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아버지, 저 왔어요.”
바네사는 오래된 초상화를 응시했다.
바네사는 자신의 아버지를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싫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죽은 후에야 바네사에게 도움이 되었다.
복수심을 품은 채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무덤에 들어갔다. 다프네는 그곳에서 어느 책을 발견했다.
악마와 관련된 책. 전대 공작은 적자를 낳기 위해 악마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덕분이에요.”
바네사는 초상화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전대 공작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는 분명 이 무덤에 악마의 물건이 있는데요. 알려 주시지 않겠어요?”
바네사는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전대 공작을 빤히 응시했다.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손톱이 얼굴을 찢어 내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 실수했다. 아버지 탓이에요. 그 눈빛이 마치 예전에 절 보는 눈빛이셨거든요. 쓸모없어진 버러지를 보는 눈빛.”
사르륵, 미소를 지은 바네사는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초상화 너머로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
“…하.”
방대한 마기.
바네사의 입꼬리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잘게 떨렸다.
바네사는 이미 찢겨진 공작의 초상화를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정말. 저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제 정말 곧이에요, 아버지.”
기다려 주세요.
***
“각하.”
벤자민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그렇듯 차가 들려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게 있다면 찻잔이 두 개라는 점이었다.
“제게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이미 모든 일은 며칠 전에 다 끝내 놓았기에 급한 건 없었다.
에드먼은 벤자민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었다.
“참 오랜만입니다.”
벤자민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주름진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지. 내가 공작이 된 후 같이 차를 든 적이 없으니까.”
소공작이었던 당시 벤자민은 에드먼과 적어도 보름에 한 번 같이 차를 마셨다. 에드먼은 그 시간을 꽤 소중하게 여겼다.
그건 벤자민의 배려였다. 전대 공작은 에드먼이 단 한 수업이라도 빠지는 것을 가만두지 않았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직접 관리했다. 그런 에드먼에게 벤자민과 차를 마시는 시간은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다.
“저는 많이 늙었고, 각하께서는 어른이 되셨지요.”
벤자민은 에드먼이 갓난아기일 때부터 곁을 지켰다. 핏덩이가 손을 뻗어 벤자민의 검지손가락을 쥐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에드먼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대는 좋은 집사고, 수하였으며, 날 키워 준 아버지와 같다.”
“각하.”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찻잔은 텅 비어 있었다.
“제가 도망치길 바라셨습니까.”
지난 이틀간, 에드먼은 단 한 번도 벤자민을 찾지 않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벤자민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갓난아기일 적부터 봐 왔기 때문일까, 벤자민은 유독 에드먼의 뜻을 잘 이해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에드먼은 벤자민에게 도망칠 시간을 준 것이다.
“알고 있었군.”
“예.”
“그럼 왜 도망가지 않았나.”
벤자민은 전에 했던 말을 또 하는 대신 잠시 에드먼을 응시했다.
“각하께서 마님을 사랑하시지만 멀리 보내드린 것과 같습니다.”
에드먼의 어깨가 굳었다.
“제가 어찌 각하의 곁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죽는 순간까지 각하의 집사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실패하지 않는다, 벤자민. 난 이것을 꼭 성공해야 해.”
“…그리 살아가시길 택하셨습니까.”
“다프네에게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 그리고 어쩌면 내가 죽은 후에도 씻길 수 없는 죄다.”
“각하.”
“받아라.”
에드먼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단 서류 한 장과 편지 한 장이다.
벤자민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순간 치솟은 불안감에 손안이 금방 축축해졌다.
“서류에는 내 유서의 내용대로 처리된 것들이다. 편지는 다프네에게 주어라.”
“각하.”
“네가 죽기 전에, 혹은 내가 죽은 후에.”
에드먼은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제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에드먼이 버석하게 마른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사람을 추악하게 만들어.”
다프네가 자신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사실은. 다프네가 평생 죽을 때까지 나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다른 이를 만나 사랑에 빠져도 되니까. 죽는 순간 사랑하는 이가 아닌 나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원망도 상관없으니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오로지 내 것이면 좋겠다.
“수고 많았다.”
어깨를 두들기는 손길이 떨어져 나가고 에드먼이 방을 나갔다.
“…각하.”
벤자민은 숨을 헐떡였다. 빨리 그를 막아야 한다. 에드먼은 황태자를 돕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죽으러 가는 것이다.
‘각하를 막을 사람….’
단 한 명뿐이다.
마님.
다프네를 찾아야 한다.
***
“부인은?”
“방에 계십니다.”
칼리토의 말에 수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칼리토의 눈썹이 높게 솟아올랐다. 무언가 그의 마음에 안 찰 때 하는 행동이었음으로 수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대답이 늦지도 않고 말도 버벅거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또?”
“예?”
“내가 방에 가둔 것도 아닌데 방에만 틀어박혀 있군.”
“그….”
수하는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 했다.
다프네는 이 저택에 온 후로 단 한 번도 방을 나오지 않았다. 칼리토가 딱히 감금한 것도 아니었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안에서 잠갔다.
“저라도 제가 ‘미지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작 부인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신 거죠.”
“흠, 그런가?”
칼리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는 수하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 보고를 이어 갔다.
“공작 부인이 말을 해놓은 것인지 부단장과 그 기사는 얌전합니다. 남작 부인은 뭐 반항할 기세도 보이지 않으시고요.”
“다행이군.”
적어도 일이 시작되어 에드먼이 발을 뺄 수 없게 된 후에 검은 기사단의 기사를 풀어 줄 생각이었다.
그 전에 알게 되면 에드먼의 칼끝에 선 이가 자신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칼리토는 괜히 서늘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성녀는 주시하고 있나?”
“예. 어젯밤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 추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아무래도 마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텔레포트를?”
칼리토가 몸을 수하에게 돌렸다.
“예.”
“허….”
텔레포트는 마나 소모가 심하다.
그것에 비해 이동 인원도 극소수이기 때문에 보통 전쟁터에서 왕이 죽기 전 왕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더군다나 황궁에 있는 마법사 중에서 텔레포트를 할 만한 이가 없었다.
“혹시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이것도 주의해야겠군.”
“예. 기사들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쩌릿한 긴장감이 손바닥 안을 파고들었다. 칼리토는 괜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긴장감을 분해시켰다.
“전하.”
“왜 부르느냐.”
수하는 입을 달싹거렸으나 이미 그의 눈에서 걱정 어린 시선을 읽어 낸 칼리토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제 와서 도망치라고?”
“그러시겠습니까?”
수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되물었다.
“너….”
칼리토는 무언가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나 몰래 뭘 준비한 것이냐?”
“아니, 그냥… 혹시 모르잖습니까. 계획은 어젯밤 무산시켰습니다.”
“내가 오늘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어쩌려고 어젯밤에?”
“그렇다면 제 한 몸 희생해야지요.”
“웃기는 소리.”
그렇게 말하는 칼리토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날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너뿐일 거다.”
“전하….”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인생 헛살았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칼리토는 상황을 정리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모였다고 했지?”
“예.”
“자, 가 보자.”
단 며칠 사이 많은 게 바뀔 것이다.
칼리토는 성공한, 혹은 실패한 미래를 예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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