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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42화 (142/145)

142화

“윽.”

손목에서 퍼져 나오는 고통에 다프네가 옅게 신음했다.

한 번, 두 번. 바네사가 칼을 그을수록 쏟아지는 피의 양이 점점 늘어졌다. 다프네는 자신의 팔에서 이만큼의 피가 흘러나올 수 있는 것에 놀랐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다프네의 피가 제단을 흠뻑 젖혔다.

바네사는 다프네의 손을 잡아다가 제단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다프네의 손은 제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바네사가 손을 놓자 다프네의 몸이 무너졌다.

“좋아, 완벽해!”

바네사는 환하게 웃으며 웅웅,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녀는 칼리토가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뇌가 점점 녹아내리는 것 같아 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다프네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렵다. 다프네는 중얼거리며 조소를 터트렸다. 차라리 죽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그녀는 사실 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다프네가 생각한 자신의 최후는 실험실 안에서의 모습이다.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쏟아 낸 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는.

그 죽음보다 누군가를 위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죽음이 기꺼웠다.

바로 앞에서 발생한 굉음도 먹먹하게 들렸다.

에드먼과 데미안이 보였다. 다프네는 꿈을 꾸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에드먼과 데미안이 이곳에 있을 리 없으니까.

“…어머니! 정신 차려 보십시오!”

순간 무채색으로 느리게 흘러가던 주변이 현실로 돌아왔다.

다프네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

“전… 하.”

우넬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칼리토를 불렀다. 칼리토는 제단에서 치솟는 붉은 기운을 넋 놓고 응시했다.

“전하.”

다시 이어지는 우넬의 부름으로 인해 칼리토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

“어느 타이밍을 노려야 합니까.”

“…우넬.”

칼리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악마가 막 깨어난 시점에는 약하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웅들의 기준이다. 과연… 네가 할 수 있겠느냐.”

우넬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몸은 어느 순간부터 잘게 떨리고 있었다. 칼리토의 시선 역시 그의 떨리는 손끝으로 향했다.

우넬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넬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각오를 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칼리토의 기사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의 기사였다.

군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기사의 도리이다. 우넬은 심호흡을 하며 무거운 발을 뻗었다.

바네사는 붉은 기운에 정신 팔려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고, 다프네는 이미 쓰러져서 보이지 않았다.

칼리토는 품 안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그는 황실 서고에서 우연히 비밀 창고를 발견했다. 칼리토의 선조이자, 영웅 중 리더였던 검사의 개인적인 유품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낡은 검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검보다는 짧지만 단검보다는 긴, 누군가의 피가 묻은 흔적이 그대로 남은 검을 홀린 듯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그 후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에 ‘기억의 기록’을 다시 읽던 칼리토는 그 검이 검사의 검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아차렸다.

악마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검은 악마와의 전투에서 이미 상할 대로 상하여 딱 한 번만 휘두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후손을 위해 남긴다는 것으로 설명은 끝이었다.

칼리토는 낡은 검을 우넬에게 건넸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같이 부식된 검을 쥔 우넬은 앞으로 걸었다.

우득, 우드득.

기괴한 소리를 내며 붉게 물든 제단의 위로 올려진 심장이 뒤틀렸다. 우넬은 빠르게 달려 나가 심장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안 돼!”

그러나 칼날이 심장에 닿기 전, 바네사가 움직이는 것이 한발 빨랐다.

“윽.”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바네사에게 밀린 우넬은 뒤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우넬의 힘을 바네사가 또 한 번 이길 순 없었다.

“안 돼! 저리 가!”

바네사는 소리를 내지르며 온몸으로 그를 막았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우넬은 기합 소리를 내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푹.

살을 가르는 감촉에 우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절대 안 돼….”

바네사가 몸을 던져 검을 막아 버렸다. 딱 한 번 휘두를 수 있다는 기록은 거짓이 아니었다. 부식된 검이 두 동강이 나 부러졌다.

바네사는 우넬이 경직된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아 무게를 실어 힘껏 밀었다. 비틀거린 우넬은 중심을 잡기 위해 무언가를 짚었다.

“우넬! 당장 손 떼!”

칼리토의 고함은 이미 늦은 후였다.

우넬은 자신이 짚은 것이 제단이라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쓰러졌다.

기사답게 근육으로 가득 차 있던 몸이 순식간에 가는 뼈와 살가죽만 남긴 채 말라 비틀어졌다.

“젠장, 우넬…!”

“가만히 있어.”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편 바네사가 칼리토를 향해 말했다.

바네사는 피를 대충 닦으며 눈을 감고 힘을 끌어 올렸다. 그녀의 몸에 충분히 비축된 성력이 상처를 휘감았고 새로운 살이 돋아났다.

“후우….”

고통이 사라지자 바네사는 눈을 뜨고 옅은 숨을 내뱉었다.

“너는….”

문득 제단으로 고개를 돌린 바네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브가 벗겨져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던 탓에 바네사는 미지의 존재가 다프네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 공작 부인이었다니. 코앞에 두고도 몰랐었네….”

다프네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제단에 여전히 손을 댄 채였다.

“목을 그을까.”

경동맥을 그으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올 텐데.

바네사는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걸친 채 다프네의 손목을 그었던 검을 꺼내 들고 머리카락을 붙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목이 잘 드러났다.

바네사는 망설임 없이 칼날을 대고 그었다. 빠르게 날아온 물체가 없었다면 말이다.

“윽!”

바네사는 검을 떨어트리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다프네!”

신전 안을 들어온 이를 발견한 바네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윈터 공작! 소공작! 그대들이 이곳을 어떻게….”

“이 일은 나중에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에드먼은 칼리토에게 소리친 후 데미안에게 손짓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게 몇 년 만일까, 동생아.”

바네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구나.”

“이미 정체는 익히 들어서. 무슨 짓을 하나 했더니 악마… 하.”

에드먼의 조소에 바네사의 미소가 움찔거렸다.

“동생아, 내가 말하지 않았니. 아버지께 보여 드릴 거라고.”

“…….”

바네사는 빙그르르 뒤돌았다.

피 묻은 입가가 아니라면, 피에 젖은 드레스가 아니었다면 연회에서 춤을 추는 귀부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아한 몸짓이었다.

바네사는 제단 위를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쓸었다.

“난 아버지가 실패한 일을 성공하고 있단다. 악마의 귀환.”

바네사는 황홀함을 참지 못하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니? 악마가 깨어나면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거란다. 부디 날 막지 말고 지켜봐 줬으면 좋겠구나.”

“막을 생각은 없다.”

“응?”

바네사가 미간을 찡그리고 에드먼을 보았다.

“막을 생각이 없다고?”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든, 뭐든 상관없어.”

“윈터 공작…!”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다.”

에드먼은 칼리토의 부름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 갔다. 그의 시선은 위태롭게 주저앉은 다프네에게 향해 있었다.

“저 여인의 목숨.”

“…뭐?”

에드먼은 허리춤에 두른 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바네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검은 마나를 가진 이는 악마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기록을 본 적 있나.”

“…정말이야, 황태자?”

바네사가 칼리토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네사는 완전한 ‘기억의 기록’을 읽어 본 적 없었다.

칼리토는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맞네.”

바네사의 눈이 반짝였다.

“굳이 미지의 존재가 아니더라고 악마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 충분히 악마를 깨울 수 있겠지.”

“악마의 선택….”

바네사는 홀린 듯 그 단어를 읊조렸다.

에드먼은 어느새 제단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에드먼은 말라비틀어진 우넬의 시체에 눈길을 한 번 주지 않았다.

“내 목숨 정도면 충분한가?”

“…충분해.”

바네사의 입에서 에드먼이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굳은 표정이 풀어지려는 찰나, 바네사가 말했다.

“그런데 난 욕심이 많단다, 에드먼. 미지의 존재와 악마의 선택을 받은 자. 둘 다 모두 이용해서 깨우고 싶어. 더 강력한 악마로 탄생하겠지!”

“데미안!”

바네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과 동시에 에드먼이 외쳤다.

바네사의 시선과 신경을 모조리 사로잡고 있던 데미안이 잽싸게 움직여 다프네를 감쌌다. 그리고 에드먼은 마나를 풀어 제단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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