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주변이 느리게 흘러갔다. 아까와는 다르게, 정말로 시간이 느려진 것이었다.
대마법사는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시간을 거스르는 그 모습은 정말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길….”
“내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예.”
“그게 미지의 존재다.”
예상치 못해 당황하는 것도 잠시 에드먼은 대마법사가 미지의 존재를 죽였던 영웅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미지의 존재를 찾는 이유가 뭡니까.”
대마법사는 에드먼의 선명한 살기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반쯤 무너진 신전 입구에서 무언가 날아들어 왔다.
다프네라는 것을 알아챈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 그를 얽매고 있는 듯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괜히 힘 빼지 말거라.”
대마법사는 다프네를 살폈다.
“…정말, 정말 맞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대마법사는 다프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고 또 훑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대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러나 닿기도 전에 날카로운 외침이 끼어들었다.
“손대지 마십시오!”
“…….”
대마법사는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에드먼은 초조한 시선으로 다프네와 대마법사를 번갈아 보았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대마법사에게 어떤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인데 몸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대마법사가 말로 회유당하거나 겁먹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에드먼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시신이라도 온전히 안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대마법사는 마음만 먹으면 다프네의 살점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켜 버릴 수 있다.
대마법사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있다. 누군가 다프네의 시신을 이용해 악마를 다시 깨우려고 할 수도 있으니 위험 요소를 완전히 없애려고 할 것이다.
“시신?”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그녀는 살아 있어.”
“…예?”
멈춘 심장을 확인했다.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는 것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에드먼은 미처 떨림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 농락하시려 하는 거면….”
“미약하지만 분명 살아 있다.”
다프네가, 살아 있다. 에드먼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미지의 존재를 찾으려는 이유는 그게 내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대마법사는 다프네를 내려다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미지의 존재가 죽은 그 순간, 주신이 나타났다. 천족과 마족, 인간이 서로를 물어뜯어도 꼼짝하지 않던 주신의 등장이었다.
주신은 피눈물을 흘리며 미지의 존재를 거두었다.
“너희들을 위해 내 아이를 내려주었더니 감히 목숨을 거두는구나.”
미지의 존재는 주신의 안배였다. 영웅들을 두려움에 떨며 용서를 구했으나 주신은 각각 저주를 내렸다.
“강력했던 검사는 점점 힘을 잃는 무력감에 몸부림치다 자결하였다. 성녀는 아이를 낳은 후에야 자신의 힘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정령사는 정령이 사라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주신은 대마법사의 힘을 앗아 가지 않았다. 그 대신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대마법사의 사명이 되었다.
“세상이 위험에 빠져 언젠간 미지의 존재가 태어날 것이니 꼭 지키라는.”
하지만 대마법사는 지키지 못했다.
새로이 태어난 미지의 존재는 이미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흑마법에 당해 치료를 할 때 알아볼 수 있었음에도 대마법사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몇백 년 동안 대마법사는 홀로 살아왔고 그는 육체적으로는 강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이미 나약해져 있었다.
그 나약함은 결국 그의 사명을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 그저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 그게 뭔지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북부를 돌아다니던 대마법사는 악마의 힘을 느끼고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그분이 이제 진정 내 힘을 앗아 가시겠군.”
아무런 미련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끝나는 동시에 하늘이 흔들리더니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환한 빛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 세상을 만든 주신이었다.
“어리석은 인간아, 내 명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용서를 바라지 않습니다. 부디 제 힘을 거두어 가십시오.”
“아니. 나는 너의 힘을 앗아가지 않을 것이다. 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살고 싶어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주신이시여…!”
대마법사는 외쳤으나 주신은 외면했다.
주신이 눈짓하자 허공에 떠 있던 다프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야.”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프네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열렸다.
다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녹색 눈이 모습을 보이자 에드먼은 멍하니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다프네….”
다프네의 몽롱한 시선이 주신에게 닿았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또다시 내려가서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주신은 다프네를 타일렀다.
다프네의 녹색 눈이 깜빡였다. 그가 기억하는 눈임에도 무언가 이상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마치 죽은 자의 것과도 같았으며 낯설었다.
분명 다프네임에도, 에드먼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돌아가자, 아이야.”
“…가지 마십시오, 다프네.”
주신의 시선에 에드먼에게 돌아갔다.
에드먼은 주신의 시선을 못 이겨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다프네, 제발….”
“제법이구나.”
주신은 자신의 시선을 견디는 에드먼을 보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의 작은 손짓에 에드먼의 상체가 바닥에 처박혔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이야.”
“다프… 네.”
주신과 에드먼의 다그침 속에서 다프네가 마침내 입술을 달싹였다. 에드먼은 여전히 텅 비어 있는 다프네의 눈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는.”
***
황태자, 칼리토의 반역이 성공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세르기 블레드와 성녀는 단 하루 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수장이 사라지자 그의 세력은 빠르게 무너졌다.
황제는 사망했다고 알려진 닉 아처에게 죽임을 당한 채 발견됐고, 닉 아처는 그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에 황태자는 사형을 내렸고 닉 아처는 공개 처형을 당했다.
황태자는 황제가 되었다.
뮤트 백작은 공이 치하 받아 공작이 되었으며, 황태자는 윈터 공작에게 대공위를 내렸다. 하지만 에드먼 윈터는 대공위를 거절하고 땅을 받았다. 그것이 어디에 위치한 땅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다양하게 추측했다.
그 후 에드먼 윈터는 고작 성년을 막 넘긴 소공작에게 작위를 넘겼다.
데미안 윈터는 황제를 지키기 위해 오른쪽 다리가 다쳐 평생을 절게 되었다. 황제는 데미안 윈터를 위해 황가의 보물이 박힌 지팡이를 선물하였고 관계가 전혀 문제가 없음을 널리 알렸다.
아들에게 작위를 넘긴 에드먼 윈터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남부 깊은 곳에서 지낸다고 하였지만 가설에 불과했다.
그렇게 젊은 황제는 새로운 정책을 널리 알리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며 불안정한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황제가 쿠데타를 성공시켰던 날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ㅎㅂㄹㄱ.공금
남부의 작은 마을은 평화로웠다.
2년 전, 갑자기 영지의 주인이 바뀐다고 했을 땐 영주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영주는 전 영주보다 영지를 더 잘 다스렸고 마을은 금방 풍요로워졌다.
성의 마구간에서 일하는 필립은 검은 말 위에 오르는 이를 발견했다.
“아, 영주님!”
영주는 마치 사람의 모습 같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필립은 괴팍하던 전 영주보다 현재의 영주가 더 좋았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지만 적어도 그는 사람을 때리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영주는 하루에 한 번씩 애마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오곤 했다. 필립은 그것이 미혼인 영주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확한 건 아니었으나 영주님의 부인을 한 번도 본 적 없었기에 모두 그를 미혼이라 여겼다. 처음에는 새로운 영주의 등장에 불안해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영주님이 30대 초반에 미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처자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영주님, 혹시… 애인 분을 뵈러 매일 가시는 건가요?”
“…….”
역시, 그럼 그렇지! 아주머니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말씀드려야겠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드린 필립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영주님을 배웅했다.
다그닥, 다그닥.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말이 움직였다. 남자가 향한 곳은 우거진 숲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을 익숙하게 들어가 작은 동굴을 지나자 2층짜리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말에서 내려 정성이 담긴 꽃밭에서 꽃을 땄다. 하얀 꽃, 분홍 꽃, 자색 꽃. 한 아름 품에 딴 남자의 뒤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까망아.”
개는 숨을 헥헥거리며 남자의 손에 애교를 피웠다. 남자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을 열었다.
물을 먹는 개를 등지고 2층으로 올라간 남자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가져온 꽃을 침대 옆 화병에 갈아 넣었다.
그리고 침대를 응시했다. 두 손을 모은 채 잠이 든 여인이 있었다.
“…언제쯤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날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다프네는 에드먼을 선택했다. 주신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다프네를 보다가 되돌아갔다.
모든 상황이 끝났음에도 다프네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랑합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에드먼은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 다프네에게 속삭였다.
그가 상체를 일으켰을 때였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드먼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녹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다프네가 손을 뻗어 에드먼의 뺨을 움켜쥐었다. 약한 힘에도 에드먼은 순순히 끌려갔다.
둘의 이마가 맞닿았다.
“오늘 꽃향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그렇습니까?”
다프네는 미소 지었다.
“나도, 사랑해요.”
당신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다. 너무 오래 간직했던 말.
당신을 사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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