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아닙니다.”
번쩍 고개를 치켜든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바네사는 잠시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바네사는 입술을 열었다.
“최근 자리를 너무 자주 비운다고 하더구나.”
“…….”
“외출하는 거야 좋지만 자제하렴. 쓸데없이 힘 빼 봤자 손해일 뿐이야.”
바네사는 아까의 일은 전부 잊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데미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네사는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들이켰다.
데미안은 누군가 자신의 몸 안을 훑는 불쾌한 기분에 주먹을 꽉 쥐었다.
머지않아 눈을 뜬 바네사의 얼굴 위로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흠, 저번과 별다를 게 없구나.”
“…노력하겠습니다.”
데미안은 창백한 얼굴로 휘청거렸으나 이내 중심을 잡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바네사는 그런 데미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상해.’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본래 바네사는 데미안에게는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들을 향한 애정 따위가 아니라 그냥 한 명쯤은 맨정신으로 놔둘 생각이었다.
지난번 몰래 밖을 나갔다가 온 데미안의 어깨에 있던 나뭇잎을 치웠던 그 순간, 무언가 찌릿함에 손끝을 지나쳤다. 에드먼을 미지의 존재로 착각한 그 순간 받았던 느낌과 똑같았다.
하지만 아주 찰나의 시간이다. 바네사는 데미안 역시 에드먼처럼 미지의 존재의 힘이 오랫동안 노출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네사는 곧바로 지하실로 데미안을 밀어 넣었다.
세르기는 새로운 실험체를 환영했고 바네사는 데미안이 뒤에서 쥐새끼처럼 찾아다니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고 겪게 만들었다.
데미안은 반항하지 않는 순종적인 실험체였으나 좋은 실험의 결과를 끌어내진 못했다. 그의 몸은 신성력을 조금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무 내보냈다.
바네사는 저번보다 더 적어진 체내의 신성력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몸만 더 망가졌을 뿐 얻은 게 없었다.
‘에드먼과 데미안.’
둘의 곁에서 오랫동안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미지의 존재다.
“하.”
에드먼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누군지 몰라도 그의 곁에 있는 미지의 존재가 전쟁 중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충분히 그들을 쳐 낼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런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다프네.’
바네사는 유난히 마르고 창백한 여자를 떠올렸다.
‘용케 살아났네.’
데미안을 포섭할 겸 북부로 갔을 때 일부러 다프네를 건드렸다.
다프네는 바네사의 계획에 전혀 없던 인물이었다. 그저 윈터 공작가로 다시 돌아가는 일부분에 쓰이는 도구에 불과했다. 다프네를 향한 에드먼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바네사는 순간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프네를 건드리고 말았다. 운이 나쁘면 즉사, 운이 좋아도 식물인간 정도의 저주를 하고 나서야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데미안은 애써 숨기고 있지만 에드먼이 침대에 누운 다프네를 보며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네사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사창가에서 몸을 팔던 제 어미가 자신을 붙잡고, 친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짓던 표정이었다. 사랑이라는 족쇄에 발이 묶여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결코 외면하지 못해 몸부림치던.
바네사는 차갑게 식은 차를 내려다보며 들이켰다.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 해.’
미지의 존재를 향한 갈망은 더욱이 커져 갔다.
***
“내 아들, 데미안이에요.”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에드먼의 사생아라고 생각했다. 데미안이 에드먼의 이복 누이의 자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대체 내가 아는 건 뭘까.’
알아 갈수록 미궁에 빠진다. 하지만 다프네는 이 느낌이 지독히도 익숙했다. 다프네는 세르기의 의해 눈과 귀가 가려졌고, 그에게서 벗어난 후에는 스스로 눈과 귀를 가렸다.
욕심 부리면 안 되니까. 에드먼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프네는 눈을 슬며시 감고 손바닥으로 두 귀를 가렸다. 우웅, 하는 느낌과 함께 주변의 소리가 차단되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면….”
“쉬운 일이야. 윈터 공작에게 상처를 주면 돼.”
“…그를 공격하라는 건가요?”
“그럴 리가. 날카로운 날붙이만 무기가 되는 건 아니야, 누이.”
세르기는 입술을 톡톡, 두들겼다.
“사지 멀쩡히 살려 두마. 하지만 그가 철저히 무너질 만큼 상처를 줘야 해.”
“…제가 한다고 해서 그가 상처 입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다프네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되짚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몽롱해졌다.
“미워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과 버리는 것이지.”
생각을 마친 다프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다프네는 자각하지 못한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세르기의 조건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에드먼은 신체만큼이나 정신력도 높다. 그런 그가 철저히 망가질 만큼 정신을 무너트리는 일은 그에게 육체적인 상처를 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다프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에드먼을 떠올리면 가슴이 빠르게 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바로 죄책감이었다.
‘내 잘못이야.’
이 모든 건 5년 전 다프네가 선택한 사람이 하필이면 에드먼이기에 생긴 일이었다.
다프네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이런. 생각이 많아 보여, 누이.”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다프네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순간 긴장한 다프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세르기는 저번에 자신이 앉은 자리 그대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낮에 있던 일에 대해 들었다.”
다프네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오, 누이. 공작은 정말 누이를 믿지 못하는 모양이야.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니.”
세르기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다프네는 대충 걸어 둔 숄을 허둥지둥 어깨에 두르며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흘 후.”
옷매무새를 만지던 다프네의 손이 멈추었다.
“사흘 후야, 누이.”
숄을 쥔 다프네의 손이 잘게 떨렸다.
“역할이 커. 누이의 행동에 따라 수십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
“…네.”
다프네는 자신이 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는 것밖에 몰랐다.
세르기가 방을 나가고도 다프네는 동이 틀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뭐?”
에드먼의 시선을 받은 벤자민은 허리를 숙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다시금 말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사이 마님을 빼 올 겁니다. 그때 마님과 도망치십시오. 소공작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망가라는 건가?”
“각하.”
벤자민은 주름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각하께서 어찌나 올곧게 성장하셨는지, 저는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실 줄 아는 분이시죠, 각하는.”
“…….”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각하의 행복을 찾아가셔 야 할 때입니다.”
“벤자민.”
“불안정하시지요.”
벤자민의 시선이 서류를 쥔 에드먼의 손으로 향했다.
에드먼의 손은 문제없었으나 그가 쥐고 있는 서류의 끝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바로 앞에서 쳐다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미세한 떨림이었으나 벤자민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현재 각하의 상태를 각하께서 제일 잘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에드먼은 폭주 직전이다.
“그리고 지금 각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압니다.”
벤자민의 호흡은 그리 고르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발….”
죽고자 하는 에드먼을 말릴 방법이 애원밖에 없다는 사실에 벤자민은 절망했다.
벤자민은 에드먼이 남긴 유서 관련된 서류를 읽어 보았다. 서류는 모두 처리되어 있었다.
에드먼이 죽은 후 모든 재산은 다프네에게 귀속된다. 검은 기사단도 마찬가지이다. 에드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프네에게 귀속시켰다.
단 하나, 윈터 공작위를 빼고. 그것은 데미안의 것이 되었다.
다프네는 자신에게 귀속될 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으며 양도할 수 없다.
이것을 모두 확인한 벤자민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이 아는 다프네를 향한 에드먼의 마음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계획은 변하지 않는다, 벤자민.”
“안 됩니다.”
“모든 보고를 받았네.”
요한을 통해 에드먼은 모든 보고를 받았다.
“데미안이 대모님께 학대를… 받았었다.”
“…예?”
벤자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이가 다름 아닌 다프네였다. 다프네가 이것을 빌미로 대모님을 협박해서 남부로 보냈다.”
한 번 파기 시작하자 그가 모르던 것이 끊임없이 나왔다. 윈터가에서 후원하는 수많은 예술가 중 대장장이를 찾아가 데미안의 검을 제작한 것부터 연무장 옆에 작은 화원을 다프네가 돌보았던 것까지.
“나는 여전히 다프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고.”
그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속죄할 것도 많다.”
에드먼은 잘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프네를 내 알량한 목숨으로 단 한 번의 마지막 속죄를 할 수만 있다면….”
에드먼은 손을 꽉 쥐었다. 떨림까지 삼켜 버릴 만큼 거센 힘이었다.
“난 악마에게라도 목숨을 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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