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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16화 (116/145)

116화

식당을 나온 에드먼에게 요한이 다가왔다.

“황비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마린다가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별일 없었다. 받아라.”

에드먼은 요한을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 낸 요한이 손을 펴자 웬 하얀색 알약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황비가 황제에게 먹이는 알약이다.”

에드먼은 마린다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매달리게 두었던 것은 마린다가 황제에게 약을 건넬 때 품에서 꺼내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정신 팔린 여인의 품에서 알약 하나를 훔쳐 오는 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에드먼은 미간을 좁힌 채 마린다의 독한 향수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은 옷을 손으로 툭툭, 털어 냈다.

“황비와 블레드 후작이 황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예.”

요한은 알약을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다 끝났습니다.”

“…그래.”

탁.

에드먼은 마차 바퀴가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왔다. 저 멀리서부터 피어오르던 연기가 주변에 자욱하게 깔렸다.

“벤자민.”

“오셨습니까, 각하.”

불에 활활 타오르다가 이제는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저택을 멍하니 보던 벤자민이 허리를 숙였다. 벤자민의 소매는 조금 그을려 있었다.

“피해는?”

“없습니다. 불은 제 방부터 시작했고 30분 동안 탔으며 10분 전에 불길이 꺼졌습니다.”

벤자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보고를 끝마쳤다.

“…그래. 그대는 가서 좀 쉬어.”

마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다 보면 윈터가의 다른 별장이 있다. 벤자민은 조금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조금만 더 있다가… 뒤따라가겠습니다.”

벤자민이 거절하자 에드먼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내버려 둔 채 마차에 올랐다.

머지않아 새로운 별장에 도착하였다.

불에 타기 시작한 시간부터 사람을 불러 별장 청소를 시작했으나 워낙 대저택인지라 청소가 끝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요한의 말을 무시하고 에드먼은 아직 흰 천으로 덮인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았다.

요한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각하, 청소가 끝났습니다.”

“불에 대한 소문은?”

“이미 다 퍼트려 놨습니다.”

요한은 잔해를 다 제거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크리스에게 수도를 벗어났다는 전령을 받았습니다.”

“…다프네는?”

“아직 잠들어 계신답니다.”

에드먼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앞으로 여섯 시간 후, 다프네는 남부에 도착한다. 그리고 도착 후, 한 시간 뒤 깨어난다.

모든 걸 잊은 채로, 새롭게.

“…침실은 어디냐. 눈을 좀 붙어야겠다.”

그 시간이 부디 빨리 지나 고통스러움이 사그라지길 바라며,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에드먼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검을 빼 들며 상체를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 숨어든 이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누구냐.”

놀란 듯 상대의 몸이 흠칫, 굳었다.

“워, 워. 나일세, 공작.”

“…송구합니다.”

에드먼은 곧바로 칼을 거두었다.

“아니야, 멋대로 들어온 내 잘못이지. 불 켜도 되지?”

칼리토는 에드먼의 허락을 구하고자 물은 게 아니기에 바로 불을 켰다. 에드먼은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자 눈가를 찡그린 채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칼리토는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숨구멍을 꽉 막았던 연기가 방 안을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며 물었다.

“공작, 약을 했나?”

“수면제와 진정제입니다.”

에드먼은 침대 한편을 나뒹굴고 있는 셔츠를 주워 단추를 채우며 대답했다.

“불면증이… 심하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칼리토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궐련을 발견했다. 얼마나 피워 댄 것인지 재는 한가득 쌓여 있었고 끄트머리만 남은 궐련은 십수 개였다.

“전하도 마찬가지이신가 봅니다.”

에드먼은 잠기운이 남아 나른한 눈을 깜빡이며 남은 궐련을 입에 물었다.

일반인이라면 들어오자마자 진작에 혼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토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멀쩡히 서 있었다.

그 말의 뜻을 알아챈 칼리토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나를 좀 아끼셔서.”

지금은 사망한 전대 황후가 제 첫째 아들인 칼리토를 증오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 피붙이에게 자객까지 보낼 정도로 미워하다니.

“피우시겠습니까.”

“좋지.”

칼리토는 에드먼이 내민 궐련을 선뜻 가져가 입에 물었다. 궐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소식을 들었네.”

에드먼은 볼우물이 생길 만큼 궐련을 빨아들였다.

매캐한 맛이 혀끝을 지나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공작 부인이 사고를 당했다지.”

후우, 뿌연 연기가 칼리토의 얼굴을 뒤덮었다.

흐릿해지는 연기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는 에드먼을 보던 칼리토가 비릿한 미소를 터트렸다.

“뭐, 그래.”

칼리토는 궐련을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 위에 비볐다.

“황제가 뇌사 상태다. 독에 당했어. 그대와의 식사 시간에.”

궐련을 쥔 에드먼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것을 발견한 건 황비고.”

“…….”

“너무 뻔해 빠진 계획이지.”

“…….”

“그리고 그만큼 효과가 큰 것이기도 하고.”

에드먼은 궐련을 재떨이 위에 비빈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게, 공작.”

칼리토는 참다못해 에드먼을 재촉했다.

그러나 에드먼은 문을 열고 누군가에게 무어라 말한 후 창문을 모두 열어 방 안 가득한 궐련 연기를 내보냈다.

“공작, 다른 때도 아니고 계획이 고작 일주일도 남지 않은 지금 이 사건이 벌어졌어.”

“전하께서 저를 버리시고 일을 진행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칼리토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리던 그때 요한이 들어왔다.

“알아냈습니다.”

요한은 서류를 에드먼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하.”

에드먼은 요한에게 건네받은 알약을 칼리토에게 보였다.

“그건….”

눈을 휘둥그레 뜬 칼리토는 알약의 정체를 아는 듯 보였다.

“황비가 황제에게 먹이는 약이 아닌가.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인데 공작이 어찌….”

“읊어라.”

에드먼이 고개를 까딱이자 요한이 입을 열었다.

“흔히 알려진 진정제입니다. 하지만 다른 약물이 추가되었는데… 마약이 들어가 있습니다. 마약으로 쓰이는 풀은 진정제와 만나면 큰 효과로 쓰입니다. 처음에는 성적으로 흥분하고 폭력적으로 변하지만 꾸준히 복용하면 점차 뇌가 녹아 버립니다.”

노예들에게 흔히 쓰이는 약이다.

약을 1년 이상 꾸준히 복용하면 자의를 잃고 점차 남에게 의존하고 복종하게 된다.

황제는 그 대상이 황비다.

“일정량 이상을 복용하면 뇌사 상태로 만듭니다.”

“…쉬쉬하고 있지만, 현재 황제는 뇌사 상태가 맞아.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기에 저들끼리 난리가 났지.”

범인이 완전히 잡혔다.

“황비군.”

칼리토는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황제가 약을 먹게 된 계기는 마린다였다.

“하지만 황제가 그 약을 먹은 지 1년이 안 되었을 텐데.”

원래도 황제는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성격이었으나 그게 갑자기 심해진 건 두어 달 전. 사냥 대회 즈음이었다.

“황비가 시발점이다. 사냥 대회가 시작하기 전쯤부터 첩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다른….”

말을 이어가던 에드먼은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추었다.

“…주술입니다.”

“황비와 블레드 후작이 같은 편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애당초 황비가 블레드 후작의 사람이라면, 모든 게 들어맞았다.

“이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칼리토는 미간을 좁혔다.

“제가 명분을 드리겠습니다.”

“명분?”

“고위 귀족 중 피렌 남작 정도면 적당하겠지요.”

칼리토는 에드먼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피렌 후작은 세르기의 아랫사람으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를 맡은 꽤 중요한 인물이었다.

뒤에서 행동하는 인물인지라 직위가 낮으니 윈터 공작가의 방화범으로 몬다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리토는 피렌 남작이 거슬리던 참이었다.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피렌 남작을 처리하지 않으면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내가 빚을 진 건가.”

칼리토는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준비하고 나오게. 긴급회의를 열었으니 지금쯤 다 도착해 있을 걸세.”

말을 남긴 칼리토가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수하가 그의 뒤를 따랐다.

저택을 나온 칼리토는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향하기 전 고개를 돌려 유일하게 열린 창문을 가만히 주시했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방의 창문이었다.

“전하?”

수하는 마차에 오르다 말고 가만히 있는 칼리토의 모습에 그를 불렀다.

“공작의 저택이 어떻게 불에 탔다고?”

이곳으로 오는 길에 했던 보고를 다시 묻는 칼리토의 행동에 수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읊었다.

“단순한 사고로 되어 있지만, 외부의 소행입니다. 하필 딱 공작이 황제의 부름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불이 났으니까요. 피해자는 단 두 명이니 화재의 크기에 비해 적은 숫자입니다. 그 피해자 중 한 명이 윈터 공작 부인이고 바로 사망 신고서가 황궁으로 갔답니다.”

“이상하지 않아? 둘은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부인이 죽자마자 사망 신고서를 보낸다는 게.”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아무래도 윈터 공작 부인은 반역자 가문이고… 콩깍지가 벗겨지기 딱 좋은 시간이 흘렀군요.”

“이상한데….”

“전하야말로 이상한 소리 마시고 어서 타십시오. 늦겠습니다.”

수하는 칼리토를 마차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칼리토는 꿋꿋하게 버티며 수하에게 명했다.

“더 꼼꼼하게 알아봐. 사소한 거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가뜩이나 바로 며칠 뒤 있을 거사로 바쁜 나날인데 이런 명까지 내려지니 수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렇다고 황태자의 명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수하가 답을 하고 나서야 칼리토는 마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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