어갈 때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그녀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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