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러니까….”
기나긴 에드먼의 말이 끝나고 다프네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했다.
“북부로 내려가는 길에 습격을 당했고, 공작님께서 혼절한 저만 간신히 챙겨서 도망쳤고, 노부부가 쓰러진 공작님과 저를 간호해 주셨고, 그 두 분은 현재 여행을 가신 상태이며,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공작님과 제가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는 건가요?”
구구절절한 설명을 한 문장으로 만들자 에드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죠?”
다프네는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보름. 보름입니다.”
“보름….”
보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다프네는 자신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믿고 있었기에 몽롱하여 사고 회로가 더딘 머리도 그 탓이라 생각했다. 에드먼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으나 다프네는 그것을 하나하나 다 지적할 만큼 머리가 맑지 않았다.
결국 다프네는 굵직한 몇 개의 의문만 내던졌다.
“왜 공작님의 수하들이 찾지 못하는 거죠? 무슨 상황이 나아진다는 건데요?”
에드먼은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자신의 웃통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속살에 다프네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이, 이게 무슨…!”
다프네는 당장 옷을 내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의 어깨에 둘러진 붕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특수한 마법이 걸린 무기에 당해 출혈이 더디고 치료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대로 헝겊을 두껍게 감싼 상처 부위는 희미하지만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윈터가의 상태는… 사실 그리 좋지 못합니다.”
다프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가 아는 윈터가는 권력의 정점에 선 가문이었다. 에드먼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는 끝난 지 얼마 안 된 전쟁의 영웅이다.
아직 전쟁의 피해가 다 회복되기 전이었기에 그가 가는 곳마다 평민과 귀족 할 것 없이 경외와 존경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칭송했다.
그런 윈터 가문이, 사실은 상태가 좋지 않다니?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제 이런 상태로 돌아가면 윈터가는 큰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인지 언제나 도자기처럼 한 가지 표정이었던 에드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다프네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의문을 해결한 다프네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던 기시감을 알아차리곤 에드먼을 보았다.
“그런데 왜 제게 존댓말을 하시나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뭐가….”
다프네는 왠지 모르게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는 에드먼의 얼굴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피로연이 끝났을 때.”
“내 이름을 불러. 그러다가 그대와 내 사이를 누군가 의심할 것이라 생각한 적 없나.”
작은 기억 쪼가리가 떠올랐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표정 변화로 그녀가 기억해 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난 그대의 이름을, 그대는 내 이름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기억나요.”
“사고의 충격으로 현재 모든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겁니다. 천천히 회복하면서 모두 기억하면 됩니다.”
“네….”
에드먼은 부드럽게 말하며 다프네의 어깨를 약한 힘으로 눌렀다.
다프네는 에드먼의 말투가 굉장히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누웠다. 푹신한 침대에 눕고 나서야 아차, 싶어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 짧은 사이에 누적된 피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자 에드먼이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
“푹 쉬세요.”
탁.
“후.”
에드먼은 자신이 내팽개친 바구니를 챙겨 1층으로 내려왔다.
그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에드먼은 혹여 심장 소리가 들릴까,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한 번 꾹 눌렀다.
다프네에게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에드먼은 환한 빛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웬 숲 한가운데였다.
에드먼은 자신의 몸이 반 이상 회복했다는 것을 깨닫고 품 안에서 정신을 잃은 다프네를 응시했다.
“…하.”
무언가를 깨달은 에드먼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황태자에게 납치당해 머물렀던 방에 가 보았다. 그곳에 한 책을 발견했다. 온전한 <기억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에드먼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목차를 읽었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옷소매를 들춰 보았다. 뜨거운 물이 닿았었던 곳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프네가 상처를 깊게 내던 허벅지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숲의 신전에서 쓰러졌을 때 마지막 기억은 다프네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며 피를 넘기는 것이었다.
에드먼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더듬었다. 흉터 없이 깨끗한 살이 만져졌다.
빠른 치료, 남을 치료하는 능력.
다프네는 미지의 존재다.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미지의 존재는 영웅들의 방패로 쓰였다.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때, 에드먼의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이 떨어졌다. 뉴벨 남작 부인에게 주었던 약과 똑같은 것이었다. 기억을 잃게 만드는 약. 에드먼을 다프네를 마차에 태워 보낸 그날부터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있었다.
만약 다프네가 모든 기억을 잃는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추악한 욕심이 꿈틀거렸다.
“…….”
에드먼은 손을 뻗어 병을 쥐었다. 그리고 마개를 꺼내 다프네의 입 안에 떨어트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에드먼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손을 털었다. 약의 5분의 1은 이미 다프네의 입 안으로 넘어간 후였다.
딱 30년 정도의 기억을 잃게 만드는 양이었기에 먹은 양으로 따졌을 때 다프네는 약 4~6년의 기억을 잃었다.
에드먼은 억지로 생각을 이어 갔다. 오히려 잘됐다 자위하며 몸을 옮겼다. 운명의 장난이지 그들이 떨어진 장소는 에드먼이 다프네가 지낼 곳으로 정해 두었던 남부 지역이었다. 에드먼은 평화로운 2층짜리 저택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지옥이라면, 그는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는 단 며칠의 달콤한 꿈을 만끽하기로 했다. 단 며칠 정도의 달콤한 꿈. 에드먼은 그것으로 족했다.
정말로.
정말.
정말….
***
다프네는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검은 구슬 같은 것을 멍하니 보았다.
“이게… 뭔가요?”
“갭니다.”
커다란 두 귀를 축 늘어트린 채 순한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마을에 내려온다던 에드먼이 손에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개라는 건 나도 알아요. 그러니까 이걸 왜….”
“마을 골목에서 쓰레기를 뒤지고 있길래 데려왔습니다.”
부드러운 옅은 갈색 털 너머로 앙상한 뼈가 보였다.
“우리가 돌아가면 이 개는 어쩌려고요?”
“입양을 보낼 생각입니다.”
“개 키워 봤어요?”
“애는 키워 봤습니다.”
막힘없이 말하는 모습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것은 다프네였다.
다프네는 어느새 집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새끼를 내려다보았다.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저 부드러운 털에 저절로 손이 갔다.
끼잉… 낑….
손이 움찔거리며 일부러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달싹이려던 찰나. 머릿속을 파고드는 개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프네는 동물을 좋아했다. 식물도 좋아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풍스러운 것을 좋아했기에 일부러 낡고 오래된 저택에서 지냈다. 그 저택에는 개구멍이 있었고 들개가 새끼를 낳았다.
정원사는 주인들 몰래 새끼들을 돌보았고 다프네가 그것을 발견했다. 다프네는 보름에 딱 한 번 정원 구석진 곳으로 가 멀리서 새끼들을 구경하다 오곤 했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흐르자 경계하던 새끼들은 다프네가 오면 아는 체를 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끔찍한 실험 속에서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다프네의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날도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강아지를 보러 가는 날과 겹쳤던 실험이 갑자기 취소되었다. 의아하던 다프네는 이내 새끼들을 보러 갈 생각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갔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무표정으로 새끼들을 죽이는 세르기의 모습을.
“이런.”
그의 앞에 축 늘어진 새끼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다만 그의 손안에 있는 새끼는 살아 있었다. 형제들 중 가장 작게 태어났으며 유난히 다프네를 따르던 새끼 강아지.
“오라, 버니.”
제발 살려 주세요. 말을 하기도 전에 세르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르기는 다프네의 뺨에 튀긴 피를 깔끔하게 닦아 냈다.
“마음을 주지 말라고 했잖아. 게다가 이런 하찮은 미물에게는 더욱더.”
“…네.”
“…….”
“다프네!”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에드먼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다프네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에드먼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프네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프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뒤돌았다.
“피곤해요. 먼저 잘게요.”
다프네는 끝까지 비틀거리지 않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잠을 자고 싶지 않았다. 분명 꿈속에서 피를 묻힌 채 낑낑거리는 새끼 강아지들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다프네는 고집스럽게 눈을 감았다.
다프네에게 악몽은 익숙한 것이었기에. 다프네는 오늘도 그저 눈을 감고 자신에게 다가올 악몽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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