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어느새 금요일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가서림의 하루는 여전히 한가로웠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 같던 이 박사의 건망증 건도 본인이 집에 붙어 있지 않으니 작은 바람조차 일지 않았다.
잠이라도 집에서 자는 게 대견해 보일 정도로 바삐 돌아다녔었는데 그것도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이가서림 안채 거실 바닥엔 이 박사가 장기 출장 갈 때마다 들고 나가는 커다란 짐 꾸러미가 쌓여 있었다.
“다녀오마. 이번엔 좀 멀리 가긴 한다만, 그래도 국내에 있으니 자주 연락하마. 너도 혹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그럼 내 열 일 제쳐놓고 총알같이 달려올 테니.”
“잘 다녀오세요. 몸조심하시고요.”
같은 경기권에 있으면서도 일을 시작하면 전화조차 잘 받지 않을 때가 허다하면서, 이번엔 무려 경상도까지 내려가면서 저런 뻥을 치고 있는 이 박사였다.
그런데도 주희는 그 말을 믿는지 순둥이같이 가만히 이 박사의 품에 안겨 있어 도 실장의 복장을 더 긁어놓았다.
“휴대전화나 챙기시고 그런 말씀 하세요. 휴대전화를 이렇게 집에 두고 가시는데 급한 연락을 어디의 누구한테 하라는 겁니까?”
“하하, 충전시켜 둔다는 게. 역시 도 실장뿐이라니까. 고마워, 도 실장. 이번에도 우리 주희 좀 잘 보살펴 주게. 내 이 은혜 잊지 않고 다음에 꼬오옥.”
“안 나가세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목 빠지겠습니다. 자요! 짐은 제가 들고 나갈 테니 어서 점퍼나 입으시라고요. 끙, 더럽게 무겁네. 하여튼 뭔 놈의 발굴 작업을 엄동설한에 하겠다는 건지.”
이 박사의 말을 삭둑 자르며 점퍼를 건넨 도 실장이 양손에 짐을 집어 들고는 투덜대며 거실을 나갔다.
“그러게 말이야. 장 교수님 말씀으론, 그 일대 전체가 개인 사유지라 허가받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외부인이 그 일대에 발만 들여도 곡괭이 집어 들고 뛰어오는 어르신이 있다고. 그래서 당분간 사전 조사만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빨리 성사된 거지?”
도 실장이 건넨 점퍼에 본능적으로 이쪽저쪽 팔을 꿰던 이 박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주희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지이익!
지퍼를 올리고 있는 이 박사의 점퍼 포켓에 온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아버지, 그 배지.”
그저 비슷한 배지가 아니라 그녀가 몇 번이나 본 그 특이한 별 문양의 배지와 똑같은 것이었다.
“아, 이거. 장 교수님이 주셨다. 한 문화재연구소 배지라는데, 이번 발굴 작업팀은 다 받았다더구나. 발굴 작업 들어가면서 이런 걸 받아 보기는 처음이지만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나.”
한 문화재연구소 배지.
똑같은 문양의 배지이긴 해도 저 배지가 그 사건의 배지는 아니란 거다.
소속팀 누구나 다 가지는 흔하디흔한 배지라는 건데, 왜 자꾸만 신경이 배지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보는 내내 뭔가가 까득거리는 것 같은 이 불편한 감각은 뭔지.
“그 배지, 저 주시면 안 돼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불쑥 말이 먼저 나갔다.
본래 워낙 강한 기운을 가진 아버지였기에 웬만한 잡귀는 접근을 못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귀신 씐 물건도 아닌 저 평범한 배지 하나가 신경을 긁어대 무턱대고 손을 내밀고 말았다.
“응? 이걸?”
“네, 그 배지 갖고 싶어요. 저 주세요.”
전혀 주희답지 않은 막무가내 어린애 생떼였음에도 이 박사는 이유 한 번 묻지 않고 주섬주섬 배지를 빼 내밀었다.
“그럼 줘야지. 우리 주희가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한 물건인데 당연히 줘야지.”
손안에 들어온 배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희를 보며 이 박사의 눈가가 기분 좋게 휘어졌다.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갖고 싶어 하는 게 없어 살짝 걱정했었는데, 이런 거 좋구나. 앞으로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렇게 얘기해 주면 좋겠어.”
말랑해지던 이 박사의 기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밖에서 도 실장이 ‘박사님! 얼른 나오세요!’라며 기차 화통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놈은 다 좋은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게 문제야. 지금 가면 우리 주희 또 한참을 못 보는데 눈치 없이 인사할 시간도 안 주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주희는 아무리 자세히 뜯어봐도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배지를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래, 다녀오마.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알았지?”
“네.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그러마. 아, 그리고 이거. 이번엔 차량 지원도 나온다니 이건 두고 가마. 너무 가게에만 있지 말고 가끔 바람도 좀 쐬도록 해. 바람 쐬러 가는 김에 멀리까지 와주면 더 좋고. 이왕이면 조수석에 남자친구라도…….”
“아버지, 지금 안 나가시면 도 실장님이 다시 오실 것 같은데요.”
아버지의 기대 심리가 점점 도를 넘어가자 주희가 현실을 일깨워 주며 길을 재촉했다.
마침 도 실장이 한 번 더 ‘박사님!’을 외쳐 줘서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 얘기는 더 듣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오신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집을 떠났다.
* * *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차 실장이 들어왔다.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제가 정시에 퇴근하시라고 했던 거 같은데요.”
“회장님이 아직 계신데 제가 먼저 퇴근할 수는 없지요.”
“이것 때문이 아니고요?”
신우는 한 문화재연구소 추가 예산 집행 날짜에 사인한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그것도 있고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그만 퇴근하셔야지요.”
차 실장이 연일 강행군하며 일을 처리하고 있는 신우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벌써 첫 발굴팀이 출발한 걸로 아는데, 맞나요?”
“네,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 김 이사님과 마주쳤는데 그 일 때문인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시더군요.”
“김 이사님은 그곳 어딘가에 개인 보물이라도 숨겨 뒀다던가요? 만약 진짜로 발굴한다 해도 어차피 매장문화재라 개인이 가지지도 못하는데 왜 이리 급하게 서두르시는 거죠?”
“김 이사님이 새로운 문화재에 워낙 관심이 많으셔서 그럴 겁니다. 그보다 내일 맞선 장소 말인데요.”
차 실장조차 이번엔 김 이사가 너무 서두른다 생각했지만 그 일로 신우의 기분이 나빠지는 게 싫었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맞선이란 말 한마디에 신우의 눈빛이 좀 더 말랑해지고 좀 더 반짝반짝 빛났다.
“장소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최대한 조용한 곳을 예약하라고 하셔서 매향원 전체를 예약했는데 매향원 직원이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GL 남 회장님과 중복 예약이 됐답니다. 그곳이 원래 남 회장님 단골 접대처이다 보니 저희 쪽에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남 회장님과 인사라도 나누시는 게…….”
“차 실장님, 내일까지 일하고 싶진 않습니다. 조용한 곳이 좋긴 하지만 매향원에서 곤란해한다면 우리 쪽에서 취소하는 걸로 하죠.”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그녀가 사람이든 귀신이든 누군가와 마주쳐 시선을 뺏기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상대가 사람이든 귀신이든 도깨비든, 그와 있을 때는 그에게만 집중하길 바랐다.
“알겠습니다. 다른 장소를 알아보겠습니다.”
차 실장은 이유를 따져 묻지도 않고 그의 말 한마디에 다른 곳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매향원을 구한 것도 어렵게 구했다고 들었는데 당장 내일 장소가 쉽게 구해질 리 없었다.
“그럴 필요 없이 이주희 씨를 현와원으로 초대하죠. 음식 준비는 할아버지 계실 때 하던 정도면 충분할 것 같으니 직원들에게 내일 점심이나 부탁해 주세요.”
“현와원에서 말입니까?”
차 실장이 멍하니 되묻는 소리에 신우가 차 실장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직원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아서요. 바로 지시해 두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죽고 신우가 회장이 되고 나서 현와원에 사람을 초대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번 일을 시작으로 현와원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주말에 일을 하게 생겼는데 잘도 좋아하겠습니다.”
“다들 좋아할 겁니다.”
지금까진 직원들 모두 예전과 똑같은 보수를 받고 있었지만 다들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 달에 겨우 몇 번 출퇴근하며 일 같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었기에 곧 다 잘리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 직원들 모두가 환영할 터였다.
기분 좋게 미소 짓던 차 실장이 문득 비서실에도, 회장실에도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생각나 웃음을 지우고 물었다.
“그런데 응산이 또 보이지 않는군요. 최근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누굴 좀 찾고 있습니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 말씀드릴 단계는 아니지만 좋은 결과 나오면 제일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의아해하는 차 실장을 보며 신우가 담담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와원의 전체를 개보수했지만 유일하게 하지 않은 곳이 한 곳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이후,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유지되어 오던 곳이.
며칠 전 신우가 우연히 그곳에 발을 딛게 되었고, 서재라 해도 좋을 정도로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 속에서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호적상으론 아버지인 박민의 일기장이었다.
다행히 비밀 일기까지는 아니었는지 쉽게 펼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펼치게 된 일기장 속에서 알게 된 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쩌면 할아버지의 친혈육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시간으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지만 응산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무사히 태어났으면 그 아이는 올해 스물다섯일 터였다.
찾게 되면 누구보다 차 실장이 가장 기뻐할 것 같았다.
신우의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말씀은 앞으로 응산이 더 자주 자릴 비운다는 건데, 차라리 경호원을 한 명 더 채용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차 실장의 경호원 채용이란 말에 신우의 얼굴에 옅게 퍼져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경호원이 필요한 몸이 아니었다. 심부름이라면 응산 하나로도 충분했고.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경호원은 응산 하나면 충분합니다.”
신우가 무뚝뚝하게 딱 잘라 말할 때였다.
똑똑!
“응산입니다.”
마침 응산이 돌아왔다.
“왔네요. 난 장소 얘기도 할 겸 잠시 이가서림에 들러야 하니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차 실장님도 그만 퇴근하십시오.”
신우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곳에 아주 중요한 걸 두고 온 것같이 행동하고 있는 신우의 낯선 태도에 차 실장은 대꾸도 까먹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신우가 회장실을 나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정말 주희한테 마음이 있으신 건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회장님이 보셨으면 무척 좋아하셨을 텐데.”
차 실장은 사인된 결재판을 챙기며 무의식중에 깊은 바람을 실어 중얼거렸다.
* * *
“꼭꼭 숨어라, 도마뱀 꼬리 보일라. 꼭꼭 숨어라, 도마뱀 꼬리 보일라. 히힛! 찾았다!”
카아악!
석이 책과 소파 사이로 도망을 다니다 기어코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꺄하하하! 석이 잡았다.”
새미가 발버둥 치는 석을 붙들고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까르르 웃어댔다.
오늘만 벌써 저 짓이 몇 번째인지.
석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왠지 조금 불쌍해지려 했다.
“새미 씨,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 거 안보이세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영업 방해하실 겁니까?”
보다 못한 도 실장이 신경질을 토해내고 말았다.
“영업 방해요? 어머, 그럼 안 되죠. 그런데 어디요, 어디? 내 눈엔 손님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요?”
“새미 씨가 정신 사납게 휘젓고 다니니까 제가 일이 안 되잖습니까, 일이. 새미 씬 일 안 하세요? 가게 다시 문 여실 거라면서요?”
“흑. 석아, 나 아무래도 도 실장님한테 미운털 단단히 박힌 거 같지? 도 실장님은 내가 싫으신가 봐. 오늘은 가게 다시 정비 중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5년 만에 만난 단짝집에 놀러 좀 왔기로. 흑, 예전 신 실장님은 날 그렇게 예뻐해 주셨는데. 맛난 것도 많이 챙겨 주시고, 예쁘다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고. 흑흑. 석아, 예전 신 실장님이 그리워. 흑흑. 신 실장니이임.”
“제가 언제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새미를 한 번도 예뻐한 기억이 없다. 그저 주희의 친구라서 참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새미가 석을 붙들고 거짓 하소연을 하고 있는 신 실장이라는 조작된 인물은 어디의 누구인지.
도 실장이 끝내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지만 주희의 가늘어진 눈매와 딱 마주친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신 실장의 행동을 지금의 도 실장이 안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으니까.
“제가 언제요? 언제 새미 씨를 미워했다고 그러십니까? 저 새미 씨 싫어하지 않습니다.”
“정말요? 그럼 제가 주희 좀 빌려가도 싫어하시지 않겠네요?”
소심하게 꼬리를 내리는 도 실장의 곁에 석까지 놓아준 새미가 바짝 붙어서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비, 빌려가다니, 무슨 말이죠?”
“내일 하루 주희 시간 좀 내주시라고요. 주희야, 우리 소풍 가자. 오는 길에 건이 오빠 만났는데 마침 건이 오빠도 비번이라더라고. 같이 소풍 가자.”
누구도 간다고 대답하지 않았는데 새미는 혼자 꿈을 꿨다.
“안 됩니다! 주인님은. 두 분이서 가세요.”
“아니, 왜요?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주인님 내일 약속 있습니다.”
도 실장이 딱 잘라 대답하는 소릴 듣고야 주희는 자신이 선본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겨우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인데 아버지와 새미 덕분에 마치 한 달은 부대낀 것같이 길게 느껴진 시간들이었다.
“약속? 무슨 약속인데? 중요한 약속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면 안 돼? 다음 주부턴 나도 가게 오픈해야 해서 시간 없는데. 같이 소풍 가자. 응?”
“안 돼.”
주희는 생각해 보는 척도 안 하고 곧바로 거절했다.
새미와 같이 있는 시간이 싫은 게 아니라 이가서림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가지고 모험할 생각은 없어서였다.
더구나 박신우에게 약속을 미루자는 연락을 하다니,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 차가운 얼굴이 상상이 됐다.
“당연히 안 되죠. 이게 얼마나 중요한 약속인데 소풍 때문에 미룹니까?”
“중요하다니, 도대체 누굴 만나는데요? 뭐, 남자라도 만나요?”
도 실장까지 그녀를 거들자 새미가 뾰루퉁하게 트집을 잡았다.
“당연히, 남자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이가서림을 보전해 줄 유일한 남자와의 약속이니까.
재계약이 이루어질 때까진 이보다 더 중요한 약속은 없었다.
“남자……. 주희 너, 설마 내일 약속 있다는 남자가 저 남자는 아니지?”
출입문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믿을 수 없어 하며 묻는 새미의 목소리와 출입문 위의 종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린 건 동시였다.
주희와 도 실장의 고개가 일제히 출입문으로 향했다.
“……!”
놀란 눈으로 빤히 응시하고 있는 주희의 시선에서 그를 반기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옆에는 김 순경의 얘기를 꺼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그때 그 여자까지 함께 있었다.
“여긴 손님맞이를 항상 귀신 대하듯 하는군.”
자연히 그의 기분이 그대로 반영된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갔다.
이가서림에 들어서면 언제나 느껴지던 편안함도 먼저 온 손님 때문인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그나마 이번엔 왜 왔느냐고 묻고 있지 않은 것 정도가 살짝 그의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신우는 뚜벅뚜벅 걸어 항상 자신이 앉던 소파에 앉았다.
휙, 실선을 그리듯 날아든 석이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신우는 가만히 오랜만에 보는 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 실장님, 정말 내일 약속 있다는 사람이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일 소풍을 가지 못한다고요? 아니, 왜요? 저 사람, 전혀 주희 타입 아니라고요. 순둥순둥한 건이 오빠가 훨씬 주희 타입…… 읍읍.”
새미가 도 실장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고, 신우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싸늘해지고 있는 모습을 본 도 실장은 기겁을 하며 새미의 입을 막았다.
“새미 씨, 이제 그만 갈 시간이죠? 아, 그렇다고요? 주인님, 새미 씨 가신다네요. 밖이 벌써 어두워져서 위험하니 제가 모셔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자, 자, 어서 가요.”
도 실장은 신우가 응산의 주인이라는 것만으로 싫었다.
하지만 신우는 당장 재계약이 걸린 이 건물의 건물주였다. 새미의 가벼운 입 때문에 이가서림이 날아가게 할 순 없었다.
“박 회장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전 새미 씨를 배웅해야 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도 실장이 새미를 거의 강제 연행하다시피 끌고 나가며 인사를 했다.
주희는 그런 도 실장의 행동을 어색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수다스런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가게 안에 침묵이 흘렀다.
“내일 약속을 취소할 생각이었나?”
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다 들렸던 여인의 말을 재해석한 물음이었다.
“아니에요. 약속 취소할 생각 없어요.”
“그렇겠지. 계약이 걸린 문제니까.”
그녀가 담담하게 아니요를 얘기하고 있는데 신우에겐 그 말이 다른 뜻으로 들렸다.
계약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에 소풍 가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됐다.
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시름시름 다 죽어가던 며칠 전과 달리 오늘의 그녀는 유난히 더 반짝반짝 빛났다.
그 이유가 누군가와의 소풍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마치 상한 음료를 들이켠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김 순경과 소풍을 가든, 데이트를 가든 그가 신경 쓸 일이 전혀 아닌데도 말이다.
이제 누가 도깨비인지 호기심도 충족됐고, 할아버지의 계약서에 명시된 세 번의 만남만 지나면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왜 없는 이유까지 만들어 이가서림에 들락거리고 있는 것인가.
왜?
답은 이미 은연중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느끼고 있었던 건가.
‘이주희는 인간이다.’
순간 그의 내면에서 비명 같은 속삭임이 들렸다. 검은 속삭임이.
훅 끼어든 어둠에 편승해 또 다른 속삭임이 끼어들었다.
[네 어머닌 인간이었다.]
당시엔 별 감흥 없이 들었던 아버지의 얘기가, 왜 갑자기 이토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세기는커녕 채 수년도 함께하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을 그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명부의 그가 인간에게 마음을 빼앗길 일은 소멸시킨 영혼을 되살리는 일만큼이나 없었기에.
제멋대로 깊어진 생각에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뭔가 말하고 있다는 것도 재빨리 인지하지 못했다.
“녹차를……. 박신우 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야 검은 파도처럼 밀려든 생각에서 벗어났다.
코앞에 그녀의 걱정스런 눈빛이 다가와 있었다.
인간.
도깨비가 아니라 기뻐했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신우의 경계심에 종이 울렸다.
신우는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는, 됐어. 내일 응산을 보내지.”
경종이 울렸으니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초대했다.
신우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허둥지둥 이가서림을 떠났다.
“……!”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도망치듯 나가는 신우를 보며 주희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뒤에 귀신이라도 있나 해서.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끼잉끼잉!
석조차 신우의 다급한 행동에 놀랐는지 그녀의 어깨로 도망와 있었다.
그녀와 석의 눈동자가 아직도 딸랑거리며 여운을 남기고 있는 출입문에 머물러 움직일 줄 몰랐다.
“석아, 너도 당황스럽지. 저 사람, 여기 왜 온 거지?”
그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얼굴에 무게를 잡더니 나가는 순간까지 무서운 표정만 짓다 나갔다. 무슨 일인지 용건도 말하지 않고.
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와의 약속은 내일이었으니까.
* * *
현와원이 여느 때와 달리 아침부터 북적댔다.
떠들썩한 게, 마치 현와원 전체를 뒤집어엎어 단장할 기세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서재만이 조용했기에 신우는 아침부터 내내 자청해서 서재에 갇혀 있는 중이었다.
평소 하던 대로 업무를 보기 위해 서류를 펼쳤지만 내용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우의 시선이 수시로 창밖을 넘었고,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갈 걸 그랬나?”
어제 그곳을 나오며 한 말이 있어 응산을 마중 보냈지만 왠지 조금 후회가 되었다.
어제 현와원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어머니와 겹쳐 생각한 자신이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치지 않고야 그가 인간을 사랑할 리가 없었다.
이건 그저, 단순히 할아버지가 아낀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관심일 뿐이었다.
이왕이면 할아버지가 아끼던 이가 잘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 같은 그런 순수한 마음.
그러니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그저 할아버지와의 약속만 지키면 되었다. 맞선을 보기로 했던 생전의 약속을.
탁!
앞에 펼쳐만 둔 채 한 장도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서류 파일을 덮어 버리고 금고로 향했다.
맞선 계약서를 보면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란 걸.
삐비빅삑삑삑! 덜컥!
금고 문을 열었지만 계약서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조금은 들떠 있던 기분이 단번에 가라앉아 버렸다.
명부에 있을 때 그가 제법 아끼던, 그의 아버지에게서 직접 선물받은 옷이었다.
“태워 버린다는 걸 잊었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와 달리 신우는 옷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명부에 있을 땐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옷.
옷에 그려진 검은 무늬만큼이나 어두워진 눈동자가 한동안 시간이 정지된 듯 멈춰 있었다.
그는 왜 자신이 명부도 아니고 인간 세상에 버려져 있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왜 자신의 몸에서 신의 기운이 사라졌는지도.
명부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네가 염라의 아들이냐’고 물은 것과,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 순간 다짜고짜 공격을 당했던 것이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반항을 하긴 했지만 그는 겨우 그 명부신의 오른팔에 현무의 인을 남기는 타격밖에 주지 못했다.
그 명부신은 누구였을까.
당시 명부엔 그를 슬슬 피해 다니던 차사들은 있었어도 그를 해할 신은 아무도 없었다.
염라, 라는 아버지의 이름에 살짝 방심하긴 했지만 아무리 어렸어도 상급신의 힘을 지닌 그가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당했다.
아버지와 연이 있는 신이고, 그를 해할 정도로 앙심이 깃든 최상급신.
짐작해 볼 수 있는 신은 한 신뿐이다. 그저 쉬쉬하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신.
그의 이름이 영묵이랬던가.
대왕의 자리를 탐해 원로들이 지명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신.
그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고, 거의 만신창이가 돼 도망쳤다고 들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다시 명부를 찾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도 그는 쫓기고 있었던 것 같다.
돌연 자신이 또 기억하지 말았으면 하던 기억을 소환해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만.”
소리 내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다.
생각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어두운 기억만 줄줄이 소환될 게 뻔했다.
차사는 되지 못해도 아버지의 제자는 꼭 되고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수련을 멈추지 않았던 기억을.
결국, 와락 얼굴을 구기고야 말았다.
“당장 태워 버리자.”
기분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이 빌어먹을 생각들이 다 옷 때문인 것 같아 책상 위로 거칠게 던져 버렸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이주희 씨 모셔왔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서재 밖에서 들린 이주희라는 말에 그제야 다시 일상의 시간이 흘렀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신우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찾아들었다.
“들어가십시오.”
서재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섰다.
베이지색 코트로 몸을 꽁꽁 여민 그녀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점점 더 평온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표정에 어딘지 조금 어색하고 불편해하는 게 보였다.
왜 저런 표정이지?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그러고 보니 만남의 장소로 현와원이 어떤지 물어보질 못했다.
어제 그 얘기를 하러 갔다가 엉뚱한 기분에 휩싸여 도망치듯 가게를 나오고 말았으니까.
늦었지만 현와원이 싫은지를 물으려는데 응산이 먼저 용건이 있는 표정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잠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짐작대로 가까이 다가선 응산이 주희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식사 준비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잠시 혼자 있어도 되겠나? 현와원을 구경하겠다면 사람을 붙여줄 테고.”
“아니에요. 여기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응산이 속삭이는 말을 들은 주희가 재빨리 신우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자신이 뭔가 말실수라도 한 건지, 그가 나갈 생각을 않고 빤히 그녀의 눈만 들여다보고 있어 조금 당황했다.
“금방 다녀오지.”
다행히 그녀가 더 당황해 왜냐, 묻기 전에 응산과 함께 서재를 나가 주었다.
혼자가 되고 나니 비로소 서재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도 실장의 손에 이끌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절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장 모서리 하나하나에까지 장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의 아름다움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워.”
서재에 갇힌 햇살마저 고귀함을 간직한 것 같은 신비로움에 넋을 놓은 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문득 가까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옷이 그녀의 눈길을 붙잡았다.
책상 위에 책이나 서류 더미가 아닌 옷이 있어서가 아니라 펼쳐져 있는 옷에 그려진 무늬가 이상하게 눈에 익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옷을 집어 들어 펼치려던 그녀의 손길이 멈칫했다.
“이건.”
검은 바탕에 더 검은 거북 무늬의 문양.
인간으로 환생하고야 알게 됐지만 신들이 좋아하는 이런 고대 사극 복장풍의 옷을 인간들은 실용성 때문에 잘 입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입고 있었다.
아직도 어느 비 오던 날,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던 얼굴이 하얀 아이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옷을 들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아이 때문에 아직도 벌을 받고 있는 그녀였지만 저도 모르게 25년 전에도 특이하다 생각했던 무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만지면 만질수록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라 기분이 묘해졌다.
“거북…….”
거북인지 용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거북의 등껍질 무늬만큼은 확실히 구분이 갔기에 흐릿하게 웃으며 중얼댔다.
그런데 그녀의 혼잣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있었다.
“현무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벌써 서재 주인이 돌아와 있었다.
얼마나 넋을 빼고 있었는지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서재 문 앞에 서서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고 있는 남자.
주희는 새삼 그를 찬찬히 훑으며 생각했다.
너무나 하얗고 고와 눈이 부시던 어느 작은 미소년에 15년의 세월을 더한 상상값을.
“아아, 뭐…….”
왠지 이 옷 당신 거냐,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를 대할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생각했던 이유도 왠지 모르게 순식간에 납득이 돼 버렸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가끔 후회를 하곤 했는데, 막상 눈앞에 너무도 잘 자란 결과값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부터 났다.
‘정말 잘 자라 주었구나.’
성격이 조금 모나고 까칠한 게 흠이긴 하지만 괜한 벌을 받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따뜻함이 밀려든다.
“왜 그렇게 웃는 거지?”
“그냥…… 옷이 너무 예뻐서요. 아, 이거 그쪽 거예요?”
그가 왜 웃는지를 묻는데 그녀는 엉뚱하게 감상을 말했다.
그러다 더 명확히 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옷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이 이상했던 건지, 아니면 그녀의 질문 의도를 헤아려 보는 중인 건지. 그가 대답은 않고 한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입었었지. 그런데, 그런 게 왜 궁금하지?”
뒤늦게 그녀가 상상했던 답이 돌아오긴 했으나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묻는 목소리는 어딘지 좀 까칠했다.
그래도 좋았다.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던 그 꼬마의 생사를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대답, 아직 안 했는데? 그 옷이 누구 것인지 왜 궁금하냐고 물었어.”
그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자신이 계속 실성한 것처럼 피식피식 웃고만 있었다는 걸.
“그냥요. 이 옷, 왠지 그쪽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그쪽이 내가 살린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적당히 둘러댔다.
‘이게…… 현무였구나.’
옷에 그려진 무늬를 자세히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현무.
누가 무늬를 새겨 넣었는지 정말 아름다웠다.
어딘지 좀 어둡고 차갑고 무겁긴 했지만 그럼에도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마치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아름다운 사람을 그대로 닮아 있는 듯했다.
주희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든 작은 옷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이제 못 입어.”
뜬금없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있는 옷에 고정돼 있었다. 어딘지 매우 어둡고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의 얼굴에서 감정이 지워졌다.
“식사 준비가 됐다고 하니 그만 나가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가만히 조심스레 옷을 내려놓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그의 시선에 쫓겨 서재를 나섰다.
* * *
“다행히 음식이 입에 맞았나 보군.”
어느 음식점에서도 음식을 즐기지 못하던 주희는 후식 타임이 끝난 지금까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이름 모를 요리들이 더 많았지만 모두 맛있었어요.”
정말 맛있었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덩달아 단단하게 굳어 있던 그의 표정도 점점 부드럽게 풀려갔다.
그녀의 얼굴에 세상을 다 품은 듯한 미소를 짓게 만든 요리장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 할 모양이다.
“차를 내오라고 할까?”
“아니요, 배가 너무 불러서 차까진 안 되겠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따라 이주희가 원래 이렇게 표정이 풍부한 여자였던가를 생각해 보게 했다.
오늘의 그녀는 어딘지 좀 웃음이 헤펐다.
그를 대할 때면 항상 두 겹, 세 겹 막을 세우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다.
왜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오늘은 그도 그런 사소한 의문쯤은 저만치 밀어 두고 싶었다.
식탁 위를 비추는 한지 조명마저 은은히 부서져 그녀의 주변만 맴도는 것 같다.
눈의 착각인지, 조명의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곱고 해사하게 빛을 발했다.
더 앉아 있다간 숨도 죽이게 될 것 같아 덜컥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차는 나중에 마시고, 산책 겸 현와원을 둘러보는 건 어때? 할아버지께서 수집하시던 고미술품을 따로 전시해 둔 전각이 있는데.”
“고당 말이죠? 정말 제가, 구경해도 되나요?”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신우는 가슴이 또 한 번 쿵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얼마든지.”
“고마워요.”
“날씨가 제법 쌀쌀하니 외투를 입는 게 좋아.”
식당을 나온 신우가 얌전히 걸려 있는 주희의 외투를 직접 손에 들며 말했다.
“아, 제가, 제가 입을게요.”
옷 시중을 들어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신우의 행동에 당황한 주희가 만류했다.
“내가 입혀주는 게 싫은 건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고마워요.”
싫은 게 아니라 불편하다는 말을 하려던 주희가 신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가만히 등을 돌려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갑자기 신우에게 이 정도 친절은 받아도 되는 이유가 생각났던 것이다.
생명의 은인인데 옷 시중쯤이야 받아도 될 것 같다는.
“고당에 가려면 정원을 지나야 되지 않아요?”
조심스레 외투에 팔을 꿰던 주희는 다른 하나가 더 생각나 물었다.
“정원은 왜?”
신우의 되물음에 주희가 살짝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여기 다녀오시고 해주신 얘기가 기억나서요. 이곳의 미술품도 물론 최고지만 현와원의 정원은 더 특별하다고요. 신기할 정도로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게, 마치 마법의 정원 같다고 하셨어요.”
그녀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회상하는지 눈 속에 아득한 그리움을 담자 신우의 심장이 또 야단을 떨어댔다.
“좀 둘러서 가야 하지만 정원을 지나서 가는 길도 있긴 하지. 하나 아쉽게도 지금은 겨울이라…….”
“감사합니다.”
겨울 정원은 볼 게 없을 거라는 말을 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감사 인사를 해 타이밍을 놓쳤다.
그녀의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져 다른 길로 가자고 할 수가 없었다.
들떠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고와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날이 더 추워진 것 같으니 단추를 잘 여미는 게 좋겠어.”
문을 열고 길 안내를 나섰는데 돌담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찬바람이 훅 몰아닥쳤다.
주희는 외투를 입고 있는데도 추운지 움찔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우중충한 게, 곧 한바탕 눈이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준비 다 됐어요. 어서 가요.”
그런데 주희는 언제 움츠렸냐는 듯 그에게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매번 생각하지만 참 묘한 여인이었다.
그가 인간 세상에서 겪어왔던 주변 여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반응을 보인다.
한성이라는 이름에 욕심을 내던 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의 집 정원에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지는 않았다.
푸른 잎들은 온데간데없고 높고 높은 겨울나무들만 치솟은 삭막한 정원길에 들어섰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커다란 바위와 가지가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걷는 길이었지만 걷다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뒤를 따라오던 그녀의 걸음에 맞춰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춰야 했지만 별것도 아닌 것에 순간순간 숨을 멈추고 바라보는 그녀를 관찰하는 것도 좋았다.
그가 이십 년을 넘게 보아온 정원이지만, 특히 겨울 정원은 그저 삭막하기 그지없는 마른 나뭇잎만 뒹구는 정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켜고 있는 작은 여인이 서 있는 이 정원은 우중충한 하늘마저 명화 속의 한 장면같이 만들어 버린다.
하늘을 향한 그녀의 얼굴 위로 하얀 꽃잎이 날아드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앗, 눈이다. 첫눈이…….”
그녀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두 손을 활짝 펴 내리고 있는 눈을 확인했다.
신우는 꽃물 든 그녀의 두 볼에 닿아 사라지는 눈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예쁘지 않아요?”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흥분해 들뜬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심장이 죄어든다.
이 낯선 현상이 벌써 몇 번째인지.
이건 어쩌면 그의 내면에서 보내는 경고인지도 몰랐다.
인간과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더 추워질 것 같은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지? 저기 보이는 연화다리만 건너면 고당이니 어서 가지.”
심장에서 울리는 경종에 신우의 목소리가 반응했다. 매우 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의 돌변한 태도에 그녀가 일순 당황해 입을 꼭 다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갑자기 죄책감을 확 불러일으켜 하마터면 사과의 말부터 할 뻔했다.
감정이 제멋대로 널을 뛰어댔다.
이게 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아 휙, 몸을 돌려 빠르게 연못 다리를 건넜다.
하지만 곧 종종거리며 쫓아오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속으로 신음 소리가 샜다.
미친놈. 현와원에 말도 없이 강제 초대한 것도 그였고, 정원 길로 가도 좋다고 동의한 것도 그였다.
그런데 이제 와 성질이나 부려대다니.
세간에서 얘기하는 한성의 얼음 황제는 도대체 어느 나라의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었는지 의문이다.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멈춰 선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눈송이가 왠지 방금 전 그녀와의 분위기를 깬 범인인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거칠게 털어냈을 때였다.
팟!
그의 신경질적인 손짓 소리와 놀란 그녀의 헛바람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아직 돌다리 위에 멈춰 서 있었다.
그런데 그가 볼 땐 분명 아무도 없는데 그녀가 허공을 응시한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잡스런 생각들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다, 당신이 왜 여길…….”
주희는 갑자기 귀신처럼 나타나 길을 막고 있는 키 크고 비쩍 바른 남자의 가면 같은 얼굴에 놀라 얼어붙었다.
차사.
당분간은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진 절대 볼 일 없을 거라고.
그런데 다시 차사가 나타났고, 어딘지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뒤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차사의 시선이 닿은 곳엔 박신우가 있었다.
『그게…….』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럴…….”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다시 볼 일 없다고 여겼던 차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안 돼요, 안 돼!”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하기 전에 온몸으로 하는 말이 먼저 나갔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고는 사방으로 주먹을 휘둘러댔다.
『아, 아니, 난 당신을 데리러 온 게 아니라…….』
차사가 당황해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해명을 하려 했지만 그 해명이 그녀를 더 패닉에 빠뜨렸다.
“가요! 가라고요! 가! 헉!”
그녀의 주먹이 더 크게 헛손질을 한 순간,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져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를 향해, 차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신우가 보여 더 당황했다.
“오지 마요!”
첨벙!
연못 돌다리 높이가 높지도 않았고 연못이 깊지도 않았지만, 겨울 초입의 연못물은 지금 얼어붙은 그녀의 심장만큼이나 차가웠다.
첨벙!
그런데 그 심장을 얼리는 차가운 물속에 또 한 사람이 곧바로 따라 뛰어들었다.
그리곤 마치 그녀의 호위기사라도 된 듯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 남자.
“누구냐! 귀신이든 차사든, 지금 이곳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다. 꺼져라!”
차사가 지금 누굴 찾아왔는지도 모른 채 기세만큼은 신에 필적할 거센 포효를 하고 있는 남자를 보는 주희의 심장이 저릿해졌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신우가 수명을 다했다 해도 이토록 아린 마음이 들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신의 율법까지 어겨가며 살린 이가 이제야 신우인 걸 알게 됐는데.
벌은 받았지만 살리길 잘했다, 가슴 쓸어내린 지 채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감흥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데려가겠다는 건 도대체 어떤 야속한 신인지.
“가요. 제발 가라고요! 지금은…… 그만 가라고요!”
신우의 어이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차사를 향해 주희가 신우의 옷자락을 꽉 붙들며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그 탓에 차사의 이목이 다시 그녀에게 쏠렸다.
뼛속까지 시린 차가운 연못물에 주저앉아 차사를 쏘아보는 그녀의 하얀 얼굴이 점점 핏기를 잃어갔고, 온몸으로 퍼져가는 시린 기운은 이를 악물어도 덜덜 떠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아, 알았어요. 갑니다, 가요. 갈 테니 얼른 거기서 나오기나 해요. 더 있다간 수명이 다하지도 않았는데 얼어 죽겠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차사가 새파랗게 언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당황해 팟, 하고 허공에 꺼지듯 사라졌다.
순간 긴장이 풀리며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던 손이 툭 떨어져 내렸고, 온몸이 흐느적대며 무너져 내렸다.
“흡.”
그제야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차가운 겨울 연못이란 걸 실감했다.
살갗을 에이는 것 같은 차가움에 저절로 신음 소리가 샜다.
그 신음 소리에 굳은 얼굴의 그가 그녀를 돌아봤고, 촤악 곧바로 그녀의 몸이 들어 올려졌다.
“어디 있지?”
귀신도 차사도 보지 못하면서 그녀를 품에 꽉 껴안고는 주위를 경계하며 묻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 갔어요.”
그녀의 말에 잔뜩 긴장한 채 허공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응산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기척도 없이 나타날 정도면 차사였나?”
담담한 듯 묻고 있었지만 그의 굳은 눈동자 속에 어딘지 겁이 들어 있었다.
당연히 무서웠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보호하려 막무가내로 연못에 뛰어들었었다.
“……!”
주희는 대답은 않고 가만히 손을 뻗어 여기저기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닦았다.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이유.
이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그녀의 두 눈동자가 더할 수 없는 슬픔으로 크게 흔들렸다.
“왜 대답은 않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차사가 널 찾아왔던 거냐고 물었어.”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요. 그는…… 다른 용건이 있다고 했어요.”
“다행이군.”
대답하는 주희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신우는 그 한마디에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첨벙첨벙 주희를 안은 채 연못을 벗어났다.
“되돌아가는 것보다 고당으로 가는 게 더 빠르겠어. 가서 사람을 부르자.”
연못을 나온 신우가 이쪽저쪽 거리를 가늠하다 그녀를 내려다봤다.
파리하게 언 입술, 흐릿한 초점. 방금 전까지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가녀린 손이 지금은 그의 옷깃을 꼭 감아쥔 채 덜덜 떨고만 있었다.
아니, 손만이 아니라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추워요.”
스르륵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보니 다시 덜컥 심장이 내려앉아 거의 날듯이 고당을 향해 달렸다.
드륵! 거칠게 고당의 문을 열어젖히고 복도를 달려 실내 온도가 조금이라도 높게 설정돼 있는 응접실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고당은 항상 고미술품 보존을 위한 적정 온도 유지가 중요했기에 응접실이라 해도 겨울 연못물에 빠진 몸을 단번에 녹일 정도로 따뜻하진 못했다.
휴대전화는 가져오지 않았고 전화기는 전시실 입구에 있었기에 그녀를 소파에 내렸다.
“사람을 불러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다급한 마음에 곧장 전시실로 향하려 했지만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신우가 새파랗게 언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그녀가 입고 있는 건, 물에 흠뻑 젖은 코트였다.
그런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코트를 그녀는 마치 제 갑옷인 것처럼 감싼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응산에게 담요를 가져오라고 하기도 전에 당장 얼어 죽을 것 같아 보였다.
“우선 코트부터 벗자.”
신우가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시, 싫어요. 추, 추워요.”
그의 손길에 코트를 뺏기기 싫다는 듯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져 소파 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렸다.
“정신 차려, 이주희! 이대로 있다간 체온이 더 떨어질 거라고.”
그녀의 비이성적인 의견을 반영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강제로 그녀의 몸을 일으킨 그는 거칠게 코트를 벗겨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주, 주세…….”
곧바로 코트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순간 그녀가 안에 입고 있던 원피스마저 가슴께까지 흠뻑 젖은 게 보였다.
잠시 원피스도 벗겨야 하나 고민했지만 차마 거기까지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대신 재빨리 자신의 차림을 훑었다. 그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의 코트도 반쯤 젖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버둥거림이 사라졌다. 코트를 포기했는지 다시 소파 구석으로 최대한 파고들었다.
마치 고치처럼 몸을 돌돌 만 그녀가 눈만 내놓은 채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더 조급해져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마른 천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코트 안을 보니 그나마 셔츠는 젖지 않았다.
신우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자신의 코트를 벗어 던지고는 빠르게 셔츠의 단추를 풀어 나갔다.
급한 마음에 소매 단추가 툭 소리를 내며 뜯겨 나갔다.
그 소리에 그녀가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신우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휙휙 셔츠를 벗어젖혔다.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남자의 상체 탓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흠칫 놀라 긴장하는 게 보였다.
그녀의 반응이 무엇을 오해한 건지 짐작이 가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또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얼어서 완전히 정신을 놓은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벗은 셔츠를 그녀의 옆에 툭 던졌더니 좀 더 확실한 반응이 왔다.
강제로 덮쳐질 거라 생각했는지 겁먹은 눈동자가 본능적으로 도망갈 길을 찾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렀던 것이다.
“갈아입어. 젖은 옷 입고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말간 눈동자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소파에 놓인 셔츠와 헐벗은 그의 상체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그의 벗은 상체에 머물러 떨어질 줄 몰랐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 속에 걱정이 들어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뭘 걱정하는 거냐 묻지 못했다.
아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 그녀가 아니라 그인지, 몸에 머문 그녀의 시선 하나만으로 몸 안 구석구석이 실시간으로 뜨거워지고 있어서.
이유도 없이 오른 열을 안으로 삭이느라 온몸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고, 통제가 되지 않는 눈동자는 자꾸만 그녀의 젖은 쇄골로 향하고 있었다.
신우는 자신의 이런 반응이 당황스럽고 또 당황스러웠다.
“그 시선은 뭐지? 내가 얼어 죽을 걸 걱정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네 저질 신체와는 차원이 다르니까. 셔츠로도 안 될 거 같으면 얘기해. 몸으로 체온을 나눠 줄 의사도 있으니까.”
통제되지 않는 몸처럼 말도 제멋대로 날뛰어 그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비꼬인 말이 나가 버렸다.
덕분에 그의 가슴에 달라붙어 있던 그녀의 시선이 떨어지긴 했다. 대신 놀라 댕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
하마터면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놀라 커다래진 그녀의 눈동자가 일주일 전 맛본 그녀의 입술 맛을 덜컥 기억나게 해서.
꽃잎처럼 달콤했던 그녀의 숨맛, 탐하고 또 탐해도 채워지지 않던 갈증.
다시 한번 그 달콤함으로 온몸을 가득 채우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가 다 어질거렸다.
‘미친.’
방금 전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바랜 지 얼마나 됐다고 몸이 이렇게 발정기에 들어선 짐승처럼 반응하는 건지.
뇌가 너무 미친 생각으로 치달으니 의외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 말라고. 난 전시실 가 있을 테니, 갈아입고 있어.”
정신이 든 만큼 감정 제어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몸은 머리의 회복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는지 좀처럼 하체에 힘이 빠지지 않아 걸음걸이에 신경을 써야 했다.
* * *
“그래, 내 옷가지도.”
전시실 입구에 놓인 테이블 앞에서 응산과 통화를 끝낼 때였다.
응접실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주희가 전시실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셔츠가 그녀에겐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가 되어 있었다.
진줏빛 원피스를 차려입었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냥 아름답다가 아닌, 자극적으로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아름다움이었다.
목이 탁 메고 몸이 묵직해지는 낯선 감각이 또다시 찾아든다.
몸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것 같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이런 원색적 감각은 정말이지 결코 반갑지 않았다.
속으로 셋, 둘, 하나. 수를 역으로 헤아리고야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놨다.
“이거, 고마워요. 덕분에 몸이 훨씬 따뜻해졌어요. 그런데…… 그쪽은 정말 괜찮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정신이 들자마자 여기에 온 걸 보면 작품들이 보고 싶어서 아닌가?”
젖어 있는 그의 바지와 벗은 상체를 훑고 있는 주희의 시선에 단순히 걱정만 들어 있다는 걸 아는데, 그는 사심 하나 섞이지 않은 그 시선조차 불편했다.
당장 화제를 작품으로 돌리기 위해 고미술품들을 눈짓했다.
“……작품들이 보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그래도 그쪽 걱정이 먼저였어요.”
작품에 먼저 관심을 보인다고 나무란 것도 아닌데 그녀가 괜히 볼까지 붉히며 미안해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 움직이는 게 더 체온을 올릴 테니 좋겠지.”
그가 먼저 천천히 전시실을 돌기 시작했고, 그녀가 그 뒤를 따랐다.
“아름다워요.”
황홀함이 깃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주희가 한 유리 진열장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뭔가 싶어 신우도 진열장 안에 든 미술품을 들여다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청자 백자처럼 빛깔이나 형태가 고운 작품이 아니었다.
주희가 감탄한 작품은 주둥이마저 깨진, 그냥 토기로 만들어진 누런 항아리였던 것이다.
그는 가끔 할아버지와 함께 고당에 미술품을 구경하러 오곤 했었지만 사실 고미술품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녀의 감탄에 두 번, 세 번 진열장 속을 다시 들여다봐도 그냥 누런 토기일 뿐이었다.
신우의 눈엔 누런 토기보다 진열장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빼고 있는 주희의 눈부신 목선이 몇만 배는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 진열장은 왜 비어 있어요? 저런 고급 백동 촛대도 진열하지 못할 정도로 진열장이 가득 찼는데 이곳만 비어 있네요.”
주희가 진열장 옆에 세워져 있는 그녀의 키만큼 높은 촛대와 빈 진열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그 진열장 주인이 따로 있었거든. 고지도였는데, 할아버지께서 많이 아끼신 작품이었어. 몇 년 전에 도둑맞았지만. 그 지도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고미술품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어떤 지도였는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지도를 도둑맞고 할아버지께선 아주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얼마나 아쉬우셨으면 행여 장물로라도 나오면 다시 사들이려고 사람까지 알아보려 했다.
“이 많은 보물급 미술품을 두고 지도만 사라졌다고요? 굉장한 가치가 있는 지도였나 봐요.”
주희가 그런 대단한 걸 못 봐 아쉽다는 투로 말하자 신우는 새삼 빈 진열장을 다시 쳐다봤다.
그땐 할아버지의 안타까움만 생각했지 그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가 봐도 보물급 미술품이 널린 현와원 고당에서 지도만 없어졌다는 건 이상했다.
‘할아버지께서 유난히 그 지도에 집착하셨던 게 그럼, 당신께서도 그런 의문을 가지셨던 걸까?’
도난당하기 전 전문가들이 가치 없음으로 결론 낸 지도라 했다.
도둑맞은 그 지도는 탄소연대측정기를 통해 밝혀진 종이 재질의 연도와 그 시대의 지명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라고.
도둑이 고미술품에 대해 전혀 몰라서 그걸 훔쳐간 것일까? 하필 지도를?
되짚어 보면 볼수록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의문이 커졌다.
할아버지와 연관된 일이고 보니 저도 모르게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때였다.
턱! 철컹, 댕댕댕!
철 구르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백동 촛대 두 개가 넘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앗! 죄, 죄송합니다.”
주희가 당황해 말까지 더듬으며 넘어져 구르고 있는 촛대를 붙잡으려 쫓고 있었다.
댕댕댕!
촛대 하나가 그의 발치에서 멎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촛대를 집어 드는데, 허둥지둥 다른 하나의 촛대를 쫓아온 그녀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죄, 죄송해요. 어디 흠집이라도 난 건 아닌지…….”
물건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놓아 걸리적거리게 한 건 이쪽인데 그녀가 더 당황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촛대를 이리저리 살피며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이건, 박쥐 촛대야.”
신우는 촛대를 집고도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보단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멍하니 뜬금없는 소릴 중얼거렸다.
“……?”
“할아버지 말씀이, 집에 복을 가져다준다더군.”
주희의 눈동자가 딱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라는 듯 말갛게 멀뚱거렸지만 신우는 말없이 그녀의 입술만 노려보다 불쑥 촛대를 내밀었다.
주희가 얼떨결에 촛대를 받아 들었다.
바닥에서 일어나려다 양손에 촛대가 쥐어지는 바람에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주희의 얼굴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닿을 듯 말 듯 바로 코앞에 입술이 있었다.
“어, 저기…… 왜, 왜요?”
가만 보면 그녀는 감이 참 느렸다. 지금도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왜냐고 묻기만 하지 피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이 여잔 왜 이렇게 위기감이 없는 걸까. 나에게만 이런 건가?
그녀의 작은 입술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그럴 리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김 순경에게도 이런 반응이겠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턴 신우의 심사가 완전히 꼬여 버렸다.
“조심하라고.”
시큰둥하게 툭 한마디만 하고는 곧장 입술을 덮쳐 버렸다.
그녀의 몸에 아직 찬기가 남아 입술이 차가웠지만 그의 배배 꼬인 심사에도 불구하고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했다.
그녀는 그의 음흉한 키스보다 두 손에 쥔 촛대를 놓으면 다시 굴러갈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촛대를 쥐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모습에 픽 웃음이 났지만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진 않았다.
기분은 말랑하게 녹아내리는데, 숨소리는 점점 탁해져 갔다.
그녀의 입술을 통째로 들이켜면서도 갈증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더 짙은 단내를 찾아 살짝 이를 드러내 깨물어 버렸다.
“아.”
촛대를 꽉 움켜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 정도로 파렴치하면 촛대가 얼굴로 날아와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촛대는 날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떨리는 손만큼 그녀의 눈동자도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눈, 감아도 좋아.”
허스키하게 욕망에 젖어 든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마법의 주문을 걸었다.
그의 마법이 통했는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신의 힘이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속을 성급하게 파고들었다.
“하아…….”
그녀의 단 숨을 받아 마시며 그의 뜨거운 욕망을 마음껏 그녀의 안에서 휘저어댔다.
댕댕댕, 촛대들이 제멋대로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아, 하아…….”
언제나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고요한 전시실이 때 아닌 욕망의 소리로 헐떡댔다.
서로의 욕망이 끈끈하게 엉켜들며 두 사람의 이성이 반쯤 가출을 시도했다.
욕망에 아주 훌륭하게 몸을 접수당하고 있는 신우의 손이 더 큰 욕망에 충실하려 애쓰며 그녀의 셔츠에 손을 대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분명 그의 셔츠인데, 단추가 왜 이리 말을 듣지 않는지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해야 했다.
하나, 둘 셔츠의 단추가 풀려갈 때마다 그의 욕망도 타들어 갔다.
성급한 욕망은 단추가 다 풀리길 기다리지도 못했다. 본능만을 좇던 무례한 손이 스윽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따스한 봉우리를 덥석 덮치고 말았다.
“흡!”
주희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신우 역시 생 날것으로 느껴지는 손아귀에 든 말랑거리는 것의 정체에 놀라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녀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후다닥 두 손으로 셔츠를 여몄다.
미처 피하지 못한, 아니 피하고 싶지 않은 손이 그대로 그녀의 날가슴에 갇혔다.
오묘한 포즈와 손아귀에 느껴지는 따스한 감촉의 정체가 신우의 콧속을 뜨뜻하게 만들었다.
강도 조절이 되지 않는 신우의 몹쓸 욕망이 ‘이대로 조금만 더’를 외쳐댔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따스한 온기를 신우는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졌다.
머릿속 상상만으로 아랫도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갈 때였다.
“회장님.”
욕망으로 눈앞이 흐릿해진 그 순간, 응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제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주희의 이런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일 순 없었다.
그게 설령 인간이 아닌 도깨비일지라도.
다급하게 소리친 신우가 바람처럼 움직여 주희가 보이지 않게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단호한 명령에 다행히 문이 열리진 않았다.
“가져온 건, 문 앞에 두고 가.”
담담하게 명령하고 있었지만 신우의 신경은 온통 등 뒤로 가 있었다.
이제야 무슨 사태인지 인식했는지 그녀의 등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마주한 등을 통해 느껴졌다.
“담요와 옷가지는 전시실 문 앞에 두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눈치가 빠른 건지, 명령에 충실한 건지. 응산은 전시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어떤 질문을 더 하지도 않았다.
순순히 사라져 준 응산으로 인해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응산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아직도 추운지 손을 달달 떨며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갔어. 서두…….”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빈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고,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 휙 고개를 들었다.
둥글고 새까만 것에 눈을 고정한 순간, 신우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미친……. 저걸 잊다니.’
CCTV가 있었다.
원래도 있었지만 지도를 도둑맞은 이후론 사방을 비추는 CCTV가.
현재 보안팀장이 응산이었으니 응산은 아마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 앞에 담요를 두고 간 건, 그의 다급한 외침 때문이 아니라 안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어서였던가.
만약 욕망에 정신을 잃어 조금이라도 더 나갔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신우는 CCTV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러다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그녀가 단추를 다 채우고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아, 아직 추운 것 같으니 담요 가져올게.”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무서워 말까지 더듬으며 도망치듯 그녀의 곁을 벗어났다.
방금 전 그들의 야릇한 행동을 누군가 봤다는 걸 알면 아마도 그녀가 다시는 그를 보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몰라야 해,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속으로 결론을 내린 신우는 입술을 한일자로 만들며 응산의 입을 막을 의지를 다졌다.
문 앞에 놓여 있는 담요와 옷을 들고 온 신우가 최대한 주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펄럭 담요를 펼쳐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몸을 빨리 녹이려면 역시 서재나 거실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미술품을 더 보고 싶은 거라면…….”
그도 응산이 가져온 긴 로브를 펼쳐 걸치며 당장 돌아가자는 말이나 다름없는 재촉을 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많이 봤어요. 그만 가요.”
다행히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래, 나머진 다음에 컨디션 좋아지면 보는 게 좋겠어.”
신우가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담요에 둘러싸인 그녀를 달랑 안아 올렸다.
“앗, 괜찮아요. 저 걸어갈 수 있어요. 정말로요.”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아니에요. 정말, 정말 걸을 수 있어요. 내려주세요.”
“지금 이 몸 상태로 그 거리를 걸어가겠다고? 몸을 녹이는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라 현와원에 아주 드러눕고 싶은 모양이지? 그것도 아니면 널 현와원에 초대해 이 꼴로 만든 나에게 시위라도 하겠다는 건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그였지만 그녀의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너무 연약해 보여 볼 때마다 위태위태한데 말이다.
협박에 가까운 말로 쏘아붙인 탓인지 이내 그녀의 버둥거리는 몸부림이 멎었다.
“정말 적반하장이네요.”
물론 그녀의 투덜거림 섞인 싸늘한 항의는 피할 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