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이가서림(李家書林).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나무판자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써진 서체가 서점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한 곳이었다.
살짝만 밀어도 삐걱대는 소리를 낼 것 같은 낡은 문이 어딘지 신비롭게 느껴지는 곳.
왠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추켜올리며 금방이라도 ‘어서 오십시오’ 손님맞이를 할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정작 이가서림의 내부는 여느 고서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출입문과 반대편에 있는 안채로 통하는 문만 제외하고는 모든 벽이 빼곡히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사다리를 이용해야 겨우 손이 닿을 것 같은 위치에도 빈틈없이 책들뿐인 고서점.
실망스럽게도 상상 속의 신비로워 보이는 돋보기 할아버지조차 없었다.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키 작은 아저씨 한 명이 떡하니 중앙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똑같은 손동작을 빠르게 반복하며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는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사사삭 사삭 사사삭 사삭!
이가서림의 전반적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도 실장이 온 신경을 집중해 사포로 손때 묻은 책의 가장자리를 갈아 대고 있었다.
사사삭, 똑같은 손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후우우우!”
마지막으로 길게 입김을 불어 갉아낸 찌꺼기를 날리자 새 책처럼 반질거리며 드러나는 하얀 속살.
도 실장은 저도 모르게 깊은 희열에 들떠 두툼한 입술을 죽 찢었다.
“윽, 콜록콜록!”
하지만 희열도 잠시, 콜록대는 기침 소리가 도 실장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앗, 주인님! 괘, 괜찮으십니까?”
맞은편 탁자에 주인님이 앉아 있다는 걸 깜빡 잊고 감히 찌꺼기를 날린 죄로 도 실장은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주희. 25세.
2년 전까지 이가서림의 주인이자 도 실장의 주인이었던 이 노인의 친손녀다.
이 노인이 죽은 현재, 역마살이 껴 땅을 파고 돌아다니는 그의 아들을 대신해 이가서림의 주인이 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현재 도 실장의 신분으로 살고 있으나 사실은 도깨비였다.
이 노인이 죽음으로써 인간과의 계약이 자연 소멸될 위기에 처했었다가 정말 다행히도 그의 손녀인 주희가 계약을 해주어서 다시 인간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도깨비가 인간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건 아주 특별한 운이었다.
인간과 계약을 맺지 못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 같은 존재가 돼 버리니까.
주희는 그가 도깨비란 사실을 알고도 계약을 해준 아주 특이한 주인이었다.
“에취! 사람이 없는 쪽으로 부시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요.”
연신 재채기를 하던 주희가 그 특별한 눈으로 그를 좌악 흘겨봤다.
“죄송합니다. 너무 집중해서 일하다 그만, 주인님이 앞에 계시다는 걸 깜빡했어요.”
무뚝뚝하게 생긴 생김과 달리 소심하기 짝이 없는 도 실장은 주희의 눈 흘김 한 번에도 언제나 이렇게 간이 졸아들기 일쑤였다.
“도 실장님, 건망증이 점점 심해지시는 거 같네요. 어제도 따로 챙겨 놨어야 할 책을 다른 손님에게 넘겨 버리시더니.”
결코 그를 탓하는 말투가 아니었지만 빤히 쳐다보는 시선 때문인지 어쩐지 앉은자리가 점점 가시방석이 되어갔다.
‘설마 그걸 눈치챈 건가?’
주희가 눈을 흘길 때마다 한 가지 일이 마음에 걸려 도 실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지만 주희가 직접 따져 묻기 전엔 결코 먼저 나서서 고해바칠 생각이 없었다.
어렵게 성사된 인간과의 계약이 어쩌면 파기당할지도 모르는 큰일이었으니까.
생존 본능을 최대치로 가동시켜 주희의 반응을 꼼꼼히 살폈지만 어떻게 봐도 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후우, 저절로 안도의 심호흡이 흘러나왔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또 할 말은 확실하게 하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약 딱지는,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정말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정말 없었어요.”
어제도 한 말을 재차 반복하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딱지가 도깨비감투에 씌기라도 한 모양이네요. 어제 아침까지 붙어 있던 게 저절로 사라졌다니 말이에요.”
“전 거짓말을 못 한다니까요. 희귀본인 줄 모르고 그 비싼 책을 헐값에 판 건 사실이지만 팔기 전에 분명히 확인을 했……었는데 딱지는 없었어요.”
주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한 말에 발끈해 받아치던 도 실장이 제 무덤을 파고 말았다.
희귀본이라 비싼 책을 헐값에.
마지막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 갔다.
지레 겁에 질린 도 실장의 커다란 눈이 뒤룩뒤룩 구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도깨비다.
비록 잡신이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재화를 가져다주는 능력을 지녔기에 꽤나 사랑받는 존재.
하지만 그에겐 그 재신의 능력이 없었다. 도깨비라면 응당 지녀야 할 금을 다루는 능력이.
그 때문인지 할아버지 때부터 이곳 이가서림은 항상 한가로웠고, 한 번도 집안 형편이 괜찮아진 적이 없었다.
주희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당장 이가서림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보태기는커녕 축내는 짓을 하다니, 도깨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주인님. 그게 그렇게 비싼 건 줄 정말 몰랐어요. 다음엔 더 잘 알아보고 팔게요. 딱지 확인도 더 확실히 하고요.”
마지못해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지만 딱지 일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안면 근육이 뻣뻣해졌다.
“도 실장님, 지금 표정과 말이 너무 따로 놀아요.”
헉! 도깨비의 천성이 거짓말을 못 하는 체질이란 걸 잊었다.
그 탓에 주희의 눈매가 더 가늘어졌고, 그는 뱀 앞의 개구리 같은 심정이 되어 숨을 허덕거려야 했다.
“그만하죠.”
사색이 된 도 실장을 빤히 쳐다보던 주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
“방금 손질한 책이나 잘 포장해 두세요. 장 교수님이 특별히 부탁하신 책이니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요.”
“물론입니다. 이런 건 제 전공인걸요. 깔끔하게 잘 포장해 놓겠습니다. 헤헤!”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도 실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헤벌쭉 웃으며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석이가 안 보이네요?”
주희가 서점 안을 두리번거리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나 책방 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석이 책장 구석구석까지 훑었는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석인 아까 오후에 준이가 만화책 사러 왔다가 데려갔어요.”
도 실장이 손질해 놓은 책을 한 권, 한 권 포개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준이가요?”
주희의 되물음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아 보였는지 각까지 잡아가며 책 정리를 하던 도 실장이 고개를 들었다.
“전부터 준이가 석일 예뻐했었잖아요. 가게 문 닫기 전에는 데려다준댔어요.”
“석이가…… 곱게 따라갔어요?”
“안 따라가면 어째요? 준이가 작정하고 유리 상자까지 챙겨 왔는데. 도마뱀 주제에 준이의 집요함을 어떻게 피하겠어요?”
도 실장이 아주 고소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좀 말리시지 그랬어요?”
“어떻게 그래요? 준인 몇 안 되는 이가서림의 단골손님인데. 단골손님과 식충이 도마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느 쪽에 무게를 둬야 할지는 뻔한 거 아니겠어요? 흥, 석이 저도 양심이 있으면 밥값은 해야죠.”
도 실장이 석을 거침없이 식충이 도마뱀이라 칭하며 준의 편을 들었다.
“아직 몸도 다 회복하지 못했는데…….”
“회복이 안 됐다니요? 석이가 얼마나 먹어대는지, 주인님이 모르시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회복이 안 된 거면, 회복되고 나면 우린 석이 먹이 대다가 집안 거덜 날 거라고요.”
사사건건 앙숙인 둘을 중재해 볼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질색하는 도 실장의 말에 주희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석을 데려온 건 그녀였다.
석은 어느 비 오는 날 이가서림의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애처롭게 쓰러져 있는 모습이 왠지 아주 오래전 어느 날의 한 남자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 아이를 살린 대가로, 그녀는 천계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으로 사는 고된 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이든 미물이든 다시는 절대 수명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아파하고 있는 석을 보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석은 그녀가 천계에서 돌봐 주던 몽이를 무척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더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만큼 석과 도 실장의 사이는 나빠져 갔다.
“하여튼 이게 다 주인님 탓이에요. 뭐하러 그런 놈을 주워 오셔서는…….”
“그 말은, 다시 꺼내지 않기로 했던 거 같은데요.”
또 시작된 도 실장의 투덜거림에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 같아 주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 덕분인지 도 실장의 투덜거림이 뚝 멎었다.
“채, 책 포장하게 상자 가져와야겠네요.”
어색한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으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는 도 실장을 보며 주희가 작게 후회의 한숨을 쉬었다.
결코 도 실장을 탓하려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과의 말을 하려는데 출입문 위의 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도 실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활짝 펴며 재빨리 손님을 맞으려 달려 나갔다.
그런데 사람이 모습을 보이기도 전에 문 안으로 먼저 밀려들어 온 건 유리 상자였다.
카아악!
“히익!”
유리 상자 안에서 나는 도마뱀의 성난 소리와 놀라 질겁하는 도 실장의 이상한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안녕하세요, 도 실장님. 석이 제가 데려왔어요.”
“아니, 김 순경님이 왜 석이를.”
도 실장이 경찰 복장을 한 김 순경을 슬쩍 흘겨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준이 어머님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셨대요. 마침 순찰 중이어서 만났는데 석이 데려다주고 가면 늦을 것 같다고 난감해하시기에 제가 대신 데려왔어요.”
“그랬군요.”
도 실장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김 순경은 석이 유리 상자 벽을 꼬리로 탁탁 치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며 활짝 웃었다.
“하하, 석이 정말 귀엽지 않아요? 준이가 왜 그렇게 석일 가지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귀엽긴 어디가요? 도마뱀 중에서도 유난히 더 못생겼고만. 얼마나 못생겼는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무슨 종인지 알 수가 없어요.”
방금 전 주희에게 한 소리 들은 이유도 잊었는지 도 실장이 또다시 두툼한 입술을 비죽거리며 석의 외모를 한껏 비꼬았다.
“그래요? 예쁜데.”
“전혀 안 예뻐요. 석일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준이랑 김 순경님뿐이에요. 그건 그렇고, 신참이 근무 중에 이렇게 업무 외의 일을 해도 돼요?”
“시민의 불편을 도와주는 것도 경찰의 업무잖아요. 밖에 동료도 같이 왔어요. 잘 지냈어요, 주희 씨?”
책방에 들어와 도 실장과 내내 말을 섞으면서도 힐끔힐끔 주희를 쳐다보던 김 순경이 한참 만에야 주희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것도 두 볼까지 붉혀가면서.
“네. 어서 오세요, 김 순경님. 석이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여기요.”
도 실장이 유리 상자를 받을 생각을 안 하기도 했지만, 김 순경은 도 실장 대신 훨씬 멀리 떨어진 주희에게로 다가가 유리 상자를 다소곳이 건넸다.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던 도 실장이 이번엔 팔짱까지 척 끼며 주인님과 김 순경을 번갈아 쳐다봤다.
“김 순경님, 우리 주인님 좋아하세요? 가만 생각해 보니 순경이 되기 전에도 수시로 커피 사다 나르고, 필요 없는 책도 자주 사가고 했던 거 같은데?”
“네에에에? 아, 아니. 그,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같은 동네에 살고, 비슷한 또래고, 책도 좋아하다 보니까…….”
“흐음.”
완전 삶아 놓은 토마토같이 벌게진 얼굴로 버벅대고 있는 김 순경을 바라보는 도 실장의 의미심장한 눈길이 더 깊어졌다.
그 탓에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김 순경의 눈이 책방 여기저기를 한참 동안 헤맸다.
경찰공무원 시험 책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던 김 순경이 뭔가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도 실장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제가 경찰이 되기 전에 여길 자주 다녔다는 거. 도 실장님, 저 경찰 되기 전엔 여기 안 계셨었잖아요. 제가 알기론 여기 근무하신 지 한 2년쯤 되신 거 같은데. 분명 저 경찰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처음 뵀지 않아요?”
김 순경이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데, 도 실장은 김 순경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주희 때문에 기겁을 해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예쁜 눈을 좌악 찢으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칠 것 같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 그야 당연히 인수인계받으면서 들었죠. 기, 김 순경님 여기 단골이시라고. 그리고 커피 얘기도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너무 오래 한곳에서 근무를 하면 동네 사람들이 이상해할 것 같아 5년 주기로 모습을 바꿔 왔다.
그런데 도 실장의 모습으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얘기하다 이런 사달을 불렀지 뭔가.
“아, 그러셨구나.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요. 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 도 실장님, 그전에 계시던 신 실장님이랑 이미지가 많이 닮으셨어요.”
김 순경이 순진해 빠진 녀석이라 다행이지, 집요한 녀석을 만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뭔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주희는 그냥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흑!
“그, 그래요? 뭐, 책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미지가 다 거기서 거기죠.”
“나이 대도 다르고 키도 다른데 묘하게 이미지가 닮았어요. 그래서 도 실장님이 처음부터 친근하게 느껴졌던 건가?”
김 순경이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치이익! 칙!
-에이스 아파트 109동 앞, 물건 투척 신고 들어왔습니다. 출동 바랍니다.
“아,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무전기에서 출동 소리가 나자 김 순경이 화들짝 놀라며 주희에게 급히 인사를 했다.
“사건인가 보네요.”
“네, 아직 인명 피해까지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이 아파트에서만 자꾸 이런 신고가 들어오네요. 그럼 전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일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네요.”
다급한 와중에도 주희의 다정한 인사말이 듣기 좋았는지 김 순경의 두 볼이 또 살짝 붉어졌다.
“다음에 또 올게요.”
김 순경이 확실히 나간 것을 확인한 도 실장이 그제야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생긴 건 맹하게 생겨가지고 가끔씩 허를 찌른단 말이야.”
혼잣말로 위안하는 것도 잠시, 뒤에서 다시 무시무시한 오라가 느껴졌다.
“도 실장니이임!”
역시 그냥 넘어가실 분이 아니었다.
“흑,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주인님. 앞으론 정말 입조심하겠습니다. 뭐든 시키시는 건 다 할 테니,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제발요.”
도 실장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파리처럼 싹싹 비비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기부터 했다.
“알겠어요. 도 실장님 말대로 한 번만 더 지켜볼게요. 대신 앞으론 석이랑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그 말에 도 실장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지만 감히 항명을 할 수는 없었다.
주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리 상자가 열렸고, 석이 날듯이 상자를 뛰쳐나와 도 실장의 머리 위로 휙 뛰어올랐다. 그리곤 꼬리로 넋이 나간 도 실장의 볼을 찰싹찰싹 쳐댔다.
무슨 이런 도깨비 수난사가 다 있을까.
주희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 도 실장이 석의 얄미운 꼬리를 잡아채 집어 들었다.
도마뱀 주제에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더 싫은 녀석이었다.
왠지 점점 속이 배배 꼬여 간다.
“그런데 김 순경 말이에요, 정말로 주인님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였다. 도깨비 주제도 잊고 감히 또 주인님이 싫어할 말을 골라 하고 만 건.
하지만 주희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김 순경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이게 무슨 소린가. 그럼 정말로 김 순경이 주인님을 좋아하고, 주인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
“네에에? 아니, 그럼 왜 이러고 계세요? 얼른 김 순경이랑 결혼해서 알나리깔나리 둥가둥가 예쁜 아기 낳으셔야죠. 그래야 제가 새로운 주인님을……. 히익! 딸꾹!”
도깨비의 작은 뇌 속에 돌연 주인님의 작고 귀엽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부푼 꿈을 풀어냈다.
그런데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얼음 화살을 날리는 것 같은 주희의 싸늘한 시선에 놀라 딸꾹질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도 실장님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나더러 아무나 붙들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뜻인가요?”
하지만 주변 온도가 훅 떨어진 것 같은 서늘한 기세와 달리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묻고 있어 주희가 진심으로 화냈을 때 어땠는지를 잊고 말았다.
눈치 없는 도깨비의 생명을 건 입 털기는 계속됐다.
“아무나라니요? 김 순경처럼 노골적으로 혼이 맑고 순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요.”
붙잡고 있던 석이 기겁하듯 몸부림쳐 도망치고 나서야 주희의 몸에서 스멀거리며 뻗어 나오는 분노의 오라를 느낄 수 있었다.
헉! 맙소사!
거무죽죽하던 도 실장의 얼굴빛이 허옇게 질려갔다.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니 김 순경님한테 가시면 되겠네요. 지금 이 시간부로 이주희와의 도깨비 계약, 해집니다. 계약서 가져와요.”
싸늘하게 뱉어진 축객령에 겁 많은 도깨비 도 실장의 혼이 달아났다.
인간과 계약 맺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계약 해지라니.
끄아아악!
“주인님! 주인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도 실장이 번개처럼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주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놓으세요. 난 도 실장님의 만만한 다른 주인님을 낳아 줄 생각은커녕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김 순경님한테로 가시라고요.”
미쳤지, 내가 미쳤지.
주희의 입을 통해 듣고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
새 주인이라니. 주희더러 어서 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 소릴 한 터였다.
“흑흑흑, 주인님. 제발 한 번만 더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결혼 얘기 꺼내지 않겠습니다. 전 주인님 죽을 때 같이 죽을게요. 제발요. 흑흑흑.”
“그 말이 더 무섭네요. 죽어서도 도깨비 가신을 건사해야 하다니. 얼른 계약서나 가져오세요.”
“주인니이이임! 흑흑흑!”
도 실장의 애절한 절규가 고서점 안 공기를 온통 징징거리는 소리로 흔들리게 했다.
그때였다.
딸랑딸랑!
출입문 위의 종이 다시 울음소리를 냈다.
누가 보면 딱 오해할 만한 포즈를 유지하고 있는 주희와 도 실장의 눈동자가 동시에 출입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짙게 찾아든 어둠을 뚫고 한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누구보다 슈트를 멋지게 소화해내고 있는 노신사, 이가서림의 큰손님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박 회장님!”
위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도 실장이 날듯이 달려가 넙죽 허리를 접으며 손님을 맞았다.
“쯧쯧. 도 실장, 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우리 보살 같은 주희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 있누.”
한두 번 보는 장면이 아니었던 듯 노신사가 혀를 차며 한심한 표정으로 도 실장을 쳐다봤다.
“아니 뭐, 헤헤헤. 제가 말실수를 좀……. 그나저나 무척 오랜만에 오셨습니다요. 저번에 회장님께서 찾으셨던 책 들어온 지 한참 됐는데. 바로 챙겨 오겠습니다.”
이때다 싶은 도 실장이 단골손님에게 차 한 잔 권하지 않고 잽싸게 일 핑계를 대고 도망을 쳤다.
“허참, 저이는 볼 때마다 사람을 정신없게 하는군. 그나저나 여긴 왜 이렇게 한가하지? 이래 가지고 밥 먹고 살겠어?”
도 실장이 안쪽 문으로 사라지고야 노신사가 인자한 얼굴에 가는 주름을 잡으며 인사말을 대신했다.
“오셨어요?”
걱정이 담긴 인사말이었지만 주희는 가만히 웃으며 노신사를 맞았다.
그런데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져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시선이 자연스레 박 회장 뒤쪽의 문밖으로 향했다.
깜깜한 어둠 속, 온통 검은색 일색인 누군가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옷과 대조적으로 유난히 하얀 얼굴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
주희의 시선이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설마!’
놀라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안 검은 옷의 사내가 그녀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이번이 두 번째.
검은 옷의 남자는 차사였다.
2년 전, 자신의 할아버지를 데리러 왔을 때도 눈이 마주친 적 있는 그때 그 차사.
죽음이 있는 곳에, 혹은 죽음이 임박한 이의 곁에 나타나는 영혼의 인도자였다.
‘박 할아버지…….’
밖의 존재가 놀라든 말든 그녀는 차사와 박 회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인간들은 심판의 날이 지난 후엔 또 다른 생으로 돌아오기도 한다는 걸 알았지만 할아버지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가슴이 아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환생한 박 회장은 그녀가 아는 박 할아버지가 아닐 테니까.
“쯧쯧, 넌 여전하구나. 젊은 녀석의 눈빛이 그래서야 원.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만날 그렇게 걱정을 했지.”
박 회장이 책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지정석인 손님용 소파에 털썩 앉으며 그녀를 타박했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평생지기인 박 회장이니 할 수 있는 소리였다.
“걱정 마세요. 전 언제나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인간의 수명에 관여한 죄를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 인간의 죽음에 초연하지 못했다.
“녀석, 꼭 이 케케묵은 책방에 젊음을 파묻어야겠어?”
“전, 여기가 좋아요.”
“이런 갇힌 공간이 뭐가 좋다고. 쯧쯧. 젊은 피가 아깝다, 녀석아.”
“그래서 좋은걸요. 여긴 왠지 묘하게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곳이거든요. 그런데 또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벌써 한참의 시간이 지나와 있고요. 전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게 좋아요.”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박 회장과의 마지막 대화에 정성을 다해 대답해 주는 것, 그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허참, 인생 다 산 늙은이같이 말하긴. 강제로라도 철거해 버릴까 보다.”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대는 박 회장이었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엔 여전히 다정함이 묻어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 자주 이가서림에 발길하는 박 회장.
어린 여자아이 혼자서 이런 고서점을 어떻게 운영할지 걱정이셨던 모양이지만 박 회장의 걱정과 달리 그녀는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강제로 철거해 버리신다면 저야 뭐 꼼짝없이 쫓겨나야겠지만 그럼 저 할아버지네 회사 찾아가서 막 농성하고 그럴지도 몰라요.”
철거해 버린다는 박 회장의 말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란 걸 알기에 그녀 역시 꽤나 진지하게 대답했다.
2년 전, 박 회장은 주희에게 한성그룹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었다.
지금 다시 이 말을 꺼내는 걸 보며, 박 회장이 은연중에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감지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에 걸렸던 일을 한 번씩 돌아보며 정리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정말 철거해 버릴까? 널 여기서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은데.”
박 회장의 말처럼 여기 이가서림과 꽤 넓은 그녀의 집은 처음부터 박 회장의 소유였다.
2년 전까진 그녀 할아버지의 건물주였고, 지금은 그녀의 건물주였다.
전세 계약서엔 농담처럼 평생이란 말이 떡하니 기재돼 있지만 박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이런 건물쯤이야 변호인단을 동원해서 언제든 허물어 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좀 더 신중하게 대답했다.
“전 할 수 있는 한 오래 이 이가서림을 지키고 싶어요. 2년 전에 저랑 평생 계약하신 거, 잊지 않으셨죠? 그 계약 무시하고 철거하시면, 박 할아버진 아마 제 원망을 무지 많이 들으셔야 할 거예요.”
“허어, 듣던 중 제일 무서운 말을 하는구나. 난 주희 너한테만은 항상 좋은 할아버지로 남고 싶은데 말이지.”
그녀의 눈빛에서 진심으로 이가서림을 원하는 걸 읽어냈는지 박 회장은 그제야 완전히 항복했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할아버진, 좋은 분이세요.”
“허허,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왠지 앞으로도 절대 나쁜 일을 해선 안 될 것 같구나.”
능청스럽게 말하는 박 회장의 말에 주희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시간, 괜찮으세요? 차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차? 커피가 아니고?”
이가서림에 들르면 언제나 커피를 주문하곤 했던 박 회장이었기에 그녀의 제안이 엉뚱하게 느껴졌는지 되물으셨다.
“네, 오늘은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마침 좋은 차가 있거든요.”
“허허, 넌 아무리 봐도 요즘 아이들과는 다른 것 같아. 차라니? 먹성마저 너무 구식이잖느냐. 허허. 그래도 네가 이토록 권하는데 안 마실 순 없지. 어디 한번 참고 마셔 보자꾸나.”
박 회장의 허락에 주희는 저도 모르게 또 힐끔 문밖을 쳐다봤다.
그런데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차사가 보이지 않았다.
“응? 밖에 누가 있는 거냐? 아까부터 계속 밖을 신경 쓰던데.”
그녀의 시선이 한참 밖을 헤맸는지 박 회장이 덩달아 고개를 길게 뽑으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문밖을 쳐다봤다.
“아, 아무도 없어요. 그냥 밖에 누가 있는 거 같아서 그랬어요.”
박 회장이 차사를 볼 수 있을 리 없는데도 주희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래? 차 비서가 나와 있나? 전화 업무가 바쁜 것 같아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었나 봐요.”
“누가 있다고요?”
상자를 든 채 안쪽 문을 열고 책방으로 들어오던 도 실장이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출입문 밖을 빤히 쳐다보며 끼어들었다.
“없다니까요. 그보단 주방에 가서 선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차 좀 내오세요.”
눈치 없는 도 실장이 차사를 보기라도 할까 봐 주희는 얼른 차 심부름을 시켰다.
“네? 선반 꼭대기 차를요? 손바닥만 한 한지함에 든 그 차요?”
“그래요.”
“에엑! 그건 실수로라도 손대지 말라고 하셨던 차잖아요?”
도 실장이 괴상한 소리까지 내며 재차 되물었다.
정말 피곤하게 하는 도깨비다.
“도 실장님, 차는 제가 준비하면 되니 도 실장님은 그만 퇴근하세요.”
주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안 도와줄 거면 사라지라는 뜻으로 퇴근이란 말을 강조했다.
“퇴근이라니요, 괜찮습니다. 차는, 당연히 직원인 제가 내와야죠. 찻물까지 최적의 온도에 맞춰 준비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도 실장이 정색을 하며 상자를 내려두고 도망치듯 책방 한쪽에 마련된 작은 탕비실 겸 주방으로 달려갔다.
“주인이 퇴근해도 좋다는데 싫다니, 저놈도 참 희한한 놈이군. 전에 있던 놈도 그렇고, 그 전에 있던 놈도 그러더니. 이 집에 무슨 퇴근 못 하게 하는 귀신이라도 씌었나? 어찌 들오는 직원들마다 다 저런 놈이지.”
별 이상한 놈 다 본다는 투의 박 회장 말을 들으며 주희는 도 실장에게 좀 더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다졌다.
“그러게요. 집터가 좀 남다른 거 같긴 하네요.”
눈치 없는 도깨비에, 인간으로 전락한 천계신.
이 조합만으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곳이긴 했다.
“그런데 저 도마뱀은 또 뭐냐? 쯧, 얼마나 외로웠으면 펫을. 허어, 역시 안 되겠다. 네가 아무리 싫대도 이번엔 이 할애비가 앞장서서 맞선 자리 알아봐야겠다.”
석을 처음 본 박 회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혀를 차며 맞선 이야길 꺼내셨다.
‘맞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번인가 넌지시 꺼내신 이야기였다.
그때마다 곧바로 그녀가 거절한 탓인지 한동안 전혀 꺼내시지 않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만약 차사를 보지 못했다면 이번에도 정색을 했을 단어였지만 주희는 한동안 가만히 박 회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박 회장의 눈 속에 든 걱정이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왜요? 강제 인연 만들어 주시게요?”
그녀가 가만히 웃으며 말을 받자 박 회장이 눈에 이채를 띠며 곧바로 타협을 시작했다.
“어허, 강제 인연이라니? 고르고 고른,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특별한 인연이지. 너처럼 이렇게 한곳에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인연이라고. 설마 내가 노망이라도 나서 네 앞에 이상한 사람이라도 데려다 놓을까 걱정하는 거냐?”
박 회장이 왜 ‘맞선’이라는 단어에 필이 꽂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설득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사르며 즐거워하고 있는 박 회장을 왠지 지금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할아버지가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정확하신데요.”
“그러니 어떠냐? 눈 딱 감고 내가 소개해 주는 사람과 한 번 만나 보는 건.”
박 회장은 그녀의 순순한 태도를 의아해하면서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딜을 했다.
“그럴게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녀였기에 순순히 승낙했다.
얼마 남지 않은 박 회장의 시간을 겨우 맞선 보지 않겠다는 말로 마음 상하게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네. 할아버지께서 주선하시는 맞선이면요.”
박 회장이 맞선 자리를 직접 주선해 주실 때까지 살아 계실 수 있다면, 그야말로 좋은 일이기에 바람을 담아 기도처럼 대답했다.
“허허. 그래, 한번 믿어 보려무나. 안 그래도 요즘 자꾸 그 녀석이 신경 쓰였었는데, 내가 왜 진작 널 생각지 못했나 몰라. 허허.”
“저처럼 신경 쓰이는 사람이 또 있으신가 봐요.”
재계에서의 위치나 겉모습에서 보이는 강한 포스와 달리 참 정이 많으신 분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하듯 또 신경 쓰는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있지. 그것도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녀석이. 그런데 말이야, 가만히 보니 왠지 너희 둘이 좀 닮은 것도 같구나. 분명 생김은 완전히 다른데……. 이거 보면 볼수록 묘하게 이미지가 닮은 것 같구나.”
빤히 쳐다보며 뭔가 이해가 안 가는 걸 봤을 때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 회장의 모습에 주희가 빙긋 웃었다.
“저처럼 이상한 사람이 또 있다니, 저도 궁금하네요.”
“허허, 아무래도 이건 인연이지? 내 한시라도 빨리 선 자리를 만들어 보마. 네 입으로 한 약속이니 나중에 딴소리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럴게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랍니까? 우리 주인님, 선봐요?”
주방에서 나온 도 실장이 다기 세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된 게, 우리 주희보다 도 실장이 더 좋아하는 것 같지?”
“당연히 좋죠. 우리 주인님은 거짓말 같은 건 안 하시는 분이니 정말 맞선을 보신다는 거잖아요. 그럼 결혼을 하실지도 모르고요.”
“그렇지.”
음흉한 속내가 드러나는 도 실장의 웃음에 박 회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맞장구를 쳤다.
“도 실장님, 그거 언제 내려놓으실 거예요?”
주희가 한숨을 쉬며 눈을 흘겼다.
“아, 죄송합니다. 찻물도 데워 왔습니다.”
달그락.
도 실장이 주희의 눈길을 피하며 다기 세트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연한 하늘빛이 도는 한지함을 그 중앙에 놓았다.
“그런데 주인님, 이 한지함 안에 든 건 무슨 차죠? 슬쩍 봤는데 겨우 꽃잎 한 장밖에 안 들어 있던데요.”
“맞아요. 화차예요.”
주희가 함을 열어 연한 하늘빛이 도는 꽃잎을 박 회장 앞에 놓인 찻잔에 넣었다. 그리곤 다기 주전자를 들어 꽃잎 위에 쪼르륵 찻물을 부었다.
꽃잎 위에 물이 닿으면서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한 향에 도 실장이 흠칫 놀라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음, 향이 이토록 청량하게 느껴지는 차는 처음 보는구나. 매우 귀한 차인 거 같은데 날 줘도 되는 거냐?”
“네. 지금 이 차가 가장 필요한 건 할아버지세요. 향이 가시기 전에 어서 드세요.”
주희의 조용한 말에 박 회장은 두 번 사양하지도 않고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잔을 들어 마셨다.
“음, 네가 왜 커피가 아니라 차를 좋아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구나. 하지만 모든 차들이 다 이런 건 아니지?”
“좋은 차예요.”
주희는 가만히 웃으며 그저 좋은 차라는 얘기만 했다.
그녀가 알기로 1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귀한 꽃잎으로 만든 차였다. 유일하게 옥황상제의 화원에서만 자라는 꽃이었고, 상제의 축원이 듬뿍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마시면 그저 추억에 잠기는 차였으나, 머나먼 망자의 길을 가야 할 이에게 이보다 더 든든한 노자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인간으로 환생한 뒤 지금까지 소식 한 번 없다 올해 처음으로 천계신인 아버지가 보내온 선물이었다.
향기만으로도 정화의 효과가 있는 차였다.
지금 책장 구석에서 꺼질 듯 떨고 있는 도 실장의 모습이 바로 그녀가 차를 건드리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흠, 이런 좋은 차를 얻어 마시니, 더 의무감이 생기는구나. 기다려 보거라. 내 꼭 일을 성사시키고 연락하마.”
왠지 아까 차를 마시기 전보다 더 결연하게 말하는 박 회장의 다짐에 주희가 웃어 보였다.
“서두르시지 않아도 돼요. 전 지금 이 생활이 가장 좋다니까요.”
“너 이 녀석, 설마 내 잔소리가 귀찮아 선볼 생각도 없으면서 대충 맞장구친 건 아니지? 아냐, 역시 구두로만 약속하는 건 믿음이 안 가. 나중에 오리발 내밀지도 모르잖아. 도 실장! 종이랑 펜 좀 가져오게.”
그녀를 못 믿겠다는 듯 빤히 쳐다보던 박 회장이 갑자기 도 실장을 불러 펜과 종이를 요구했다.
그녀가 그럴 일 없다 말할 새도 없었다. 도 실장이 박 회장의 장단에 맞춰 곧바로 종이와 펜을 대령했다.
“여깄습니다요, 회장님!”
그게 만족스러운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죽 늘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스스스슥!
박 회장이 일필휘지로 뭔가를 단숨에 휘갈겼고, 순식간에 종이 한 장이 그녀의 앞에 내밀어졌다.
“자, 내 사인은 끝났으니 이젠 네가 여기다 사인하려무나.”
하지만 종이를 받아 든 순간 주희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맞선 각서…….”
<맞선 각서>
나 이주희는 박주호가 주선한 상대와 맞선을 볼 것을 약속하며, 선입견 없이 그 사람을 세 번은 더 만날 것을 맹세합니다.
맞선 각서라니.
그것도 세 번을 더 만나야 한다는 말까지 첨부된 각서.
각서 하단엔 이름과 주소까지 꼼꼼히 기입해야 하는, 말 그대로 정식 각서처럼 보였다.
“뭘 망설이는 거냐? 설마 말을 번복할 생각은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박 회장님. 우리 주인님은 한번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시는 분입니다요. 아, 뭐 하세요, 주인님. 회장님 기다리시잖아요? 어서 사인하세요.”
당황해 눈을 껌뻑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박 회장이 눈을 가늘게 떠 보였고, 도 실장은 직접 펜까지 내밀며 사인하라 다그치면서 몰아댔다.
“…….”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반박할 이유를 댈 수 없어 주희는 일단 사인을 했다.
“껄껄,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나.”
그녀의 사인이 들어간 각서를 받아 든 박 회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색한 표정을 오해했는지 몇 마디 덧붙이셨다.
“뭘 그리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냐? 못생기고 이상한 놈을 소개할까 봐 걱정인 거냐?”
“아니에요.”
“녀석,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놈, 아주 괜찮은 놈이니 말이다. 뭐 성격이 좀 강한 게 흠이긴 하다만 알고 보면 절대 모진 놈이 못 되거든. 그리고 미리 스포 하나 하자면 그 녀석, 하하. 아주 잘생겼단다.”
흐뭇하게 웃으며 얘기하시는 박 회장의 얼굴 표정에서 박 회장이 얼마나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박 회장의 환한 미소만큼 그녀의 가슴에는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애써 가만히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네 애비는 아직도 출장 중인 거냐? 쯔쯧, 땅 파고 돌아다니는 일이 뭐 그리 좋다고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어.”
“괜찮아요. 전 아버지가 일에 몰두하실 때가 제일 보기 좋은걸요.”
“속없는 것. 만날 그렇게 괜찮다, 괜찮다 하니까 그 무딘 녀석이 네가 진짜로 괜찮은 줄 안단 말이다. 애비한텐 적당히 투정도 부리고 그래야 하는 거라고. 쯧, 너무 착해 빠져서 큰일이라니까.”
사실 전혀 착하지 않은 그녀인데 박 회장은 이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없다.
“그럼 차도 얻어 마셨고, 각서도 받았으니 나도 이제 그만 일어나련다. 시간을 보아하니 너도 퇴근할 시간 다 된 것 같고 말이야.”
박 회장이 원하는 걸 다 얻었다는 듯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따라 일어선 주희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출입문 밖을 향했다.
차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박 회장이 말씀하셨던 차 비서가 가게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눈이 마주쳐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조심해서 가세요.”
주희는 문을 나서는 박 회장을 향해 할 수 있는 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래, 잘 있어라. 곧 다시 연락 보내마.”
차마 기다리겠다는 답은 못 하고 가만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살펴 가십시오, 박 회장님.”
도 실장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포장해 둔 책 상자를 차 비서에게 건넸다.
“그래, 자네도 잘 있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걸어가는 박 회장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많이 쓸쓸해 보였다.
“오늘은 아니었으면…….”
“네? 뭐가요?”
도 실장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되물었지만 그녀는 모른 체하고 뒤돌아 찻잔을 정리하기 위해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런데 언제 깨어났는지 석의 행동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야! 도대체 뭘 먹는 거야! 아무거나 먹지 마!”
빽 고함을 지른 도 실장이 도깨비 최고의 속도로 마구 달려갔지만 석이 더 재빨랐다.
날름.
석이 긴 혀를 내밀어 우려내고 남은 꽃잎을 먹어 치운 것이다.
“이, 이 바보 도마뱀이! 그 꽃잎차, 이상한 거란 말이야! 야, 뱉어! 뱉으라고!”
석을 붙잡고 꽃잎차를 뱉으라며 탈탈 털어댔지만 석은 꺼억 소리까지 내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도 실장님, 내버려 두세요.”
“하지만, 아까 이 차 기운이 이상했어요. 완전 불길한 차였다고요.”
“괜찮을 거예요.”
귀신이나 도깨비에겐 위협적으로 느껴질 차였지만 다른 이들에겐 전혀 무리가 없을 터였다.
“하긴, 식충이 도마뱀이 뭔들 못 먹겠어.”
석이 아무렇지 않은 걸 확인한 도 실장의 얼굴에 살짝 안도의 빛이 스치더니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붙잡고 있던 석을 휙 던져 버렸다.
거친 내침에도 불구하고 석은 날렵하게 바닥에 착지해 못마땅한 표정으로 도 실장을 쏘아봤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성질내며 달려들지는 않았다.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나른한 표정을 짓더니 슬금슬금 주희의 다리로 다가가 머리를 비볐다.
주희가 손을 내밀어 그런 석을 안았다.
“안아 주지 마세요. 너무 그렇게 오냐오냐하니까 자꾸 버릇만 나빠지잖아요.”
도 실장의 성질내는 말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석은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희의 품에 고개를 쿡 처박고 잠이 들었다.
“가게 문 닫을 시간이 지났네요. 석인 내가 데려갈 테니 도 실장님이 문단속 좀 해주세요.”
그렇게, 길고 긴 이가서림에서의 평범한 하루가 끝났다.
그날 이후, 사흘 만에 부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재계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박 회장의 부고 소식에 온 나라가 떠들썩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박 회장님이, 흑흑. 박 회장님이……. 쿨쩍.”
언제나 감정 헤프기로 유명한 도 실장이긴 하지만 박 회장의 부고 소식은 더 충격이었는지 하루 종일 눈물 바람이었다.
“정말 장례식장에 안 가실 거예요?”
도 실장이 콧물 소리와 볼멘소리가 섞인 물음을 몇 번째 뱉어냈다.
“안 가요.”
“어쩜 그렇게 야박하세요. 박 회장님이 주인님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배웅은, 나흘 전에 이미 했어요.”
그랬다. 배웅은 그 마지막 날, 박 회장이 아직 살아 있던 나흘 전의 인사로 충분했다.
혼이 없는 육신을 향해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생애 박 회장을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분명 더 좋은 곳으로 가셨을 테니 안타까워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상제의 축원은 그만큼 강력한 덕을 쌓음을 의미했기에 어떤 판관도 함부로 하진 못할 터였다.
“어떻게요? 주인님, 설마 사람 수명도 보이세요?”
눈물도 뚝 그칠 정도로 놀란 도 실장이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다그쳤다.
“도 실장님, 난 명부신이 아니에요. 명부신도 담당 차사가 아니면 다른 사람 수명은 모를 테고요.”
“그럼 어떻게 박 회장님이 가실 걸 미리 아신 거예요?”
“차사요. 마지막으로 책방에 오셨던 그날, 차사가 할아버지 뒤를 따라왔었어요.”
“아, 차사……. 씨이, 난 못 봤는데. 너무해요. 봤으면 저한테도 얘기 좀 해주시지. 배웅도 못 했는데. 주인님, 같이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안 돼요?”
“네. 장례식장에 가는 건 의미가 없어요. 박 할아버지의 영혼은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도 실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장례식장엔 원귀들이 많다는 거. 제가 귀신이라도 씌길 바라세요?”
“그렇긴 하지만, 흑. 박 회장님. 흑흑!”
또다시 시작된 도 실장의 눈물 바람에 주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날 도 실장이 차사를 봤다면, 아마 지금 이 모습이 그날의 도 실장 모습일 터였다.
도 실장이 차사를 보지 못한 게 박 회장에겐 너무도 다행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도 도 실장님의 마음 충분히 아실 거예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분명 좋은 곳으로 가실 거예요.”
좋은 곳으로 갔을 거란 건 알지만 그럼에도 이제 영원히 박 회장을 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남아 코끝이 시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인연을 영원히 떠나보낸 우울하고 또 우울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