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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17화 (117/145)

117화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칼리토는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낮게 깐 목소리를 보아하니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이야기임이 틀림없었다.

“각….”

“쉿.”

칼리토는 손을 들어 의문을 표하는 수하의 입을 다물게 한 후 흘러나오는 말소리에 집중했다.

“무슨 소식이요? 아, 혹시 윈터 공작의 저택이 불탄 것 말입니까?”

“예. 들으셨군요.”

“모를 수가 없죠. 불이 어찌나 크던지 제 저택에서도 연기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예상대로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한 것이었다.

김이 샌 칼리토는 금세 심드렁해진 얼굴로 발을 까딱거렸다. 일단 끝까지 들어 보자는 심사였다.

“각하….”

뒤에서 수하가 간절히 그를 불렀으나 칼리토는 귀찮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대충 휘저었다.

그사이 대화가 이어서 진행되었다.

“내 처남이 황궁에서 일하여 말해 준 것인데 윈터 공작이 공작 부인의 사망 신고서를 제출했다더군.”

“반나절도 안 돼서 말입니까?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물론 이게 우리한테 좋은 일이잖습니까. 저번 회의 때만 해도 공작 부인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그렇긴 하지만… 고인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렌트 백작.”

“난 그런 생각을 했다니까. 공작이 황녀와 손을 잡고 윈터 공작 부인을 살해한 건 아닐까 하는….”

에드먼이 지나치는 것은 그때였다.

“공작?”

칼리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공작이 왔음에도 말하지 않았느냐고 눈빛으로 질책하자 수하가 억울한 듯 눈을 축 늘어트렸다.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전하께서 막으셨잖습니까.”

아까 전 두 번째 부름에 에드먼이 왔다는 걸 말하기 위함인 줄 몰랐다. 칼리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급히 에드먼을 막아섰다.

“에헤이, 공작. 진정을 좀….”

에드먼과 눈이 마주친 칼리토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팔 하나, 다리 하나.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그래.”

에드먼의 살기에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 있던 칼리토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마저도 에드먼이 시선을 돌렸기에 대답이 가능한 것이었다.

에드먼은 칼리토를 비켜 안으로 들어갔다.

“윈, 윈터 공작 각하?”

화들짝 놀라는 소리와 함께 에드먼은 오렌트 백작의 뒷덜미를 잡고 방을 나왔다.

간결하게 눈인사를 한 에드먼이 옆방으로 들어가자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1초가 1분 같던 짧은 시간이 흐르고 에드먼이 방을 나왔다.

“흑, 흐윽….”

닫히기 전 문틈으로 보이는 오렌트 백작은 피 웅덩이 위를 뒹굴고 있었다.

“안 들어가십니까.”

에드먼은 회의장 앞에서 고개를 까딱였다. 칼리토는 그제야 발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가지.”

칼리토는 에드먼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제 멍청한 수하의 말을 떠올렸다.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아무래도 윈터 공작 부인은 반역자 가문이고… 콩깍지가 벗겨지기 딱 좋은 시간이 흘렀군요.”

‘콩깍지가 벗겨져?’

진짜로 콩깍지가 벗겨진 사람이라면 이런 반응을 하지 않았을 테고.

그런 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길을 막는 자신마저 찢어 죽일 것 같은 에드먼의 시선을 상기하자 저도 모르게 오싹 돋아난 소름에 칼리토는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허….”

황당함에 젖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에드먼의 약점은 알려진 것이 없다. 아무리 그의 뒤를 캐 봐도 수상쩍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칼리토는 더욱이 에드먼과 손을 잡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에드먼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같은 편이 된 후에도 그의 약점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편일수록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어야 배신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에드먼의 약점을 찾기는 쉽지 않았고 분명 이렇다 할 것을 찾지 못했었다. 조금 전까진.

“…약점을 알 것 같기도 하군.”

“예? 무슨 약점 말이십니까?”

“됐다. 무능한 놈 같으니라고.”

칼리토는 수하를 향해 혀를 차며 몸을 휙 돌려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칼리토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자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은 느슨하게 풀렸다.

그는 그것이 에드먼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피비린내를 풀풀 풍기며 피 묻은 손을 태연하고 닦고 있는 에드먼의 모습은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앉게.”

칼리토가 자리에 앉자 다른 이들이 슬쩍 눈치를 보며 회의를 시작했다.

“계획은 변경 없이 그대로 갑니다.”

“그래도 오늘 같은 일이 있었는데….”

에드먼은 피가 묻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변경하면 안 되겠죠. 안 그렇습니까, 전하.”

“공작의 말이 맞아.”

제삼자처럼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던 칼리토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쏠리자 자세를 바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 공작 부인께 그런 일이 생긴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계획을 변경할 순 없다. 추모는 그 후에 해도 충분해.”

칼리토까지 그리 말하자 다른 이들은 수긍했다.

칼리토는 양손을 깍지를 낀 채 입술에 댔다. 자칫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 순식간에 무겁게 내려앉자 모두 귀를 기울였다.

“이 일은 다른 배후가 있을 걸세. 거사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인 윈터 공작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 보면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블레드 후작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지.”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제 혈육을 이렇게….”

“공작 부인을 아끼는 줄 알았는데… 참으로 가차 없군요.”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세르기가 다프네를 안고 갈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은 내심 안도했다. 만약 다프네가 세르기를 따르게 된다면 윈터 공작가를 놓아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인 에드먼이 없다면 거사가 성공할 확률은 더 낮아진다.

괜히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칼리토와 손을 잡았다가 목만 날아갈지도 몰랐기에 만약 다프네가 세르기와 손을 잡았다면 그녀를 처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저들끼리 은밀하게 알아보려던 찰나 이런 일이 생기니 믿음이 두터워졌다.

‘아주 대놓고 안도하고 있군.’

칼리토는 에드먼이 또 칼을 꺼내 들 기미를 보일까 봐 그를 흘끔거렸으나 눈을 반쯤 내리깐 채 그들을 주시할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에드먼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알 텐데 안타깝게도 저들 중에는 그만큼 눈치 있는 이들이 없었다.

‘저것들도 쓸모를 다하면 버려야지.’

쿠데타를 돕겠다고 나선 이들 중 제대로 된 이는 손에 꼽았다. 전부 한미한 가문에다가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기에 칼리토와 에드먼, 유레이트만이 진짜 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 분수도 모르고 쿠데타에 협력하는 대신 성공 후에는 딸을 황후로 맞이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들까지 있으니 칼리토는 문득 자신의 이러한 처지가 참으로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공작이 부인을 잃어 상실감에 빠져 있는 동안 내가 범인을 찾았네.”

“누구입니까?”

“피렌 남작일세.”

“예? 그자가 왜….”

“알고 보니 블레드 후작의 숨은 수하였더군.”

또다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칼리토는 미리 짜 놓은 대본대로 줄줄이 읊었다.

“자자, 그럼 그 문제는 해결되었고. 계획은 변경 없이 진행하는 걸로 하세.”

애당초 예정이 있던 회의가 아니었던지라 금방 파했다.

칼리토가 상황을 정리하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자리를 뜬 몇몇은 문이 채 닫히지 않은 옆방의 모습을 본 것인지 숨을 들이켜며 창백한 얼굴로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공작.”

칼리토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드먼을 붙잡았다.

“난 최대한 그대에게 무엇이든 알려 줄 것이네. 숨기는 것 없이.”

“그렇습니까.”

“그런데 난 아직 그대가 의심스러워. 이번 방화 사건도 그렇고.”

“…….”

“정말 자네가 한 짓이 아니야?”

짧은 정적도 잠시. 칼리토는 옅은 한숨을 내쉬는 에드먼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전하.”

“어?”

“전 최대한 전하를 돕고 싶습니다.”

“어… 고맙네?”

칼리토는 엉겁결에 감사를 전했다.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전하의 적은 저의 적이기도 합니다. 전하께서 제 적인 이유가 없으니 같은 편이 되기로 한 것이고요.”

“그렇지….”

“저를 믿든 믿지 않으시든 전하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에드먼은 피를 채 닦지도 않고 검집에 넣어 놓은 칼의 손잡이를 손으로 매만졌다.

“제 뒤를 캐는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

“그렇다면 제가 먼저 전하의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에드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쉬십시오.”

에드먼은 그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저, 저저…!”

칼리토의 수하는 얼굴이 붉어진 채 에드먼이 나간 문을 향해 삿대질했다.

“조용히 해.”

칼리토는 쏟아져 나오려는 수하의 말을 시작도 하기 전에 막았다.

“전하.”

“윈터 공작의 말은 틀릴 게 없다.”

칼리토에게는 힘이 없다. 고작해야 정보를 모으는 데 능하다는 것뿐. 정치적으로 칼리토는 이름뿐인 황태자였다.

정권은 이미 오래전부터 탈세와 비리를 일삼는 이들이 사이좋게 나눠 가진 지 오래다.

황제의 총애도, 친모의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 황태자가 황제가 되어 봤자 허수아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칼리토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살기 위해 그리고 허수아비가 되지 않기 위해 이용하기 쉬운 멍청한 황태자를 연기했다.

저를 잡아먹기 위해 침을 뚝뚝 흘리는 하이에나 같은 이들을 피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

귀족들의 눈을 피하고자 세력을 끌어모았기에 칼리토의 수하들은 대부분 평민이다. 냉정하게 말해 정치적으로 쓰임이 없었다.

쿠데타에 성공하더라도 귀족들, 특히나 고위 귀족들이 힘을 모은다면 아주 손쉽게 황위 계승권을 박탈시키고 새로운 허수아비로 먼 방계를 데려와 황위에 앉힐 수 있을 것이다.

칼리토에게는 고위 귀족이 필요했다.

황실과 사돈을 맺지 않았으나 직위는 높고 따르는 귀족과 평민이 많은.

에드먼 윈터 같은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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