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때 이야기를 들어 줬다면, 하는 후회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하물며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데미안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담담한 얼굴로 깜빡거렸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 보는 것. 똑같은 크기는 아닐지언정 비슷하게 느껴 보고자 최선을 다했다.
데미안의 사고 회로와 행동은 정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에드먼은 그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말할 자격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그 최선이 신전에 가는 것이었느냐.”
“예.”
데미안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서류를 읽어 보십시오.”
그 말에 에드먼은 무의식중에 계속 들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주었다가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그럼 며칠 후 다시 봬요, 아버지.”
데미안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방에서부터 나오는 환한 빛으로 인해 유난히도 눈에 띄는 테라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가 보였다.
“크흑.”
데미안은 한 발짝 떼자마자 치밀어 오르는 고통에 몸을 잘게 떨었다.
가쁜 숨을 억지로 규칙적으로 내뱉기를 반복하자 한참 후에야 숨이 진정됐다. 고통도 한층 옅어졌다.
데미안은 인중에 흐르는 코피를 익숙하게 닦아 내며 고통으로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그리고 이내 발걸음을 돌려 어둠 속에 몸을 감추었다.
***
홀로 남은 에드먼은 데미안의 흔적을 쫓다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서류를 읽어 보라는 데미안의 말이 떠올랐기에 에드먼은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한 문장씩 눈에 담을수록 무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 점점 다른 감정이 깃들었다.
의아, 경악, 분노.
“이게, 무슨….”
서류를 쥔 에드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에 따라 서류도 흔들렸다.
손에 힘을 주자 서류를 찢어질 듯 팽팽해졌다. 에드먼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 내렸다.
다프네에 관한 것이다. 정확히는 세르기의 실험 일지의 일부분. 즉 다프네를 실험한 일지 부분.
실험을 시작한 나이는 고작 여덟 살 적. 방계를 사고사나 실종으로 위장해 납치한 세르기는 직계인 다프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다프네에게서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세르기가 만든 장치에 몸을 연결하여 신력을 몸 안에 넣는다. 사람은 일종의 성력을 운반하는 도구가 되는 실험이었다.
다프네의 몸은 신력을 거부하며 밀어냈고 그 부작용으로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났다. 세르기는 이럴 리 없다며 실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프네는 무려 10년 동안 매주 그 지옥 같은 실험실에 제 발로 들어가야 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무관심한 아버지, 이미 모두 세르기의 사람이 되어 다프네를 신경 쓰지 않는 사용인. 다프네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문득 어느 한 장면이 그의 앞을 스쳐 갔다.
“북부 생활은 괜찮으십니까.”
결혼 2년 후였던가, 3년 후였던가.
어쩌다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에드먼이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결혼 후 2, 3년이 지난 후에야 한 질문에 다프네는 아주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은 매우 늦게 나왔다.
“만족스러워요.”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었기에 에드먼은 그 대답을 들었음에도 다른 질문이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다프네의 진심이 깃든 얼굴을 보며 무어라 생각했더라.
연기를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하… 하하….”
잔뜩 힘 빠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최악이었다.
에드먼은 흐린 눈으로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한 문장도 틀리지 않고 기억되었음에도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다프네의 흔적이라도 되는 듯 읽고, 또 읽었다.
에드먼은 동이 뜨는 것을 창백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의 옆에는 밤새도록 피운 궐련 끄트머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새벽 내내 내용을 읽고 또 읽는 것을 멈춘 에드먼은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다프네가 그동안 어떤 일을 당했는지.
데미안이 왜 신전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칼리토가 내민 손을 잡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다프네를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먼의 계획은 간단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자극하고 다프네를 위헙하는 황녀와 황제 그리고 블레드 후작을 친다. 다프네는 모든 인연을 끊고 새로운 인연과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은….
‘난 무엇을 해야 하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버지와 저는 죽으면 안 됩니다. 이 쿠데타를 성공시켜서 오래 살아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께 속죄해야 합니다.”
오래 살아가는 것.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다프네에게 속죄해야 하는 것.
단지 이 두 가지는 에드먼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에드먼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것.’
***
harbaragi_syk
“여기까지 다시 오느라 수고했네.”
“…….”
“혹시 내 수하들이 험하게 다룬 건 아니지? 만약 그랬어도 조금만 참아 주게. 기사 두 명이 워낙 실력자라 예상보다 더 힘들었거든. 그래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대를 거칠게 대했을 수도 있어. 이 점은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
“아, 말을 못 하는 중이군.”
칼리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짓했다.
옆에 있던 수하가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풀었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질문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칼리토가 도리어 질문을 재촉했다.
“무슨 질문이라도 해 보게, 공작 부인.”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전하.”
“참으로 많고 긴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군. 적절한 질문이었어.”
음,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칼리토가 말을 정리하는 동안 다프네는 생각을 정리했다.
다프네가 깨어난 것은 북부로 막 넘어서던 때였다. 처음에는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마차 안에 함께 타 있던 뉴벨 남작 부인이 무릎을 꿇고 부탁했다.
“마님, 부디 각하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때 크리스가 전령을 보냈을 때기에 마차는 멈춰 있었다. 뉴벨 남작 부인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 습격이 시작됐다.
이상한 것은 그 습격이 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프네도 알아챈 것을 부단장인 크리스가 알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끝없이 밀려들어 오는 수가 적어도 수십, 거의 백에 가까웠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분명 시간 흐르고 크리스와 유진의 체력이 떨어진다면 상황은 역전될 것이다. 다프네는 마차 안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이다. 다프네는 이런 인력을 사용할 만큼 자신을 노리는 이들을 떠올렸다.
‘오라버니?’
아니다. 그는 이렇게 대놓고 하는 걸 싫어한다. 깊은 밤, 자객 하나를 몰래 그녀의 침실에 밀어 넣을지언정 이런 방법을 선호하지 않는다.
‘황녀?’
이것도 아니다. 황녀가 다프네를 데려오려 했다면 대놓고 황제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보낼 것이다.
도무지 생각이 좁혀지지 않았고 그사이 복면을 쓴 이들의 수가 배는 늘어 있었다.
다프네는 입을 꾹 다물고 뉴벨 남작 부인을 안에 둔 채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님!”
유진은 다급히 앞에 있는 자를 걷어차고 다프네에게 다가왔다.
“어서 들어가세요!”
“괜찮아요.”
“마님!”
다프네는 자신을 주시하는 이를 바라보았다. 복면을 쓴 이들의 수장이라는 직감이 왔다. 수장이 손을 들자 공격이 멈추었다.
크리스도 주춤거리다가 다프네의 곁으로 왔다.
“내가 목적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만 가는 건가요?”
“다 데려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가면 죽나요?”
“아닙니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다프네는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 생각했다.
고민을 짧았다.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요.”
“마님!”
“경, 이대로 가다간 다 다치고 말 거예요.”
크리스는 흐르는 땀을 닦아 내지도 못한 채 조금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 명령을 들으라고 하지 않던가요?”
“…하셨습니다.”
크리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크리스와 유진은 다프네의 마을에서 형제로 위장해 그녀의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기에 앞서 에드먼은 다프네의 말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에드먼의 명을 받았다.
크리스는 검을 집어넣었고 유진도 조용히 그를 따랐다.
그리고 다프네가 안도하는 사이, 방심한 틈을 타 수장이 다가와 다프네를 기절시켰다. 다프네의 마지막 장면은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자신에게 손을 뻗던 크리스의 모습이었다.
다프네는 어렴풋이 이 일을 꾸민 자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그게 황태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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