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에드먼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다프네가 거부했다는 소리냐.”
“네.”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답한 이는 데미안이었다. 복면을 쓴 채 눈만 조금 드러낸 데미안은 에드먼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다름 아닌 다프네가 세르기에 의해 황궁에 있다는 것이다.
상황을 살피느라 세르기를 주의 깊게 주시하지 못했던 데미안은 곧바로 온 황궁을 뒤졌다. 그리고 다프네를 찾아냈다. 깊은 새벽, 잠금장치가 없는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쉬웠다.
“…데미안?”
다프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잠시 그의 앞으로 달려오듯 다가왔다.
지하실로 들어간 후로 이상하리만큼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러나 새벽이라 그런가, 아니면 멀쩡한 다프네를 봐서 심리적 안정감이 들어서 그런가 데미안은 한결 숨 쉬기 편안해졌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다프네의 눈시울을 붉혔다. 데미안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척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찾고 계십니다.”
“…….”
“돌아가요, 어머니.”
“…아니.”
다프네는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또다시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것을 티 내지 않고 익숙하게 숨을 골랐다.
숨 쉬는 게 어렵다는 것쯤은 문제없었다. 진짜 문제는 다프네가 거절을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내가 지금 가면 오라버니는 바로 네 번째 전쟁을 시작하겠지. 그가 충분히 준비를 끝냈니?”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다는 확신을 담은 어투였다.
데미안은 입술을 달싹였다. 다프네의 말이 맞았다. 이탈한 병사들이 돌아왔으나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유레이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서부로 내려갔다. 전령을 보내는 족족 실패하니 유레이트가 서부 귀족들의 포섭 성공 여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한창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지금 기습을 먼저 해야 한다. 혹은 유레이트가 병력을 끌고 올 때까지 기다린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의견 싸움이 현재 진행형인지라 준비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어머니가 신경 쓰실 부분이 아닙니다.”
“나를 이용하렴.”
확실히 다프네가 이곳에 있다면 세르기가 기습할 이유 하나가 사라진다.
“어머니.”
“난 돌아가지 않아, 데미안.”
다프네는 단호히 말했다.
그것을 그대로 전달한 에드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드먼이 어디로 가려는지 알아챈 알렉이 화들짝 놀라며 그 앞을 막아섰다.
에드먼의 서슬 퍼런 눈초리에 어깨가 흠칫했으나 알렉은 피하지 않았다.
“각하, 마님께서 틀린 말을 하신 게 아닙니다. 소공작님, 마님께서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알렉은 곧바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각하, 뮤트 백작님께서 남기신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유레이트의 연락이 끊긴 지 며칠이 지난 상태이다.
“포섭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북부에서 돌아오는 길, 알렉은 유레이트가 지나온 마을에 잠시 들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부름을 받는 꼬마가 내민 쪽지였다.
“서부에서 병력을 보내준다는 것이냐.”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서부는 제국의 한 부분이지만 이상하게도 영향력이 적었고 저들끼리 똘똘 뭉쳐 있다. 독립한 공국에 가까웠다. 때문에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예. 서부에서 흑마법을 극도로 혐오한다고 합니다.”
“아.”
에드먼은 뒤늦게 서부가 흑마법사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았던 지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흑마법사를 사냥하자 뿔뿔이 흩어져 있던 흑마법사들이 모여 가장 병력이 적은 서부를 공격했다.
이 일이 황제가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서부는 흑마법사만큼이나 황실을 혐오하게 된다.
이것을 알고 있었으나 고작 그러한 이유로 성공 확률이 낮은 일에 동참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뜻밖이었다.
“각하, 일주일. 딱 일주일만 기다리면 됩니다.”
“…….”
침묵이 길어지는 그를 모두가 간절히 바라보았다.
에드먼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
harbaragi_syk
다프네는 제 앞에 놓인 것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프네는 창밖으로 보이던 매캐한 연기와 시체를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프네의 앞에 놓인 것은 구하기 힘든 귀한 다과와 부드럽고 촉촉해 보이는 달콤한 디저트였고, 코를 스치는 것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차의 향기였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다프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성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급하게 준비한 거라 부족한 점이 많을 거예요.”
다프네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대답을 회피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전쟁의 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귀한 차와 갓 만든 디저트를 앞에 두고 있다. 괴리감이 다프네를 괴롭혔다.
성녀가 미지의 존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둘째치고 세르기와 한편이라는 것이 거북했다.
“흐음. 내게 궁금한 게 많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다프네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가령 내가 왜 에드먼과 얼굴이 매우 흡사하게 생겼는지, 뭐 그런 것들.”
다프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야 눈을 제대로 봤네요.”
말려들었다는 생각에 다프네는 황급히 눈을 내리까려고 했으나 성녀의 말이 더 빨랐다.
“에드먼과 나는 남매예요. 이복 남매.”
“…….”
성녀는 노래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밖에서 날 데려왔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아이가 태어났어요. 그리고 뭐, 뻔해요. 쫓겨나다시피 저택을 나와야 했죠.”
“…복수를 하려는 건가요?”
“복수? 누구에게요? 에드먼에게?”
성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에드먼에게 복수라니!”
허리까지 젖혀 가며 웃던 성녀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여전히 거두지 않은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역시, 순진해 빠졌네요.”
“…….”
“난 복수 같은 걸 꿈꾸는 게 아니에요, 다프네.”
성녀는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속삭였다.
“그런 같잖은 감정 놀이를 하려는 게 아니라고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에드먼과 놀라울 만큼 겹쳐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성녀는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어요. 그동안 내 역할을 대신 해 주었으니까요.”
영문을 모르는 말에 다프네가 눈을 깜빡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어머니, 들어가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다프네가 경직됐다. 데미안이었다.
자신이 성녀와 있다는 것을 모를 텐데? 아니, 왜 문으로 들어오는 거지? 누구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다프네는 이내 멈칫했다.
‘…여긴 성녀의 방이야.’
잠시 잊고 있었다. 성녀의 방이라는 것을 알고도 데미안이 들어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이 말하는 어머니는….
“잘 알고 있는 사이지만 다시 소개할게요.”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데미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성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새가 지저귀듯 말했다.
“내 아들, 데미안이에요.”
“…왜 그러셨습니까.”
문이 닫히자마자 물음이 튀어나왔다.
바네사는 고개를 돌려 데미안을 보았다. 원래에도 무표정이었던 데미안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꾹 참고 있는 티가 났다.
아무리 데미안이 의젓하고 감정을 잘 숨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에게만 통했다. 바네사는 남의 약점이나 단점을 잘 찾아냈고 데미안의 어리숙함 역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이 말이니?”
바네사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정말 바네사 뭣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 생각했겠지만 데미안은 달랐다.
“…아시잖습니까.”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겠구나.”
데미안은 끝내 자신의 입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왜….”
그가 잠시 말을 멈춘 이유는, 다프네를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챈 바네사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데미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공작 부인을 이곳에 데려온 것? 아니면… 너를 내 아들이라고 소개한 것?”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둘 중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겠구나. 공작 부인은 내가 심심해서 불렀고 너는 내 아들이 맞잖니.”
바네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데미안은 애꿎은 입술만 다물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두 번째 문장에 움찔거렸다는 것을 바네사는 놓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신경 쓰이니?”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