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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38화 (138/145)

138화

귀족들의 눈에는 쿠데타를 일으킨 황태자보다, 칩거 중인 황녀보다 아직 배 속에 있는 황족을 허수아비처럼 다루기 더 쉽게 보일 것이다.

“블레드 후작의 손을 들어 줄 확률이 높다. 귀족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전쟁에서 블레드 후작을 끝내야 해.”

“한데 황비의 배 속 씨가 황족이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래서 황제궁 시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현재 실종 상태더군.”

“…블레드 후작이 손을 쓴 거군요.”

완벽한 함정이다. 빠져나갈 구멍 없이 촘촘하게 만들어진 거미줄에 걸린 벌레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릴수록 거미줄의 주인을 빨리 부르는 셈이다.

하지만 벌레는 운이 좋았다. 거미줄 주인의 신경이 딴 곳으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저희도 마법사를 모집하거나 황궁 마법사를 포섭해야겠습니다.”

마법사는 독립적이다. 황궁 마법사들도 계약직이었고 그들은 늘 갑의 위치였다. 충성심이 없으니 포섭이 성공할 가능성도 높았다. 세르기가 도대체 무엇으로 마법사를 붙잡고 있을지 몰라도 시도는 해 봐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에드먼이 사라진 지 보름이 되던 날. 그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

에드먼이 수도로 돌아오기까지 약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돌아올 땐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했으나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알렉이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를 쉼 없이 달려갔기 때문이다.

천막이 열리자 초조하게 안을 돌아다니던 벤자민과 요한, 뉴벨 남작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각하…!”

최대한 소리를 억누른 외침이 튀어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령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위치와 다프네와 함께 있다는 두 문장이 전부였기에 그들이 오기 전까지 모두가 불안에 떨며 시간을 보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칼리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알렉을 통해 전달했고 그들은 바로 수도로 올라올 수 있었다.

“독을 먹었다. 해독하는 데 시간이 걸려 미쳐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요한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의원을 데려올 것 같은 행동을 취하자 에드먼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다 해독을 했으니 전령을 보낸 것이다.”

“다행입니다. 정말… 그래도 뉴벨 남작 부인께 진찰을 받아 보십시오.”

“그러지.”

“마님은 괜찮으십니까?”

“휴식을 취하러 갔다.”

다프네는 텔레포트를 하자마자 전처럼 기절했다. 단순 기절이었지만 에드먼은 곧바로 벨라에게 다프네를 맡기고 돌아왔다.

“공작!”

그때, 칼리토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괜찮은가!”

“예. 전하께서는 쾌차하셨습니까.”

“나야 진작 회복했지. 걱정 많이 했네.”

칼리토가 자리에 앉자 에드먼을 비롯한 이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재회를 하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공작이 돌아온 기쁨을 좀 더 누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네. 블레드 후작이 일주일 후 긴급회의를 또 열 생각이라는군.”

에드먼은 알렉과 만나 상황을 모두 전달 받았다.

“그 명단에 설마….”

“우리가 포섭한 귀족들도 포함해 있었네.”

“허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가설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세르기는 기어코 칼리토가 포섭한 한 줌의 귀족들마저 앗아 갈 생각이었다.

“움직임이 조급하군요. 그쪽도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닐 것 같습니다.”

에드먼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세르기라면 아주 천천히 먹잇감을 옥죄어 올 게 분명한데 지금 그는 지금 그럴 여유가 없다는 듯이 움직였다.

“확실히 그렇긴 해. 문제라면 우리의 상황이 더 안 좋다는 거지.”

칼리토는 거칠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그동안의 노고를 뜻하듯 푸석해져 있었다.

“황비가 회임까지 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내 입지는 더 좁아졌다. 귀족들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해. 귀족들이 결정을 내리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질 전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만약 귀족들이 결정을 내린다면 전쟁도 치르지 못하고 끝나게 될 것이다.

“…그 귀족들의 명단 말입니다, 전하. 그 안에 제가 있습니까?”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있네.”

에드먼은 고민에 잠겨 테이블을 두들겼다.

규칙적이게 천막을 울리던 소리가 멈춘 순간, 에드먼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각하!”

“세르기 블레드는 내 죽음을 거의 확실시 하고 있습니다. 제가 회의에 참석해 상황을 흩트려 놓고 있다면 황궁에 어렵지 않게 침입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너무 위험한 방법입니다.”

“그대 수하의 말이 맞아, 공작.”

칼리토는 요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언데드 상대하려면 적어도 공작이 필요해.”

“약조하겠습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겠노라고.”

“공작….”

칼리토는 낮게 신음하며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모두 물러가게.”

요한과 알렉은 할 말이 많았지만, 칼리토의 명을 따랐다. 천막 안은 순식간에 칼리토와 에드먼만 남게 되었다.

“…공작.”

“예.”

“그 약조, 지킬 수 있겠나?”

에드먼은 대답 대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이 방도밖에 없습니다.”

“그대 설마…!”

“전하.”

에드먼은 칼리토를 응시한 후 그의 말을 끊었다.

“한 가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말해 보게.”

“다프네를 지켜 주십시오.”

“공작.”

“제 계획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전하와 뜻을 함께했던 공을 치하하며 다프네를 지켜 주시면 됩니다.”

칼리토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진 것은 한참이 흐른 후였다.

“…알겠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조를 지키겠네.”

***

“다프네.”

에드먼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다프네가 에드먼을 보았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에드먼은 입술을 달싹였다. 망설임도 잠시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다프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야기 전해 들었어요.”

“…요한.”

에드먼은 범인을 알아차리자 낮게 읊조렸다.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제가 알려 달라고 귀찮게 굴었으니까요.”

“다프네.”

“영영 말을 하지 않을 셈이었나요?”

다프네는 이상한 기류를 알아차리고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있다고 확신한 채 요한을 찾아갔다. 예상 외로 요한은 순순히 알려 주었다.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다프네는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요한, 왜 내게 다 말해 주나요? 내가 막으면 어쩌려고요?”

“…저는 마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각하를 말리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요한은 덧붙였다.

“상황은 대충 예상이 갑니다. 각하의 회복력이 얼마나 뛰어난데, 보름이면 회복을 하고도 남았겠죠. 마님께서 먼저 돌아오자는 말을 하셨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각하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각하의 전령이 도착하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각하께서 돌아오지 않으셨으면 했다는 것을요. 하지만 우습게도 각하께도 돌아오시니 기뻤습니다.”

요한은 지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희를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그의 표정은 지울 수 없는 씁쓸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는 것 잘 압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해 봤자 마님께 와 닿지 않아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것 또한 변명이 되겠죠. 죄송합니다, 마님.”

다프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알겠다는 대답도,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프네는 요한의 모습을 오래 담다가 돌아갔다.

“다프네, 날 막을 겁니까?”

“막으면요?”

“가지 않을 겁니다. 다시 떠나자 그러면 당장 떠날 수 있습니다.”

에드먼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어쩌면 조금은 절박하게. 도리어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차라리… 그리 말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드먼.”

“그대의 말 한마디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프네는 손을 뻗어 에드먼의 뺨에 조심스럽게 댔다. 항상 눈으로 더듬어 오던 얼굴을 조금씩 매만졌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예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죠?”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데미안과 똑같네요.”

다프네는 조소했다.

“왜 둘 다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행동하나요? 그리고 왜 그걸 나를 향한 속죄라고 생각하죠?”

“…그대가 느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프네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당신을 막지 않을 거지만 떠나자는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에드먼의 얼굴이 아주 잠깐이지만 일그러졌다. 억지로 표정을 편 그가 말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언제… 기억이 돌아왔습니까?”

“…….”

다프네는 조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호수에서 당신이 내게 고백하기 직전에요.”

“…….”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에드먼이 여전히 자신의 뺨 위에 닿아 있는 다프네의 손을 맞잡았다. 다프네는 에드먼에게 잡힌 손을 뺐다.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에요.”

“…….”

“그러니까 우리, 다음에 꼭 만나요.”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나왔다.

에드먼 홀로 천막 안에 덩그러니 남았다. 그는 자신의 뺨을 더듬었다. 다프네의 미약한 온기를, 에드먼은 한참 동안 매만졌다.

그것이 마지막 숨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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