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그녀의 밤손님 2권
3-2장
“박, 신우 씬가요? 제 이름을 어떻게?”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이나 하고 있다니, 도 실장뿐만 아니라 그녀마저도 어떻게 된 모양이다.
당연히 로비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으니 난장판을 만든 그녀에 대해서도 조사했을 텐데 말이다.
“당연히 조사를 시켰습니다. 한성 로비에 도마뱀이 출몰하는 사건이 흔한 건 아니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석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식으로든 변명을 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저, 저, 그런데 우선 이 팔 좀 풀어 주시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살색의 향연 때문에, 머릿속이 제정신이 아닌 주희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양해를 먼저 구했다.
“안고 있는 걸 깜빡했군요. 창고엔 왜 그렇게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처럼 튀어나오면 크게 다칩니다.”
당황스러움은 순전히 그녀의 몫이었는지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손에서 풀려나고도 이상하게 쿵덕거리는 가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천만다행히 도깨비길은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창고에 왜 숨어 있었는지 해명해야 하는 일이 남았지만 깊은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어쨌든 정신이 좀 들고 나니 자신이 가장 먼저 뭘 물어야 하는지가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조사를 하셨다니 제가 여기 온 이유를 짐작하시겠지만, 임대계약서 때문에 꼭 직접 만나 봬야 할 것 같아서요. 할아버지께서 터무니없이 싸게 계약해 주신 건 알고 있지만 갑자기 해지 통보서를 보내시니까 저희도 입장이 좀 난처해서요.”
또 언제 건물주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무조건 계약서 문제가 우선이었다.
“그 얘기라면 차 실장님께 들었습니다. 몇 가지 불필요한 자산들을 정리 중이라 그러신 거 같더군요. 여기 적혀 있는 것과 실제 시세 차가 좀 난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가 조금 전부터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게 그녀와 박 회장의 계약서였던 모양이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저 전세가로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사기였다.
그런데도 자신은 더 못 있게 됐다고 억울하다며 이렇게 따지러 온 격이고.
“네, 맞아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답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저절로 힘이 빠지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곧 겨울인데, 이사할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마음이 시려 왔다.
“갈 곳은 있습니까?”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가 불쌍해 보였는지 그가 물었다.
“알아봐야죠.”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옳겠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박 회장의 손자였다.
그렇게 좋은 인연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분인데, 그녀로 인해 그분의 손자를 힘들게 하는 건 옳지 않았다.
“왜 계약 기간대로 있겠다고 따지지 않는 거죠?”
“할아버지가 계셨으면 해봤을 테지만, 이제 안 계시니까요. 그리고 계약 기간 지켜졌어요. 평생.”
허허, 너털웃음 웃는 박 회장의 모습이 떠올라 그만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음, 그런 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군요.”
박신우가 새삼스럽다는 듯 계약서를 다시 보며 혼잣말을 했다.
“예고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와서 죄송했습니다. 이사할 곳을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기한은?”
그녀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그가 기한을 물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 자금 사정으로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건 어림도 없었다.
결국 가게를 접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는 결론인데, 생각만으로도 한숨이 났다.
“최대한 빨리 알아볼게요. 부탁합니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한참을 그렇게 빤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자신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요? 어떤?”
“내가 할아버지와 한 약속이 있는데, 약속만 하고 지키질 못했습니다. 그쪽이 날 도와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어떤 약속이냐 물으려는데 그녀의 앞에 종이 한 장이 팔락거리며 내밀어졌다.
“맞선…… 이, 이건.”
나 이주희는 박주호가 주선한 상대와 맞선을 볼 것을 약속하며, 선입견 없이 그 사람을 세 번은 더 만날 것을 맹세합니다, 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의 주소와 자필 사인까지 꼼꼼히 기입한 맞선 각서였다.
주희의 얼굴이 빨갛다 못해 잘 삶은 토마토같이 변했다.
“그쪽도 각서까지 쓰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나와 마찬가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난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거든요.”
“하지만 그건 그냥…….”
“이 내용대로 나랑 세 번 만나 주면, 이가서림의 임대계약서, 할아버지와 같은 조건으로 다시 쓰는 거 생각해 보죠.”
처음에 제안한다면서 부탁하듯 말하기 시작한 신우의 말투가 점점 거만하기 짝이 없는 갑의 말투로 변해갔다.
“할게요.”
하지만 주희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정색을 하며 받아들였다.
“선입견 없이 세 번은 더 만날 것.”
“그럴게요. 선입견 없이 세 번.”
신우가 야릇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이가서림이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푼 주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요.”
신우가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는 듯 흡족한 웃음을 웃을 때였다.
쾅!
노크도 없이 서재 문이 부서질 듯 열리더니 도 실장이 숨을 씩씩거리며 달려 들어왔다.
“주인님! 이씨, 놔! 주인님 괜찮은지 확인을 해야 한다고!”
뒤에서 다시 잡아채려는 응산의 손길을 마구 뿌리치며 도 실장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내버려 두십시오.”
신우의 명령에 응산이 바로 손길을 거둬들였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도 실장님은 괜찮으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도 실장과의 계약서를 갈가리 찢어 버리겠다 다짐했었는데, 일이 예상외로 잘 풀린 덕에 도 실장을 걱정할 여유도 생겼다.
“주인님, 어서 가요. 여기 영 터가 안 좋아요. 어서요.”
도 실장이 막무가내로 주희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다.
“이분들, 집까지 잘 모셔다드리세요.”
안 그래도 막상 집에 갈 때가 되니 지갑조차 가지고 오지 않은 사실이 생각나 걱정이었는데, 신우가 마치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미리 편리를 봐줬다.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진심으로 감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신우가 약속 잊지 말라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안 데려다줘도 돼. 우리끼리 갈 거라고.”
도 실장이 기분 나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불퉁한 표정으로 응산을 보며 거절했다.
“그럼, 도 실장님은 걸어오세요. 난 이분이 태워 주는 차 타고 가야겠어요.”
하지만 찬바람을 일으키며 곁을 지나는 주희의 말에 도 실장은 와락 얼굴을 구기면서도 주희의 뒤를 졸졸 따라야 했다.
“주, 주인님. 같이 가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천천히 뒤돌아선 신우의 가늘어진 시선이 한동안 주희와 도 실장이 튀어나왔던 창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났지만 박신우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가 헛것을 들은 걸까.”
주희는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간절함에 혹시 자신이 멋대로 상상한 건 아닌가 불안해지기 시작해 멍하니 문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그 조건이 사실이었다는 데 기대를 해보는 건, 아직 계약 해지 내용증명이 날아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님! 마트 가서 호박 좀 사다 주세요.”
도 실장이 또 칼국수를 만들겠다며 들어가더니 주방에 들어간 지 5분도 되지 않아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자신은 계약 해지가 될까 불안해 조마조마한데, 도 실장은 그날 현와원을 다녀온 이후로 계약 얘기를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계약 해지 따윈 아무것도 아니란 듯 저렇게 평소보다 더 씩씩하게 굴었다.
“호박…….”
“땡초도요! 이렇게 스트레스 쌓일 땐 땡초 팍팍 썰어 넣어 칼칼하게 먹어야 돼요. 육수 우릴 동안 얼른 다녀오세요.”
주문을 끝낸 도 실장의 머리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마트까지 다녀오는 게 귀찮아 호박 필요 없이 그냥 먹자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땡초 주문까지 더해지고 만 것이다.
도 실장의 기나긴 음식 철학 강의를 듣지 않으려면 꼼짝없이 마트에 다녀와야 했다.
“귀찮아.”
“뭐라고요?”
바로 옆에 있어도 들릴까 말까 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는데 귀가 얼마나 밝은지 도 실장이 또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녀올게요.”
“귀신한테 홀리지 말고 앞만 똑바로 보고 다녀오셔야 해요.”
일곱 살짜리 마트 심부름 보내는 어미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도 실장의 말은 못 들은 척 외투를 입고 가게를 나섰다.
선득할 정도의 차가운 바람이 저도 모르게 얇은 외투를 여미게 했다.
가게와 붙어 있는 집에 거주를 하다 보니 계절을 잘 느끼지 못하는데 이렇게 거리로 나오면 비로소 계절감을 느끼게 된다.
발치에 나뒹굴고 있는 퇴색한 나뭇잎들이 마치 곧 겨울이 올 것임을 알리는 전령처럼 보였다.
‘겨울…….’
박신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정말로 이 계절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맬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에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게 좋을까?’
이사를 해야 한다면 제일 먼저 얘기를 해야겠지만 고고학 외에 생활 능력 제로인 아버지에겐 아마 미리 걱정만 얹어 주는 꼴일 터였다.
또, 잘되면 그냥 이대로 계약 유지가 될 수도 있고.
‘아냐, 나중에.’
답답한 건 자신이라 먼저 연락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는 바쁜 사람이니 시간을 빼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음에도 이상하게 한숨이 났다.
시름만 한가득인 걸음으로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새 마트가 마주 보이는 사거리 횡단보도 앞이었다.
주희는 녹색 신호등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횡단보도를 건넜다.
낮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인적이 뜸했는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한 아이가 있어 마트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열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이 시간에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마트 앞 화단 턱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흔들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추운 11월의 날씨에 반팔 차림.
너무 빤히 쳐다본 탓인지 그때까지도 어딘가를 멍하니 보고 있던 아이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추워 보여 누구를 기다리는 거라면 마트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주희 씨! 어디 가세요?”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길래 돌아보니 도로변에 순찰차가 멈춰 서 있었다.
그 안에서 김 순경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댔다.
“가게는 어쩌고 이 시간에 여기 있어요?”
“도 실장님 심부름요. 호박 필요하대서요.”
“와아, 오늘도 맛있는 거 만드시나 봐요. 도 실장님 요리 실력 정말 굉장하죠. 특히 메밀칼국수 끓이는 솜씨요. 어떻게 그런 훌륭한 맛을…….”
가끔씩 이가서림에서 밥을 얻어먹곤 하는 있는 김 순경이 입맛까지 다시며 황홀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차에서 내렸다.
타이밍을 같이해 누군가가 다가드는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전단지 하나를 내밀고 있어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보시면 연락 좀 해주세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볼이 움푹 들어간 해쓱한 얼굴에 공허한 눈빛의 여인이었다.
“아주머니, 날이 추운데 옷을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시면 어떡해요. 이거라도 걸치세요.”
김 순경과 아는 사이였는지 김 순경이 여인의 어깨에 외투를 둘러 주었다.
“괜찮습니다, 김 순경님. 혹 신고 들어온 건…….”
김 순경의 친절을 사양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꺼질 듯 힘이 없었지만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표정엔 너무도 간절한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없었어요. 있었으면 제일 먼저 연락드렸죠.”
외투를 거절하는 여인에게 억지로 다시 외투를 덮어 주며 대답하는 김 순경의 목소리에 난처함과 연민의 감정이 묻어났다.
잠시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여인의 눈동자가 다시 사망 선고를 들은 환자처럼 흐려졌다.
허깨비 같은 여인의 몸이 곧 쓰러질 듯 휘청댔다.
“아주머니! 안 되겠어요. 모셔다드릴 테니 오늘은 그만 집으로 들어가세요.”
김 순경이 여인을 부축해 순찰차로 데려가려 할 때였다.
“기란 씨? 괜찮아요?”
한 남자가 다급하게 다가서더니 주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쳐 김 순경과 함께 여인을 부축했다.
제법 세게 부딪힌 탓에 몸을 비틀거린 주희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쓸며 물끄러미 상대를 쳐다봤다.
중키에 인상도 강하지 않은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빛이 바랜 낡은 사파리 점퍼와 흙 묻은 운동화가 왠지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낡은 옷깃에 달려 반짝이는 특이한 문양의 배지 정도가 유일하게 시선을 끄는 그런 남자였다.
“오늘은 그냥 집에 계시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었는데. 이러다 정말 큰일 난다니까요.”
“아주머니와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었죠?”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김 순경이 알은체를 했다.
“네. 바쁘실 텐데 기란 씬 제가 아파트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김 순경님은 다른 일 보세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아파트까지 태워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요 앞 주차장에 제 차를 주차해 뒀거든요.”
“그래요? 그럼…….”
“기란 씨, 가요!”
김 순경이 인사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중년 남자가 여인을 재촉해 멀어져 갔다.
“……!”
주희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등 뒤를 빤히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단에 걸터앉아 놀고 있던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험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정말 저 아주머니 볼 때마다 너무 안타까워서 가슴이 아프네요.”
김 순경이 이미 저만치 모퉁이를 돌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연이 많은 분이신가 보네요. 소중한 걸 잃어버리…….”
여인에게서 받은 전단지가 생각나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를 펼쳐 든 순간, 주희는 갑자기 말을 잃었다.
전단지 속에, 방금 전 자신이 본 소녀가 해맑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소정이에요. 저 아주머니 딸인데 올여름 왜, 물폭탄처럼 비가 쏟아진 날 있었잖아요? 그날 사라졌어요. 연기처럼요. 사실 아주머니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경찰에서도 이젠 손을 놓은 상태예요.”
귀신.
더 깊어진 김 순경의 탄식 섞인 말에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았다.
순간 머리가 빙글 도는 것 같아 살짝 몸을 비틀댔다.
“주희 씨! 괜찮아요?”
그녀의 어깨를 붙든 김 순경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전, 그만 가볼게요.”
“앗, 마트 가신다고 했죠.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요. 어서 가보세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김 순경에게 주희는 말없이 목례만 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게 뭐야?’
귀신을 보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했지만 방금 전처럼 귀신인지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녀가 먼저 귀신에게 말을 건넬 뻔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희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이게 다 기다렸다 데려가야 할 영혼의 안내자가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해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3D 업종이란 건 알지만 이건 완전 근무 태만이잖아!”
원망의 화살이 그녀가 유일하게 본 적 있는 키 크고 비쩍 마른 차사에게 날아가는 건 당연했다.
마트 문을 열어젖히는 주희의 손길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여인의 공허한 눈동자가 팟, 하고 머릿속을 꽉 채운 탓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순간, 심장 한편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아주 잠시, 여인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도리질 치며 자신이 벌을 받고 있는 이유를 억지로 상기했다.
더불어 인간으로 환생한 후 유일한 친구였던 새미가 더 이상 그녀를 찾아오는 일이 없어진 이유도 떠올라 버렸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마저 다시 떠올려 버린 주희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 올리며 냉정하게 결론 내렸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자신이 끼어들 일은 절대 아니라는 결론을.
* * *
“괜찮습니다, 교수님. 바쁘시면 택배로 보내 드릴까요? 알겠습니다. 포장은 잘 해뒀으니 내일 아무 때나 오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장 교수님 내일 오신대요?”
“네, 요즘 많이 바쁘셨대요. 시간 된 것 같으니 우리도 그만 퇴근할까요?”
전화기가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던 주희는 장 교수의 전화를 끝으로 오늘 하루도 기대감을 내려놓았다.
“네, 이것만 정리하고요. 문은 제가 잠글 테니 먼저 들어가세요.”
새로 손질한 책을 가나다 배열에 맞춰 꽂고 있던 도 실장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한가해 하루 종일 멍하니 문밖만 쳐다보며 넋을 놓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도 실장은 그녀와 달리 한시도 손을 놓지 않고 저렇게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문은 제가 잠글게요.”
주희는 왠지 모르게 양심 한구석이 쿡 찔리는 것 같아 슬그머니 일어서서 출입문 쪽으로 갔다.
딸랑!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출입문 위의 종이 울렸다.
“……!”
문밖 통유리 너머에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존재에 좀처럼 놀라지 않는 주희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우아악!”
종소리에 무심결에 뒤돌아보던 도 실장도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존재에 놀라 기겁을 했고, 잠을 자던 석이마저 벌떡 일어나 꼬리를 바짝 치켜세우며 카아악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팟!
온몸을 검은색으로 두른 존재가 문을 열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해 주희의 앞에 섰다.
딸랑딸랑!
『역시 제가 보이는군요.』
가면을 둘러쓴 것 같은 표정 없는 하얀 얼굴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가 주희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우리 주인님은 아직 어리단 말입니다!”
주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도 실장이 앞으로 나서며 다급한 외침을 토해냈다.
『너 따위가 사자의 앞을 가로막다니, 겁을 상실했군.』
“도 실장님, 물러나세요.”
검은 옷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을 본 주희가 만약을 생각해 도 실장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주인님…….”
“알아요, 이분이 차사라는 거. 여기에 인간은 나뿐이니 아마 날 데리러 온 거겠죠.”
오늘로 세 번째 만남.
예고 없이 등장한 차사의 모습에 처음엔 놀랐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차사의 등장은 그녀가 가장 원했던 일이었다.
주어진 수명이 다한다는 건 그녀가 받고 있는 벌의 끝을 의미했으니까.
“흑! 주인님, 주인님. 흑흑!”
『저놈이 도깨비란 사실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눈이 밝은 인간을 종종 보긴 했지만 당신처럼 도깨비까지 부리는 인간은 처음 보네요. 신을 등에 업은 것 같지도 않고, 분명 인간의 기운을 지녔는데 나 같은 차사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군요.』
도깨비를 부리고, 차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매우 이상하게 보였는지 차사의 얼굴에 뜻밖이란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죽는 건가요?”
“어흑흑, 말도 안 돼요. 주인님 아프신 데도 없고 사고도 나지 않았는데 왜요? 왜 주인님이 죽어야 하냐고요!”
담담하게 묻는 주희와 달리 도 실장은 마치 자신이 죽는 것처럼 흥분해 따져 물었다.
『아직 이주희 씨 수명부가 날아온 건 아닙니다.』
차사는 도 실장의 흥분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오직 주희만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
수명부가 날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론 사람이 죽기 일주일 전에 차사의 손에 수명부가 전달되었다.
그러니 수명부가 날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죽을 시기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뭐라고요? 주인님의 수명부가 날아오지 않았다고요? 그럼 뭐죠? 제 눈앞에 있는 건 차사 분장을 한 귀신입니까? 차사가 아직 죽을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막 찾아다니면서 위협하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요! 이거 저승법 위반 아니에요?”
그저 미간만 찌푸리고 있는 주희와 달리 뒤늦게 차사의 말을 알아들은 도 실장이 놀란 게 억울했는지 열을 내며 따지고 들었다.
차사의 가면 같은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가는 걸 본 주희가 도 실장을 뒤로 잡아 빼고 앞으로 나섰다.
“날 데려가려고 온 게 아니라면,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차사가 인간에게 부탁이라니?
“부탁요?”
차사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꺼낸 말이었지만 너무도 생뚱맞은 말이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나를 볼 수 있고, 보고도 기절하지 않으며, 얘기까지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차사를 볼 수 있는 사람이야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방금 전처럼 차사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제정신으로 차사와 이렇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은 당연히 없을 테고.
“도움이라면 어떤 도움을 말하는 거죠?”
『사람 하나만 찾아 주십시오. 오늘 수명부가 내려와서 미리 조사하러 갔었는데,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일주일 안에 이 사람을 찾아 데려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미 영이 분리된 거 같습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
“이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저승으로 데려가야 할 사람을 놓쳤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요즘 차사직은 백으로 들어가나 보죠?”
황당해 말문이 막힌 건 주희도 마찬가지였지만 도 실장의 이죽거림은 도를 넘어섰다.
『차사직을 백으로 들어갔는지 아닌지 어디 네 몸으로 시험해 보든지.』
도 실장의 입바른 소리에 차사가 으스스한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달아나는 영혼을 위협할 때 쓰는 검을 칼집에서 뽑고 있었다.
“헉!”
“차사 님, 제 도움 필요하시다면서요.”
칼을 본 도 실장이 놀라 숨을 들이켜며 주희의 뒤로 후다닥 달아났고, 주희가 그만하라는 듯 한숨을 쉬며 차사의 주의를 붙잡았다.
그리고 차사의 말 중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다시 물었다.
“수명부가 이제 내려왔는데 그 사람의 생기기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죽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언제 죽었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알아야 영(靈)을 찾기 쉬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알아봐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영을 찾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알아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차사의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해할 때였다.
“그런 거라면 주인님을 찾아올 게 아니라 차사 님이 경찰로 현신해서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왜 가만히 잘 지내고 있는 우리 주인님을 찾아와서 이 난리예요?”
그녀 대신 또 도 실장이 먼저 나서서 까칠하게 꼬투리를 잡았다.
차사가 또 검을 꺼내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깐죽거리는 말투에 주희가 차사를 힐끗 쳐다보며 도 실장을 조용히 시키려 할 때였다.
차사의 표정이 갑자기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곤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중얼했다.
『인간으로 현신하려면…… 이상 돼야 합니다.』
“뭐라는 거야, 도대체!”
도 실장이 잘 들리지 않았는지 투덜댔지만 주희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생긴 비주얼로는 연차 500년은 돼 보이는 상급 차사이면서, 실제론 인간으로 현신하지도 못하는 초신참차사라는 말이었다.
팟!
차사가 허공에 사람의 영상 하나를 만들었다.
『이 아입니다. 주소는 저기 새겨 놓을 테니 한번 알아봐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차사는 자신의 능력이 들켜 무안했는지 멍하니 아이의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쫓기듯 말하고 나타났을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하! 뭐 저런 무식한 차사가 다 있어? 주인님, 모른 척하세요. 주인님 수명부가 내려오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차사가 왕왕대도 주인님 못 데려가요. 괜히 알아봐 준다고 했다간 오히려 주인님만 인간들한테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거예요. 아이와 일면식도 없는데 무슨 핑계로 찾아가서 묻냐고요? 아우! 안 그래도 요즘 완전 재수 옴 붙은 것 같은데, 이젠 별 거지 같은 차사까지 다 붙어서는. 에이, 소금이라도 뿌려야겠네.”
도 실장이 콧김을 씩씩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바가지를 들고 나와서는 안채로 통하는 문을 휙 열고 소금을 가지러 갔다.
석이까지 따라 나가고 있었지만 주희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 아이였어. 이름이 소정이랬던가?’
자신이 귀신인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아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인간으로 살다 가고 싶은데 왜 갑자기 자신의 앞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걸까.
관여하지 말아야 하건만, 이미 마음이 움직여 버렸다.
“내일 김 순경님을 찾아가 봐야겠어.”
한숨 쉬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다 시선을 문밖에 뒀을 때였다.
또다시 전신을 시커멓게 감싼 누군가가 문밖에서 가게 안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어 흠칫 놀랐다.
딸랑!
문밖의 손님이 밤의 어둠과 함께 느릿하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
“지나가다 보니 가게 불이 아직 켜져 있길래.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온 모양이군.”
마치 자주 드나드는 단골손님 같은 말을 하며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박신우였다.
“괜찮습니다. 어서 오세요.”
순간 명부의 사람이 다시 온 걸로 착각한 게 무색하게, 그는 검은색 슈트를 반짝이는 빛의 색으로 소화하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주희의 인사를 받은 박신우가 한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박신우가 소식을 전해 오길 순간순간 기다려 왔는데 막상 이렇게 바늘 끝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생각보다 작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느릿한 시선으로 책방을 둘러보던 그가 혼잣말을 했다.
현와원을 집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 이가서림 정도야 당연히 작은 골방에 불과할 테지만, 실제론 누가 봐도 결코 작은 가게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녀에게 이가서림은 단순히 단위면적으로만 따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모든 추억을 함께한 특별한 공간.
하지만 그 특별함은 오로지 자신에게 한해서일 뿐이다.
상대에게까지 그녀의 특별함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앉으시겠어요?”
주희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담담하게 자리를 권했다.
책방 구석구석을 훑던 그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와 멎었고, 마침내 책방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우뚝 서 있던 그가 몸을 움직였다.
박신우가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찾아 앉은 곳은 언제나 박 회장이 이곳에 오면 앉던 자리였다.
“커피 한잔하시겠어요?”
자신의 지정석인 듯 편안하게 앉은 그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박 회장이 언제나 찾던 커피를 권했다.
“그쪽이 내려 주는 건가?”
“……그럴게요.”
힐끗, 그녀의 시선이 잠시 안채로 통하는 문으로 향했지만 소금을 가지러 간다던 도 실장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커피를 타는 건 선택의 여지 없이 그녀의 몫이 되었다.
주희가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 주방으로 향했고, 신우는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가서림이라…….”
온통 책으로 장벽을 두른 공간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다시 한번 책방 구석구석을 훑던 신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절로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게 되는, 이상할 정도로 편안한 공간이었다.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이곳을 자주 찾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가진 책방 주인까지.
한 번도 인간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이주희란 여인은 이상할 정도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게다가 이제 겨우 세 번 본 여인일 뿐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곧 알게 되겠지.”
몇 번 더 만나다 보면 그녀의 정체와 그 이유도 알게 될 거라 생각하며 마치 현와원 자신의 집에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몸을 기대앉았다.
정말 필요 이상으로 마음이 풀어지게 하는 곳이다.
의식적으로 닫아 두고 있는 어느 날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열에 시달렸던 어느 날 이후, 차라리 영원히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기억이 되살아나 버렸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기억이 났다.
더불어 자신의 몸속에 신의 능력이라곤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돼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능력치 제로의 한낱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 한 가지만 빼고는 명부의 존재들은커녕 그 흔한 잡귀 하나도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훅, 신경질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신우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을 때였다.
덜컥!
책방 안쪽으로 나 있는 문이 열리더니 격한 투덜거림을 토해내며 한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우, 하필 소금도 이것밖에 없어. 주인님, 내일 소금 사러…… 으힉!”
그를 본 사내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흠칫 웅크리는 사이, 신우의 얼굴은 이미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내의 발치에서 같이 멈칫하던 도마뱀이 그를 발견하고는 휘익 날듯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팔을 타고 올라 어깨 위에 자리를 잡더니 바로 코앞에서 직직 소리를 내며 눈을 반짝였다.
그때도 영특한 녀석이라 생각했었지만 겨우 한 번 본 이를 기억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더 영특한 녀석인 모양이다.
“훗, 그래. 이름이 석이라고 했었지.”
주인을 닮았는지 펫조차도 평범하지 않았다.
신우는 석의 등을 천천히 규칙적으로 쓸어내리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서 있는 사내를 봤다.
“야! 식충이, 너 이리 안 와? 그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 쫓겨나게 생겼는데 뭐가 좋다고 꼬리를 쳐?”
자세히 보니 그녀와 함께 다락방 겸 창고에서 느닷없이 쏟아져 나왔던 사내였다.
신우의 날카로운 눈매가 좀 더 가늘어지더니 짜증을 있는 대로 토해내고 있는 사내를 빤히 쳐다봤다.
현와원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아무도 모르게 창고 안에 숨어 있던 두 사람.
혹시나 해서 그들이 돌아간 후에 CCTV를 확인해 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이 현와원에 숨어든 흔적은 없었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했는지 응산과 함께 현와원을 나서는 모습만이 찍혀 있었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다 아는 그로선 둘 중 하나가 공간이동 능력이 있는 신이거나 도깨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 족제비 같은 사내든, 아니면 이주희. 혹은 둘 다일지도.
잡귀 하나도 다룰 수 없는 바보가 된 그였기에 당장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급할 건 없었다.
건조하고 무료한 그의 생에 처음으로 이야깃거릴 제공하고 있는 이들이었고, 남은 생은 지겹도록 길고 길었으니까.
“이주희 씨에게 듣지 못했나 보군요. 약속만 지켜 주면 할아버지가 계약한 그대로 재계약해 주겠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재계약? 그게 정말입니까? 그냥 해보는 소리, 아니죠?”
사내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빨리 달려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되물었다.
“약속만 지켜진다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잠깐만요, 그런데 약속이라니요?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죠?”
도 실장이 좋아 죽을 것같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다시 물었다.
“맞선.”
“맞선요? 맞선! 박 회장님과 사인 계약한 그 맞선? 상대가 그쪽이었습니까?”
“그쪽도 내용을 아는 모양입니다.”
“물론이죠! 그때 제가 직접 펜을 건네드렸었는데요. 이히히! 그렇죠, 암요. 약속과 계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져야 하구말구요. 맞선! 좋았어! 응? 그런데 우리 주인님은요?”
마치 바보 춤이라도 출 기세로 시시덕거리던 남자가 또 살짝 맛이 간 표정을 지었다.
“당신 뒤에.”
그의 말에 곧바로 목을 움찔하더니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스스슥 게걸음으로 자리를 피하는 신기한 모습마저 선보이는 남자였다.
“도 실장니이임. 문은 제가 닫을 테니 그만 퇴근하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그녀의 표정만으론 화가 났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계약서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이제 겨우 스물다섯일 텐데 지나치게 감정을 잘 감추는 것 같았다.
“걱정 말고 퇴근하세요. 제가 이분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하지만……. 아, 알겠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십시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한 번 더 반박을 하려다가 좀 더 날카로워진 그녀의 눈빛 때문인지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인사했다.
그에게도 꾸벅 영혼 없는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사내는 바가지를 든 채 출입문을 나갔다.
딸랑!
정신없이 굴던 사내가 사라졌지만 신우는 사내의 인사말을 되새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둘이, 같은 집에 사는 겁니까?”
두 사람이 같이 살든 말든 그가 관여할 바가 아니란 걸 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런 터무니 없는 질문을 하고 있는 건지.
어쨌든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대답을 꼭 듣고 싶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그의 기세 때문인지 그의 어깨에 자리 잡고 있던 도마뱀이 쪼르르 그녀의 뒤로 도망쳤다.
“연인 관계인지를 물으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그의 차가운 기세에도 그녀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달그락, 그의 앞에 태연하게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질문이 어려웠던 모양이군요. 내가 궁금한 건 두 사람이 같이 사는지 여부인데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스스로도 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같이 산다는 말이 자꾸만 신경을 긁어대 고집스레 대답을 요구했다.
이주희와 도 실장, 누가 봐도 연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맞아요. 이가서림 마당을 기준으로 위채와 아래채로 나눠져 있긴 하지만, 어쨌든 한집이니 같이 산다고 하는 게 맞겠죠.”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동거를 긍정했다.
이주희가 누구와 동거를 하든,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흥미를 보였던 건 그저 작은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묘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군요.”
방금 전 사내가 나간 출입문이 아니라 사내가 처음 나타났던 안쪽 문에 시선을 두며 건조하게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한 모금 마신 커피의 맛은 유난히 쓰고 텁텁했다.
“맛이 없군.”
신우는 커피를 준비한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거만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퇴근할 시간인 것 같으니 본론만 말하죠. 계약 맞선. 내가 당분간 시간 내기가 힘들어서 그러는데 이주희 씨가 시간을 맞춰 줬으면 합니다. 첫 번째 만남을 내일로 했으면 하는데, 가능한가요?”
의견을 묻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고 건조하게 느껴졌다.
“내일요?”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자 신우는 의식적으로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갈 시간이 다 되었는지 응산이 때마침 출입문 저편에서 안쪽을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신우는 스윽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은 아무래도 그쪽이 바쁜 모양이니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죠. 다음 시간이 언제 날지는 모르겠지만.”
세 번의 만남이 없으면 새 계약서도 없다. 급한 건 그녀였지 그가 아니었다.
용건이 끝났다는 듯 신우는 망설임 없이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렸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응산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아, 알았어요. 시간이랑 장소는요?”
뒤에서 들려오는 당황한 목소리에 신우의 입가가 설핏 비틀려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는 천천히 뒤돌아 그녀를 봤다.
평소의 표정 없는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만큼이나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살아 있는 표정이 꽤나 그를 즐겁게 했다.
“6시에 데리러 오지.”
그녀는 너무 이르다 어쩐다 토를 달지 않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의 첫 번째 계약 맞선 날짜가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