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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22화 (122/145)

122화

“마실 텐가?”

칼리토는 찻잔을 내밀었다. 마침 갈증이 났기에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토는 차를 찻잔에 따르며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를 보고 별로 놀라지 않는군.”

“…놀랐습니다.”

깨어나 보니 재갈이 물려 있고 앞에 황태자가 있었다. 당연히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나는 부인을 납치했어. 나한테는 윈터 공작의 약점이 필요하거든.”

“약점… 이라니요?”

다프네가 눈을 깜빡였다.

“부인은 윈터 공작의 약점이야. 유일한 약점.”

다프네는 혼란스러운 눈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렸다.

‘약점이라고?’

흠이라면 모를까 단 한 번이라도 약점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표정은 숨겼을지언정 찻잔을 쥔 손의 떨림은 마저 숨기지 못했기에 칼리토는 금방 알아차렸다. 다프네가 몹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일단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보게나.”

다프네는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북부로 향하던 중이었고 나는 그대를 납치했어. 윈터 공작은 나와 협력하고 있지만 내 수하가 아니지. 나는 윈터 공작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해. 그는 믿음직스럽지만 믿을 만한 사람은 아직 아니라는 거지.”

“…….”

목이 탔다. 다프네는 내려놓았던 찻잔을 금방 다시 들어 올려 입술을 축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축약해 보자면, 나는 윈터 공작의 복종을 받기 위해 부인을 인질로 삼은 걸세.”

다프네는 눈을 내리깐 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난감했다.

그 머뭇거림을 알아챈 칼리토가 턱을 까딱였다.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 보게.”

“…잘못 짚으셨어요.”

“무엇을?”

“전 에드먼의 약점이 아닙니다.”

칼리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가 왜 내게 협력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황제 폐하와 오라버니와 사이가 좋지 않고 또….”

다프네는 눈을 데구륵, 굴렀다.

칼리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인, 부인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난 그리 생각해. 그리고 나는 부인을 인질 겸 보호하고 있는 걸세.”

“보호요?”

누구에게서?

황녀? 아니면 오라버니?

“성녀에게서.”

다프네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성녀가 나오지 않은 지 몇십 년이 지났다. 다프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없는 소문들을 꼼꼼하게 되짚어 보았지만 성녀와 관련된 것은 없었다.

“오늘 아침, 신전에서 공표를 했네. 성녀의 존재를 알렸어.”

칼리토가 내민 것은 찢어진 신문 한 면이었다.

신성해 보이는 성녀가 눈을 감은 채 대신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 붙어져 있었고 이 외의 기사 내용은 찢겨져서 볼 수 없었다.

“성녀가 저를 왜 노리는 거죠?”

“정말 몰라?”

칼리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나?”

다프네의 몸이 굳었다.

“그대의 피나 채액으로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고.”

“그걸, 어떻게….”

실험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칼리토가 하나하나 짚어 넘기자 다프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칼리토는 이번에 어떤 책을 내밀었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질 낮은 투박한 가죽으로 된 책 표지를 넘기자 흔히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양피지로 된 이상한 책이었다.

<기억의 기록>

다프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다프네가 읽는 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 칼리토는 그녀를 관찰하듯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핏줄이 다 보일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가진 다프네는 이상하리만큼 흐릿한 인상이었다. 중간중간 마주친 눈동자가 독특한데 전체적으로 흐릿했다. 목은 길었으며 속눈썹은 생각보다 풍성했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 탓에 병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탁.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다프네는 한 층 핏기가 가신 얼굴로 책을 덮었다.

“왜 이 책이 금서가 되었는지 알 것 같지 않은가. 영웅에 대한 악담만 가득하지. 하지만 이만큼 영웅에 대한 존재를 확실하게 해 주는 증거가 없어 가지고 있었지.”

“…….”

“나도 이걸 밤새도록 읽었지만 믿기지 않았단 말이지.”

“…….”

“근데 이거 말곤 설명이 안 돼.”

“…….”

“그대는 ‘미지의 존재’야.”

미지의 존재.

이름이 존재하지 않고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에 성별조차 알 수 없는 그를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라 불렀다.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린 책에서 미지의 존재의 활약은 아주 미세하다.

이 때문에 미지의 존재를 영웅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가 악마의 봉인함으로써 큰 활약을 했고 이 탓에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동료들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미지의 존재가 악마를 봉인한 것은 맞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는 영웅들의 동료가 아니었다.

미지의 존재에게는 그 어떠한 힘도 통하지 않았다. 성력, 마력, 마나. 심지어 천족과 마족의 힘까지.

미지의 존재는 본래 아주 하찮은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가 가진 능력을 알게 된 영웅들은 미지의 존재를 강제로 동료로 삼고 전쟁터를 끌고 다니며 방패 역할을 대신했다.

필자는 보았다. 미지의 존재가 동료들의 앞에 서서 대신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미지의 존재는 목숨으로 악마를 봉인하지 않았다.

미지의 존재는 분명 살아 있었다. 죽어 가는 동료들을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주신이 그 바람을 들어주신 것이다.

악마를 봉인했다는 것은 그 봉인을 풀 수도 있다는 뜻.

악마의 힘을 기억하는 영웅들은 공포에 떨었노라. 그리하여 미지의 존재를 죽였다.

그리고 목숨으로 악마를 봉인했다고 알렸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필자는 영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보았기에 후세를 위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영웅을 믿지 마라.

- <기억의 기록> 제21장 본문 발췌

***

짜악!

“어째서, 이번에도!”

귀를 때리는 따가운 소리와 함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렸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눈을 굴렸다.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녀님.”

문이 열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씩씩거리던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후작.”

“진정하시지요.”

바네사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숨을 깊게 내뱉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세르기는 바닥에 쓰러진 신관을 향해 눈짓하자 붉어진 뺨을 움켜쥐고 후다닥 방을 나갔다.

“대신관님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제 공표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 아닐까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런가요.”

바네사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차분한 모습이었다. 다만 아직 열이 다 내려가지 않아 볼이 상기 되어 있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바네사는 이틀 전부터 급격히 불안해했다. 초조해하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번에는 뭐였죠?”

“윈터가의 대모요.”

“힘들게 구한 것이었을 텐데, 일이 잘 풀리지 않으시군요.”

힘들게 구하긴 했다.

소피아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였고 수도의 미묘한 기류를 읽은 것인지 호위를 평소보다 배로 고용했다. 그러나 언데드를 이기진 못했다.

언데드를 떠올린 바네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만족스러웠어요. 언데드가 생각보다 쓸모가 있어요.”

“다행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죠?”

“예, 새벽 즈음부터 시작할 것 같습니다.”

내일은 건국일 당일이다.

원래 바네사는 성녀로 공표되는 날을 건국일로 정했으나 거사가 있는 날이라 이틀을 당기게 되었다.

“제가 짜낸 이야기가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들다마다요.”

반역을 준비한 황태자와 윈터 공작.

황실을 지키기 위해 둘을 막는 블레드 후작. 모두를 포옹하는 성녀.

실제로 황태자와 에드먼을 죽일 생각이 없는 바네사는 그것이 포옹한다는 표현에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일이 끝나면 여유가 많이 생기니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북부에 다녀와야겠어요.”

“북부에 말입니까?”

바네사는 옅은 미소로 세르기의 물음을 회피했다.

***

어두운 침실. 한 여인이 침대에 가까이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의 몸은 온통 화려한 걸로 치장되어 있었기에 어두운 침실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일어나.”

잔뜩 갈라져 메마른 음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일어나.”

여인은 아까보다 더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라고!”

마린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황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린다는 손을 들어 황제의 뺨을 내리쳤다. 손톱만 한 보석이 달린 반지가 황제의 뺨에 긴 생채기를 냈다. 마린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렸다.

“일어나, 일어나!”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때리고 꼬집어도 황제는 여전히 똑같다. 마린다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일어날 때가 됐잖아….”

황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마린다고 알고 있었다.

세르기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는 마린다를 만나 주지 않았다. 마린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가 자신이 토사구팽당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지켜 줄 이는 황제가 유일하다는 생각에 마린다는 황제를 깨우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마린다는 흐느끼다가 황제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 한 마린다와는 다르게 어미의 양분을 쪽쪽 빨아먹은 배 속의 생명은 어느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원했잖아. 그러니까 빨리….”

아무리 말랐다고 해도 황제는 전장을 돌아다니던 기사였기에 팔 하나도 무거웠다.

마린다가 비틀거리면서 손을 놓치자 힘없는 손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

마린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했다.

“도, 도망을….”

“이런, 마린다.”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마린다는 몸을 휙 돌렸다.

세르기는 엉망진창인 황제를 보았다가 마린다를 보았다. 정확히는 부풀어 오른 마린다의 배를.

마린다는 본능적으로 배를 움켜쥐며 또다시 뒷걸음질했다.

“오, 오지 마!”

“황제의 씨를 품은 실험체는 처음이라 설레네요.”

마린다는 벌벌 떨었다.

“반항하지 마요. 흥분되어서 어떤 실수를 할지 모르니까.”

“안 돼, 안, 안 돼….”

마린다가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에 잡혀 그대로 어둠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곳에 남은 건 세르기의 콧노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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