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10/20)

8장

주변이 어둠으로 물든 거리, 이가서림의 간판이 보이는 큰길 앞에 고급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먼저 내린 주희가 운전석에서 내려 다가오는 신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현와원의 하루는 예정보다 훨씬 더 길어져 버렸다.

옷이 드라이가 되어 돌아올 동안 기다리느라 저녁까지 먹게 됐던 것이다.

정말이지 힘겨운 하루였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런데 신은, 오늘 하루 그녀의 혼을 아주 탈탈 털어 버릴 심산인가 보다.

낮에 그녀의 심장을 툭 떨어뜨렸던 차사가 가게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뱅뱅 맴돌고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배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신우를 차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인사했다.

“왜 딴소리지? 방금 전엔 차 한잔 마시고 가도 된다며?”

“아니요, 오늘은 그냥 가세요! 그게, 제가 좀 많이 피곤해요.”

그들의 기척 때문에 차사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으니 왠지 더 다급해져 신경질적으로 신우를 재촉했다.

“왜 그러지? 설마, 아까 그 차사는 아니겠지.”

그녀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신우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넘겨짚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피곤해서 그래요. 가세요.”

차사의 등장에 가슴이 두근댔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는 차사를 보지 못하니 잘 다독거리면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눈치가 빨랐다.

“거짓말.”

쏘아보는 신우의 눈빛에 억지로 침착하려 애쓰던 주희의 표정이 무너졌다.

“현와원에서 나에게 했던 말도 거짓이었나? 널 데리러 온 게 아니라던 말, 거짓이었냐고.”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 거짓말하는 재주는 없는지 대답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아니면! 널 데리러 온 것도 아닌데 차사가 왜 또 여길 찾은 거냐고?”

신우가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그녀를 잡아채 뒤로 보냈다.

주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은 정말 차사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왜 매번 본인보다 그녀를 먼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주희가 잠시 차사도 잊고 멍하니 신우의 넓은 등만 바라볼 때였다.

『그러니까요! 제가 당신들을 데려가려고 온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잖습니까!』

팟!

차사가 신우의 코앞에 나타나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주희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차사는 뭐 이런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인간을 봤나, 하는 눈으로 신우를 요리조리 노려보고 있었다.

“그 말, 정말이에요? 이 사람을 데리러 온 게 아닌 거?”

차사의 매서운 눈매 따윈 전혀 무섭지 않았다.

신우의 팔을 잡아 내리며 차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그, 그렇다니까요.』

그녀의 기세에 차사가 움찔 뒤로 물러나며 똑같은 대답을 했다.

차사의 대답에 긴장감으로 뻣뻣했던 주희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럼 왜 온 건데요?”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기가 무섭게 뭔지 모르게 화가 치솟아 까칠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게, 부탁이 있어서요. 그런데 이놈 보내고 얘기하면 안 됩니까?』

말을 똑바로 전하지 않은 것만 해도 미운털이 단단히 박힐 판에 부탁이 있다면서 뻔뻔하게 조건까지 다는 차사였다.

“차사가 뭐라고 하는 거지? 정말 널 데리러 온 게 맞아?”

아무것도 듣기 싫으니 가라고 말하려는데 신우가 먼저 경계 태세를 취한 자세 그대로 그녀를 힐끗 돌아보며 묻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이, 불안한 눈동자가 얼마나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요. 나도, 당신도 데리러 온 거 아니래요.”

“수명부를 가져온 게 아니란 말이야?”

“네. 아니래요.”

“그럼 왜 온 거지? 요즘 차사직은 시간이 남아도나? 한가하게 놀러 다닐 시간까지 있게.”

주희의 대답을 재차 확인한 신우의 눈동자에 잠시 안도의 빛이 도는가 싶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했다.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들으란 듯 차사를 비꼬아 댔다.

갑자기 대기가 확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우 씨.”

그만하란 뜻에서 신우의 팔을 꽉 붙들며 조용히 이름을 불렀지만 신우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는 걸 보니 신참차사인 모양인데, 주희 씨에게 또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러 온 거라면 썩 꺼져.”

겁이 없는 건지, 감이 둔한 건지 신우는 차사의 약점까지 들춰내 축객령을 내렸다.

차사가 이번엔 정말로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 주희는 최대한 신우를 감싸며 차사의 가면 같은 허연 얼굴을 주시했다.

『……이놈, 뭡니까? 연차가 차지 않으면 현신을 하지 못하는 건 명부인들만 아는 사실인데 이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당신이 말한 겁니까?』

신우에게 차사의 뾰족한 검끝이 겨눠질 줄 알았더니 신우가 아니라 주희에게 잔뜩 골이 난 신경질적인 물음이 쏟아졌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차사를 상대로 거짓말입니까? 당신이 아니면 이놈이 어떻게 아냐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신우가 던진 말 한마디가 주희와 차사의 시빗거리를 불러일으켰다.

“뭘 대꾸하고 있어? 널 데리러 온 게 아니면 차사를 상대할 생각하지 마.”

신우가 단호하게 말하며 주희를 잡아끌어 이가서림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주희가 끌려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 차사의 당황해하는 모습이 잡혔다.

자존심 강해 보이던 차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신우 씨, 기다려요.”

“신경 꺼. 차사 정도면 아무리 신참차사라 해도 명부신의 반열에 올라 있다. 어떤 일이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 인간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얘기하고 있는 신우의 설명만 들으면 마치 명부에 살다 온 사람 같았다.

도대체 신들이나 아는 이런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걸까.

주희가 신기해하며 신우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은 신우에게 넋을 뺄 게 아니라 차사의 간절한 눈빛이 먼저인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있는 신우의 발길을 멈춰야 했다.

“그럼, 신우 씨 보내고 나서 얘기할 거예요.”

“너.”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곧바로 신우의 발길이 멈췄다.

주희를 돌아보는 신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날 찾아온 손님이에요.”

신우가 가고 나서 얘기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신우가 옆에 있어 주면 더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데도 믿음이 먼저 갔다.

“내 도움이 필요하대요. 신우 씨가 싫지 않다면 옆에 있을 때 듣고 싶어요.”

그녀가 담담하게 덧붙인 말에 신우의 얼굴에 매우 혼란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다 눈을 살짝 찌푸리고는 무슨 뜻이냐 묻고 있었지만, 주희는 모른 척 차사를 돌아봤다.

“그래서 차사 님 부탁이 뭐죠?”

주희의 옆에 호위기사처럼 버티고 선 신우의 모습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힐끗거리던 차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소정이 다시 사라졌습니다.』

차사가 툭 던진 한마디에 주희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차사 님 말이 이해가 안 가요. 소정인 차사 님이 직접 명부로 데려가셨잖아요. 데려간 지 일주일도 더 지났는데 이제 와서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소정이 본래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온 게 안타깝다며 판관께서 재판에 사흘의 말미를 주셨거든요. 당연히 담당인 제가 유소정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했고요. 분명 하루 종일 제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닌 걸 봤는데.』

“그런데요?”

『다른 일이 있어 잠시 다녀온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벌써 하루 반나절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가 인연이 있던 곳을 샅샅이 훑었는데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말입니다.』

“시간 안에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문책을…….』

“누가 당신 얘길 물었어요? 소정이가 어떻게 되냐고요!”

우물쭈물 대답하고 있는 차사를 쏘아보며 주희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러 버렸다.

주희의 사나운 기세에 놀란 차사가 흠칫했다. 신우도 항상 연약한 모습만 보이던 주희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기세에 의외라는 듯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

“사념만 남아 원귀가 되겠지. 환생도 승천도 못 하고 구천을 떠돌면서. 어떤 멍청한 차사 놈 때문에.”

대답은 놀라고 있는 차사가 아니라 주희의 말에만 집중하고 있던 신우의 입에서 나왔다.

그 모습이 얄미워 차사가 신우를 좌악 째려봤다.

『하지만 분명 제 어머니에게 착 달라붙어 다녔었다고요. 이렇게 말없이 사라질 리가 없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소정이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어떻게 해요.”

제 어미를 품에 안으려 헛손질을 하던 소정의 안타까운 모습이 다시 떠올라 주희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주희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신우의 기분도 가라앉았다.

멍청한 차사 같으니.

“영에게 감정 이입을 해선 안 된다는 걸 잊다니, 선임 차사가 누군지 모르지만 신참 교육을 발로 한 모양이군.”

멍청한 차사 때문에 주희가 마음고생을 하는 것 같아 신우가 비꼬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때였다.

주희의 눈치만 보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던 차사의 기세가 갑자기 바뀌었다.

순식간에 대기가 서늘해지고 주희가 막아설 틈도 없이 휙 신우의 목에 칼이 겨눠졌다.

“차사 님!”

『네놈 뭐냐! 네가 어떻게 차사령 제일 규칙을 알고 있는 거지? 넌 누구냐!』

차사의 말에 주희는 패닉에 빠졌다.

이게 무슨 말인지. 신우가 명부 세계, 그것도 차사령을 어떻게 안다는 걸까. 차사를 보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저 검부터 말려야 했다.

“칼 치워요. 이 사람은 정말 평범한 인간이라고요! 봐요, 지금도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걸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차사령을 알아요? 이 사람 말은 그냥 일반론이에요. 영의 안타까운 사연에 감정 이입을 하면 당연히 데려가기 힘들 테니까.”

『일반론이라고요? 인간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요?』

신우의 서늘한 시선이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말도 안 되는 변명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차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하지만 푸른 연기를 뿜고 있는 차사검은 치워지지 않고 있었다.

저 칼끝이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신우의 생기를 빼앗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요. 그러니 제발 그 칼 좀 치우라고요. 이 사람 다치게 하면 다시는 당신 일 돕지 않을 거예요.”

차사가 실수로라도 검을 잘못 다룰까 겁이 나 애걸과 협박이 뒤섞인 말로 조심조심 달랬다.

스르릉!

차사가 검을 검집으로 거두는 모습을 보고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건방진 인간입니다. 제가 아무리 신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염라대왕님의 일곱 번째 제자인데, 이따위 앞도 못 보는 인간한테 스승님을 욕보이는 얘길 듣다니요. 매우 불쾌합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런 인간 옆에 있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괜히 옆에 있다간 눈먼 칼에 맞는단 말입니다.』

차사가 신우의 말에 감정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이를 득득 가는 것 같은, 감정이 잔뜩 실린 격앙된 목소리로 투덜대고 있는 걸 보면.

차사의 집요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 자꾸만 신우를 향했지만 우선은 시퍼런 칼날이 치워진 것만 해도 안심이 됐다.

그보다 염라의 일곱 번째 제자라니.

“대왕님의 일곱 번째 제자시라니, 대단한 분이셨네요. 시간이 없다고 하셨죠? 소정이 찾으려면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죠?”

그녀가 천계에 있을 때 현학 스승님께 염라대왕의 제자는 여섯이라고 들었다.

자신이 인간계에 있는 잠깐 사이 새로 들인 제자라면 지금 눈앞의 차사는 정말 신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확인해 차사를 다시 발끈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대충 추켜세워 주고 신우에 대한 말은 못 들은 척 차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번번이 감사합니다. 생각해 봤는데, 소정 양이 사라질 이유는 한 가지뿐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위험해졌을 때요. 주희 님께서 소정 양 어머니 주변을 좀 살펴 주시면 일이 훨씬 빨리 해결될 것 같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렇겠네요. 어머니 일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였으니.”

차사의 의견에 머리를 끄덕이는데 이상하게 팔이 저릿할 정도로 아파 팔을 붙잡고 있는 신우를 올려다봤다.

언제부터 이런 표정이었던 걸까. 차사의 칼이 목을 겨누고 있을 때도 이런 표정은 아니었는데, 입술을 꾹 다물고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 신우의 얼굴은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놀라 신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설마, 제 일 하나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차사를 도울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의 지나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지금의 신우는 의도적으로 상대를 긁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표정을 살펴봐도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이놈, 혹시 내가 제 할아버지 데려간 걸 아는 겁니까?』

그녀만이 아니라 차사도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다짜고짜 검부터 뽑지는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신우의 코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어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차사를 보지도 못하는 신우가 어떻게 어떤 차사가 박 회장을 데리고 갔는지 안단 말인가.

그럼 왜?

의문이 풀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신우를 여기 있게 해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와 버리면 정말 차사의 눈먼 칼이 어디를 향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신우 씬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찾아 나서겠다는 말이야? 그때 어떤 꼴을 당했는지 벌써 잊었어?”

“잊지 않았어요. 잊지 않았으니까 찾아 나서려는 거예요.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소정이를 알아 버렸으니까요. 소정이가 원귀로 떠도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소정인, 꼭 좋은 곳으로 갔으면 해요.”

소정을 보내고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번엔 정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것만 같았다.

“소정이 어머니 계신 곳이 어디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큰거리며 아려와 신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차사에게 물었다.

“맘대로 해.”

차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신우가 시리도록 냉정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그리곤 타고 왔던 차를 향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주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오늘 알게 됐다. 신우가 첫 만남부터 왜 그렇게 낯익게 느껴졌었는지.

볼 때마다 그립고, 볼 때마다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그의 몸속에 불어넣은 자신의 기운 때문이란 걸.

그런데 지금, 사라지고 있는 신우의 뒷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너무도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부아아앙!

차에 오르고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시동을 걸자마자 곧장 출발해 버리는 신우의 차를 주희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우와, 저 싸가지 없는 놈 봐!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있는 대로 꼬장은 다 부리고 가네.』

차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신우의 차 뒤꽁무니를 매섭게 째려보며 어이없어했다.

처음부터 보내려고 했으니 차라리 잘된 거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몸은 따로 노는지 그녀의 시선은 신우가 사라진 휑한 도로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나며 이가서림의 문이 열렸다.

“아니,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야! 당장 도깨비길로 쳐들어가야, 어? 주인님! ……우와아아악!”

도 실장이 투덜투덜 혼잣말을 하며 밖을 내다보다 어둠 속에서 주희를 발견했다.

반갑게 주인님을 외치려다 문득 주희 옆에 서 있는 비쩍 마른 검은 옷의 사내를 보고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같이 놀라 괴성을 질렀다.

후다닥!

도 실장은 얼마나 놀랐는지 후다닥 이가서림 안으로 도망을 쳤다.

『뭐, 저런 방정맞은 도깨비가. 왜 저런 놈들과 계속 연을 맺고 사시는 겁니까? 아까 그놈도 그렇고.』

“별소릴 다 하시네요. 차사 손님도 받는데 도깨비가 대순가요? 쓸데없는 얘긴 그만하시고 장소나 얘기해 주세요.”

차사가 신우의 얘길 삐딱하게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모르게 톡 쏘며 까칠하게 대꾸했다.

『아니, 어떻게 차사와 도깨비를 비교하시…… 허억!』

차사가 기분 나쁘다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이가서림 안으로 다시 들어갔던 도 실장이 5초도 지나지 않아 튀어나오더니 차사의 머리와 어깨 위로 무언가를 마구 뿌려댔다.

차사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떨었다.

“후이이! 후이이! 망할 놈의 차사!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와! 저리 꺼져라, 꺼져!”

쏟아지는 팥과 소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처음 겪어보는 참담한 수모에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다음부턴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다.

죽이겠다 차사검을 빼들고 쫓아가는 차사와 도망치면서도 입을 나불거리는 입이 거친 도깨비의 추격전이 무시무시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났다.

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도 모르게 또 시선이 텅 빈 도로의 끝으로 향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는 한 사람의 흔적을 좇아 그녀의 피곤한 시선이 오래도록 도로 위에 머물렀다.

* * *

부아아앙!

무표정한 얼굴로 액셀을 밟아가는 신우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운 제자를 거두셨다.’

명부에 있을 때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리, 염라의 일곱 번째 제자.

주희의 입에서 덜떨어진 차사를 지칭해 ‘염라대왕님의 일곱 번째 제자’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신우의 모든 사고는 얼어 버렸다. 감정마저 그대로 말라 버렸다.

처음 모든 기억이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몸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당황스러웠고, 차사는커녕 잡귀 하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당황을 넘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의 혼란스러움은 길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기억과 현재의 몸 상태를 비추어 봤을 때, 명부에선 이미 그가 죽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유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의문 따윈 부러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도 정말로 몰랐을까’ 하는.

기억이 돌아온 이후 가슴 밑바닥에 꾹꾹 밟아두고 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제멋대로 기어 나왔다.

“알았으면 어떻고, 몰랐으면 어떻다는 거지? 난 이미 명부의 신이 아닌데.”

병신 같은 생각을 제어하기 위해 거칠게 혼잣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왜 찾지 않으셨을까’ 하는 마지막 의문만큼은 떠올리지 않기 위해 핸들을 더 꽉 틀어쥐고 액셀을 있는 힘껏 밟아댔다.

부아아아앙!

굉음을 내며 폭주해가는 거친 소리가 딱 그의 마음인 것 같았다.

주변의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속도 게이지가 올라가는 데 따라 모든 사물이 일직선으로 변해가게 달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현와원에 닿았다.

끼이이익!

탕!

거칠게 차 문을 열고 신우가 차에서 내렸다.

“다녀오셨……습니까.”

응산이 신우를 향해 인사를 하다 잠시 멈칫했다.

“차가 너무 느려 터졌어. 다른 걸 알아봐.”

신우는 저기압의 원인이 모두 느려 터진 차 탓이라며 짜증을 내고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응산은 힐끗, 신우가 타고 온 차를 봤다.

최근 새로 구입한 마이바흐.

비록 스포츠카는 아니었지만 최고속도 250km/h인 차였다.

한국에선 달릴 도로가 없을 정도로 빠른 차인데 느려 터졌다니.

주희를 배웅하고 오겠다며 나갈 때만 해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는 썼으나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그러면 그새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데.

응산은 신우가 나타났을 때부터 느껴지던 시선에 등이 따가웠지만 애써 무시하며 신우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신우가 지나간 자리 위의 가로등 센서등이 점멸되고야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응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팟, 검은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어느 길을 가다가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하고 평범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냥 우연히…….”

중년 남자의 시선이 방금 신우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우연이십니까?”

응산이 잠시 상대가 누군지도 잊은 채 무례하게 되물었다.

중년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이 응산을 돌아봤다.

첫 대면이 떠오른다.

신우가 현와원에 온 다음 날이었다.

정원사로 분하고 있던 그의 앞에 지금의 이 평범한 모습이 아닌 지극히 차갑고 날카로워 보이는 명부의 신 하나가 나타났다.

명부의 신이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 영문을 몰라 당황해하는데, 신은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마치 죽일까, 어쩔까 고민하는 것 같아 보였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를 발산하는 신.

신이 갑자기 허공에서 칼을 소환해냈다. 마치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는 듯.

그런데 맙소사, 그건 언월도였다. 명부의 신들 중에서도 당대엔 염라대왕만이 다룬다는 언월도.

칼등에 아수라의 형상이 새겨진 언월도가 그의 정수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냥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할 것 같아 도깨비검을 소환해냈다.

챙! 파지직!

예상대로 그의 도깨비검은 일합을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가고 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한 번만 더 내려치면 꼼짝없이 공기 중으로 소멸돼 버릴 그가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 물었다.

“괜찮은 기운을 가졌구나.”

그가 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염라대왕을 대면하고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형상과는 좀 다른, 매우 의외라는 투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협하던 언월도가 사라졌다.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다.”

다짜고짜 떨어져 내렸던 칼만큼 부탁이란 것도 다짜고짜 뜬금없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도깨비 주제에 명부 최고신의 말을 씹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명령도 아니고 부탁이라고 했다.

“부탁이라시면…….”

“어제 온 저 아이, 나쁜 것들이 꼬이지 않게 신경 좀 써줬으면 한다.”

“사연이 있는 아이인 모양이군요.”

박 회장이 열흘 전 장례식이 끝나고 어느 공원에서 데려온 아이라는 이야길 들었다. 기억상실에 연고자가 나타자지 않아 잠시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

염라대왕이 부탁할 정도의 아이라면 도대체 어떤 아이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물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소리를 높이는 것도, 까칠하게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염라대왕의 분위기가 어딘지 위험을 넘어서 살기 같은 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이가 현와원에 있는 동안은 잘 살펴보겠습니다.”

“고맙네.”

고맙다는 말을 하는 염라대왕의 차갑고 딱딱하기만 한 얼굴에 처음으로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염라대왕은 나타난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우를 부탁하고 지금까지 염라대왕이 그를 찾은 건 딱 한 번뿐이었다.

신우가 이유 없는 신열에 일주일이나 시달리던 때였다. 이유 없이 뜨거웠던 신우의 열은 그가 다녀가고 나서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오늘이 두 번째였다. 그래서 더 많이 놀랐다.

신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해서.

“정말 우연이십니까?”

응산이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우연이었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니 걱정 말거라.”

“다행입니다.”

대왕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 응산은 바로 믿었다.

“그런데 저 아이가 언제부터 그곳을 드나들게 된 거냐? 그동안 인연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이가서림을……. 그렇다면 혹 주희 님을 데리러 오신 겁니까?”

응산이 대왕의 물음에 대답은 않고 미간에 굵은 주름을 잡으며 무겁게 되물었다.

“마응산, 신우가 어떻게 거길 가게 됐는지를 물었다.”

소리를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중년 사내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아, 죄송합니다. 박 회장님 돌아가시고 가게 부동산 계약 건에 문제가 생기고부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 회장님과 주희 님 사이에 이행되지 않았던 작은 계약 문제도 있고요.”

응산은 신우와 주희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아주 표면적인 이야기만을 전했다.

묻고 있는 대왕의 분위기가 왠지 현재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감정을 전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단순히 계약서 때문이란 말이지?”

대왕이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네.”

찌푸려진 대왕의 미간을 보니 오늘 고당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따위는 더욱더 전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사실 그도 지금 신우의 너무 갑작스런 변화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신우를 지켜봐 온 결과, 그는 이성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열아홉, 스물, 피 끓는 청춘일 때도 그 흔한 포르노 영상 한 번 보지 않았다.

인간 남자로서 아주 많이 모자라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될 정도로.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주희를 볼 때마다 눈을 떼지 못하고, 주희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있었다.

원래도 박 회장 외에는 아주 사소한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던 아이였는데, 박 회장이 떠나고 나니 그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무감각하던 눈동자가 주희에 한해선 시시각각 달라지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가서림을 드나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왠지 이유를 꼭 알아야 할 것 같아 날벼락이 떨어질 걸 각오하고 넌지시 한 번 더 물었다.

“신우가 상처받는 게 싫으니까. 그 아이에겐 감사만 해도 모자라다는 걸 아는데…… 아무래도 상처받는 쪽은 저 녀석이 될 것 같아서……. 겉모습과 달리 마음이 약한 녀석이라…… 자꾸만 걱정이 되는군.”

현와원 안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대왕의 말에 응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대왕의 말은 왠지 주희의 수명이 다했다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그만 가봐야겠어. 신우, 잘 좀 부탁하네.”

응산이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잠시 잠깐 사이, 중년 사내의 모습을 한 염라대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쩌지.”

주희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염라가 말릴 정도면 신우의 마음을 붙드는 게 옳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말릴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난 것 같았다.

게다가 만약 주희가 잘못되면 주희의 계약 도깨비인 도칠은 어떻게 되는 건지.

* * *

신우는 찬물로 전신 샤워를 하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맘대로 해.]

타월로 머리를 닦다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멈칫했다.

자신이 이 말을 누구에게 했는지 이제야 기억났다. 그의 표정이 얼마나 험악했으면 좀처럼 놀라지 않는 그녀가 움찔 놀라던 것도 이제야 선명하게 떠올랐다.

“음.”

얼마나 미친놈처럼 보였을지 생각하니 절로 신음 소리가 샜다. 로브 하나만을 걸친 남자가 매섭게 거울 속을 쏘아보고 있었다.

“병신 같은 놈. 누구한테 화풀이야.”

일곱 번째 제자면 어떻고, 여덟 번째 제자면 어떤가.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얼마나 재수 없게 생긴 놈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신으로선 진짜 병신이라 그런 덜떨어진 차사 하나 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 무슨 염라대왕의 제자 자리를 아직도 마음에 둔단 말인지.

안 그래도 불면 날아갈까, 쥐면 바스러질까 조심스러운 여자인데 못나게 애꿎은 화풀이나 해대다니.

갈수록 못나 보이는 거울 속 자신을 더 매섭게 쏘아보며 다시 그녀를 떠올렸다.

[소정이 어머니 계신 곳이 어디죠?]

마치 제 부모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묻던 주희였다.

“또 졸졸 따라나서겠지?”

주희가 또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짜증이 솟구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 올렸다.

어떻게 할까. 다시 가볼까?

무슨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혼자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설 주희를 생각하니 당장 마음이 불안해졌다.

생긴 것과 달리 고집이 고래 심줄인 그녀가 이미 간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으면, 누가 말려도 갈 게 분명했으니까.

혼자 보낼 수는 없어.

신우가 방 안을 뱅뱅 돌며 어떻게 할지 고민할 때였다.

똑똑!

“응산입니다.”

노크 소리에 이어 방문이 열리고 응산이 들어왔다.

“낮에 부탁한 건 잘 처리했어?”

“네,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요원들은 보지도 못했고, 영상은 이미 모두 지웠습니다.”

“다행이군.”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방금 전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전에 알아보라고 지시하신 박민의 연인에 대해서요.”

박민, 박신우에게 호적상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우연히 찾은 박민의 일기를 토대로 혹시나 해서 알아보라 지시했었는데 이제야 찾은 모양이다.

“찾았나?”

이 소식을 들으면 저세상에서라도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셨겠다 생각하며 흐뭇해할 때였다.

“5년 전에 이미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응산의 무거운 목소리에 신우의 미간에도 금이 갔다.

“그런데 딸이 한 명 있다고 합니다. 그분의 딸이 맞는지는 제가 직접 알아보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분의 딸이 맞았으면 좋겠군. 자세히 알아봐.”

일기장이 조금만 더 일찍 발견되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 딸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 널 부른 건 다른 부탁이 있어서야.”

용무가 끝난 거 같아 응산이 나가 보려는데 신우가 어딘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붙잡았다.

“다른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이가서림에 좀 다녀와 줬으면 해서.”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갑작스럽게 이가서림이라는 말이 나오자 응산이 뜨끔 놀라 신우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염라대왕과 자신의 대화를 엿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가서림을요?”

“도 실장을 조용히 만나서, 그녀가 언제 떠나는지 알아봐 줬으면 해.”

“주희 님이 떠나다니요? 어디를요?”

신우의 뜬금없는 말에 응산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나도 모르지. 모르니까 알아보라는 거고. 어떤 덜떨어진 차사 놈이 저번에 잡아갔던 혼령을 또 놓쳤다고 징징거리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곱게 생각해 주려고 해도 고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건 내 자릴 빼앗겼다는 자괴감과는 다른 이유다, 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선 맞다고 아우성쳐 대고 있다.

“혼령이라면 얼마 전 그 아이의 혼령을 말하는 겁니까? 아, 아니,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어떻게 생각해? 실수는 차사가 했는데 뒤치다꺼리를 인간이 하겠다는 게 이해가 돼? 귀신 무서워서 밖에 잘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주제에, 귀신을 찾아 나서겠다는 게 말이 되냐고?”

차에서 내릴 때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나 했더니, 혼령 일로 주희와 싸우고 온 모양이다.

응산은 흥분해 열을 내고 있는 신우의 낯선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봤다.

신우가 처음 현와원에 와 지금까지 25년을 살면서 보인 감정의 기복보다, 최근 일주간에 보인 감정의 기복이 더 큰 것 같았다.

더 이상 주희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 충고해야 옳겠지만 차마 예전의 그 건조한 모습으로 돌아가라고도 할 수가 없다.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차사 말로는 아직 수명부가 내려온 게 아니라고 했다니 아직까진 시간이 좀 있을지도 모른다.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지.”

* * *

차사가 다녀간 뒤 주희는 곧장 짐을 꾸렸다.

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제 가게를 마쳤는지 안채로 들어서던 도 실장이 그런 그녀를 보고는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아니, 정말로 가시게요?”

차사에게 어깃장을 놓다 아주 된통 당해 만신창이가 된 도 실장이 아직도 다리를 절며 주희의 곁으로 다가섰다.

“되도록 빨리 올게요. 가게 좀 부탁해요.”

“그 망할 놈의 차사 부탁을 왜 또 들어줘야 하는데요? 귀신과 엮여서 좋을 일이 뭐 있다고. 잘 아시면서 정말 왜 그러세요? 그것도 하필 이 밤중에! 밤길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아세요? 게다가 저 고물 차를 끌고 어느 산골짜기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거길 어떻게 찾아가냐고요.”

도 실장의 걱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차사의 얘기를 듣고 나니 어차피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일찍 소정을 찾아 나서는 게 나을 거 같아 짐을 꾸린 참이었다.

“다행히 제신리라잖아요. 아버지가 발굴 작업 가신 곳요. 당분간 아버지와 같이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차는 고물이지만 내비도 있으니 충분히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거긴 박사님 일터잖아요. 박사님 일 시작하시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시는 분이라는 거 모르세요? 아우, 정말. 정 가실 거면 기다리세요. 저도 같이 가게.”

“도 실장님까지 가면 가게는요? 내일 탁 선생님께서 물건 가지러 오기로 하셨다면서요.”

“아, 맞아. 그랬지. 에이, 어쩔 수 없죠. 내일 전화해서 다음에 오시라고 할게요.”

“저 혼자 다녀오면 되…….”

도 실장과 실랑이 중에도 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대문을 나서던 주희가 대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때문에 흠칫 말을 멈췄다.

이 시각에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처음 보는 어색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신우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아 물었다.

마치 다신 안 볼 사람처럼 냉랭하게 가버려 놓고는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는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나도 제신리에 볼일이 있어서.”

“무슨 말이에요?”

주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따지고 들자 신우는 살짝 당황했다.

주희가 오늘 바로 출발할 것 같다는 응산의 말에 허둥지둥 달려오긴 했는데, 변명을 생각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문을 나오면서 그녀가 제신리 어쩌고 하기에 갑자기 한 보고서가 떠올라 일단 갖다 붙이고 봤다.

김 이사가 그렇게 조르던 한 문화재연구소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업에 들어간다는 장소가 제신리였다는 게 기억난 것이다.

“이번에 우리 한성에서 지원하는 문화재 발굴 작업 들어간 곳이 제신리거든. 오늘 시굴 트렌치(Test Trench, 좁고 길게 구획해 시굴해 보는 것) 들어갔다고 했으니 결과가 어떤지도 궁금하고 해서 한번 가보려고.”

이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린지. 차라리 그냥 너 혼자 못 보내, 하면 될 것을.

고미술, 고고학, 문화재 따위엔 1도 관심이 없는 그가 하필 변명이랍시고 발굴 작업 핑계라니.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의 말을 믿을 리 없었다.

“그래요. 지원 기업에서 관심을 가져주시면 현장에서도 더 힘이 나겠죠.”

그런데 이 여자, 뭐 이렇게 쉽게 넘어가는 건지.

의아하다 못해 신기해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주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넋을 놨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도 실장이었다.

“그럼 우리 이 박사님이 이번에 발굴 작업 들어간 곳이 한성에서 지원하는 문화재연구소였어요? 이야, 잘됐다. 주인님이 저 10년도 더된 고물 차를 몰고 가실 걸 생각하니 살이 떨렸는데 정말 잘됐네요. 우리 주인님 좀 부탁합니다.”

평소보다 초췌해 보이는 도 실장이 어쩐 일인지 오늘은 가시도 세우지 않고 잘 갔다 오라며 주희의 등까지 떠밀어 주었다.

신우가 몰고 온 차에 턱턱 짐까지 실어 주니 차가 출발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부아아앙!

멀어져 가는 차를 향해 웃는 얼굴로 크게 손을 흔들던 도 실장이 차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야 싹 웃음을 거뒀다.

“안 오면 어쩌나 했네. 그 망할 놈의 차사를 상대하려면 박 회장 정도의 성질머리는 있어야 상대가 되겠지.”

여기저기 얻어터져 아고고 절로 신음 소리를 낼 때 응산이 왔었다.

나쁜 머리를 굴릴 것도 없이 신우가 있으면 차사가 맘대로 하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차사 주제에 아직 미래가 창창하게 남은 생목숨을 앗아갈 순 없을 테니 말이다.

냉랭하고 성질 고약한 게 싫었는데, 또 한편으론 차사 퇴치를 위해선 저만한 호위기사가 없었다.

차사 놈 엿 먹이기 계획을 완성한 도 실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도 실장님!”

멀리서 새미가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도 실장에게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불쑥 도마뱀 상자를 내밀었다.

“여기요. 오늘 석이 데리고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너무 재미있게 잘 놀았어요. 그치, 석아. 너도 좋았지?”

새미의 말에 석이 카아악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다.

“어머, 내 말에 반응하는 거 봐. 석인 날 너무 좋아하나 봐. 아웅 귀여워.”

누가 들어도 싫다는 괴성으로 들리는데 새미의 귀엔 아주 강력한 필터링이 장착돼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도 실장으로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석을 오늘처럼 하루 종일 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생기다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러네요. 석이도 새미 씨가 좋은가 봅니다.”

음흉하게 맞장구를 치니, 석이 다시 한번 카아악댔다.

“주희는요? 어? 방에 불이 꺼져 있네. 술 한잔하러 가자고 하려 했는데. 벌써 자는 거예요?”

“아닙니다. 이 박사님 뵈러 잠시 지방에 내려가셨습니다.”

차마 귀신 찾으러 갔다고는 할 수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

“박사님 어제 아침에 내려가신 거 아니었어요? 무슨 일이길래 그새 또 박사님을 뵈러 가요? 박사님 뭐 짐 빠뜨리고 가셨어요?”

“어, 그, 뭐, 그렇죠. 박사님 가끔 정신줄 잘 놓으시잖아요.”

새미가 따지고 들자 다른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적당히 얼버무렸다.

거짓말을 하려니 눈을 맞출 수가 없어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렸다.

그런데 문득 새미의 옷깃에 달려 있는 배지가 어디서 많이 본 배지 같아 좀 더 유심히 살폈다.

“맞아요. 내 얘기도 까먹었었죠.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렇게 심각한 말을 까먹을 수 있죠?”

“그 배지, 혹시 주인님 책상 위에 있던 그거 아니에요?”

새미가 흥분해 분해하든 말든 도 실장이 배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맞아요. 도 실장이 저 가져도 된다고 했잖아요.”

“제가 언제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주인님이 그 배지를 얼마나 아끼는데요. 이 박사님한테 받으셔서 그런지 한번 끼지도 않고 매일매일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계신다고요! 당장 이리 내요!”

“와아, 사람을 완전 도둑 취급하시네. 아까 아침에 석이 데려가면서 물어봤잖아요! 이거 가져도 되냐고. 그랬더니 분명 도 실장님이 웃으면서 ‘얼마든지’ 그러셨잖아요?”

씩씩대는 새미의 말을 듣다 보니 왠지 언뜻 그랬던 것도 같다.

그땐 그저 석을 데려간다는 사실만이 기뻐 배지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몰랐었다.

“어. 내가 착각했던 거 같네요. 하지만 그건 정말 안 됩니다. 이리 주세요.”

“싫어요.”

“새미 씨.”

“주희한테 소중한 거라니 다시 돌려주긴 할 건데, 제가 직접 줄래요. 주희 만나면요. 주희도 없다니 오늘은 이만 갈게요. 건이 오빠 불러서 술이나 한잔해야겠어요.”

“어, 안 되는데. 나중에 꼭 돌려주셔야 해요.”

불안해하는 도 실장의 목소리에 새미가 흥, 콧방귀만 뀌고 사라졌다.

* * *

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고도 한참을 더 달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직 따지지 않고 있었다.

내내 그녀의 눈치를 보며 어색해하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왜 따지지 않는 거지?”

“뭘요?”

“발굴 작업 보고 싶어서 간다는 거, 핑계라는 거 알았을 거잖아.”

현와원에 고미술품이 널리고 널렸는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가 갑자기 문화재 발굴 작업이 궁금해 현장에 간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는데, 누가 믿겠는가.

“그냥요. 그쪽이 같이 가주면 어쨌든 나한텐 고마운 일이니까요.”

주희의 대답이 괜히 눈치나 보던 그의 어색한 기분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그의 귀엔 같이 가줘서 좋다는 뜻으로만 들려 실실 속웃음이 났다.

“그런데 보디가드도 없이 계속 이렇게 혼자 움직여도 되는 거예요? 예전에 할아버지께선 항상 보디가드랑 같이 다니시던데.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한테 신체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보기에도 강해 보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과한 자신감이네요. 경제계가 겉 다르고 속 달라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날 걱정해 주는 건가?”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주희가 해주는 걱정은 이상하게 달달해 되물으면서도 피식 웃었다.

“네, 걱정이 되네요.”

“걱정 마. 응산이 하던 일 마무리 짓고 내가 제신리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오기로 했으니까. 도깨비 경호원이 이럴 땐 꽤 유용한 거 같아.”

응산이 도깨비길로 안내하겠다는 걸 그가 말렸다. 주희가 도깨비길을 통해 가는 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빨리 갈 이유가 없다 싶기도 해서.

그 덜떨어진 차사와 주희가 만나는 건 늦으면 늦을수록 좋을 것 같아서.

물론 소정이란 아이가 잘못되면 주희가 힘들어할 것 같아 안 갈 수는 없어 그가 나선 터였다.

그런데 그 여정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다행이네요.”

그리곤 다시 침묵이 이어졌지만 조금 전까지의 어색한 분위기와는 달랐다. 함께 있는 차 안의 공기마저 달라진 것 같았다.

달달하고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게 느껴지는 게, 그녀와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툭, 그녀의 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았던 것이다.

힐끗 보니 그녀가 두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긴 속눈썹으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녀의 작은 얼굴을 자꾸만 곁눈질하게 된다.

단순히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고,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 그를 잡아당기는 무언가가.

평소처럼 어설픈 방어막이라도 세워 주면 좋을 텐데, 오늘의 그녀에겐 그런 것도 없었다.

시시때때로 그만 보면 웃고, 그가 어떤 요구를 해도 다 들어줄 것처럼 굴었다.

말도 안 되는 그의 거짓말도 다 받아 주고, 심지어 이젠 그가 걱정되기까지 하단다.

너무 달달해서 심장이 아파 오는 것 같다.

“네가 이렇게 무방비해 버리면…… 난 더 욕심을 내고 싶어질지도 몰라.”

신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깨에 기댄 그녀의 온기에 그의 몸이 반응을 했다.

너를 품고 싶다.

그의 전신 세포 하나하나가 아우성치며 맹렬하게 그녀를 원했다.

점점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고 타는 듯한 갈증으로 목이 말랐다.

주희를 곁눈질하는 것도 힘들어질 즈음, 다행히 갈증을 조금이라도 식혀 갈 수 있는 휴게소 표지판이 보여 핸들을 꺾었다.

스르륵, 차가 멎었는데도 그녀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얼마나 꿀잠을 자는지 이젠 살짝 입까지 벌리고 새근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만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이러다 정말 일 나겠다 싶어 억지로 휙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휴식을 취하려 휴게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조금 열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휙 다시 고개를 돌려 새근대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 여잔,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 건가?’

차 안에 단둘이만 있는 거였다. 그것도 야밤에. 그런데도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잔다는 건, 기뻐할 일이 아니라 왠지 자존심 상해해야 할 일로 해석이 됐다.

“하.”

어쩐지 방금 전까지 혼자서 들떴던 자신이 살짝 머저리같이 느껴졌다.

그녀 때문에 마음이 상했는데도 여전히 예뻐 보이는 얼굴을 잠시 노려봤다.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를 원위치시킨 그는 불퉁해진 마음과 달리 조심스레 차 문을 닫고 내렸다.

찰칵.

주희는 의식 저편에서 희미하게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눈은 떴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아 멍하니 두 눈을 껌뻑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XX휴게소라는 로고가 보였고, 그제야 시야가 좀 더 선명해졌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었는데…… 그새 잠들었네.”

잠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운전석에 있던 남자를 찾아 밖을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늦은 탓인지, 휴게소가 한적한 탓인지 그녀가 찾던 남자는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아니, 아무리 많은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한눈에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비주얼만으론 당장 런웨이에 올라도 될 것 같은 그가 뭔가를 손에 들고 매우 뚱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이지?”

항상 짓는 무표정이 아니라 어딘지 심통이 난 것 같은 표정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지?”

분명 히터가 켜져 있는데도 이상하게 공기가 차게 느껴져 차 안을 두리번거리다 차창 밖을 보게 됐을 때였다.

그녀가 타고 있는 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형 트럭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그 앞에 장승처럼 서 있는 뒷모습의 남자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아래위로 시커먼 색으로 도배를 한 키 크고 비쩍 마른 남자.

왠지 이미지가 그녀가 아는 차사의 뒷모습과 닮았다 생각하며 좀 더 빤히 쳐다볼 때였다.

휙, 남자가 뒤를 돌아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차 안에 있는 그녀의 눈과 딱 마주쳤다는 착각이 들었다.

흠칫 놀라 몸이 살짝 굳어졌는데, 드러난 차사의 얼굴이 그녀의 몸을 더 얼어붙게 했다.

분명 얼굴은 그녀가 아는 그 차사와 비슷한데, 싸늘하게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결코 그녀가 아는 그 신참차사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생각했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계속해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모른 척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목을 움츠려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달칵!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긴장하고 있던 그녀의 심장을 뚝 떨어뜨려 놓았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어서 타세요.”

주희의 재촉에 신우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

탁!

차 문을 닫고 그녀를 위해 사가지고 온 차를 내려놓은 그는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또 귀신이라도 본 건지 표정이 완전히 얼어 있었다. 굳은 눈동자가 자꾸만 뒤를 신경 쓰며 산만하게 움직였다.

신우의 표정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만히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게 했다.

“이주희, 나와 있을 때는 나만 봐.”

그의 거만한 명령에도 그녀는 잠시 눈을 크게 떴을 뿐, 그의 요구대로 그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그렇게…….”

주희가 바라봐 주는 시선이 좋았다. 오롯이 그 하나만이 담긴 그녀의 눈동자는 세상을 모두 담은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이대로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싶었지만 그녀를 불안하게 하는 존재들을 곁에 두고 키스를 할 순 없었다.

“그만 출발할까.”

주희의 얼굴을 감싼 손을 놓을 생각도 없으면서 나직하게 출발을 물었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위해 차를 후진시키자 주희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의 원흉이 어디쯤 있는지 보지 못해도 짐작이 갔다.

되도록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액셀을 밟으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그녀가 굳은 얼굴로 차를 멈추게 하고는 창밖을 노려보았다.

뭔가 잔뜩 못마땅한 시선으로 한 곳만을 쏘아보던 그녀가 언제 얼어 있었냐는 듯 거칠게 차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붙잡을 틈도 없었다.

주희가 향하는 곳은 대형 트럭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트럭 안에 한 남자가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귀신 일에 관여해서 좋을 것 없다는 걸 확실하게 가르쳐야겠군.”

신우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뒤따랐다.

보지 못하니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눈빛 하나, 손짓 하나로 그녀에게 닥친 위기 정도는 감지할 수 있을 테니까.

『제발요. 부탁합니다, 차사 님. 상자 하나만 아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제발요. 어미도 없이 불쌍하게 자란 녀석입니다. 벌어 먹이는 게 바빠 놀이공원 한번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남들 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 하나도 아비 힘들까 사달라고 조르지 못한 아입니다. 그런 녀석이 처음으로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 상자는, 꼭 아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제발 그 등록금만이라도 전해 주고 가게 해주십시오.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차사 님, 제발요. ……제발 부탁합니다, 차사 님.』

『그런 건 남은 인간들이 할 일이다. 누군가가 상자를 찾아서 가져다주겠지.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그만 가자.』

『흑흑, 상자가 있는 장소는 저밖에 모릅니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녀석이 잘 찾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두는 건데. 흑흑, 제발 부탁입니다. 이야기만이라도 전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넌 이미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그런 널 명부로 데려가야 하는 게 내 일이고. 네가 아들에게 상자를 전해 주지 못한 건 어쩌면 신의 안배일지 모른다. 네가 운명을 무시하고 계속 이렇게 버틴다면 난 율법에 따라 널 강제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김철수,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음. 대형 트럭 운전기사.

회사에 소속돼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나 수당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

강림차사는 일주일 전 받았던 수명부에 기록된 영혼 이력들 중 특이사항을 기억해냈지만 강림차사에겐 별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김철수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살다 간 이는 많고 많았기에 지금 김철수가 쏟아내고 있는 절절한 아들 타령은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인간은 언제나 남은 세상에 미련이 많았고, 소원을 다 들어주다간 일이 끝이 없을뿐더러, 영혼에게 몇 번 사기를 당하고 나면 그 어떤 인간 영혼의 말도 믿지 않게 된다.

강림차사는 언제나 그렇듯 건조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어서 갈 것을 재촉했다.

“신의 안배? 어떤 신이신지 모르겠지만 참 야박한 신이시네요. 상자 하나만 전해 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우세요? 마지막 가는 길 마음 편하게 해주면 안 되는 건가요?”

등 뒤에서 좀 전에 눈이 마주친 것처럼 느껴지던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다가오는 기척은 진즉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말까지 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인간의 뒤에 따라붙은 기척은 조금 전에도 느끼고 놀랐지만 천계의 기운이었다.

강림차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차사 특유의 냉랭하고 건조한 모습으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인간치곤 유난히 밝은 눈과 귀를 가진 것 같다만, 배움은 길지 않은 모양이군. 이런 자리에 끼어들지 말라는 배움은 받지 못한 걸 보니.』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인간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뒤에 있는 남자에게 가 있었다.

방금 전, 강림차사를 두 번 당혹케 한 남자였다.

첫 번째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천계의 기운을 접한 것이고, 두 번째는 남자가 그가 아는 누군가를 어쩐지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천 년 넘게 스승님을 보아 왔지만 매번 다른 모습이었는데, 딱 한번 인간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의 모습이 지금 앞에 있는 이 남자의 모습이었다.

닮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너무도 닮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스승님의 아들인 무율은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스승님에게 사랑은 하나뿐이었다는 걸 알기에 다른 아이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게다가 천계의 기운. 상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 눈동자가 왜 이리 익숙한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제자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며 졸졸 따라다니던 아기신 무율.

“저도 가려고 했어요. 저 아저씨의 울음이 그치기만 했다면요.”

여인이 항의하는 말에 긴장을 한 건 여인의 뒤에 호위기사처럼 서 있던 남자였다.

“이주희, 너 지금 귀신이 아니라 차사를 붙잡은 거였나?”

“그럼 어떡해요. 저 아저씨가 저렇게 간절하게 애원하는데. 가게에 왔던 차사 님은 이분에 비하면 아주 천사였네요. 생긴 건 그분이랑 똑같이 생기셨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강림은 여인이 말하는 차사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갓 차사직을 받은 그의 막내 사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막내가 자신의 얼굴이 너무 여려 보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차사 일을 할 땐 그의 얼굴을 좀 쓰겠다고 하더니 그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만해.”

아주 겁 없고 맹랑하기 짝이 없는 여인의 투덜거림이 이어지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바싹 몸을 긴장 시키며 여인의 앞으로 대신 나섰다.

마치 차사의 상대는 자신이라는 듯.

남자의 어이없는 행동에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데, 기분이 나쁘긴커녕 이상하게 자꾸만 더 눈길이 갔다.

그래서였다. 남자의 반응이 보고 싶어진 건.

스스스스.

강림은 인간들이 볼 수 있게 신체를 현신시켰다. 일반인의 복장이 아닌 명부신의 모습 그대로.

흠칫! 놀라 굳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남자는 생각보다 더 강한 자기 제어 능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눈동자가 흔들린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만약 수백만분의 일 확률로 무율이 살아남았다면, 지금 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망상은 확인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다시 생각하니 자신이 잠시 미쳤던 것 같다.

“눈이 밝은 저 아이보다 네가 차사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군. 저 아이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교육 잘 시켜라. 차사 앞엔 나서는 게 아니라는 걸. 더 이상 시간 지체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라.”

입 안에 쓴물을 삼킨 듯 씁쓸했지만 인간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었다.

“가겠습니다. 대신 저 기사가 전해 줘야 한다는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얘기하게 해주십시오. 차사 님이 바쁘시다니 제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건방진…….”

역시 인간에겐 틈을 보이면 안 되는 거였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더니 결국 여인과 똑같은 고집을 피우고 있는 남자를 향해 차사검을 뽑으려다 멈칫했다.

“어머, 어머! 영화 촬영 중인가? 자기야, 우리 저기 한 번만 보고 가자.”

“영화 촬영? 어디어디?”

휴게소에 드나들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얘기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무슨 마음으로 제 앞에 모습을 보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차사검을 휘두를 정도로 생각이 모자란 분이 아니란 걸 압니다. 먼 길 가셔야 할 텐데, 이왕이면 영이 안정된 상태로 데려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 영혼이 이 사람과 몇 마디만 나누게 해주십시오.”

힐끗 보니 주희는 차사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희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편안해진 것을 보고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았다.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더 모여들기 전에 그만 모습을 감추시는 게 좋겠습니다.”

“건방진 인간…….”

강림의 노한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그대로 모습이 사라졌다.

“어? 방금 그 사람 어디 갔지?”

“아니잖아. 촬영 장비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무슨 영화야? 잘못 본 거겠지.”

“이상하네. 분명 시대물 복장이었는데. 내가 잘못 봤나? 어, 그런데 저기 트럭 기사 아저씨, 좀 이상하게 자는 것 같지 않아? 아까 우리 들어갈 때도 저랬던 것 같은데, 자세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트럭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한 남자가 조심스레 트럭의 문을 두드렸다.

“헉! 기절했나 봐! 경찰! 119! 119 불러!”

사람들의 웅성임 소리를 뒤로하고 주희와 신우도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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