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오랜만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방금까지 새하얗게 변한 머리를 열심히 굴린 것이 무색하게 말이 튀어 나갔다.
에드먼은 곧바로 다프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다프네는 멀쩡했다. 다친 구석도 없고 혈색도 괜찮았다. 에드먼은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겨우 입 안으로 삼켜 넣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에드먼은 식은땀으로 가득한 손바닥을 문질렀다.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두 모금 그리고 바닥을 보일 때까지 모조리 삼켜 넘겼다.
진정이 조금 되는 것 같았기에 에드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함께 갑시다.”
딸깍. 다프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줄곧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어디로요?”
“…….”
다프네가 한 질문은 에드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디라니.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에드먼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거렸다.
다프네는 옆에 두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입술만 달싹이던 에드먼이 제 앞에 놓인 서류를 응시했다.
이혼 서류장.
“이 말을 너무 늦게 한 것 같아요.”
“…….”
“이혼해요, 우리.”
에드먼과 다프네의 눈이 마주쳤다.
“알겠습니다.”
에드먼은 깃펜을 들어 곧바로 자신의 서명을 새겨 넣었다.
허리를 숙인 탓에 에드먼은 다프네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프네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차분히 호흡했다. 에드먼이 허리를 들어 올리기 전 간신히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다프네는 에드먼의 서명을 가만히 보다가 서류를 잡아당겼다.
“대신.”
하지만 에드먼의 손에 저지당했다. 다프네는 움찔하는 것도 잠시 서류가 찢어질 듯 팽팽해지자 결국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나와 함께 가는 겁니다.”
“…어딜요.”
“다프네.”
“대체, 어딜 함께 가자는 건가요.”
다프네의 입가에 피식, 조소가 스며들었다.
“북부? 아니면 수도에 있는 저택?”
“…….”
“그것도 아니면 나 홀로 남부에서 지내라는 건가요? 모든 걸 잊은 채로?”
에드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프네는 자신이 한 말 중에 답이 있다고 확신했다.
“당신이 이곳에 서명을 함으로써 우리는 남이에요, 에드먼. 아, 아니지. 우린 원래 남보다 못한 사이였죠.”
내가 그걸 까먹었네요.
다프네는 중얼거리며 서류에 힘을 주었다. 팽팽하던 것이 무색하게 서류는 금방 다프네의 손안에 들어왔다.
“다프네.”
“하, 에드먼.”
다프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5년 동안 서로에게 상처만 줬어요.”
다프네는 차근차근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당신과 함께 간다고 지난 5년과 다를 게 있을까요? 우린 변하지 않았어요. 나도, 당신도 그대로일 뿐이에요.”
다프네는 서류를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지난 5년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다신 만나지 말아요, 우리.”
제발.
다프네는 지금 자신이 한 말 중 가장 진실된 말을 속삭이며 몸을 돌렸다.
“아뇨, 바뀌었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 문고리에 손을 올렸을 것이다.
멈칫한 다프네는 에드먼에게 보이지 않는 입술을 한 번 꽉 문 후 허공으로 뻗은 손을 움직여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알면서 왜 모른 척하십니까.”
다프네는 무시했다.
뚜벅, 뚜벅.
자신의 심장을 떨리게 했던 심장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무시하고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꺼운 문을 당기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했다.
끼익. 기름칠한 문이 부드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안도하며 다시금 손에 힘을 주었다. 두꺼운 문이 열리고 아주 작은 문틈이 생긴 순간.
쾅!
다프네는 눈을 굴렸다. 작은 문틈을 없애 버린 원인인 커다란 손은 자신의 바로 뒤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다프네는 저 흉터투성이인 손이 의외로 높은 온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돌처럼 딱딱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왜 모른 척하는 겁니까.”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목덜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다프네.”
스르륵. 문에 놓여 있던 손이 아래로 흘러내려 문고리를 쥔 다프네의 손을 덮었다. 다프네는 자신의 창백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손등을 멍하니 응시했다.
침대 위가 생각났다. 그는 뒤에서 손을 뻗어 이렇게 자신의 손을 감싸 쥐곤 했다. 그것이 습관인 것처럼, 이렇게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다프네의 손을 움켜잡고….
“다프네.”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
다프네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휙 돌았다. 예상대로 그는 바로 뒤에 있었다. 다프네의 큰 몸짓에 뒤로 물러날 법도 하지만 에드먼은 그러지 않았다.
“윽.”
다프네는 크고 급하게 도느라 에드먼의 단단한 가슴팍에 한 번 부딪히고 딱딱한 문에 한 번 더 부딪혔다. 입술 사이로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다프네는 안도했다. 걱정과 다르게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고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고, 냉정했다.
“말했잖아요.”
다프네는 턱을 치켜들고 에드먼의 눈을 그대로 직시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다프네, 난 그대를….”
“아니.”
다프네는 이어지려는 에드먼의 말을 그대로 끊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해요.”
다프네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먼저 가까이 다가온 것은 에드먼이었음에도 다프네가 다가오자 그는 곧바로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다프네는 에드먼이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게 셔츠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동시에 앞으로 향했다. 둘의 몸이 한 번 부딪치고 그 반동으로 살짝 멀어졌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가까웠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정도로.
“당신과 이렇게 몸을 맞붙여도.”
“…….”
“떨리지도, 혐오스럽지도 않아요.”
다프네는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셔츠를 움켜쥔 손에 힘을 풀고 이마를 툭, 그의 가슴팍에 댔다. 그래야 엉망이 된 표정을 숨길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쿵, 쿵, 쿵. 빠른 심장 박동이 이마로 전해 왔다. 다프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박동이었다.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다프네의 심장은 저렇게 고장 난 듯 뛰었다. 다프네는 혹여 제 박동이 전해질까 맞닿은 가슴을 살짝 땠다.
떨림을 숨기지 못한 불안정한 숨소리가 머리를 간지럽혔다. 다프네는 그 모든 걸 무시했다. 빠른 심장 박동, 불안정한 숨소리, 잘게 떨리는 몸.
“제발 그만해요.”
짝!
박수 소리가 공기를 가르는 것은 그때였다.
다프네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다프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오라버니.”
“다프네.”
무표정을 한 세르기는 다프네를 빤히 응시했다. 그 모습에 다프네는 불안감을 느끼며 상황을 되짚었다.
그의 신경을 거스를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세르기는 기분이 상한 듯 습관처럼 짓고 있던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이리 와.”
아….
다프네는 그제야 큰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에드먼의 손을 발견했다.
“놔요.”
세르기가 앞에 있자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가 에드먼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다프네는 불안에 떨며 세게 몸을 움직여 에드먼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다프네가 다급히 걸음을 옮기는 순간 탁, 손목이 잡혔다. 그라면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움켜쥘 수 있으면서 공기를 잡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
“다프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
“아니요.”
그렇기 때문에 다프네는 더욱 굳은 얼굴로 단호히 말했다.
“끝났어요. 말했잖아요.”
이제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고.
“그냥 내 앞에서 사라져요. 다신 나타나지 마요.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해도 안 좋은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프네는 거칠게 손목을 털어 반쯤 돌아간 몸을 세르기에게 돌렸다. 그리고 착한 아이처럼 미소를 지었다.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다프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다프네는 무시하며 자신에게 손을 뻗은 세르기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손을 움켜쥐기 직전.
쿵.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톡 쏘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불길한 느낌에 겨우 고개를 돌린 다프네는 눈을 깜빡였다.
다프네는 처음 보았다. 에드먼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정확히는 쓰러지는 것을. 에드먼은 반쯤 쓰러진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붉은 피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바닥 사이로 떨어져 카펫을 적시고 있었다.
붉게, 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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