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차가 출발하고도 한참을 신우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상황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강림차사.
차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자였고, 겉모습과 달리 가장 인자하고 정이 많은 차사였다.
명부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차사이기도 했다.
강림차사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냉정한 차사에게 걸렸으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차사검에 베였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 상황은 차사의 일을 정면으로 방해한 것이었다.
이가서림의 덜떨어진 차사처럼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어떤 성질 고운 차사가 자신의 일을 방해받았는데 곱게 넘어간단 말인가.
신의 일을 방해한 죄로 충분히 단칼에 베어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됐어요. 그 아저씨가 당신한테도 고맙다는 말 꼭 전해 달라고 했어요.”
다음에, 화가 좀 가라앉았을 때 얘기하려고 했는데, 주희가 꺼낸 고맙다는 말이 신우의 머릿속을 내내 맴돌고 있던 위험 요소를 건드리고 말았다.
“고맙다고? 겨우 그 말이 듣고 싶어 그 상황에 뛰어든 거였나? 자살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차갑고 냉정하다 못해 거칠기까지 한 말이 거르지 않고 그대로 튀어나가 버렸다.
“미안해요. 당신까지 위험하게 만들어서.”
힐끗 옆을 보니 그녀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풀 죽은 소리로 사과하고 있었다.
이마저도 자신이 아니라 남을 먼저 챙기는 말이었다.
스스로를 전혀 돌보지 않는 주희의 이런 행동들이 자꾸만 그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죽을 수도 있었어.”
“미안해요.”
저가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하다니.
“넌 방금 전, 신의 일을 정면으로 방해하고 나선 거야.”
“미안해요. 그 아저씨 울음소리가 자꾸만 머리에 울려서 그만…… 다음부턴 당신이 위험하지 않게…….”
도무지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여자였다.
이대로 더 달렸다간 순간순간 폭주하게 될 것 같아 마침 보이는 졸음쉼터를 향해 핸들을 꺾었다.
끼이이익!
신우의 거친 운전에 안전벨트를 했는데도 주희의 몸이 앞으로 왁 쏠렸다.
“내 얘기가 아니야. 너, 네가 죽었을 수도 있다고!”
급정거에 놀란 눈빛으로 돌아보는 그녀를 향해 결국 속에 담고 있던 답답함을 쏟아냈다.
“아.”
그런데 이 여자, 반응이 가관이었다.
“아? 그 맹한 감탄사는 뭘 뜻하는 거지? 설마 네가 죽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는 뜻은 아니지?”
그가 딱 꼬집어 물은 말이 그대로 적중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자꾸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제 목숨보다 남의 아픔에 더 공감할 수 있는 건지.
“음, 그게…….”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화를 내야 말귀를 알아들을까. 어떻게 가르쳐야 다시는 신의 일에 겁 없이 나서지 않을까.
그녀의 눈과 귀를 막고 싶어져 버렸다.
달칵!
신우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몸을 비틀어 당황한 빛을 띠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다시는 그러지 마.”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그 목소리가 어딘지 애원에 가까웠다.
눈과 귀를 막고 싶다 생각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입술은 막 변명을 쏟아낼 것 같은 그녀의 입을 막았다.
놀라 살짝 벌어진 그녀의 아랫입술을 그의 입술로 깨물었다.
그의 혀 끝에 닿은 그녀의 말랑한 입술을 할짝할짝 부드럽게 핥았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지만 어딘지 멍해진 틈을 타 그녀의 입 안을 거칠게 침범해 들어갔다.
촉촉이 젖은 그녀의 안을 점령한 그의 혀가 개선장군처럼 그녀의 입 안을 휘저어댔다.
그녀 안의 말랑하고 따스한 혀가 조심스레 그의 혀에 얽혀 드는 게 못 견디게 좋았다.
그녀의 입에서도, 그의 입에서도 목 안 깊은 곳에서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샜다.
입술에서 시작해 퍼져 나가기 시작한 흥분세포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의 몸은 흥분으로 뻣뻣하게 굳어가는데 그녀의 몸은 반대로 나른하게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자동으로 내려앉는 것을 보며 신우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찰칵.
그녀의 안전벨트를 원위치시킨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선을 느리게 훑어 내려갔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다른 한 손은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얇은 스웨터 속을 더듬었다.
“흡.”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그녀의 속살이 닿은 순간 그녀가 눈을 떴고, 놀란 숨을 삼켰다.
“괜찮아. 눈 감아.”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며 늑대의 거짓말에 속지 않았지만, 한 번 더 부드럽게 입술을 핥으니 그녀의 눈이 다시 감겼다.
그녀의 눈이 감기는 걸 확인한 그의 입술은 조금 더 깊은 욕망을 찾아 그녀의 목선을 타고 흘렀고, 뜨거운 입술 자국을 남겼다.
움푹 파인 쇄골에 닿은 그의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할짝할짝 핥아대자 그녀의 몸이 바르르 잘게 떨었다.
“으음…….”
그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나온 순간 그의 손이 봉긋하게 솟은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의 커다란 손을 다 채우기엔 많이 작았지만 아담하게 안기는 날것의 온기가 그의 하체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잡아당기려는데 자리가 불편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익! 좁아.”
욕망이 강제로 통제당한 느낌에 신우가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렀고, 좌석 두 개가 스르르 뒤로 눕혀졌다.
다시 그녀를 안으려 그녀의 자리로 옮겼을 때였다.
“시, 신우 씨……. 이, 이건 아닌 거 같은데요.”
좌석이 눕혀진 탓에 놀랐는지 그녀의 눈이 다시 떠졌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더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니란다.
자신의 몸은 뜨거울 대로 뜨거워져 머리가 이미 제정신이 아닌데 그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엔 발갛게 물든 그녀의 두 볼이며 힐끗힐끗 쳐다보는 야한 눈매가 모두 그를 원하는 것만 같은데 말이다.
“아니라고? 그럼, 이 들끓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눈동자만 굴리며 누워 있는 주희를 신우가 무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아,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네가 모른다고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난 지금도 네 온몸에 키스하고 싶고, 네 온몸을 만지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너와 있으면 내 몸이 내 맘대로 통제가 안 돼. 나만 이런 이상한 기분인 건가? 나 혼자만 미친 거냐고! 말해 봐. 떨리던 그 감각, 내가 잘못 해석한 건지.”
신우는 처음에 키스를 강행한 이유도 잊어버리고 오직 몸이 말하는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몸 안에 들끓어대는 이 이상한 기운에 대해 무섭게 진심을 말했다.
더불어 그녀의 진심도 다그치듯 요구했다.
당황해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피가 말랐다.
주희의 입에서 ‘미친놈, 꺼져라.’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아 무서웠다.
숨이 목 끝까지 꽉꽉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귀를 의심할 말이 들려왔다.
“난, 난…… 그래요. 나도 싫지 않은 것 같아요.”
주희는 갑작스럽게 대답을 요구하는 신우 때문에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 뜸을 들이며 고민했지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신우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거짓을 말할 수 없어 진심을 말했다.
신우와 첫 눈맞춤을 한 순간부터 그가 좋았던 것 같다.
그 이유가 어쩌면 신우의 몸에 흐르고 있는 익숙한 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이 점점 더 짙게 신우를 향해 흐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이상한 기분 또한 그녀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오늘 현와원에서도 그랬고, 방금 전에도 그랬다.
그의 입술이 스친 곳마다 화끈거리며 뜨거웠고,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속살이 떨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현상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가 화를 내며 ‘나 혼자만 미친 거냐?’ 하고 물은 후에야 알 것 같았다. 자신도 미쳐 있다는 걸.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한평생을 살다 가려 했는데, 마음이 움직여 버렸다.
자신의 속에 이미 한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생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손을 뻗어 조각 같은 그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그녀가 아는 신과 인간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남자.
손길이 스치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게 만드는 이 남자를 누군들 싫어할 수 있을까.
“당신을 만지고 싶은 게 미친 거라면, 나도 미친 거 같네요.”
“하아.”
주희의 대답에 잠시 멍해 있던 신우가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듣고야 맥이 탁 풀려 그녀의 양옆으로 팔을 짚으며 엎어졌다.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음, 저기, 좀 무거운데요.”
멋쩍은 듯 중얼거리는 주희의 어색한 목소리에 신우가 갑자기 쿡쿡거리는 웃음소릴 냈다.
“왜 웃는 거죠?”
“넌 거짓말이 너무 티 나. 목소리가 어색해지거든. 그 말은 방금 전 네가 한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뜻이지. 내가 미치게 만지고 싶고 내가 미치게 좋다고 한 말 말이야.”
“미치게 좋다고는 안 했는데요. 그냥 미친 거 같다고 했지.”
그의 귓가에서 낮게 투덜대는 그녀의 목소리 톤이 너무 좋다.
스윽,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다.
“같은 말이야.”
코가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그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단정 짓듯 말했다.
“그런 말이…….”
“쉿! 그럼 증명해 주지.”
주희의 작은 항의를 막기 위해 신우는 증명이라는 핑계를 대고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삼키기 시작했다.
살짝살짝 그녀의 입술을 핥는 것만으론 어쩐지 애가 끓어 한 가지를 더 주문했다.
“만져도 좋아.”
그녀가 만져도 되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손이 자신을 만져 주길 허락하는 주문을 했다.
방금 전 그녀의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때의 기분 좋은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이,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주희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가볍게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몸속에 열기가 고였다.
그의 혀가 그녀의 단내 나는 열기를 좇아 그녀의 안을 헤집었다.
키스가 점점 거칠어져 갔고, 그녀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그녀의 단 숨이 너무 좋아 그녀의 손이 사라진 줄도 몰랐다.
“……!”
스윽, 언제 셔츠가 걷혀 올라갔는지 허리에 느껴진 손의 감촉에 신우의 몸이 뻣뻣해지며 키스가 멈췄다.
키스로 인해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그녀를 열기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며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했다.
“아, 안 되나요?”
“돼.”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몸을 만지겠다는데 싫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신우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짧게 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너무 아름다워서 한번 만져 보고 싶었어요.”
고맙다니.
신우는 그녀의 말에 온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옷 속을 어설프게 더듬어 오는 그녀의 손에 그의 몸속 세포 하나하나가 열감을 느껴야 했다.
가슴까지 더듬어 올라온 손이 마치 소중한 것을 쓸듯 조심스레 스윽 가슴을 훑어 내리자 그는 호흡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꼭지를 건드렸을 땐 흡, 아랫배에 힘이 격하게 들어갔고, 허벅지가 당기는 이상 증세까지 벌어졌다.
그녀의 손을 괜히 허락했다는 생각이 들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 좁은 차 안에서 그녀를 안아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능력이 사라진 걸 크게 아쉬워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공간이동 능력이 사라진 게 입술을 깨물어야 할 만큼 아쉬웠다.
이대로 자신의 침실까지 움직이지 못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힘겨웠다.
“자, 잠깐.”
일단 그녀의 손을 멈춰야 했다.
그녀의 몸을 만지고 탐할 땐 거의 제정신이 아니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그녀와 처음을 맞이하는 건 싫었다.
나중에 돌아올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를 생각하면 무섭기도 했다.
주희에겐 항상 고운 시선만 받고 싶었다.
“왜요?”
“더 하면…… 못 참을 거 같아. 여기서 널 끝까지 안아 버릴지도 모른다고.”
욕망을 덜어내느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아…….”
그제야 그녀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재빨리 손을 뺐다.
“젠장.”
그녀의 손길이 거둬졌는데도 아랫배 아래 커다란 불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은 묵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걸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좋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괜찮아요? 많이, 불편해 보여요.”
붉으락푸르락하는 그의 얼굴을 그녀가 슬쩍슬쩍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아니, 안 괜찮아. 몸이 터질 것 같아.”
“어, 어쩌죠?”
그의 밑에서 놀라 바르작거리는 그녀의 몸짓에 이미 불룩하게 텐트를 치고 있던 그의 바지 속 물건이 비명을 질러댔다.
“윽, 움직이지 마!”
“아.”
결국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뱉어졌고, 그녀는 순간 냉각된 것처럼 딱 굳어졌다.
그때였다.
차 안에 갑자기 음악 소리가 흘렀다.
“무슨 소리죠?”
“내 휴대폰 소리.”
그의 전화번호를 아는 건 차 실장과 응산뿐이었고, 둘 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지 않았다.
신우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떠올린 덕분인지 몸의 열기도 조금 빠진 듯했다.
몸을 일으켜 벗어 두었던 코트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모르는 번호였다.
“왜 안 받으세요?”
“xxx9. 모르는 번호야.”
“몇 번이라고요? 이리 줘봐요.”
모르는 전화번호라며 막 전화를 끊으려는 신우의 휴대폰을 주희가 벌떡 일어나 채갔다.
그리곤 곧바로 통화 중으로 만들어 귀에 가져갔다.
무슨 일인지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여보세요. 아버지?”
아버지.
그 한마디에 신우는 당황을 넘어서 바짝 긴장했다.
전화기 저편에서 이곳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눕혀져 있는 의자며 여기저기 흔적이 남은 그녀의 얼굴이 신경 쓰였다.
그녀의 피부가 너무 약한 건지, 그가 정신을 놓고 너무 세게 빨아 당긴 건지, 그녀의 입술이 부풀어 있고 목에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아, 도 실장님요. 네. 제신리 내려가는 길이에요. 그냥 누구 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네, 박 할아버지 손자분요. 제신리에 일이 있으시대요. 목소리요? 그, 그냥 휴대전화 목소리라서 그럴 거예요. 밤도 늦었고요.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릴 테니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네.”
통화가 끝났다.
그녀는 영혼 빠진 얼굴로 넋을 놓고 휴대전화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제신리 문화재 발굴팀에 있다고 했지. 그럼 보고서에서 봤던, 장 교수님 추천으로 합류하셨다는 이 박사님이 혹시 아버지?”
“네.”
“이력이 굉장하신 분이었던 거 같은데…….”
딸의 입장에선 결코 좋은 분일 수 없을 것 같아 주희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보고서를 꼼꼼하게 훑으며 봤던 이 박사의 이력은 밥 먹고 타지만 돌아다녀야 가능할 것 같은 이력이었던 것이다.
“네. 고고학에 완전히 빠지신 분이에요. 물론 저한테도 너무 좋은 아버지고요.”
“그 정도로 바쁘시면 같이한 시간이 거의 없었을 거 같은데.”
“같이한 시간이 짧다고 사랑의 깊이마저 얕아지는 건 아니니까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척 좋은 분이세요.”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는 주희의 입가에 번져가는 웃음을 보며 그녀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다행이군.”
이상할 정도로 단내가 나고 이상할 정도로 빛이 나 보이던 게 어쩌면 그녀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늦게 도착하면 불호령이라도 떨어질지 모르니 빨리 출발해야겠군.”
“음, 그럴지도요.”
아버지를 생각하는지 주희가 예쁘게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의 그 에로틱한 감정은 다 어딜 갔는지 그녀의 눈 속에 이미 그는 없고 그녀의 아버지만 있었다.
아무래도 주희에겐 시시때때로 그를 각인시키는 주입식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정식으로 사귀는 문제는, 제신리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지. 귀신 찾으러 가면서 우리의 중대사를 결정지을 순 없으니까.”
“아.”
그의 말에 주희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되돌아왔다.
그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만족스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 * *
“기란아, 이렇게 이른 시각에 어딜 가는 거냐.”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대문을 나서고 있는 기란을 기란의 아버지가 불러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산책 좀 하고 오려고요.”
제신리에 내려오고도 내내 방에만 누워 있던 기란이 엊그제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고집스레 땅만 지켜 왔는데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기란이 조금이라도 더 기력을 찾을 수 있다면 문화재 발굴이 아니라 땅을 팔라고 해도 팔아 버릴 것 같았다.
손녀가 있었다는 소식도 충격이었는데 그 손녀를 화장한 유골함을 받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선산 제일 튼튼한 나무에 수목장을 했지만 딸에겐 차마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기란을 또 보게 될까 무서워서.
선조들의 유지 따위가 무어라고 딸이 만신창이가 되는 줄도 모르고 10년을 넘게 인연을 끊고 살았던 것인지.
이제 와 후회해 봐도 아무 소용없겠지만 당장은 기란이 저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또 발굴터에 가는 모양이구나. 그 일이 하고 싶으면 발굴팀장한테 언질을 넣어 주마.”
“아니에요. 전 문화재 쪽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걸요. 그냥 잠시 구경만 하고 올 거예요.”
“그럼 덕원이를 불러 줄 테니 차를 타고 가거라. 걸어가기엔 너무 멀 것 같구나.”
“아니에요. 오늘은 덕원 씨 그냥 좀 쉬게 두세요. 걸어가면 운동도 되고 더 좋아요.”
기란은 지금 발굴 현장에 가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곳에 돌아와 며칠을 천장만 쳐다보며 넋을 놨던 모양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보다 더 초췌한 몰골로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움직였다.
일어나 앉고 걷는 것만으로 아버지의 얼굴에 차츰 생기가 돌았기에.
아버지 앞에선 더 이상 울지 않게 됐다.
그래서 발굴 현장을 핑계로 삼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머릿속이 온통 소정의 모습으로 가득 차 하루 내내 눈물만 쏟아낼 게 뻔했기에 간 것뿐이었다.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는 또 그녀보다 더 죄인의 얼굴이 될 게 뻔했으니까.
어젯밤처럼 꿈속에 소정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녀는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기 위해 핑계를 대고 이렇게 집을 나서곤 했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네, 다녀올게요.”
기란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대문을 나섰다.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올 때만 해도 이곳에 다시 돌아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아버지가 있어 아직은 살아 있을 수 있는 모양이다.
쉬이잉,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 닥쳤다.
본능적으로 목이 움츠러들었고, 머플러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소정아.”
이상하게 어제오늘 소정의 기억이 더 짙어져 괴로웠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이 발굴터가 아닌 선산이 있는 산등성이 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녀가 혼자 있고 싶을 때 올라가 울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기란 씨, 어디 가세요?”
뒤에서 들린 덕원의 목소리에 기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늘은 정말 혼자 있고 싶은 날인데, 어제도 그제도 덕원이 자꾸만 뒤를 따라다녀 귀찮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명확히 얘기해야겠다 싶어 뒤를 돌았다.
그런데 덕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쪽은 발굴터도 아닌데……. 서, 선산에 가시게요?”
“네. 산책 겸 어릴 때 올라갔던 산에 가보려고요. 그런데 이분들은…….”
덕원이 약간 당황한 듯 더듬거렸지만 기란은 덕원과 같이 온 선남선녀에게 시선을 붙잡혀 눈여겨보질 못했다.
특히 여자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었다.
“발굴터 관련 손님이신데 숙소가 모자라대요. 어르신께서 집으로 모셔도 된다고 하셔서요.”
“그래요. 방은 많으니 문제없을 거 같네요. 그럼 나중에 뵐게요.”
“어, 어, 기란 씨. 이분들 모셔다 드리고 올 테니 같이 가요. 혼자 산에 올라가기엔 너무……. 히익!”
휘이잉!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에 덕원이 말을 멈춰야 할 정도였다. 기란의 목에 둘러져 있던 머플러도 벗겨져 휙 날아갔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단아한 여인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오늘 계속 춥다는데 이거라도 단단히 여미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목에 얌전히 머플러를 감아 주며 말하고 있는 여인을 어디서 봤는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무런 대가 없이 따스한 머플러를 감아 주었던 여인.
“머플러 주인이었네요.”
기란이 머플러를 단단히 여며 주고 있는 여인의 따스한 눈동자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억하시네요.”
여인이 마주 보며 빙긋 웃는데, 기란은 그 눈 속을 들여다보다 그만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렸다.
“앗! 기란 씨. 왜,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당황한 덕원이 기란의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당황스럽긴 기란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잘 참아왔는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며칠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눈물이 흘렀다.
“아, 나 왜 이러지……. 미, 미안해요.”
고마운 손님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일인지.
기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아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더 당황스러웠다.
그런 기란을 여인이 눈동자만큼이나 따스한 팔로 가만히 안아 주었다.
마치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럴 리가 없건만 소정을 잃은 아픔을 아는 듯한 토닥임이었다.
“괜찮아요. 억지로 참지 않으셔도 돼요. 울다 보면 슬픔도 조금씩 흘러갈 거예요.”
여인의 위로 한마디에 기란은 마치 신에게 눈물을 허락받기라도 한 것처럼 더 서럽게 울었다.
“…….”
지금 여기에 선 누구도 그녀에게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기란은 눈물샘이 동이 나 말라 버릴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다 어느 순간 기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신우 씨.”
스르륵, 맥없이 쓰러지는 기란을 붙잡아 달라고 신우를 불렀지만 기란을 받아 안은 건 덕원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기란이 우는 내내 기란의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같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였다.
“따라오십시오.”
덕원이 기란을 안고 앞장서 가는 모습에 주희는 잠시 신우와 눈을 마주쳤다.
“정말 없어요. 어떡하죠?”
주희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따라가 보자.”
* * *
“이거 생각보다 작업이 더디겠는데요. 제토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릴 거 같습니다.”
발굴 현장팀을 이끌고 있는 임 팀장이 이 박사를 보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게. 그렇게 많이 쌓인 걸 보면 일반적으로 쌓인 것 같진 않고, 그 옆 큰 산에 문제가 있었던 거겠지? 엄청난 물난리라든가, 토사 붕괴 같은. 그 흙을 다 걷어내려면 자네 말마따나 시간이 많이 걸리겠더군. 하지만 뭐 어떤가? 그 흙들 덕분에 일제강점기 때도 그 악랄한 놈들의 눈을 가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네. 그러니 우린 흙을 탓할 게 아니라 오히려 흙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의 소중한 유물들을 고이 지켜 줬으니 말이지.”
이 박사가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흥분해 말했다.
“박사님은 여전하시네요. 오랜만에 박사님과 함께 작업해서 좋긴 한데, 전 좀 걱정입니다. 이상하게 이번엔 한 소장님이 너무 조급하게 구셔서요. 김 이사님이 시굴 트렌치 할 때도 참석한 거 보셨죠? 영 낌새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주말에 이러고 있는 게 정상입니까?”
“아, 그 족제비같이 생긴 사람이 김 이사라고 했지. 뭐 자금을 그만큼 댔으니 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야 뭐, 발굴만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자네는 계속 집에 못 들어가면 좀 그렇겠군.”
“박사님이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따님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어련하시겠습니까.”
임 팀장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하하하, 봤나? 내 딸 예쁘지 않은가? 선녀도 내 딸처럼 예쁘진 않을 거라네.”
좁은 고고학계에서 이 박사의 팔불출 딸 사랑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평소엔 참 보기 좋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번 발굴 작업으로 마누라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 박사의 헤벌쭉 벌어지는 입이 그를 심통 나게 했다.
“딸을 그렇게 예뻐하시는데 시집이라도 가버리면 많이 아쉬우시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우리 주희는 시집 안 간다고 했네. 나도 시집보낼 마음 없고.”
헐. 약 오르라고 한 소리였는데, 이 박사는 일언지하에 딸 시집보내는 건 안중에도 없단다.
문득 이 박사의 딸 옆에 마치 기사처럼 서 있던 한 남자가 생각났지만 아무리 비약해도 그건 아닐 거라는 생각에 말문을 닫았다.
한성그룹의 신임 회장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라니, 상상 자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저 장소를 파보자고 제안한 사람이 누구지? 육안으론 전혀 식별이 안 되는데 딱 짚어서 저곳을 파자고 한 사람이 누구야?”
“네? 박사님이 파라고 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전 근태가 파야 될 장소가 표기된 지도를 가져다주기에 박사님이 표기해 주신 줄 알았는데요.”
“무슨 소리야? 고고학에 어설픈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장소가 아니라 가장 먼저 마을 어귀를 파자고 했겠지. 그쪽은 손을 대도 나중에나 댔을걸? 내가 숙소에 잠시 다녀온 사이 그곳을 파놓은 거였다고. 물론, 결국엔 더 잘되긴 했지만 말이야. 그 지도에 표기한 거 누군지 알아봐. 발굴 보고서에 이름을 대문짝만 하게 넣어주게. 완전 신의 손을 가졌지 뭔가. 하하하. 축복받은 손이야.”
이 박사는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와 은제 방울의 발굴에 마냥 기뻐하며 대수롭지 않게 하하 웃어넘기고 있었지만 임 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누가?’
근태가 가져다준 지도는 분명 그들이 며칠 동안이나 보며 체크하던 지도였고, 그 지도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장난으로 체크를 한 거였으면 어쩔 뻔했는지. 운이 좋아 유물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발굴 계획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보다 굴착기 기사는 언제 오는 거지?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박사님, 아직 브리핑도 시작 안했습니다. 팀들도 안 왔고요. 작업 시작은 더 나중입니다.”
“늦어, 늦어.”
일분일초라도 현장에 빨리 가고 싶은 듯 조급증이 난 이 박사가 브리핑장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어? 저분이 왜? 아직 서울 안 올라가셨나?”
임 팀장이 브리핑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김 이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여, 임 팀장님. 주말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제 오후부터 안 보이시기에 서울 올라가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러려고 했는데, 한 소장님이 내려오신대서 뵙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보다 이 박사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업계에서 금손으로 유명하시던데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은제 방울이 단순한 방울이 아니라 무구로 보인다면서요? 그것도 ‘거북아 거북아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의 건국신화를 뒷받침하는 것 같은 여섯 개의 방울에 여섯 가지 정교한 문양이 들어가 있는 무구요. 고고학적 가치로 어마어마하다면서요?”
“그 이야긴 도대체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밖으로 말이 나가지 않게 하라고 했는데.”
“제가 바깥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긴 하죠. 하지만 아직은 그런 얘기가 나가지 않게 조심해 주십시오. 확실한 건 연구소에 보내 놓은 분석 결과가 나와 봐야 아니까요. 저희도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운이 좋아 인골이라도 나와 주면 더 좋고요.”
“박사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무척 기대됩니다.”
“같이 가실 겁니까? 오늘은 제토 작업만 할 거라 유물을 보시긴 힘들 텐데요?”
“저야 뭐, 발굴 현장 분위기를 보러 가는 거죠. 역사를 하나하나 캐낸다 생각하면 왠지 심장이 뜨끈해지는 것 같아서요.”
“김 이사님은 문화재를 진심으로 좋아하시는군요. 그런 분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현장에 자주 놀러 오십시오.”
이 박사와 김 이사가 주고받는 말을 임 팀장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지켜봤다.
김 이사의 입에 발린 말이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김 이사가 종종 발굴 현장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발굴 초기에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발굴 거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나타나 유물만 스윽 확인하고 가곤 했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역사가 어떻고 심장이 어떻고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자금 지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만 아니었다면 당장 내쫓고 싶었다.
진심으로 고고학밖에 모르는 이 박사에게 저런 식으로 사기 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 이사님, 여기 앉으시지요. 다들 들어오고 있는 걸 보니 곧 브리핑 시작될 것 같습니다.”
제일 앞장서 들어오고 있는 학예사 근태의 뒤를 이어 다른 팀들도 다 같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게 보여 이 박사의 자리와는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김 이사에게 권했다.
* * *
크릭, 드드드, 그그긍, 지이잉!
암석을 깨고 흙을 파내는 굴착기 소리가 산등성이 전체를 울려댔다.
“다행히 아직 땅이 얼진 않았는데 암석이 많아서 작업이 영 까다롭네요.”
굴착기 소리가 시끄러워 임 팀장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이 박사에게 말했다.
“그러게. 굴착기가 한 대만 더 있었으면 좋겠군. 저거 한 대 가지고 언제 다 파내나.”
이 박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크게 말씀해 주세요. 잘 안 들립니다.”
“굴착기 기사한테 제발 저기다 흙 쌓지 말고 저쪽으로 치우라고 하라고. 저긴 발굴 들어가야 하는 장소라고!”
“알겠습니다.”
이 박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못마땅해하며 소리치듯 말하자 임 팀장이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제 기사님, 임 팀장입니다. 그쪽에 흙 쌓지 마시고 거기 큰 나무 뒤쪽으로 쌓아 주십시오.”
-뭐? 나무 뒤쪽으로 쌓으려면 시야가 가려져서 일이 더 더뎌진다고!
굴착기 기사의 고함 소리가 무전기를 뚫고 크게 들렸다.
임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이쪽 세계는 곱게 얘기해선 다들 들어먹질 않는다.
기사가 나이가 좀 있어 대우를 해주려 했더니, 아무리 작업이 까다로워도 그렇지 팀장 머리 꼭대기로 올라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더뎌도 되니 나무 뒤쪽에 쌓으라고요! 지금 그 자린 발굴 들어가야 하는 자리라서 두 번 일하게 된단 말입니다!”
임 팀장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무전기 저편에서 쓰벌쓰벌 욕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굴착기의 흙은 곧 임 팀장이 요구한 장소에 후두둑 뿌려지기 시작했다.
싸움이 나도 일만 똑바로 진행되면 별 문제 될 게 없다는 주의인 이 박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주변을 한 번 더 살필 때였다.
“어? 주희 아냐? 주희야! 여기다, 여기!”
이 박사는 주희를 보자마자 체면도 잊고 크게 소리 질러 불렀다.
“박사님, 그만 좀 하십시오. 다 쳐다봅니다.”
임 팀장이 옆구리를 쿡 찔러도 이 박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박사의 딸과 같이 올라오고 있는 훤칠한 키의 남자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같이 붙어 다니네.”
둘의 관계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 박사가 몇 년 만의 부녀 상봉이라도 하듯 와락 딸을 끌어안는 걸 보고 작은 의문 따위는 저만치 밀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헐, 진정 대단한 딸이 아닐 수 없다. 저런 흙투성이로 끌어안는데도 싫다고 밀어내지 않으니 말이다.
살짝 이 박사가 부러워졌다.
“어서 오십시오, 박 회장님. 김 이사님 만나러 오신 건가요? 그러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읍에 볼일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김 이사님요? 아닙니다. 김 이사님이 여기 계셨군요.”
“김 이사님이 이번 발굴엔 더 관심이 많으신지 어제 시굴 현장에도 오셨습니다. 저희로선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음료라도 한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잠시만 보고 내려갈 생각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우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이 박사와 주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금 신우의 귀엔 김 이사 따위의 얘기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하하하, 허허허, 주희에게 홀딱 빠진 것같이 굴고 있는 이 박사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질투가 나는 것도 같고, 부러운 것도 같은.
“아버지, 일 보세요. 전 잠깐 구경만 하다 내려갈게요. 나중에 숙소로 찾아뵐게요.”
임시 천막이 쳐져 있는 곳에서 큰 소리로 임 팀장과 이 박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주희가 슬쩍 아버지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 그럴래? 연구소에서 사람이 온 걸 보니 어제 보낸 유물 결과가 나온 것 같아서 가봐야 할 것 같다. 저쪽 근처는 작업 중이라 위험하니 가까이 가지 말고 이 부근에서 구경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걱정 마시고 어서 가보세요.”
“그럼, 박 회장님도 구경하시다 가십시오. 저흰 바빠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박사님, 어서요.”
임 팀장이 이 박사의 팔을 끌다시피 해 임시 천막이 쳐진 곳으로 사라졌다.
“정말 다 하고 있네.”
주희가 임 팀장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뭘 다 하고 있다는 거지?”
주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신우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배지요. 임 팀장님도 그렇고, 아까 올라오면서 보니 일하는 사람들도 다 꽂고 있었어요.”
“한 문화재연구소 배지?”
“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주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신우의 말에 한동안 빤히 그를 쳐다만 봤다.
신우는 그게 왜 문제가 되냐, 묻는 게 아니라 먼저 그녀의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그다음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주희는 왠지 기분이 좋아 빙긋 웃어 보였다.
“왜 웃는 거지?”
“그냥요. 사실 똑같은 배지, 소정이 그렇게 만든 아저씨도 가지고 있었거든요. 마지막 날에도요.”
“그러고 보니 아파트 주민들이 수군거리던 연구소가 한 문화재연구소였군.”
신우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만 시선을 끌어서 보게 되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제 노파심이에요. 그런데 아주머니 말로는 어제 거의 하루 종일 이곳에 있었다고 했는데, 소정인 이곳에도 없는 것 같네요. 응산 씨도 나중에 이쪽으로 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이 근처를 좀 더 돌아봐요.”
“바닥이 영 고르지 않은데, 괜찮겠어? 내가 안고…….”
“괜찮아요. 우, 운동화 신었는걸요.”
신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아 그의 말을 얼른 중간에서 잘랐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아버지의 팀원들 앞에서 안겨 다녔다가 당장 아버지의 귀에 얘기가 들어가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차사는 아직도 안 보이는 거야?”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또 차사를 트집 잡았다.
신우는 이상할 정도로 신참차사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네. 아직……?”
신우 앞에서 차사 얘기는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짧게 답하며 시선을 돌릴 때였다.
산등성이 아래에서 한 중년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고, 그 남자의 등에 아이의 영인 듯한 영 하나가 딱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주희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도 소정의 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엔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전속력으로 소정을 향해 달렸다.
그때였다.
인부들 사이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큰 소란이 일었다.
“어? 어? 저 굴착기 왜 저래? 어, 어? 허억! 사, 사람 있어요. 멈춰요! 멈춰! 기사님! 기사님!”
그그긍! 끼이익!
신우는 주희가 말없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 나가기에 처음엔 누구 아는 사람을 만난 줄 알았다.
사람들의 다급한 고함 소리를 듣고야 주희가 달려가는 방향을 보니 근처의 굴착기가 끼긱대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신우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지만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으아악!”
비명은 자신의 앞에 웬 여인 하나가 달려온 것을 보고 의아해하던 김 이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피해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 두 눈만 질끈 감는 김 이사였다.
후두둑! 텅! 쾅!
흙과 날카로운 돌들이 가득 든 굴착기 삽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으악! 사람이……. 미친! 빨리 기사 끌어내려!”
인부들의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김 이사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신우 님!”
조금 늦게 도착한 응산이 놀라 다시 끼긱 소리를 내며 움직이려는 굴착기의 기사에게 달려가 강제로 창문을 깨고 기사를 끌어내려 굴착기를 멈췄다. 그리곤 굴착기 기사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신우에게로 달려갔다.
응산은 본 것이다. 굴착기의 거대한 삽이 김 이사를 밀치고 주희를 감싸 안은 신우에게 정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그걸 맞았으면 신우의 뼈가 부러지고 살이 으깨졌을 게 분명했다.
“시, 신우 씨…….”
신우는 주희의 얼어붙은 목소리가 들리고야 정신이 들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신우의 목소리도 얼어붙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굴착기 삽을 쳐내고 그녀를 품에 안긴 했지만 한꺼번에 쏟아지는 흙과 돌들을 다 막아낼 순 없었던 것이다.
휙, 주희를 품에서 떼어내 살펴보니 그녀의 몸 군데군데 흙투성이였다. 돌이 스쳤는지 이마에 핏자국도 보였다.
“이마가……. 다른 데는? 다른 데는 괜찮아?”
“나, 나는 괜찮아요……. 신우 씨…… 피가……. 어, 어디 봐요.”
그의 오른팔을 향해 손을 내미는 주희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주희의 손이 닿고야 팔의 아픔이 느껴졌다. 코트 아래로 제법 많은 양의 피가 주르륵 흘러 손등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신우는 아픔보다 들켜선 안 되는 한 가지가 떠올라 주희의 손을 떨치고 팔을 등 뒤로 감췄다.
“괜찮아. 그냥 살짝 긁혔을 뿐이야.”
생각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나가 버렸다.
주희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고 신우는 속으로 욕을 뱉어냈다.
“신우 님!”
응산이 미친 듯이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는 것을 보고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응산! 건드리지 마.”
신우가 차갑게 이름을 외치는 순간 응산이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나직하게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목소리엔 차가운 한기를 넘어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팔이…….”
“괜찮다. 그냥 살짝 긁혔을 뿐이다.”
신우가 응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번 더 경고를 담은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응산의 눈엔 흘러내린 피의 양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안 돼요, 신우 씨. 치료를 해야 해요. 병원부터, 병원부터 가요. 제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데 옆에서 주희가 넋이 나간 얼굴로 신우의 다른 팔을 붙들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미친! 제 기사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 괜찮습니까?”
“주희야! 주희야!”
사람들까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박사가 밖의 소란에 놀라 기겁하며 뛰어왔다.
“응산, 장소를 찾아.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치료해야 해.”
신우가 응산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응산은 그제야 신우가 치료를 받겠다는 말로 들려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단 그의 상처를 봐야 했다.
“여기 구급약이나 뭐 그런 거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저기 천막 안에. 하지만 병원에 가셔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저 천막을 잠시 빌리겠습니다. 저 굴착기 기사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놔 주십시오. 주희 님은 저 아이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잘 잡아 두십시오.”
응산의 눈에도 아이가 보였다.
책임자에게 기사를 잡아 놓으라 말한 응산이 주희에게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하지만 주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주희야, 괜찮아? 어, 자네, 그 팔은…….”
이 박사도 신우의 손등에 묻은 피를 보고는 흠칫 놀라 숨을 삼켰다.
“괜찮습니다. 구급상자가 있다니 잠시 상처를 보고 오겠습니다. 주희 씨 괜찮은지 한번 봐주십시오. 저 사람도요.”
신우가 주희를 부탁하고 돌아서다 아직도 넋이 나간 채 퍼질러 앉아 있는 김 이사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응산의 말대로라면 이 자리에 아이의 영이 있다. 주희가 달려간 곳은 김 이사가 있는 곳이었고. 굴착기의 움직임도 이상했지만 아이의 영과 김 이사가 동시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더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지. 얼른 들어가서 살펴보게.”
신우는 응산과 함께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코트 벗으십시오. 상처를 보겠습니다.”
“됐어. 안 아파. 손등의 피나 닦을 수 있게 휴지라도 가져다줘.”
“안 됩니다. 상처를 봐야겠습니다.”
“윽, 뭐 하는 짓이야!”
신우가 반항했지만 응산이 힘을 동원해 강제로 신우의 코트를 벗겨냈다.
셔츠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신우의 팔을 걷어 올린 순간, 응산은 제 눈을 의심하며 돌처럼 굳어졌다.
“그러니까 치료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도깨비 주제에 뭘 놀라고 있어. 피 닦을 거나 가져와.”
신우가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신우의 명령에도 응산의 얼어붙은 시선은 신우의 팔에만 머물러 있었다.
상처가 없었다. 분명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졌을 만한 양의 피를 흘렸는데 지금 신우의 팔엔 상처가 없었다.
염라대왕이 맡기고 가긴 했으나 한 번도 신우가 인간임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신우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깨비는 아니다. 도깨비였으면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귀신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신의 반열에 있는 자일 테고, 염라대왕이 데려왔으니 명부신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명부신을 차사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또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 신우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건가?
“머리 굴리지 마. 내가 어떤 존재이든 넌 나와 계약된 도깨비일 뿐이다. 그렇지 않아?”
신우가 피를 아무렇게나 닦아내며 시큰둥하게 결론 내렸다.
마치 그의 복잡한 머릿속을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도깨비의 계약자.
그렇다. 염라대왕의 부탁이든, 특이한 인간이든, 명부신이든 일단 신우와 그는 계약을 맺었고, 그 계약대로 신우를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힐끗 보니 옆에 구급상자가 보여 구급상자를 열었다.
“필요 없다니까.”
“신우 님은 필요 없으시겠지만 밖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려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 앉으시고 팔, 이리 주십시오.”
응산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지금 상황을 설명하자 신우가 말없이 의자에 앉아 팔을 내밀었다.
“경호가 필요 없다고 하신 게 이런 것 때문이었군요.”
팔에 남은 피를 닦아내고 보니 신우의 팔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그가 들어 알고 있는 신의 회복력을 넘어서는 회복력이었다.
하지만 신우가 정말 신이라면 애초에 이렇게 다치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다쳤다는 건, 신의 다른 능력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귀신도 차사도 보지 못하니 아마 자신의 짐작이 맞을 터였다.
신의 능력은 없으면서 몸의 회복력만 신일 수 있는 건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건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응산은 머릿속의 의문을 떨쳐내기 위해 신우의 팔에 붕대를 둘둘 감았다.
제 생각에만 빠져 붕대를 감다 보니 너무 두툼하게 감은 것 같다 생각할 때였다.
천막을 걷으며 주희가 들어서고 있었다.
“괜찮……아요? 많이…… 다쳤군요.”
응산이 팔 전체를 붕대로 둘둘 말아 놓은 탓에 누가 보든 엄청난 중상 환자처럼 보였다.
주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주희가 가만히 손을 뻗더니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레 팔을 쓸었다.
애처로움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지만 신우는 그 눈빛이 오롯이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걱정하지 마. 네가 옆에 있으니 금방 나을 거야.”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슥, 힘든 척 머리를 그녀의 품에 기댔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머리를 꼭 안아 주며 안쓰러운 듯 가만히 만져 주었다.
그녀의 품 안은 너무 달콤하고 향긋했다.
이대로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까칠한 응산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깼다.
“밖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저기, 아이도 찾은 것 같으니 얘기는 되도록 내려가서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이가, 여기 있어?”
“네. 제가 어디 가지 말고 따라오라고 했어요.”
“그래. 그럼, 김 이사를 따라다닌 게 맞는지 물어봐. 맞으면 왜 따라 다닌 건지도.”
아이가 있다는 말에 신우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볼 수 없지만 허공을 쳐다보며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서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곱게 차사 말이나 잘 들었으면 이런 사달이 나지도 않았을 거라는 까칠한 감정이 섞인 눈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아이가 무서워해요.”
주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신우의 얼굴을 다시 자신의 가슴에 품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신우는 그런 주희의 손길이 너무 따스해 아이를 다그치는 것도 잊었다.
“제가 이미 물어봤어요. 소정이가 가해자와 김 이사라는 분이 몇 번 만나는 걸 본 적 있대요. 그런데 여기 와서 우연히 또 그분을 보게 되니 걱정이 앞섰나 봐요. 혹시 엄마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돼서 계속 따라다녔대요.”
“김 이사와 만난 적이 있다고? 김 이사도 그 일에 가담했다는 거야?”
신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주희에게 물었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그때도, 이번에도요. 물론 좋은 일도 아닌 거 같지만요.”
“무슨 말이지?”
“음, 김 이사님이라는 분 아무래도 뒷거래를 하는 것 같아요. 문화재 발굴 끝나고 정식으로 등재되기 전에 몇 가지씩 빼돌리는 수법으로요.”
“그건, 도굴이잖아.”
사람이 아닌 귀신에게 물어 고자질하는 거 같아 난감해하며 대답을 하는데 신우가 단호하게 도굴이라는 결론을 내놨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증거가 없어요. 여기서 말을 꺼내 봤자 우리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예요.”
귀신이 봤다는 말을 할 순 없으니 김 이사의 행동이 도둑질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알아, 그 정도는. 그만 내려가지. 아이는 어디쯤 있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어깨에 코트를 두른 신우가 뜬금없이 아이의 영이 있는 위치를 물었다.
“제 오른쪽 옆에요.”
“너, 한눈팔 생각 말고 그 언니 옆에 딱 붙어 있어. 차사에게 듣지 못했나 본데, 제때 명부에 들지 못하면 너도 예외 없이 소멸당할 거야. 아무리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도 말이지. 어떻게 명부신들의 마음을 샀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대우면 넌 네가 원하는 곳에 환생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 네 복을 네 발로 차지 마.”
분명 보이지 않을 텐데 신우는 마치 소정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주희의 옆에 서서 가만히 듣고 있던 소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환생이면 나…… 나 엄마 딸로 다시 올 수 있는 거예요?』
“아니, 그건 명부신들의 영역이라 알 수가…….”
주희가 당황해 신우를 살짝 노려봤다. 환생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원하는 곳에 환생할 수 있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일주일 만에 인간 세상으로 다시 내려보내는 특별대우라면 충분히 가능해. 보통 인간은 사십구 일을 재판받고도 인간 세상의 빛을 다시 구경하기 힘드니까. 물론, 다 떠나서 네 어머니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만 가능하겠지만.”
도대체 저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주희는 당황해 소정을 내려다봤다.
“가자. 네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아무래도 네 담당 차사는 길을 잘 못 찾는 것 같으니 아주 잘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하거든.”
신참차사에 대한 감정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낸 신우가 천막을 걷고 나갔다.
옆에 있던 소정이 신우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가고 있는 모습에 주희가 당황했지만 서둘러 신우의 뒤를 따랐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난 기억에 없다고! 내 기사 경력이 얼만데 사람한테……. 이 새끼, 너 거짓말하는 거지? 이것들이! 놔! 이거 놓으라고!”
굴착기 기사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악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나오는 걸 본 응산이 신우의 곁으로 다가섰다.
“본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계속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단 경찰을 불렀습니다. 김 이사님께 같이 조사받으시라고 부탁했고요. 저흰 병원 간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아이 일이 먼저인 거 같아서요.”
“그래.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확실하게 알아봐. 왜 그랬는지. 병이라면 무슨 병인지도.”
굴착기 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방금 전 주희의 위험했던 상황이 다시 떠올라 저절로 싸늘한 목소리가 나갔다.
가까이 가면 목을 졸라 버릴 것 같아 애써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 시선 끝에 굴착기 기사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김 이사가 보였다.
할아버지를 생각해 항상 여지를 남겨두고 웬만하면 넘어갔었는데 김 이사는 할아버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욕심이 많고, 교활하고, 겁이 많은 인물인 것 같았다.
김 이사에 대해선 다시 시간을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신우의 팔에 감긴 붕대 때문인지 아무도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이 박사마저 주희를 따라가서 잘 간호해 주라고 등을 떠밀었다.
인부들의 얘기로 주희가 다칠 뻔한 걸 신우가 구해 줬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것이다.
신우 일행이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사람들 무리에 숨어 살피는 한 학예사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어떻게 천계의 기운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넌 인간이구나.’
신우의 팔에 둘둘 감긴 붕대를 쳐다보는, 인간의 몸에 빙의한 영묵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그런데 점점 잠잠해지던 굴착기 기사가 있는 곳에서 갑자기 다시 소란이 일어 고개를 돌렸다.
“잠깐! 아니, 그게 왜? 왜 이 사람이 이 배지를 달고 있는 겁니까? 이 사람도 한 문화재연구소 소속입니까?”
김 이사가 신경질적으로 빽 소리치며 따져 묻고 있는 장면에서 영묵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놈의 쓸모도 이제 다 됐구나. 이 발굴만 끝나면 너도 끝이다.’
명부신들의 치부의 땅인 이곳을 찾기 위해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명부에서도 원로들만 알고 있다던 땅.
지도를 얻지 못했으면 영원히 찾지 못했을 곳이다.
한 무녀를 두고 두 명의 명부신이 벌인 사랑과 시기와 질투로 몸살을 앓았던 땅.
산이 무너지고 땅이 뒤틀린 무녀의 무덤.
명부의 신물을 훔쳐서라도 사랑을 얻고자 했던 선대 명부신의 탐욕이 천오백 년의 차원을 넘어 그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지도에 표시된 표기법이 명부의 표기법임을 안 순간 느꼈던 희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제, 방울 무구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희열에 들떠 진한 피의 향연을 즐겼다.
살점이 분리되는 것 같은 고통도 마치 곧 다가올 전력 회복의 전조 증상처럼 느껴졌다.
신물을 가진 자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상자.
이제 조금만 더.
원래의 힘만 회복하면 더 이상 들킬까 염려하며 인간의 몸속에 신체를 가두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한 명부신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않는 한 누구도 그의 힘을 능가할 명부신은 없다.
얼마든지 그들을 농락할 수 있었다.
영묵의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희열에 들뜬 살기도 짙어져 갈 때였다.
“우와, 진한 씨. 그 팔에 그건 뭐죠? 문신?”
옆에서 갑자기 들린 말에 학예사는 자신의 오른팔 소매가 걷어 올려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닙니다. 그냥 스티거 같은 겁니다. 아, 전 천막에 뭘 하나 놔두고 와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옷을 끌어 내리며 천막으로 향하는 영묵의 걸음이 거칠었다.
‘젠장, 그 어린놈의 힘이 이런 식으로 남을 줄이야.’
염라의 아들놈이 쏘아 보낸 힘을 단 한 방 막아냈을 뿐이다. 그런데 신체에 손상을 입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술법으로 빙의를 하는 인간들의 몸에도 이 검은 자국이 뚜렷이 나타날 정도로 힘이 강력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힘을 회복해도 성가신 놈이 될 뻔했는데, 미리 싹을 제거하길 잘했다.
이제 더 이상 죽은 놈은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발굴에만 집중할 때였다.
학예사가 천막으로 들어섰고, 천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예사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 * *
소정의 집으로 가기 위해 주희 일행이 마을 인근을 지날 때였다.
앞서 가던 응산이 갑자기 긴장하며 멈춰 섰다.
비쩍 마른 몸에 가면같이 딱딱한 얼굴을 한 차사.
“차사……. 제가 기다리는 차사 님이 아니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대신 오신 거예요?”
주희가 신참차사인 줄 알고 반갑게 부르려다 신참차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서늘하게 뿜어져 나오는 시린 기에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아니다.』
강림차사가 신우의 곁에 가만히 서 있는 어린 영을 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막내가 판관들에게 문책을 당한 이유인 영인 것 같았다. 다행히 찾은 모양이다.
도깨비까지 더해진 이 이상한 조합의 일행에 의해.
일행 중에서 어젯밤만 해도 멀쩡하던 팔을 그새 부러뜨렸는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사내가 다시 봐도 시선을 끌었다.
『다친 건가?』
무심결에 묻고 말았다.
“네. 저기,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주희 님,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사의 말에 시시콜콜 대답하고 있는 주희가 당혹스러웠는지 응산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해 주희가 말을 흐렸다. 스치기만 해도 얼음이 꽝꽝 얼어 버릴 것 같은 저 차사가 신우를 걱정할 이유가 없어서.
더군다나 어젯밤에 얼마나 살벌한 분위기였는데, 걱정이라니.
그 예로 차사의 가면 같은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 것도 같다. 응산의 황당한 표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차사가 보이지 않아서인지 신우만이 무표정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이를 대신 데려가려고 오신 게 아니……. 아, 혹시 어제 그 트럭 기사 아저씨 영도 잘못된 거예요?”
정말 여기엔 왜 온 걸까? 생각하다 갑자기 트럭 기사의 영이 생각나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차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 신우가 거칠게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가자. 영을 놓치는 실수는 아무 차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강림차사가 영을 놓쳤다는 건 농담으로라도 할 수 없는 말이야. 아무래도 저쪽 일로 온 거 같으니 우린 그만 가자고.”
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서 있는 옆집에서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는 안타까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잡아끄는 신우의 손길에 끌려 일행 모두 소정의 집으로 향했을 때였다.
팟!
강림차사가 다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가로막은 것뿐만 아니라 푸르스름한 연기를 뿜어내는 칼날을 신우의 목에 겨눈 채 서슬 퍼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무슨 짓이에요!”
긴장한 주희가 움직이지 못하게 신우를 꽉 붙들었고, 놀란 응산이 도깨비검을 빼들었다.
“칼, 치우십시오. 저희는 차사 님에게 위해를 가한 적이 없습니다.”
『나에게 위해를 가한 적은 없으나 난 알아야겠다. 이 사내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난 내 이름을 말한 기억이 없다.』
“차사 님 이름을…….”
강림의 싸늘한 말에 응산이 숨을 삼키며 신우를 돌아봤다.
정말 어떻게 차사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겨우 이름 하나에 흥분하시다니, 강림차사 님의 이름이 아깝습니다. 일곱째 자리를 그런 덜떨어진 녀석이 꿰찬 것도 혹 강림차사 님이 물렁해진 탓은 아닙니까?”
“시, 신우 님. 제발 입 다무십시오.”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도 그렇지, 차사를 대놓고 비꼬고 헐뜯다니.
응산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점점 거대해져 가는 차사의 기세에 압도당해 갔다.
맙소사.
강림차사에 대한 도깨비들 사이의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누가 강림차사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차사가 진짜 강림차사라는 데 손모가지를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염라대왕의 첫 번째 제자.
그런데 왜 염라대왕이 맡긴 신우를 그 제자가 모르는 것일까.
염라대왕이 지키라고 한 건, 설마 첫 번째 제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던가.
모골이 송연해진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일이나 똑바로 하시지요. 멍청이 차사처럼 넋 빼고 있다가 영을 놓치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요.”
신우의 짜증 섞인 말에 응산은 속으로 기함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먹고 또 차사를 도발하다니. 그냥 죽고 싶어 스스로 칼에 목을 내미는 것 같았다.
아니,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자살하려 들었다.
칼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저 죽는 줄도 모르고 슥 앞으로 나서고 있는 게 아닌가.
“신우 님!”
“신우 씨!”
응산과 주희가 놀라 신우를 잡아당기는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팟!
그토록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우던 칼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응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앞장서. 아이를 데려다줘야 할 거 아냐.”
신우가 투덜대며 휘적휘적 걸어갔다.
신우는 응산과 주희가 잔뜩 긴장한 것으로 보아 칼이 겨눠진 걸 알았다.
하지만 강림차사였기에 실제로 칼을 휘두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았다.
‘누구한테 투정이야. 왜? 찾지 않았다고 트집이라도 잡고 싶었던 거야?’
아직도 명부에 감정이 남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짜증나게 했다.
입 안에 쓴물이 고이는 것같이 씁쓸했지만 건조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 가서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미 잊힌 존재를 억지로 기억하게 하는 건 서로에게 아픔일 뿐이니까요.”
신우가 혼잣말하듯 남긴 말에 강림차사는 그 자리에 화석이 된 듯 굳어졌다.
『넌, 넌…….』
싸울 때조차 평온을 유지하던 강림차사의 내면에 거센 파도가 일기 시작했고, 가면 같았던 얼굴에도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율이구나.’
신우가 독백하듯 한 말은 그가 무율에게 해준 말이었다.
어머니에 대해 물으려는 무율을 말리기 위해 했던 말이다.
[이미 잊힌 존재를 억지로 기억하게 하지 마라. 그건 너에게도, 대왕에게도 아픔이다.]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건지.
왜 무율의 몸에서 천계의 기운이 느껴지는지 몰라도 좋았다.
명부에서 갑자기 느껴지던 무율의 기에 뭔가 잘못됐구나 느낀 것도 잠시, 인간계로 간 것으로 모자라 완전히 기가 소멸해 버렸을 때의 그 절망감이란 당해 보지 않은 이는 모를 것이다.
이상한 건 스승님이었다. 아들을 찾아 미친 듯이 인간 세상을 뒤지고 다닌 건 겨우 하루뿐이었다.
그 이후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씻은 듯이 잊은 것처럼 그렇게 평소의 염라대왕으로 돌아와 있었다.
명부신들의 성정이 원래 차갑다는 건 알았지만 스승님이 그토록 차가운 성정을 지닌 분이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
비록 몸에서 신의 기운이라곤 느껴지지 않고, 신의 눈도 잃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