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누군가는 남아야 합니다.”
“내가, 내가 남으마.”
“어머니.”
데미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용서되지 못할 것을 압니다. 죄송합니다.”
“…….”
“제 잘못도 있지만… 어머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전대 공작의 무덤에서 따 온 꽃에 안 좋은 기운이 묻어 있었다고, 어머니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것의 정체를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질책하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
“이제 됐습니다.”
데미안은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다프네와 데미안의 침입을 알아챈 이들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는 소리였다.
“저기 있다!”
“어머니.”
데미안은 한 번 더 다프네를 불렀고 그녀는 답했다.
“…그래.”
그것이 정답이었는지 데미안은 미소를 지었다. 다프네에게 처음 지어 주는 미소임을 알기에, 다프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데미안은 더욱더 밝게 웃었다.
“전 단 한 번도 당신을 미워한 적 없습니다.”
찌이익. 데미안은 다프네의 손을 잡고 스크롤을 찢었다.
그의 미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다프네는 제 발아래 환한 빛이 터져 나오자 그제야 스크롤이 찢어진 것을 깨달았다. 다프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물들었다.
다프네가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환한 빛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다프네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마법이 시전 되면서 웅웅, 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걸까.’
데미안은 다프네의 입 모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다프네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마법이 시전 된 것이었다.
“하….”
뒤늦게 도착한 기사들은 텔레포트를 처음 접하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이내 기사들은 칼을 겨눈 채 에드먼을 에워쌌다.
“데미안 윈터는 반역자의 탈옥을 도운 죄로 즉시 체포한다!”
“뭐?”
바네사는 소식을 늦게 접했다.
그녀가 휙 뒤를 돌자 머리를 빗겨 주던 하녀가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빗에 얼굴이 긁힐 뻔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네사의 시선은 보고를 마친 자신의 수하에게 박혀 있었다.
바네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확실해?”
“예, 예?”
“확실하냐고!”
“아, 예! 확실합니다!”
바네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것과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이 열리면서 다른 이가 들어오는 것이 더 빨랐다.
멈칫한 바네사는 들어온 이가 자신이 찾던 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지었다.
“하, 지금 뭐 하는 건가요. 후작!”
세르기 역시 소식을 접한 건지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소공작이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지만 성녀님께서도 어찌 된 일입니까. 소공작은 분명 흑마법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흑마법에 걸린 이는 자신에게 그것을 건 주술사에게 결코 손대지 못한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세르기가 데미안에게 흑마법을 건 주술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소공작은 애당초 흑마법에 걸린 적이 없으며 걸린 척해 온 겁니다.”
세르기는 바네사를 보며 진실을 알게 됐다.
“성녀님은 그걸 알면서도 그저 지켜보고 계셨던 거군요.”
“피차일반이군요.”
바네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세르기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대마법사가 만든 것이라 추적을 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합니다. 그전까지 움직여 봤자 좋을 게 없으니 잠시 전쟁을 멈춰야 합니다.”
바네사는 세르기를 유심히 살폈다.
바네사는 짧은 시간 안에 상대의 약점과 역린을 발견하는 데 탁월하다. 세르기는 몇 달 동안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한 상대이다.
“…당신, 설마.”
바네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공작 부인이 왜 그대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는지 알겠네요.”
“무슨 말입니까.”
미간을 좁히는 모습에 바네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누이는 더 이상 공작 부인이 아닙니다. 둘은 이혼했습니다.”
“뭐, 가족사에 내가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죠.”
바네사는 아직 흥분하여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를 마셨다.
“그나저나.”
바네사는 세르기를 위아래로 훑었다.
“평소와 뭔가 다른데요. 뭘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닌데. 이상한데….”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 순간 방 전체의 온도가 뚝 떨어지고 한기가 돌았다.
보기만 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왠지 모를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물건이었다. 마치 검은 숲 안에 있던 신전의 제단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겨우 고개를 돌린 세르기가 물었다.
“악마의 심장이에요. 제 아버지가 발견한 것이지요.”
바네사는 악마의 심장을 들어 올렸다. 이제 보니 아주 미세하고 느리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방의 온도는 뚝뚝 떨어지고 한기가 짙어졌다.
바네사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방의 온도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한기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건 원래 뛰지 않았어요. 근데 후작이 들어온 후에 뛰기 시작했죠. 악마의 심장은 오로지 단 하나, 천적에게 반응해요.”
“천적이라면… 천족은 멸종했으니 미지의 존재를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그 말은 즉 세르기에게 미지의 존재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세르기는 품 안에 있는 손수건을 떠올렸다. 다프네의 피를 닦았던 피. 그것을 떠올린 세르기는 일순 든 생각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글쎄요. 아까 잠깐 상황을 보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 곳으로 갔습니다. 그 반대편에 미지의 존재가 있었을 수도 있겠군요.”
“흠, 그런가….”
미지의 존재도, 악마의 심장에 대한 자료와 정보가 없는 바네사는 꺼림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네 번째 전쟁은 여기서 멈추는 게 좋겠어요. 미지의 존재가 죽으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소공작의 처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데미안의 몸 안에 흐르는 피를 다 말하지 못하지만 혈통은 확실히 좋아요. 미지의 존재를 잡은 날, 데미안을 악마에게 바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동안 ‘아들아, 아들아’ 했던 것이 무색하게 바네사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데미안의 죽음을 말했다.
“아, 마린다는 어떻게 되고 있죠?”
“반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 속의 씨는 잘 크고 있고 마린다의 몸은 언데드입니다.”
“그 씨를 이용하도록 해요. 귀족들을 그걸로 포섭하세요.”
“예, 그러죠.”
차차 계획을 세우던 와중이었다.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노아? 무슨 일입니까.”
세르기는 제 수하를 향해 말했다. 그는 허리를 푹 숙였다.
“뮤트 백작이 서부의 지원군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
다프네는 따사로운 햇빛에 눈을 떴다.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고 부드럽게 부는 바람이 다프네의 헝클어진 머리를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다프네는 상체를 일으킨 채 창문 너머의 파란 하늘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의 풍경을 보았다. 우거진 나무. 작은 정원. 나무 울타리. 텃밭 옆에 작은 축사. 그 위를 평화롭게 쬐어 주는 햇살.
“…다프네?”
다프네는 뒤에서 문이 열리는 것도 듣지 못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에드먼?”
사후 세계가 아니었나? 다프네는 당황하는 것도 잠시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흐렸다. 도무지 떠올리려 해도 누군가 안개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흐릿했다. 떠오르는 건 그저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뿐. 다프네는 두통이 밀려오자 머리를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머리가 아픕니까?”
에드먼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다프네에게 달려왔다. 그에게 반쯤 기댄 채 침대에 앉은 다프네는 에드먼을 향해 멍하니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이상하다. 다프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 속보다 에드먼은 나이가 들어 보였다.
“분명 결혼식 후 북부로 향하는 마차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낯선 곳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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