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그녀의 밤 손님
프롤로그
달도 자취를 감춘 그믐밤, 흐릿하게 거리를 비추던 가로등마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해 버린 어느 도심의 공원이었다.
쏴아아아!
기상이변인지 공원 주변에 때 아닌 겨울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쏟아지는 사나운 빗줄기.
그 속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이 모든 게 네 아버지 탓이다.”
미동도 않고 서 있던 사내의 입에서 느릿하게 뱉어지는 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목소리처럼 음산했다.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사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공원의 질퍽한 바닥 위, 한 아이가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반듯이 눕혀져 있는 작은 인영.
눈을 뜨지 않고 있는 작은 아이의 모습이 마치 시체와 같았지만 시린 대기 속에 뿜어지는 미세한 온기가 아직은 아이가 살아 있음을 전해 주었다.
사내도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의 몸속에 떠돌고 있는 특유의 기운 때문에 최선을 다한 그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명계의 추적자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스윽, 몸을 숙여 커다란 손을 작은 인영의 가슴 위로 가져갔다.
쏴아아아!
세상의 비를 한곳에 다 모아 놓은 듯한 폭우가 쏟아졌다.
“이건 아주 작은 대가일 뿐이다. 그 작은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은 데 대한.”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던 사내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분노의 기운이 담기는가 싶더니 퀭하게 죽어 있던 눈동자에서 기괴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순간, 아이의 가슴 위에 놓인 사내의 커다란 손 주위로 검은 실 같은 오라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위험한 기운을 잔뜩 담은 검은 오라가 한 덩어리로 뭉쳐지더니 어느 순간 곧장 아래로 뻗어 내렸다.
텅!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작은 몸이 바르르 경련했다.
그와 동시에 미세하게 뱉어지던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아이의 몸속을 떠돌던 독특한 기도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가 손을 내밀어 아이를 만지니 아이의 몸이 기이할 정도로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아이에게서 손을 뗀 사내는 사납게 쏟아지는 폭우의 저편, 검은 허공을 빤히 응시했다.
빠르게 다가들던 사자들의 기운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내의 입가가 괴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기다려라. 이건 겨우 시작일 테니.”
한 번 더 숨이 멎은 아이의 육신을 힐끗 쳐다본 검은 옷의 사내가 잠시 머뭇거렸다.
수 분 후 완전히 소멸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명계 사자들의 기운과는 다른 뭔가 생소한 기가 다가드는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자신의 몸속을 떠도는 술법의 힘이 빠른 속도로 약해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아이의 모습과 생소한 기가 다가드는 곳을 번갈아 응시하던 사내, 영묵은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어느 때보다 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치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암흑의 밤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혼자 진흙탕 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폭우 속에서 우산조차 들고 있지 않은 아이.
이상한 아이였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건, 이렇게 사나운 빗속에서도 아이의 머리나 옷이 전혀 젖어 있지 않았다.
비가 아이를 피해 가는 건지 아이가 비를 피해 가는 건지, 이상하게 아이의 주변에만 비가 내리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연신 뒤를 힐끔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아이참, 하필 오늘 같은 날 비야?”
마치 비를 내린 원망의 대상이 하늘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달리는 와중에도 볼멘소리를 내며 예쁜 눈을 가늘게 찢어 하늘을 향해 흘겼을 때였다.
갑자기 아이의 다리에 뭔가가 턱 걸렸다.
“아앗!”
아이의 동그란 두 눈동자가 놀라 휘둥그렇게 커졌고, 순식간에 작은 몸이 진흙탕 위로 엎어졌다.
털썩!
제법 사나운 기세로 넘어졌는데 이상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읏, 차가워! 힝, 이게 뭐야. 다 젖었잖아!”
하지만 문제는, 넘어지는 바람에 기가 흐트러져 방어막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순식간에 세찬 비를 그대로 쫄딱 다 맞고 말았다. 덤으로 흙탕물까지 뒤집어썼다.
차가운 빗줄기가 온몸을 흠뻑 적시며 피부에 닿자, 시리도록 찬 기운에 아이는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투덜거림을 토해냈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발딱 몸을 일으키려 바닥에 손을 짚었다.
“……?”
손에 닿은 바닥의 느낌이 이상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이번엔 굴러떨어질 것같이 커졌고, 놀라 뒤로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아악!”
시체.
숨이 멎을 것같이 놀란 아이는 주춤주춤 엉덩이를 밀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인간을 죽인 거야?”
방금 전, 자신이 마구 달리던 순간을 떠올리며 여자아이의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인간계로의 첫나들이인데 비를 맞고 싶지 않아 신력을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인간은 약하니까 살짝 발에 차인 정도에도 죽었을지 모른다.
“……!”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인간 아이가 이런 한밤중에, 그것도 진흙탕 속에 누워 있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상해. 현학 스승님의 인간학대로라면, 인간 아이는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했는데?”
한번 의문이 들기 시작하니 더 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작은 아이의 머릿속에 도로록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심각한 의문이 공포를 잠시 밀어낼 정도였다.
엉덩이 걸음으로 멀어졌던 몸을 발딱 일으킨 여자아이는 쓰러져 있는 아이의 시체로 다가가 용기 내어 손을 내밀었다.
인간은 죽으면 몇 시간 후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는 가르침이 떠올랐던 것이다.
손 아래 만져지는 아이의 몸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휴, 내가 그런 게 아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여자아이는 그제야 반듯하게 누워 있는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처럼 새하얀 얼굴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눈을 번쩍 뜰 것만 같았다.
“이렇게 어린데…….”
멍하니 중얼거리다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사 아저씨는 왜 안 오시지?”
인간이 죽었는데 영혼을 안내해야 할 차사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이의 몸속에 흐릿하지만 영혼이 느껴지는데 말이다.
“이상해.”
이상하게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실 시체를 처음 봤다. 아니, 죽음이란 거 자체를 처음 목격했다.
그 탓일까?
쳐다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왜인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방어막을 해제한 탓에 세차게 쏟아붓고 있는 빗줄기가 눈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눈까지 아파 왔다.
사납게 쏟아붓는 빗줄기가 마치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슬픔이 아픔이 되어 누군가 얼음 칼로 콕콕 심장을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아파…….”
여자아이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미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아이의 손을 기어이 잡고 말았다.
슈우욱!
갑자기 여자아이의 전신에서 투명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 빛이 누워 있는 아이의 전신을 감쌌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을 내고 있는 두 아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자아이와 손을 맞잡고 있던 여자아이의 얼굴에 갑자기 당황한 빛이 서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파랗게 질려갔다.
순간 여자아이의 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무리가 암흑을 밝히며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털썩.
폭주하듯 한꺼번에 빛을 쏘아 보내 버린 여자아이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세상이 다시 암흑에 잠긴 바로 그때였다.
팟!
“주희 님!”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 여자아이를 일으켜 안으며 놀란 소리를 냈다.
여인은 황급히 주희의 몸 상태를 살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어서 돌아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곁에서 가는 숨을 내쉬고 있는 다른 아이를 보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맙소사. 이걸 어쩌지?”
방금 전 주희가 쏘아 낸 거대한 힘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에 관여하고 만 듯했던 것이다.
이후 벌어질 난감한 일을 생각하면 아이의 생명을 즉시 다시 거두는 게 옳겠지만, 주희가 불어넣은 생명을 다시 거두는 건 아무리 그녀라도 쉽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건 주희의 몸 상태였다.
여인의 망설임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팟!
주희를 안은 여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할 것 같던 세찬 빗줄기도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부슬거리며 내리는 비가 바닥에 누운 아이의 볼을 어루만지듯 흘러내렸다.
미세하지만 아이가 숨을 쉬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뜨진 못했지만 차갑게 굳어 있던 몸에 옅은 온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공원 옆길에서 인기척이 났다.
“혼자 걷고 싶군. 따라오지 말게.”
한 중년의 사내가 차에서 내리며 먼저 내려서 우산을 받쳐주고 있는 경호원을 향해 말했다.
어느 장례식장에라도 다녀오는지 검은 슈트를 입은 그의 목소리엔 무슨 일인지 진한 아픔이 배어 있었다.
“아직 비가 내립니다, 회장님.”
“그래, 아직도 비가 오는군.”
경호원의 말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숨길 수 없는 처연한 빛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들 내외를 한꺼번에 보내고 오는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내가 또 언제 비를 맞아 보겠나. 우산은 됐네.”
중년 사내가 터덜거리는 걸음을 옮기자 경호원이 우산을 접고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겨울 초입의 찬비가 아들 내외를 보내고 온다는 중년 사내의 검은 상복을 흠뻑 적시고,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오래도록 씻겨 내렸을 때였다.
중년 사내의 몸이 뭔가에 놀라 흠칫한 순간, 경호원이 중년 사내의 앞으로 나섰다.
“회장님,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경호원이 한껏 주위를 경계하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헛것을 본 건 아닌 모양이군. 죽은 건가?”
검은 밤, 겨울의 차가운 비를 맞으며 공원 바닥에 움직임 없이 쓰러져 있는 사람이라면 살해를 당했거나 자살을 했거나 십중팔구 죽은 자가 맞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년 사내는 재차 확인을 하듯 물었다.
경호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한 발짝 나아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아이가 왜 이런 곳에…….”
이런 곳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성인도 아니고 겨우 10세 전후의 어린아이인 것을 확인한 경호원이 놀라 중얼거렸다.
입고 있는 옷마저 현대 복장이 아니었다.
윗옷이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것이, 꼭 고대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무척 놀랐지만 경호원은 아이의 생사를 먼저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살아 있습니다.”
경호원이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를 냈다.
“허.”
경호원의 말에 중년 사내가 눈을 껌뻑거리며 아이를 내려다봤다.
“일단 병원으로 옮기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경호원은 중년 사내의 말대로 아이를 안아 들고 재빨리 차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허, 그놈 참. 무슨 일이기에 이 빗속에서.”
중년 사내가 아이를 안고 가는 경호원의 뒤를 따르며 연신 혀를 찼다.
아들 내외의 사고 이후 아주 잠시지만 처음으로 가슴에 응어리졌던 아픔이 옅어졌다.
아이는 병원에 데려간 후에도 오래도록 눈을 뜨지 못했다.
뇌 정밀 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었음에도 그저 막연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게다가 병원에 도착하던 날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연고자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겨우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였다.
어느 사극 촬영장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귀하게 자란 티가 역력히 났다.
당연히 실종 신고가 들어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매일 병실에 들러 아이를 지켜보길 일주일, 차라리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던 아이가 눈을 떴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당황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궁금한 점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는 더 이상 묻는 걸 멈췄다.
상대를 투영할 것같이 맑은 눈을 반짝이고 있는 눈동자를 믿기로 했다.
신이 비와 함께 내려준 인연이라 여겨 아이의 이름은 ‘신우’가 되었다.
그의 성을 빌려 박신우.
아들 내외를 잃고 살아갈 이유를 상실한 그에게 다시 살아도 좋을 이유를 만들어 준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