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0-2장
주희 일행과 기란은 이른 새벽부터 마당에 나와 서 있었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시면 좋을 텐데.”
“이만 올라가 봐야 해요.”
신우는 출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주희가 고집을 피워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내려올 때만 해도 생각지 못했는데 막상 일이 해결되고 나니 신우의 출근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회장 취임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 때문에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됐다.
“마음이 좀 가라앉으시면 언제 저희 책방에 한번 놀러 오세요. 제가 차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
“꼭 놀러 갈게요.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기란이 주희를 폭 껴안으며 소정에 대한 고마움을 목소리에 담아 전했다. 그리곤 상자 하나를 신우에게 내밀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건 신우 씨가 받아 주세요. 이걸 가지고 있으면 소정이 말대로 난 계속 이걸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될 거 같아서요.”
귀신상자.
어제 직접 만져 보고는 많이 놀랐다. 겉을 둘러싸고 있는 재질만으론 분명 인간계의 물건인 것 같은데 물건이 가진 능력면에선 절대 인간계의 물건일 수 없었다.
“매우 오래된 미술품 같습니다. 대가는 제가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대가는 이미 충분히 받았는걸요. 신우 씨가 이걸 가져가야 제가 소정이와의 약속을 지킨 게 되니 꼭 받아 주셔야 해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작별의 시간이 끝나고 대문을 나섰다.
길이 좁아 마을 어귀에 세워 뒀던 차에 도착해 응산이 뒷좌석 문을 열었을 때였다.
신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코트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든 신우가 액정에 뜬 번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 박사님 전화번호인 거 같은데.”
제신리에 내려올 때 받았던 당황스러운 전화번호를 기억한 신우가 휴대전화를 주희에게 내밀었다.
“여보세요? 네, 아버지. 저예요. 안 그래도 지금 잠시 숙소에 들렀다 서울 올라가려던 중이었는데. 네? 장 교수님 막내딸이면 지혜요? ……아, 아직 대학생이었던 거 같은데…… 어쩌다가. 네, 알아요. 장 교수님이랑 몇 번 책방에 같이 온 적 있어요. 아버지 대신 장례식장에요? 어, 저기…… 아니에요. 알았어요. 제가 대신 가볼게요. 네,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주희는 통화가 종료되고도 한참을 멍하니 무거운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야?”
“장 교수님 막내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대요. 그저께 밤에……. 믿어지지 않네요. 장 교수님 어떡하죠? 늦게 얻은 아이라 그런지 유독 더 예뻐하셨는데.”
말끝마다 우리 지혜, 우리 지혜 하시던 분이었는데 지금 어쩌고 계실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장 교수님이라면 한 문화재연구소 고문으로 계신 그분을 말하는 건가?”
“네. 원래는 오늘 내려오시기로 하셨다는데 그저께 밤에 그런 일이 있었나 봐요. 아버지 친구분 통해서 이제야 연락이 왔대요. 아버진 지금 몸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시라고, 저한테 부탁하시네요.”
“그래서 지금 장례식장에 가겠다는 말을 하는 건가? 진심으로 하는 소린 아니지?”
“저도 되도록 장례식장만큼은 가고 싶지 않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신우가 까칠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가봤자 만나고 싶은 영은 이미 없을 테고, 객귀들만 득시글거릴 게 뻔했으니까.
“이주희, 이젠 책방 접고 귀신흥신소라도 차릴 생각인가?”
“장 교수님은 아버지의 은사님이세요. 내가 가지 않으면 아버진 무리해서라도 서울에 다녀가시려 할 거라고요. 주말도 없이 무리해서 일하시는 분인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 수명부에도 누락된 객귀들이 돌아다니는 그곳에 가겠다는 말을 하는 거야? 설마 귀신이 소정이처럼 다 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질 나쁜 귀신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쩔 건데? 귀신 씌지 않을 자신 있어?”
“겁주지 말아요. 안 그래도 장례식장 갈 거 생각하니 간이 콩알만 해지는데 신우 씨까지 왜 그래요?”
신우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와락 더 겁이 나 저도 모르게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주희 님…… 아, 아닙니다. 일단 차에 타십시오. 가시면서 얘기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응산이 주희를 부른 건 같이 가주겠다는 말을 하려 했던 건데, 급히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신우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쏘아봤기 때문이다.
“아, 미안해요.”
주희가 당황해 사과하며 차에 오르려는데 신우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아직 대답 안 했어. 그런 곳에 혼자 가서 귀신 씌지 않을 자신 있냐고?”
아직 귀신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신우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정말로 질 나쁜 귀신이 웅크리고 있을 것 같았다.
“신우 씨! 같이 가줄 것도 아니면서 자꾸 이럴 거예요?”
결국 신경이 예민해져 하얗게 노려봤다.
“같이 가자고 부탁하지도 않았잖아.”
신우가 이상한 말을 했다. 마치 장례식장에 같이 가자고 하면 같이 가줄 것 같은 말을.
“어, 저기, 같이, 가줄 수 있어요?”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제신리에 내려오며 약간의 미묘한 관계가 형성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의 장례식장에까지 같이 가주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그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네 부탁이면 가줘야지. 업무 끝나고 책방으로 데리러 가지.”
마치 데이트 약속이라도 잡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장례식장에 같이 가는 시간을 말하는 신우였다.
“고마워요.”
신우가 귀신을 퇴치하는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닌데, 같이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 막연한 두려움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타십시오.”
한숨 섞인 응산의 재촉이 있고야 일행은 뒤늦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차가 마을 어귀를 지나 발굴 현장 아래를 스쳐 지나는 사거리에 멈춰 섰을 때였다.
이렇게 이른 아침 시간에 SUV 한 대가 발굴 현장으로 가는 외길을 향해 속도를 올리는 게 보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도 있나 보네요.”
“예산이 부족하게 책정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왜 저렇게 강행군이지?”
주희의 걱정이 깃든 목소리가 누굴 걱정해서인지 알기에 신우도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집행했던 예산을 떠올렸다.
“날씨 때문이겠죠. 더 추워지면 발굴도 멈춰야 할 테니까요.”
대답하는 주희의 목소리가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차 안이 따뜻해서인지,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주희는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기도 전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의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차가 좁아. 더 큰 차를 알아봐야겠어.”
“……!”
응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엊그제만 해도 차가 느리다고 트집이더니, 이젠 리무진급으로 넓은 세단을 타고 좁다니.
입을 열면 그냥 침대차를 사시라고 권할 것 같아 묵묵히 운전만 했다.
그러다 힐끗 룸미러를 봤다. 신우가 잠든 주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염라대왕이 찾아와 부탁하고, 강림차사가 알고 있으며, 명부의 룰을 차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신우의 존재가 무엇인지.
“연애해 봤어?”
신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에게 하는 소린지는 몰랐다.
주희에게서 눈 한 번 떼지 않고 있기도 했고, 구백 년 생애 처음 들어 본 이상한 질문이라서.
“연애해 봤냐고?”
다시 묻는 소리가 들리고야 자신에게 묻는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슨 의미로 묻는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오래 살았을 거잖아. 그럼 마음에 드는 여자 한둘쯤은 있었을 테고. 그땐 어떻게 했지? 특별한 방법이 있으면 얘기 좀 해봐.”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싶어 다시 룸미러를 힐끗거렸다.
마침 룸미러에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진심이구나.
“도깨비가 사랑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없지.”
“이미 아시겠지만 저도 도깨비입니다.”
신우가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룸미러에 비친 가늘게 뜬 눈빛이 ‘쓸모없는 놈’이라 말하고 있어 약간 울컥하고 말았다.
“하지만 연애하는 인간들은 많이 봐왔습니다. 일백 년도 살지 못하면서 서로 자존심 세우느라 지지고 볶는 인간들요. 그런 피곤한 사랑을 할 거면 차라리 시작을 하지 않는 게 맞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 인간은 일백 년도 살지 못하지. 연애 밀당으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아.”
신우의 고개는 다시 주희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신우는 어깨에 기댄 주희의 꺾인 머리가 불편해 보였는지 조심스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신우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었다.
얼마나 다급하면 도깨비에게 연애 상담을 하려 들었을까 싶어 픽 웃음이 났다.
“그런데, 혹시 이게 뭔지 알아? 단순히 귀신 씐 물건은 아닌 거 같은데. 귀신만이 아니라 차사까지 보이게 하는 상자라니. 인간계의 물건이 아닌 거 같아.”
주희의 자세가 편안해진 걸 흡족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신우의 눈에 문득 기란에게 받은 상자가 들어왔다.
붕대가 감긴 불편한 손임에도 그것을 들어 유심히 살피며 응산의 의견을 물었다.
“저도 그런 물건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봅니다. 되도록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간혹 인간들의 탐욕에 노출된 물건에 염이 깃들면 위험한 능력을 발휘하는 물건들이 있으니까요. 그런 건 보통 생기를 앗아갑니다.”
“위험한 물건이라……. 그래서 그런가? 손 아래에서 묘한 힘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는데.”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상자 안에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상자를 이루고 있는 틀을 깨부수고 싶다는 충동을 살짝 느꼈었다.
물론, 지금은 그녀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기에 그런 실험을 해볼 생각은 없었다.
신우는 다시 가만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가다가 휴게소 보이면 세워.”
“휴게소는 왜…….”
휴게소에 들르지 않고 고속으로 달려도 출근 시간까지 도착하기 어려운데 주희까지 잠든 마당에 왜 휴게소에 세우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자존심 따위 세울 생각 없으니까. 같이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릴 생각이야. 휴게소마다 핑계를 대서 세워 줘.”
헐, 자신이 약이 올라 한 말은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신우의 해석 능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냥 평소처럼 묵묵히 있었으면 좋았을걸, 말 한마디가 안 그래도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 * *
이른 아침, 김 이사의 차가 제신리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성의 임원인 이상 신우의 눈에 띄고도 어영부영 출장 핑계로 더 눌러앉을 수는 없어 서울에 올라간다는 생색을 내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박 회장은 도대체 뭣 때문에 여기에 내려왔던 거지? 이쪽 방면엔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어제는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우를 떠올리니 또다시 죽을 뻔했던 어제 일이 생각나 김 이사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굴착기 기사, 아직도 자백했다는 연락 없어?”
“네. 없었습니다.”
“그건 절대 실수가 아니었어. 작정하고 사람을 죽이려고 내다꽂은 거였지. 연구소 소속도 아니라면서 배지는 왜 달고 있었던 건지는 알아봤어?”
이상하게 자꾸만 배지가 거슬려 운전하고 있는 비서에게 또 물었다.
“이번 발굴 현장에서 전담으로 맡게 됐다고, 발굴이 끝날 때까진 같은 팀이라며 나눠 줬답니다. 그런데 이사님, 어제부터 배지를 계속 신경 쓰시던데, 마음에 걸리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냐, 아무것도.”
김 이사는 딱 잘라 말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영상이 오랜 세월을 지나고도 다시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임원 자리를 바로 코앞에서 놓쳐 열 받은 일이 있었다.
그때도 물론 다른 직원들에 비하면 초고속 승진이란 말을 들었었지만 다른 직원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박 전 회장과 멀지만 피가 섞인 친척이었으니까.
그런데 박 회장의 아들놈은 너무도 손쉽게 그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러고도 자신은 원하지 않았다는 식의 온갖 위선이란 위선은 다 떨어댔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날은 유독 더 그랬던 것 같다.
언제부터 정신이 나갔던 건지 기억에 없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것도 생전 처음 와보는 외진 길을.
하지만 그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자신이 몰고 있는 차의 속도 게이지가 한계치를 찍고 있었고, 부아앙 소리를 내는 차의 정면에 다른 차가 있었다.
끼이이익! 쾅!
브레이크 따윈 소용이 없었다. 그대로 앞차를 들이받았고, 앞차가 낭떠러지를 굴렀다.
모골이 송연해진 건 그 차의 차량 넘버가 눈에 익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그냥 악몽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뉴스를 통해 전해진 건 눈에 익었던 차량 넘버의 주인인 박 회장 아들의 사망 소식이었다.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는데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이 보였고, 자신의 셔츠 깃에 못 보던 배지 하나가 달려 있는 게 보였다.
같이 술을 마신 한 소장이 배지를 보여 주긴 했으나 그가 단 적은 결코 없었다.
한 문화재연구소의 한 소장과는 서로 윈윈하는 사이였다.
연구소에 넉넉한 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그 역시 나름의 대가를 받아가도 좋다는 묵약을 한 사이.
그런데 그날은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사고가 났던 잠깐을 제외하곤 아예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 꿈을 실현시켜 줄 배지라는 말을 하던 한 소장의 얼굴만이 기억났다.
한 소장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도는 것 같고,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시선에 신경질적으로 배지를 빼 던져 버렸다.
이상할 정도로 찜찜함을 제공하는 한 소장이었지만 그가 있어 두둑하게 딴 주머니를 꿰찰 수 있었기에 섣불리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저 차, 한 소장님 차 같은데요?”
비서의 말에 김 이사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발굴 현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한 소장님도 저희를 본 것 같은데 멈출까요.”
“한 소장. 원래 어제 오기로 했었는데 왜 못 왔다고 했지? 서울에 있었던 게 확실해?”
“어제 연구소로 전화해 비서에게 바꿔 달라고 했으니 서울에 계셨던 게 확실합니다. 오늘 내려오신다고 하셨는데 생각보다 더 일찍 내려오셨네요.”
어제 이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니 굴착기 기사에게 배지를 건넨 건 한 소장일 수 없었다. 약이든 술이든 건넬 수가 없었을 테니.
그런데도 한번 예민해진 신경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세워.”
하지만 그의 기분과는 별개로 이번 발굴 현장에서 얻을 이익을 생각하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한 소장이 보였다. 며칠 전에 집에서 봤을 때와 달리 오늘은 굉장히 활기차 보였다.
기분 나쁠 정도로 몸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본마음은 싹 감추고 사람 좋은 웃음을 웃어 보였다.
“아이고, 한 소장님. 못 뵙고 가는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몇 시에 출발하셨길래 벌써 도착하신 겁니까?”
“어제 못 와서 일찍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어딜 가시길래 이쪽 방향으로 가십니까?”
“지금 여기에 박 회장이 내려와 있어서요. 인사를 하고 올라가야 눈치가 덜 보일 것 같아 인사하러 가는 길입니다. 어제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전했거든요.”
김 이사가 한 소장을 떠보기 위해 슬쩍 사고 이야기를 끼워 넣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더 서둘러 내려왔습니다. 현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요. 다행히 김 이사님은 괜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박 회장님은 좀 어떠십니까?”
그런데 역시나 한 소장의 표정만 봐서는 내면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정말 궁금해할수록 기분 나빠지는 사람이다.
“저도 경과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법 다치신 것 같았는데 가서 물어봐야지요.”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마을 어귀에 나란히 차를 세우고 발굴터 주인의 집이 어디인지 물어보기 위해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일행이 있기에 불러서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한 소장이 몸짓으로 막아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할머니 귀신상자는 아버지께 여쭤 보고 드렸어야 하는데 제 맘대로 줘버렸네요. 아버지한테도 할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물건일 텐데 제가 그만 제 생각만 했어요. 그 물건이 있으면 신우 씨가 주희 씨를 더 잘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다. 잘했다. 사실 난 그게 무척 싫었다. 너한텐 만지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 할머닌 가끔 그 귀신상자를 몰래 만지곤 하셨거든. 그래서 내가 다락으로 치워 버렸던 거고. 있어 봤자 우리에겐 해가 되는 물건이었다. 그 상자가 그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널 이렇게 지켜 준 데 대한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던 것 같구나. 그런데 정말로 소정이가 보였던 거냐?”
“네. 원래의 밝은 모습 그대로요. 오히려 날 위로해 주고 갔어요.”
“그 아가씨도 그렇고 박신우 씨도 그렇고, 언제 한번 꼭 인사하러 가야겠구나.”
노인과 여인의 이상한 대화를 엿들으며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는 한 소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기에 처음 보는 사람들을 상대로 저런 심각한 표정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던 한 소장이 불쑥 앞으로 나서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발굴터 주인 되십니까?”
김 이사는 한 소장이 어떻게 발굴터 주인을 한눈에 알아본 것인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신도 겨우 스치듯 한 번 본 것뿐이기에 한 소장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 노인이란 걸 알았는데 발굴터 주인을 한 번도 보지 않은 한 소장이 어떻게 주인을 아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제신리 발굴 현장을 책임지게 된 한 문화재연구소 소장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입니까. 터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작업은 덕분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냥 방금 전 두 분의 얘기를 듣다 보니 궁금증이 생겨서요. 귀신상자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떤 상자인지 궁금해서요. 혹시 그 상자의 문양을 기억하십니까?”
한 소장의 뜬금없는 질문에 기란이 아버지를 대신해 앞으로 나섰다.
“매장문화재인지를 물으시는 거라면, 절대 아니니 그만 가세요. 그건 발굴터에서 나온 물건이 아니라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니까요. 그리고 찾으시는 상자에 문양이 있는 모양인데 그건 문양 같은 거 없습니다. 아무 무늬 없는 그냥 색바랜 낡은 상자일 뿐이에요.”
기란의 까칠한 말을 듣고야 기란의 아버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매장문화재? 이, 이런 도둑놈들을 보았나. 사정사정해서 발굴하게 해줬더니 지금 뭐라? 내 조상들의 유지도 저버리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기에 허락했는데 이젠 하다하다 남의 집안 물건까지 탐을 내? 그따위 도둑질을 하려거든 당장 내 땅에서 나가거라, 이놈들!”
당장 곡괭이라도 들고 올 것처럼 노발대발하는 기란의 아버지였다.
“어,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저놈이나 오래전에 집에 들었던 도둑이나 다를 게 무엇이냐. 이미 뿔뿔이 흩어졌던 그 가보들을 다시 사들이려 내가 그렇게 애를 썼어도 아직 다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저놈은 하다하다 이젠 다락방 물건까지 탐을 내는구나. 저런 도둑놈 심보를 가진 놈을 내 땅 발굴 책임자로 앉히다니, 내 당장 군수한테 가서 따져야겠다.”
부르르 떠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기란의 표정도 따라서 어두워졌다.
도둑이 정말 가치 있는 물건이란 물건은 모조리 다 가져갈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녀의 고집이 한몫한 것 같아 지금도 죄책감이 들었다.
나중에 도둑들을 잡고 보니 고택 개조 인부로 일했던 사람들이 가담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범인들은 잡았지만 대부분의 미술품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고 했다.
그중에 유독 아버지께서 찾고자 했던 건 고지도였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하셨다고 했다.
“읍내 나가시더라도 좀 더 진정하신 연후에 나가십시오. 혈압 더 오르시면 위험합니다.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들! 당장 나가십시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려거든 앞으론 이곳에 발도 들이지 마시고요.”
덕원이 기란의 아버지를 부축하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말했다.
소란 때문인지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 한 소장님, 오늘은 그만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잘되고 있는 발굴 현장에 초를 쳐도 유분수지, 갑자기 한 소장이 미쳤는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김 이사가 당황하며 끼어들어 한 소장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이 험악해진 분위기에도 한 소장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 문양이 없다면 아닌 거 같긴 한데…….”
한 소장이 뭐라뭐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차를 향해 걸어가 버렸다.
김 이사의 존재마저 완전히 잊은 듯 황당한 행동이었다.
* * *
“뭘 먹지?”
신우가 무엇을 먹을지 메뉴판을 유심히 보다 돈가스 아래에 작은 글씨로 즉석에서 튀기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라는 문구를 보고는 빙긋 웃었다.
“돈가스를 먹고 싶긴 한데 팔이 이래서 잘라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붕대를 감은 팔을 주희가 잘 볼 수 있게 몸을 튼 다음 들으란 듯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제가 잘라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예상대로 아주 흡족한 대답이 돌아왔다.
“고마워. 넌?”
“전 아침부터 돈가스는 좀 그렇고, 우동으로 할게요. 응산 씨는요?”
“괜찮습니다. 전 원래 아침을 먹지 않습니다. 밖에서 차 한잔 마시고 있을 테니, 다 드시면 나오십시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팔 타령을 하는 신우의 가증스러움에 응산은 속에서 닭살이 돋는 것 같아 단호하게 음식을 거부했다.
신우가 오른손잡이가 아니라 양손잡이라는 건 현와원 고용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도 신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희의 측은지심을 이용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눈치껏 빠져 주지 않으면 어떤 매서운 눈총이 쏟아질지 몰랐다.
혼자 식당 밖으로 걸어나가는 응산의 뒷모습을 주희가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신우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는 다른 의자 하나를 빼 주희에게 자리를 권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응산 씨 정말 저대로 보내도 괜찮겠어요? 응산 씨도 아침 못 먹었잖아요.”
“별걱정을 다 하는군. 먹고 싶었으면 얘기했겠지. 아무리 부하직원이라도 억지로 먹으라 권하는 건 실례야.”
알아서 척척 빠져 주는 응산이 기특하긴 한데 이렇게 주희의 관심을 가져가는 건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차에서 잠이 깨었을 때만 해도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에 침까지 묻어 있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피곤해 보이긴 해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단정했다.
뭔가 못마땅했다. 왠지 모르게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고 싶고, 그의 침이라도 발라 놓고 싶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신우가 그녀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얼굴에 뭐가 묻었거든.”
이 남자, 정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잘했다.
방금 전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미친 듯이 뻗친 머리도 정리하고 말라붙은 침 때문에 세수까지 하고 왔는데 말이다.
“거짓말이 눈에 보여요.”
“거짓말 아냐. 여기.”
신우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스윽 문지르는 행동에 주희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방금 전에 세수하고 왔거든요?”
금방 손이 치워지긴 했지만 손이 닿았던 입술이 다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쉽네. 침 묻었을 때가 더 귀여웠는데.”
“변태예요?”
“널 볼 때마다 발정하느냐고 묻는 거라면, 맞아. 나 변탠 거 같아.”
“입, 다무세요. 신우 씨 눈엔 여기 사람 많은 거 안 보여요?”
주희가 앞에 있는 주문표를 와작 우그러뜨리며 벌떡 일어서서 신우를 노려보며 험악하게 말했다.
옆 테이블에서 우동을 먹고 있던 아저씨가 컥컥거리며 입에 넣었던 우동 사리마저 뱉어내고 있었다.
“기다려요. 돈가스 가져올 테니.”
주희가 바락 화를 내고 가는 모습조차 예뻐 신우는 주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 잠시, 주희가 눈치를 보게 만든 우동남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속으로 적당히 먹고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인데 우동남자가 허둥지둥 일어났다.
“오, 오늘은 영 입맛이 없네. 그, 그만 가야겠다.”
맹세코 그가 가라고 협박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주희가 가져온 돈가스와 우동이 차려졌을 땐 가까운 주변 테이블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슥슥, 주희가 제법 거친 손길로 돈가스를 자르고 있었다.
“나 먼저 주는 건가? 우동 불면 맛없을 텐데, 먼저 먹지 그래.”
“아뇨, 신우 씨 먼저 드세요. 자요.”
그녀가 자른 돈가스를 포크로 찍어 신우의 입에 넣어주었다.
신우는 아기 참새가 먹이를 받아먹듯 납죽 포크까지 깨물며 받아먹었다.
입에 음식이 들어가서인지 그의 얼굴이 꿀 한 통을 들이부은 것같이 달콤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원했던 대로 조용했다.
아마 입 안의 저 음식을 다 씹어 삼킬 때까지는 그녀가 원하는 침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있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만 닫고 있으면 정말 잘난 남자였다. 그런 데다 만년빙하도 녹일 것 같은 달달한 시선까지 더해지니 보고 있는 자신의 심장마저 달달해지는 것 같았다.
눈을 뜬 채로 침을 흘릴 것 같아 급히 시선을 다시 돈가스로 돌렸다.
포크로 콕 찍어 보지도 않고 돈가스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포크를 쥔 그녀의 손을 감싸는 바람에 놀라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달달했지만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무슨 의민가 싶어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데 그가 포크를 뺏어갔다. 그리곤 그녀의 입 앞에 돈가스가 내밀어졌다.
“아니, 나, 난 내가 먹으면 되는데…….”
자꾸 사양하는 게 더 시선을 끄는 것 같아 고개를 내젓다 생각을 바꾸고는 재빨리 그가 내민 돈가스를 먹었다. 바삭거리는 식감이 너무 고소하고 맛있었다.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서일까,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 우동, 나도 좀 먹을 수 있을까?”
신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느껴지고, 야하게만 느껴지던 눈매도 따스하게만 보였다.
살짝 귓불까지 붉히며 그의 입에 우동을 넣어주고, 자신은 또 돈가스를 받아먹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닭살인 짓거리를 아침부터 하고 있었지만, 둘 다 서로의 눈빛에 취해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끔 다칠 필요가 있겠어.’
신우는 그녀의 입술을 맛볼 때 느꼈던 뜨거운 열감도 좋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매우 불편하긴 했지만 주희의 이런 다정한 손길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매일이라도 다친 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응산이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바깥 테이블에 앉아 힐끗 식당을 봤지만 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신우의 안전이 전처럼 걱정되지 않았다. 그런 괴물급 회복력을 지녔으니 어지간해선 죽을 것 같지 않았다.
“경호 체계를 좀 바꿔야 할 것 같군.”
그가 경호하지 못할 때는 틈틈이 다른 경호원을 따라붙였었는데 이제 경호 급수를 한 단계 낮춰도 될 것 같았다.
찬 공기를 깊숙이 마시며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의 발신자가 탁용호 경호원인 것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갔다.
“나다.”
-마 팀장님, 탁용호입니다. 어젯밤에 보고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저한테 조사해 보라고 시키신 명새미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명새미. 벌써 DNA 결과가 나왔어? 박민의 딸, 맞아?”
개인적으로 부탁을 한다고는 했지만 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은 그저 예전 그대로 보전돼 있는 박민의 방에 들어가 머리카락 몇 개 수거해 전했을 뿐이데 요즘과학은 거의 신의 힘에 필적하는 것 같다.
-네. 99.9% 일치한답니다.
“회장님이 좋아하시겠군.”
바라던 대답에 저도 모르게 길게 입꼬리를 늘일 때였다. 왠지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게다가 휴대전화 저편에서 뒤이어 전해 온 소식마저 안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마 팀장님, 연락드린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어젯밤에 그 명새미 씨가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사고냐, 큰 사고냐 다그쳐 물을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김 이사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전화기 저편에서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지만 곧바로 통화를 종료시켜 버리고 태연하게 김 이사를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김 이사님. 김 이사님도 지금 올라가시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평소의 김 이사답지 않았다. 뭔가에 놀란 것도 같고 겁을 먹은 것도 같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야말로 자넬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박 회장은?”
오늘따라 평소의 그 지나칠 정도로 유들유들한 웃음도 사라져 있었다.
“식사 중이십니다.”
“그래. 그보다 자네, 방금……. 아닐세. 박 회장이 어디 있다고?”
“저기…… 나오십니다.”
달려가 김 이사가 나왔으니 주희와 적당히 거리를 두라는 조언을 할 새도 없이 신우와 주희가 딱 붙어서 걸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새 또 다투기라도 했는지 신우의 얼굴이 부르퉁했다.
“누굴 줄 거라고?”
“도 실장님요. 도 실장님이 호두과자 좋아하거든요.”
“나도 좋아해, 호두과자.”
맙소사.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저따위 유치한 말이 신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일 거라곤 누구도 믿지 못할 터였다.
신우의 약점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김 이사에게 아주 대놓고 ‘우리 사귀어요’ 광고하는 꼴이었다.
“발굴 현장에서 봤을 때도 낯이 익다 했더니 호텔에서 봤던 그 여인이군. 분명 그때 분위기는 저렇지 않았던 거 같은데. 발굴 현장에 있던 이 박사의 딸이라며?”
“전 경호만 할 뿐입니다.”
“차 실장한테 교육을 너무 잘 받은 것 같군.”
응산의 단호한 대답에 김 이사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보통 때였으면 이죽거리는 몇 마디쯤은 해야 정상인데 말이다.
“더 있다 오실 줄 알았더니, 김 이사님도 일찍 출발하신 모양입니다.”
“회장님이 올라가셨는데 계속 눌러앉아 있을 순 없지요. 그보다 팔은 좀 괜찮으십니까? 미리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저도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걱정해서 묻는 건지, 아니면 부상의 정도가 궁금해 묻는 건지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 말투로 신우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크게 다치시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되셨는지 모르지만 보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도 신경을 좀 쓸까 합니다. 당하고 나서 후회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신우는 김 이사의 눈빛이 여사롭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아니라 해명하지 않았다.
대신 내 건 내가 알아서 철저하게 지킬 거란 눈빛을 쏘아 보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럼, 저희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식사하고 오십시오.”
신우 일행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차를 향해 가는 모습을 김 이사는 그들의 차가 떠날 때까지 지켜봤다.
어떻게 하면 신우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까,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릴까 항상 고민하지만 지금 그를 당황케 한 건 신우가 아니었다.
박민. 그 이름 하나가 그의 내면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참느라 온갖 애를 다 써야 했다.
왜 그 이름이 25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튀어나오는 건지.
설마, 박 회장이 무언가 눈치라도 채서 조사를 시킨 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당시 뉴스 보도에 따르면, 박민의 차엔 블랙박스도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하필 그날 주변 일대 CCTV가 모조리 고장이 나 범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차가 멀쩡했다. 분명 꿈대로라면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어야 할 범퍼가 마치 새것처럼 말끔했었다. 때문에 그는 수사 물망에조차 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박민은 결코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다.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박민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그였다.
의도치 않았지만 일이 술술 풀렸고, 시간만 지나면 한성의 모든 것이 그의 차지가 될 수 있었다.
박 회장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 박신우만 굴러들어오지 않았어도.
“박민의 딸이란 말이지…….”
박신우로도 모자라 자칫 잘못하면 몇 푼 받은 것마저 토해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두려움이 가시고 나니 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어느 때보다 거세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사님, 추운데 안 들어가시고 왜 여기 계십니까?”
화장실에 갔던 비서가 그에게 말을 걸어오고야 탐욕에 물든 눈동자를 속으로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