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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18화 (118/145)

118화

수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반대했으나 칼리토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칼리토에게는 최후의 선택이자, 유일한 선택이었다.

황제는 그를 엘리자벳과 결혼시키지 못해 안달이 났으나 에드먼에게는 사랑하는 부인도 있겠다, 그야말로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윈터 공작이 칼리토를 도와줄 마땅한 명분이 없었기에 모든 약점을 드러내고 손을 내민 것은 도박이었다.

칼리토는 그 도박에 성공했고 오히려 예상보다 훨씬 쉽게 받아들여 당황스러웠다. 그렇기에 칼리토는 방심하고 있었다.

“허… 이거 내가 완전히 당했군.”

칼리토는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공작은 각하를 우습게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 봤자 무엇 하겠느냐. 윈터 공작이 황위에 욕심이 없는 것을 감사히 여겨라.”

“하지만….”

“제대로 된 힘도 없으면서 황태자라는 직위만 믿고 기고만장해진 거지.”

“…….”

“내가 그토록 경멸하는 핏줄을 나도 모르게 의지하고 있었던 거야….”

수하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사소한 것이라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

칼리토는 의자에 깊게 파묻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전하께서 사소한 것까지 알아보라고 하셔서 뒤늦게 알아 온 것입니다. 오늘 이른 아침, 윈터 공작가에서 출발한 마차 한 대가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북부고 마부는 검은 기사단의 부단장이었습니다.”

“…마차 안에 탄 인물은?”

“윈터 공작 부인이었습니다.”

***

ㅎㅂㄹㄱ

“오렌트 백작가로 위로금을 보내.”

“…금액은 어느 정도일까요.”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뜬금없는 말에도 요한은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다.

지난번, 대리인으로 온 자신에게도 막말을 쏟아 내던 오렌트 백작의 입버릇이 기어코 에드먼의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팔 하나, 다리 하나.”

“적당한 금액으로 맞춰 보내겠습니다.”

어차피 사라질 가문이니 요한은 아낌없이 금액을 측정했다.

겉옷을 벗은 에드먼은 자리에 앉아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질렀다.

잠을 자기 위해 궐련을 몇 대나 피웠는데도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에드먼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요한이 말했다.

“별일 없다고 합니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할까.”

에드먼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남부에 도착하면 더는 보고를 받지 마라.”

“하지만… 알겠습니다.”

요한은 머뭇거리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너도 쉬어라.”

“예.”

요한이 나가고 에드먼은 품 안을 더듬었다.

까슬까슬한 종이의 재질이 손끝을 스쳤다. 에드먼은 차마 그것을 꺼내 보지도 못하고 연필로 그려진 선이 제 손끝에 문드러질까 봐 모서리만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앞으로 네 시간. 다프네는 모두 잊을 거다.

에드먼은 부디 시간이 빨리 흐르길 기다렸다.

***

“마린다가 사고를 쳤다면서요?”

바네사는 세르기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황궁에서 후작의 세력이 아직 닿지 않은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 아이도 참 대담해요.”

자칫하다간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좋게 말해 대담한 것이지, 실은 멍청한 행동에 가까웠다.

“제 주제에 사고를 쳐 봤자, 라고 생각했는데… 황제를 독살하려고 할 줄은 저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흐음.”

바네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윈터 공작 부인이 죽었다지요.”

“예.”

제 여동생의 죽음을 긍정하는 이치고는 매우 덤덤했다.

“아까 사망 신고서도 들어왔고 시체도 확인했습니다.”

“맞던가요?”

세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확인해 봤자다. 시체는 새까맣게 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이 죽어서 물어보는 건데요. 만약 공작 부인이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건가요?”

“흠. 미처 생각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아마 죽이지 않았을까요.”

세르기는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라 말하면서 바로 죽였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 모습에 바네사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세르기 블레드는 참 자신과 닮은 사내였다.

“여기 부탁하신 물건입니다.”

세르기는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바네사가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은 다름 아닌 <기억의 기록>이었다. <기억의 기록>은 단 하나의 책이었으나 사람들에 의해 군데군데 찢겨 곳곳에 흩어졌다.

이것이 그나마 책 형태의 모양으로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바네사는 곧바로 찻잔을 내려놓고 <기억의 기록>을 훑기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미지의 존재’에 대해 말한 거 기억해요?”

“방패로 쓰였다는 영웅 말입니까?”

“맞아요.”

바네사는 기억의 기록의 책장을 덮은 채 그 위를 손톱으로 두들기며 말을 이어 갔다.

“‘미지의 존재’는 실존해요.”

세르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디에….”

“에드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그럼 그때 공작을 신전으로 데려오라고 한 이유가….”

“네, 맞아요.”

바네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에드먼에게서 그 기운이 느껴졌으니 주변 인물일 확률이 높아요.”

“…‘미지의 존재’가 왜 필요합니까?”

그 말에 바네사는 미소를 지었다.

“내 계획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아주 중요한 인물이거든요.”

세르기는 멈칫했다. 생체 실험이라는 황홀함에 허우적거려 뒤늦게 든 의아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제 와서 그걸 묻는다고요?”

“단순히 황실을 장악하고 권력 위에 서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세르기는 바네사를 응시했다. 윈터 공작과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 닮은 얼굴이 미소를 머금은 채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비슷하지만 분명 달랐다. 모두를 꿇리고 권력의 정점 위에 서는 것은 같으나 무언가 더 있었다.

“후작은 참으로 눈치가 빨라요.”

바네사는 후후,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후작에게만 알려 줄게요. 대신관도 후작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바네사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을 채 감추지 못해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난 악마를 소환할 거예요.”

악마.

마족의 왕.

다섯 영웅이 힘을 모아도 도무지 소멸시킬 수가 없어 영원한 봉인을 했다는 악마는 주술사들이 숭배하는 존재였다.

흑마법 자체가 마족이 남긴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악마라는 존재는 기억의 기록에 쓰여 있던 것이다. 한마디로 악마가 실존했다는 증거는 없다.

“악마가 실존합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봉인되어 있어요.”

“어디에 봉인되어 있습니까?”

세르기의 심장이 흥분으로 빠르게 뛰었다. 그의 얼굴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악마….’

세르기는 악마라는 단어가 자신을 이렇게 흥분하게 만들 줄 미처 몰랐다. 그 어떤 실험에서도 이만큼 심장이 빨리 뛴 적 없었다.

악마라는 매혹적인 단어에 홀린 세르기의 눈이 몽롱해졌다.

“마지막 대전쟁이 어디서 치러졌죠?”

“검은 숲이죠.”

“그리고 그곳에 신전이 있죠.”

세르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이상한 제단.”

사람을 홀리는 제단이었다. 아주 잠깐 시선을 준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그곳에 손을 댈 뻔했다. 바네사가 손을 대면 큰일이 난다며 단단히 경고하여 겨우겨우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사람을 매혹하는 악마 그리고 제단.

“그곳에 악마가 봉인되어 있는 겁니까?”

바네사는 미소와 침묵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악마의 봉인을 깨우기 위해서는 ‘미지의 존재’의 상당한 피가 필요해요. 목숨을 잃을 정도로 많은.”

“이유가 뭡니까?”

“성녀의 기록에 따르면 ‘미지의 존재’가 목숨으로 악마를 봉인했어요. 그러니 깨어날 때도 똑같은 대가가 필요하죠.”

“봉인….”

세르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악마에서 홀린 기분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바네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러니 후작,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요.”

“당연합니다. 황태자가 윈터 공작을 끌어들였다고 해서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에드먼이 큰 힘을 가진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 힘의 몇 배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 황태자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악마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신다 약조한다면, ‘선물’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미 저번 만남에서 세르기의 ‘선물’의 맛을 본 바네사의 눈이 반짝였다.

“좋아요. 악마와 만나게 해 줄게요.”

“사실 우리에겐 황궁 기사단을 빼면 검은 기사단과 견줄 병력이 없지요.”

“그렇지요.”

‘기사들인가?’

생각보다 진부하고 쓸데없는 선물에 김이 빠진 듯 대답하는 바네사의 목소리는 흐릿했다.

세르기는 예상한 것인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손을 튕겼다.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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