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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32화 (132/145)

132화

툭, 툭.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카펫 위에 떨어졌다. 붉은 웅덩이가 서서히 커졌다. 에드먼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커다란 웅덩이가 생기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의 상체가 무너졌으나 시선은 여전히 다프네를 향해 있었다. 에드먼은 피로 범벅된 입술을 뻐끔거렸다.

‘도망… 쳐….’

다프네는 더듬더듬 그 말을 읽었다.

“…아.”

다프네는 비틀거리며 에드먼에게 향했다.

“누이.”

그러나 어정쩡하게 허공을 떠돌던 손을 세르기가 낚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에드, 에드먼.”

다프네는 에드먼의 이름을 멍하니 불렀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는 세르기의 말소리에 그대로 묻혔다.

“아아, 누이. 결국 그에게 독을 먹인 거야?”

아니야, 아니, 아니야…. 다프네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세르기는 그런 다프네를 품에 안은 채 어릴 적 이따금 했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다프네는 그것을 쳐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에드먼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하지만 세르기는 놔주지 않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찻잔을 바꾼다는 생각 즈음은 내가 예상 못 했을 것 같아?”

바르작거리던 몸부림이 멈추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세르기를 보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다프네가 에드먼과 자신의 찻잔을 바꾼 것을.

다프네는 독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독을 먹는다 해도 해독할 수 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웁.”

다프네는 입을 틀어막았다. 뜨겁고 따가운 느낌이 역류하는 것과 동시에 피가 울컥 쏟아져 내렸다. 다프네는 덜덜 떨리는 손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세르기는 두 찻잔 모두 독을 넣은 것이었다.

“…다프네.”

잔뜩 쉰 에드먼의 목소리에 다프네가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으나 세르기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니.”

한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에드먼의 모습으로 세르기가 혀를 찼다.

다프네는 고작 찻잔을 두 모금 정도 마셨지만 에드먼은 모두 마셨다. 몇 배나 많은 양을 먹었음에도 에드먼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다프네는 각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야가 흐릿해졌다. 세르기는 그것을 눈치채고 다프네를 자신에게 기대게 만들었다.

“쉬이.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누이. 내가 누이를 죽게 놔둘 리 없잖아. 윈터 공작도 신경 쓰지 마. 죽진 않을 테니까.”

세르기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다프네는 그것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기사들의 손에 제압되는 에드먼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공작을 지하에 가둬 놔라.”

세르기의 말을 마지막으로 다프네는 이내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헉!”

수면 아래를 부유하는 몸을 누군가 확 끌어당긴 것처럼 정신이 확 돌아왔다. 다프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익숙한 천장임을 확인한 다프네가 상체를 재빨리 일으켰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몸 전체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다프네는 본능적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먼.’

다프네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 제 시야에 있던 에드먼을 떠올렸다. 다프네보다 몇 배나 되는 양의 독을 마신 에드먼은 분명 상태가 안 좋을 것이다. 해독제를 바로 먹은 다프네도 반나절이 훌쩍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어쩌면 에드먼은….

머리를 거칠게 흔든 다프네는 곧바로 침대에서 벗어나 문고리를 붙잡았다.

덜컹.

싸한 불안감이 다프네의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안 돼.”

덜컹, 덜컹.

“안 돼, 안 돼….”

덜컹, 덜컹, 덜컹, 덜컹.

다프네는 열리지 않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고리를 얼마나 세게 쥐고 흔든 것인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다프네는 그 고통을 모르는 듯 붉게 달아오른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쾅!

다프네는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쾅! 쾅!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다프네는 힘이 빠지려는 주먹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쾅! 쾅! 쾅!

아무리 해독을 했다지만 한 번 독이 몸 전체를 돌았기에 다프네의 체력은 평소보다 반밖에 안 되었다.

그런 상태로 계속 주먹을 휘둘렀으니 팔이 빠질 것 같았으나 다프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휙.

다시금 주먹을 휘둘렀으나 허공을 가로질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프네는 환한 빛에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쯧.”

문을 열고 들어온 세르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다프네를 지나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다프네는 순식간에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어났어야 했는데. 저 문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살아 있어.”

줄곧 문에 박혀 있던 시선이 돌아갔다. 누가 살아 있냐는 멍청한 질문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다프네는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한, 한 번만…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러면….”

“다프네.”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그에게 모든 걸 고했어요. 이혼 서류에 서명도 받아 냈고 확실히 끊어 냈어요.”

“끊어 내?”

세르기는 허둥지둥 이어지던 다프네의 말을 끊었다.

다프네는 자신의 마음을 들춰 봤을까, 두려움에 입을 다물었다.

“공작은 아닌 것 같던데.”

다프네가 의식을 잃고 세르기의 품에서 축 늘어졌을 때, 기사들에게 제압당했던 에드먼이 순간 그에게 달려들었다. 치사량에 준하는 양의 독을 먹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하지만 검을 들 정도는 아닌지 오러를 풀었다. 검은색 아지랑이가 자신을 제압하던 기사들을 재로 만들고 세르기에게 달려들었다.

곧 에드먼은 세르기의 품에 있는 다프네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오러가 희미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기사들에 의해 에드먼은 다시 제압당한 채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다프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누이.”

세르기는 마치 키우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다프네의 머리를 매만졌다.

“말을 잘 들어야지. 그러면 한 번쯤은 만나게 해 주지 않겠니. 방에만 얌전히 있으면 이 오라비가 다 알아서 해 주마.”

다프네는 네, 하고 얌전히 대답하며 자신의 몸에 힘이 빠져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생각했다.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다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세르기를 밀쳐 냈을 테니까. 그럼 그것이 세르기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되면서 영영 에드먼을 만나지 못하게 됐을 수도 있었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다프네는 어두운 방 안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

ㅎㅂㄹㄱ

달그락.

다프네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잠에 들 수 없어 눈만 감고 있었기에 작은 인기척이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다프네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그락.

문과 마찬가지고 굳게 닫혀 있던 창문에서 난 소리였다. 그것이 바람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다프네는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와 주춤거리며 창문으로 향했다.

“누구….”

순식간에 바람이 들어왔다.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창문에 걸터 선 이는 익숙한 이였다.

“…데미안?”

“어머니.”

데미안은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프네를 위아래로 살폈다. 다프네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데미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사하시군요….”

다프네가 독을 먹고 쓰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자신이 세운 계획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깊은 새벽이 되고 나서야 데미안은 움직였다.

마주한 다프네는 창백하다는 것을 빼면 평소와 같았다. 데미안은 곧바로 손을 뻗었다.

“아버지께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다프네는 그 손을 맞잡았다.

데미안을 끌어안은 다프네는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주변이 휙휙 바뀌는 것을 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축축한 한기가 몸을 휘감는 것과 동시에 데미안이 다프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착했습니다.”

다프네는 조금 비틀거리며 바닥을 디뎠다. 차가운 바닥에 발을 움츠리던 다프네는 에드먼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에드먼…!”

정신을 잃은 에드먼의 몸을 돌리자 아직 마르지도 않은 피가 다프네의 손을 적셨다.

“이것을 찢으면 이동할 수 있습니다. 추적이 따라붙지 않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데미안은 다프네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스크롤?”

마법을 담을 수 있는 종이를 만드는 건 대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능력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왜 주는 것인지…. 다프네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이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신발을 벗어 다프네의 발에 신겨 주었다.

다프네는 그의 손이 멀어지기 전에 붙잡았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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