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언제 급습이 올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하루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쇠약해진 뉴벨 남작 부인은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뉴벨 남작 부인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며칠이나 훌쩍 지난 후였다. 적량을 모르는 다프네는 병에 있는 약을 모두 먹였고 나이가 많은 뉴벨 남작 부인은 며칠 동안 약 기운 탓에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깨자마자 알렉에게 이곳의 상황을 전달 받았다. 현재 유레이트를 기다리는 중이며 황태자가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북부에 내려가 있다는 것 등등.
그리고….
‘마님.’
뉴벨 남작 부인은 다프네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설명도 듣지 못했다. 물어도 난감하다는 듯 말해 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각하.”
그렇기에 뉴벨 남작 부인은 참다못해 에드먼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곧 단 몇 주 사이에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에드먼은 폭주 직전의 상태였다. 뉴벨 남작 부인은 전달 받은 그의 상태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것은 에드먼의 선택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할 말을 주변에서 질리도록 했을 테니 뉴벨 남작 부인은 결국 입을 꾹 다문 채 안으로 들어갔다.
“몸은 괜찮은가.”
자신이 할 말이었다.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남의 몸을 신경 쓰는 모습이 이상했다.
“괜찮습니다. 그저 잠을 잤을 뿐인걸요.”
“남작은 외숙부님과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같이 떠나라.”
“…마님은 어디 계신가요?”
“황궁에 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비틀거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답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침음이 새어 나왔다.
“마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외숙부가 서부 포섭에 성공했다. 이틀 후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마님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다프네가 지금 목숨으로 시간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급습이 없는 이유였다. 다프네가 황궁에 있어서. 다프네가 제 목숨을 담보로 시간을 내 준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프네를 무사히 구출할 거다.”
에드먼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는 한 말을 지켰다.
그것을 잘 아는데도, 뉴벨 남작 부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예.”
뉴벨 남작 부인은 반드시 다프네를 무사히 구출할 거라는 에드먼의 말을 되짚었다.
그래. 각하라면 분명 마님을 무사히 구출하실 수 있을 거다.
문제라면….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어.”
같이 차를 마시자는 다프네가 물은 말이었다.
“…벨라 뉴벨입니다, 마님.”
벨라, 벨라, 벨라….
다프네는 마치 그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듯 찻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벨라.
다프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다프네는 마치 마지막 숙제를 마무리한 듯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벨라. 고마웠어, 전부.”
마님. 왜 그러시는 건가요? 벨라의 물음은 끝을 맺지 못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더 빨랐다.
벨라는 그제야 입 안을 맴돌던 차 맛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벨라는 다프네의 눈과 마주했다. 삶에 대한 미련을 남기지 않은 눈. 그녀는 마치 벼락에 맞은 듯 큰 깨달음과 함께 몸을 잘게 떨었다.
아, 마님은… 모든 준비를 마치셨구나. 막을 수 없는 것이로구나.
***
유레이트의 귀환을 단 하루 남긴 밤, 세르기 블레드의 급습이 시작됐다.
“각하.”
단 반나절 만에 초췌한 몰골이 된 알렉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계속 전쟁터에 머물러 있던 에드먼이 겨우 자리에 앉은 때였다.
“다른 수가 필요합니다.”
세르기가 보낸 기사의 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왔다. 어디서 구한 병력인지 몰라도 세르기는 이 전쟁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직 언데드는 등장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힘만 빼면 에드먼에게 불리했다.
단 하루만 버티면 유레이트가 돌아온다. 하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작님!”
천막을 거칠게 열고 나타난 이는 우넬이었다.
우넬 역시 전쟁의 흔적이 여실한 얼굴로 들어왔다. 우넬의 손에는 피로 인해 얼룩덜룩한 편지가 한 통 쥐여 있었다.
“…반사 상태의 기사가 가져온 것입니다.”
목이 반쯤 너덜너덜해져서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힘겹게 다가온 기사는 눈이 반쯤 뒤집힌 채 쪽지를 내밀었다.
“윈, 윈터 공작님께… 윈터 공, 공작님께….”
마치 세뇌라도 당한 듯 부들부들 떨던 기사는 우넬이 그 쪽지를 건네받자마자 사망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에드먼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슨 내용입니까.”
알렉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에드먼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만약 반나절이 지나도 오지 않거든 요한 테도르에게 임시 권한을 수여한다.”
“…각하.”
“요한에게 곧바로 연락을 취해라.”
요한은 현재 에드먼의 명에 따라 후방에 위치한 작은 별장에 있었다. 별장은 이곳 상황을 전달 받아 포섭한 귀족들과 회의를 나누는 곳이다.
“블레드 후작이 내 시체를 보이기 전까지 내 죽음을 믿지 마라.”
에드먼은 알렉을 스쳐 가며 말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그렇게 떠나셨다는 겁니까.”
연락을 받고 한 시간 만에 전방에 도착한 요한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처 막을 틈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마음먹는 걸 누가 막는단 말입니까.”
요한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비틀거리던 요한은 테이블을 짚고 겨우 중심을 다잡았다.
요한은 천막의 입구를 쳤다. 해가 보였다.
“…해가 지기까지 아직 다섯 시간이 남았습니다.”
“만약 각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다면….”
“돌아오실 겁니다.”
요한은 단호히 말했다.
에드먼은 돌아올 것이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돌아오실 겁니다.”
***
“모시겠습니다.”
에드먼은 제 앞에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허리를 펴고 반 발자국 정도 앞장을 섰다.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으며 숨소리조차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드는 이는 산 사람보다는 시체에 가까웠다.
에드먼은 제 앞을 조금 앞선 채 걸어가는 이의 뒤통수를 주었던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황궁은 저번에 왔을 때와 사뭇 달랐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던 때와는 다르게 간간이 사람이 지나다녔다.
시체 태우는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수십 번 전장에 몸을 담근 에드먼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냄새였다.
에드먼은 이번에는 자신이 지나오는 길을 살폈다.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세르기가 황제의 궁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으나 정작 그 주인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유진을 들여보낸 결과 황제는 아직 살아 있었다. 정신도 깨어났다. 하지만 황제는 방치당하고 있었다. 무관심 속에서 황제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에드먼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문이 열리고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던 복도와는 다른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 공작. 왔군.”
세르기가 반가운 이를 만난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네.”
에드먼은 집무실에 한 발짝 걸쳤다. 그리고 또다시 한 발짝.
집무실에 들어온 에드먼의 뒤로 문이 닫혔다.
뚜벅, 뚜벅.
에드먼의 발걸음에 세르기의 맞은편에 있던 이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
에드먼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그의 주춤거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드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무슨 할 말이 있어 날 부른 건가. 할 말은 저번에 다 했네만.”
세르기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저 하나뿐인 소중한 누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려는 것에 불과하네.”
세르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먼을 스쳐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먼은 그제야 멈췄던 걸음을 옮겨 세르기가 앉은 자리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이가 내려놓았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둘의 눈이 스쳤다. 아주 짧지만 손끝이 쩌릿할 정도로 강렬했다.
“…다프네.”
에드먼은 까슬까슬한 목소리를 굴려 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의 앞에는 다름 아닌 다프네가 앉아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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