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다프네는 담담히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내가 저번에 성녀가 미지의 존재를 노린다고 했던 거 기억할 걸세.”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토는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를, 그러니까 미지의 존재를 이용해서 악마의 봉인을 깰 생각인 거야.”
“악마… 라니요?”
“지금 부인이 생각하는 악마가 맞아. 마족들의 왕이자 미지의 존재가 봉인한 존재.”
순식간에 다프네의 얼굴 위로 혼란스러움이 퍼졌다.
칼리토는 궐련을 꺼내 메마른 입술로 물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도 잠시 불을 찾을 수 없자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궐련을 내뱉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대신관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더군.”
“…그는 성녀의 사람이지 않나요?”
“토사구팽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는군. 이 모든 건 대신관이 해 준 이야기야. 자신의 모든 성력을 걸고. 악마가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 걸세.”
대신관이 성력을 걸었다는 건 목숨을 걸었다는 것과 같다. 그 말인즉, 모든 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마족이 태어나고 세상은 악에 물든다.”
다프네는 세간에 심심치 않게 떠도는 말을 읊었다.
만약 정말로 악마가 깨어나 마족이 태어난다면 세상은 아주 짧은 순간에 혼란에 빠질 것이다.
먼 옛날과는 달리 천족은 천계로 올라갔으며 영웅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숨을 거뒀다. 대마법사 홀로 악마를 봉인할 순 없을 것이다. 네 명의 영웅이 실패하여 미지의 존재가 겨우 봉인한 악마이다.
“…제가 죽어야 하는 건가요?”
“‘기억의 기록’에 의하면 미지의 존재는 자신의 피를 통해 악마를 봉인했다고 쓰여 있네.”
미지의 존재의 최후를 생각해 보았다. 몸의 피가 모두 뽑혀 말라비틀어진 시체.
무심코 내린 시선이 잘게 떨리는 손끝에 닿았다. 다프네는 자신의 시선을 따라 칼리토가 고개를 내리는 것을 보고 얼른 손을 감추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칼리토가 지금 당장에라도 다프네를 제압해 목숨을 앗아 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프네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숨을 가늘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만약 다프네가 살아있다면 언제든지 악마는 깨어날 수 있다.
“…부인, 난 부인을 해칠 생각이 없네.”
다프네는 그 말에 안심하지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존재는 매우 위험해. 더군다나 언제 또 미지의 존재와 성녀 같은 이가 동시에 나타날지도 모르고.”
다프네는 일순 ‘기억의 기록’ 중 한 문장이 떠올랐다.
악마의 힘을 기억하는 영웅들은 공포에 떨었노라. 그리하여 미지의 존재를 죽였다.
그녀의 앞에 있는 황태자는 그 영웅 중 한 명의 후손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다프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인. 내게 악마를 완전히 소멸 시킬 수 있는 방도가 있네.”
다프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연히 발견한 선조의 검인데 딱 마지막 기회가 있어.”
칼리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악마는 깨어난 직후 가장 약하다고 하네. 나는 그때를 노릴 거야. 분명 성녀는 죽기 직전까지 미지의 존재를 찾기 위해 애를 쓸 것이고.”
“…….”
“내 약속하겠네. 부인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윈터 공작에게 대공의 작위를 하사하고 공작과 소공작의 안전, 부, 명예 모든 걸 약속하겠네. 물론 부인의 안정을 제일 먼저 생각할 거고.”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칼리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프네를 스쳐 가기 직전 멈춰 서서 말했다.
“잘 생각하게.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이를 살리는지.”
다프네는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억누르며 규칙적으로 숨을 내뱉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막 바로 밖에 있는 칼리토의 수하에게 말했다.
“전하께 말해 주세요. 결정에 따르겠노라고.”
“부인, 준비됐습니까.”
“…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어요.”
***
“…그럴 리가요!”
문 너머로 터져 나오는 소리에 세르기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 앞에 선 사용인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저희가 어찌 공작님을 배신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세르기는 회의장 안의 상황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처음 긴급회의를 연 당일, 세르기의 앞으로 수많은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회의에 참석하는 고위 귀족들이 같은 편이 되겠다는 무언의 뜻이었다.
에드먼의 사망에 대한 소문을 흘려 놓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의 해독제만 먹이고 감옥에 처박아 두었던지라 회복하더라도 분명 불구가 될 확률이 높았다.
에드먼의 존재감은 오직 그의 검술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모두가 뚜렷이 기억하는 전쟁 영웅, 소드마스터에 버금가는 실력.
물론 에드먼은 소드 마스터였고 마나가 매우 독특하여 숨기고 있었다는 게 전부 밝혀졌다.
세르기는 손 빠르게 여론을 조정했다. <기억의 기록>을 조작하여 검은 마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렸으나 그동안 쌓인 견고한 명성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순간에 그의 명성을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실패한 것에 속이 쓰렸다.
“세르기 님.”
바로 뒤에 선 노아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세르기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모두 마음을 정한 것 아니었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저희가 어떻게 공작님을….”
“오랜만입니다, 공작.”
세르기는 늘 그렇듯 미소와 함께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대화가 뚝 끊겼다. 세르기는 차갑게 내려앉은 회의장을 가로질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에드먼의 앞으로 다가갔다.
세르기는 예상치 못한 에드먼의 등장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훑었다. 그의 사지는 멀쩡했다.
“…건강해 보입니다.”
“아니길 바란 것 같군.”
담담한 에드먼의 말에 세르기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자 주변 귀족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살얼음 낀 분위기를 뒤로하고 세르기는 비어 있는 상석에 앉았다.
의아하다는 시선이 날아오자 세르기가 아, 하고 작게 탄성 후 말했다.
“폐하께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시어 잠깐 내게 대리인을 요청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직위도 하사하셨고.”
“그럼, 블레드 공작이… 되는…?”
세르기가 옅은 미소로 긍정하자 주변이 술렁거렸다.
재상의 자리로도 모자라 무려 공작위를 하사 받았다. 파격적인 소식이었다. 몇몇은 깨달았다. 세르기가 완전히 황실을 장악했다는 것을.
여러 감정이 뒤섞인 혼란스러움 속에서 세르기와 에드먼은 서로 응시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에드먼은 술렁임이 조금 가라앉자 물었다.
“긴급회의를 연 연유가 무엇인가.”
“요즘 아시다시피 흉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황비님께서 회임도 하셨고, 실은 폐하께서도 올해를 넘기기 힘드십니다. 슬슬 상황을 정리할 때가 왔습니다.”
“…….”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 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에드먼에게 쏠렸다.
“반역자라….”
그 시선이 따가울 법도 하지만 에드먼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흑마법사를 이용해 폐하의 눈앞을 어지럽히고 황실을 혼란에 빠트린 장본인을 황위 계승권자이신 황태자 전하께서 처단하려 한 게 어찌 반역이 되겠나.”
“흑, 흑마법? 지금 흑마법이라고 하셨소?”
“흑마법이라면… 주술사 아니오! 지금 블레드 후, 아니 공작이 주술사와 내통했다는 것입니까, 공작님!”
세르기는 무표정으로 노아에게 손짓했다.
‘아무래도 다 같이 쓸어버려야겠군.’
귀족들이 없다 해도 그의 계획에 해가 되는 건 없었다. 손짓을 뜻을 알아챈 노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모습을 감추었다.
“따로 얘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에드먼은 혼란에 빠진 귀족들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세르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미끼는 충분히 던졌다.
에드먼의 할 일은 완전히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세르기는 에드먼이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에드먼은 평소와 확연히 다른 그의 모습에 생소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확실히 초조해하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나와 손을 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에드먼은 멈칫했다.
이곳에 오기 직전 칼리토가 남긴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세르기 블레드가 공작과 협력 관계를 맺자고 할 수도 있네. 하지만 기억해. 그자의 목표는 공작 부인이야. 마법사를 불러와 텔레포트의 흔적을 추적한 이유도 공작 부인을 찾기 위함이었네.”
에드먼은 뒤이어 자신이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 다프네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던 세르기를 떠올렸다.
세르기와 다프네의 관계는 묘했다. 다프네는 세르기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듯 굴었고 세르기는 다프네를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성녀를 배신하겠다는 겁니까?”
“성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 줄 아십니까?”
에드먼과 세르기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지의 존재입니다.”
세르기는 에드먼의 움찔거린 어깨를 발견하지 못하고 말을 이어 갔다.
“그것으로 악마를 깨운다고 하지 뭡니까. 저도 그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악마를 깨운다면 세상이 멸망할 터인데 그럼 내가 그동안 한 고생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게 되지요. 그래서 나는 성녀를 막을 생각입니다.”
“…….”
“물론 공작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먼이 밀려들어 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찢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이게 뭔가! 왜 안 죽는 것이야!”
“도망쳐!”
“이 괴물들은 뭐야! 블레드 후작! 블레드 후자악!”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들이 자리를 옮긴 곳은 회의장에 딸린 작은 응접실이었기에 문을 열자마자 회의장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수없이 많은 언데드가 들어오고 있었다.
에드먼은 생각할 틈도 없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검은 아지랑이가 그의 발을 타고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허공으로 뻗었다.
하지만 언데드와 사람이 뒤엉켜 있었고 마나는 그렇게 섬세하지 못했다. 언데드를 처리하려면 사람에게도 피해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언데드에게 당하고만 있던 그때, 문으로 들어오던 언데드 한 무더기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누군가 나타났다.
“아버지!"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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