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나흘이 지났다.
하루 동안 앓다가 깨어난 것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다프네는 다시 앓아누웠다. 고열에 시달리고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지만 감기는 진득하게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흘 동안 다프네와 에드먼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다프네는 더는 에드먼의 존댓말이 어색하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다프네는 이따금 그의 이름을 불러 놓고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마음이 불편했을 뿐이지 그의 이름을 처음 불렀을 때부터 느낌이 익숙했다. 마치 예전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다프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결혼식은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이전에 첫 만남도, 두 번째 만남에서도 결단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은 적도 없었다.
다프네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애써 모른 척하며 넘겼다. 그 기시감을 깊게 파고들기엔 다프네는 지금의 평화로움이 좋았다.
에드먼은 그녀의 생각보다 다정했다. 놀랍게도, 정말 그랬다.
다프네가 기침 한 번 하면 어떻게 들었는지 아래층이 있다가 후다닥 올라와 몸 상태를 살폈고 모든 게 그녀가 우선순위였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우선순위였던 적 없는 다프네는 그것이 어색했다.
다프네가 자신을 꺼린다는 것을 알아챘을 게 분명한데도 에드먼은 다프네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게 몰래 그어 놓은 선을 절대 넘지 않았다.
마치 나를 잘 아는 것 같아. 다프네는 에드먼을 볼 때마다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프네는 피식, 조소를 터트렸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저 세르기 블레드의 여동생. 혹은 블레드 가문의 여식 정도로만 알고 있었겠지.
다프네는 알려진 게 없었다. 세르기가 다프네의 외부 활동을 막았기 때문에 당연하였다.
기대하지 말자. 희망 따윈 가지지 마. 다프네는 스스로 주문을 걸듯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거울 속에 갈색 머리 여자는 단출한 외출복 차림을 하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외모였다.
그나마 볼 건 녹색 눈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눈마저 싱그러운 녹음이 아닌, 늪을 연상케 하는 거무튀튀한 색이었다.
다프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괜한 옷소매만 보며 만지작거렸다.
기대하지 않고 희망을 품지 않으려고 해도 눈 속에서 반짝이는 기대가 읽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프네는 인정했다. 그래, 나는 꽤 신이 났다.
오늘은 드디어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소풍이라고 해 봤자 에드먼이 우연히 발견한 호수 근처에서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해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다프네는 처음이었다.
다프네는 심호흡을 하며 기대감을 털어 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다프네는 건조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만족했다.
“다 됐습니까.”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준비를 마친 에드먼이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새끼 개가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네.”
다프네는 에드먼의 곁에 섰다.
***
목적지는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말주변이 없는 다프네와 에드먼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둘은 조용히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거닐었다.
다프네는 이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먼과 단둘이 있는 건 그녀의 기억보다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호수에 도착했다. 다프네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에드먼은 바구니에서 돗자리를 꺼내 바닥에 깔고 점심을 꺼냈다. 다프네는 머뭇거리다가 돗자리에 앉았다.
에드먼은 이틀이 한 번 마을에 내려가 재료를 사 와 간단한 음식을 만들었다. 그것들은 정말 ‘간단한’ 음식이다. 건더기가 적게 들어간 수프, 잼을 바른 빵, 버터를 발라 가볍게 구운 빵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바구니에 꺼낸 것은 속이 꽉 찬 샌드위치, 오렌지주스, 새빨간 방울토마토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샐러드였다.
“오늘 아침에 사 온 건가요?”
“…요리에 소질이 없습니다. 직접 만든 음식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어쩔 수 없이 만드는 방법을 터득한 간단한 음식들이고요.”
둘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에드먼이었다.
그는 홀로 잔디를 뒹굴며 노는 새끼 개를 보며 물었다.
“…아니요.”
다프네는 맨발을 잔디 위에 올려놓은 채 발을 꼼지락거렸다. 발바닥 아래 깔린 잔디의 간지러움이 기분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언제 돌아갈 수 있나요?”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돌아가고 싶으냐니? 에드먼의 물음은 마치 지금 이대로 있자는 말처럼 들렸다.
다프네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돌아… 가야죠. 원래 자리로요.”
입 안이 모래라도 씹은 것처럼 까슬까슬했다. 다프네는 괜히 목을 매만지며 에드먼의 시선을 피했다. 다프네는 이상하게 그의 눈을 마주 보기 힘들었다.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회피하고 싶었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프네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것이 분명 티가 났을 텐데 에드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호수 위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 가족. 솔솔 불어오는 바람. 바람의 지휘에 따라 살랑거리는 나뭇잎. 화음처럼 간간이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 따스한 햇볕, 맑은 공기, 고요하고 평화로운 주변.
다프네는 눈을 감고 있는데도 자신을 응시하는 에드먼의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무시하며 들리는 소리, 느껴지는 바람에 집중했다.
머지않아 다프네가 눈을 떴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은 이내 에드먼이 꺼낸 말로 인해 당황으로 물들었다.
“윈터가가 위태롭다는 건 거짓이었습니다.”
“…네?”
고개를 젖혀 햇볕을 쬐고 있던 다프네가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말에 그의 눈을 회피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프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다프네의 시선이 에드먼의 어깨로 향했다. 흰 와이셔츠 아래로 어깨에 두른 붕대가 보였다.
“이 정도 상처는 금방 낫습니다.”
“그런데 왜….”
“상처가 나을 때쯤 다시 손으로 터트렸습니다.”
“…왜요?”
혼란스러웠다.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 가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지만, 간신히 나온 말은 한 단어였다. 왜? 도대체 왜?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요.”
“…….”
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생활이 달콤했다. 매일 두려움에 떨며 달콤함에 환희에 젖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에드먼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는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프네는 숨을 멈추고 에드먼을 응시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습니다.”
지금까지 쭉.
지독히도 쓴 달콤한 고백을 하며, 남자는 부서져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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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에드먼은 무의식중에 눈을 깜빡이는 것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방에 있었고 창밖은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두워져 있었다. 에드먼은 침대에 앉은 채로 기억을 뒤집었다.
아침에 마을로 내려가 음식을 사고, 1층에서 다프네를 기다렸다. 마을에서 구해 온 옷을 입은 다프네는 아름다웠다. 그녀가 입은 옷 중 가장 값싸고 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옷임에도 눈이 부셨다.
다프네와 함께 나란히 걸어 호수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다프네는 무릎을 끌어안은 상태로 고개를 젖혀 햇볕을 쬈다. 따사로운 햇살이 다프네의 하얀 얼굴 위에 내려앉고 바람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윈터가가 위태롭다는 건 거짓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간 말이었다.
에드먼은 그것을 다시 주워 담지 않았다. 머릿속은 새하얗기만 한데, 그는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술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대를 사랑합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습니다. 지금까지 쭉.”
다프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프네는 어딘가로 향했다.
혹시나 그의 고백을 듣고 떠나는 걸까. 그러나 설령 다프네가 진짜 떠난다고 해도 에드먼에게 그녀를 잡을 권리는 없었다.
에드먼은 떠나는 다프네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저택이었고 다프네의 방문 앞이었다. 에드먼은 문 너머 옅게 들리는 숨소리에 안도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일 전령을 보내기로 했다. 위치도 알릴 겸 해독제를 보내 달라는 말도 적어야 했다. 에드먼은 전령에 쓸 내용을 정리하며 애써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에드먼.”
다프네의 목소리에 에드먼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다 하다 환청이 들렸다.
“에드먼.”
아까보다 목소리가 더 뚜렷했다.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다프네가 서 있었다.
다프네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해 있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날 사랑한다고 했죠.”
“늦었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더 이상.”
“당신과 이렇게 몸을 맞붙여도.”
“떨리지도, 혐오스럽지도 않아요.”
다프네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다프네는 에드먼에게 다가오며 그의 목에 손을 휘감는 동시에 귓가에 속삭였다.
“증명해 봐요.”
내가 그걸 느낄 수 있을 만큼.
곧이어 둘의 입술이 깊숙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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