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이상할 정도로 바쁜 날이었다.
이가서림의 주인이 된 이래 처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다.
“허허, 내 자네 할아버지 때부터 수차례 책방을 드나들었지만 이런 건 또 처음 보는군. 무슨 이벤트라도 하는 건가?”
부탁했던 책을 받으러 온 장 교수가 책방 안 곳곳에서 책을 펼쳐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이벤트도 안 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손님이 많네요. 차 한 잔도 대접 못 해 드리고 죄송해요, 교수님.”
“허허, 지금 차가 문젠가? 이런 신기한 광경을 다 보는데. 최근엔 네 할아버지 때보다 더 장사가 안 되는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오늘 보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구나. 저거 봐, 투덜이 도 실장 입이 아주 귀에 걸렸구나.”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는 장 교수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주희가 살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이렇게 웃는 걸 다 보니 좋구나. 손님이 밀리는 것 같으니 난 그만 가련다.”
장 교수가 뒤에서 계산하기 위해 만화책을 들고 기다리는 꼬마의 눈치를 보며 제법 묵직한 택배 상자를 안아 들었다.
“아, 제가 차에 실어 드릴게요.”
“이 녀석, 너까지 날 노친네 취급하는 거냐? 그보다 네 아비는 잘 있다더냐? 언제 온다는 말은 없고?”
“며칠 전에 통화했었는데 일정이 조금 더 길어진다고 하셨어요.”
아버지의 대학 은사인 장 교수였기에 언제나 아버지의 안부를 챙겨 물었고, 그녀도 웃으며 안부를 전했다.
“그래, 늦어진다고 했단 말이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잘 계실 거예요. 아, 그건 이리 주세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배웅조차 못하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요. 도 실장님, 여기 잠깐 봐주세요. 장 교수님 배웅하고 올게요.”
장 교수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주희는 상자를 받아 드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큰 소리로 도 실장을 불러 카운터를 맡기고 앞장서 가게를 나섰다.
“아직 구하지 못한 책은 구해지는 대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운전 조심하세요, 교수님.”
“그래, 다음에 또 보자꾸나.”
기분 좋게 그를 배웅한 주희는 장 교수의 차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참 그 자리에 서 있던 주희는 문득 햇살이 빌딩 숲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훌쩍 지나 버린 건지.
오늘 6시. 이가서림의 생존이 걸렸다 해도 좋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약속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게 됐다.
원래는 오후에 옷을 갈아입으러 갈 생각이었으나 너무 바쁜 바람에 아침 출근할 때 복장 그대로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이었다.
아무리 형식적인 만남이라지만 맞선 장소에 입고 나가기엔 지나치게 무례하다 여겨질 정도였다.
잠시 장 교수만 배웅하고 들어갈 생각에 코트조차 입지 않았더니 구멍 숭숭 뚫린 스웨터 사이로 드나드는 찬바람이 마치 박신우의 입에서 튀어 나오던 싸늘한 말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박신우의 싸늘한 눈초리를 상상해 버린 주희가 잠시 집 쪽을 보며 어떻게 할까 망설일 때였다.
갑자기 주변 온도가 훅 떨어지는가 싶더니 눈앞에 시커먼 존재가 팟,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
주희는 너무 놀라 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언제 알아봐 주실 겁니까?』
누가 차사 아니랄까 봐 시커먼 색으로 도배를 한 차사가 눈을 부라리며 눈앞에서 물었다.
“차사 님, 앞으로 제 앞에 나타나실 때는 먼저 기척을 내고 나타나 주세요. 인간은 차사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약해서 너무 놀라면 심장이 멎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차사의 일을 알아봐 줄 결심을 한 이상, 싫어도 앞으로 이런 식으로 종종 마주칠 터였다.
그때마다 이런 섬찟한 경험을 또 하게 될 것 같아 아주 작정하고 따지듯 요구했다.
『지금 날 도와준다고 협박이라도 하는 겁니까? 아직 그 일에 관해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으면서?』
“협박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물론 차사 님을 도울 생각이고요. 단지 제 일상까지 팽개치고 차사 님 일만 도울 순 없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말 당돌하군요. 내가, 무섭지 않습니까?』
“수명부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차사 님이 직접 얘기해 주셨는데 무서워해야 하나요?”
그녀의 당돌한 말이 못마땅했는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는 차사의 주변 온도가 더 내려갔지만 그녀는 해야 할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보다 이렇게 절 찾아오실 시간에 차라리 아이 어머니 곁을 지켜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이가 죽게 된 사연이야 모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아이의 혼은 무사히 데려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놀다 왔겠습니까? 오늘 하루 종일 다른 일 하나도 못 하고 혹시나 해서 지금까지 그곳을 지키다 왔습니다.』
“그런데…… 없었다고요?”
『그러니까 여기엘 다시 찾아왔죠.』
차사의 신경질적인 대답에 주희는 멍하니 마트 앞에서 어머니의 곁을 떠돌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럴 리가.’
불과 어제 낮에도 본 혼령이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들린 낯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휙 뒤를 돌아봤다.
박신우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박신우 씨.”
저녁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신우를 보며 당황한 주희가 멍하니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방금 뭔가 없다고 했던 거 같은데, 뭐가 없다는 말이죠?”
그녀의 등 뒤를 두리번거리며 묻는 신우의 물음이 있고야 주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여전히 뒤에 서 있는 차사를 봤다.
당연히 인간의 눈에 보일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왠지 모르게 당황스러웠다.
주희가 눈짓으로, 작은 손짓으로, 차사를 향해 어서 사라지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지만 차사는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 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뭔지 모르게 심장이 툭 떨어지는 느낌에 주희는 신우가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차사를 향해 싸늘한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가세요. 계속 방해하면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차사가 잠시 그런 그녀를 쏘아보더니 팟, 촛불이 꺼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금 그거 나한테 한 소립니까?”
한껏 낮아진 묵직한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그, 그럴 리가요. 그냥 혼잣말이에요. 제가 가끔 혼잣말을 좀 하거든요.”
주희는 천천히 뒤돌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하고 있는 변명이 ‘나 미쳤소’라는 말과 똑같다는 걸 알았지만 다른 변명거린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저기, 오늘 가게가 좀 바빠서 제가 아직 준비를 못 했거든요.”
주희가 힐끗힐끗 책 먼지 가득한 자신의 옷차림을 훑으며 얘기하자 왠지 모르게 그의 딱딱한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기다리죠.”
“감사합니다. 금방 올 테니 잠시만 책방에서 기다려 주세요.”
주희는 머릿속으로 자신에게 제대로 된 정장이 있었나를 떠올리며 책방이 아니라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신우는 한참이나 그녀가 사라진 낡은 대문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도깨비인가, 네가?”
신우가 무표정한 표정만큼이나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가서림 근처에 차를 주차할 데가 없어 제법 떨어진 거리에 차를 세우고 걸어오다 길가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는 그녀를 봤다.
얼떨결에 반갑게 부르려다 그녀가 허공에 대고 뭐라뭐라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이 이상해져 혼잣말을 한다는 가정보다, 그녀 쪽이 도깨비라 귀신과 얘기를 한다는 가정이 더 설득력 있었다.
허공을 향해 험악하게 가라고 외치던 순간을 떠올리니 도깨비일 확률이 더 높아졌다.
따지고 보면 이주희가 도깨비든 인간이든, 혹은 신이든 그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저 할아버지와 귀여운 계약을 맺은 이에 대한 작은 흥미, 호기심이 다였으니까.
“할아버지께서 많이 아끼셨던 거 같은데…….”
무심코 중얼거리다 갑자기 뭔가가 떠올라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할아버지께서 말도 안 되는 임대 조건으로 계약을 유지해 왔던 것이며, 틈만 나면 보지도 않는 고서들을 잔뜩 사와 창고에 쌓아 두셨던 일들이 떠오른 것이다.
그건 단순히 지인의 손녀라는 위치를 넘어 마음을 주신 거였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마음을 쏟아부은 이가 인간이 아닌 한낱 도깨비였다면 업경대 앞에 섰을 할아버지에겐 아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이왕이면 도깨비가 아니라 인간이면 더 좋을 텐데.”
이미 오래전에 업경대를 지났을 할아버지의 혼을 떠올리며 신우는 이주희가 그저 눈이 좀 밝은 인간이길 바라 보았다.
* * *
찰칵! 찰칵!
신우가 내민 손을 어색하게 잡고 차에서 내린 순간,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플래시까지 터졌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몸을 딱딱하게 굳힌 주희가 신우를 올려다보는데 그의 얼굴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들어가십시오. 곧 따라 올라가겠습니다.”
신우의 뒤에 서 있던 응산이 사진을 찍고 벌써 저만치 도망을 치고 있는 파파라치를 주시하며 말했다.
“가지.”
신우는 파파라치를 향해 사라지고 있는 응산을 다시 쳐다볼 생각도 않고 호텔 로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주희의 시선만이 경호원 응산의 뒷모습과 신우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다 로비로 종종걸음을 쳤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박신우가 한성그룹의 젊은 회장이 되어 최근 가장 따끈따끈한 핫이슈를 제공하고 있는 인물이란 걸.
그런 인물이 젊은 여자와 호텔에 등장했으니, 생각보다 더 큰 가십거리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저기…….”
“그쪽 사진이 돌아다닐 걸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내 경호원들이 제법 타협을 잘하는 재주를 가졌으니까요. 얼굴이 알려지는 쪽을 원한다면…….”
“아니요!”
그녀의 강한 부정에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인간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다 가자가 주희의 인생 목표였다.
그런데 한성그룹 젊은 회장의 여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가십거리가 된다면, 이가서림의 계약이 원래대로 유지된다 해도 그 동네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면 왠지 생각을 달리하고 싶어집니다만.”
“그런 소리는 농담으로라도 듣고 싶지 않네요.”
신우의 농담에 반응하느라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웅장한 파라다이스 호텔의 로비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평판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걸로 아는데, 이주희 씨가 좋아하는 타입은 좀 다른가 봅니다.”
“전 평생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으니까요. 몇 층이에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가 버튼을 누를 생각을 않자 그녀가 올라가는 버튼을 꾹 누르며 물었다.
“인생 다 산 늙은이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군요.”
그는 몇 층인지 대답은 않고 박 회장이 자주 하던 농담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박 회장과 박신우, 정말 닮지 않은 조손간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면에서 닮은 면을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차가운 인상의 중년 남자가 타고 있었는데 막 나오려다 그들을 보고는 멈칫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중년 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오롯이 신우에게 향했다.
“대표님…… 아니지, 이제 취임식도 끝났으니 회장님이시죠. 회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 곳엘 다 출입하시고. 더구나 이런 어린, 설마 학생은 아니겠지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이죽거리는 중년 남자는 인상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제가 귀신이 아니다 보니 가끔 외식도 하고 그럽니다. 김 이사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저께 말씀하시기로, 오늘 H&Y 간담회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소가 여기가 아닌 걸로 아는데, 벌써 다녀오신 건가요?”
날카롭게 기를 세우는 김 이사의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치는 신우를 보며 주희는 역시 회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방금 전 닮은 면도 있구나 느끼기가 무섭게, 지금 신우의 모습은 타고난 기업가였던 박 회장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왠지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 박신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좀 더 친근함이 담기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일이 좀 생겨서. 안 그래도 지금 간담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입니다.”
김 이사가 입술을 꾹 깨물고 자존심 상해하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H&Y 간담회에 한성이 빠졌다는 말이 나오는 건 곤란합니다. 어서 가보십시오.”
신우가 김 이사를 떠다미는 듯한 말을 하며 느긋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그녀도 신우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요! 한 가지 묻는 걸 잊었습니다. 한 문화재연구소 투자 지원 건 말입니다. 아직 통과가 되지 않았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까지 붙들며 김 이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따지듯 물었다.
“지금 검토 중입니다. 김 이사님도 아시다시피 최근 사소한 시빗거리부터 처리하느라 꽤 바빴거든요.”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추진해 오시던 일이었습니다.”
“충분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 저를 겨냥해서 일부러 늦추시는 거라면.”
신우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에서 점점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이사라는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다급한 안건인 건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김교진 이사님.”
김 이사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뇌까리듯 조용히 상대를 부르는 신우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는데 마주하고 있던 김 이사가 흠칫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제가 김 이사님을 겨냥해 일을 늦출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한성그룹을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주시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투자하던 금액의 두 배를 요청해 오시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처리할 순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떠돌고 있는 소문처럼 제가 바지 회장이 아닌 바에야 말입니다. 기다리십시오. 다시 검토해 보고 모레까지 답을 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신우가 ‘바지 회장’이라는 말을 한 순간 김 이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봐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지만 두 사람 사이가 정말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까지 문을 잡고 계실 생각입니까? 제가 지금 배가 많이 고픕니다.”
“죄송합니다.”
신우가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싸늘하게 말하자 김 이사가 반사적으로 사과의 말을 웅얼거리며 잡고 있던 문을 놨다.
지이잉!
스카이라운지를 향해 끝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우를 쳐다보고 또 쳐다봤다.
“뭡니까?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방금 전까진 그냥 박 할아버지를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음,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이상하게 박신우 씨가 굉장히 친근하고 낯익게 느껴져서요. 음, 우리 혹시 그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나요?”
말 그대로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그를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진 만날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랄 일만 있어 느끼지 못했는데 집중해서 그를 보고 있으니 왠지 진한 그리움의 향기가 나는 듯했다.
“음, 이런 걸 작업 멘트라고 하는 건가요?”
“네?”
뜬금없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지 주희가 멍청하게 두 눈을 껌뻑거리며 되물었다.
“아니면? 나 같은 사람을 어디서 봤는데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어설픈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내가 그 정도로 흐릿한 이미지를 가졌다고? 작업 멘트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물론 박신우의 겉모습이야 그의 말대로 한 번 보면 천 년을 기억할 정도로 절대 잊을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자신이 했던 맹한 말이 어설픈 작업 멘트로 들리기도 해서, 더 이상 다른 변명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쿡. 앞으로 어디 가서 이런 빤히 보이는 작업 멘트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주희 씨.”
재밌다는 듯 쿡쿡거리며 놀리는 그의 말에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다시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변명으로 들릴 것 같아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설명할 길 없는 말과 달리, 그를 의식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가 익숙하게 느껴져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묘한 느낌이었다.
“다 왔네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점점 더 따스하게 느껴지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바로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중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홀을 가로지를 때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을 배웅하는 다른 직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생각했을 때 누군가 그녀의 곁을 빠르게 지나쳐 가며 살짝 그녀의 어깨와 부딪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어딘지 낯이 익다는 생각에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중키에, 길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의 남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갑자기 방금 전 부딪친 남자의 코트 깃에 붙어 있던 배지가 떠올랐다.
“아…….”
오늘은 빛바랜 사파리 점퍼도, 흙 묻은 운동화도 아니었지만, 특이한 문양의 배지는 그대로였다.
바로, 어제 낮에 마트 앞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어딜 보는 겁니까?”
그녀가 가만히 멈춰 서 있어서인지 매우 못마땅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박신우와 달리 방금 전의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확실히 기억해낸 주희가 기뻐하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슈우욱!
기척도 없이 그녀의 바로 곁을 스치는 존재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아이였다.
차사가 그토록 찾고 있던 아이.
아이의 갑작스런 등장에 너무 놀라 멍해졌지만 곧바로 몸을 돌려 이미 레스토랑을 빠져나간 아이를 뒤쫓았다.
차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날아가던 아이의 굳은 표정이 심상찮아 보여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여 버린 것이다.
주희는 남아 있는 박신우의 얼굴이 얼마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지 따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레스토랑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라운지 앞을 두리번거렸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그 아이였는데.’
당황한 그녀의 시선이 이리저리 구르다 멍하니 내림 카운트를 계속하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쳐다보며 넋을 놨다.
“지금 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계약 맞선을 없던 일로 하자는 뜻입니까?”
바로 머리 위에서 위험한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지금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되었다.
맙소사!
새 계약서가 날아가게 생겼지 뭔가.
돌아서는 다리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주희는 계약 맞선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었다.
“죄송해요. 아는 사람을 본 것 같…….”
뒤돌아 횡설수설 변명을 주워 담다 더욱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에게 아주 대놓고 나 미쳤소를 다시 어필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이를 쫓아 나오긴 했지만 인간인 그의 눈에 아이 귀신이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는 사람?”
그가 굳게 닫혀 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저 맞선, 꼭 보고 싶어요. 아니, 봐야 해요.”
저절로 신음 소리가 새는 것 같았지만 오직 새 계약서만을 머릿속에 담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바람을 입에 담았다.
“취향이 너무 독특한 거 아닙니까? 아니면 시력에 문제가 있거나.”
입 밖으로 내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신우는 자신의 존재가 마치 깃털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내뱉고 말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딱 봐도 유부남이던데 불륜 뭐 그런 걸 좋아하는 취향이냐고 묻는 겁니다.”
“아, 아니거든요!”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정색하며 아니라 외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멍하니 넋을 빼다 여기까지 달려 나올 정도로.
얼핏 보긴 했지만 키 작고 정말 별 볼 일 없는 중년 사내였다.
그런 이에게 밀리다니.
그의 존재감이 이토록 희미하게 느껴져 본 적은 없었다.
띵!
마침 다른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사람이 내리지 않았다면 무슨 말을 더 입에 담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왜 아직 안 들어가고 계십니까?”
“지금 이 숙녀분과 본인의 성적 취향과 맞선의 절실함 중 어느 쪽을 택할 건지에 대해 논의 중이었습니다.”
응산의 목소리에 신우는 나쁜 기분을 그대로 담아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들로 이죽거렸다.
“맞선이라니까요. 그리고 자꾸 제 취향을 이상한 쪽으로 모시는데, 저도 눈 있거든요? 이왕이면 얼굴, 몸, 다 잘생긴 사람이 좋다고요.”
주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맞선을 선택했고,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모는 그의 말도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본인의 의사를 확실히 전했다.
“좋아요. 이번만은 속아 주죠. 하지만 또 한 번 맞선 장소에서 한눈파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그땐 그쪽에서 작정하고 계약을 파기하고 싶은 거라 생각하고 우리 계약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 그럴 일 없어요. 다음엔 그쪽에서 하자는 대로 할 테니 걱정 마요.”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하는 달콤한 말들과 오롯이 그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모든 게 가식일지 모르겠지만 그제야 엉망으로 엉켰던 기분도,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심도 조금씩 회복이 되어갔다.
“들어가지.”
* * *
파라다이스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의 럭셔리한 식사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에 없다.
식사 내내 느껴지던 그의 따가운 시선과 혹시라도 떠돌이 귀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그 고급스런 스테이크 코스 요리가 어떤 맛이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오직 계약서만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애피타이저까지 다 깨끗이 비운 후였다.
보통 사람들은 맞선을 보면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정말 밥만 먹고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집으로 바로 들어갑니까?”
이가서림이 보이는 위치에 왔을 때야 그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가게에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아요.”
시간상 문을 닫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가게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주희가 대답했다.
스르르, 소리도 없이 차가 멈췄고, 경호원이 내려 문을 열어 주기 전에 그가 먼저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어색한 감사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렸을 때, 이가서림의 문이 열리며 도 실장이 제법 먼 거리를 버선발로 뛰쳐나오듯 뛰어나왔다.
“주인님!”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때까지 신우의 손 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손을 도 실장이 순식간에 낚아채갔지만 그녀는 도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다.
순간 신우의 굵은 눈썹만이 꿈틀댔다.
“일은요. 주인님이 너무 늦게 들어오시기에 걱정이 돼서 그랬죠. 어서 들어가세요, 주인님. 맞선 보면서 다른 사람까지 줄줄이 달고 다녀야 하니 엄청 피곤하셨겠어요.”
도 실장이 그들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응산을 사납게 쏘아보며 이죽거렸다.
현와원에서의 첫만남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도 실장은 저 응산이라는 사람과 마주치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지금은 자신의 코가 석 자라 도깨비의 사연에까지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도 실장님이야말로 피곤하실 텐데 먼저 퇴근하세요.”
주희는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를 끌고 들어가려는 도 실장의 손을 떨쳐내며 말했다.
그리곤 어둠 때문에 표정이 잘 읽히지 않는 신우를 돌아보며 정중히 인사했다.
“저녁, 잘 먹었어요. 안녕히 가세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 한잔하고 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이 시간에 차는 무슨 찹니까? 피곤한 사람 붙들고 뭐 하시는 거죠?”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도 실장이 먼저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바람에 주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도 실장이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언제는 맞선 보라며 등을 떠다밀더니, 지금은 말끝마다 가시를 뱉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피곤하다니, 어쩔 수 없죠. 차 마시며 다음 만남 날짜나 의논해 볼까 했더니. 그럼 다음에 연락하겠습니다.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안 피곤해요. 전혀요. 들어가세요.”
다음 만남이라는 신우의 말에 주희가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곧바로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꿔 간다는 말을 할까 봐 재빨리 신우의 팔을 잡아끌기까지 했다.
이제 두 번 남았다.
약속 이행이 빠를수록 그녀의 삶도 빨리 안정권에 접어드는 것이다.
“커피 말고 다른 차도 있습니까?”
못 이기는 척 주희의 손길에 끌려 들어가는 신우의 시선과 못마땅함에 볼을 실룩거리고 있는 도 실장의 시선이 이유 없이 허공에서 작은 불꽃을 튀겼다.
“제가 평소 즐겨 마시는 녹차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어제 자신이 내려 준 커피에 대놓고 맛이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어제 그 커피만 아니면 됩니다.”
손님들에게 종종 커피를 대접하곤 하는데, 신우처럼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제 너무 긴장해서 커피량 조절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잠을 자던 중이었는지 문소리에 잠시 고개를 든 석이 그녀를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박고 잤다.
그 모습에 주희가 본능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조용조용 움직였다.
“도마뱀을 펫으로 기르는 사람이 흔하진 않을 거 같은데. 왜 도마뱀을 기르는 겁니까?”
“이유 같은 거 없어요. 석이완 그냥 우연히 만났어요. 잠시 앉아 계세요. 차 준비해 올게요.”
신우는 이유가 없다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부엌으로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대답 내용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단 그녀의 뒷모습조차 피곤해 보여 자꾸 신경이 쓰였다.
사실 도 실장의 도발만 아니었으면 차를 마시겠다 고집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셈이었지만 또 막상 이 공간에 서고 보니 잘한 것도 같다.
신우는 몸을 움직여 어제의 소파에 지그시 기댔다.
분명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고서점의 낡고 낡은 의자일 뿐인데 그에게 맞춘 듯 편안함을 제공했다.
몸이 최적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보니 시선이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베일에 싸인 비밀투성이 맞선녀.
이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인간 세상에서 현재 유일하게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인이었다.
베일이 벗겨지지 않아도 좋으니 되도록 이 기분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섞여든다.
하지만 편안함인지 나른함인지 모를 감각에 빠져든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 괜찮다니까요. 어서 들어가세요, 김 순경님! 주인님도 아직 퇴근 안 하셨다니까요.”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와 함께 도 실장이 누군가의 등을 떠밀며 들어왔다.
“그래도 문 닫을 시간이 지났는데 퇴근하셔야……. 아! 아직 손님이 계셨네요.”
이상한 놈이 들어왔다.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보면 경찰이 맞을 터인데, 빙구 같은 말랑한 웃음을 짓고 있는 녀석의 생김새로 봐서는 절대 경찰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니까요. 앉아 있으세요. 주인님 차 준비하러 가셨는데 김 순경님 것도 같이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올게요.”
그를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태도로 손님맞이를 하고 부엌으로 사라지는 도 실장을 보니 다시 한번 김 순경을 보게 됐다.
“안녕하세요! 책 사러 오셨어요? 처음 뵙는데 이 동네에 사시는 분이 아닌가 봐요? 여기 뭔가 신비롭지 않아요? 이상하게 마음도 편해지고. 여긴 정말 특별한 곳인 거 같아요. 아, 그거 아세요? 여기 되게되게 오래됐어요. 저 어릴 때부터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혼자 말하는 재주를 가진 녀석인 모양이다.
전혀 반응하지 않는 낯모르는 이를 상대로 주절주절 쉬지 않고 묻고 답하는 아주 특별한 재주를.
정신이 온전한 놈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라, 더 빤히 쳐다봐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놈의 얼굴이 제 주인을 본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되는 것을 보며 신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김 순경님 오셨어요?”
불쑥 날아든 다정한 말투에 왠지 모르게 미간의 주름이 좀 더 짙어졌다.
“주희 씨.”
“안 그래도 한 가지 부탁이 있었는데 잘 오셨어요.”
쪼로록!
녹차를 준다기에 티백 녹차쯤이려니 생각했는데 정식 다기세트까지 갖춰 차를 내온 그녀가 익숙한 손짓으로 다관을 들어 숙우에 찻물을 부으며 말했다.
“부탁요? 주희 씨가 저에게 부탁이라니, 뭔데요?”
마치 부탁을 해줘서 황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놈의 노골적으로 정직한 얼굴에 헛웃음이 날뻔했지만 웃지 않았다.
“조금 이따가요. 우선 차부터 드세요.”
그의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대답하고 있는 그녀의 말에 김 순경의 얼굴은 점점 환해져 갔고, 반대로 신우의 얼굴은 점점 무표정하게 굳어져 갔다.
“커피보단 나았으면 좋겠네요.”
이제야 그를 응시하며 말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김 순경을 보던 눈길과는 확연히 다른 절제된 눈빛이었다.
“주희 씨가 달인 차는 정말 달라요. 어떤 찻집의 차보다 달콤하고 맛있다니까요.”
찻집도 아닌데 마치 차 홍보대사라도 된 것같이 흥분해서 말하는 김 순경의 말이 왠지 신우의 비위에 거슬렸다.
“자주 마셔 봤나 보군요. 하지만 녹차를 마시고 달콤하다는 말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닌데……. 정말 맛있다는 말을 한 건데…….”
그의 말에 당황해 얼굴을 붉힌 김 순경이 어물어물 변명을 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김 순경의 난처함은 전혀 자신의 몫이 아니었기에 신우는 보란 듯이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투명한 연둣빛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맑은 기운을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온기를 품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 신우가 향기 머금은 첫 모금을 마셨다.
입 안을 감도는 여린 맛과 향.
깔끔함과 담백함이 함께하는, 그가 집에서 즐기는 차와 비슷한 맛을 내는 차였다.
“우전인가.”
무심코 나온 그의 말에 다들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헐, 여기에도 노인 한 분 계셨네. 첫 모금에 그런 걸 맞히는 사람은 우리 주인님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네요.”
도 실장이 부엌에서 나오다 그 말을 듣고는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부루퉁하게 꿍얼거렸다.
“확실히 커피보다는 낫군.”
도 실장의 말을 무시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신우가 그녀를 봤다.
“다행이네요.”
그녀의 입가에 부드럽게 맺히는 미소가 보기 좋았다.
방금 목 넘김을 한 차에서 그가 그렇게 면박을 놓았던 달콤한 맛이 우러나 순간 놀랐지만 표정만은 거만한 본래의 표정 그대로였다.
“여전히 맛있네요. 제가 맛 표현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잘 표현 못 하겠지만 정말 맛있어요.”
“고마워요.”
삶은 호박 같은 물렁물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있는 김 순경의 말에 그녀는 방금 전 그에게 보인 미소와 똑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찻잔에 두 번째 차가 채워졌고, 다시 마신 차는 봄 향기 품은 처음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난 당최 그 풀때기 우려낸 물을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도 실장님이 끓여 주시는 메밀차도 맛있어요.”
“김 순경님은 여기서 나오는 건 뭐든 다 그렇게 후한 점수만 주시니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진짠걸요. 특히 도 실장님 칼국수 실력은 정말 최고예요.”
“인정합니다. 칼국수만은 자신하죠. 김 순경님 미각 제대로십니다.”
도 실장과 김 순경의 주고받기식 칭찬 릴레이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차만 마시고 있던 신우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난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벌써요?”
그녀가 왜 당황한 표정을 짓는지 모르지 않았다.
“다음 약속은 다음 주 토요일이 좋을 거 같은데. 12시.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괜찮아요. 시간 낼게요.”
그가 다른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다급하게 좋다는 뜻을 전했다.
“약속요? 두 분, 무슨 일 있으세요?”
서로 마주 본 채 시간 약속을 잡고 있는 신우와 주희를 번갈아 쳐다보며 김 순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일까,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었는데 신우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대답했다.
“일이 아니라 맞선입니다.”
“맞선요?”
“그렇습니다. 맞선.”
김 순경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라 소리치고 있는데 그는 또 한 번 강조해서 대답해 주었다.
그 바람에 김 순경의 시선이 그녀에게 못 박혔고, 그녀는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곧바로 가게를 나섰고, 그녀는 당연하게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에이, 걱정 마요. 김 순경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맞선 아니에요.”
닫히는 문틈 사이로 도 실장이 김 순경을 어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왜 그런 소리를 했느냐 따지지 않았다.
신우는 찬 공기를 마시며 큰길가에 세워진 자신의 차를 향해 걸음을 뗐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도 규칙적으로 그를 따라왔다.
쉬이이잉!
큰길로 나오니 차들이 지나다녀서인지 바람이 더 차게 느껴졌다.
그제야 그녀가 나올 때 외투를 걸치지 않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추운지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바람이 차니, 그만 들어가요.”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그녀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낡은 SUV의 뒤꽁무니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를 지나쳐 도롯가로 바짝 다가갔다.
이젠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진 차를 보려 그녀가 몸을 내밀었을 때였다.
빠아아앙!
때마침 달려오던 트럭 한 대가 미친 듯한 클랙슨 소리를 울려댔다.
“……!”
섬찟한 기운이 정수리를 강타하는 놀람이었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클랙슨 소리에 얼어붙어 있는 그녀를 와락 잡아채 끌어안았다.
쉬이이잉!
빠아아앙!
스쳐 지나가는 트럭의 성난 바람 소리와 클랙슨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품에 안은 그녀의 온기가 아무 일도 없음을 전해 주는데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은 풀리지 않았다.
“저기…….”
그녀의 바르작대는 몸짓과 목소리를 듣고야 서서히 얼어붙어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꽉 껴안은 팔을 풀고 그녀의 가는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인간은 한번 죽으면 끝이다. 다시 살아나지 못해. 만에 하나 환생을 한다 해도 그건 결코 지금의 네가 아니란 말이다.”
지금까지 언제나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던 존댓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다.
만약 실수로 한 발짝만 더 도로로 내디뎠으면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죽음.’
그저 평범한 인간 하나가 제명을 다하는 것뿐이라 생각하면 그만인데, 왜인지 그게 되지 않았다.
이 작은 인간 하나가 뭐라고, 어이없게 할아버지를 보냈을 때의 기억과 감정이 오버랩되었다.
얼음송곳을 꽂아대는 것같이 가슴 시리던, 몇 날 며칠을 정적이 흐르는 어둠만을 노려보고 있던 그날의 감정을 소환시키고 있었다.
“회장님!”
다행히 응산이 달려온 덕분에 더 이상 미친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됐다.
신우는 엉망으로 엉켜든 감정을 억지로 털어냈다.
“가요.”
신우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응산을 재촉해 차에 올라타 버렸다.
스르르르!
길에 우두커니 남겨진 주희는 반박 한번 못 해보고 멍하니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고급 세단의 뒤꽁무니만 쳐다봐야 했다.
“왜?”
정말 바보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트럭이 위험하게 옆을 지나갔다는 건 알겠는데, 그가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한번 죽으면 끝이라니?’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깨를 꽉 붙들고 싸늘하게 말하던 그의 시선은 심장이 졸아들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그의 말을 가만 생각해 보면 어딘지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묘한 여운이 남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되새길 때였다.
『저놈 뭡니까?』
갑자기 확 끼쳐오는 냉기와 목소리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차사 님! 제발 기척 좀 내고 나타나시라고 했잖아요!”
너무 놀라다 보니 상대가 차사든 뭐든 와락 신경질적인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차사는 그녀의 신경질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차사가 어떻게 기척을 내고 나타납니까? 그나저나 정말 저놈 뭡니까? 낮에 봤을 때도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에게서 왜 다른 기운이 느껴지죠?』
그녀를 힐끗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신우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기운이라니?
“왜요? 차사 님 눈엔 저 사람도 귀신으로 보이세요? 그럼 잡아가시면 되겠네요.”
주희는 하급 도깨비보다 더 맹한 말을 하고 있는 차사의 뒤통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제야 차사가 신우가 사라진 도로에서 관심을 거두고 주희를 봤다.
『귀신이면 당연히 잡아갔죠. 귀신의 기운이 아니니까 이상하다는 거고. 나도 천계신을 한 번도 보지 못해 장담은 못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금 그 기운, 천계의 기운인 거 같아요. 아, 물론 당신 같은 인간은 느끼지 못하겠지만요.』
이 신참차사 님께서 뭐라시는지.
천계의 기운?
“차사 님, 연차 몇 년이세요?”
천계신이 차사는커녕 귀신 하나 못 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인지, 어이가 없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궁금했던 경력을 따져 물었다.
『그 불량한 시선은 뭡니까? 설마 지금 내 눈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요? 방금 그 사람, 낮에 당신을 봤는데도 모른 척했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하긴, 그건 좀 이상한데? 차사를 봤는데 그런 눈빛일 수는 없는데……. 그럼 뭐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참 티를 너무 팍팍 내고 있는 차사의 모습에 주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휙 지나쳤다.
차라리 어서 들어가 김 순경에게 아이가 탄 차를 운전하고 있던 남자에 대해 묻는 쪽이 백배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볼 때마다 소정과 같은 공간에 있던 남자였다.
귀신과 우연이 자주 겹치는 이는 인연보다 악연일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소정의 죽음에 그 남자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가, 같이 가요!』
* * *
에이스 아파트 109동 앞.
몇몇 여인들이 호호 입김이 나오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몰려나와 있었다.
“어제 정은이 아빠 회식 끝나고 오는 길에 큰일 날 뻔했다면서요?”
“그랬다니까요. 정말 이게 무슨 일이래요. 다행히 다치진 않았지만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장난도 이 정도면 최악 아니에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구요.”
“그래도, 신고는 안 하셨죠?”
“그러니까 경찰이 안 왔죠.”
누군가 눈치를 보며 물었고, 정은 엄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유, 정말 왜 자꾸 우리 동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그러게요. 이러다 우리 109동만 아파트값 떨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
“이렇게 쉬쉬할 일이 아니라 정말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아요? 이래 가지고 밤에 밖에 나가기나 하겠어요? 불침번이라도 서자고요. CCTV를 더 설치하든지.”
“하지만 CCTV를 더 설치했는데도 또 이런 사고가 났잖아요. 정말 무슨 귀신 씐 아파트처럼 아무도 없는데 물건이 떨어…….”
“쉿!”
흥분한 여인의 말에 다들 놀란 토끼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109동 앞으로 다가서고 있는 주희를 발견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호호호. 아마 장난꾸러기 녀석이 호기심에 장난쳤을 거예요. 안 그래요?”
“맞아요. 다친 사람도 아무도 없는걸요. 장난이었을 거예요. 그나저나 나 빨래 돌려놓고 나왔는데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머, 나도 오늘 손님 오시는 걸 깜빡했네.”
“같이 가요. 나도 오늘 약속 있어서 준비하러 올라가야 해요.”
점점 가까워지는 주희를 의식했는지 여인들이 서로 눈짓하며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 사라지고 겨울 찬바람만 남은 109동 앞에 선 주희의 시선이 자동으로 끝없이 높이 뻗어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그 아이 짓일까?
영혼은 형체를 갖추지 못했기에 물리적 힘을 쓸 수 없는 게 보통이지만 아주 가끔 영적인 스파크가 일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기에 드는 의문이었다.
어제 김 순경에게선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정보를 얻어내긴커녕 박신우가 투척하고 간 맞선 선언 때문에 넋 나간 김 순경을 달래 보내는 것만도 일이었다.
그런 김 순경에게 느닷없이 소정의 죽음이 그 마트에서 봤던 남자와 연관이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이전에 미친년 취급을 당하는 게 먼저일 테니까.
그게 지금 주희가 오전 일찍 에이스 아파트를 찾은 이유였다.
김 순경에게 자세한 이야길 듣진 못했지만 그 남자가 사는 곳이 소정이 살던 아파트와 같다는 건 아이 귀신을 처음 본 날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에 무턱대고 찾아와 본 것이다.
“어떡하지? 일일이 초인종을 눌러봐야 하는 건가?”
사실 소정의 주소를 찾아오긴 했지만 그 남자가 109동에 사는지 아니면 다른 동에 사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데다 사실 초인종을 눌러 확인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도대체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당신이 소정을 죽였냐고 물을 것인가, 아니면 소정을 어쨌냐고 묻겠는가.
어느 쪽이든 그녀만 정신이상자가 될 터였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가 위험에 빠지거나.
먼저 소정의 영만 따로 만나 보는 게 가장 옳은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마침 아파트 주차장 안쪽에서 낯익은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차를 살피니 어젯밤 그녀가 봤던 그 낡은 SUV가 맞았다.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지.”
막상 차를 보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차 주인이 몇 층에 있을까를 가늠하며 높이 치솟은 아파트를 어지럽게 올려다볼 때였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나기에 돌아보니 그녀가 아는 사람이 아파트를 나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초점 없는 시선으로 휘청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소정 어머니의 손에 전단지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계절을 느끼지 못하는지 입고 있는 외투가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추워 보였다.
휘이잉!
스치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전단지 몇 장이 날려가고 있었다.
휘청거리던 소정의 어머니는 마치 아이가 날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단지를 잡으려 뛰었다.
몸을 가누는 것도 힘겨워 보이던 가녀린 몸이 보도 턱에 걸려 그대로 넘어지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놀란 주희가 달려가 넘어진 소정의 어머니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 소정이. 우리 소정이가…….”
자신의 몸보다 전단지부터 먼저 챙기려 드는 앙상하게 뼈마디만 남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주희가 작게 한숨을 쉬며 저만치 화단 구석에 떨어진 전단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을 때였다.
부르릉!
차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SUV가 출발하고 있었다.
소정의 영이 제 어머니를 꼭 품어 안고 있는 것도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소…….”
저도 모르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려다 아주머니가 놀랄 것 같아 말을 멈췄다.
순간 아이의 시선이 자신과 마주쳐 놀란 것도 잠시, 아이는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 나가고 있는 차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차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여기서 다시 아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 쉰 주희가 소정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여기요.”
내민 전단지 속에 방금 전 아이의 영이 짓고 있던 표정과는 너무도 다른, 환하게 웃는 소정이 있었다.
이미 인간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아이.
그토록 마음을 다져 마음 주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 애쓴 보람도 없이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 온다.
“고맙습니다. 저기, 우리 아이 보시면 꼭 좀 연락 주세요.”
소정의 어머니가 받아 든 전단지 한 장을 다시 그녀에게 건네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눈 속에 담긴 간절함은 살아 있는 아이의 소식이었다.
“오늘 계속 춥다고 하던데 이거라도 하고 가세요.”
주희는 차마 거짓을 말하진 못하고 자신이 하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아주머니의 목에 감아 주었다.
“하지만 아가씨가.”
“괜찮아요. 전 계속 가게 안에 있을 거라서 이건 아주머니께 더 필요할 것 같네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소정의 어머니에게 진심을 전하며 머플러를 더 단단히 묶어 주었다.
“고마워요. 아…… 늦었어. 어서 한 장이라도 더…….”
고마움을 전하는 소정 어머니의 눈빛에 아주 잠시 맑은 빛이 도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흐려졌다.
전단지를 꼭 품어 안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린 소정 어머니가 허둥지둥 걸음을 재촉하며 사라져 갔다.
주희는 오래도록 아주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정이가 빨리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소정을 위해서도, 위태위태해 보이는 소정의 어머니를 위해서도,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당장 가자고 난리를 치더니 필요할 땐 없어. 완전 근무 태만이야.”
어젯밤, 아이의 영이 어떤 남자와 같이 있더라는 그녀의 말을 들은 차사는 당장 그 밤에 아파트를 찾아가자고 난동을 부렸었다.
물론 그녀는 차사의 말을 무시했다.
그 남자의 집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찾겠다는 건, 그 밤에 아파트 초인종을 그녀에게 일일이 누르라는 미친 요구였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급하다던 차사가 오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종일 다른 혼을 인도하러 명부를 드나들어야 한다고 했던가?
같이 왔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원망의 화살이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하는 염치없는 차사에게로 향했다.
아쉬움에 터덜거리는 걸음을 걸어 이가서림 앞에 도착하니 도 실장이 가게 앞을 쓸고 있었다.
“어? 주인님, 벌써 다녀오세요?”
“아이를 놓쳤어요.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그냥 왔어요.”
“그러게 뭐하러 그런 팔푼이 차사 일을 돕고 나서요? 냅둬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게. 그런 무능력한 차사는 잘리는 게 영혼들한테 이득이라고요.”
도깨비와 차사가 서로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말을 얼핏 듣긴 했는데 도 실장과 신참차사가 그 소문의 정석을 밟아가는 느낌이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마주칠 때마다 서로 긁어댔다.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진 것처럼.
“이번 건은 차사 님 잘못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잖아요. 그리고 저대로 너무 오래 두면 결국 사념만 남은 원귀가 돼 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소정의 혼은 환생도 하지 못하고 결국 원귀로만 세상을 떠돌든지 저승귀가 돼 버릴지도 모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죽은 귀신 일에 끼어들어 좋은 일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새미 씨 일 이후엔 지금까지 모른 척 잘만 지나치시더니 정말 왜 그러시냐고요.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요.”
투덜대는 도 실장의 말에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던 새미와의 유쾌하지 못했던 마지막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죽은 어머니의 말을 전한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새미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일이 있은 후 새미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없이 이 동네를 떠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녀는 도 실장의 말처럼 눈과 귀를 닫았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렇게.
신계에서도 오지랖 넓게 수명에 관여했다 벌을 받은 주제에 인간의 일에까지 관여해 결국 또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번만이에요. 차사 님이 그 아이를 잘 인도해 갈 때까지만요.”
도 실장의 말처럼 다 쓸데없는 짓인지도 모르지만 전단지를 내밀던 소정 어머니의 간절한 눈빛이 자꾸만 뇌리에 남아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꼭 이번만입니다?”
“그럴게요.”
“웃지 마세요.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 그냥 서 있지만 마시고 마트 가서 메밀가루라도 좀 사오세요. 호박도요. 오늘도 점심 먹을 틈도 없이 바쁠지 모르니 미리 점심 재료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다녀올게요.”
투덜투덜대면서도 그녀를 무조건 이해해 주려 애쓰는 도 실장의 모습에 군소리 없이 마트 심부름을 하러 나설 때였다.
“잠깐만요. 아니, 머플러는 또 어디다 갖다 버리시고 목을 훤히 드러내고 계신 거예요? 추위도 무지 많이 타시면서!”
머플러가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도 실장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따지고 들었다.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미안해요.”
“하여튼 우리 주인님은 가끔 이상한 데서 감정이 헤프다니까. 이거라도 매고 가세요.”
도 실장이 투덜투덜 혼잣말을 하며 자신의 목에 매져 있던 머플러를 풀어 그녀의 목에 둘둘 말아 주었다.
“괜찮아요. 마트 가까우니 빨리 갔다 오면 돼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귀가 이렇게 빨간데. 잠깐, 아니지. 주인님이 또 귀신한테 홀려 오면 정말 책방 문 닫고 귀신흥신소 차려야 할 판인데……. 안 되지. 그건 절대 안 돼. 주인님! 마트 내가 다녀올게요. 주인님이 가게 보세요.”
머플러를 다 묶고 제대로 묶었나 이리저리 살피던 도 실장이 갑자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등을 떠밀려 했다.
“걱정 마요. 사람과 귀신 정도는 구분하니까. 다녀올게요.”
주희가 작게 한숨을 쉬며 도 실장을 다독거린 후 마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귀신 무서워서 밖을 못 다닐 것 같으면 평생 가게 안에 틀어박혀 살아야 한다.
가게 안에만 있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런 제약이 생기면 마치 감옥에 갇혀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 싫었다.
“불안한데. 정말 앞만 똑바로 보고 다니셔야 해요! 귀신하고 눈 마주치지 말고요!”
한 번 더 다짐을 받듯 잔소리를 해대는 도 실장의 말은 못 들은 척 걸음을 빨리했다.
모퉁이를 돌아 도 실장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야 그녀의 걸음이 느려졌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인적 없는 거리에 휘이잉 찬바람만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춥네. 받아오길 잘했어.”
소정 어머니에게 준 머플러도 사실 도 실장이 선물해 준 머플러라 미안해서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보니 도 실장의 과한 친절이 따스함이 되어 와닿았다.
피식 웃음을 머금은 채 한참을 걸어 마트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키이이익!
비명인지 울음소린지 모를 기이한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크게 들리더니 갑자기 처음 접해 보는 냉기가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팟!
바로 눈앞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형체를 드러냈다.
『살려 주세요! 제발요! 우리 엄마 좀 살려 주세요!』
곧장 뇌로 박혀 드는 것만 같은 아이의 처절한 절규 소리에 주희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