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새벽이 내려앉은 시간. 정적이 내려앉은 새벽을 뚫고 조용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선발대는 에드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검은 기사단 반과 제널 남작의 개인 병력 스물 남짓. 채 오십도 되지 않는 병력이 황궁의 뒷문에서 숨을 죽였다.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머지않아 안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연 이는 다름 아닌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문을 완전히 열었다.
누구도 모르게 진입하기 위해서는 안에서 열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시종장은 쉽게 포섭할 수 있었다.
시종장은 넓은 궁을 관리하고 황제를 잘 보좌했으나 한 가지, 기가 약하고 우유부단했다. 높은 주인을 모시는 수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족한 것이었다.
“수고했네.”
시종장은 에드먼에게 깨끗하게 세탁된 돈과 땅 서류를 건네받았다. 머뭇거리던 시종장은 그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이내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안으로 들어간 후 검은 기사단과 제널 남작의 개인 병력으로 찢어졌다. 궁을 샅샅이 뒤져 세르기 블레드를 찾고 신호를 받는 작전이었다.
세르기가 황궁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빠져나갈 문 앞으로는 검은 기사단을 배치해 두었다.
칼리토는 성녀가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
에드먼은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숨도 쉬지 않은 채 에드먼을 응시했다. 에드먼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모든 게 순조로워서 이상하다. 복도는 텅 비어 있고 사용인은 보이지 않는다.
선발대보다 먼저 도착하여 정찰을 한 검은 기사단의 기사에게 이런 보고를 받은 적 없다. 단 한 시간 사이에 이 넓은 황궁이 조용해진 것이다.
‘함정이다.’
에드먼의 신호에 얼굴이 창백해진 이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에드먼은 인기척이 모여 있는 곳을 알아차렸다. 황제의 즉위식이나 국혼 같은 나라의 중요 행사가 열리는 연회장이었다.
“모두 전하께 돌아가서 대기해라.”
“각하, 그건….”
“돌아가.”
에드먼이 단호하게 말하자 결국 그를 말리던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에드먼은 다른 이들이 모두 돌아서는 것을 보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음악 소리가 커졌다. 이상한 점은 인기척에 비해 연회장 안은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에드먼은 스스로 문을 열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하셨군요.”
에드먼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끌어 내렸다. 족히 백 명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연회장 안에는 세르기가 홀로 있었다.
황좌에 앉은 세르기가.
“황제는 죽었는가.”
“그게 중요한가요.”
세르기는 싱긋, 웃으며 에드먼의 물음을 피해 갔다. 세르기는 황금으로 뒤덮은 황좌를 매만졌다.
“흠. 이게 바로 권력 위에 앉은 기분인가.”
생각했던 만큼 그리 좋진 않군. 세르기는 중얼거렸다.
“무슨 속셈이지?”
“기회를 드리지요.”
“…….”
“황태자를 배신하고 내 편이 되세요.”
세르기는 황좌에서 일어났다.
“왜 굳이 실패할 계획에 동참한 거죠?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텐데.”
정말 궁금하다는 듯 세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누이를 선택한 것도 그렇고. 당신에게는 내 아버지와 누이를 그대로 죽여도 사고로 위장할 능력이 되잖아요.”
계속 가지고 있던 의문이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그의 아버지는 다프네와 단둘이 에드먼을 만났다. 아무리 자신이 죽으면 소문이 새어 나가게 계획을 세웠다지만 에드먼이 그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 자리에서 둘 다 죽일 방법과 능력도 넘쳐날 텐데, 왜 죽이지 않은 거지?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죽을 목숨.”
에드먼은 검을 빼 들었다.
“워워, 나는 그대를 상대하지 못합니다.”
세르기는 진정하라는 듯 뒤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에드먼이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탁.
세르기가 손을 튕긴 것은 그때였다.
황좌 뒤에 휘장이 걷어지면서 갑옷을 입은 기사 수십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먼은 이미 인기척을 읽었기에 놀라는 기색 없이 검을 움켜쥐며 자세를 취했다.
끼릭, 끼릭.
신경을 거슬리는 쇳소리가 들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저들은 부족함 없이 계속 들어올 테니 마력을 마음껏 써도 됩니다.”
배려를 베풀듯 말한 세르기가 박수를 한 번 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만히 서 있던 기사들이 에드먼에게 달려들었다.
“아참, 저택으로 화가를 불렀었다지요. 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던 거죠?”
에드먼은 답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나지 않을 텐데.”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더 가해졌다.
세르기는 부드럽게 웃으며 뒤돌았다.
“누이에게 흑마법을 걸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오래 떨어져 있으면 먼저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그다음은 목소리, 마지막으로는… 그 인물에 대해 완전히 잊게 되죠.”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거늘.”
세르기의 미소가 사라진 것은 그때였다.
“누이가 살아 있는 걸 압니다.”
끝도 없이 밀려온다. 에드먼은 검을 고쳐 쥐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적어도 두 시간, 혹은 그 이상.
에드먼은 흘러내린 땀방울이 앞을 가리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그의 움직임 한 번에 세 명의 기사가 한꺼번에 날아 갔다. 투구가 벗겨지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우… 우어….”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얼굴. 에드먼이 익히 아는 얼굴이다. 제1 기사단의 부단장.
그는 더듬더듬 떨어진 투구를 줍기 위해 바닥을 더듬었다. 목이 반쯤 찢겨져 덜렁거린 채로.
“저게 무슨….”
에드먼은 문득 이들이 칼리토가 말한 언데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들이 끝없이 밀려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을 대충 처리하고 이곳을 뜰 생각이던 에드먼은 생각을 고쳤다. 만약 이들 중 하나라도 빠져나오면 평범한 이들은 그대로 당하고 말 것이다.
에드먼은 손목의 팔찌를 내려다보다가 검을 집어넣었다. 기사들은 그때를 노리지 않고 달려들었고, 에드먼은 마력을 풀었다. 검은색 아지랑이가 꿈틀거리며 부피를 키워 갔다.
“으어….”
기사들은 인간보다는 동물 같은 본능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검은색 아지랑이에 잠식되는 것이 더 빨랐다. 재가 쌓인다.
에드먼은 심호흡을 하며 마력을 컨트롤했다. 설산에서 마물들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얌전했지만 여전히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후우….”
에드먼은 마치 화재 후 현장처럼 재가 흩날리는 연회장에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눈을 떴다.
***
ㅎㅂㄹㄱ.공금
“신전에도 함정이 있었다.”
칼리토는 엉망이 된 몰골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에드먼이 언데드를 처리하고 나왔을 땐 칼리토도 비슷한 시간대에 기지에 도착했다.
신전으로 간 칼리토를 기다리는 것은 언데드였다. 언데드는 베어도 베어도 다시 살아나니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공작께서는 홀로 처리하셨다는 말입니까?”
칼리토의 기사를 이끄는 기사단장, 우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저희 기사 오십으로도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공작 홀로 세 시간 동안 그 언데드를 다 처리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넬.”
칼리토는 말리듯 우넬을 불렀으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십 중 칼리토를 포함해 소드 마스터가 총 셋이었다. 에드먼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다. 한 가지의 가설 말고는 모두지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혹 블레드 후작과….”
에드먼은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들어 올렸다.
“내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고 알려져 있죠.”
“그 점이 더 이상하다는 겁니다. 아무리 공작의 실력이 출중해도 소드 마스터 셋도 애먹은 것을….”
우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에드먼의 손에 들어 있던 서류가 순식간이 재로 변해 흘러내렸다.
에드먼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낀 재를 털어 내며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됐습니까?”
“……!”
멍하니 있던 우넬은 칼리토를 뒤로 밀어내고 바로 검을 꺼내 에드먼의 목 아래 댔다.
“무슨 속셈이냐.”
에드먼은 목 바로 아래 칼날이 들이밀어져 있음에도 무표정이었다.
“내 마력입니다. 모든 걸 재로 만들어 버리는.”
에드먼은 칼리토를 향해 말했다.
“다음 계획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렇게는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당하기만 할 겁니다.”
“…우넬, 물러나라.”
“하지만 전하, 저 마력은 너무 위험….”
“우넬!”
우넬은 결국 검을 내리고 물러났다. 칼리토는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모두 물러나라. 공작과 계획을 세울 것이니.”
“…예.”
반사적으로 안 된다고 하려던 우넬은 칼리토와 눈이 마주치자 결국 방을 나갔다.
칼리토는 복잡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이래서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군….”
“예.”
“그대에게 할 말이 있네.”
결정을 내린 칼리토가 말했다.
“성녀를 보았네. 멀지만 분명 보았지.”
“그렇습니까.”
“그 성녀가 자네의 혈육이야.”
혈육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히려던 에드먼이 멈칫했다.
혈육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죽었다.
단 한 명 빼고.
바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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