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수하는 데미안이 열고 나간 창문을 닫으며 물었다.
“무엇을?”
칼리토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대답하기 싫을 때 칼리토가 회피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었기에 수하는 짧게 진저리를 쳤다.
“무엇이긴요. 윈터 공작 부인이 살아 있다는 것이지요. 소공작은 각하께 이것저것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흐음.”
칼리토는 데미안이 박차고 나간 창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이것이 성공하면 나는 황제가 될 몸이야.”
“그렇지요.”
“황제가 진 빚은 참 갚기 힘든 거지. 윈터 공작만으로도 벅차.”
“…그냥 알려 주기 싫었다고 사실대로 말씀하십시오.”
칼리토는 언제 무표정이었냐는 듯 허허,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건방지구나, 건방져.”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내치시든가요.”
“건방지다고 했지 마음에 안 든다고 한 적은 없다.”
“예, 예.”
수하는 한숨처럼 답을 하였다.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칼리토의 수하였으므로 그가 하는 말이 장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고작 이런 일로 자신을 내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미한 자작 가문의 사생아였던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전부 칼리토 덕분이었다.
수하는 칼리토가 무슨 짓을 해도 그의 곁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똑똑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생아들과는 다르게 팔려 가지 않고 아비의 사업을 도우며 학대당하던 때 손을 내민 칼리토는 그에게 구원 그 자체였으니까.
“그래서, 좀 알아 왔느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수하는 툴툴거리면서도 칼리토의 앞에 서서 허리를 반쯤 숙인 채 보고를 시작했다.
“목적지는 남부입니다.”
“남부?”
“예. 정확한 지역까지는 알 수 없으나 남부인 것은 확실합니다. 흔적을 지우고 길을 꼬아서 가고 호위 두 명의 실력이 꽤 상당한지라 추적을 붙이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싶습니다.”
“무리해.”
“…습격하라는 말씀입니까.”
수하의 물음에 웃음기 없는 얼굴 위로 갈색빛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공작의 약점을 잡고 있어야 한다.”
“전하의 적은 저의 적이기도 합니다. 전하께서 제 적인 이유가 없으니 같은 편이 되기로 한 것이고요.”
공작이 나에게 협력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부족했다. 공작에게 황제는 증오의 대상도, 복수의 대상도 아니다. 단순히 자신을 건드리고 도발하는 상대일 뿐.
부족했다.
“공작 부인을 납치하시겠다는 것이군요.”
“지켜봐서 알겠지만 난 공작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어. 그리고 난 쿠데타 성공 후에도 몇 년 동안 공작의 지지가 필요해.”
칼리토는 몇 번이곤 공작에게 접근해 완전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공작은 칼리토의 수하가 아니었다. 단순히 이 거사에 협력하는 것이 전부다.
“약점을 쥐고 있다면 고개를 조아리는 척이라도 하겠지.”
“전하.”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무모하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도 칼리토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다.
‘만약 블레드 후작이 공작에게 접근한다면.’
약점인 공작 부인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한다면 공작은 굳이 실패 가능성이 높은 이 무모한 거사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먼저 약점을 잡아야 한다.’
그게 에드먼을 끝까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수하는 굳은 다짐을 마친 듯 생각을 정리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 부인을 데려오겠습니다.”
“…부탁하마.”
명을 내리면서도 칼리토는 이것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토는 수하가 나가기 전 불러 세웠다.
“‘미지의 존재’에 대해 알아야겠다.”
데미안은 분명 성녀와 세르기가 ‘미지의 존재’를 찾는다고 했다.
벽이 얇은 옆방에서 모든 걸 들은 수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론 경매장에 나온 기억의 기록은 블레드 후작이 전부 가져갔습니다.”
“아니지.”
칼리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가지 못하는 곳이 있지 않으냐.”
“…황실 서고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오직 황실의 피를 이은 자에게만 문을 여는 황실 서고는 확실히 세르기가 가지 못했을 장소이긴 했다.
황실 서고는 모든 책의 필사본이 존재한다.
설령 그것이 갈기갈기 찢긴 기억의 기록일지라도.
***
“도착하셨답니다.”
서류를 넘기던 기계적인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주어도 존재하지 않는 말의 뜻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에드먼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말이었으니.
“또한 더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령을 보내지 말라 했습니다.”
요한은 에드먼의 명을 따랐다.
“…그래.”
에드먼은 목소리를 쥐어짜 내 겨우 대답을 한 후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넉넉한 돈도 보냈으니 허드렛일하지 않아도 남은 생을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유롭고 평화롭게.
그러다가 마을의 건실한 청년과 결혼을 할 수도 있다.
다프네는 자신이 썩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아니다.
햇볕 아래에서 탐스러운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거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다. 분명 다프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시골 청년이 있을 것이다.
한집에 살고, 아이를 낳고.
순박한 시골 청년은 퍽 다프네를 아껴 줄 것이다. 작은 상처에도 호들갑을 피우고 매일 다정한 말을 속삭여 줄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하, 각하!”
요한의 다급한 부름에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요한은 당황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에드먼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손이었다.
“…아.”
에드먼은 손안에 재와 사라진 펜을 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인지했다. 저도 모르게 오러를 사용했다.
“대마법사에게 팔찌를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닙니까? 당장 대마법사에게 연락을 넣겠습니다. 분명 북부에 머무르겠다 하였으니….”
“됐다.”
에드먼은 손가락 사이에 낀 까슬까슬한 재를 털어 냈다.
“문제없다.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뿐이야.”
“하지만….”
“괜찮다.”
단호하게 말하자 요한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에드먼은 테라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만 물러가 봐.”
“…예. 무슨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요한이 물러가자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듯 선선해진 밤바람이 그의 머리카락과 옷가지를 흐트러트리며 집무실 안을 침범했다.
에드먼은 테라스 난간을 붙잡았다.
“데미안.”
“…여쭤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목소리는 바로 뒤편에서 들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까?”
에드먼은 고민했다.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체화했을 때부터 계속해 오던 고민이다. 데미안에게 모든 사실을 말할지 말지.
데미안은 아직 어리다. 충동을 참지 못한다. 만약 살아 있다고 한다면 다프네를 찾아갈지도 모른다.
그것까진 상관없다. 괜찮다.
그러나 작은 실수로 다프네가 데미안을 발견하게 된다면 모든 기억이 돌아올 것이다.
다프네가 먹은 약은 기억 삭제다. 정신 계열의 약이니 후유증이 컸으나 에드먼은 그 후유증을 최소화했고 이 탓에 약의 효능은 현저히 떨어져 불안정하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너도나도 다프네에게 그리 썩 좋은 가족이 아니었지.”
“…아버지.”
물론 다프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상처만 주고받는. 그런 관계일 뿐이었다.
“다프네는 우리 곁에 없는 것이 행복할 거다.”
“…….”
“그러니 너도 다프네를 잊도록 해라.”
“…싫습니다.”
에드먼은 몸을 틀었다.
어둠 속에 데미안의 인영이 달빛을 받아 어렴풋이 눈에 보였다.
“전 어머니를 잊고 살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가 받으신 고통을 평생 느끼고 간직하며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만을 생각할 겁니다.”
“데미안.”
데미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후회는 항상 늦게 하는 거라는 게 맞습니다. 아버지, 우린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무엇을.”
“블레드 후작의 금지옥엽. 힘들게 얻은 귀한 딸. 사치스러운 영애.”
데미안은 딱딱한 목소리로 마치 서류를 읽듯 줄줄이 읊었다.
“결혼 적 사교계를 떠돌던 어머니의 별명이지요. 아버지가 아는 결혼 전 어머니는 단지 이 세 별명이었을 테고요.”
에드먼은 침묵했다.
데미안의 말이 맞았다. 에드먼은 블레드 후작이 히죽거리며 다프네를 들이밀었던 날, 다프네에 대한 정보를 캤다.
아버지와 오라비의 그늘 속에서 멍청하고 순진하고 곱게 자란 영애.
보고를 듣고 든 생각이자 다프네를 향한 한 줄 평가였다.
“5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지만 어머니는 이 세 별명과는 너무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드셨습니까?”
했다.
금지옥엽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전대 블레드 후작 옆에 서 있는 다프네는 너무나도 어색해 보였다.
힘들게 얻은 귀한 딸이라기엔 전대 블레드 후작의 눈빛은 그저 딸을 도구로 이용할 생각밖에 없는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
사치스러운 영애라기에 다프네는 치수도 맞지 않고 급하게 맞춘 듯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데미안은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얼굴로 에드먼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느리게 올라오는 에드먼의 손에 억지로 서류를 쥐여 주었다.
“아버지가 모르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
“아버지와 저는 죽으면 안 됩니다. 이 쿠데타를 성공하게 해서 오래 살아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께 속죄해야 합니다.”
“…….”
“말하지 않은 건 어머니십니다. 하지만 이상함을 느끼고도 외면했던 건 아버지와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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