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7/20)

5장

벽을 장식하고 있는 두꺼운 장서들에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책장 모서리 하나하나까지 공방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동서양이 묘하게 어우러진 격조 높은 아름다운 공간.

햇살조차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든, 현와원 설계가의 혼이 느껴지는 서재였다.

왠지 서재가 사람을 가릴 것같이 느껴지는 곳이었지만, 신우는 마치 자신의 침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거의 한 달여 만에 출근 없는 주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달그락.

햇살을 등지고 미뤄 뒀던 서류를 훑고 있던 신우가 겨우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끄러미 그것을 쳐다봤다.

언제나 마시던 차인데 오늘은 뭔가 한 가지 빠진 듯한 맛이 났다.

그 탓에 어제 이가서림에서 마셨던 차맛이 더 선명하게 기억나 버렸다.

“어느 차밭에서 들여온 찬지 물어봐야겠군.”

차맛이 아니라 차를 우려낸 주인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다시 서류에 정신을 집중했고, 이른 시간부터 많은 시간을 할애한 서류 파일을 마침내 덮었다.

한 문화재연구소에서 제안한 가야 문화재 발굴에 관한 파일이었다.

신우가 마호가니 책상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파일을 바라봤다.

제안서가 문제 될 건 없었다. 요청한 금액도 연구 규모로 보면 타당해 보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뭔가 거슬리는 찜찜함이 남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바로 차 실장이 들어왔다.

“오늘은 올 필요 없다고 했던 거 같은데요.”

“지금쯤이면 다 보셨을 거 같아서요.”

“김 이사님 쪽에서 또 재촉이 온 모양이군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김 이사가 차 실장을 얼마나 달달 볶았을지 상상이 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되도록 김 이사님 쪽과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차피 나가야 할 자금이라 사인을 하긴 했지만 김 이사님이 꼭 이 연구소만 고집하는 이유가 뭔지 차 실장님도 모르십니까? 자금 요청이 들어온 연구소가 이곳만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첫 타이밍의 문제가 아닐까요? 김 이사님이 고고학 발굴에 한창 관심을 보이시던 시기와 한 문화재연구소에서 연구 자금 지원 요청이 들어온 타이밍요.”

“할아버지께서도 외가 쪽 사촌에 팔촌 격인 김 이사님과 시빗거리를 만들기 싫으셨을 테니, 그 한 번의 투자가 지금까지 관행으로 굳어졌을 거라는 말입니까?”

“다른 연구소보다 괜찮은 실적을 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첨부된 자료대로라면 충분히 더 투자할 가치가 있더군요. 그대로 진행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찜찜한 마음 때문에 잘 추진해 오던 일을 멈출 순 없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직접적인 연이 있는 사람 중 몇 안 되는 친척 중 하나.

할아버지가 그랬듯 그도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김 이사를 멀리할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쉬십시오.”

“차 실장님, 제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시죠?”

“정말 잘하고 계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박 회장님께서 보셨다면 많이 대견해하셨을 겁니다.”

뜬금없는 신우의 감사에 신우가 덮어 놓은 파일을 집어 들던 차 실장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 거의 한 달 만이시죠? 푹 쉬시고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나가시다 마응산 씨 보이면 좀 들어오라고 전해 주십시오. 오늘은 아침 내내 보이질 않더군요.”

“응산이라면 오늘은 정원 손질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응산이 정원 손질을요?”

“네. 회장님 돌아가시고 정원사가 갑자기 그만둬서 새로 구하려고 했는데 얼마 전 응산이 시간 남을 때마다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우선은 해보라고 했습니다. 곧 새로 알아보겠습니다. 현와원에 워낙 나무들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응산이 경호 일을 하면서 돌보기엔 무리일 거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두십시오. 나중에 보기 흉하면 알아보도록 하죠.”

현와원에 사람이 더 늘어나는 게 싫었던 신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원사를 거절했다.

“알겠습니다. 응산에게 들어오라고 전하겠습니다. 쉬십시오.”

차 실장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마응산입니다.”

노크 소리에 이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응산이 작업복 차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응산의 바짓자락에 묻은 흙이며 어깨 위의 마른 나뭇잎을 보니 차 실장의 말대로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원 손질 중이었다고요?”

현와원의 정원은 워낙 넓고 손질이 까다로운 나무가 많아서 베테랑 정원사도 손보기 힘들다고 했는데 의외였다.

“네. 현와원엔 까다로운 나무들이 많아서요. 나무들이 기분 상하지 않게 눈이 오기 전에 잔가지 정리를 해두려고요. 절 찾으셨다고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대답하고 있는 응산의 대답에 신우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응산의 말이 왠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을 그만뒀다던 정원사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가 처음 현와원에 들어와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현와원 정원사와 마주친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뒷모습이거나 흙을 일구는 구부정한 모습이 전부여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재작년,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정원사의 뒷모습은 분명히 기억했다.

[진 씨, 날이 제법 찬데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지 그러나.]

[올핸 추위가 빨리 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를 하려고요. 현와원엔 까다로운 나무들이 많아서 나무들이 기분 상하면 큰일이거든요. 눈이 오기 전에 잔가지를 정리해 둬야 합니다요.]

눈앞에 서 있는 응산의 말과 기억 속에 남은 왜소한 체구의 중년 정원사가 했던 말이 묘하게 겹쳤다.

두 사람의 엄청난 체격 차에도 불구하고 점점 의심의 골이 깊어져 갔다.

“급한 건 아니고, 여기 이 파일 속에 든 사람에 대해 알아봐 주셨으면 해서요. 그보다 정원 일에 대해선 얼마나 아시죠? 내년엔 서재 앞 정원에도 꽃이 폈으면 좋겠는데. 구근인가를 미리 심어야 하는 걸로 아는데, 그런 것도 가능할까요?”

신우가 파일을 건네며 그동안 한 번도 관심을 드러낸 적 없는 정원 일에 대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서재 앞 정원엔 이미 작약 구근을 심었습니다. 내년 봄이면 서재에서도 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파일을 받아 들고 대답하는 응산의 얼굴에 전에 없이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신우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무표정해져 갔다.

고개를 숙인 채 파일을 살피고 있는 응산을 바라보는 신우의 시선에 찬기가 돌았다.

“할아버지께서 심었으면 하셨던 꽃을, 마응산 씨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현와원에 오기도 전의 일인데 말이죠. 너무 허술하시네요, 진 아저씨.”

그의 차가운 말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응산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고개를 든 덩치 큰 응산의 얼굴에서 하얗게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한성그룹 소속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계약서를 쓰자고 했을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설마 이런 존재가 이리 가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그의 실수였다.

“마응산 씨, 아니 진 아저씨.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의 현와원 도깨비. 어느 쪽이 본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 모습을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좀 더 조심해.”

“전…….”

몸만이 아니라 목소리마저 얼어붙어 말을 잇지 못하는 응산이었다.

“그렇게 얼어 있지 않아도 돼. 계약을 해지하자고 할 생각 없으니까.”

명부의 신들은 도깨비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의 힘을 완전히 상실했다 해도 그 역시 명부의 존재였기 때문인지 응산의 존재를 안 순간 본능적으로 까칠하게 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제 명부의 존재도 아닌 그가 도깨비인 응산에게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말, 계약을 그대로 유지해 주시는 겁니까? 제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도 말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을 삼키며 되묻고 있는 응산을 신우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응산과 그는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관계였다.

도깨비란 사실을 숨겼다는 이유를 들먹여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지만 응산은 지금까지 겪어 본 어떤 경호원들보다 괜찮은 경호원이라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 현와원 도깨비는 명부신들의 선입견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괜찮은 기를 가졌으니까.

“좀 의외라 놀라긴 했지만 네가 인간이든 도깨비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 네 존재를 알게 돼 내 주변이 시끄러워진다면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 그러니 언제나 행동을 조심하도록.”

도깨비에게 존댓말을 쓸 정도로 호감이 생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깨비라 하여 이유 없이 내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도깨비로 인해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건 참을 수 없었기에 시큰둥하게 행동을 조심시키는 건 잊지 않았다.

“가만, 도깨비라……. 그럼 내 궁금증도 풀어 줄 수 있으려나?”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나 응산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궁금증이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저 다락방 창고, CCTV 어느 각도에도 잡히지 않은 두 사람이 갑자기 저 안에서 쏟아져 나왔어. 두 사람 다 귀신은 아니었고. 그러니 저곳에 도깨비길이 있다고 보는 게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이겠지. 둘 중 누가 도깨비인지 알고 싶은데. 이주희 씬가,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공간이동 능력이 있는 신은 아닌 것 같아 도깨비 쪽에 비중을 두며 물었다.

“아, 아니, 그분은 아니…….”

“그럼 도 실장이겠군.”

당황하며 말끝을 흐리는 응산의 말을 신우가 중간에 가로채며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

그의 말에 그대로 말려든 응산이 얼음처럼 굳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내심 흡족하게 웃었다.

이주희의 존재가 할아버지의 다음 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서.

“걱정 마. 내가 먼저 나서서 알은체하진 않을 테니. 그 파일 속에 든 인물에 대해 알아보는 건 다음 주부터 해도 되니 오늘은 정원 일을 마저 하도록.”

이주희가 인간이길 바라긴 했으나 막상 알고 나니 생각보다 더 기쁨이 컸는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온기가 차올랐다.

명부에서도, 인간 세상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묘한 감정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가 보겠습니다.”

그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한 응산이 서재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쿵!

방금 그가 말했던 창고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벌컥 창고 문이 열렸다.

쿠당탕!

봉두난발을 한 사내가 엎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야야!”

신우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엄살을 떨고 있는 사내에게서 떨어져 창고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창고 쪽은 조용했고,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흑, 어서 주인님을 찾아야……. 대산이에게 부탁을……. 대산아아아!”

딱 미친놈 몰골로 흐느적거리며 일어나던 도 실장이 문 앞에 서 있는 응산을 보고는 그동안 그렇게 날을 세우고 있던 것도 잊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응산’이 아니라 ‘대산’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엉엉! 대산아! 산아! 우리 주인님, 엉엉. 우리 주인님 좀 찾아줘! 주인님이 사라졌어.”

“미친…….”

도 실장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몰골로 미친놈처럼 달려들자 안 그래도 신우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응산이 버럭 화를 내려다 멈칫했다.

신우가 전에 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봐. 네 주인이 어떻게 됐다고?”

응산이 도 실장을 감싸기도 전에 신우가 손을 뻗어 와락 뒷덜미를 잡아채 물었다.

“놔! 놔! 주인님, 주인님을.”

“똑바로 말해. 이주희가 사라졌다니, 무슨 말이지?”

주인님을 찾아달라는 도 실장의 말에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지만 그는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흑, 마트에 메밀가루 사러 가셨었는데, 호박도 사러……. 흑! 아침에 가셨는데 지금까지 안 돌아오고 계시다고요. 빨리 찾아야 해요. 빨리.”

횡설수설하는 도 실장의 넋 나간 말을 듣던 신우가 잡고 있던 그의 옷자락을 놨다.

“지금, 마트 간 사람이 좀 늦게 온다고 이 난리를 치는 건가?”

어이가 없어 싸늘하게 쏘아보며 물었다. 제멋대로 뛰던 심장 소리도 정상을 되찾아갔다.

“우리 주인님, 요즘엔 마트 갔다가 늦게 온 날이 없었다고요! 저번에 귀신한테 홀려서 고생한 이후론 한 번도요! 그런데 마트엔 오지도 않았다고 하고, 김 순경님도 찾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하고. 흑, 어떡해!”

“휴대폰은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그러지? 전화 안 받으면 김 순경한테 말해서 긴급 위치추적이라도 하면 될 거 아냐?”

도 실장의 입에서 김 순경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이상하게 구정물이 튄 기분이 들어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우리 주인님, 휴대폰 같은 거 없으시다고요. 내가 그렇게 장만하시라고 우겼는데, 가게에만 있는데 휴대폰이 왜 필요하냐고 하면서……. 흑, 또 귀신한테 홀려 따라갔으면 어떡하냐고요? 이래서 내가 그 빌어먹을 차사는 도와줄 필요 없다고 했는데. 흑흑!”

“차사라니? 그녀가 현신하지 않은 차사도 본다고? 그렇다면 수명이.”

인간의 눈에 귀신이 아니고 차사가 보인다는 건 그녀의 수명이 다 됐다는 뜻이다.

왠지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고 얼굴빛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왁!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 주인님 아직 죽을 때 안 됐다고요! 차사 말이, 아직 수명부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단 말입니다. 우리 주인님은 그저 좀 특별한 눈을 가지고 계실 뿐이라고요!”

도 실장이 흥분해서 빠르게 내갈기는 말 대부분이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수명부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말만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가슴속의 답답함이 눈 녹듯 사라져 갔다.

“이씨,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대산아아아! 넌 가능하지? 어? 가능하지? 제발 우리 주인님 좀 찾아줘. 제발.”

다시 시작된 도 실장의 앓는 소리에 기대감이 실린 신우의 눈빛도 응산을 향했다.

“너 바보야? 그분이 도깨비도 아닌데 내가 무슨 수로 족적을 찾아?”

응산이 그와 도 실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

“왜 안 돼? 넌 나와 달라서 길눈이 밝잖아. 어디든 잘 찾아가잖아? 우리 주인님 찾아내! 우리 주인님 찾아내라고! 너 때문에 내 금의 기운도 다 사라졌는데, 주인님 하나 못 찾아줘? 찾아내! 찾아내라고!”

“도칠이 너.”

어린애 수준으로 생떼를 쓰는 도 실장을 쳐다보던 응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긁어 올리다 신우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안 되나?”

안 되냐, 묻고 있었지만 안 되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 기운을 몸 전체에서 풀풀 날리고 있는 신우의 낯선 모습이라니.

응산은 저도 모르게 대답을 신중히 가렸다.

“도깨비들마다 특유의 향이 있어서 그 향을 기억하며 쫓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은…….”

“있어! 도깨비 냄새! 주인님이 내 머플러를 하고 갔어. 내 머플러를 하고 갔다고!”

거의 다 죽어가던 도 실장이 응산의 말을 듣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되살아나 외쳐댔다.

“아침까지 내가 매고 있던 머플러를 마트 가실 때 꽁꽁 싸매 드렸다고. 그러니 찾을 수 있는 거지? 응? 찾을 수 있지?”

도 실장이 손을 발발 떨며 간절한 목소리로 응산에게 매달렸다.

“그렇다는군. 가능해?”

응산과 도 실장,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신우도 덤덤함을 가장해 다그쳐 물었다.

“머플러를 잃어버리지만 않으셨다면 가능할 거 같습니다.”

“가! 어서 가! 어서, 어서!”

도 실장이 응산의 팔을 잡아끌며 창고 문, 도깨비길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가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신우가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말이 나가고 나니 그녀를 당장 보고 싶다는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회장님, 도깨비길은.”

“내 맞선녀가 위험하다잖아.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귀히 여겼던 여인인데 내가 알고도 모른 척할 순 없지. 앞장서.”

도무지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곤 믿지 못할 변명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꽉 잡으십시오. 도깨비길은 매우 험합니다.”

팟!

대낮에 도깨비불이 켜지고 세 인영은 순식간에 창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흐릿한 조명에 고무 냄새와 매연 냄새가 고인 지하 주차장이었다.

유리 벽에 큼지막하게 마트 로고가 그려져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곳에 불이 밝혀져 있는 걸로 보아 영업 중임이 분명한 것 같은데 지하 주차장은 묘하게 적막했다.

드문드문 주차된 차들이 있었지만 한참 동안 다른 새로운 차들이 지하로 내려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불빛과 가까운 거리에 마트 창고인 것으로 보이는 문이 돌연 벌컥 열리며 뭔가가 튀어나왔다.

“우앗!”

넘어지는 도 실장을 응산이 태연하게 붙잡아 세웠다.

“여긴 또 어디야? 우씨! 여긴 마트잖아? 너, 내가 안 본 사이 완전 바보 멍청이가 된 거 아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고!”

도 실장이 버럭 신경질을 부리며 삿대질까지 했다.

“네가 여기저기 흔적을 많이 뿌리고 다녀서 그렇잖아. 괜찮으십니까?”

이가서림을 제외하고 도 실장의 냄새가 밴 곳들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벌써 아홉 번째 허탕 중인 그들이었다.

“괜찮아. 이곳이 아니라면 어서 다른 곳으로 가지.”

그의 눈치를 보며 묻는 응산에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고 있었으나 가슴속엔 점점 검은 기운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난 안 가! 대산이 너, 바보 멍청이가 된 게 분명해. 난 마트 다녀도 지하 주차장엔 올 일이 없다고. 차도 없는데 이곳에 올 이유가 없잖아! 이씨, 이제 그냥 나 혼자 찾을 거야. 널 믿은 내가 바보였어.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고!”

도 실장의 신경질적인 소리에 신우와 응산의 두 눈이 마주쳤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고, 몸도 따라서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뭐야? 왜 그래?”

그들의 행동에 뭔가를 깨달았는지 도 실장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넓은 주차장을 마구 휘젓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가 멈췄다.

지하 주차장 한쪽, 건축 자재들이 쌓여 있고 공사 가림막이 쳐진 곳에 ‘창고 확장 공사 중,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영업을 하고 있는 마트인데 이상할 정도로 주차된 차들이 몇 대 없다 했더니 다들 공사 중이란 걸 아는 모양이었다.

공사장 가까이 서 있던 신우가 손을 뻗어 가림막을 거칠게 걷어 올렸다.

휙!

이주희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건축 자잿더미 위에 마치 죽은 것처럼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

순간,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은 충격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분명 걱정을 했었고, 빨리 찾아지지 않아 답답했었지만 막상 눈앞에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그의 감정을 크게 뒤흔들었다.

하지만 목덜미로 흘러내려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의 몸은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그녀에게로 향했다.

맥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턱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손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살갗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그의 등골에도 선뜩한 찬기가 덩달아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가만히 맥을 확인하니 미약하게 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주인니니니임!”

신우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과 도 실장이 가림막을 걷고 비명을 질러댄 건 동시였다.

도 실장의 비명 소리는 당연히 무시됐다.

신우가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꽁꽁 얼어붙은 그녀의 몸을 다급하게 감쌌다.

몸 전체를 감싸고도 남는 긴 로브로 돌돌 만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올리며 응산에게 물었다.

“이대로 병원에 가는 건, 위험할까?”

“지금 상태로 도깨비길은 위험합니다. 그보단 이가서림이 이 근처이니 일단 집으로 옮기시고 김 박사님을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녀를 찾았는데도 이상하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김 박사님께 연락해. 그리고 넌 여기 남아서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경찰을 동원하든, 마트 경비원 멱살을 잡든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하게 알아와.”

그들이 찾아나서지 않았으면 그녀는 아마 이대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을 터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됐는지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을 생각한 것만으로 뒷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응산에게 명령을 내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얼음 가루가 날렸다.

“주인님! 흑흑, 주인님! 우리 주인님 저한테 주세요. 제가.”

그런 와중에 마치 초상이라도 난 듯 눈물 콧물 뽑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도 실장을 보니 저절로 눈꼬리가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이가서림으로 간다. 앞장서.”

조용히 말하고 있었으나 온몸으로 위협하는 기를 감지한 도 실장이 한 발짝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제 주인이 걱정인지 힐끗힐끗 그녀를 쳐다보다 재빨리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 * *

달칵!

징징거리던 도 실장이 김 박사의 배웅을 나가자 방 안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해쓱한 얼굴만 아니면 곤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신우의 시선이 복잡했다.

쓰러져 있던 그녀를 본 순간 갑자기 치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응산에게 조사를 명령했지만 되짚어 생각해 보면 자신이 왜 그런 감정에 휩싸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왜지?”

할아버지를 제외한 누구도 그의 관심 영역이 아니었는데 이 여인은 첫 눈맞춤부터 그의 시선을 사로잡더니 불과 몇 번의 만남만으로 그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건, 명부에서도 인간계에서도 누군가에게 손이 닿는 걸 본능적으로 싫어하던 그가 이주희에게만은 매번 의식 없이 자청해서 손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우는 무심결에 자신의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명부에서 그의 능력을 비꼬아 누군가가 붙인 별명이 ‘파괴의 신’이었다.

차사 견학을 갔던 어느 날, 호기심에 만진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던 충격적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담당 차사의 경악한 표정과 같이 견학을 갔던 동기의 휘둥그레진 두 눈, 그리고 명부의 신이 가져선 안 되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그 순간.

자신이 명부에서 가장 경계하는, 영혼을 소멸시키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목적지까지 혼을 인도해야 하는 명부의 신들은 누구나 그가 곁에 있는 걸 두려워했다.

그날 이후, 그는 스스로 명부의 신들을 피했다.

현재는 모든 힘이 사라졌지만 그 습성이 그대로 남은 탓에 지금도 누군가와 손길이 스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넌 싫지 않은 거지.”

다시 한번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잠만 자던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그의 신경을 온통 빼앗아 버렸기에.

“박……신우 씨?”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흐릿하게 잡히는 존재를 확인하고자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던 주희가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날 알아보는 걸 보니 죽진 않겠어.”

눈을 뜬 모습이 기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상한 감정이 겹쳐서 저도 모르게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여긴…….”

박신우 특유의 서늘함이 섞인 목소리에 주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여 천장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자신의 방이었다.

“왜 내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그런 험한 짓을 당한 거지?”

신우가 하대를 하고 있었지만 주희는 지금 그의 말투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떠오른 것이다.

머릿속이 점점 선명해지며 낡은 SUV 뒷좌석에 쓰러져 있던 소정 어머니도 떠올랐다.

“아주머니! 윽!”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는데,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저절로 신음 소리가 흘렀다.

“내가 그쪽이라면 당분간 가만히 누워 있는 쪽을 택할 거 같군.”

“지, 지금 몇 시예요? 경찰, 경찰에 연락을……. 앗!”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머리가 아픈 것도 무시한 채 침대에서 허둥지둥 내려서던 주희는 앞으로 그대로 엎어졌다.

머릿속 의지와는 별개로 몸은 전혀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꼴사납게 넘어지던 그녀의 몸이 단단한 무언가에 걸렸다.

“……!”

무언가에 걸린 것까진 좋았는데, 등 뒤에서 느껴지는 너무도 강렬한 남자의 가슴 온기는 결코 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잘 보여도 재계약에 도움이 될까 말까인데, 이상하게 이 남자 앞에선 시시각각 바보짓을 하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느끼지도 못하나? 아니면, 내 관심을 끌고 싶어 고의로 몸을 던지는 건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 요런 예쁘지 않은 말을 덤으로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잡아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좀 급해서요. 이 팔 좀 풀어 주실래요?”

그에게 한숨 섞인 양해를 구하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선 누군가에게 머리를 가격당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의식이 흐릿해져 쓰러지던 순간, 얼굴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백미러 속에 비친 낡은 야상과 낯익은 문양의 배지가 떠올랐다.

“설마 이 몸으로 또 움직이겠단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급해서요. 소정이 어머니가 위험하다고 경찰에 신고해야 해요. 김 순경님에게 가봐야 해요.”

자신이 마트에 간 게 오전이었는데 벌써 창밖에 어둠이 내린 걸로 보아 시간이 한참 지난 듯했다.

“김 순경?”

까칠함이 한층 더해진 목소리로 그가 되묻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소정 어머니가 위험하다.

“어서 이 팔 좀 풀어 주시라니까요. 빨리……. 헉!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어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팔에 갇힌 몸을 빼내기 위해 비트는데, 돌연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어 놀라 숨을 들이켜야 했다.

떨어지지 않으려 그의 셔츠 앞자락을 꽉 잡은 그녀가 신경질적인 물음을 흘렸지만 그의 표정만으론 속을 알 수 없었다.

“어딜 간다고? 너 바본가?”

그녀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그녀의 몸은 다시 침대에 눕혀졌고, 덤으로 바보란 욕까지 얻어먹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너무 황당했지만 마음이 급해 다시 일어나려는데, 정말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털썩.

그녀가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누른 것이다.

“뭐, 뭐죠? 이, 이 손 안 치워요!”

물론 몸이 강제로 밀려 눕혀진 데 대한 놀라움이겠지만 주희는 당황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커다란 손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의식돼 빽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얌전히 누워 있겠다고 하면, 놔주지.”

“이……!”

얼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싸늘한 그와 대조적으로, 속에서도 얼굴에서도 불이 난 그녀가 다시 고함을 지르려 할 때였다.

쾅!

방문이 부서질 듯 세게 열리며 도 실장이 들이닥쳤다.

“주인님! 이 미친 호랑말코 같은 놈이. 당장 그 손 안 치워!”

주희와 신우의 묘한 자세를 본 도 실장이 눈을 부릅뜨고 씩씩대며 신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달려든 기세와 달리 도 실장은 신우의 한 손조차 감당하지 못해 허우적거렸다.

“아아, 아야야! 이씨! 우리 주인님 놔! 놓으라고!”

그래도 도 실장 덕분에 그녀의 몸에서 신우의 손은 사라졌다.

“네 주인이 저 몸으로 당장 경찰서에 달려가겠다는데, 그냥 둘까? 소정이 어머닌지 누군지가 위험하다고 말이야.”

“뭐라고요?”

싸늘하기 짝이 없는 신우의 말에 도 실장이 허우적거리던 몸짓을 뚝 멈추며 되물었다.

“방금 눈 뜨자마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위험을 알려야 한다고 나가겠다는데, 그냥 두냐고?”

친절하게 다시 설명을 더하는 신우의 말에 도 실장이 주희와 신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안 되죠. 의사 선생님께서 우리 주인님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박신우 씨, 우리 주인님 무조건 못 가게 막아주세요. 또 가겠다고 고집부리시면 아까처럼 덮쳐눌러서라도요. 부탁합니다.”

“도 실장님!”

“몰라요! 안 들려요! 제가 차사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죠?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가 주인님만 죽을 뻔했잖아요? 다시는 그 무능하기 짝이 없는 차사 일 도와줄 생각도 마시라고요!”

귀를 막고 주절주절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주워섬기는 도 실장을 보는 주희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가셨다.

“도 실장님!”

“쉬세요. 전 오늘 하루 종일 닫아 두었던 가게 문 다시 열러 가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도 실장을 외쳤지만 도 실장은 그답지 않게 냉담한 얼굴로 쏘아보더니 변명 한마디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란 소린지.

차라리 허공에 대고 말하는 미친년이 낫지, 차사 일을 돕고 다니는 인간이라니.

왠지 계약서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하, 하, 도 실장님이…… 별소리를 다 하시네요.”

다그쳐 묻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침묵이 어색해 웃음으로 얼버무려 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정신 사나운 도깨비이긴 하지만 차사 일은 나도 도 실장과 같은 생각이야. 차사의 일에 인간이 끼어들어 좋은 경우는 없으니까.”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그의 말에 주희는 눈을 휘둥그렇게 떠야 했다.

“어, 어떻게…….”

“도 실장, 제가 도깨비란 걸 들키든 말든 미친놈처럼 널 찾아다녔어. 도 실장 아니었으면 넌 아마 지금쯤 마트 지하 주차장에서 죽어 있었을 거다.”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는 험한 일을 겪었는데 당장은 도 실장이 도깨비란 걸 들켰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닿았다.

“도 실장님이 또 현와원에…….”

도깨비길을 통해 여기저기 찾아 헤맸을 도 실장의 모습이 상상되어 한편으론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 그만하고 잠이나 더 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마치 도 실장이 도깨비든, 혹은 그녀가 차사를 보는 인간이든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로 들렸다.

박수무당도 놀랄 일에 보통 인간이 그런 마인드를 가진다는 게 가능한가?

의문이 쌓여갔지만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이 차사의 일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 소정이란 아이는 자신의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했어요. 정해진 운명조차 살지 못한 거라고요. 그런데 아까 제가 본 상황대로라면 아주머니도 위험한 것 같아요.”

감정을 수습한 그녀가 담담하게 사정 설명을 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의 기세로 봐선 중간에 말을 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니, 오히려 미간까지 찌푸리며 귀 기울여 듣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가봐야 한다고요.”

“수명을 다하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도 실장에게 자세한 건 듣지 못했는지 그가 묘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다.

“그래요. 수명부가 내려와 사전 답사를 갔더니 이미 아이의 생기가 사라진 후라고 했어요. 차사 님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난 이미 그 아이의 혼을 봤고요.”

“그럴 리가.”

“그러니 김 순경님께 부탁해서라도 얼른 찾아야 해요. 제가 가…….”

“그냥 있어.”

자신의 말이 통한 것 같아 침대를 내려가려는데 다시 말 한마디로 제지당하고 말았다.

“경찰은 증거도 없이 움직이지 않아.”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도와줄 생각 없으면 방해라도 하지 말아 주세요.”

주희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봤지만 그녀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널 두고 하는 말이었군. 인간이 신의 일에 끼어들어 좋은 일은 먼지만큼도 없어. 외투나 입어. 설마 그 차림으로 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한껏 비꼬인 말투와 달리 동행까지 해줄 모양이었다.

“같이, 가주시려고요?”

“아니면? 걷지도 못하는 그 몸으로 도대체 몇 발짝을 갈 수 있는데? 아주머니를 찾아간다는 건 그냥 해본 소린가?”

“고마워요.”

잔뜩 못마땅해하는 그의 말 속에서 온기를 찾아낸 주희는 진심이 우러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감사를 전했다.

“……!”

따스함이 담긴 그녀의 작은 미소에 느리고 규칙적으로 뛰던 신우의 심장이 갑자기 덜컥대는 소리를 냈다.

“금방 준비할게요.”

신우는 조심스레 침대를 내려와 외출 준비를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가 없고 심장도 제멋대로 뛰어 엇박자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할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이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한참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똑똑!

“회장님, 마응산입니다.”

마침 나가려는데 응산의 목소리가 들려 달칵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김 순경과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도마뱀이었다. 응산은 그 뒤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휙! 도마뱀이 날듯이 주희의 어깨 위로 날아들었고, 낑낑대며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문질러댔다.

“그래그래, 석아. 나 괜찮아.”

“주희 씨이이, 정말 괜찮은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많이 걱정했어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도 실장님 말로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던데.”

도마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으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던 김 순경이 그녀의 복장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침 잘 오셨네요. 경찰서에 가는 길이었어요.”

“저한테요?”

김 순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설레발을 쳤다.

“네. 김 순경님 찾아가는 길이었어요.”

이어진 주희의 대답에 김 순경의 눈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소정이 어머니 일로 전해 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그녀의 모습에 김 순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치직! 치직!

-에이스 아파트 109동, 추락 사고 신고 들어왔습니다. 긴급 출동 바랍니다.

무전기에서 난 소리를 들은 김 순경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같이 무전기 소리를 듣고 있던 주희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무전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어쩌면 소정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주희 씨, 미안해요.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소정이 어머니 얘긴 나중에 들을게요. 미안해요.”

이 동네에선 거의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지 김 순경은 많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녀를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하며 허둥지둥 방을 나가고 있었다.

주희가 다급히 그런 김 순경을 부르려다 멈칫 입을 다물었다.

누가 사고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김 순경을 부른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거 같진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직접 가보고 판단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히 자신의 작은 방을 꽉 채우고 있는 신우에게 향했다.

“그 눈빛은 뭐지? 경찰도 다녀갔는데 굳이 또 거길 가겠다는 건가?”

“방금 김 순경님 무전에서 나온 장소가 아주머니가 사는 곳이에요. 아니길 바라지만 확인해야 해요. 아직 김 순경님에게 아주머니 일을 알리지도 못했잖아요. 부탁합니다.”

“내가 싫다면?”

“오늘, 감사했습니다.”

두 번 묻지도 않고 가만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생긴 건 전혀 고집이 세 보이지 않는데 오늘의 그녀는 왠지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고래 심줄보다 더 고집이 세 보였다.

“약속은 약속이니 일단 데려다주지. 응산, 차는?”

김 순경이 나갔음에도 여전히 문밖에 서 있는 응산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응산이 도착했다는 건 그녀의 사건에 대한 조사도 어느 정도 끝났다는 의미였다.

“대기시켜 놨습니다. 그런데 정말 같이 가실 생각입니까? 제가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응산의 말 속에서 이상한 기미를 읽은 신우가 더 빤히 응산을 쳐다봤지만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 왜인지 이유를 묻진 않았다.

“걸을 수 있겠나? 못 걷겠다면 안아서 차까지 데려다주지.”

신우가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재촉했다.

안아 주겠다는 한마디에 딱 예상한 반응이 돌아왔다.

“아니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화들짝 놀란 그녀가 도마뱀을 방패막이처럼 껴안은 채 뻣뻣한 걸음으로 빠르게 방을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얘기해. 무슨 일이지?”

신우는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르며 응산에게 조용히 물었다.

“CCTV에 찍힌 대로라면 이주희 씨 전에 다른 피해자가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차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따지고 들자 남자가 당황해서 손에 잡힌 걸 휘두르더군요. 이주희 씨가 잠시 후에 나타났는데, 차 뒷좌석에 태워진 아주머니를 발견한 순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 거지? 그냥 범행 장면을 들켜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거잖아.”

“남자의 일관되지 않은 행동이 왠지 걸려서요. 그 아주머니를 내려칠 때와 이주희 씨를 내려칠 때 분명 같은 사람인데 왠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아주머니를 내려칠 땐 정말 당황해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 같았지만 이주희 씨를 가격할 때는 손속에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사장에 끌어다 놓는 순간에도요.”

“사이코패스라도 된다는 거야?”

“단순히 사이코패스라기엔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혹시 모르니 신우 님은 현와원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입으로 한 약속이다. 함께 가주겠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그보다 부탁 하나만 하지. 만약 주희 씨 근처에 차사가 보이면 나한테도 알려줘.”

벌써 그들이 탈 차 앞에 가 멈춰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신우가 응산에게 부탁했다.

“차사와는…….”

“나타나지 않으면 가장 좋겠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부탁이다. 무능한 차사가 또 쓸데없이 그녀를 끌어들이는 일이 생기면 충고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응산이 어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아 그대로 앞만 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 * *

에이스 아파트 109동 앞은 앰뷸런스 소리에 경찰차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소리로 난장판이었다.

그중에서도 노란 출입 통제선 앞에서 실랑이 중인 한 여인과 경찰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주머니! 다가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 사람…… 봐야 해요. 들어가게…… 해줘요.”

한 여인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중얼대며 통제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르르 모여선 이들이 너도나도 경쟁하듯 안타까운 탄식을 토해냈다.

“아휴, 저걸 어째. 소정이 살아 있다는 희망 하나로 근근이 버텨왔는데.”

“그러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니까요. 그 착실해 보이던 정 씨가 그랬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당신, 저번에 정 씨한테 술 얻어먹지 않았어요?”

“그랬지. 무슨 문화재연구소인가에 정식으로 취직하게 됐다고 이제 떠돌이 생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었지. 그때가 소정이가 실종되기 전이었지, 아마? 그 이후론 한 번도 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어. 얼마나 바쁜지, 말 한번 붙이기 힘들었으니까.”

“맞네, 맞아. 사고 낸 것 때문에 양심에 찔려 사람들을 피해 다녔던 게 분명하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 씨 아저씨가 소정이 엄마를 얼마나 살뜰하게 챙겼는데요.”

“그게 다 찔리는 게 있어서 그랬던 거겠지. 아니면 소정이 엄마 낌새를 살피기 위해서거나.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긴 해요. 소정이 행방불명된 지가 언젠데 이제 와 투신자살이라니?”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이제 다 들통 날 것 같으니까 자살한 거 아냐. 아까 소정이 엄마가 경찰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정 씨가 소정이 우산 손잡이 고리 인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거? 정 씨한테 따지고 들다 머리를 맞아 정신을 잃었다잖아. 자칫하면 소정이 엄마도 죽을 뻔한 거라고.”

“하지만 소정이 엄만 살아 있잖아요. 그 아저씨가 정말 나쁜 맘을 먹었으면 소정이 엄마도…….”

“무슨 소리야? 그럼 소정이 엄마까지 죽었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정황상…….”

“정황은 무슨 정황? 사고를 냈으면 백배사죄부터 해야지, 그걸 지금까지 숨긴 게 인간이 할 짓이야? 새댁 그렇게 안 봤는데 영 안 되겠네.”

“아주머니! 제가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저한테 역정을 내고 그러세요?”

“새댁이 지금 말을 험하게 했잖아?”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요? 아우! 정말 속 시끄러워. 하필 우리 아파트에서 사고가 날 게 뭐람. 당장 아파트값 떨어지게 생겼네. 짜증나!”

젊은 여인의 신경질적인 소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빛이 하나같이 어두워졌다.

다들 남의 안타까운 사연보다 당장 아파트값 떨어지는 게 더 큰일이라는 듯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그때 우람한 덩치를 지닌 한 사내가 몰려선 사람들을 헤집으며 길을 텄다.

그 뒤를 작은 몸집의 여인과 달빛을 받아 더욱 해사한 빛을 내고 있는 사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들 현장 수습에 방해가 되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거기! 기자님, 사진 찍지 마시라고요!”

“유서가 발견이 됐다는데 사실입니까? 자살한 사람이 저 여인의 딸을 죽였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경찰 하나가 신경적으로 빽 소리를 질렀지만 기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질문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김 순경, 사람들 더 이상 접근 못 하게 차단시키지 않고 뭐 해!”

“방 기자님,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선 밖으로 나가십시오.”

노란 테이프 근처, 여기저기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현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응산의 뒤에서 가만히 뒤를 따르던 주희가 갑자기 멈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면서 죽은 사람이 소정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경찰을 붙들고 쓰러지는 소정의 어머니를 본 순간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

쓰러지는 제 어머니를 안으려 몇 번을 헛손질하면서도 다시 안으려 애쓰고 있는 소정의 참담한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소정의 혼을 다시 볼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게 이런 모습, 이런 느낌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눈동자가 뜨거워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괜찮아?”

누군가의 팔이 뻗어와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야 자신이 쓰러질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안 되겠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응산!”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응산을 부르고 있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웠…….”

괜찮다고 팔을 풀어 달란 얘기를 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스치더니 밤보다 더 검은 복장을 한 이가 소정의 뒤로 나타났다.

『찾았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소정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차사였다.

『유소정.』

“잠깐만요!”

나타나자마자 수명부를 펼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는 차사의 모습에 주희가 당황해 소리쳤다.

“박신우 씨, 놔주세요.”

다급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요구와 반대로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엔 더 단단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박신우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어서 놔주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차사가 힐끗 돌아보긴 했지만 자신의 일이 먼저라는 듯 다시 소정을 응시하며 수명부를 읊어갔다.

『유소정. 20XX년 XX월 XX일 생. 20XX년 11월 XX일. 수명부의 영을 받습니다.』

“기다려요!”

그녀의 다급한 외침 따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를 끌어안고 있던 소정의 영이 마치 무언가에 조종당하듯 일어나 차사의 앞에 서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그들의 일에 관여하는 건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안 돼.”

멍하니 넋을 잃고 차사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귀에 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서늘한 목소리 덕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어? 아주머니! 구, 구급차! 구급차!”

경찰에 저지당해 넋을 놓고 있던 소정의 어머니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팟!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차사가 그녀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크게 도움이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 영혼이 아직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당신 덕분입니다. 갑자기 추가 업무가 생겨서 바쁘게 됐지만, 인사는 해야 도리일 것 같아서.』

차사가 소정의 영혼과 경찰에 둘러싸여 잘 보이진 않지만 또 하나의 영혼이 있을 곳을 번갈아 쳐다보며 매우 귀찮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런 말들이 전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구급요원들이 응급처치를 하고 있는 소정 어머니의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명부령에 제압당한 소정의 영혼은 아까와 달리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 모습이 왠지 아까의 어쩔 줄 몰라 하던 소정의 모습보다 더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아 주희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제 업무는 영혼을 인도하는 것까지니까요. 그 이후의 결정은 판관의 영역입니다. 업경대에 죄의 경중을 비춰본 후에 거취가 정해지겠죠. 일이 이렇게 된 데 대한 사고 경위도 밝혀질 테고요.』

이미 알고 있는 이런 얘기를 들으려 했던 게 아닌데, 남의 집 불구경하는 듯한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빨리 밝혀졌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요. 하지 않아도 좋을 마음고생을 더 하지 않게요.”

저도 모르게 차사를 탓하는 듯한 말투가 나가고 말았다.

『설마 내가 실수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분명 이번 일은 내 잘못이 아니라 수명부에 착오가 생겨서라고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요.』

“어느 쪽의 실수든, 그쪽 세계의 실수 맞잖아요? 그쪽이 더 열심히 발로 뛰든, 아니면 그쪽 대왕님을 추궁하…….”

말을 더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나고 눈앞에 소정의 혼이 어른거려 싸늘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런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에 감겨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발밑이 허전해졌다.

휙, 그녀의 몸은 어느새 신우의 뒤에 가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더니 눈앞에 신우의 등이 보였다.

『감히 도깨비 따위가 날 막겠다고 나선 거냐?』

싸늘한 차사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옆으로 빼보니 신우의 앞에 몸을 바짝 긴장시킨 채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는 응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푸른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검을 뽑아 들고 이죽거리는 차사의 모습도 보였다.

응산이 도깨비?

그 사실에 대한 놀라움보다 대치하고 선 이들의 급박한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만! 일이 해결됐다면 차사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그 와중에 신우의 싸늘한 명령형 목소리가 허공을 향해 뱉어졌다.

순간 차사가 어이없다는 듯 신우를 쳐다봤고, 한동안 묘한 침묵이 흘렀다.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여기가 사건 현장임을 전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날 보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지껄이다니. 이쪽도 겁이 없긴 마찬가지군.』

차사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하며 스르릉,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신우의 뒤에서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수명부가 내려오기 전까진 다시 볼 일이 없겠지만, 다시 만났을 땐 좀 더 말을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특히 대왕님에 대한 이야기는요. 인사는 충고로 대신하겠습니다. 이놈, 그리고 이가서림의 그놈, 너무 이런 도깨비들과만 연을 쌓지 마십시오. 당신의 다음 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있는 그 정체 모를 이상한 놈도 제가 봐선 덕을 쌓는 데 별로 도움이 될 거 같지 않군요. 어쨌든 이번 일은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응산과 신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못마땅한 투로 말하던 차사가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저 멀리, 경찰들이 모여 있는 사고 난 자리에 다시 나타나 있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 남자의 혼 앞에 선 차사가 작고 검은 사리기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 들고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남자의 혼이 무어라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하고 연기처럼 작은 사리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천계에서 말로만 들었던, 도망칠 우려가 있는 영혼을 잡아간다는 그 영혼기인 듯했다.

귀찮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영혼기를 품에 갈무리한 차사가 그래도 소정의 혼은 제법 정중히 데리고 사라졌다.

“주희 씨! 여긴 웬일이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정신없이 날뛰는 기자를 제어하느라 고군분투 중인 김 순경이 보였다.

찰칵!

“한성의 박 회장님 아니십니까? 여긴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 순경을 힘들게 하던 기자가 이번에 또 다른 먹이를 포착했다는 듯 작은 눈을 반짝이며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신우의 앞은 이미 응산에 의해 제어되고 있었다.

“사고 난 사람과 혹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기자가 끈질기게 질문을 해대는 모습에 주희는 괜히 자신 때문에 신우가 귀찮은 일에 시달리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사진 나가지 않게 해.”

그녀가 드러나지 않게 뒤로 감추기까지 해주는 그의 모습에 미안함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때 소정의 어머니를 들것에 실은 구급요원들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비켜주세요!”

누군가가 길을 막고 있는지 구급요원들이 소리쳤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중년 남자와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할아버지였는데, 구급요원들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연신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서 비켜주세요!”

구급요원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리고 나서야 중년 남자가 앞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앗, 죄송합니다. 어르신,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 아파트가 맞긴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리가 날짜를 잘못 잡아 온 모양입니다요. 앞에 무슨 사고라도 난 모양……. 기란 씨?”

동행인 할아버지를 한쪽으로 잡아당기며 사과를 하던 남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구급요원이 데려가고 있는 여인을 봤다.

“뭐 하시는 겁니까?”

“잠깐만요! 내가 아는…… 헉! 기란 씨! 기란 씨!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구급요원들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더 바짝 다가가 소란을 피웠고, 뒤처져 서 있던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듯 들것에 실려가고 있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봐요, 이러시면…….”

남자의 소란 때문인지 여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기란 씨!”

눈을 뜬 여인을 본 남자가 기쁨의 소리를 질렀지만 여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 뻣뻣하게 서 있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였다.

언제나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소정의 어머니였는데 그 멍하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슬픔이 고이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벌을 받나 봐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에 발음이 흐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소정의 어머니 입에서 뱉어진 ‘아버지’라는 단어만은 주희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섭게 굳은 얼굴로 석상처럼 서 있던 할아버지가 소정의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것도 보였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겨진 소정의 어머니가 혼자가 아닐 거란 사실에 주희는 저도 모르게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찰칵! 찰칵!

방 기자의 관심이 이번엔 또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난 할아버지와 소정의 어머니에게로 쏠려 마구 사진을 찍어댔다.

“그만 가요.”

주희가 신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가 뒤를 돌아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고맙군.”

뜬금없는 그의 말이 그녀가 더 이상 있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아 고맙다는 의미임을 알았다.

미안한 마음에 어두운 밤임에도 표가 날 정도로 두 볼이 달아올랐다.

혼자 왔으면 많은 인파 때문에 현장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했을 게 뻔했다.

그러면 소정도, 소정의 어머니도 내내 마음에 남아 그녀를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같이 와줘서.”

이렇게 동행해 준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지금 그 마음, 오래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녀의 인사에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순간 무방비해진 그의 얼굴이 하얀 달빛을 배경으로 빛났다.

쿵, 떨어져 내리는 자신의 심장과는 별개로 또다시 그가 무척이나 낯익게 다가와 잠시 멍해졌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지? 고맙다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나?”

“아, 아니에요.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그의 까칠한 말에 깜짝 놀라 말을 버벅댔다.

하지만 다행히 너무 낯이 익어 그랬다는 괜한 말로 실수를 더하진 않았다.

또 작업 멘트라는 말을 듣기 전에 황급히 감사의 말을 덧붙였다.

“그럼 이제 그만 가지. 응산.”

주희의 발걸음을 재촉한 신우가 고개를 돌려 응산과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만 가시지요.”

그렇게 응산의 인도로 그들은 조심스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자리를 뜨기 전, 인파 사이로 소정 어머니가 오열하는 모습이 살짝 보였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아픔이었지만 저렇게 서럽게 울 수 있으면 아마도 잘못된 선택을 할 확률도 줄어들 터였다.

어느 쪽의 인연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마침 나타나 준 저 할아버지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 * *

사방이 폐쇄돼 주위를 밝히는 빛이라곤 벽에 붙어 있는 흐릿한 벽등이 유일한 공간.

어둠에 둘러싸여 공기의 흐름조차 갇힌 것 같은 좁은 공간에 특이하게 생긴 돌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앙상하게 마른 몸의 사내가 누워 있었는데, 창백한 모습이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어 마치 시체와 같았다.

머리맡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나 쓸 법한 오래된 향로가 놓여 있고, 거기에 비릿한 냄새를 내는 향이 피워져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사이비 종교의식이라기엔 너무도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잿빛 연기를 내며 올라간 향 줄기가 흩어져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듯 사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마치 살아 있는 듯 넘실대던 잿빛 연기가 돌연 사내의 몸속으로 훅 빨려 들어갔다.

팟!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던 공간에 거센 바람이 일며 빨갛게 점으로 타오르던 향이 꺼졌다.

“컥!”

시체처럼 누워 있던 사내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거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내는 현재 한진태라는 인간을 그릇으로 쓰고 있는 명부의 도망자 영묵이었다.

명부신의 오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췌하고 초췌한 인간의 몸에 빙의해 있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는 영묵의 꽉 다문 입가에서 주룩, 가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차사가 어떻게 알고…….”

몸을 되돌리기 전 차사를 본 영묵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언뜻 보이던 여인의 말간 얼굴은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 여인은 마트 지하 주차장에서 납치 현장을 들켜 당황하고 있던 정 씨를 대신해 그가 처리한 여인이었다.

마침 그가 정 씨의 몸에 빙의하지 않았으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뻔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어쩌다 사건을 목격한 게 아니었나? 그보다, 옆에 있던 남자는 분명 한성의 신임 회장 같았는데. 한성의 회장이 왜 그곳에 있는 거지? 게다가 그 기운은. 설마…… 아닐 거다.’

여인의 등장만 해도 의문인데 그 옆에 서 있던 사내와의 조합은 또 뭐란 말인가.

영묵이 알기로 그 사내는 분명 한 문화재연구소의 최고 기부 기업인 한성의 신임 회장이었다.

비록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최근에 종종 뉴스에 등장 중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놀라고 있는 건, 그곳에 한성의 신임 회장이 느닷없이 나타나서가 아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미약하긴 했지만 한성 회장이 지니고 있는 기운이 마치 천계의 기운처럼 느껴져서였다.

한성의 신임 회장이 천계신들과 연관이 있다고? 그럴 리가.

게다가 맨 앞의 그건 분명 도깨비였다.

당혹감을 넘어서 말이 안 되는 조합이었다.

“아냐, 잘못 느낀 거겠지. 그런 조잡한 인간의 몸에 천계의 기운이라니, 말도 안 돼. 아닐 거…… 허어억!”

있을 수 없는 조합이란 결론을 내린 것과 동시에,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고 전신을 칼로 난도질하는 것 같은 통증이 한꺼번에 찾아들었다.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신음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갔다.

명부의 추적자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육신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인간의 몸을 신의 그릇으로 쓰기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수명을 채워야 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단순히 수명을 채워야 하는 거라면 악심을 품은 인간들이 널리고 널렸으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수명을 연장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이 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으, 매번 이런 고통이라니…… 끝까지 쓸모없는 놈이었군. 겨우 이 정도 수명뿐이었다니.”

소정이라는 아이의 수명을 취했을 때도 겨우 몇 달밖에 연장하지 못했는데, 정 씨의 수명도 겨우 1년 정도의 시간밖에 채워지지 않았음을 몸으로 느꼈다.

이래서 수명을 취할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고르는데도 직접 상대의 수명을 취하고 나서야 그 상대의 남은 수명이 얼마였는지 알게 되니 매번 이 모양이다.

순간 인파 사이에서 머리를 내밀던 말간 얼굴의 여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 씨를 처리하는 게 급하지만 않았어도 더 신중히 상대를 고를 수 있었는데.

하루에 두 명의 수명을 취하는 건 현재 몸 상태론 무리였다.

“최대한 신중하게…… 추적자의 눈을 피해야 해. 최대한 신중하게.”

소정이란 아이를 차사가 데려갔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겉보기엔 인간이 낸 사고였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고통으로 떨리는 손으로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며 암흑의 공간 저편을 쏘아봤다.

한참을 그렇게 고통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숨을 골랐다.

고통이 잦아들자 시선이 본능적으로 자신이 앉아 있는 특이한 돌침대의 머리맡으로 향했다.

툭, 머리맡의 돌 한 조각을 슬쩍 눌렀다.

지이잉!

벽돌만 한 크기의 돌 한 조각이 튀어나왔고, 그 안에 색이 누렇게 바랜 기름 잔뜩 먹은 종이가 둘둘 말려 들어 있었다.

부스럭대며 종이를 펼쳐 보니 종이엔 그림이라기엔 단조로운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한 표식에 멈춰 움직일 줄 몰랐다.

순간 사내의 눈동자에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새빨간 불꽃이 튀었다.

“조금만 더. 이것만 찾으면…… 원래의 힘의 되찾을 수 있는 거다. 이런 잡스런 술법 따위 쓰지 않아도 되는 거다.”

고통의 여운이 아직 남아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을 떨며 혼자 중얼거릴 때였다.

똑똑!

멀리서 희미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했는데도 노크 소리가 들려 예민한 신경을 더 긁어댔다.

아무 대답이 없으면 그냥 가겠지만 9시를 향해 가고 있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지도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 그리고 힘든 몸을 추슬러 침대를 내려왔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한곳을 누르니 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르륵!

등 뒤로 커다란 수묵화가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는 벽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똑똑똑똑!

서재 저편에서 어딘지 어수선한 노크 소리가 다시 들렸다.

당황해 말리는 고용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김 이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십시오.”

김교진 이사!

영묵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던 얼굴을 억지로 무표정하게 되돌리고 잠가 놓았던 서재 문을 열었다.

“이여, 한 소장님!”

어디 연회라도 다녀오는지 슈트 차림의 김 이사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하루빨리 발굴 계획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력해야 할 놈이 제 향락에 빠져 있어 못마땅했지만, 영묵은 매우 정중하게 김 이사를 맞았다.

한진태라는 한 문화재연구소 소장의 가죽을 쓰고 있어야 하는 한 누구에게도 빈틈을 보일 생각이 없었다.

“흐흐, 한 소장님께 좋은 소식을 바로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술기운에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분명하지 않은 발음이었지만 영묵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좋은 소식이라니……, 혹 발굴 계획 건입니까?”

“역시! 우리 한진태 소장님! 한 소장님은 앉아서 천 리를 보십니다. 흐흐, 그렇습니다. 소장님께서 그렇게 신경 쓰시던 기획안, 드디어 내일이면, 히끅. 사인된 서류가 제 손에 들어옵니다. 히끅!”

점점 어눌해지는 말투에 딸꾹질까지 하는 김 이사였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확실했다.

‘드디어 찾을 수 있는 건가!’

한 소장의 눈에 순간적으로 주체하지 못할 희열의 빛이 떠올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신의 힘을 되찾을 두 개의 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중 하나의 신물은 명부 보고에 있었다.

그게 한번 쫓겨난 처지임에도 25년 전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명부를 찾은 이유였다.

결과는 참담했고, 나머지 하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계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 명부의 신물을.

그 신물을 찾기 위해 수십 년을 한 문화재연구소 소장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제가 손님을 너무 오래 밖에 세워 뒀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영묵이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김 이사를 서재로 안내했다.

김 이사를 먼저 서재로 들여보낸 영묵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김 이사의 슈트 깃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배지가 없었다.

‘감이 좋은 건가?’

아주 오래전 한성 후계자의 교통사고 이후, 김 이사가 배지를 착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김 이사가 배지를 착용하든, 하지 않든 이번 발굴 작업만 성공하면 모든 걸 되돌릴 힘이 생길 테니까.

이번에 확보한 자료에 의하면 지금 그곳이 지도에 표시된 그 장소가 맞았다.

지도에 표시돼 있던 지명들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 데다 종이 재질의 연도에도 없던 지명들이라 지도를 손에 넣고도 얼마나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그 신물만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인간의 육신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드디어 내 손에.’

이제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신물의 존재에 영묵의 내면이 숨길 수 없는 희열로 떨렸다.

‘두고 봐라. 힘을 회복한 후에 내 반드시 염라 네놈을 다시 찾을 것이다. 네 아들놈의 숨을 거둔 것 정도로는 내 분이 풀리지 않아. 대왕의 자릴 네놈에게 넘긴 원로들까지, 다 함께 죽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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