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달칵!
주희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등을 보이고 앉아 책을 포장하고 있던 도 실장이 휙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봤고, 와락 미간이 좁혀지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섰다.
“좀 쉬시라니까 왜 또 나오고 그러세요?”
예상대로 도 실장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이제 괜찮아요.”
내심 움찔했지만 오전 내내 침대 신세를 지다 보니 더 이상은 누워 있고 싶지 않아 태연하게 말하며 가게로 들어섰다.
그녀의 행동에 도 실장의 미간에 더 진한 주름이 생겼지만, TV 앞에서 졸고 있던 석은 그녀의 기척이 반가운지 쪼르르 달려들었다.
발목에 들러붙어 머리를 문질러대는 석을 향해 주희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꾸 그렇게 안아 주지 마시라니까요! 주인님이 자꾸 그렇게 안아 주니까 더 버릇이 없어지잖아요!”
순간 불똥이 엉뚱하게 석에게 튀었다.
하지만 이내 석은 도 실장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밥은요? 점심은 챙겨 먹고 나오신 거예요?”
석을 안고 멍하니 서 있는 주희의 모습이 도 실장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아침을 늦게 먹어서…… 괜찮아요.”
“아니, 다 차려 놓은 밥도 못 챙겨 먹으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와락 얼굴을 구긴 도 실장이 다시 폭풍 잔소리를 쏟아냈지만 이내 씩씩대며 밥을 챙기기 위해 성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돌연 내딛던 발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켜져 있는 TV를 끄기 위해 소파 쪽으로 향했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 덕분에 주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고 있는 TV 쪽으로 향했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깐만요, 도 실장님. 끄지 마세요.”
어제 현장에서 본 적 있는 기자의 사진이 동그랗게 떠 있고, 아나운서가 사건을 취합해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럼 일부 현장 사진과 경찰 쪽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 사진들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건 자택에서 발견된 유서입니다.
유서에 의하면 정철민은 올여름 실종됐던 유소정 양을 실수로 치어 사망케 했음을 자백했습니다.
겁이 나 우발적으로 시신을 은닉했고,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경찰이 유소정 양을 묻었다고 밝힌 장소 인근에서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방 기자를 연결해 보겠습니다.>
TV에서 보여 주는 여러 장의 사진들 중 모자이크 처리된 정철민의 시신 사진이 있었다.
스치듯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철민의 옷깃에 달려 있는 배지가 이상할 정도로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핏 보면 별 모양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얼기설기 복잡한 선으로 연결된 특이한 문양의 배지였다.
그를 볼 때마다 옷이 바뀌었지만 저 별 모양 배지만은 언제나 가슴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배지를 달고 있었던 걸 보면 정철민은 저 단체 소속인 걸 무척이나 소중히 여겼던 모양이다.
“이런 걸 왜 봐요? 정신 사납게.”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도 실장이 정색을 하며 전원을 꺼 버렸다.
도 실장의 말이 맞았다. TV를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소정은 이미 먼 곳으로 떠났고, 시신을 찾는다고 해도 소정이 다시 돌아올 일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자꾸만 TV로 눈이 갔다.
자식을 영원히 가슴에 묻어야 하는 소정의 어머니에게만은 소정의 흔적이 또 다른 의미일 것 같아서.
하지만 TV를 다시 켜 끝까지 사실을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저 유서에 기록된 장소가 거짓이 아니길 마음으로 바라 볼 뿐이다.
“그렇게 한가하면 저기 쌓아 놓은 고서들 가격 분류나 하세요.”
도 실장의 시큰둥한 말에 고개를 돌리니 책상 위에 못 보던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남 실장님 다녀가셨나 보네요.”
평소의 그녀라면 새로운 서적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책 상태부터 살펴봤을 텐데 지금은 전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쌓여 있는 책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며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도 실장이 결연한 표정으로 쌓여 있는 사서삼경들 중 한 권을 집어 들고 흔들며 주희의 시선을 붙들었다.
“네, 남 실장님 다녀가셨어요. 이 책 구하려고 아주 멀리 경상도까지 다녀오셨대요.”
주희의 시선이 책에 가 있는 걸 확인한 도 실장이 눈을 반짝이며 마치 직접 책을 구하러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문헌 조사 현장이 아주 드라마틱했대요. 딱 봐도 고관대작의 집처럼 보이고, 그 집주인마저 어찌나 기세등등한지 처음엔 교수님들을 아주 턱으로 부렸답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문헌들을 분류하다 보니 이게 웬걸요, 글쎄 그 집안이 노비의 후손이라는 사실만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네요. 그 많던 문헌들도 알고 보니 죄다 이런 가치 없는 교과서들뿐이었다 하고요.”
“그런 일 한두 번 있는 거 아니잖아요. 남 실장님은 좋아하셨겠네요.”
도 실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희는 여전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 멍하니 반응했다.
“남 실장님이야 그렇죠. 교수님들이 가치 있는 물건을 건질 게 하나도 없어 완전 개고생하셨지만요. 남 실장님 말론 주인님이 주문하셨던 책 대부분이 있을 거라던데 확인 한번 해보세요.”
도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집요하게 주희에게 말을 걸었다.
“나중에요.”
하지만 도 실장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희의 눈빛은 여전히 멍하기만 했다.
“주인님! 계속 그렇게 넋 놓고 있을 거면 그냥 주무시지 도대체 왜 나오신 건데요?”
참는 것과는 영 인연이 먼 도 실장이 또다시 버럭 성질을 냈다.
주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으니 두 모녀에 대한 잔상이 더 크게 짓누르는 것 같아 억지로 몸을 추슬러 나왔는데, 아무래도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다.
지금 자신의 상태론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영업 방해였다.
절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힘없이 몸을 돌렸다.
“어딜 가요! 이왕 나왔으면 책 분류 작업이라도 하셔야죠. 저기 쌓여 있는 상자들 안 보이세요? 도마뱀 손이라도 빌려야 하게 생겼구만, 언제까지 그렇게 넋 놓고 있을 건데요?”
방금 전까지는 왜 나왔냐고 야단이더니 지금은 또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야단인 도 실장을 주희가 두 눈을 껌뻑대며 쳐다봤다.
“아우, 내가 미쳐! 그래서 그렇게 말렸던 건데. 망할 놈의 차사 같으니. 다시 나타나기만 해봐, 아주 그냥 벼락 맞으라고 저주를 퍼부어 줄 테니. 자요! 먼지투성이니 장갑 끼고 작업하세요.”
도 실장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차사 욕을 해대는가 싶더니 불쑥 하얀 장갑을 내밀었다.
“밥 차려올 동안 딴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하시구요, 일! 알았어요?”
얼떨결에 장갑을 받아 든 그녀를 향해 재차 다짐 같은 말을 남긴 도 실장이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안채로 통하는 문을 밀고 나갔다.
끼잉, 낑!
어느새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가 있던 석이 마치 도 실장의 말에 공감이라도 한다는 듯 낑낑대며 그녀의 볼에 머리를 문질러댔다.
“그렇게 티가 나니?”
이제 제법 감정을 감출 줄 알게 되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석이 또다시 낑낑대는 소리를 냈다.
“그래. 도 실장 말대로 일을 하자. 일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도 실장이 건네준 장갑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중얼거린 주희가 무의식적으로 장갑을 끼고 책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묵직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서들 중 맨 위에 있는 《시경》을 집어 들어 펼쳤을 때였다.
딸랑!
문 위의 종이 유난히 맑은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3일은 머리를 감지 않은 것 같은 떡진 머리에 꼬질꼬질한 사파리 점퍼, 여기저기 말라붙은 흙이 묻어 있는 워커를 신은 키가 큰 중년의 남자였다.
“아버지.”
멍하니 서서 중얼거리는 주희와 달리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던 석이 눈을 빛내며 잽싸게 도망쳤다.
중년 남자가 양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아무렇게나 턱턱 집어 던지더니 긴 팔을 활짝 펼쳐 주희에게 달려들었다.
며칠 전 마지막 통화를 할 때만 해도 일정이 한참 더 늦어질 것 같다던 분.
“주희야아아아!”
‘왜 벌써 오신 거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짜부라지듯 먼지투성이 아버지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흑, 우리 따아알!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잘 지냈지? 아무 일 없었던 거지?”
등을 토닥이기까지 하며 아직도 그녀를 마치 열 살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아버지.
이런 과격한 감정 표현이 대부분 멀리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 데 대한 보상 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의 감정 표현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반항을 포기한 건 이미 오래전이었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안겨 있었다.
아버지가 발굴 현장에 다녀오시면 언제나 그렇듯 흙냄새, 먼지 냄새가 진동을 한다.
지금도 어김없이 몸에 밴 아버지 특유의 텁텁한 흙냄새가 코를 마비시켰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평소였으면 풀풀 날리는 먼지 냄새, 흙냄새에 이맛살부터 찌푸렸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이 마른 흙냄새가 싫지 않았다.
아침 내내 가슴을 시리게 하던 모녀의 잔상이 왠지 다독여지는 것만 같았다.
답답하기만 하던 응어리가 맥없이 풀려가는 이상한 감각과 함께 코끝마저 찡해져 온다.
“잘…… 다녀오셨어요? 한참 더 걸릴 것 같다고 하시더니 일찍 오셨네요. 일이 잘 안 된 거예요?”
순간적으로 목이 잠겨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탁한 음성이 묻어났다.
“응? 주희 너, 목소리가 왜 이래? 울었어?”
확, 그녀를 몸에서 떼어낸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평소 같지 않게 매의 눈길로 하나하나 뜯어보며 세세히 살폈다.
아버지가 가끔 이상한 데서 예민하다는 걸 깜빡 잊었다.
“울긴 누가요? 괜한 사람 잡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서 씻기나 하세요. 냄새나요.”
새로 출토된 유물 조사라도 하듯 날카롭게 뜬 시선에 주희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어 평소의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아냐, 분명 방금 전에 목소리가 이상했어. 무슨 일이야?”
“아무 일 없다니까요. 그냥 잠을 너무 많이 자서 목이 잠긴 것뿐이에요. 방금 전에 나왔거든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네, 없어요.”
거듭된 그녀의 다짐을 듣고야 아버지가 의심의 눈길을 거뒀다.
“그래, 아무 일 없어야지. 하아암! 그런데 도 실장은? 이가서림 지박령 같은 녀석이 그새 그만뒀을 리는 없고. 어딜 간 거야?”
의심이 풀리고 나니 피곤도 한꺼번에 몰려드는지 크게 하품까지 해댔다. 그리곤 뒤늦게서야 도 실장을 찾았다.
“밥 챙기러 안채에요.”
“밥? 흠, 그렇지. 도 실장이 그런 거 하나는 또 적극적으로 잘 챙기지. 하하. 주희야, 아무래도 여기 터가 아주 남다른 모양이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새로 들어오는 직원마다 하나같이 다 도 실장처럼 참한 녀석들인 걸 보면 말이야. 할아버지가 안 계신데도 내가 출장을 다닐 수 있는 건 다 도 실장 덕분이다. 알지?”
아버지는 피곤에 찌든 모습이면서도 도 실장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까지 끄덕이며 흡족해하셨다.
“네, 여전히 잘 챙겨주세요. 그러니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그보다 아버지,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얘기는 내일 하고 어서 들어가 쉬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겠다. 며칠 밤을 샜더니 저절로 눈이 감겨. 하아아암! 장 교수님 닦달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을 텐데. 몸이 아주 물먹은 솜 같구나.”
“장 교수님요?”
장 교수가 그저께 가게를 다녀가면서 언뜻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던 일이 생각나 되물었다.
“계획서를 좀 더 검토해 봐야 할 것 같아 아직 확답은 드리지 못했지만 아마 조만간 같이 작업하게 될 것 같다. 읏차, 이제 퇴임도 얼마 남지 않으신 분이 무슨 일 욕심이 그리 많은지, 원.”
부루퉁한 표정으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리해서 일정을 앞당겨 왔다는 거 자체가 장 교수의 부탁을 수락하겠다는 뜻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게 한 달은 더 걸릴지도 모른다던 아버지가 일찍 귀가한 진짜 이유인 듯했다.
“장 교수님 좋아하시겠네요. 어서 들어가서 씻고 주무세요.”
“그래, 더 있다간 바닥에 쓰러져서 잘 것 같구나. 도 실자아앙!”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커다란 짐가방을 집어 든 아버지는 안채로 통하는 문을 밀기가 무섭게 도 실장을 크게 부르며 사라졌다.
그 뒤를 석이 재빠르게 문틈 사이를 비집고 따라 나가는 게 보였다.
주희는 순간 석을 부르려다 내버려 뒀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언제나 데면데면한 아버지를 석이 쫓아갔을 리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배가 고픈 거겠지.”
벽시계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항상 으르렁거리는 도 실장과 석이었지만 밥 시간때만은 항상 석이 먼저 꼬리를 내렸었다. 그러니 지금 석이 안채로 달려간 건 도 실장을 찾아서일 확률이 컸다.
주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런데 방에서와 달리 온몸을 짓누르던 우울 세포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볍고 머릿속이 전에 없이 맑아졌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책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탁 선생님이 오래전에 주문하신 책이지.”
갑자기 의욕이 샘솟아 기분 좋게 도 실장이 건네준 하얀 장갑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딸랑!
또다시 손님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
한 사람이 들어선 것만으로 갑자기 가게가 비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남자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고 왜 왔는지를 가늠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신우가 미동도 않고 가만히 주희의 안색을 살피다 혼잣말을 했다.
어제 아파트 사고 현장을 빠져나와 차에 오르자마자 죽은 듯이 쓰러져 잠든 그녀였다.
그가 직접 안아다 침대에 눕힌 순간에도, 도 실장의 시끄러운 호들갑에도 눈을 뜨지 못하던.
파리하게 누워 있던 그녀의 모습이 오전 내내 그의 머릿속을 맴돌더니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가서림 앞이었다.
마치 어떤 사악한 신의 술법에 걸려들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밀었다.
스스로에게 충분한 설명이 필요한 행동이란 걸 알았지만 제법 생기를 되찾은 그녀를 눈앞에서 보니 사소한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왜……. 약속은 다음 주 아니었나요?”
심지어 반갑지 않다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있음에도 그의 관심은 오롯이 그녀의 안색에 가 있었다.
창백함이 사라진 그녀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그의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여기 손님은 미리 약속을 잡고 와야 하는 건가? 미처 몰랐군.”
“아, 아니,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고맙다는 말을 들을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이런 문전박대를 당할 거라고도 생각 못 했는데. 다음부터 여길 방문할 땐 필히 약속을 잡고 오도록 하지.”
당황해 얼굴까지 붉히며 말을 더듬고 있는 모습이 재밌어 그가 한 번 더 농담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에겐 농담하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어젠 정말 고마웠어요. 그리고 이가서림은 언제든 손님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가서림이 문을 연 동안엔 박신우 씨가 오시고 싶을 때 언제든 오셔도 됩니다.”
어느새 주희의 두 볼을 물들이고 있던 예쁜 복숭앗빛이 사라지고 정색한 표정의 이가서림 주인이 서 있을 뿐이었다.
“참고하도록 하지. 책을 좀 둘러봐도 되나?”
“얼마든지요.”
그녀의 표정이 주는 재미는 사라졌지만 가게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를 편안하게 감싸던 분위기는 여전해 잠시 더 이 안정된 기분을 즐기기로 했다.
손을 뻗어 아무 책이나 꺼내려던 신우가 문득 한 가지, 차사에 대한 충고는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책상 위에 쌓여 있는 낡은 책들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동안 충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마치 정지된 화면 같은 그녀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시 차사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충고를 해줄 필요가 있을까?’
차사도 사건을 완전히 해결한 것 같고, 그녀도 제법 편안함을 되찾은 것 같아 보이는데 괜한 충고로 어제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건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신경 쓰여.”
그녀의 그림 같은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혼잣말을 하며 뒤돌아섰다.
“……!”
신우는 보지 못했지만 신우의 혼잣말에 책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주희의 어깨가 흠칫했다.
주희가 조심스레 고개를 드니 한 책장 앞에 서 있는 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어마어마한 사람.
자꾸만 그가 의식돼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책이라도 발견했는지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있는 그를 보니 금방 갈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가격 책정을 하려면 책을 꼼꼼히 살피고 집중해야 하는데 한숨을 쉬며 다시 고서를 봐도 온몸의 신경이 자꾸 한 사람에게만 쏠렸다.
당황해 시선을 돌리다 보니, 가게 한쪽에 도 실장이 잘 손질해서 쌓아 놓은 책들이 보였다.
‘그래, 지금은 차라리 몸 쓰는 일을 하는 게 낫겠어.’
책 모서리마다 사포로 갈아 깔끔하게 해놓은 책들.
그녀가 지금 생각 없이 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일인 것 같았다.
주희는 수북이 쌓여 있는 책들을 장르별로 분류한 뒤 맨 위에 쌓인 소설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드르륵!
가나다 배열 중 ‘다’열에 해당하는 책이었기에 사다리를 움직였다.
어린 시절 놀이터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건 그녀에게 있어 매우 익숙한 놀이터의 놀이기구 같은 거였다.
다른 이가 보면 한 손에 책을 든 채 높은 사다리를 오르는 모습이 아찔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주희에겐 오랜 세월 단련된 안정된 자세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위협을 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뭐 하는 짓이지?”
느닷없이 바로 등 뒤에서 들린 야수의 낮은 으르렁거림에 흠칫 놀라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던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기우뚱 균형이 무너진 몸이 기울기 시작하는데, 너무 어이없는 사태에 비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사다리를 다섯 칸이나 올랐었다는 사실만이 떠올라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디 하나는 틀림없이 부러졌다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툭!
들고 있던 책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어디 하나 부러지는 몸의 고통은 없었다.
“바본가? 이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사다리를 오르게?”
대신 서늘한 신경질 폭탄이 강도 높게 떨어졌다.
주희가 살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자 천장을 배경으로 신우의 싸늘한 얼굴이 클로즈업돼 있었다.
“그쪽이 뒤에서 소리만 지르지 않았어도 아무 일 없었어요. 그리고 어제부터 왜 자꾸 반말이세요?”
그의 얼굴을 보니 방금 전 너무 놀란 게 억울해 고맙다는 말 대신 부루퉁하게 그를 탓했다.
그것도 어젠 아무 소리 않다가 이제 와 반말 트집까지 더해서.
“어제부터 어린애도 하지 않을 행동들만 골라서 하니까. 할아버지 친구분 손녀라 지금까지 반존칭어 써준 것만도 고마운 줄 알아.”
그 말이 그의 화를 증폭시키고 말았는지 그의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몇 마디 더 했다가는 어쩌면 그의 품에서 압사당할지도 몰랐다.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두 팔에 아까보다 더 큰 힘이 불끈 들어가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괜스레 기분만 더 나빠졌다.
“이 입술은 또 뭐지? 그래도 네가 잘했다고 입술을 내밀고 있는 건가?”
“그쪽만 아니었으면 안 떨어졌어요. 정말로요.”
고집을 부리는 것도 사람을 봐가면서 적당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때까지만 해도 잘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네가 떨어진 게 다 내 오지랖 때문이다, 이 뜻인가?”
“잘 아시네요. 이제 아셨으니 어서 내려주기나 하세요. 이런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서로가 곤란해질 테니까요.”
그의 얼굴을 조금만 더 찬찬히 살폈으면 좋았을 것을.
제 억울한 감정에만 취해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의 목소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감지하지 못했다.
“곤란해져?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누가 보면 곤란하다는 건지 어디 직접 시험해 보지.”
그녀의 몸이 조심스레 책장에 기대 세워지고, 국어책 읽는 것보다 더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커다란 손에 의해 턱이 치켜 올라가고 책장과 그 사이에 빈틈없이 몸이 갇혔을 때야 비로소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반신반의해 볼 틈도 없이 주희의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뭐 하는…… 읍!”
조각 같은 얼굴이 바로 코앞에 클로즈업되고, 놀란 외침을 토해내려던 입술이 통째로 집어삼켜졌다.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거친 손길이, 그의 매서운 눈매가,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어 버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은 따뜻한 숨결처럼 부드러웠고, 마치 세필로 그림을 그리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입술이, 그의 혀가, 자신의 입술 구석구석을 떠도는데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숨결에 집중하고 말았다.
평소에도 이상할 정도의 낯익음에 당혹스러웠는데 지금은 그저 낯익음의 정도를 넘어서 진한 그리움의 향기마저 나는 것 같았다.
이건 뭐지?
정체불명의 감정에 휩싸인 주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눈, 감아도 좋아.”
신우의 목소리가 처음 느끼는 욕망에 허스키하게 잠겨 들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 그녀의 입술을 덮치고 봤는데, 너무 맛있는 향기가 난다.
꽃잎처럼 달콤한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또 훔치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내면에선 자꾸만 갈증이 심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욕망에 겨워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눈을 감으라고 요구하긴 했지만, 그게 무슨 마법의 주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같은 주문에 걸린 그도 따라서 눈이 감겼다.
아주 잠시 그녀를 혼내려고 시작한 이기적인 입맞춤이 어느새 마법에 걸린 입맞춤으로 변해 버렸다.
명부에서도, 인간계에서도 무엇도 욕망해 본 적 없는 그가, 그녀의 작은 입술이 전부인 것처럼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더 깊은 달콤함을 찾아 그녀의 입 안 깊숙한 곳을 휘저어댔다.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못하던 그의 몸이 점점 신열이 오른 듯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 갔다.
아주 작은 그녀의 숨결 하나조차 놓치고 싶지 않아 집요하게 더 깊은 곳을 찾아 그녀의 입 안을 헤맸다.
어느새 욕망을 좇는 음흉한 손으로 변한 손이 그녀의 허릴 거칠게 감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음…….”
점점 짙어지는 욕망에 머릿속이 멍해져 갔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져 눈을 떠야 했다.
바로 앞에 놀라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있었다.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 확 와닿았다. 더불어 여기가 어디인지도.
의식이 점점 선명해지며 안채로 통하는 출입문 저편에서 쿠당탕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 식충이가! 그건 네 게 아니라고! 얼른 안 내놔!”
뜰에서 잡기놀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얼마나 집중했으면 저 큰 목소리를 이제야 감지했다.
‘미친.’
그녀를 당황시키려고 한 키스였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조차 믿기지 않는 자신의 즉흥적인 행동에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거친 입맞춤 탓인지 그녀의 입술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붉은 입술을 다시 삼키고 싶은 욕망에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처음 키스를 시도한 이유를 애써 기억해냈다.
“그러니까, 잘못했으면 그냥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
적반하장 격인 신우의 말도 안 되는 말이 주희의 눈빛마저 되돌렸다.
아니, 살짝 뒤틀린 독기를 품게 했다.
“키스, 처음 해보세요?”
“……!”
“지금 같은 말도 안 되는 키스를 시도했을 땐 어색한 어깃장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는 거예요. 아니면 성추행, 성폭행으로 신고당하실 테니까요. 다음에 또 누군가에게 키스하실 땐 필히 참고하셨으면 좋겠네요. 키스가 하고 싶으면 먼저 ‘키스하고 싶다’ 구애를 해야 한다는 걸요.”
주희가 고개를 발딱 치켜들고는 다다다 숨도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구애를……. 다음부터는 참고하지.”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리는 그의 태도에 주희는 왠지 모르게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말로만 알았다고 하지 마시고 어서 이 팔이나 풀어 주세요.”
말과 달리 계속해서 허리를 옥죄고 있는 그의 팔이 신경 쓰여 퉁명스럽게 요구했다.
“괜찮겠어?”
그런데 풀라는 팔은 풀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뜬금없이 묻고 있었다.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그럼 괜찮지, 안 괜찮겠어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야 그의 팔이 풀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그의 팔이 풀린 것까진 좋은데 그녀의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르륵 밑으로 주저앉고 있었다.
“……!”
다행히 그녀의 몸은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전, 다시 그의 품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몸이 조심스레 소파에 앉혀졌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군.”
그는 결코 비웃지 않았다. 비웃긴커녕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오히려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가 걱정스레 쳐다보는 시선에 그녀의 얼굴은 한여름 태양 아래 익어가는 복숭아보다 더 발갛게 타들어 갔다.
“식충이 너, 오늘 저녁은 없을 줄 알아!”
도 실장의 고함 소리가 한층 더 또렷해지는가 싶더니 벌컥 안채 문이 열렸다.
도 실장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워 보긴 처음이었다.
“주인님, 배고프시죠? 이 박사님 빨래 좀 돌려놓고……. 박 회장님? 왁! 주인님, 주인님 얼굴이 왜 그래요?”
밥 쟁반을 받쳐 든 채 가게로 들어서던 도 실장이 먼저 신우를 보고 놀라더니 주희를 보고는 더 놀라 달려들었다.
그런데 도 실장이 놀라든 말든 신우의 관심은 도 실장이 들고 들어온 쟁반에만 가 있었다.
“이 시간까지 아직 밥도 먹지 않은 거야?”
방금 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던 그녀의 몸을 떠올리며 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하지만 상대방 말을 듣지 않기로는 도 실장이 한 수 더 위였다.
“우리 주인님, 혹시 박 회장님이 그러신 거예요?”
“뭐?”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 주인님 얼굴이 이 모양이냐고요?”
신우가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탁자 위에 쟁반을 탁 내려놓은 도 실장이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그, 그만하세요, 도 실장님. 그런 거 아니에요.”
도 실장의 말에 가장 당황한 건 주희였다.
그의 입에서 키스가 어쩌니저쩌니 하는 말이 나올까 조마조마해 신우의 눈치를 보며 말렸다.
“그런 거라면, 방금 전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해 놀라긴 했지. 그럼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게 그것 때문이었나?”
그런데 헛다리를 짚는 건 신우도 막상막하였다.
아니면 그녀를 생각해 도 실장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고단수 수법인가?
본심이야 어쨌든 그 덕분에 주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그게 무슨? 아니, 설마 주인님 또 사다리에 올라가셨어요?”
물론 도 실장의 시끄러운 잔소리까지 피하기는 힘들었다.
“책 정리할 게 많이 쌓여 있어서요.”
“그런 건 제가 한다니까요! 아우, 정말! 내가 주인님 때문에 제명대로 못 살아요!”
도 실장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화통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신우의 시선은 내내 도 실장이 탁자 위에 내려놓은 빈약한 밥상에만 가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니 도깨비 따위에게 구박이나 당하고 있는 주희가 보였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곧장 도 실장을 잡아채 뒤로 밀어낸 신우가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어어? 우리 주인님을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
주희가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도 실장이 따지고 들었지만, 신우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출입문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시끄러.”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도 실장의 말을 잘랐다.
“주인님 밥 먹어야 해요.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단 말이에요.”
“밥 먹여 보낼 테니, 가게나 똑바로 지켜.”
제 주인 밥 하나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하는 못난 도깨비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안고 있는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아 말을 남겼다.
“하지만…….”
“도 실장님, 걱정 마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가게 좀 부탁해요.”
그냥 내버려 두면 끈질기게 같은 상황을 되풀이할 것 같아 주희가 한숨을 쉬며 도 실장을 말렸다.
그의 온도가 갑자기 왜 이렇게 싸늘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가게를 나설 때까진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얼굴을 화끈하게 달구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려주세요.”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기분이 그대로 반영된 불퉁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내려달라고?”
“제 몸 상태를 저보다 그쪽이 더 잘 아시는 모양이죠?”
“왜 이렇게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거지?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신우의 모습에 주희는 어이가 없었다.
“강제로 끌려 나오다시피 했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서 내려주기나 하세요.”
싸늘하게 이유를 말해 주었음에도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가만히 서 있자 더 신경이 쓰이게 된 건 그녀였다.
이곳은 그녀가 평생을 살아온 동네였다.
남자의 품에 안겨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그녀를 알아볼 사람이 널리고 널린 거리 한복판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어서 내려주세요. 보는 눈이 너무 많잖아요.”
결국 그녀가 먼저 당황한 표정을 지어야 했고, 거리를 힐끗거리며 다시 요구해야 했다.
구걸에 가까운 그녀의 해명이 그제야 통했는지 드디어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있었다.
그녀를 언제나 어린애 취급하는 아버지조차 이렇게 안고 돌아다니시진 않았다. 그런데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아 괜스레 없는 먼지까지 탈탈 털어야 했다.
“남의 시선을 너무 많이 의식하는 거 아닌가? 너무 소심하군.”
“내가 소심한 게 아니라 그쪽이 너무 뻔뻔한 거죠.”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쳐다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그를 향해 바락 쏘아붙였다.
“그쪽처럼 잘나면 그런 뻔뻔함이 당연한지 모르겠지만, 난 달라요. 제발 좀 상대방도 의식해 줬으면 좋겠어요. 괜한 오해로 이상한 소문나는 거 싫으니까. 그리고 식사 약속을 잡을 땐 미리 의사를 물어봐 주시고요. 다음에 또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시면……!”
그리고 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싫어 시큰둥하게 몇 마디 더 덧붙일 때였다.
쉬이이잉!
돌풍이 일며 겨울 찬바람이 전신을 휘감고 지나갔고, 외투를 입지 않은 몸이 저절로 떨려 말을 잇지 못했다.
“입어.”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녀의 잔소리를 듣고만 있던 그가 그녀의 어깨 위로 자신이 입고 있던 긴 코트를 벗어 둘러주며 말했다.
“이러면 그쪽은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저격하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칼바람에 겨우 얇은 셔츠 한 장 차림으로 서 있는 그를 보니 저도 모르게 가시 빠진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건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볼 때마다 위태위태한 그 약골 체력이나 어떻게 좀 고민해 보는 게 어때?”
아무래도 이 눈앞의 남자는 호의를 베풀고도 욕을 먹는 아주 희한한 재주를 지닌 모양이다.
어떤 말을 하면 상대가 기분이 나쁜지 연구하고 분석해 단어 선택을 하는 것 같다.
마치 인간으로 전락한 그녀의 존재를 알고 비꼬기라도 하는 것같이 들렸다.
발등에 닿을 정도로 긴 남자 코트를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그의 눈을 싸늘하게 쏘아봤다.
“전, 약하지 않아요.”
그에게 자신의 말이 얼마나 웃기게 들릴지 모르지 않지만 그녀는 힘주어 따지듯 말했다.
하지만 눈가에 힘을 준 의미가 무색하게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툭!
거리를 지나는 어느 행인의 아주 작은 어깨 부딪침 한 번에 그녀의 다리가 곧바로 비칠댔던 것이다.
차라리 바닥에 고꾸라졌으면 좋았을 것을, 난감하게도 그녀는 또 어김없이 너무도 익숙한 그의 가슴에 코를 박고 말았다.
귓불이 화끈 달아올랐다.
“몸은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으니, 난 이쪽 뜻에 따르도록 하지.”
그녀의 몸이 어느새 달랑 들려 올라갔고, 디즈니 공주님 같은 자세를 취하게 됐다.
그의 목소리에 나직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건 아마 기분 탓만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려달라 몸부림치지 못했다.
다시 비칠댈까 걱정이 돼서가 아니라, 몹시 당황스럽게도 갑자기 훅 끼쳐오는 너무도 진한 그리움의 향기에 정신이 멍해져서.
정말 이상했다.
깊게 호흡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그리움의 향기라니.
* * *
휘이잉!
식당을 나와 이가서림으로 향하는 거리의 바람은 여전히 매섭고 차가웠다.
밥을 먹어서인지 몸도 훨씬 따뜻해지고 무엇보다 천만다행히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다.
‘아깐 너무 먹은 게 없어서 그랬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무례한 짓을 당하고도 그립다는 생각을 했을 리 없다.
자신의 실수를 배고픔으로 정당화시키고 나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경호원이 안 보이네요.”
식당을 찾을 땐 제정신이 아니어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항상 그와 한 세트로 움직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혼자 다니기도 해. 그보다, 어제 그런 귀신을 자주 보나?”
멍하니 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답을 신중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집주인 입장에선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귀신 보는 여자와는 계약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재계약, 못 하게 될지도…….’
긴장해 절로 신음 소리가 샐 것 같은데 이어진 신우의 말은 그녀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도 실장 말로는 현신하지 않은 차사까지 본다고?”
어제 사건 현장에서의 신우를 떠올려 보면, 귀신이나 차사를 보는 그녀를 알고도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밤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귀신도 모자라 차사까지 보는 세입자라니, 어떤 집주인이라도 계약서를 쓰고 싶지 않을 게 분명했다.
몸 안을 채웠던 밥 에너지가 구멍 숭숭 뚫린 스웨터를 통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새삼 다시 찾아든 추위에 어느새 제 옷처럼 어깨에 두르고 있던 그의 코트 자락을 본능적으로 단단히 여몄다.
가게 재계약은커녕 다른 이들처럼 질겁해 도망가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그녀가 귀신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낯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다.
새미가 그랬던 것처럼.
“그게…….”
저절로 고개가 아래로 처지고 시선이 낡은 운동화에 가 닿았다. 언제 풀렸는지 운동화 끈이 제멋대로 풀려 있었다.
어떤 대답이 좋을지 고민하느라 끈을 다시 묶을 생각조차 않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데, 발등 위로 스윽 검은 그림자가 졌다.
놀라 몸을 움찔하는데 아래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치게 밝은 눈을 지닌 모양인데, 다음부턴 되도록 차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아. 인간이 차사와 엮여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자신의 귀가 이상해진 걸까? 그의 말은 마치 그녀가 귀신을 보든, 차사를 보든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들렸다.
주희는 넓고 넓은 등을 보인 채 운동화 끈을 묶고 있는 남자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무섭지 않으세요?”
이 세상 미모가 아닌 남자가 태연하게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며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귀신을 보고 차사를 보는데, 제가 무섭지 않으시냐고요?”
그가 천천히 일어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현신하지 않은 차사까지 본다고 해서 좀 놀라긴 했지만, 보통 인간들보다 밝은 눈을 가졌다고 해서 무서워할 이유가 있나?”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되묻고 있는 그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고 싶어 하니까요.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이는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잖아요.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고, 되도록 멀리하고 싶은…….”
“네 말은 지금, 내 눈이 어둡다고 상대를 탓하는 남자로 보였다는 말인가?”
다른 이들과 너무 다른 그의 반응에 멍하니 대답하는데 그가 점점 표정을 굳히더니 까칠하게 되물었다.
“그게 보통 인간이잖아요.”
“그럼 난 인간이 아닌가 보지.”
그가 대놓고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소리에 도리어 당황한 건 그녀였다.
“아, 아니, 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네 말은 충분히 이해했으니 그만하지. 내가 차사에 대한 얘기를 꺼낸 건 혹시 실수라도 그들 앞에서 대왕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는 뜻이었어. 뭐 충분히 겪었을 테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또 다른 차사를 보게 되더라도 되도록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고.”
그가 결코 화를 낸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더해질 때마다 그의 주변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지.”
서늘해진 온도만큼이나 차가워진 목소리가 길을 재촉했고, 그는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 있었다.
‘왜?’
왜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변했는지 머릿속에 의문이 구름처럼 일었지만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가서림’의 낡은 간판이 보이는 거리에 도착했을 때, 가게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낯익은 여인의 뒷모습이 그녀의 이성을 모조리 빼앗아가 버린 탓이었다.
‘설마…….’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움직여지지 않는 몸과 달리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렸다.
“안 들어갈 생각인가?”
외투도 없이 하얀 원피스 차림으로 서 있는 여인을 뒤로한 채 신우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여인이 뒤를 돌아봤다.
‘왜 네가?’
돌아선 이의 모습에 주희는 속으로 신음 소리를 삼켜야 했다.
눈동자가 뜨거워지고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은 느낌에 순간적으로 몸이 흔들렸다.
“의사를 부르는 게 좋겠군.”
어느새 다가선 신우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굳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신우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뭔가 그녀를 향해 말하려 하고 있었다.
주희는 더 뜨거워지는 눈을 감당하지 못해 질끈 감아 버렸다.
‘새미야…….’
“얼굴이 백지장 같은데 괜찮다는 말을 하는 건가?”
몹시 짜증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몸은 어느새 또다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들어가서 쉬면…… 괜찮을 거예요. 미안하지만 가게까지만 좀 부탁해요.”
마치 괴물 쳐다보듯 하얗게 질려 뒷걸음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5년이나 지난 지금 새미가 그녀의 앞에 다시 서 있었다.
새미가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인간의 일이 아닌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저, 저기, 주희야…….”
“미안하지만 가게 안까지 좀 데려다주세요. 어서요.”
주저하는 새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주희는 못 들은 척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신우를 재촉했다.
그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널 부르는 것 같은데, 모른 척해야 될 사람인가?”
무심한 그의 목소리에 주희가 눈을 번쩍 떴다.
“보여요? 신우 씨한테도?”
주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고, 신우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가를 꿈틀거렸다.
“내, 내려주세요.”
신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들뜬 목소리로 요구하는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새미를 힐끗 쳐다본 신우가 별말 않고 주희를 내려주었다.
주희는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웠던 아까와 달리 새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혼이 아니란다.
“주희 너, 방금 그거, 혹시 날 귀신 취급했던 거니?”
눈을 가늘게 뜬 채 쏘아보고 있는 여인은 그녀가 기억하는 그 새미가 맞았다.
“새미야…….”
주희가 감격에 겨울 틈도 없이 새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와아! 기집애 봐. 5년 만에 보는 친구를 졸지에 귀신이나 만들고.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안 변했어. 비실비실한 것도 여전하고. 바보같이. 이러니까 자꾸 안 좋은 게 꼬이는 거야. 잘 좀 먹어!”
5년이 지났는데도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지 마치 엊그제 만나 수다를 떨었던 친구처럼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따지고 드는 목소리가, 목을 껴안고 있는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감추진 못했다.
새미는 그녀가 가끔 귀신을 본다는 걸 알고도 그녀를 멀리하지 않은 유일한 친구였다.
‘어디 있어, 어디? 내가 쫓아 줄게.’라며 그녀를 막아서고 소금을 뿌려대던 친구.
갑자기 돌아가신 아주머니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새미가 뒷걸음질 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미를 혼자 키우느라 언제나 가시를 세우고 살던 아주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후회와 진심이 담긴 말이었기에.
[널 어쩌면 좋으니, 새미야. 이렇게 일찍 떠날 줄 알았으면 그 사람을 찾아보기라도 하는 건데. 미안하다, 새미야……. 사랑해.]
아주머니의 혼이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새미를 보듬어 안은 채 속삭이던 말을 그녀는 넋을 놓은 채 눈물 흘리며 되뇌어 주고 말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지? 반가움의 표현이라면 이미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친절하지 않은 신우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도 비로소 의식됐다.
“새, 새미야.”
당황해하는 주희의 목소리에 새미가 팔을 풀었다.
“기집애, 5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럼 이 정도도 안 하니?”
돌아왔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새미의 말에 두근대며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이 동넨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안 변했더라. 건물이며 가게며 다. 음, 아니다. 변한 게 있긴 하더라. 사람이 말이야. 여기 오는 길에 건이 오빠를 만났는데, 파리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던 그 순둥이 오빠가 제복을 입고 있었어. 순경이라니, 완전 안 어울리는 거 있지.”
잠시 입술을 비죽대던 새미가 이내 재잘재잘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하자 5년의 공백이 한순간에 메워지는 것만 같았다.
주희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작은 미소가 번져갔다.
“언제까지 여기 서서 잡담을 하고 있을 생각이지? 안 들어갈 건가?”
추억에 젖어 든 주희의 기분과 달리 신우는 새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길을 재촉했다.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는 신우의 태도에 주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신우보다 더 그녀를 당황시킨 건 새미였다.
“주희야, 누구니? 저런 냉혈한은. 절대 네 타입 아니니 남자친구는 아닐 테고. 어떻게 아는 사이야?”
새미가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서 귀에 대고 속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우의 귀에 이상이 있지 않는 한 충분히 다 들릴 만한 소리였다.
“그게…….”
힐끗, 난감해진 그녀의 시선이 신우를 향했다.
집주인? 맞선남?
뭐라고 대답하는 게 오해를 부르지 않을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신우의 까칠한 대답이 먼저 나왔다.
“친구라고? 내가 보기엔 무늬만 친구인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쓰러지기 직전인 사람을 이 추위에 의도적으로 바깥에 붙들어 두려고 하는 이를 보통은 친구라고 부르지 않지. 친구가 아니면, 그럼 선무당인가? 5년이나 만나지 않았다면서 상대가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까지 자신하다니 말이야.”
신우의 낯선 태도에 주희가 당황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가 좀 차가운 면이 있긴 해도 초면인 사람을 이렇게 비꼴 정도로 꼬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새미는 새겨들은 것 같지 않았다.
“앗, 맞다! 그러고 보니 너, 방금 전에 쓰러질 것처럼 비틀댔었지! 괜찮은 거야?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 아니다. 저 사람 말대로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얘기하자. 어서.”
새미가 막무가내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이가서림의 문을 밀며 외쳤다.
“할아버지이이이! 저 왔어요! 신 실장님! 새미 왔어요!”
새미의 들뜬 목소리와 반대로 주희의 얼굴엔 다시 그늘이 졌다.
이제 이가서림에 새미가 찾는 할아버지와 신 실장은 없었던 것이다.
* * *
오후 내내 눈물바다가 되었던 이가서림에 밤이 찾아들었다.
“아이고, 머리야. 그놈의 사이렌 울음소리에 아직도 귀가 먹먹한 것 같네.”
아직도 귀가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도 실장이 귀를 막았다 뗐다 했다.
대성통곡을 하던 새미와, 그런 새미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신우까지 겨우 돌려보내느라 한 개고생을 떠올리니 저절로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징하다, 징해. 어떻게 그렇게 몇 시간을 울어댈 수 있는 거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때, 이 박사도 주희도 슬픔에 잠기긴 했지만 누구도 새미처럼 대성통곡을 하진 않았다.
대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사방으로 이리 툭, 저리 툭 부딪히며 마치 영혼 없는 껍데기가 움직이는 것 같아 아슬아슬했었지만.
“그나저나 주인님을 귀신 쳐다보듯 하며 도망칠 땐 언제고, 왜 다시 와서 그 난리래?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질 땐 언제고. 쯧! 하여튼 주인님은 속도 없어요, 속도. 자비로움이 아주 상제급이라니까.”
유일한 친구를 잃은 그때 주희의 퀭했던 얼굴과 그런 일을 당하고도 또 아무 소리 않고 다 받아 주고 있던 주희가 떠올라 도 실장이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릴 때였다.
덜컥!
“하아암! 상제급이라니, 뭐가 상제급이라는 거지?”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며 자러 들어갔던 이 박사가 크게 하품을 하며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다.
“벌써 일어나셨네요. 내일까지 못 일어나실 것 같다더니.”
“어디서 자꾸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잘 수가 있어야지. 난 또 우리 주희가 우나 싶어서 일어났더니 아주 잘 자고 있더라고. 무슨 놈의 꿈이 그리 리얼하든지, 아직도 귓가에 징징 울리는 것 같다니까. 하아암!”
헐! 우는 소리가 났던 게 몇 시간 전인데 이제 일어나 우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니.
곰도 이런 곰이 없었다.
“꿈이 아니라 실제 울긴 울었죠. 주인님이 아니라 새미 씨가요. 아주 대성통곡을 하고 갔습니다.”
“하아암! 새미? 새미가 돌아왔어? 주희 좋아하겠네. 그래, 갔던 일은 잘됐대?”
연거푸 하품을 하던 이 박사가 새미란 말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잘됐냐니, 뭐가요?”
“뭐냐니? 당연히 새미 아버지 일이지.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제 어머니 장례식 다음 날 다급하게 떠났잖아. 주희가 할아버지 심부름 가서 못 보고 간다고 나한테 대신 좀 전해 주라던데? 그날이 아마 내가 인도에 출장 가던 날이었지? 도 실장도 알잖아? 그때 인도 일을 하게 돼서 내가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아니지, 참 그때는 도 실장이 없었지. 신 실장이 있을 때였으니. 하여튼 출장 다녀와서 내가……. 음, 가만. 내가 이 얘기를 우리 주희한테 전했던가? 왜 기억에 없지?”
이 박사가 자다 일어나 새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으며 5년도 더 전의 일을 기억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잊어먹을 게 따로 있지!
도 실장의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었지만 이 박사 말대로 신 실장으로 변했을 때의 일이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고구마처럼 벌겋게 물들였다.
주희가 그 사실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둔탱이 아버지란 인간은 모든 사람이 다 제 마음같이 곰인 줄 안다.
주희야 제 아버지가 귀신도 붙지 못할 정도로 깨끗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 안심이 된다지만, 도 실장이 보기엔 아무리 봐도 그저 뇌가 깨끗한 사람처럼 보였다.
“도대체 그 머리로 어떻게 박사 학위를 따신 겁니까?”
“그러게. 발굴 작업만 하면 왜 항상 다른 건 다 잊어버리게 되는지……. 어쩌지, 도 실장? 주희한테 뭐라고 하지?”
“어쩌긴 뭘 어쩝니까?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셔야죠. 주인님이야 또 흐리멍덩 넘어가겠지만 새미 씬 아닐 것 같으니 각오 단단히 하셔야지요. 그보다, 얼른 전화나 받아요. 방금 전부터 계속 울리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못 느끼세요?”
멍하니 도 실장의 신경질적인 말을 듣고 있던 이 박사가 휴대폰에 뜬 발신인을 보고는 눈을 빛내며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장 교수님. 아닙니다. 지금 서울입니다. 일찍 마무리 짓고 올라왔습니다. 오늘요? 괜찮습니다. 조금 자고 일어났더니 그 정돈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곧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또 일이세요? 이 밤에?”
통화를 끝내고 곧장 그를 보는 이 박사의 눈에 담긴 총기를 보며 도 실장이 먼저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금방 다녀오지. 혹시 주희 깨어나면.”
“다녀오세요. 깨어나실 것 같지 않지만 혹시 깨면 장 교수님 뵈러 갔다고 전할게요.”
일 생각밖에 없는 사람을 붙들고 징징거려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항상 그랬던 것처럼 포기하고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이 박사는 자다 깬 그 모습 그대로 나가 10년도 더 돼 덜덜거리는 고물 SUV를 끌고 사라졌다.
“에휴, 누굴 탓해. 다 내 죄지, 내 죄.”
이 박사 어릴 때만 해도 신동이 났다고 이 거리가 떠들썩했었는데, 지금은 그 좋은 머리로 땅이나 파고 돌아다닌다.
그게 다 이 박사가 역마살이 낀 탓이라 믿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터에 눌러앉은 무능한 도깨비 때문인 것 같아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