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장 (12/20)

10-1장

『신우 아저씨, 저 차사 아저씨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신우의 옆에 딱 붙어 가던 소정이 주희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니? 너도 방금 봤잖아. 얼마나 살벌했는지.”

주희는 방금 전의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다시 간이 철렁하는 것 같아 신우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자신에게 차사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그렇게 엄포를 놓았으면서 정작 본인은 차사를 비꼬는 것도 모자라 헐뜯기까지 하다니.

아주 자살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신우 아저씨, 꼭 내가 엄마에게 투정부릴 때처럼 굴었는걸요. 그런 건 아무에게나 하는 거 아니잖아요. 엄마니까, 엄마는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걸 아니까 떼쓰는 거잖아요.』

소정의 말에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했다. 평소의 신우 같지 않았다.

하지만 신우가 어떻게 차사를? 보지도 못하는데?

『엄마다!』

엄마를 부르는 소정의 반가운 한마디가 주희의 머릿속에 쌓여가던 의문들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소정이 달려가 기란을 폭 안았지만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주희는 그 모습에 가슴이 아팠지만 소정은 그래도 좋은지 엄마를 이리 안고 저리 안고, 엄마 엄마 하며 주위를 뱅뱅 돌았다.

“팔은 왜 그래요? 어쩌다가 다치셨어요?”

신우의 붕대를 본 기란이 놀라며 다가와 팔을 살폈다.

“발굴 현장에서 사고가 좀 있었어요. 굴착기 삽에 찍혔어요.”

“네에? 병원은? 병원엔 다녀오셨어요?”

“아뇨, 신우 씨가 괜찮다고 가지 않겠다고 해서요.”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뼈엔 이상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상처 소독 제대로 안 하고 내버려 두면 큰일 나요. 병원 가기 싫으시면 저라도 좀 봐드릴까요?”

주희와의 인연 때문인지, 아니면 천성이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타입인지 기란의 걱정이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신우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언니, 우리 엄마한테 부탁해요. 나 찾으러 다니느라 그만뒀지만 우리 엄마, 간호사였어요. 진짜 유능한 간호사요.』

소정이 자기 엄마가 최고라는 듯 가슴을 쑥 내밀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주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신우 씨, 팔 치료 받아요.”

주희의 얼굴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자 신우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팔을 잡아끌어 집으로 끌고 들어가는데도 그녀의 반짝임에 눈이 멀어 있었다.

“아주머니, 간호사시래요. 우리 얼른 가서 치료 받아요. 아주머니, 치료 어디서 받아요?”

그런데 치료를 받잔다. 당황해 응산을 봤지만 응산도 나 몰라라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아, 저기, 제 방에……. 저기 보이는 방요.”

기란의 대답에 주희는 신우의 다른 팔을 끌어안다시피 해 방을 향해 직진했다.

뿌리쳐야 하는데, 거짓말이 탄로 날 위기에 몰렸는데, 신우는 반짝반짝 설렘 가루를 뿌려대는 주희의 빛에 매료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네. 내가 간호사란 걸 말했던가?”

기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랐고, 엄마 껌딱지 소정도 기란에게 딱 달라붙어 따라갔다.

상처 보는 게 뭐 대단한 구경거리라고 다들 분위기에 휩쓸려 덩치 큰 덕원에 응산까지 우르르 기란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신우는 위기에 몰리고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 와중에도 아직 생채기가 남아 있는 주희의 이마가 보였다.

“알았어. 치료할게. 대신 너부터.”

“난 다친 데 없다니까요.”

“이마에 상처가 그대로야.”

손을 내밀어 흙 묻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어머, 그러네요. 소독을 하는 게 좋겠어요. 상처가 깊진 않은 것 같지만 얼굴에 흉이 남으면 안 되죠. 구급상자가 여기 어디……. 아, 여기 있다.”

오래된 고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기란의 방엔 자그마한 다락이 있었고, 몇 가지 잡동사니들 틈에 제법 커다란 구급상자가 있었다.

“앉아 봐요, 주희 씨.”

“아니, 전 괜찮은데…….”

기란이 구급상자를 열며 말하자 당황한 주희가 거절하려 했지만 신우가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바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주희는 겨우 생채기 하나 치료 받으면서 수많은 눈들의 구경거리가 돼야 했다.

“다 됐어요. 방수밴드니까 이대로 씻어도 돼요. 씻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여기저기 흙투성이에요.”

“그러네요. 신우 씨 치료하는 것만 보고 씻어야겠네요.”

“흙투성이로 옆에 있어 봤자 치료하는 데 방해만 돼. 가서 씻고 와. 뭐 해? 모두 데리고 나가지 않고.”

신우가 눈에 힘을 주고 응산을 쏘아봤다. 도대체 주변 정리 안 하고 뭐 하는 거냐는 의미를 팍팍 실어서.

응산은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염라대왕이 지키라 했고, 신의 눈과 귀는 가지지 못했으나 신의 회복력을 지닌 몸. 게다가 강림차사와도 인연이 있는 것 같은 신우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복잡한 걸 싫어하는 도깨비에게 가장 어려운 난이도의 숙제가 주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멍하니 무리들에 휩쓸려 다니기만 했는데, 신우의 경고가 있고야 정신이 들었다.

“머리 굴리지 말라고 했던 말 벌써 잊었어? 네 계약자는 나다.”

아주 명쾌하게 다시 결론까지 내려 주니 앞으론 헷갈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치료하는 데 방해됩니다. 다들 그만 나가십시오.”

우르르 사람들을 몰아낸 응산이 덜컥, 문까지 닫아 주고 나갔다.

방 안엔 이제 신우와 기란만이 남았다.

“듬직한 경호원을 두셨네요. 어디 봐요. 소독은 제대로 하고 붕대를 감은 거예요?”

기란이 신우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고 아무렇게나 둘둘 감겨 있는 붕대를 풀며 물었다.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아 상처가 상당히 깊을 거 같아 걱정이 됐다.

그런데.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팔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상처가 없었다.

분명 사고가 있었다고 했는데.

기란과 신우와 눈이 마주쳤다. 조각 같은 얼굴에 항상 냉정한 이미지의 신우였건만, 이 순간만은 매우 난감한 표정이 됐다.

눈길마저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며 어색해했다.

“비밀로 해주십시오.”

어색한 얼굴만큼이나 굳은 목소리로 비밀을 요구하는 모습에 기란은 그만 풋, 웃음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잘난 남자도 누군가의 동정표를 사고 싶어 하는구나, 싶어서.

“음, 이런 부상투혼까지 발휘해서 마음을 얻고 싶은 상대가 주희 씨예요?”

“부탁입니다.”

“여자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좋아요. 저도 지지해 드릴게요. 대신, 절대 상처 주면 안 돼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기란이 확답을 하고야 신우의 긴장이 풀렸다.

아직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그의 안에선 은연중에 이미 결론이 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마음을 가지기로.

인간의 한평생이 얼마나 짧은지는 당분간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내가 보기엔 이미 두 분 다 서로 마음이 있으신 거 같던데, 잘됐으면 좋겠네요.”

눈 깜빡임조차 그림 같은 미남자가 여인의 마음 한 가닥을 붙잡고자 이토록 애쓰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대상이 주희라니 어쩐지 이해가 됐다.

가만히 구급상자에서 새 붕대를 꺼내 두 사람의 사랑이 잘 엮여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꼼꼼히 감았다.

“다 됐어요. 언제까지 연극하실진 모르겠지만 이제 진짜 병원 다녀온 사람처럼 보이네요. 귀신이 얘기해 주지 않는 한 들킬 염려 없을 것 같아요.”

기란의 말에 신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설마 아직 안 나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물론 그래 봤자 있어도 보지 못하지만.

그런데 문득 방 안의 정경이 고택치고도 유난히 고풍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처음 이곳에 와 집을 봤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다.

오래된 마을이면 어딜 가나 한두 채씩 있는 동네 유지의 집 같으면서도 어딘가 좀 달랐다.

몇백 년은 된 것 같은 고택 특유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한옥과 달리 유난히 선이 가늘고 고운 것 같았다.

신비함은 외관뿐만 아니라 이 방에서 절정을 이룬 것 같았다.

문살 하나하나, 다락문 고리 하나하나에까지 독특한 숨결이 배어 있었다.

“아름다운 집이네요.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데 관리를 무척 잘하신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몇 대가 이어져 온 집이랬어요. 아버지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죠. 하지만 고택 그대로는 정말 불편했어요. 제가 개조하자고 고집부리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도 공포 영화의 세트장 같았을 거예요.”

“하지만 이 방은 유난히 더 아름다운데요.”

“알아주시네요. 저도 이 방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곧 점심 준비할 테니 신우 씨도 씻고 오세요.”

자신이 좋아하는 방을 칭찬해 준 사람은 처음이라 기란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잘 정리한 구급상자를 원래 있던 다락에 밀어 넣으며 말할 때였다.

쿵! 텅텅!

신우를 쳐다보며 구급상자를 밀어 넣느라 옆에 있던 다른 물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안이 텅 빈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는 건 거무튀튀한 색에 끝이 둥근 사각 상자였다.

“할머니께서 버리신 줄 알았는데, 이게 아직도 있었네.”

상자 모양이긴 한데 상자는 아닌, 사방이 막힌 채 모양만 상자였다.

재질이 쇠에 가까운데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고 아무런 문양조차 없었다.

오래 관리를 안 한 탓에 색마저 거무튀튀하게 바래 있기까지 했다.

기란이 허리를 숙여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어릴 때 그녀가 신기해하며 만지기라도 하면 할머니께서 기겁을 하며 달려와 만지지 말라고 했던 상자였다.

“이거, 할머니 말씀으론 귀신상자래요. 만지면 귀신이 보인다고 절대 만지지…….”

어릴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웃으며 신우에게 재미난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려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기란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상자를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선 채로 정신을 놓기라도 했는지 헛것이 보였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어 미친 듯이 잠만 자도 만나지 못했던 소정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호기심을 드러낼 때 짓는 특유의 표정으로 입을 비죽 내민 소정이 신우의 다친 팔에 감긴 붕대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

갑자기 숨이 턱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손만 뻗는데 퉁! 상자를 떨어뜨렸다.

순간, 딸이 사라져 버렸다.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은 통증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사, 상자가…… 소정이가…….”

바닥을 기어 구르고 있는 상자를 찾아 더듬었다. 미친년처럼 중얼거리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꽉 거머쥐었다.

소정이 다시 보였다.

그토록 찾아 헤매도 찾지 못했던 소정이 마지막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몸의 힘이 쭉 빠져 일어설 수도 없고 목이 메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퀭한 두 눈에 고인 뜨거운 액체만이 하염없이 두 볼을 타고 흘렀다.

『엄마? 엄마, 왜 그래? 아, 아저씨…….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왜 이래요? 어디 아파요?』

소정이 넋 나간 듯 주저앉아 있는 그녀의 앞에서 놀란 눈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기란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 소리치며 소정을 끌어안았다.

“소정아! 아…….”

하지만 소정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그대로 소정을 통과해 버리며 헛손질을 했다.

누군가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홀로그램인 것만 같다.

하지만 기란은 절망할 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정이 보이지 않게 가로막았다.

“아…… 안 돼. 안 돼요. 데려가지 마요. 제발 데려가지 마요.”

가면 같은 허연 얼굴에 생기라곤 보이지 않는, 누가 봐도 차사인 시커먼 존재가 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차사 아저씨, 우리 엄마…… 나 보이는 거예요? 어, 어떻게…….』

차사의 무표정한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었지만 사실 차사는 소정이 묻기 전부터 매우 난감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부터 기란이 소정과 자신을 본다는 걸 그도 느꼈던 것이다.

아무래도 기란이 쥐고 있는 저 상자가 기물이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소정의 영을 잃은 일로 인해 판관들에게 문책을 당하고 왔는데 소정을 찾은 걸 기뻐할 새도 없이 들키지 말아야 할 인간에게 모습을 들키고 만 것 같았다.

자식의 귀신을 본 인간이 남은 인생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더불어 아이도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볼 수 있는데 자발적으로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 나 보여? 보이는 거야? 엄마…….』

“소정아…….”

소정과 기란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려고 몇 번이나 헛손질하며 애를 썼지만 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지 소정은 엄마 안기를 멈추지 않았다.

『엄마…….』

차사마저 그런 두 사람을 인상을 쓴 채 지켜보기만 했다.

기란의 이상행동에 신우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보같이. 일을 똑바로 처리하는 게 없어. 응산!”

신우는 타이밍을 지독히도 맞추지 못하는 신참차사를 욕하며, 거칠게 문을 열어 응산을 불렀다.

이 정도로 일을 못하면 그 후폭풍이 아버지에게까지 미치겠단 생각에 왠지 더 짜증이 났다.

“부르셨……습니까.”

신우의 굳은 목소리 탓에 재빨리 달려온 응산이 차사를 보고는 흠칫했다.

게다가 기란과 소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표정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무슨 일이에요? 아…….”

주희마저 씻기 위해 벗던 셔츠 단추를 도로 채우며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린 두 사람의 모습을 주희는 망연히 넋을 놓고 쳐다봤다.

“차사에게 말해. 멍청히 있지 말고 어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영이 강한 집착을 가지게 되면 명부에 들지 못해. 그럼 아이는 충분히 환생할 수 있음에도 결국 소멸당하게 될 거다.”

“하지만 저대로라면 남겨진 아주머닌…… 견디지 못할 거예요.”

신우의 냉정한 말에 주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걸 곁에서 듣고 있던 차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연히 일을 이렇게 만든 놈이 아주머니의 기억을 지워 주고 가야지. 저 귀신상자도 어디 다른 곳으로 치우고.”

『…….』

감정이 다분히 실린 신우의 말에 주희가 힐끗 차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언제나 발끈하던 차사가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만 더 허옇게 떠가는 차사를 보며 주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신을 못 할 뿐만 아니라, 기억을 지우는 능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차사 님, 시간은 얼마나 있어요? 제가 한번 얘기해 볼게요.”

없는 능력을 당장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소정을 보내고 기란을 달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오늘 자정까지는 돌아가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설마, 그 능력까지도 없다는 거야?”

신우가 무섭게 쏘아붙여도 차사는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런 걸 보면 신참차사 성격이 생긴 것과는 달리 많이 순둥이인 모양이다.

아무리 능력이 부족한 신참차사라 해도 명부신. 인간 하나 사라지게 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하지만 차사가 아무리 순둥이여도 자꾸 긁어대서 좋을 건 없었다.

그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건 차사가 아니라 신우였다.

“그만해요, 신우 씨. 그렇게 화만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자꾸 그럴 거면 그만 나가 있으세요.”

주희의 단호한 말에 신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다행히 더 이상 다른 말을 더 하진 않았다.

“죄송한데 차사 님도 그 모습 좀 어떻게 바꾸면 안 될까요? 만약 내 아이가 따라가야 할 사람이 차사 님같이 무섭게 생겼으면 정말 보내기 싫을 것 같거든요. 본인 얼굴도 아니시라면서요. 되도록 가장 순한 버전으로 부탁해요.”

『하지만 제 얼굴은 너무 나약해 보여서……. 이 얼굴일 때가 영을 인도해가기 가장 쉬웠는데요.』

“그거야 겁을 먹어야 갈 인간들일 경우 그랬겠죠. 하지만 저쪽은 아이예요.”

주희의 말에 시무룩해진 차사의 시선이 아직도 애달프게 손을 잡으려 애쓰고 있는 두 사람에게 향했다.

순간 신참차사의 모습이 변했다.

주희의 눈에 잠시 이채가 스쳤다. 응산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동안 차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훨씬 좋네요. 본모습이에요?”

『네. 이 모습으로 영을 데려가다 몇 번 놓칠 뻔한 적이 있거든요. 강림차사 님 얼굴을 빌리고 나선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사람마다 다른 거죠. 앞으로 아이들 데려갈 땐 그 모습이 좋겠네요. 그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면 아이들이든 여자들이든 다 잘 따를 것 같으니까요.”

강림차사의 모습과는 체격부터 얼굴까지 완전히 바뀌어 차사가 아니라 천사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어딘지 분위기가 살짝 신우를 닮은 것 같기도 해, 저도 모르게 힐끗 신우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 중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 있었는지 신우가 그녀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설득이 되든 안 되든 자정 전에는 데려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는 것 같네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차사는 위로라 생각했는지 여전히 시무룩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정의 뒤에 나타나 깜짝 놀랐는데 곧이어 더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차사가 소정을 만진 순간 어떻게 된 건지 소정의 모습이 영이 아닌 실체가 되었던 것이다.

“엄마? 어, 엄마가 만져져. 엄마가……. 엄마아아!”

“소, 소정아……. 소정아! 소정아!”

기란과 소정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저게 가능하죠?”

『차사로선 쓸모없는 능력입니다. 오래가지도 못하고요. 자정까진 가능할 겁니다.』

차사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몸은 현신시키지 못하면서 영을 현신시킬 수 있다니.

“지금 소정이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네요. 고마워요.”

신기한 능력에 마음이 따뜻해진 주희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차사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는 기란과 소정의 곁으로 다가갔다.

『…….』

주희의 칭찬에 차사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저런 능력은 처음 보네요. 영을 현신시키는 능력이라니.”

응산이 무심코 한 말에 신우의 얼굴이 한층 더 무표정해졌다.

다른 명부신들에 비해 모든 능력에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그와 달리 신참차사는 너무도 부족한 힘을 지녔는데도 차사가 될 수 있었던 게 저 이유 때문인 듯했다.

파괴의 손이 아닌 영을 실체화시키는 재능.

“우린 그만 나가 있는 게 좋을 거 같군. 차사에게도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으라고 해. 차사가 옆에 버티고 있으면 불안해서 될 얘기도 안 될 테니까.”

신참차사에게 말을 할 때면 항상 돋아 있던 가시가 빠졌다.

응산이 갑자기 변한 신우의 태도가 이상한 듯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전혀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무표정의 가면 뒤에 감정을 숨겨 버리던 옛날의 신우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신우의 말을 차사도 이미 들었는지 당황해하면서도 재빨리 방에서 사라졌다.

* * *

“엄마 냄새 너무 좋아.”

소정은 몸 안의 눈물이란 눈물은 모두 쏟아내고야 탈진한 듯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귀신일 때는 맡지 못했던 엄마의 향기를 맘껏 맡았다.

“미안해, 소정아. 내가 그날 야간 교대 근무만 하지 않았어도…….”

기란이 소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날을 떠올리다 또 울컥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엄마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냥 교통사고였어. 아저씨가 나쁜 마음을 먹었을 뿐이고.”

“널 혼자 두지만 않았어도…….”

“그러지 마. 나 엄마가 나 찾아다니면서 울기만 할 때가 제일 슬펐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불이 안 켜진 줄도 모르고 앉아 있는 엄마를 볼 때는 정말 무서웠어. 이젠 그러지 마. 난 엄마 아픈 게 제일 싫어.”

너무 많이 울어 기운이 빠졌는지 소정이 눈을 감고 나른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기란은 소정이 매 순간 자신의 옆에 있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삼켰다.

가만히 소정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만이 가늘게 떨렸다.

“엄마, 신우 아저씨가 그러는데 나 환생할 수 있대. 환생한다는 건 다시 아기로 태어난다는 거지?”

소정이 툭 던진 말에 머리를 쓰다듬던 기란의 손길이 멈칫했다.

지금까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들의 옆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주희와 눈이 마주쳤다.

소정의 말에 의하면 기란이 정 씨에게 죽을 뻔한 걸 주희가 구해 줬다고 했다.

귀신도 차사도 볼 수 있어 도움을 요청했다고.

그저 마음이 따뜻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생명의 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연히 소정의 말뜻이 무엇인지 눈으로 물었다.

“소정이라면 충분히 환생할 수 있을 거예요.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기란의 시선에 주희는 심장이 뜨끔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모른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상상 가능한 가장 적절한 답을 했다.

“그 말은, 이대로 보내야 한다는 거네요.”

소정을 꼭 끌어안는 기란의 말에 주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지금 이렇게 소정이를 만질 수 있는 건 차사 님이 소정이를 아주 많이 안타깝게 생각해 주어서예요. 만약 소정이가 가지 않으면 소정인 영으로서도 영원히 소멸당하고 말 거예요. 그러면 소정인 다시 환생하지 못해요.”

“하지만…….”

소정을 보내고 싶지 않아 떨리는 기란의 눈동자를 보는 게 너무 가슴 아팠다.

하지만 보내야 한다는 걸 기란도 너무 잘 아는 것 같았다.

소정이 여기 남게 해달라고 더 이상 애원하지 않는 걸 보니.

주희와 기란이 그렇게 안타까운 시선을 주고받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소정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켜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엄마, 나 다시 엄마 딸로 태어날래. 아니야. 엄마 지킬 수 있게 아들로 태어나는 게 더 좋겠어.”

주먹을 꼭 쥐며 당돌한 다짐까지 하는 소정을 본 기란은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주희를 돌아봤고, 주희는 그 시선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성별도 고를 수 있는 거 맞나? 신우 아저씨한테 물어봐야지. 그런데 참 이상해. 왜 명부 일을 차사 아저씨보다 신우 아저씨가 더 잘 아는 것 같지? 이상해.”

그것만이 아니라 소정은 성별 타령까지 하면서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너무 발랄한 모습에 도저히 방금 전까지 울고불고했던 그 소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이 모습이 원래의 소정인가?

주희가 기란을 힐끗 보니 완전 넋을 놓고 있는 게 그녀의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괜히 마음이 더 짠해졌다.

“그보다, 엄마아아.”

소정이 갑자기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불렀다.

“왜?”

정말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소정의 모습에 기란이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며 대답했다.

“신우 아저씨가 그러는데, 가장 중요한 건 엄마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 한대. 그래야 내가 올 수 있다고.”

다다다 속사포처럼 튀어나가 버리는 소정의 말을 말릴 틈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난 그 아저씨 좋아. 엄마 뒤 졸졸 따라다니는 덩치가 이만큼 큰 아저씨. 그 아저씨, 힘은 엄청 세 보이는데 엄마가 울면 그 아저씨도 뒤에서 운다? 마음이 좀 약해서 문제긴 한데 그래도 그 아저씨만큼 엄마 좋아하는 사람 없는 거 같아. 엄만 어때?”

소정은 지금 자신의 다음 생의 아빠를 자신이 정하려 하고 있었다.

주희가 놀라 끼어들었다.

“소, 소정아. 그, 그런 건 어른들이 알아서 할 문제야. 사랑은 억지로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거든. 사랑은 저 하늘의 상제님도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야.”

“칫, 그럼 난 아빠를 고를 수 없는 거예요? 그 아저씨가 아빠면 엄마를 정말 잘 지켜줄 것 같아서 좋은데……. 아, 나, 나 몸이 다시……. 벌써 시간 다 된 거예요?”

“사, 상자, 상자가 어디……. 아, 다행이다.”

소정이 갑자기 다시 보이지 않아 당황하던 기란이 상자를 찾아 거머쥐었다. 그랬더니 정말로 다시 소정이 보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차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흠칫 놀라며 본능적으로 소정이 보이지 않게 가로막았다.

『엄마, 그러지 마. 다른 차사 아저씨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아저씬 날 정말로 안타까워해 줬어. 내가 잘못될까 봐 주희 언니한테까지 부탁하러 가주고. 정말 좋은 분이야.』

“하지만.”

『응, 알아.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거. 하지만 다시 올 수 있대. 나, 판관 아저씨들한테 떼를 써서라도 빨리 올 테니까. 신우 아저씨, 나 정말 다시 올 수 있는 거죠? 그런 거죠?』

마침 방으로 들어서고 있던 신우와 응산을 향해 소정이 불안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물었다.

당연히 신우는 듣지 못했고 응산이 당황하며 작은 소리로 말을 전달했다.

“어느 쪽에 있어?”

기란의 주변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고자 응산에게 물었다.

『엄마, 그 상자 신우 아저씨한테 잠시 맡겨 봐. 나 아저씨 답을 꼭 듣고 싶어.』

신우가 해줄 수 있는 답인지의 여부를 판가름하기보다 기란도 소정만큼 신우의 답이 듣고 싶었다.

“신우 씨, 이거요.”

소정의 위치만 파악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얼떨결에 손에 거무튀튀한 상자가 쥐어졌다.

순간적으로 손바닥 아래에서 우웅 떠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아졌고, 곧 시야가 밝아지며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딱 봐도 약해 보이는 신참차사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강림차사의 모습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어딘가 눈에 거슬렸다.

『신우 아저씨, 나 정말 다시 올 수 있는 거죠?』

“당연히. 만약 누구든 네 환생을 막는다면 어제 본 강림차사 님를 찾아. 내가 부탁했다고 해. 그러면 아마 방법을 찾아 주실 거다.”

신우가 담담하게 대답하는 소리에 신참차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게 무슨 소린가?’ 궁금해했지만 누구도 차사에게 대답해 주는 이는 없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신우 아저씨.』

“그런데 다른 조건은 다 갖춰진 거니?”

기란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슬쩍 기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게, 덕원 아저씨 오면 부탁 좀 하고 가려고 했는데 아직 안 오시네요.』

“내 생각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던데. 네가 나서면 괜히 무섭지 않을까?”

『하긴. 덕원 아저씬 굉장히 마음이 약한 것 같으니 귀신 같은 거 보면 까무러칠지도 몰라요.』

“그래도 분명 좋은 분인 거 같더라. 잘 어울려.”

『히힛,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건 다시 네 어머니 드릴 테니 인사해라. 시간 다 됐어. 늦기 전에 가.”

『고마워요. 신우 아저씨, 주희 언니.』

상자가 다시 기란에게 돌아왔고, 소정은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엄마를 폭 안았다.

역시나 그냥 통과해 버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엄마가 보고 있었으니까.

『엄마, 나 이제 갈 거야. 그리고 꼭 다시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소정아.”

『약속해. 많이 울지 않기로.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울 땐 꼭 덕원 아저씨랑 같이 가기로.』

기란의 울음 섞인 부름에 소정은 자신의 바람을 아주 담담하게 얘기했다.

“흑, 소정아.”

『이 귀신상자는 신우 아저씨 주는 게 좋겠어. 주희 언니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난 이제 더 이상 귀신으로 오지 않을 거니까. 내가 가고 나서 엄마가 보게 되는 귀신들은 모두 내가 아닐 거니까.』

신우와 주희가 걱정돼 한 당부라기보다는 엄마가 눈만 뜨면 귀신상자를 만지며 자신을 찾을까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다.

『……다녀올게.』

차사의 얼굴이 점점 다급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방긋 웃는 얼굴로 다녀온다 인사를 하는 소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가자.』

차사가 소정을 감싸자마자 마치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소정아!”

기란이 절규하듯 소리내 불러도 소정이 다시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기란 씨! 무슨 일이에요?”

친척집에 갔던 기란의 아버지를 늦은 시간에 모시고 온 덕원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기란의 울음소리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왜? 기란 씨가?”

“잠시만 그냥 두세요. 잠시만요.”

문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오열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던 기란의 아버지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그래, 가슴에만 묻는 게 힘들다면 차라리 기억하는 게 맞겠지. 며칠 전에 소정일 찾았다고 연락이 왔었다. 네가 하루라도 빨리 잊었으면 하는 마음에 너에겐 말하지 못했다. 덕원이 데려와 네가 어릴 때 자주 찾던 그 나무에 수목장을 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소정이를 보러 가보자.”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울고 있는 게 분명한 아버지의 무거운 말에 기란은 방금 전 소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산에 올라갈 땐 덕원을 데려가라던 말과 많이 울지 말라던 말이.

멍한 눈으로 덕원을 보니 덕원이 눈물을 감추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방금 전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정말 네가 왔다 갔구나.

3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