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현와원(玄瓦院).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반듯반듯 네모난 집들이 아닌, 전통 담장이 높다랗게 쌓여 있는 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담장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보이는 높게 치솟은 솟을대문이 있었다.
사람을 가릴 것 같은 웅장함이 느껴지는 솟을대문 앞에 검은 차 한 대가 소리 없이 멈춰 섰다.
차가 멈추자마자 조수석에서 내린 경호원이 재빨리 뒷좌석으로 가 우산을 펼쳐 들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장례식 내내 줄기차게 내려 한층 더 우울한 분위기를 보탰다.
달칵, 뒷좌석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새까만 슈트에 새까만 넥타이, 셔츠마저도 온통 검은색 일색인 장신의 남자였다.
“아직 비가 내립니다. 안채까지 걸어가시기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집 안의 차고까지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방금 차 안에서 했던 말을 걱정스런 목소리로 다시 꺼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가 부탁드렸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되묻는 사내의 목소리는 울림이 좋은 묵직한 톤을 지녔지만 어딘가 묘하게 텅 빈 공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지시하신 대로 집안 고용인들 모두 일주일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으면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경호 문제도 신경 쓰이고 하니 저라도 남아 있는 게…….”
“괜찮습니다. 잠시 혼자 쉬고 싶습니다. 차 실장님도 장례식 기간 동안 한숨도 못 주무셨다는 거 압니다. 아마 할아버지께서도 차 실장님의 마음 충분히 아셨을 겁니다.”
차 실장은 거의 25년 동안 박 회장을 경호해 왔고, 지금은 한성그룹 전체의 경호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사고가 있던 날은 할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그날…… 제가 모셨어야 했는데, 하필.”
말을 하다 또 목이 메어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사고가 있던 날, 박 회장은 저녁 늦은 시간 예정에도 없던 어딘가에 다녀온다며 나갔다.
그날 차 실장은 다른 선약이 잡혀 있어 같이 갈 수가 없었다.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이 신호등도 무시한 채 그대로 차 옆구리를 들이받은 사고였다.
물론 그가 운전을 했어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고였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차라리 그 현장에 같이 있었으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차 실장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날 제가 할아버지를 더 적극적으로 붙들었어야 했겠네요.”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씁쓸함이 묻어나는 검은 사내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차 실장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박 회장의 죽음이 누구보다 안타깝고 외로운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차 실장은 자신의 짧은 생각에 이내 얼굴을 굳혔다.
“알고 있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일주일 후에 오십시오. 모든 일은 그때부터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어느새 열려 있는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당황한 차 실장이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 버리는 사내의 뒤를 쫓아 우산을 다시 드리웠다.
“대표님, 우산 가져가십시오.”
“괜찮습니다.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비를 맞아 보겠습니까.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검은 사내가 쓸쓸하게 웃어 보이며 한 말에 차 실장은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충격받은 표정으로 굳었다.
“…….”
어느새 뒷모습을 보이며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검은 사내가 마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검은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차 실장은 한참이나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들으셨습니까, 회장님? 대표님이 회장님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차 실장이 그의 마음처럼 울고 있는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박 회장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비통해했던 어느 비 오던 날, 회장님과 우연히 인연이 닿은 아이였다.
아무 연고도 없이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난 아이.
처음엔 사실 불안했었다.
아이가 한 해, 한 해 자라면서 박 회장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았지만, 오늘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박 회장 최고의 선택이 바로 박신우였음을.
내일부터 한성그룹은 꽤나 시끄러울 터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박 회장의 사돈에 팔촌이라는 촌수까지 겁 없이 달려들며 줄을 이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박신우 대표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평소의 박신우는 지금의 처연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범접하기 무서울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모습이 전부인 남자였으니까.
* * *
여름 장맛비같이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장례식 이후에도 일주일을 더 내리더니 마침내 멎었다.
이른 아침, 현와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차 실장의 두 손엔 방금 전 법률팀에서 가져온 서류들이 넘쳐났다.
안채까지 이어진 긴 정원 길을 걷던 차 실장은 문득 항상 걸어온 이 길이 오늘따라 무척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의 비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 느껴 보는 적막할 정도의 고요함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안채로 향하는 길이 평소 그가 다니던 길 같지가 않았다.
“이 일만 마무리 지으면 나도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 살아야겠군.”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물기가 남은 풀잎에 빛이 반사돼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던 차 실장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시기가 좀 더 늦었으면 좋겠네요.”
그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차 실장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돌계단 위에서 박신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우의 뒤에 펼쳐진 장엄한 현대식 한옥 배경 탓인지, 아니면 특이한 문양의 긴 로브를 입고 있어서인지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달라 보였다.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에 부서져 흑요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조각을 빚어 놓은 듯 뚜렷한 이목구비에 파리할 정도로 하얀 얼굴.
게다가 190에 가까운 장신에 무신이 봐도 부러울 정도로 탄탄한 몸까지.
왠지 바라보고 있는 이가 숨을 죽이게 되는 존재였다.
일주일 사이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일까?
평소에도 과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신우인데 핼쑥함이 더해지니 위험한 분위기마저 한층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거의 매일 보던 얼굴이라 이제 익숙할 법도 한데,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가끔 이렇게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다행히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정도의 담은 있었다.
“먼저 대답부터 주셔야지요. 할아버지 대신 제 비서 겸 경호원으로 남아 주시면 좋겠다고요.”
신우는 참 묘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보통의 아이가 가지는 두려움이란 걸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상할 정도로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재미있는 진지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대표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대표님을 모시기에 전 너무 늙었습니다. 새 경호원을 뽑았으니 곧 인사 발령이 날 겁니다. 그 전까진 못 미더우셔도 제가 곁에 있어 드려야겠지만요.”
신우의 농담에 차 실장이 마음에서 비롯된 웃음을 웃으며 새 경호원에 대한 보고를 했다.
“나이라. 그 생각을 못 했네요. 그럼 경호는 필요 없고 비서 업무만 부탁드리죠.”
신우가 뭔가 착각했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또 조금 전에 했던 농담을 다시 꺼냈다.
“……!”
차 실장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경호원은 필요 없습니다. 제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까요.”
경호원이 필요 없다니?
한성 회장의 자리가 어떤 곳인데 경호원도 없이 움직인단 말인가.
지금 자신의 비서 문제 따위로 상황 파악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대표님, 그건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차 실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반박하고 나섰다.
“난 전부터 귀찮은 경호원 따위 필요 없다고 했던 거 같은데요. 차 실장이 할아버지를 꼬드겨서 억지로 경호원을 뽑겠다고 했던 거죠.”
“그래도 약속하셨잖습니까?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닙니다. 경호원 하나 없이 다니신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돌아가신 회장님도 이 사실을 아시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실 겁니다.”
차 실장이 평소 그답지 않게 격분해 말했다.
“그럼 안 받으면 되겠네요. 그 서류, 사인하지 않으면 그만이잖아요.”
“어떻게…….”
차 실장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둥그렇게 뜨며 들고 있던 두툼한 서류 봉투를 쳐다봤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는 일주일 사이 법무팀에서 준비한, 급하게 사인받아야 할 서류들이었다.
“모든 재산과 권한을 나에게 위임한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장이겠죠. 내 사인이 없으면 공중분해 돼 버릴 한성그룹의 지분들 따위.”
“그걸 아시면서.”
“차 실장님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난 한성그룹의 오너가 되고 싶은 욕심 없습니다. 지금까진 할아버지 때문에 한성의 일에 신경을 썼지만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랬다. 박신우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가끔 박 회장의 투정 섞인 요청을 받아 주는 정도가 박신우가 반응하는 전부였다.
회사에 관심을 보인 것도 박 회장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신우야, 너도 이제 성인이 됐는데 지금부터 천천히 이 할애비 일을 배워 보는 건 어떻겠느냐?]
박 회장이 농담처럼 한 말에 회사 경영에 대해선 문외한이던 신우가 미친 듯이 경영학을 섭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박 회장이 없었다.
차 실장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낯빛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무슨 그런 농담을 다 하십니까, 대표님.”
“난 농담 따위 안 해요. 잘 아실 텐데요.”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넘기려 했으나 신우에게 이런 농담이 통할 리 없었다.
자신을 거둬 준 박 회장이 평생을 일군 한성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꼴은 살아 있는 동안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신우를 설득할 수 있을까 빠르게 머리를 굴려 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신우가 처음 건넨 제안이 떠올랐다.
“제가, 제가 대표님의 비서를 하겠다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던져 본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가 제안을 하자마자 신우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차 실장님이 도와주신다면야, 당연히 생각을 달리해야겠죠.”
느릿하게 수락하는 신우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저 같은 늙은이를 비서로 두셔서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스펙도 좋고 빠릿빠릿한데요.”
저도 모르게 감정이 실린 부루퉁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쓸데없이 머리만 굴리는 녀석을 옆에 두면 피곤하거든요. 그리고 내가 차 실장님을 꽤 좋아합니다.”
맙소사. 박신우가 원래 이렇게 사람을 유연하게 잘 다루는 사람이었던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율하는 걸로 잔뼈가 굵은 그를 이리저리 쥐어흔들 정도로?
차 실장은 한동안 묘한 시선으로 신우를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새 경호원은 이미 뽑았으니 그대로 채용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새 경호원 채용만큼은 필히 관철시키고 말겠다는 의지를 담아 강하게 어필했다.
신우의 경호까지 그가 책임져야 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뼈가 녹아내릴 근무 환경이 되고 말 테니 말이다.
“알아서 하십시오. 대신, 입이 무거운 녀석이어야 합니다.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는 것만 해도 귀찮은데 시끄럽기까지 하면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요.”
“입이 무거운 녀석입니다.”
“그거 마음에 드네요.”
다행히 생각보다 쉽게 허락이 떨어져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 실장은 새로 채용한 경호원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최종 면접을 본 녀석은 다른 이들에 비해 무술 실력이 월등했다. 서류상으로도 완벽했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계약서에 사인하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더니, 그 녀석이 먼저 이상한 제안을 해왔다.
“그런데 대표님, 새 경호원이 계약은 대표님과 개인적으로 하고 싶다고 합니다.”
“한성 공채 직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채용되길 원한다고요?”
“네.”
“별 미친놈 다 보겠네요. 저야 뭐 상관없습니다. 차 실장님 말씀대로 입만 무겁다면요. 서재로 가 계십시오. 옷만 갈아입고 곧 가겠습니다.”
“저는 서재로 가서 서류를 분류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참, 자산관리팀에서 박 회장님 개인 명의로 된 자산들 중 몇몇은 정리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하세요.”
박 회장의 자산에 정말로 관심이 없는지 신우가 덤덤하게 대답하고는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현와원의 정원엔 다시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홀로 남겨지고 보니 문득 현와원의 아름다움이 신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집 센 양반가의 심처처럼 이음과 맞춤의 기법이 멋들어지게 조화된 현대식 한옥.
지금의 현와원은 신우가 심하게 아팠던 어느 날 이후 박 회장의 특별 지시로 새롭게 지어진 집이었다.
다시 느껴 봐도 현와원의 웅장한 아름다움은 신우를 닮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이미 대표님에게 마음을 뺏기셨던 거야. 그게 아니면 처음 데려올 때부터든지.”
한참을 더 그렇게 서 있던 차 실장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서재로 향했다.
* * *
박 회장의 부고를 듣고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박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같았다.
고서를 사들이고, 잘 손질해서 파는 일상의 연속.
웬일로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오긴 했지만, 출장 기간이 좀 더 길어질 것 같다는 전혀 새롭지 않은 소식이 전부였다.
나른하고 한가한 이가서림의 하루가 또 그렇게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딸랑!
“등기 왔습니다.”
우체부 아저씨가 친절하게 편지 하나를 전해 주고 갔다.
발신인에 한성그룹이라 찍혀 있어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이익!
성의 없이 봉투를 찢어 그 안의 종이를 꺼내 펼쳤다.
“……!”
처음엔 등기가 잘못 온 줄 알았다. 그래서 봉투 겉면을 다시 펼쳐 수취인을 확인했는데 ‘이주희’, 분명 자신의 이름이 맞았다.
뭔지 모르게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재빨리 다시 종이를 좍 펼쳤다. 눈을 크게 떠 종이를 투시할 듯 쳐다보며 속으로 한 자, 한 자 읽었다.
임대차 계약 해지 통보!
귀하의 20xx년 어쩌고저쩌고부터 시작해 마지막엔 그래서 임대차 계약 해지를 통보합니다, 라는 문서였다.
이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타이틀로 커다랗게 박혀 있는 임대차 계약 해지 통보, 라는 말만 눈에 들어왔다.
“뭐예요? 도대체 무슨 내용인데 주인님 표정이 그렇게 오묘해요? 앗, 혹시 연애편지예요?”
도 실장이 퉁명스럽게 묻다가 갑자기 희희낙락하며 고개를 불쑥 내밀더니 서류를 채갔다.
“이거 뭐죠? 계약 해지 통보? 계약 해지? 해지? 이게 무슨……. 박 회장님이 2년 전에 여기 평생 계약해 주셨잖아요? 계약서! 그래, 엄연히 계약서가 있는데 어디서 이런 사이비 서류가 날아와요?”
도 실장이 기함할 듯 눈을 희번덕 뜨며 불을 뿜어댔다.
“계약서가 있긴 하죠. 사기 계약서 같은 계약서가. 쥐꼬리만 한 전세금에 평생이란 기간이 적혀 있는 계약서가요. 내가 계약한 계약자는 박 할아버지셨고, 여기 새로운 계약자 이름은 박신우네요.”
힘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한 주희의 시선이 다시 한번 새 계약자가 될 이름에 가 멈췄다.
박신우.
그 아래 법적 절차에 이의가 있으면 한성그룹 법무팀으로 연락하라는 메시지까지 따로 첨부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주인님, 뭐 하고 계세요? 어서 가서 따져야죠!”
“따져요? 나더러 지금 대한민국 최고 법무팀을 상대로 소송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라는 거냐, 대신 현실적인 말로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그럼 이대로 그냥 길바닥에 나앉아요? 난 이대로는 못 죽어요! 법무팀이 안 되면 이 박신우라는 후레자식을 찾아가서라도 따져야죠. 이놈, 박 회장님 손자 맞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제 할아버지가 직접 사인한 서류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구만. 49재도 아직 안 지냈는데 어떻게 이딴 걸 날려 보낼 수 있는 거냐고요. 이거 인간 맞아요?”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을 향해 원망의 따발총을 쏴대는 걸 보니 도 실장이 무서워도 아주 많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래요. 도 실장님 말대로 한번 만나 보기는 해야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길고 긴 한숨이 절로 흘렀다.
이가서림의 전세 가격으론 서울 어디를 가도 세를 구하지 못한다. 아니, 지방으로 이전을 해도 이 가격엔 불가능했다.
그 말은 곧, 이가서림의 종지부를 뜻했다.
그녀가 가진 무기라곤 고작 계약서에 기록된 ‘평생’이라는 말이 다였다.
하지만 이가서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녀의 일생일대 처음 싸움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어디 가세요?”
도 실장이 외투를 주섬주섬 입고 있기에 주희가 힐끗 시계를 보며 물었다.
“어디 가긴요! 당장 따지러 가야죠. 주인님은 뭐 하세요? 어서 옷 안 입고!”
얼굴에 결연한 기세가 그대로 드러나 안 그래도 부드럽지 않은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앉아요. 지금 가면 점심시간이라 아무도 못 만날 거예요.”
“아! 점심. 그렇지. 우리도 배 든든하게 채우고 가야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당장 나갈 것같이 굴던 도 실장이 외투를 다시 벗어 반듯하게 개어 두더니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갔다.
정신 사납게 하는 도 실장이 보이지 않으니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계약 해지 서류의 존재가 더 커다랗게 다가왔다.
한숨 쉰다고 될 일이 아니었지만 저절로 한숨이 났다.
* * *
“무슨 개똥 같은 소립니까? 그럼 이 서류를 귀신이 보내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세요? 여기 분명히 한성 법무팀에 연락하라고 써 있는데?”
한성 법무팀 응접실로 안내된 건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돌아온 해답은 도 실장의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주희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도 실장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녀도 냉정하게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지만 일이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꼬여가 도 실장을 다독일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법무팀이 발송한 서류를 다 찾아봐도 이런 서류는 없었습니다. 그 서한과 관련해 어떤 공문도 내려온 적이 없고요. 무엇보다 한성 자산 목록에 그 주소의 자산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습니다.”
“뭐요? 그럼 우리 이가서림이 있는 땅이 유령 땅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 자산은 아마 전 회장님의 개인 자산이셨을 확률이 높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자세한 건 차 비서님이나 회장님 개인 변호사님께 여쭤 보시는 게……. 아, 황 변호사님 해외 출장 중이세요. 다음 달 중순에나 귀국하실 예정이니 차 실장님을 찾으시는 게 빠를 것 같네요. 물론 차 실장님께서도 당분간은 신임 회장님 취임 문제 때문에 바쁘셔서 이런 일로 시간을 내실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요. 제 생각엔 다음 달쯤 다시 찾아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법무팀 직원이 시종일관 친절한 어투로 자신의 의견을 전해 주고 있었지만 도 실장에겐 그 모든 말들이 그저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키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그렇게 장황하게 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우린 당장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요! 지금 당장!”
“음, 뭔가 오해하셨나 보네요. 방금 전 그 말은 그런 방법도 있다는 제 개인적인 의견이었을 뿐입니다. 기다렸다 차 실장님을 만나 보시든, 아니면 더 기다렸다 내용증명을 받으시든, 결정은 그쪽에서 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저희 법무팀에서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버럭 고함을 지르며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도 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시종일관 사근사근하게 상담을 해주던 직원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왜 차 실장인지 변호산지를 만나야 하는데요? 우린 여기 적힌 대로 한성 법무팀 찾으래서 찾았을 뿐이니, 빨리 이게 무슨 소린지 확실히 하라고요! 당신이 해결 못 하겠거든 당장 여기 이 서류에 써 있는 계약자 놈을 데려와요! 이 박신우란 자식 불러오라고요!”
다혈질의 도 실장이 말을 빙빙 돌리는 직원의 말에 폭발한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헉!”
도 실장이 사납게 부른 이름 하나에 지금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한성 직원이 경악한 얼굴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모습에 도 실장의 기가 더 살아나기 시작했고, 막말 퍼레이드가 거침없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자식이 말이야, 제 할아버지가 생전에 해놓은 계약을 49재 향도 꺼지기 전에 뒤엎어? 박신우 이 개자식 불러와!”
이가서림을 나서기 전, 무슨 일이 있어도 흥분하지 말 것을 그렇게 경고했건만, 찰떡같이 알았다며 걱정하지 말라던 도 실장의 약속은 아무래도 도깨비감투가 감춰 버린 모양이다.
“도 실장님, 그만하세요.”
주희가 한숨을 푹 쉬며 도 실장을 말릴 때였다.
덜컥, 뒤쪽에 있는 문이 열리며 제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네 명이나 들이닥쳤다.
“부르셨습니까?”
“이 사람들 내보내세요. 어서요!”
“가시지요.”
직원의 냉정한 명령에 운동으로 단련된 건장한 사내들이 성큼 다가와 도 실장과 주희의 양팔을 붙잡았다.
“뭐? 이거 뭐야? 뭐 하자는 거야! 안 놔?”
머리 하나는 더 큰 보안 요원들에게 붙잡혀 있으면서도 도 실장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눈을 부라렸고, 주희는 이런 험악한 꼴을 겪게 된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 눈을 질끈 감았다.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지금 해보겠다는 거야? 너희들,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지? 아냐? 좋아, 이대론 못 가지. 이씨, 이거 놔! 난 박신우 그 개자식 만나기 전엔 절대 못 가니까! 어디 너희 마음대로 해봐.”
보안요원의 팔을 순간적으로 확 떨쳐낸 도 실장이 보란 듯이 보안요원들 앞에서 벌러덩 바닥에 드러누우며 어깃장을 놓았다.
당황한 건 도 실장을 붙잡고 있던 두 보안요원들이었다.
“어서 데려가라니까요! 곧 높으신 분들 오실 텐데 이 난장판을 보시게 할 생각이에요? 다 같이 잘리고 싶으냐고요?”
“가시죠!”
법무팀 직원의 싸늘한 말에 보안요원들이 표정을 굳히며 당장 도 실장을 일으켜 세웠고, 거의 연행하다시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녀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끌려 나갔다.
“놔! 놓으라고! 야, 이거 안 놔?”
“사람 말을 저렇게 못 알아들어서야, 원. 쯔쯧!”
보안요원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온몸으로 버둥거리며 절규하는 도 실장 덕분에 그녀도 덩달아 꼴사납게 달랑 들어 올려진 채 로비까지 연행됐다.
로비엔 근무 시간일 텐데도 이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제공하고 있는 그들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주희는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야 뭔가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앗! 가방. 잠깐, 잠깐만요! 가방 두고 왔어요! 가방.”
그녀가 놀란 눈을 들어 다급하게 가방을 찾을 때였다.
“가방, 가져가요!”
저 멀리 법무팀 직원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가방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아왔다.
“안 돼!”
순간 주희의 얼굴이 하얗게 얼어붙으며 핏기가 가셨다.
“놔! 이거 놔! 가방! 가방에 식충이가……!”
도 실장도 가방을 봤는지 놀라 더 크게 온몸으로 버둥거리며 가방을 외쳐댔다.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다행히 주희의 왼쪽에서 팔을 붙잡고 있던 보안요원이 다른 팔을 뻗어 휙 낚아챘다.
그때였다.
주희와 도 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딱 그 순간, 살짝 벌어진 가방 틈 사이로 푸른빛이 실선처럼 쏘아져 나왔다.
“헉!”
“우왁! 뭐, 뭐지?”
가방을 들고 있던 보안요원이 기겁하며 헛바람을 들이켰고, 도 실장을 붙잡고 있던 두 보안요원들이 놀라 소리쳤다.
“도마뱀이다!”
“잡아!”
누군가가 이리저리 날뛰는 석의 정체를 알아챘고, 로비 경호를 담당하고 있던 보안요원들까지 총동원돼 도마뱀 포획에 나서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
석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아 다행이기는 했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결코 웃지 못할 장면이었다.
주희와 도 실장은 여전히 보안요원들에게 붙잡힌 채 멀찍이 떨어져서 그 난장판을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다.
“석아.”
한숨 쉬며 석을 불렀지만, 마구 달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석도 많이 놀랐는지 그녀 쪽을 한 번 돌아보지도 못했다.
“빨리 잡아! 그분 벌써 도착하셨다고.”
누군가 소리친 한마디에 도마뱀 포획에 뛰어들었던 일반 직원들이 바싹 긴장한 표정으로 한곳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보안요원들만이 더욱 필사적으로 석을 쫓기 시작했다.
“뭐 해요? 그 사람들 어서 후문으로 내보내지 않고.”
그때까지 이 황당한 해프닝을 지켜보고 있던 법무팀 직원이 멍청히 서 있는 보안요원들을 다급하게 재촉했다.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간 중앙 출입문 쪽에서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이란 인사말이 들리고서야 멍청하게 서서 같이 해프닝을 구경 중이던 보안요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주희와 도 실장을 후문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야! 이거 놔! 우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단 말이야! 박 회장님이 직접 계약서에 사인한 걸 너희가 무슨 이유로 해지하려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 이거 놔! 놓으라고!”
도 실장은 끌려 나가면서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고, 처절한 절규 소리가 길게 꼬리를 물며 로비에 메아리쳤다.
그 탓에 입도 벙긋하지 않은 주희마저 꼴사납게 끌려 나갔다.
하지만 덩치 큰 보안요원들의 손길을 피해 죽어라 도망치고 있는 석이 걱정돼 고개를 빼느라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석아!”
다시 한번 크게 석을 불러 봤지만 석은 여전히 도망치기 바빠 듣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돌아본 건 석이 돌진하고 있는 상대였다.
오후 햇살을 받아서인지 빛을 머리에 인 듯 반짝이는 새까만 머리카락,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선명하게 음영을 드리우는 조각 같은 이목구비.
천계와 인간계를 통틀어 그녀가 본 중 가장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였다.
그 탓에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시선이 붙들리고 말았다.
그런데 문득 남자의 감정 없는 시선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익숙하게 느껴졌다.
분명 처음 보는 남자가 맞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묘한 느낌이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그녀가 보안요원에 의해 끌려 나간 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기에.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한성 본사 중앙 출입문으로 세 남자가 들어서자 양옆으로 긴장한 채 좍 늘어서 있던 직원들이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공식 취임식도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회장님이라 부르며 마치 조폭 두목을 영접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임직원들의 모습에 신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췄다.
순간 그 넓은 중앙 로비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어서 잡아.”
카아악!
그 탓에 높은 분들이 보시기 전에 도마뱀 포획을 하기 위해 필사적이던 보안요원의 목소리가 아주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생생하게 로비에 울려 퍼졌다.
게다가 신경질 난 도마뱀이 포효하는 소리까지.
허리를 접어 인사를 하고 있던 직원들은 고개를 들지 않고도 무슨 사태인지 짐작이 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사람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이리저리 도망치기 바빴던 석은 마침내 마음에 드는 기를 발산하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펄쩍 뛰어올라 그를 향해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휘이익!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자 순간적으로 반응을 보인 건 신우가 아니라 신우의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신입 경호원 마응산과 차 실장이었다.
팟!
응산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신우를 향해 날아든 것을 한 손으로 거칠게 잡아챘다.
그 모습에 조심스레 허리를 펴고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오롯이 응산에게 향했다.
카아아악!
달려들던 것이 무엇이든, 아부 직원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든, 신우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멀리서 들린 소리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의 의식을 잡아당기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신우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중앙 출입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여인이 한성 보안요원에게 끌려 나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먼 거리를 격하고도 여인의 걱정 가득한 눈빛이 한눈에 읽혔다.
묘한 일이었다.
여인뿐 아니라 인간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였는데, 보안요원에 의해 여인이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눈맞춤일 뿐인데 이상하게 뇌리에 박히는 여인이었다.
카아아악!
여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응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포악한 외침을 토해내고 있는 도마뱀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버리고 오겠습니다.”
눈살을 찌푸린 채 도마뱀을 쳐다보며 말하는 응산을 향해 신우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봐.”
응산은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도마뱀과 신우를 번갈아 쳐다봤고, 이내 조심스레 신우에게 도마뱀을 건넸다.
도마뱀은 응산의 손에서 풀려나자마자 신우의 팔을 휘익 타고 올랐다.
순식간에 신우의 어깨에 안착한 녀석이 꼬리를 바짝 치켜세우고 응산을 향해 카악, 잔뜩 화가 난 포효 소릴 질러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지만 신우는 놀라기는커녕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스윽, 도마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 이름이 석인가?”
여인이 마지막에 애타게 부르던 이름을 떠올린 신우가 물었다.
녀석은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발딱 치켜들고 그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인이 사라진 방향이었다.
“가거라.”
짧은 허락이 담긴 신우의 부드러운 말에 석이 마치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그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아주 잠시 뒤돌아 신우를 쳐다보더니 곧장 여인의 체취를 뒤쫓아 사라졌다.
사사삭, 초현대식 건물의 번쩍이는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푸른 도마뱀이라니, 마치 합성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푸른빛 화살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도마뱀의 모습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차 실장님.”
도마뱀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마르고 건조한 목소리가 조용해진 로비를 울리자 임직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대표님.”
“우리 한성 임직원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시간이 남아돌았습니까?”
“죄송합니다. 마중할 필요 없다고 미리 전달하는 걸 잊었습니다.”
차 실장이 다른 변명 없이 곧바로 잘못을 시인하며 사과했다.
임직원들은 한 달여간의 시끄러웠던 자리다툼에 종지부를 찍은 신우를 기대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맞이하려 내려왔을 것이다.
신우가 이런 아부성 행동을 유난히 싫어한다는 걸 미리 공지했어야 하는데, 한꺼번에 많은 일들이 밀려 깜빡 잊고 말았다.
“앞으론, 이런 겉치레로 시간 낭비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우가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는데 임직원들은 제 풀에 바짝 얼어붙고 있었다.
“각 부서에 잘 전달해 두겠습니다. 그만 올라가시지요. 손님이 오실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자신의 실수라 생각한 차 실장이 긴장한 임직원들을 위해 손목시계를 보며 자연스럽게 신우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임직원들을 뒤로하고 세 일행은 엘리베이터 앞에 가 섰다.
띵!
“방금 전 해프닝, 무슨 일인지 알아보세요.”
막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신우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차 실장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순간 신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몰라 의아해했다.
“방금 전 도마뱀 주인이 끌려 나가던데, 왜 끌려 나갔는지 이유를 알아보시라고요.”
차 실장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신우의 말이 더해지고야 방금 전 로비에 도마뱀뿐만 아니라 그 주인도 함께 있었음을 깨달았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임직원들이 나열해 있는 바람에 당황해서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탓이었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 시야가 좁아진다는 생각을 하며 뒤를 힐끗 돌아보자 아까 해프닝의 조연들이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