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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26화 (126/145)

126화

사람들의 비명. 살려 달라는 외침. 살이 타는 냄새. 시체 썩은 내.

다프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누이.”

세르기는 뒤에서 나타나 다프네의 옆에 섰다.

“어때? 누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이 생지옥이.”

다프네는 대답 대신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세르기가 까마귀를 통해 쪽지를 전달한 것은 이틀 전이었다. 쪽지는 이틀 후 창문을 열어 놓으라는 한 문장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다프네는 시간이 다가오자 뉴벨 남작 부인에게 자신이 먹었던 약을 먹였다. 뉴벨 남작 부인이 잠에 빠져 쓰러지자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처리해야 하나 했더니 잘됐군요.”

뉴벨 남작 부인을 잠재운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복면을 쓴 이를 따라 창문을 나와 도착한 곳은 황궁이었다. 전쟁의 흔적이 잘 보이는 테라스의 난감을 움켜쥔 다프네가 고개를 돌렸다.

“이걸 보여 주기 위해서 날 부른 건가요, 오라버니.”

“그것도 있고.”

세르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다프네는 가만히 세르기를 응시했다.

지난 열흘간, 다프네는 방에 틀어막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생각은 도무지 종지부를 찍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자신의 특이 체질이 실험의 부작용이라고만 생각했지 미지의 존재일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애당초 알려진 게 없다 보니 미지의 존재가 가진 특이 체질도 기억의 기록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행인 점은 세르기는 다프네가 미지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다른 의도가 있었기에 다프네는 대놓고 물었다.

“무슨 속셈이죠?”

“황태자가 죽었어.”

“…네?”

다프네는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아무리 혼란스러움에 빠졌다지만 그보다 앞서는 생각은 바로 쿠데타였다.

칼리토가 머물라 한 저택에 있을 때 지나가는 몇 없는 사용인을 붙잡고 물어봐도 말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다프네는 저택을 나가 볼까, 고민도 했지만 이내 그곳이 자신에게 제일 안전한 곳임을 깨닫고 얌전히 방 안에 있었다.

그러니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한 다프네는 칼리토가 죽었다는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손끝에서부터 핏기가 가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쿠데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죽었다.

실패했다.

“이 쿠데타는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어, 누이.”

세르기는 승리에 기뻐하지도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결과를 마주한 듯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세르기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찡그린 상태였다.

“그래, 그런데… 예상 못 한 변수가 하나 생겼어.”

세르기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재가 쌓인 것을 본 다프네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에드먼 윈터.”

다프네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세르기가 말을 이어 갔다.

“난 솔직히 그가 실패가 뻔히 예정된 쿠데타에 동참한 것도 놀라워. 근데 내 예상보다… 더 세더군.”

세르기는 에드먼에게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어느 시기가 되면 마력이 불안해져 폭주 위험에 휩싸인 것도.

예전의 그가 참여한 전쟁과 마물 토벌의 피해까지 모두 계상해 내린 통계에서 보면, 그는 진작 폭주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에드먼은 멀쩡했다. 죽었던 사기가 되살아나는 것을 넘어 황태자가 있을 때보다 더 결의의 차 있었다.

단 열흘 사이에 총 세 번의 전투가 치러졌다.

황태자가 전사한 전투는 두 번째 전투로 일주일 전.

에드먼이 엄청난 활약을 펼친 세 번째 전투는 고작 사흘 전이니 한창 사기가 하늘을 찌를 시기였다.

곧 네 번째 전투가 시작된다.

세르기는 에드먼을 결단코 낮잡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세르기는 계획에는 없던 다프네를 데려온 것이다.

그가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알아챈 다프네는 입술을 달싹였다. 왜 다들 그런 오해를 하고 있냐고,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들이 있는 곳에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후작.”

보기 드문 미성에 다프네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새하얀 백금발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셨습니까.”

성녀였다.

미지의 존재, 즉 다프네를 찾고 있는 성녀.

***

“다행히 사기는 되찾았습니다. 이번 전쟁이 추후 남은 이들의 분위기를 결정할 것 같습니다.”

우넬은 고작 일주일 전을 되짚어 보았다.

칼리토는 전투가 한창인 곳에서 활을 맞았다. 심장을 그대로 꿰뚫은 화살을 모두가 보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을 막는 건 불가능했고 급하게 후퇴한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다.

이탈하는 이들은커녕 사병을 다시 회수하고 잠적하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넬이 보아도 이 쿠데타는 실패했다. 그는 주군을 지키고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나 칼리토의 유언 때문에 차마 자살도 하지 못한 채 모래처럼 바스러지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세르기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세 번째 전쟁을 시작했다.

사기는 떨어질 만큼 떨어지고 병력은 10분의 1이 이탈했다. 애초에 병력 차이가 많이 났기에 이탈은 큰 피해였다.

우넬은 죽을 준비를 마치고 전쟁에 참여했다.

“뒤로 물러나 있게.”

전쟁이 한창인 시점, 에드먼이 나타났다. 그는 검을 허리춤에 단 채 꺼내지도 않고 앞으로 향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조금씩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저 수많은 기사들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마력 각성자의 자살.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우넬은 에드먼을 막으려고 했다. 에드먼이 죽으면 완전히 끝이 났다. 이 나라는 그들이 죽은 후 저 진창으로 처박힐 것이다.

에드먼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들이 죽은 후 에드먼이 남아 있다면 이 나라가 그나마 진창에 처박히지는 않을 거라는, 그런 희망.

그러나 우넬이 손을 뻗었을 땐 에드먼이 마력을 푼 후였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재로 변하는 이들을 보며 우넬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밀려들어 오던 적도, 바닥을 기던 적도 모두 재로 변했다.

그렇게 에드먼이 세 번째 전투로 대승을 거두었을 때 우넬은 그를 전처럼 대하지 않았다. 우넬에게 에드먼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그가 더 이상 신뢰할 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탈했던 기사들도 대부분 돌아왔습니다.”

희소식 중 하나였다.

제 목숨이 아까워 뒤도 안 보고 도망갈 땐 언제이고 성공 가능성을 보이자 그 업적에 제 이름 한 줄 새기고자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상황을 그저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넬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유리하다. 돌아오려는 이들을 굳이 막지 마라.”

“예.”

에드먼이라면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기에 우넬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우넬이 물러가고 나타난 것은 알렉이었다.

“각하.”

“상태는?”

에드먼은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무표정이었던 얼굴 위로 초조함이 깃들었다.

알렉은 초췌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에드먼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칼리토가 화살에 관통당한 것은 맞다.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심장을 비껴 나갔기에 숨이 간신히 붙어 있었다.

에드먼은 곧바로 칼리토의 측근 수하와 알렉을 북부로 보냈다. 다프네를 위해 가져왔던 커다란 마력석이라면 칼리토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 그 예상은 적중했다.

며칠 동안 이 문제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탓에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마른세수를 한 에드먼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말했다.

“…그래. 고생이 많았다. 쉬어라.”

“내일입니까.”

전쟁이 한 번 일어나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 지속된다.

하지만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아니고 내부의 싸움인지라 길어야 사흘이었기에 고작 열흘 사이에 세 번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내일.

어쩌면 마지막 전쟁이 될지도 모르는 네 번째 전쟁이 치러진다.

“집사님은… 여전히 없으시더군요.”

“옳은 선택을 한 거다.”

벤자민은 홀연히 사라졌다. 에드먼은 벤자민의 빈자리를 느꼈으나 그를 찾거나 뒤를 쫓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고위 귀족의 집사였던지라 기사 한두 명 정도는 처치할 능력이 되니 걱정도 되지 않았다.

알렉은 점점 주변인을 하나둘 떠나보내는 에드먼을 보며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남부는 어떤 상태이지?”

“수도와 붙어 있는 지역은 대충 현재 상황을 전달받았으나 아직 그 안쪽까지 퍼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보름 이상이 걸릴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다프네는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됐다더라, 하는 끝맺음의 이야기를. 에드먼은 뻑뻑한 눈을 억지로 깜빡였다.

에드먼이 있던 천막이 휙 걷어졌다.

알렉이 검을 움켜쥐며 뒤를 도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여러 인기척이 우르륵 쏟아 들어왔다.

“…벤자민?”

벤자민뿐만 아니라 크리스와 유진까지 있었다.

“각하.”

말문을 튼 그들의 얼굴을 본 순간 에드먼은 무너져 내릴 뻔한 몸에 힘을 겨우 주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기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말해.”

다프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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